서적소개
시대의 초상 : 사르트르가 만난 전환기의 사람들
장 폴 사르트르 / 생각의나무 / 2009.6.17
– 그 자체가 ‘프랑스’로 평가되었던, 세기의 지성 사르트르의 시선으로 전하는 작가와 예술가, 그 인간과 시대에 대한 ‘뜨거운 얼음’ 같은 성찰
사르트르가 살았던 시대의 작가, 예술가에 대한 비평을 엮은 이 책은 사르트르의 비평적 관점과 예술론 그리고 대인관계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롭고도 중요한 작품이다. 이미 수십 년 전 다른 나라의 작가와 예술가에 대한 이 비평들은 시공을 넘어 지금여기에 사는 우리에게 사회를 향한 치열한 고민, 예술에 대한 열정 등 깊은 영감을 불어넣는다. 따라서 이미 고인이 된 그들은 사르트르를 통해 우리 앞에서 생생히 마주하게 된다.
‘전체성’을 사유하려던 사르트르에게 작품이란 작가 개인을 통째로 드러내는 중요한 징후이다. 작품으로부터 작가를 읽어내어 작가가 살아낸 시대 전체를 그것이 형상화된 작품을 통해 읽어낸다는 일은 결코 도식적인 연계작업이 아니다. 단, 작품이 ‘모든 것’을 드러낸다는 조건, 다시 말해 작가의 ‘전체성’이 녹아들어 ‘모든 것’(개인, 시대, 사회, 역사, 취향, 관점 등)을 드러내는 작품이라는 단서가 붙어야 한다. 때문에 그의 비평적 안목에 걸려든 작가라면 일단 작품 속에 전체성이 드러난 작가여야 하고 그때야 비로소 비평은 활기를 띠게 된다.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작가들은 그러한 혐의가 짙다.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읽혀진 사르트르의 작품해석은 작가에 초점을 맞추므로 작가의 모습이 확연히 그려져야 할 텐데,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작품과 작가와의 끊임없는 왕복운동 끝에 우리 앞에 세워지는 것은 작품도 작가도 아니다. 당연하게도 관계를 들여다보는 일은 늘 자기반성을 동반한다. 작심하고 펜을 들었든 아쉬움에 붓을 들었든, 모든 글에는 어쩔 수 없이 사르트르가 드러나 보인다. 그가 이 책에서 그려낸 인물들의 초상화가 대상에 대한 묘사를 넘어서서 사르트르를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인물들 주변을 휘몰아치던 한 시대를 돌아보게 한다는 것이 아마도 이 책의 부정할 수 없는 미덕이다.

○ 목차
I
Portrait d’un inconnu 미지인의 초상: 나탈리 사로트
L’Artiste et sa conscience 예술가와 의식: 라이보비츠
Des rate et des hommes 쥐와 인간: 앙드레 고르
Ⅱ
Gide vivant 살아 있는 지드: 앙드레 지드
Reponse a Albert Camus 카뮈에게 보내는 답장: 알베르 카뮈
Albert Camus 카뮈를 애도함: 알베르 카뮈
Paul Nizan 다시 우리 앞에 선 니장: 폴 니장
Merleau-Ponty 길목에서: 메를로퐁티
Ⅲ
Le sequestre de Venise 베네치아의 유폐자: 틴토레토
Les peintures de Giacometti 그림들: 자코메티
Le peintre sans privileges 특권 없는 화가: 라푸자드
Masson 22개의 데생: 앙드레 마송
Doigts et non-doigts 지(指)와 비지(非指): 볼스
책 뒤에 부치는 옮긴이의 말

○ 저자소개 : 장 폴 사르트르 (Jean Paul Sartre)
1905∼1980. 파리 출생으로 두 살 때 아버지를 잃고 외조부 슬하에서 자랐다. 메를로 퐁티, 무니에, 아롱 등과 함께 파리의 명문 에콜 노르말 슈페리어에 다녔으며, 특히 젊어서 극적인 생애를 마친 폴 니장과의 교우는 그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평생의 연인 시몬 드 보부아르와도 그 시절에 만났다. 전형적인 수재 코스를 밟아 졸업하고, 병역을 마친 그는 항구 도시 루아브르에서 고등학교 철학 교사로 일하다가 1933년 베를린으로 1년 간 유학, 후설과 하이데거를 연구하였다.
사르트르는 1938년에『구토』를 출간하여 세상의 주목을 끌며 신진 작가로서의 기반을 확보하였고, 수많은 독창적인 문예평론을 발표하였다.『존재와 무』『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변증법적 이성비판』등을 발표하고『레탕모데른』지를 발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2차 대전 전후 시대의 사조를 대표하는 위대한 사상가로 평가받았다.
