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신, 죽음 그리고 시간
에마뉘엘 레비나스, 엠마누엘 레비나스 / 그린비 / 2013.5.30
데카르트에서 출발해 하이데거에서 정점을 이루는 서구 철학의 자기중심적 경향을, 나에 대한 타자의 근본적 우선성을 주장함으로써 철저히 비판하려 한 레비나스. ‘타자성’과 ‘바깥’을 화두로 하는 현대 철학의 한 흐름에 초석을 놓은 사상가로 평가되는 레비나스가 대학교수로서 마지막으로 행한 두 개의 강의 (1975-1976)를, 그의 제자이자 철학자인 자크 롤랑이 책으로 엮었다.
‘신, 죽음 그리고 시간’에서 레비나스는 ‘신’, ‘죽음’, ‘시간’이라는 시대를 초월한 철학적 주제들이 사실은 자기중심적 서구 철학에 의해 오염되어 왔다는 전복적 주장을 펼치며 자신의 전망을 제시한다. 이 책을 필두로 속속 발간될 ‘레비나스 선집’은 그간 산발적으로 소개되어 온 레비나스 사상에 대한 총체적 시야를 얻는 데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 목차
편집자 머리말 _ 자크 롤랑
1부 _ 죽음과 시간
첫번째 질문 |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무엇을 아는가? | 타인의 죽음과 나의 죽음 | 반드시 거쳐야 할 길: 하이데거 | 현존재 분석 | 현존재와 죽음 | 죽음과 현존재의 전체성 | 시간의 근원으로서의 죽음을-향한-존재 | 죽음, 불안 그리고 두려움 | 죽음으로부터 사유된 시간 | 하이데거의 이편: 베르그송 | 근본적 질문: 하이데거를 거스르는 칸트 | 칸트 강의(계속) | 어떻게 무를 사유하는가? | 헤겔의 응답: 『논리학』 | 『논리학』 강의(계속) | 『논리학』에서 『정신현상학』으로 | 『정신현상학』 강의(계속) | 죽음의 스캔들: 헤겔에서 핑크로 | 죽음에 대한 다른 생각: 블로흐로부터 | 블로흐 강의(계속) | 블로흐 강의(마지막), 결론을 향하여 | 시간으로부터 죽음을 사유하기 | 마무리를 위하여: 다시 질문하기
2부 _ 신과 존재-신-론
하이데거와 함께 시작하기 | 존재와 의미 | 존재와 세계 | 윤리로부터 신을 사유하다 | 동일자와 타자 | 주체-대상 상관관계 | 주체성에 대한 질문 | 칸트와 초월론적 이상 | 말함으로서의 의미작용 | 윤리적 주체성 | 초월, 우상숭배 그리고 세속화 | 돈키호테, 마법 걸기 그리고 굶주림 | 무-아르케로서의 주체성 | 자유와 책임 | 존재론의 출구로서의 윤리적 관계 | 책임의 비-상함 | 말함의 진솔성 | 무한의 영광과 증언 | 증언과 윤리 | 의식에서 예언성으로 | 불면에 대한 찬사 | 경험 바깥: 데카르트의 무한 관념 | ‘부재에 이르기까지 초월적인’ 신
다른 인간에 대하여: 시간, 죽음 그리고 신 _ 자크 롤랑
옮긴이 후기 | 참고문헌 | 찾아보기 | 저역자 소개
○ 저자소개 : 에마뉘엘 레비나스, 엠마누엘 레비나스 (Emmanuel Levinas, 1906 ~ 1995)
에마뉘엘 레비나스 (Emmanuel Levinas)는 리투아니아에서 유태인 부모 아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3년 프랑스로 유학해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수학했고, 1928~1929년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후설과 하이데거로부터 현상학을 배운 뒤, 1930년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후설 현상학에서의 직관 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39년 프랑스 군인으로 2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어 종전과 함께 풀려났다. 1945년부터 파리의 유대인 학교(ENIO) 교장으로 오랫동안 일했다. 이 무렵의 저작으로는 『시간과 타자』(1947), 『존재에서 존재자로』(1947), 『후설과 하이데거와 함께 존재를 찾아서』(1949) 등이 있다. 1961년 첫번째 주저라 할 수 있는 『전체성과 무한』을 펴낸 이후 레비나스는 독자성을 지닌 철학자로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1974년에는 그의 두 번째 주저 격인 『존재와 달리 또는 존재성을 넘어』가 출판되었다. 그 밖의 중요한 저작들로는 『어려운 자유』(1963), 『관념에게 오는 신에 대해』(1982), 『주체 바깥』(1987), 『우리 사이』(1991) 등이 있다. 레비나스는 기존의 서양 철학을 자기중심적 지배를 확장하려 한 존재론이라고 비판하고 타자에 대한 책임을 우선시하는 윤리학을 제1철학으로 내세운다. 그는 1964년 푸아티에 대학에서 강의하기 시작하여 1967년 낭테르 대학 교수를 거쳐 1973년에서 1976년까지 소르본 대학 교수를 지냈다. 교수직을 은퇴한 후에도 강연과 집필 활동을 계속하다가 1995년 성탄절에 눈을 감는다.
