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신약신학
레온 모리스 / 기독교문서선교회 / 1998.3.01
신약 신학에 대한 입문을 제공하려는 목적으로 쓰여진 본서는 신학생과 관심 있는 평신도들에게 신약성경 정경서들의 중요한 신학적 가르침을 설명하려고 시도하였다.
따라서 독자들은 본서를 읽고, 성경을 연구하고자 하는 도전을 받게 될 것이다.
또한 본서는 평신도들이 기독교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교양서이다.
○ 목차
서론
바울의 글들
공관복음과 사도행전
요한의 저작들
일반서신들
○ 저자소개 : 레온 모리스 (Leon Morris)
2006년 소천한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호주의 뉴 사우뜨 웨일즈(New South Wales) 주(州)의 리스고우(Lothgow)에서 1914년에 출생하였고, 시드니 대학교에서 이학사(B. Sc.) 학위를 한 후(1934), 영국에 유학하여 런던 대학교에서 신학사(B. D.) 학위(1943)와 신학 석사(M. Th. 1946)를 하고 성공회의 사제(Priest)로 임직했다.
박사 학위 논문은 후에 그의 첫 저서가 된 ‘십자가에 대한 사도적 선포'(The Apostolic Preaching of the Cross)를 주제로 하여 캠브리지 대학교에서 썼다(Ph. D., 1952). 그 후에 모리스는 복음주의자들이 만든 복음주의자들의 성경 연구 공동체요 연구 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틴델 하우스(Tyndale House)의 책임자(Warden)를 역임했다(1960-64).
그 후 호주로 돌아가 호주 성공회의 중요한 신학 교육 기관 중 하나인 멜버른(Melbourne)에 위치한 리들리 컬러쥐(Ridley College)에서 신약학을 가르치며 오랫동안 학장(Principal)을 역임하면서 29년을 가르치고서 1979년에 은퇴하였다. 지금은 이곳에 그의 이름을 딴 도서관이 남아 있다.
레온 모리스는 정통 기독교의 가르침에 매우 충실하면서도 또한 현대의 다양한 논의들을 상당히 많이 수용하여 논의하는 대표적인 복음주의 신약학자와 신학자였다.
저서로 ‘속죄의 의미와 중요성’, ‘신약 신학’, ‘나는 계시를 믿는다’, ‘신약개론’, ‘뉴 인터내셔널 성경 주석 7. 요한복음(상)’, ‘뉴 인터내셔널 성경 주석 8. 요한복음(하)’, ‘뉴 인터내셔널 성경 주석 15. 빌립보•빌레몬•데살로니가전, 후서’ 등이 있다.
– 역자 : 박용성
성결교 신학대학(B.A.) 졸업후 연세대 교육대학원을 수학하고 미국 훼이스 신학교에서 신학석사(M. Div., Th.M)를 취득하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수학했으며, 달라스 신학교에서 신학석사(S.T.M)를 취득하고 근본주의 침례교 신학교에서 신약전공 신학박사(Th. D.)를 받았으며, 밥죤스 대학에서 철학박사(Ph.D.) 과정을 마쳤다. 성결교 신학대학 및 대학원 교수로 재직했다.
○ 독자의 평
신약신학은 건실한 복음주의 신약신학자 레온 모리스의 신약신학의 개관서이다. 본서의 특별한 점은 정경의 순서대로 다룬 것이 저자별로 묶어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별히 사도바울의 서신들을 통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신약 성경에서의 사역을 설명한다. 어떤 책에서든지 순서가 중요하듯이 레온 모리스가 바울 서신부터 그리고 바울서신에서의 삼위 일체 하나님의 사역을 먼저 설명한 것은 레온 모리스가 무엇을 중시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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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신학 과목을 시작함에 있어 신약신학이 어떤 학문이며 무엇을 다루는가?라는 물음이 제기된다.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하여 신학이란 무엇을 어떻게 다루는 학문인가를 규명하는 먼저 신학에 대한 정의를 바로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겠다. 왜냐하면 우선적으로 신약신학은 신학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신학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내리느냐에 따라서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아주 다른 신약신학이 존재하기(주장되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정의 아래 행해지는 신학이라 할지라도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학문이다’는 점은 공통적으로 인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점에서 근본적으로 상반된 정의가 내려짐을 본다. 그것은 신학의 주체가 누구이냐는 점이다. 인간이 신학의 주체가 된다고 전제할 때는 (a) 신학이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여 왔으며 또한 생각하는가를 연구 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신학의 주체가 된다고 전제할 때는 (b) 신학이란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하여 인간에게 계시하여 주신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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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의 리들리 대학(Riddley College)에서 학장으로 섬겼던 레온 모리스. 2006년 소천 이후에야 그를 알게 되었습니다. 일찍이 그의 틴델주석(요한계시록)을 통해 도움을 받았었는데, 신약신학을 통해 신약전체를 복음주의적인 안목으로 공부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할 뿐입니다. 이승구 교수님이 번역하신 ‘신약의 십자가’와 함께 본서는 성경신학적으로 신약을 연구할 수 있는 안목을 제공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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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신학은 개혁주의 신약을 총체적으로 개괄한 책이다.
신약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세월의 장벽을 넘고 또 그 당시의 문화와 현대 문화의 격차를 극복해야 한다.