그는 많은 희곡을 발표하여 호평받기도 했는데, 『파리떼』『출구 없음』『더럽혀진 손』『악마와 신』『알토나의 유페자들』 등은 그 사상의 근원적인 문제성을 내포하는 동시에 그때마다 작가의 사상을 현상화한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1964년, 『말』로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수상을 거부한 일화로 유명하다. 1980년 4월 15일 작고할때까지 끊임없이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 역자 : 윤정임
연세대학교 불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고, 프랑스 파리 10대학에서 사르트르의 『성자 주네』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중앙대학교 불문과에서 강의하고 있다. 역서로 사르트르의 『방법의 탐구』, 들뢰즈와 가타리의 『철학이란 무엇인가』, 엠마뉘엘 카레르의 『적』, 장 주네의 『자코메티의 아틀리에』 등이 있다.

○ 관련자료
– ‘상황 Ⅳ’에 실린 글의 해제
우리가 같은 진영에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시간이란 질기며 뒤죽박죽입니다. 어쨌거나 내가 생각하던 바를 당신에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좋은 일이었습니다. 당신이 내 글에 답하고 싶다면 우리 잡지는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하지만 난 더 이상 응수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당신이 나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지금은 어떤 사람인지를 다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대답으로 당신이 어떤 말을 하건, 어떤 일을 하건 간에 당신과 싸우는 일은 거절하겠습니다. 우리의 침묵으로 이 논쟁이 잊혀지기를 바랍니다. 「카뮈에게 보내는 답장」 중에서
1964년에 출간된 『상황 Ⅳ』는 ‘인물론 Portraits’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사르트르와 중요한 교감을 나누었던 작가와 예술가들의 책이나 전시회의 서문, 망자에게 헌정된 추도사, 논쟁이나 제안에 대한 답변서, 에세이와 비평 등의 다양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분량 또한 자유로워서, 몇 쪽 안 되는 짧은 글이 있는가 하면, 거의 한 권 분량의 긴 글도 있다. 틴토레토를 제외하면 대상이 된 인물 모두가 사르트르의 동시대인이었으며 그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었던 예술가와 작가들이다.

『상황 Ⅳ』에 포함된 글 중에서 두 편의 글은 번역에서 제외되었다. 「한련 화단Un parterre de capucines」과 「내 창가에서 보는 베네치아 Venise, de ma fenetre」가 그것인데, 이 두 편의 글은 로마와 베네치아에 대한 에세이이다. 우선은 ‘인물론’이라는 이 책의 전체적 성격과 조금 다르기 때문에 그리고 이 단상들은 원래의 기획이던 『알브마를 왕비 혹은 마지막 여행자 La reine Albemarle ou le dernier touriste』에 실려 1991년에 다시 출간되었기 때문에 본 번역서에서 제외되었다.
『상황 Ⅳ』에 실린 글들에 대해 살펴보자.
– 미지인의 초상: 나탈리 사로트
나탈리 사로트의 소설 『미지인의 초상』에 대한 서문이다. 사르트르의 서문은 『미지인의 초상』을 “탐정소설처럼 읽히는 반소설”이라고 지칭하며 누보로망의 다른 이름인 ‘반소설 anti-roman’이라는 표현을 널리 퍼뜨리게 된다. ‘반소설 anti-roman’이란 말은 이미 J.-P. Faye의 Recit hunique에서 사용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르트르가 전후의 소설적 경향을 지칭하기 위해 새롭게 되살려낸 것이다. 사로트의 소설이 “소설 장르 자체를 반박하는 소설”이라는 지적은 ‘소설 자체를 반성하는 소설’인 누보로망의 기치에 곧바로 연결된다.
사르트르는 『미지인의 초상』이 그려내는 “우리 내면세계의 원형질적인 비전”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이 소설의 가치가 저자가 바라듯이 그 심리적 추구에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심을 표명한다. 프루스트, 조이스,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을 강하게 드러내는 사로트의 소설이 “심리적인 것을 넘어서 실존 자체 속에서 인간 현실에 도달할 수 있는 기교를 완성”하기를 바란 사르트르에게 이러한 의혹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보부아르 역시 사로트의 “진실되지 않은 편집증적 주관주의”를 비판하기도 했다.
– 예술가와 의식: 라이보비츠
동명의 제목을 가진 르네 라이보비츠의 책에 대한 서문으로 1950년에 쓰인 글이다. 사르트르의 참여문학론에 영향을 받은 라이보비츠는 ‘예술의식의 변증법에 관한 소묘’라는 부제가 붙은 『예술가와 그의 의식』에서 참여론을 음악예술에 접목할 수 있는가를 타진하고 있다. 사르트르는 라이보비츠의 견해를 하나하나 검토해가며 조심스러운 논지를 전개하는데, 이 서문을 통해 ‘의미하지 않는 예술’인 음악의 참여 가능성에 대한 보충설명을 하는 셈이다.
