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시민권과 자본주의
브라이언 S.터너 저 / 일신사 / 1997.7.31
시민사회의 자율적 발전론의 입장을 취한는 이 책은 시민사회가 자본주의 경제관계에 따라 구조화된다는 맑스주의의 환원론적 시민사회를 비판하면서, 시민권의 평등주의적 권리확대는 점차 계급과 시민권 사이에 대립구도의 형태로 발전되어 간다는 마샬리안의전통을 따르고 있다.
○ 목차
- 서론 : 무엇이 쟁점인가?
- 시민권의 기원
- 정치와 개량주의
- 사회적 투쟁
- 사회운동
- 개인주의와 시민권
- 결론
○ 저자소개 : 브라이언 S. 터너
영국의리즈 대학 졸업. 애버딘 대학 및 프린더스 대학 교수 역임. 현대 호주의 디킨 대학 교수로 재직중이다.
사회학 이론, 종교사회학 및 시민권이론, 사회발전론에 걸친 폭넒은 관심사를 가지고 있다.
저서로는 『베버에 관하여, 숙명의 사회학에 대한 에세이』, 『종교와 사회이론』, 『신체와 사회』 등이 있다.
– 역자: 서용석 외
○ 책 속으로
계급투쟁과 같이 전쟁은 애국적 통일감정을 증진시키는 동시에 항의와 저항을 활성화한다.
적어도 파시즘에 대항하는 민중전쟁의 상황에서는 그러했다.
노동계급의 연대와 애국심의 결합은 시민권의 실현을 가능하게 하는 유력한 조건이다.
게다가 전시의 점령기간은 의식을 급진화시키고 여성들의 투쟁참여를 고무하며, 부와 특권의 불평등한 분배에 의문을 갖게 할 수도 있다.
전쟁은 경제성장이 가져오는 계급분할 경험과는 반대로 참여적 시민권 문제를 둘러싼 애국적 연대감을 증진시키는 경향이 있다. — p.103
○ 독자의 평
시민의 존재는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 모순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자율적 존재로서의 국가 이데올로기에 대한 부정과 동시에 기존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옹호 속에서 시민사회는 그 사회의 존재가 가능케 하는 역할을 해 왔다. 그런 의미에서 시민을 바라보는 관점은, 우리 사회에 대해 판단하고 평가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논의를 제공해 줄 것으로 기대된다. 지금껏 시민권과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데에는 일관된 하나의 관점이 통용되고 있었던 것 같다. 혹자는 이를 맑시즘을 위시한 계급/혁명론적 시각과 아담 스미스나 그 외의 학자들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지배 이데올로기적 시각으로 나누기도 한다. 하지만 유동적인 사회 움직임에 있어서 단 한가지의 이론만으로 사회의 모든 요소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사실인 듯 하다. 그러한 시각에서 저자는 다양한 관점을 통해 사회를 바라보고 있는 듯 하며, 그 중에서도 시민권의 확립과 변화, 그 역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듯 하다. 시민권의 발생에서부터 그 고찰은 시작하며, 궁극적으로 시민권이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수행하고 있는 역할 혹은 그러한 시민권이 가능케 하는 사회적 조건에 대해 서술하는데 많은 공을 쏟아 붓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베른슈타인으로 대표되는 맑시즘적 개량주의와 유럽사회에 존재했던 사회민주주의의 관계를 통해 오늘날의 자본주의가 붕괴되지 않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으로서 개량주의의 공헌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동시에 플란차스 등 소위 맑시즘의 현실적용에 힘썼던 이들의 사상 역시도 그러한 의미에서 맑시즘의 본성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함을 논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는 맑스에 대한 또 다른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시민권을 부여함으로써 그 사회 구성운들로 하여금 그 체제에 저항할 수 있는 이론적 힘을 제공해 주었다는 점에서 맑스가 자본주의 사회를 ‘진보적’으로 파악했다는 주장이다. 또한 그는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의 도래로 인해 소멸되게 된다는 맑스의 주장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음으로 인하여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간접적인 옹호를 하고 있는 듯 하다. 이 점은 관료제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도 명확화되고 있다. 그는 실질적 정의를 이루기 위한 관료제화는 결과적으로 사람들의 일반적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기 때문에 용인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와 동시에 그 안에서 사람들이 관료제에 민감하게 대처, 반응할 수 있는 기제를 갖추길 요구한다. 물론 그는 개량주의나 수정주의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며 상당히 많은 부분을 사회 투쟁과 사회운동 영역에 할애하고 있다. 그러나, 그 운동의 수위나 범주가 자본주의 체제를 전제한 상태에서 전개되고 있는 듯한 우려를 지울 수가 없다. 그것은 사회 체제의 안전성을 도모함과 동시에 그 내재적 변혁에 대한 갈망으로 보여지며, 조금은 미온적이지 않나 라는 생각도 든다. 그것은, 사회 체제의 계속적인 안정성 추구와 사회복지 혜택의 수여를 통해 더 이상 투쟁하지 않음과 동시에 사회에 대한 어떠한 문제점을 제기하지 못하는 오늘날 시민사회의 현실에서는 더더욱 두드러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시민사회 안에서의 안정적 투쟁은 결과적으로 수정주의나 개량주의와 별 다를 바가 없지 않나 싶다. 다만, 그 주체가 사회를 이끌어나가는 엘리트계층이 아닌 시민이라는 것 외에는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관점이 사회주의 혁명의 실패와 함께 더 이상 어떠한 유토피아적 발상도 허용되고 있지 않은 오늘날 사회의 다변화된 모습을 설명하는데 적절할 수도 있으며, 그 안에서 더 이상 계급 투쟁이 아닌 사회개혁과 민주화를 위한 수많은 NGO들의 시민운동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