저자는 이러한 어려움을 이해하고 신약성경의 기자들이 의도한 바를 현대에 맞게 적용하는 법을 찾아내려고 노력하였다. 따라서 이 책은 성경이 오늘날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또 신약신학에 대한 입문을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신학생과 관심있는 성도들은 신약의 정경서가 지닌 중요한 신학적 가르침들을 이 책을 통해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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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신학은
첫째로 주후 1세기 기독교의 시작과 관련된 역사적 문서들을 다루는 학문이다고 정의한다.
둘째로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의 삶과 신앙의 주요한 근거가 되는 문서들을 다루는 학문 이다. 그러므로 주후 1세기 신약의 저자들이 무엇을 어떻게 믿었느냐에 대한 기록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러므로 신약신학은 신약 저자들의 신앙을 역사적인 안목을 가지고 기술하는 것이다.
세째로 성경신학의 주요 관심사는 신약저자들이 무엇을 어떻게 믿었는가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신약의 저자들이 살고 있던 시대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모리슨의 신약신학을 통하여 우리는 신약성경을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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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신학적이라는 말이 여전히 생소합니다. 항상 성경을 조직신학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이 습관이 되어있는 우리들에게, 레온모리스는 어느 시대 어느 누구를 통해서도 동일한 말씀을 주고 계시는 하나님을 다시금 바라보게 합니다. 그럼에도 아쉬운 것은 번역이 조금 어렵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어려운 내용이 아닌데도 간혹 난해함을 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찬찬히 곱씹어 읽어볼 생각입니다.
○ 레온 모리스의 ‘신약신학’ 제13~19장 요약
제13장 요한복음서 : 하나님 아버지
1. 아버지와 아들
요한은 아버지와 아들은 여러 방법으로 연결되어 있다. 아버지가 무엇을 하는지 아버지는 그 자체로 누구인지 또는 그 관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이 그리스도와 맺는 관련 속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의 의미를 아들을 우리에게 주시고 또 그가 아들을 통해 무엇을 이룩하셨는지를 이해함으로써 알 수 있는 것이다. 사도요한은 서언에서부터 연결시켜 사용한다. 로고스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또한 그가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예수는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다. 그가 아버지를 본 유일한 자이기 때문이다(6:46). 아버지와 아들이 어떤 의미에서 하나라는 것은 (10:30) 사도 요한의 계속되는 가르침 중에 하나이다. 이것의 이해에서 “아버지는 나보다 위대하다(14:28)”라고 말할 수 있는 의미 포함도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하며 이것은 “성육신”이란 용어로도 이해된다. 아들을 아는 것은 아버지를 아는 것이며 아버지도 아들도 서로 분리되어서는 알 수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교사”인 예수와 함께 있다(3:2). 아들을 보는 것이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14:9).
아버지와 아들의 결속은 사랑에 의해서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고, 아들은 아버지를 사랑한다. 요한복음서에서만 그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명확하게 드러나 있는 것을 본다.
2. 살아 계시는 아버지
요한은 하나님 아버지를 위대한 분으로 보았다. 그는 예수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5:17) 말하며 다시 반복하여 예수께서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았고 같은 일을 할 따름이라(5:19)고말한다. 이것은 예수가 아버지에게 매우 가깝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중요한 방법이다. 또한 그는 예수의 끊임없는 활동에 대해 언급한다. 이 활동은 성육신하신 아들과 관계된 영광과 여러 면에서 연결되어 있다. 아버지의 활동은 그가 이 열매의 생산을 돕는 방법을 통해서 보여 질 수 있다. 그리스도가 포도나무인 것처럼 아버지는 그 포도나무를 손질하는 농부이다(15:1). 예수는 이것이 영혼의 영역에서도 적용될 수 있음을 말한다.
3. 아들의 사명
요한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신다는 것을 자주 말하므로 그들이 하나라는 사실과 죄인들에 대한 신적 동정심을 나타낸다. 요한에게는 예수가 단지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는 “나를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라고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했기 때문이다. 그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이 그를 보내셨다는 사실에 연관되어 있다. 보내어졌다는 의미인 “사명”의 개념은 그 안에 “보낸 자”의 뜻한 바를 행한다는 생각을 담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에 의해 세상의 구원을 이룩하기 위해 보내진 분이다(3:17). 그러므로 세상이 믿음에 이르러야만 한다는 것은 중요한다(5:24). 곧 하나님이 보낸 자를 믿는 것이다. 그리고 믿는 자의 하나됨은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예수를 보냈다는 것을 믿게 한다. 아버지가 아들을 보낸 것은 아들을 따르는 사람들의 삶의 길을 암시한다.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셨다. 아들은 성령을 보내셨다. 성령은 제자들을 보내셨다.
4. 위대하신 하나님
요한은 하나님을 전능하신 존재, 즉 그의 생각하신 바를 이루실 수 있는 분으로 생각하였다. 요한은 공관복음서에서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돌출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최상의 분이시라는 것은 요한에게나 다른 복음서 저자들에게 마찬가지로 인식되었다. 요한은 우리의 구원의 시작이 하나님과 함께 있음을 재차 명확히 한다. 이것은 사랑이란 용어로도 설명되어질 수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3:16). 그리고 이와 같은 방법으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5. 아버지의 자녀들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언급한다. 곧 하나님은 로고스를 받아들이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인간들의 활동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활동에 의해 생겨난다(1:12~13).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진 일과 연관 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다 그리고 이것은 요한이 예배에도 주의를 기울였음을 보여준다. 장소는 중요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사람이 예배하는 방식이다. 요한은 또한 기도 중에 하나님의 오심에 대한 가르침도 기록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말하는 것에 응답하는 사람들은 예수의 사역 안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시인하는 것이다.