사르트르는 라이보비츠의 논지를 토론하며 점점 더 난해해져가는 현대음악의 대중성 문제를 제기한다. 그 역시 예술을 정치적 선전도구로 예속시키는 일은 단죄하지만, 음악이 12음 기법 같은 난해한 법칙으로 제시되는 것에 대해 아무런 이의제기를 할 수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기법의 추상화는 의미작용이 비어 있는 공허한 형식주의로 기울어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현대음악은 엘리트 청중을 강요하고, 노동대중은 음악을 요구하는데, 이 둘을 어떻게 화해시킬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다.
– 쥐와 인간: 앙드레 고르
1957년 여름, 로마에 머물던 시기에 쓰여진 이 글은 1958년에 출간된 앙드레 고르의 『배반자』의 서문으로 실리게 되는데, “사르트르의 글 중에서 가장 잘 쓰인 글 중의 하나”라는 찬사를 받는다. 서문의 제목 「쥐와 인간」은 프랑크 로빈슨의 단편소설 「미로」에서 암시를 받은 것이다. 「미로」는 금성에 착륙하게 된 우주항공사들이 자신들이 정복했다고 믿었던 금성인들에 의해 오히려 실험용 모르모트로 이용된다는 내용의 공상과학 소설이다. 사르트르는 이 소설에 기대어 고르의 『배반자』에 나타나는 심오한 의미를 부각시키고 프로이트, 마르크스 그리고 사르트르 자신에 의해 발전되어온 ‘이타성’ 문제를 파헤치는 기회로 삼고 있다.
사르트르는 고르의 작품에서, 어린 시절부터 가정과 사회가 부과한 역할에 골몰하는 배반자라는 인물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다. 이 ‘도둑맞은 아이’, ‘서른두 살 이래 실존으로부터 벗어나버린’ 인물에서 ‘인간의 목소리라는 노예의식의 보편적 중얼거림’을, ‘우리 모두처럼 균열이 간 전형적 인물이면서 더 이상 자신의 다중성을 견딜 수 없었던 배반자’를 발견한다. 그리하여 그는 침묵을 끊고 자기를 뚫고 들어와 자기 대신 ‘나’라고 말하는 그 틈입자의 행위를 더는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사르트르는 고르가 그려낸 ‘배반자’의 모습을 통해 이른바 ‘지식인’으로 일컬어지는, 사회의 불편한 존재들에 대해 열정적 견해를 전개한다.

– 살아있는 지드: 앙드레 지드
1951년 지드의 사망을 접하고 써낸 추도사이다. 지드는 1938년에 NRF를 통해 사르트르의 단편 『벽』에 대한 관심을 표한 바 있고, 두 사람은 1939년 처음 만났다. 그로부터 2년 후, 독일 포로수용소를 빠져나온 사르트르는 레지스탕스 작가운동을 도모하기 위해 지드를 찾아간다. 전후 그들은 서너 차례 다시 만났으며 사르트르는 지드와의 만남이 아주 유쾌했다고 회상한다. 실제로 사르트르는 지드에 대해 우정을 간직했으며, 특히 그의 쾌활한 냉소주의를 높이 샀다.
추도사에서 사르트르는 지드를 용기와 신중함이 잘 혼합된 인물이며 지난 30년간 프랑스적 사유의 한 지표가 되는 작가로 규정한다. 또한 “지드의 예술은 위험과 규칙 사이의 중재를 설정하고자 했다”면서 그를 20세기 프랑스 문학사의 중요한 자리에 위치시키고 있다. 지드는 정확하고 절도 있는 고전적 문체로 상징주의의 구습으로부터 프랑스문학을 해방시켰다는 것이다. 사르트르에게 지드는 진정성의 본보기였고 “자신의 이념을 살아낸 작가”였다. 후회와 모순으로 점철된 지드의 생애는 무신론을 향한 개인의 행로를 보여주는 모범적 선례라는 것이다. “그가 우리를 위해 한 인생을 살았으니, 우리는 그를 읽음으로써 그 인생을 재생하기만 하면 된다.”

– ‘카뮈에게 보내는 답장’과 ‘카뮈를 애도함’
많은 부분에서 협력하고 동지적 관계를 유지했던 사르트르와 카뮈가 갈라서게 된 계기는 공산주의와 소련의 역할에 대한 견해 차이 때문이었다. 1951년에 간행된 『반항적 인간』에서 카뮈는 혁명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드러냄으로써 《현대》와의 입장 차이를 분명하게 밝힌다. 이 책에서 카뮈는 다비드 룻세가 폭로한 소련 강제수용소의 실상을 언급하면서 소련정치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공산주의혁명을 일종의 도덕적 반항으로 대체할 것을 요구하며 혁명적 운동세력과의 분명한 노선 차이를 드러낸 것이다. 기존의 혁명적 운동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카뮈의 논지에 《현대》 편집진은 대응을 고려했고, 편집회의를 거쳐 장송 F. Jeanson이 카뮈의 책에 대한 거센 비난조의 서평을 《현대》에 싣게 된다. 이에 카뮈는 정작 기사의 저자인 장송에게가 아니라, 그때까지 동지로 지내던 사르트르에게 ‘잡지사 주간님 귀하’라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인사말로 시작하는 격렬한 비난의 반문을 발표하게 된다.