6. 종말론
요한복음서의 강조점은 현재이다. 로고스의 함께 하심은 우리와 함께 현존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알려졌고 예수의 죽음을 통해 구원이 현실적 실재가 되었다. 요한은 끝 날에 예수가 서게 될 자리에 대해 강조한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을 모두 아들에게 맡기셨다.”(5:21)라는 예수의 말을 기록한다. 요한은 예수의 재림과 모든 죽은 이들의 부활과 마지막 날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제14장 요한복음서 : 성령론
1.성령으로 태어남
요한은 성령에 관한 매우 중요한 가르침을 지니고 있다. 요한은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와 그의 위에 머무름”을 본 세례 요한의 증언으로 시작한다. 세례 요한은 계속해서 그가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으나 예수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심을 그러한 표적이 그에게 주어짐으로 알 수 있었다고 말한다(1:33).
삶을 새롭게 하는 데에 있어서 성령의 사역은 중요하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들이 있다. 처음 의견은 물을 정화의 의미로 보는 것과 두 번째 견해는 육체적인 출생과 관련짓는 것이다. 세 번째 중요한 견해는 그리스도인의 세례에 대한 언급으로 보는 것이다. 예수는 어떤 율법에 대해서도 그런 충실함을 가르치지 않으신다. 오히려 성령이 주시는 생명의 자류를 강조한다. 예수의 모든 말씀은 오직 성령만이 신령한 생명을 생산한다고 가정한다. 여기에 생명과 성령의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것이다.
2. 성령의 때
이 복음서에 나타난 또 다른 어려운 말씀은 요한이 초막절의 마지막 날에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에 대한 기록이다. 요한은 오순절 날의 생생한 성령을 보지 못했다는 의미로 “성령이 아직 계시지 아니 하신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아들의 사역은 성령의 사역으로 이어진다. 오순절날의 부어주심 이전에 대속적인 제사가 있어야 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우리는 왜 이것이 그래야 하는지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명백하게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 복음서 안에는 성령의 일하심에 대해 약간 언급할 뿐이지만 사도행전에서는 성령의 활동이 강력하게 분출되며 이것은 서신들에게서도 계속 이어진다.
3. 진리의 영
다락방에서 십자가 고난 바로 전날 밤에 예수께서는 성령에 관한 놀라운 가르침을 주신다. 그 가르침에는 다섯 가지 중요한 구절이 있다. 예수는 그를 진리의 영이라 부른다(14:17; 15:26). 성령은 진리를 전달하는 영으로서 복음의 진리 곧 예수 안에 있는 진리를 사람들에게 깊이 가져다 주는 영이다. 하나님의 진리가 어떠한 것인지를 우리가 이해하게 하는 것은 세상적인 지혜가 아니라 성령이다. 예수는 “그가 그 자신의 말을 하지 아니하고 그가 들은 대로 말할 것이다.”라고 확실하게 말한다. 성령으로부터 유래되는 새로운 계시는 없다. 성령은 예수께서 이미 가르치신 가르침을 계속하는 것이다.
4. 교회의 교사
성령은 그리스도를 증거 한다(15:26). 성령은 사람들에게 예수가 누구시며 무엇을 하셨는지에 대해서 증거 하여 가르치신다. 예수께서 즉시 계속적으로 “너희 역시 증거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중요하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서만 행동하였기 때문이다.
5. 하나님의 임재
성령은 영원히 사도들과 함께 계신다(14:16). 예수는 세상은 진리의 영을 영원히 소유하기는커녕 받을 수도 없다고 설명하신다(14:17). 진리의 영의 주장에 대해서 무감각한 자들에게는 이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 임재는 오직 하나님의 백성에게 속한 어떤 것으로 오직 그들에게만 있는 것이다. 예수는 확실하게 그 성령을 세상은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여 받을 수도 없고 받지도 않는다고 말한다(14:17). 세상은 눈치채지도 못하는 그것이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좋은 선물이다. 악에 대한 승리는 인간의 업적이 아니라 그의 백성을 대신하여 그들 속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열매인 것이다.
6. 세상을 책망함
세상이 하나님의 성령을 인식하지 못하고 대부분의 성령의 사역이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이루어진다 해도 하나의 중요한 사역이 불신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다(16:8). 성령이 죄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시리라는 말씀 뒤에 예수는 “죄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16:9)라는 말을 첨가한다. 성령은 세상을 의에 대하여 심판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아버지께로 가셔서 제자들은 다시는 예수님을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10). 성령께서 책망하시는 사역의 세 번째 부분은 심판에 관하여인데, 그것은 이 세상의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다. 세상의 임금은 물론 사단이다.
7. 보혜사
다락방의 강론에서 예수는 성령을 언급하시며 헬라 용어 parakletos를 사용한다. 보혜사가 언급된 모든 구절들에서 도출되는 사실은 그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안에서 사역하심을 알 수 있다. 보혜사가 하시는 일에는 법률적인 배경이 있다. 그러나 어떤 법률적 용어도 그의 사역을 완전히 다 표현하지는 못한다.
8. 교회 안의 성령
모든 세대에서 셩령에 의한 거듭남의 절대적인 필요성과 기본적인 중요성을 명확히 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하다. 성령께서 교회로 하여금 권위 있게 용서와 용서의 보류에 관하여 하나님이 하신 일을 선언할 수 있도록 하신다. 요한은 성령에 관한 주제를 다루는 적은 양의 공간을 생각할 때에 풍부하고도 많은 양을 가르친다. 성령의 자리는 요한복음서 안에서 강조되는 것이고 그리스도인이라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주제이다.
제15장 요한복음서 : 그리스도인의 삶
요한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가능해진 새로운 삶으로의 길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요한은 그리스도인의 개념으로서의 생명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그가 특별한 용어 “생명”을 사용하지 않을 때에도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하여 언급한 것을 많이 가지고 있다.
1. 영생
생명에 관해 구약에 많은 언급이 있다. 그러나 거기에서는 대부분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현재의 삶을 이야기 한다. 생명은 복(신 30:15), 장수(시 91:16), 하나님 앞에서의 기쁨(시 16:11)과 관련되어 있다. 마지막은 이 생명을 보다 더욱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 우편에의 영원한 즐거움”을 언급하기 때문이다. 요한은 영생이란 용어를 사용할 때는 더욱 많은 개념을 가진다. “영원한”으로 해석되는 용어는 문자적으로 “한 세대에 속한”이란 의미를 지닌다. 이론적으로 세대란 말은 창조 이전의 세대나 현제의 세대를 의미할 수 있다. 요한은 이 세대 끝의 주요성에 대한 시각을 잃지 않고 있다. 그는 미래적 종말론 을 가지고 있으며 무덤에 있는 자들이 인자의 음성을 듣고 어떤 자는 “생명의 부활”로 “심판의 부활”로 나올 것이다(5:28~29)는 예수의 진술을 기록하고 있다. 요한은 계속해서 이 생명을 그리스도와 연관 시키며 서두에서 생명이 “그 안에” 있었음을 말하고 “사람들의 생명이 그 빛”이었음을 계속해서 지적한다. 요한은 영생이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로 주어지며 그것이 그리스도가 행하신 일과 관련되어 있다는 진리를 끌어내는 다양한 방법을 가지고 있다. 형용사 “영원한”은 장차 올 세상과 연관되고 이는 다른 방법들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다가올 마지막 날에 일어날 자들의 일부분이 “생명의 부활”로 나올 것을 읽는다(5:29). 요한은 상대적인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생명에 관한 중요한 진리들을 이끌어 낸다. 그는 “죽음”이란 단어를 다른 복음서에 비해 여덟 번 사용하고 있다. 누구든지 예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며, 죽음을 맛보지도 않을 것이다” 거기에는 예수의 죽음을 언급하고 또한 그의 죽음의 방식이 중요하다는 것을 밝히는 표현들이 있다. 요한은 이것이 십자가 상의 죽음이 저주를 견디는 것임을 의미한 것 같다. 그리고 신자들에게 생명이 오는 것은 예수의 죽음, 죄인이 받았던 저주를 견디는 죽음을 통해서임을 말해준다.
2. 수난
요한복음서의 서문에서 십자가는 언급되지 않지만 요한복음서가 진행되면서 십자가는 그가 말하는바 예수를 거부하는 자들과 예수께서 신자들에게 가져오는 생명에 관한 말 속에 분명히 암시되고 있다. 요한은 초대교회에서 예수의 높임으로 사용했던 그 단어를 예수의 못박힘에 사용하고 있다. 이것을 영광으로 취급해야 하며 예수의 죽음이 가져다 주는 구원이 우주적인 영역을 가지고 있음을 명백히 한다. 그의 실제적인 수난에 대한 진술은 독특한데 그는 하나님이 뜻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강조점을 두며 예로 예수가 환경의 주인임을 보인다. 요한은 겟세마네의 고통에 관한 장면을 생략하고 있다. 그것은 요한이 이 시점에서 예수가 상황의 주인이 되심에 초점을 맞추기 원했고 그 번뇌를 잘 못 이해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해왔다. 요한의 가장 중요한 기여 중에 하나는 빌라도 앞에서의 재판에 관한 기록이다. 모든 복음서를 통해 예수의 재판이 두 단계임이 분명하다. 유대 권력자들 앞에서와 빌라도의 앞에서의 재판이다. 요한은 가야바 앞에서 벌어진 일은 거의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예수가 빌라도에게 나왔을 때 벌어진 것은 상당한 부분 기록한다. 중요한 것은 진리이지 힘이 아니다. 빌라도는 세 번씩이나 예수의 결백을 선언했다(18:38). 그러나 유대인은 “가이사의 충신” (19:12)인가의 문제를 제기하여 빌라도의 결정에 압력을 준다. 그것이 그들의 힘의 사용 방식이다. 힘은 부패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진리를 패배하지 않았다. 부활을 통해 요한은 참된 주권이 지상적인 권력의 추한 조달자에게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 있음을 지적한다.