「카뮈에게 보내는 답장」은 바로 이 카뮈의 반박편지에 대한 답변으로 쓰여진 글이다. 1952년에 일어난 이 사건, 두 지식인의 불화는 이후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 두 사람의 이름은 당시의 실존주의의 유행과 더불어 가장 많이 거명되었고, 그들의 저서 또한 많이 읽혔기 때문이었다. 둘의 관계가 쉽게 풀리지 않은 데는 복잡한 문제들이 한데 얽혀 있기 때문인데, 여기에는 당대의 가장 유명한 작가였던 둘의 자존심 문제도 한 몫 했고 사회문화적 차이와 기질적 차이 또한 둘의 결별에 무시할 수 없는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두 사람은 이 사건을 계기로 다시는 만나지 않게 되며, 1960년 카뮈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 사르트르는 짧지만 아름다운 추도사로 두 사람 사이의 회복되지 못한 우정을 기리며 애도를 표하게 된다.
– 다시 우리 앞에 선 니장: 폴 니장
1960년, 프랑스의 어느 조그만 출판사가 요절한 젊은 작가 폴 니장의 『아덴 아라비아』 (1931)를 재출간하기로 결정하고, 사르트르에게 서문을 부탁한다. 둘도 없는 친구였던 니장을 위한 이 서문에서 사르트르는 둘 사이의 우정을 갈피마다 적어 넣으며 사라진 친구와 그의 아름다운 소설을 되살려내고 있다.
이 서문은 또한 사르트르에게 혹독한 자기비판의 기회가 되었다. 니장이 공산당에 가입하여 좌파운동에 열정적이던 시절, ‘무정부주의적’ 입장에 있던 사르트르는 친구의 적극적 활동에 회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신호들이 없지 않았건만, 왜 내가 그것들을 보려 하지 않았을까? 아마 그건 질투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내가 공감하지 못하는 감정들을 부정했었다”고 고백한다. 훗날 메를로퐁티는 『기호들』에서 사르트르의 이 텍스트를 길게 인용하면서 그의 혹독한 자기비판을 변호해주기도 한다.
사르트르는 니장의 반항에 생생한 현실감을 부여하고, 공산당의 모략에 의해 희생된 친구의 죽음을 되살려내고 있다. 그리고 썩어가는 공산당 관료와 좌파 정치인들에 대한 강경한 비난을 서슴지 않으면서 그러한 구태의 모습으로는 젊은 후예들을 결집할 수 없음을 경고한다. 사르트르는 좌파에 새로운 피를 수혈해줄 수 있는 사람은 자기와 같은 오십대의 노장들이 아니라 젊은이임을 자각한다. 니장 덕분에 모든 희망이 사라지지 않았다면서 희망의 재구축을 위해 사르트르는 이 글을 통해 니장과 젊은 세대 사이의 중개자가 되기를 제안하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열정적이고 폭발적인 서문이 실린 니장의 『아덴 아라비아』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게 되고, 프랑스 독자들에게 작가 니장을 재발견하게 해준다.
– 길목에서: 메를로퐁티
메를로퐁티 (1908~1961)는 사르트르보다 세 살 아래였다. 그들의 첫 만남은 에콜노르말에서 이루어졌다. 사르트르가 에콜노르말에서 만났던 메를로는 실제의 모습과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비교할 수 없는 유년으로부터 결코 치유되지 못한” 사람이었고, 언제나 그 유년에 다시 합류하려는 불가능한 욕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죽음에서’ 태어나 세상에 던져진 그의 일관된 기획은 잃어버린 내재성을 도처에서 찾아내는 일이었다.
1945년 메를로는 《현대》의 창단 편집위원에 합류한다. 그리고 잡지의 편집장으로서 정치부분을 담당하고 실존주의운동에 함께 참여한다. 《현대》는 메를로와 사르트르의 우정을 돈독하게 했지만 동시에 둘 사이를 갈라놓은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 메를로는 사르트르보다는 사태를 제대로 질문할 줄 알았고, 역사적 시간의 불가역성을 가늠할 줄 알았으며, ‘모호한 정치세계’의 방향을 잡을 줄도 알았다. 그는 사르트르의 안내자 역할을 하면서 잡지의 정치담당 편집자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자율성은 엄격하게 고수해나갔다고 한다. 때문에 메를로가 《현대》를 떠났을 때 사르트르는 “(퐁티가) 자신의 잡지를 나의 무능함에 떨궈 놓았다”며 그를 원망했다.