3. 믿음
요한은 “믿는다”(pisteuein)는 동사를 이 스물 한 장짜리 책에서 98번 사용한다. 요한은 비록 가끔은 거의 그런 것처럼 연결시켜 놓는 것같지만 명백하게 믿음과 거하는 것의 개념을 연결시켜 놓지 않는다(12:46). 믿음은 사람에 대한 신뢰를 의미하며 일련의 주장에 대한 지적인 고착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안에 진리가 있으며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 대한 빈번한 언급은 확실하게 진리를 도출해 낸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1)라고 기록한다. 여기서 그것을 믿는 것과 믿음 사이에 차이를 둘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곳에서 어떻게 표현되었든 간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믿는 다는 것이다.
4. 사랑
요한복음 3:16의 진술이 죄인들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요한은 하나님이 사람들의 장점이나 호감을 끌만한 것 때문에 사랑을 베푸신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사랑의 놀라운 것은 그것이 장점도 없고 가치도 없는 인간들에게 쏟아진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에게 응답이 있는 사랑을 요구한다. 예수는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 얘기한다(14:15, 23, 28). 사랑의 중요성은 예수가 베드로에게 행한 세 차례의 질문에서 보여지는데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그가 예수를 아는 것을 부인했으며 그로 인해 모임 속에서 리더자로서의 그의 자리가 의심받아야만 했다. 양떼를 먹이라는 예수의 세 번에 걸친 사명 수여에 짝을 이루는 베드로의 주에 대한 세 번의 사랑의 확인이 확실히 그의 자리로 그를 다시 세울 수 있게 했다. 요한은 때로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작은 사랑을 이야기 한다. 그는 빛보다는 어두움을 사랑했고 사람들이 칭송을 사랑했던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는 세상이 그 자신의 것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그 누구도 그것을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5. 죄
죄는 매우 심각한 문제다. 예수가 삼십 팔년된 병에서 고침을 받은 그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말라”(5:14). 수차례 예수는 사람들에게 “죄 가운데서 죽음”(8:21, 24)을 말하셨다. 모든 죄가 동일한 수준은 아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그를 빌라도에게 넘겨준 자가 빌라도보다 “더 큰죄”를 지었다(19:11)고 말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빌라도의 무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요한은 대개 “죄”란 단어를 단수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개별적인 악한 행위라기보다는 사람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원리이다. 근본적인 문제가 바로 그것이며 희생적인 죽음으로 “하나님의 어린 양”이 그 죄를 제거한다.
6. 세상
요한은 “세상”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한다. 요한의 저서에서 “세상”의 개념은 예수께서 오셔서 이루신 일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대부분의 경우에 요한은 세상을 그리스도와 그의 사람들에 대한 적대하는 개념으로 사용한다.
7. 빛
요한은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1:5)고 기록한다. 세례요한은 그 빛이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지 알았다. 그는 빛에 대하여 증거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1:6~7). 요한 자신이 빛은 아니다(1:8). 그러나 그것에 대하여 증거하기 위해 왔다. 그와 같은 시대의 사람들은 그 빛에 잠시동안 즐거이 있기를 원하으로 인해 앞으로 무엇이 올지를 희미하게 알았다. 세례 요한처럼 그 빛에 응답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진리를 행하며 빛으로 온다. 그들은 빛을 가진 자처럼 걸으며 어두움은 그들을 따라 잡지 못한다. 그들은 그 빛을 믿고 그들은 빛의 아들이 될 수 있다.
8. 진리
진리란 말의 속성이며 혹은 존재의 속성이다. 구약의 개념은 좀더 풍부하며 다양한데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만 절대적인 진리를 안다. 이것이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가 사는 방식에 중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진리는 특별히 예수와 관련되어 있다. 예수는 빌라도에게 진리가 그에게 있어서 기본적인 관심인 것으로 가장 엄숙한 말로 강조했다.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요한은 서문 이후에 은혜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지만 그것은 진리란 단어와 함께 이해되어지며 이 진리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9. 심판
심판의 단어를 “정죄”, “정죄하다”로 보면 너무 소극적 해석이다. 심판은 마치 영생이 현존하는 실체인 것처럼 현존하는 실체이다. 그러나 내세에는 영생에 대한 완전한 경험이 있을 것이며 심판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요한에게 많은 것을 의미하는 현존하는 심판은 단순히 심판만이 아니며 세상 마지막의 심판날은 실체이다. 요한은 때로 심판의 성질에 대해 이야기 한다. 예수는 그의 대적들의 심판을 거부하시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외모로 심판하고(7:24) 육체를 따라 심판하기 때문이다. 그 자신의 심판은 그와 같지 않다. 확실히 그것은 그가 심판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이유 중의 하나로 보인다. 그의 심판은 하나님과 함께여서 의롭고 공정하며 참되다.
10. 성례
요한이 두 가지 성례 모두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무시하기는 쉽지 않다. 하나는 문맥으로서 두 번째는 언어로서 이다. 세 번째는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축복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거나 그를 믿는 것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축복에 대한 구절에서 언급된다는 사실이다. 네 번째는 유대인들은 사람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어떤 것을 취하는 것을 의미하기 위해 먹고 마신다는 은유를 종종 사용했다. 그는 이들 의식에 관한 직접적인 아무 언급도 하지 않는다. 그라나 그는 그것들이 지시하는 영적인 실재에 대해서 가르치며 그가 말한 것을 이해하는 것은 그것들을 더욱 의미 있게 지킬 수 있도록 해준다.
제16장 요한 서신들
1.하나님 아버지
이 편지들에서는 하나님에 대해 크게 집중하며 두 가지의 것이 특별히 강조되는데 예수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연결 그리고 하나님과 그 백성과의 연결이다. 요한일서의 수신자는 분명히 영들에 관해 당황했다. 사람들은 “영감되도록” 요구했고 그래서 그들의 가르침은 수용되었을 것이다. 요한은 이 글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명확하게 선언한다(3:17). 그리고 정말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4:8, 16). 우리가 사랑을 아는 것은 화목제로 보내신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부터이다.
2.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할당 된 곳은 비판적이다. 요한은 분명히 비평적인 것을 예수에 대한 태도에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신적 본질에 대한 고도의 “영적인” 관점과 물질에 대한 매우 낮은 관점을 소유함으로 그들에게 인간 예수는 신성한 그리스도가 될 수 없었다. 생명은 그의 위대한 개념이며 우리는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가 취급하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가 죄를 지었음을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미 행하신 진리의 계시들을 부인하는 것이다. “죄는 불법이다”(3:4). 그것은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며 개인의 의지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 서신에서 매우 힘차게 주장되는 하나님의 사랑의 배경에 맞서는 것은 두려운 것으로 여겨진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아들을 주심으로 나타나고 십자가는 사람들에 대한 그의 관심을 잘 보여준다.
3. 그리스도인의 삶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가 행하신 모든 것의 빛 가운데서 기대되는 것처럼 성실한 것이다. 전적 죄의 포기를 의미한다. 그러나 강조점은 사랑이다.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사랑에 대해 다른 신약의 책보다 강조하는 이들 서신이 또한 하나님의 명령을 언급하는 것은 놀랍다. 믿는 자들은 죽음을 지나 생명에 이르렀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에 대한” 부정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대부분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에 반대되는 세상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로서의 세상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며 세상의 자녀들도 알지를 못한다. 우리는 세상과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지만(요 3:16) 그것이 “세속적” 의미의 세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의 사람들을 의미하는데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셔서 그의 아들을 그들의 구세주가 되도록 보내셨다. 요한일서 2:15의 생각은 우리의 사랑을 이 현세에 두지 말며 세속에 몰두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제17장 요한계시록
1. 영광의 주
요한 그의 첫 환상은 모든 영광중에 계신 주님이었다(1:12~20). 그 주님을 어떠하신 분이신가 보지 못하면 그것의 어떤 참된 관점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 관점을 제시하면서 일련의 칭호들을 계시한다. 그는 “처음이요 나중”(1:17~18)이며,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1:18) 가진 사람이며 그는 “하나님의 아들”(2:18)이고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며 열 사람이 없는 그 이”(3:7)이고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3:14)이다. 어린양이 일곱 인을 떼실 수 있는 자로 보이고 또 그가 그 일을 행하시므로 찬양의 함성이 울려 퍼진다. 어린양의 위대함은 그가 하나님과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 지시된다. 요한은 서두에서 예수님이 최고임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그가 비록 로마 왕국에서는 가볍게 여겨졌지만 하늘나라에서는 최고의 영예를 얻는다. 이 글 전체를 통해 예수님은 만물의 주로 나타난다. 예수님의 위대함은 그의 구원 사역을 가능하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셨다. 요한이 어린 양이라는 비유적 표현을 사용할 때 그는 종종 그 어린 양의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다. 예수의 피 흘리심은 중요한 것이다. 진실로 그것은 죽임당하신 어린 양이란 개념 속에 함축되어있다. 이 책은 승리에 대한 강조와 그리스도와 연결된 승리로 사람들을 흥분시킨다.
2. 만유의 하나님
요한은 하나님께 깊은 경외감을 갖고 있다.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 할 때에 상세하게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 대해 말할 때에는 대단히 경외적인 언어를 사용하여“(보좌에)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과 같더라”(4:3)고 말한다. 하나님은 묘사할 수 없는 분이며 우리는 다만 무릎 꿇고 경배 할 뿐이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으로(7:2) 그는 세세 무궁토록 사신다(4:9~10) “하나님으로부터의 생기”가 죽은 자들에게 생명을 준다(11:11). 하나님에 대한 요한의 사상은 다양하다. 그러나 그 사실이 유지되고 도출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터이다.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은 기본적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세상의 통치자가 아무 쓸모 없음을 의미한다. 때때로 하나님은 그의 계획대로 일하시기에 그들은 단지 그가 원하시는 것을 할 뿐이라는 생각이 있다. 하나님의 승리는 악의 능력에 대한 실제적인 감각없이 묘사되지 않는다. 악의 세력의 지도자는 여러 겉모양으로 나타난다. 그는 “큰 용으로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이다.”(12:9) 인간적인 악의 배후에는 사단의 악한 얼굴이 있다. 선한 세력과 악한 세력 간의 싸움이 여기 지상에도 있지만 그것은 더 큰 전쟁의 일부분일 뿐인데 왜냐하면 요한이 하늘의 전쟁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12:7). 요한은 승리에 대해 완전히 확신하며 그가 악의 힘을 실제적으로 보듯이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도 본다. 결국 요한은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11:15)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3. 하나님과 그의 백성
요한계시록에서 사랑의 용어는 자주 나타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돌보신다는 사상은 계속 흐르고 있다. 요한이 어떤 길을 제시하든지 그 곳에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돌보시고 그의 백성들에게 필요한 계시를 주심으로 그들의 어려움 속에서 볼 수 있게 하신다는 사상이 있다. 2~3장의 일곱 교회에 관한 메시지를 통해 그의 백성들이 행하는 모든 일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하나님은 그들의 실패와 성공을 아시며 그들에게 축복을 주신다. 그리스도가 속죄하신 것은 하나님께 속죄된 것이다(5:9). 구원은 하나님께 돌려진다. 그리고 거룩한 성 구원받을 장소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저희들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시리라”(7:17). 계시록에 경배에 관한 많은 것들이 이야기 되어 진다. 이것은 대부분 하늘에서의 경배이다(7:11). 악신을 경배하는 것에 대한 언급도 있다. 그래서 그것이 누구인지 상기시킨다. 요한은 그가 천사에게 경배할 필요가 없다는 것과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해야 한다는 것이다(19:10). 요한은 기도의 유용성을 강조한다. 요한은 확실하게 기도는 귀하고 효과적임을 말한다. 요한은 하늘에서 하나님이 왕위에 앉으셔서 세상에서 그의 목적을 실행하시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도는 응답되며 가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으로 구속받은 사람들과 그를 신뢰하는 자들은 머지않아 하늘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다.