혁명의 효용성과 그 의미에 대한 회의가 드리우던 무렵,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메를로는 소련의 수용소 현실을 고발하는 글을 잡지에 기고한다. 한국전쟁에 대해 떠돌던 무성한 소문들 (미국의 사주에 의한 남한의 북침설)은 사르트르를 급작스럽게 프랑스 공산당과 가깝게 만들었고 ‘동반자적 자세’를 공표하게 했다. 잡지의 편집진은 양편으로 갈라졌고, 사르트르는 메를로가 개인적 입장을 상세히 밝힌 기사의 게재를 거절하게 된다. 1953년 여름, 메를로는 사르트르와 몇 통의 편지를 주고받은 후 잡지사 일을 사임한다.
사르트르의 글은 바로 이 두 사람의 공동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사르트르는 씁쓸하면서도 강렬한 문학적 언어로 메를로라는 한 인간의 초상화, 역사와 사유의 소용돌이에 의해 부서진 우정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완전히 깨지지 않은 이들의 우정은 다시 회복될 기회를 마련하지 못한 채 메를로의 죽음으로 끝이 나버리고, 사르트르에게 ‘후회와 아쉬움으로 곪아버린’ 상처를 남기고 만다.
– 베네치아의 유폐자: 틴토레토
회화에 대한 사르트르의 관심은 거의 언제나 현대의 화가들, 그것도 동시대의 화가들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베네치아 시대의 화가 틴토레토에 기울인 그의 관심은 아주 예외적이다. 게다가 미완성인 또 하나의 연구가 이 불운의 화가에게 할애된 사실(『상황 ?』에 실린 「성자 조르주와 용」)을 고려하면 틴토레토에 대한 그의 관심은 각별하다고 할 수 있다.
틴토레토론은 『존재와 무』에서 언급한 실존적 정신분석의 방법론과 마르크시즘의 역사적 분석방법을 결합한 전기형식을 띤다. 이 글에서 사르트르는 한 도시의 역사를 그곳에 살았던 한 화가의 열정에 연결시켜 그려냈다. 즉 베네치아라는 도시의 초상화가 틴토레토의 삶과 작품을 통해 변증법적으로 재구성된 것이다.
– 그림들: 자코메티
사르트르가 스위스 태생의 화가이자 조각가인 자코메티(1901~1966)를 알게 된 것은 1941년이다. 보부아르에 따르면, 둘 사이에는 첫 만남부터 깊은 친연성이 자리했다고 한다. 한 사람은 문학에, 또 한 사람은 예술에 모든 것을 걸었던 것이다. 사르트르는 자코메티의 예술작업에서 자신과 동일한 기획을 읽어냈다. 그의 조각과 회화에 형상화된 인간의 고독과 고뇌는 사르트르의 실존적 기획에 맞닿았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자코메티의 작업에 언제나 공감해왔고, 그의 조각작품에 대해 이미 한 편의 글을 발표한 터였다.(「절대의 탐구」 , 1938, 『상황 Ⅲ』) 회화작품을 중점적으로 분석하는 「자코메티의 그림들릡은 매그 갤러리 Galerie Maeght에서 열렸던 자코메티의 전시회를 위해 1954년에 발표한 글이다.
이 글에서 사르트르는 화가의 방식에 드러나는 집요한 강박을 추적하면서 예술적 기교에 좀 더 집중한다. 그는 자코메티의 작품 속에서 거리의 문제와 인간적인 것에 너무 근접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직시한다. 그리고 이 두려움을 이해하기 위해 자신의 체험을 반추한다. 자코메티 작품의 분석이 근본적으로는 예술가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지만, 사르트르 자신의 미학적이고 철학적인 사유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글로 평가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특권 없는 화가: 라푸자드
이 글은 〈군중들〉이라는 큰 제목 아래 〈소요〉, 〈고문에 관한 삼매화〉, 〈히로시마〉 등의 작품이 소개되었던 1961년의 라푸자드의 전시회 카탈로그의 서문으로 작성되었다.
라푸자드의 회화를 설명하는 이 글은 미학에 대한 사르트르의 개념이 비교적 소상하게 전개되고 있어서 많은 비평에 노출되었으며, 특히 『변증법적 이성비판』에서 논의된 ‘군중’의 개념을 그림을 통해 설명한다는 점에서 각별한 주목을 받기도 한다. 또한 회화에서의 주제의 문제를 꽤 길게 논구하고 있고 라푸자드뿐만 아니라, 고야, 티치아노, 피카소, 과르디, 반고흐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어서 상당히 흥미롭게 읽힌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라푸자드의 성공은 “형상의 거짓된 통일성을 거부하고 서정적 통일성을 추구”한 데서 비롯한다. 이 서정적 통일성은 세계에 대해 벌였던 실험 속에 화가 자신을 연루시켜 타자들과 소통하게 한다. 사르트르가 라푸자드를 “특권 없는 화가”로 칭송하는 이유는 화가라는 지위가 가져다준 거리를 지키지 않고 인간들의 군집 속으로 스며들어가 자신의 회화 속에서 그 인간들에게 가해진 폭력을 증거했기 때문이다.