제18장 히브리서
1. 위대하신 하나님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알고 있는데, 그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만드신 분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위대성에 대해 의심하지 않지만, 그 강조점은 하나님의 위대성에 있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 그 은혜는 하나님의 하시는 사역 가운데에서 발견한 것에 기초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 안에서 활동하신다. (그렇다면 저자의 심중에 하나님께서 구원사역을 이루심에 활동적이라는 사실을 품고 그가 구원에 대해서 말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알아보기로 하자.)
2. 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
이 서신은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지속적인 전개로 시작한다. 저자는 예수의 인격에 대해 모든 피조물보다 월등하신 분으로서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으로 묘사한다. 또한 다른 선지자들보다 다른 수준의 존재이며, 그리고 모든 창조물 관계에서 소유주의 아들로서 상속자의 위치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가 세상의 모든 피조물 중의 그 누구보다도 그 어떤 것보다도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위대하다는 사실을 진술함으로 저자는 그리스도가 만유를 위한 구원을 가져온다는 사상을 발전시킨다. 그 사상은 위대한 대제사장, 멜기세덱과 같은 제사장, 또는 그가 의미 한 바 구원을 가져오는 새 언약이란 개념들을 사용하여 표현된다.
3. 참 인간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사람이 되실 정도로 위대하시다는 저자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를 볼 수 있다. 저자는 우리에게 예수는 “그가 육체로 계실 때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5:7)”고 말한다. 저자는 예수의 인간성에 대해 인상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예수의 인간적 출생에 관해서 히브리서는 그가 유다 지파에 속한다는 것을 알려 준다(7:14). 그리고 인간적으로서의 삶과 죽음을 표현하였으며, 단순히 인간적 이름인 “예수”를 9번사용 하며 그때마다 인간성이 강조됨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예수를 하나님과 같으며 동시에 완전한 인성을 갖고 계신 분임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멜기세덱과 같은 제사장
저자는 그리스도를 제사장, 또는 대제사장으로 보는 점이다. 이것은 독특하며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보는 매우 설명적인 방법이다. 그는 멜기세덱에 대한 대단히 독특하게 다룬다. 멜기세덱은 창세기 14:18-20에서의 한 사건에 등장한다. (그가 살렘의 왕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에게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와서 그를 축복하고 그로부터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받은 자라는 것이다. 이것이 전부이다.)
이 사람의 이름은 “의의 왕”, “평강의 왕”이라 의미한다. 또한 멜기세덱은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생명의 끝도 없다”(7:3). 그에 대한 기록이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멜기세덱에게 적용되는 진리는 가장 실제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에게 적용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멜기세덱과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셔서 영원한 제사장으로 맹세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제사직의 폐지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영원하다.
멜기세덱에게 십일조가 드려진 것과 그에 의해서 축복이 빌어진 것을 통해서 레위적 제사장보다 그리스도의 우월성이 논증된다. 그리고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한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기 때문에(7:7) 중요하다. 두 가지 사실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수행된 제사장직이 예루살렘의 제사장들에 의해서 수행된 제사장직보다 크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5. 위대한 대제사장
멜기세덱과는 별개로 제사장직이란 개념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서 많은 것을 말해준다. 먼저 제사장직의 본질은 제사에 있다. 제사장은 제사 드리는 자들의 대표자로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림으로 그의 제사장직을 수행해야 한다. 또 제사가 죄를 없이 하지 못하지만, 지상의 제사는 날마다 드렸다. 여기서 히브리서의 중요한 강조점 중 하나로써 그리스도께서 하나의 제사를 드렸는데 그 제물이 바로 그 자신으로 완전하고 영원히 효험 있는 제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날마다 제사를 드려야 하는 레위적 제사장들과 비교하여 그는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다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의 제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오직 한 길을 의미한다는 사실에서 중요하다.
6. 새 언약
신약성경전체에서 나타나는 “언약”이란 단어의 절반 이상이 이 서신에서 발견되며 대부분이 새 언약과 관련된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레미야 31:31-34를 길게 인용함으로써 새 언약에 대한 그 예언은 하나님이 그의 법을 그의 백성의 마음에 기록하리라는 것과 더 이상 그들의 죄를 기억하시지 않으리라는 내용이다. 곧 그리스도가 죄를 결정적으로 없이 하셨다는 것이다(9:26). 저자는 예수의 죽음이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할 수 있음을 말한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새 언약은 영원함을 보여준다.
7. 죄의 문제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의 구원 사역의 의미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묘사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죄를 정결케 하시는 일을 하신다(1:3)”라고 말한다. 죄는 더러운 것이지만, 예수께서 그 더러움을 완전히 제거하셨다. 때때로 죄는 히브리서가 그리스도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9:28)” 드리신 바 되셨다고 말한다. 또한 저자는 제사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그리스도께서 “죄를 위하여 영원한 제사를 드린 것”으로 말한다. 그리고 저자는 하나님이 그 언약 안에 있는 자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새 언약에 대한 예언을 두 번이나 인용한다.
8. 그림자와 실체
저자는 천상의 실체와 우리가 지상에서 볼 수 있는 그에 대한 불완전한 모형 사이를 구별하는데, 여기에서 그의 사상이 얼마만큼이나 플라톤주의의 영향(플라톤은 어떠한 것의 완전한 이데아가 하늘에 있으므로 우리가 땅에서 보는 것은 다만 하늘에 있는 원형에 대한 불완전한 모사품에 불과하다.)을 받았는가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어왔다. 저자가 일상적인 형태의 플라톤주의를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의 주된 사상은 천상의 것이 지상의 것을 훨씬 능가함을 선언하고 있어 아주 중요하다. [ex: “율법 자체는 장차 오는 좋은 그림자일 뿐 자체가 참형상이 아니다”(10:1)].
9.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우리의 반응
히브리서가 우리에게 중요한 어떤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히브리서에서의 믿음은 미래를 바라보며,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세계에로 용감하게 나아가는 신뢰이어서 하나님께서 그의 종을 내내 지키시리라는 완전한 확신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실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믿음으로 나아갔다(11:8)”는 사실이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길은 징계와 오래 참는다는 용어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순종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를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5:9).
제19장 야고보서
야고보서는 올바른 삶에 대한 강조에 주목한다. 바로 이점이 어떤 이들은 저자가 신학적인 관심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추론이다. 야고보는 한 사람의 기독교 신앙고백 안에 함축된 전체적인 삶의 중요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신학적인 확신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1. 믿음과 행위
야고보의 강한 강조는 믿음과 행위를 다루는 데에서 나타난다. 믿음만이 아닌 삶의 관계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라고 말한다. 이 서신의 이 부분이 오직 믿음으로의 칭의를 말하는 바울의 가르침에 반대한다는 제안한다. 바울은 믿음을 강조하고 야고보는 행위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양 쪽 모두 공정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어느 쪽도 다른 하나의 중심 사상을 논쟁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은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된다”(롬 3:28)것이다. 야고보 또한 믿음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태도로서의 믿음을 받아들인다. 그는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논쟁의 구절에서 행위에 의해서 증명될 “믿음”을 언급한다(2:18).
야고보는 믿음의 중요성에 부인하지 않지만, 믿음이 메마른 지성주의 이상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서 바울과 야고보가 칭의를 말할 때 그들이 하나님의 종의 삶의 다른 단계를 말하고 있음의 주의하여야 한다. 둘다 아브라함에게 호소하는데 바울은 믿음이 그의 의로 여겨졌다고 한다(롬 4:3, 9-10). 반면에 야고보는 그의 아들 이삭을 희생 제물로 바치라고 부름 받은 좀 더 늦은 때를 말한다(2:21). 누구든지 처음 하나님께 나아올 때에는 단순한 믿음으로이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지난 후에는 아무런 행위 없이 하나님의 승인을 기대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라는 것이다. (더글라스 무우는 그의 야고보서 주석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첫 단계에서의 칭의를 사용하지만 야고보는 마태나 다른 저자들처럼 최종적인 칭의, 즉 최후의 심판의 날에 보게 될 종류의 칭의를 사용한다고 주장한다.)
2. 그리스도인의 봉사
야고보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섬기는 길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한다. 그중 하나가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에 대한 태도이다. 확실히 그가 알고 있는 신자들 중 약간의 부유한 그리스도인들도 있고, 대부분의 신자들이 가난했고,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의 물품들 때문에 압박받고 있었다. 야고보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있는 독자들에게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괄시하고 압제하지 말 것을 말하고, 또한 독자들에게 세상 사람들에게서 받아들여지는 태도로 부자들을 편애하지 말 것을 조언한다. 그리고 야고보는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는 부자들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을 하는데 그는 그들이 심판받으리라고 확신한다(5:1-6).
또한 야고보는 율법에 대해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1:25)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그 율법대로 심판받을 것이다(2:12). 그는 또한 “최고의 법”(2:8)에 대해서 말하는데 이것은 계속 이어서 사랑이란 단어로 설명되어진다.
그리고 야고보는 그리스도인이 인내하는 능력을 지니기를 원한다. 인내는 “생명의 면류관”으로 인도하는 길일뿐 아니라 하나님의 좋은 선물이기도 하다(1:12).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야고보는 우리가 기도를 완전히 사용하기를 기대한다. 그는 능력 있는 기도와 사람으로 엘리야를 기억하는데 독자들에게 이러한 모범을 통하여 교훈을 얻기를 바란다(5:13-8). —- 한태희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