– 22개의 데생: 앙드레 마송
이 글은 1947년에 그려진 마송의 〈욕망의 주제에 관한 22개의 데생〉을 위한 서문으로 작성되었다. 마송(Andre Masson, 1896~1987)은 초기에는 초현실주의자들과 함께 활동했으나 2차대전을 즈음하여 그로부터 결별한다. 바타이유와 절친한 관계였으며, 사드와 바타이유의 작품을 주제로 에로틱한 데생들을 그려냈다. 1941년 미국으로 도피해 활동하면서 오토마티즘의 그림을 그려 잭슨 폴락의 회화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전후에 프랑스로 돌아온 뒤부터는 오토마티즘 대신에 추상화의 경계에 있는 표현주의적이고 서정적인 그림을 그려낸다. 사르트르의 오랜 친구로서 1946년에는 사르트르의 희곡 『무덤 없는 주검』의 무대장치를 맡기도 했다.
회화에 대한 대부분의 글에서처럼 사르트르는 마송의 회화가 어떻게 불활성에서 벗어나는가를 보여준다. 이것은 화가의 의도와 관객의 시선이 함께 어울려 빚어내는 해체의 위력에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다. 마송이 그려낸 괴물들과 변형들은 형태를 운동양식으로 제시하여 인간과 자연이 혼동되어 나타난다. 이로 인해 대상들의 현시 속에 생성이 새겨지고, 광물, 식물, 동물, 인간 사이의 불분명한 이행이 가능해진다. 사르트르는 마송의 회화 안에서 하나의 힘을 발견한다. 바로 그 힘이 시각을 폭발시켜 전환transmutation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빚어낸 운동은 대단한 힘으로 드러난다.
– 지와 비지: 볼스
볼스의 수채화와 데생에 대한 이 글은 1963년 델피르 출판사에서 볼스에 대한 여러 저자의 글을 모아 발간했던 문집에 끼어 있었다. 사르트르는 볼스와의 개인적 관계를 회상하며 글을 시작한다. 독일에서 추방된 볼스를 만난 것은 1945년인데, 그의 염세주의는 거의 형이상학적이었다고 한다. 볼스의 세계로 들어서기 위해 사르트르는 먼저 그의 시로부터 영감을 얻어낸다. 하지만 곧이어 볼스가 참조했던 동양철학으로 기울어지는데, 그것은 분명하게 실존적인 문제제기로써 물질과 무에 대한 관계를 드러내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사르트르는 우선 볼스의 독창성을 유럽적인 예술의 풍경 안에서 설명하려고 한다. 볼스의 예술을 클레와 비교하는데, 두 화가가 우주적 비전을 공유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클레의 사물들은 지상적 중력을 보존하기 때문에 구조화된 전체성 안에 녹아들지 않는다. 사르트르는 사물들에 대한 볼스의 매혹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그의 작품에서 일어나는 사물의 현상학적 변질이 화가와 세계의 관계를 표명하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볼스의 눈속임이 그려낸 유사성과 그로 인해 빚어지는 형상들의 상상적 전복을 즐겁게 묘사하고 있다.

○ 출판사 서평
– ‘앙가주망’의 사상가 사르트르, 그가 다시 우리 앞에 서다
사르트르는 기존질서를 비판적으로 점검하고 자유로운 삶이 가능한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읽고 생각하고 쓰고 토론하고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주었다. 그가 볼 때 인간은 사회적 제도의 구속을 넘어서, 태어나면서부터 누구나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만들어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인간은 그냥 아무 내부적 관계없이 하나의 시간과 공간에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집합이 아니다. 사르트르는 집합적 의지를 가지고 동시에 자유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유로운 선택과 결단을 통해 역사를 만들어가는 ‘융합된 집단’의 모습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와 실존주의를 결합시키려고 하였다. 그것은 소외와 착취의 관계를 벗어난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적 관계를 지향하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존재를 향한 물음을 추구하면서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를 계승한다. ‘세계내존재’란 현존재의 본질적 존재구조로, 인간도 다른 존재와 나란히 세계 내부에서 사실상 존재하고, 인식을 하든 행동을 하든 간에 다른 존재와 교섭하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사르트르가 자신의 사상을 전개하면서 등장하는 ‘상황’도 이 ‘세계내존재’의 다른 버전이겠다. 이 ‘세계내존재’에서 인간은 자기기만에 빠져 자기 마음에 드는 허위를 진실로 받아들이고, 스스로의 자유에 대하여 회피한다. 자신의 신념과 한계 사이에서 균열이 발생하고, 자기로부터 한계를 두고 존재하게 된다. 이 거리가 무 (無)가 된다. 이 무는 존재의 구멍이고 본래의 자기에 대한 실추 (失墜)인데, 사르트르는 이 실추에 의해서 대자 (對自)가 구생된다고 말한다. 이 대자는 여러 가능성을 향하여 자기를 벗어나 탈출하려는 기투(企投)이고, 이를 통해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투의 과정은 현실의 부조리와 비참을 넘어서기 위한 ‘앙가주망’이라는 버전으로 다가오게 된다.
푸코에 따르면 사르트르의 휴머니즘은, 그리고 특히 『변증법적 이성 비판』은 “19세기의 사람이 20세기를 생각하려는 장려 (壯麗)하고도 비통한 노력이다. 이 점에서 사르트르는 마지막 헤겔주의자이며 또 마지막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말할 만하다.” 특히 ‘전체성’을 인간의 도덕적 사회참여의 문제로 연결짓고자 하는 그의 노력은 “모든 부분적 진실은 우리를 허위로 이끌 뿐이고, 오직 전체성만이 우리를 진실로 이끈다. 그러한 마르크스주의 또는 헤겔주의적 신념을 한 사람의 자유로운 부르주아 지식인의 역설적 선택으로 이해하게 한다. 어쨋거나 사르트르는 교조화되고 결정론적인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마르크스주의자로 자처하면서도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이 저지른 1956년의 헝가리, 1968년의 체코 침공에 대해서는 단호한 비판을 할 정도로 자립적 지성의 면모를 보였다.
사르트르는 20세기 유럽의 비판적 지성으로 현실에 개입했고, 늘 젊은이들과 함께했다. 한마디로 ‘거리를 사랑한’ 그는 프랑스 청년들에게 식민지 유지를 위한 비열한 전쟁에 징집을 거부하라는 내용의 ‘121인 선언’을 주도하였고, 1968년 5월혁명의 현장에 서 있었으며 이후 《리베라시옹》의 창간에도 참여하였다. 사르트르는 단순히 책상머리에서 펜을 굴리는 소설가, 희곡작가, 문학비평가, 사회이론가를 넘어서 세상으로 나온 실천적, 즉 ‘앙가주망’의 대 사상가이다.
현실사회주의 국가의 붕괴 이후 고전적 좌파 지식인의 전형이었던 사르트르의 선택과 참여에 대한 재해석이 이루어졌지만, 역사적 결정론을 거부하고 억압받는 자의 편에 서서 행위자의 실존적 선택과 자유를 옹호한 사르트르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많은 지식인들의 모범이다. 그래서 마르쿠제는 사르트르를 가리켜 ‘세계의 양심’이라고 불렀다. 사르트르는 항상 기득권의 수호보다는 보다 정의로운 방식으로 기존체제를 변화시키려는 사회참여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그것은 모든 종류의 결정론과 환원론을 거부하고 인간이 스스로의 역사를 만들어간다는 그의 실존주의적 믿음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사르트르 이후 참여하는 전통적 지식인의 역할은 단절되고 말았다.
이처럼 사르트르가 한국사회에서 영향력이 미흡한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임에 틀림없는데, 그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사르트르를 사상가라기보다는 『구토』 등의 소설로 익숙해진 하나의 문학가로서의 인식이 강해, 사르트르의 진면목이 가리워졌기 때문이다. 또한 분단상황의 ‘레드 콤플렉스’가 지배적인 한국사회의 토양이 기본적으로 좌파지식인은 그를 받아들이기에 수월치 않아 그를 전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점도 한 몫 한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으로 사르트르가 받아들여질 자리가 빈약한 것은 한국사회의 이념지형도 또는 지식인의 지형도와 관련되어 있다. 지식인의 전문주의적, 기능주의적 성향의 강화로 사르트르와 같은 전체성을 담보한 실천적 지식인은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게 되었다. ‘성찰적 보수주의’ ‘파당적 좌파지식인’ 등 사이에서 사르트르와 같은 자유주의적 좌파지식인이 받아들여질 자리는 좁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여러 이유가 있지만 한국사회처럼 극단으로 치닫고 보다 성찰이 요구되는 ‘상황’ 속에서 사르트르가 전해주는 메시지를 통해 한국사회의 새로운 좌표설정에 활용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이 책이 그러한 희망을 일구는 데 한 부분을 차지하기를 바란다.

– 초상화와 자화상 사이에서: 『상황Ⅳ』의 의미
사르트르가 이야기하는 카뮈, 메를로퐁티 등은 당대의 시대를 표상하는 인물들로, 이들에 대한 글을 통해 비평적 관점과 예술론 그리고 사르트르의 대인관계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이 책에서 사르트르가 다루는 인물들 중에서 카뮈, 니장 그리고 메를로퐁티는 우선 그 분량에서부터 각별한 무게로 다가온다. 모두 사르트르와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졌으면서 하나같이 사르트르보다 앞서 세상을 등졌던 인물들이다. 게다가 카뮈와 메를로퐁티는 관계회복이 되지 않은 채로 사르트르를 떠나버렸고, 니장의 경우는 세상에 뛰어든 ‘시차’로 인해 함께 우정을 나눌 공간을 빼앗겼든 듯하다. 우정에 있어서만큼은 사르트르에게 큰 운이 없었던 것 같다. 「책 뒤에 부치는 옮긴이의 말」 중에서
모두 열 권으로 간행된 상황 시리즈에는 백여 편의 사르트르의 글과 십여 개의 대담이 실려 있다. 2차대전 직후부터 1976년까지 지속적으로 발표된 이 시리즈에는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사르트르의 입장이 다양한 방식으로 표명되고 있다. 사르트르는 1975년 미셀 콩타와 가졌던 대담에서 자신의 책 중에서 후세대에게 다시 읽혀졌으면 하는 책들 중의 하나로 이 상황 시리즈를 꼽으며 그 성격을 설명하였다.
『상황』 시리즈는 말하자면 철학에 가장 가까우면서 철학적이 아닌 분야, 즉 비평과 정치를 다룬 것이다. 나는 그것이 살아남기를 바라며 후세대가 읽어주었으면 한다.
『상황』 시리즈 각권의 부제는 다음과 같다.
상황 I: 비평론집
상황 Ⅱ: 문학이란 무엇인가
상황 Ⅲ: 전쟁 직후
상황 Ⅳ: 인물론
상황 V : 식민주의와 신식민주의
상황 Ⅵ: 마르크시즘의 문제 I
상황 Ⅶ: 마르크시즘의 문제 Ⅱ
상황 Ⅷ: 68 주변
상황 Ⅸ: 산고
상황 X: 정치와 자서전
『상황 Ⅳ』는 사르트르의 비평적 관점과 예술론 그리고 대인관계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롭고도 중요한 작품이다. 우선 ‘인물론’이라는 부제는 이 책에 포함된 글들이 한 인간의 초상화를 그려내기 때문에 붙은 것이긴 하지만, 그의 비평적 관점이 언제나 ‘인간’ 혹은 ‘작가’에 맞춰져 있는 점을 고려할 때 무심히 지나쳐버릴 부제만은 아닌 듯하다.
‘전체성’을 사유하려던 사르트르에게 작품이란 작가 개인을 통째로 드러내는 중요한 징후이다. 작품으로부터 작가를 읽어내어 작가가 살아낸 시대 전체를 그것이 형상화된 작품을 통해 읽어낸다는 일은 결코 도식적인 연계작업이 아니다. 단, 작품이 ‘모든 것’을 드러낸다는 조건, 다시 말해 작가의 ‘전체성’이 녹아들어 ‘모든 것’(개인, 시대, 사회, 역사, 취향, 관점 등)을 드러내는 작품이라는 단서가 붙어야 한다.
그의 비평적 안목에 걸려든 작가라면 일단 작품 속에 전체성이 드러난 작가여야 하고 그때야 비로소 비평은 활기를 띠게 된다.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작가들은 그러한 혐의가 짙다.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읽혀진 사르트르의 작품해석은 작가에 초점을 맞추므로 작가의 모습이 확연히 그려져야 할 텐데,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작품과 작가와의 끊임없는 왕복운동 끝에 우리 앞에 세워지는 것은 작품도 작가도 아니다.
사르트르는 여러 예술 중에서도 특히 회화에 관심을 가졌는데, 그 이유는 회화가 이미지와 재현의 문제를 파고들기 때문이었다. 그가 선택한 화가들은 현실의 의미에 사로잡힌 화가들이다. 이들은 모두 자기 시대에 연루되어 작업을 한다. 틴토레토는 베네치아의 질서와 몰락을 교묘하게 형상화했고, 라푸자드는 알제리의 항거를 추상화했으며, 볼스는 개인의 불행을 존재의 이타성을 통해 구현하고, 마송은 자연과 문화의 경계를 지워버려 현대의 신화를 부정한다. 무수한 윤곽선들로 무neant를 갈고 닦아 미로 같은 시각을 창조하는 자코메티의 시도는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사이를 질문하게 한다.
관계를 들여다보는 일은 늘 자기반성을 동반한다. 작심하고 펜을 들었든 아쉬움에 붓을 들었든, 모든 글에는 어쩔 수 없이 사르트르가 드러나 보인다. 그가 이 책에서 그려낸 인물들의 초상화가 대상에 대한 묘사를 넘어서서 사르트르를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인물들 주변을 휘몰아치던 한 시대를 돌아보게 한다는 것이 아마도 이 책의 부정할 수 없는 미덕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