– 편자 : 자크 롤랑(Jacques Rolland)
1950-2002. 철학자이자 편집자로서, 레비나스의 대표적인 제자 그룹에 속한다. 특히 그는 레비나스의 수고와 강의를 편집하여 출간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편집본으로는 『탈출에 관하여』(1982), 『신, 죽음 그리고 시간』(1993), 『제일 철학으로서의 윤리학』(1998), 『에마뉘엘 레비나스 선집』(1984) 등이 있다. 또한 레비나스에 관한 학술대회를 조직하여 발표 논문집을 『에마뉘엘 레비나스?: 제일철학으로서의 윤리』(공저, 1993)라는 제목으로 출간하였다. 주저로는 『도스토옙스키?: 타자의 질문』(1983), 『노마드적 진리?: 레비나스 입문』(공저, 1984), 『앎과 달리?: 레비나스』(공저, 1987), 『다르게의 여정?: 레비나스에 대한 독해』(2000), 『호텔 브리스톨 혹은 공산주의에 관하여』(2011)등이 있고, 오랫동안 세르프(Cerf) 출판사의 잡지 『감시받는 밤』의 편집자로서 활동하였다. 그 외에도 『차이의 모험』(1985), 『하이데거 입문』(1985)과 같은 잔니 바티모(Gianni Vattimo)의 저작들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프랑스에 소개하였다.
– 역자 : 김도형
부산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레비나스의 정의론에 관한 박사학위논문을 준비 중이다. 부산대, 인제대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레비나스의 정의론 연구?: 정의의 아포리, 코나투스를 넘어 타인의 선으로」, 「레비나스의 인권론 연구?: 타인의 권리 그리고 타인의 인간주의에 관하여」 등이 있고, 지은 책으로는 『대학생의 논리적 사고훈련을 위한 워크북』(2013, 공저)이 있다.
– 역자 : 문성원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기대, 서울대, 서울시립대, 서울산업대 등에서 강의했으며, 2000년부터 부산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철학의 시추: 루이 알튀세르의 마르크스주의 철학』(1999), 『배제의 배제와 환대: 현대와 탈현대의 사회철학』(2000), 『해체와 윤리: 변화와 책임의 사회철학』(2012)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지그문트 바우만의 『자유』(2002), 그리고 『국가와 혁명』(1995), 『철학대사전』(1997),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의 역사』(2000) 등의 공역서가 있다.
– 역자 : 손영창
부산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레비나스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부산대, 인제대 등에서 강의했으며 2012년부터 경남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타자성에 대한 해석과 언어의 역할: 레비나스와 데리다 비교연구」, 「리쾨르의 윤리학에서 살펴본 자기성과 타자의 문제」 등이 있다.
○ 책 속으로
한 강의가 죽음과 시간으로 교직된 주제를 택한 반면, 다른 강의는 신의 이름인 ‘척도를 넘어선 단어’에 대해 묻는다. 그렇지만 이 두 강의 모두 레비나스가 그의 사유 한가운데서 마주치는 문제, 즉 윤리적 관계로 이해된 인간 간의 관계라는 문제를 철학적으로 설명하는 가운데 행해진다. 우리가 언급한 세 개념[죽음, 시간, 신]이 레비나스가 쓴 책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윤리적 관계로부터며, 또 여기 이 두 강의에서 레비나스가 말로 그 세 개념을 전개해 나가는 것도 이 윤리적 관계로부터다.— p.5
그러나 죽음과 함께 열리는 것은 무 또는 미지의 것인가? 존재는 죽는 순간에 존재-무의 존재론적 딜레마로 돌아가고 마는가? 이러한 질문이 여기서 제기된다. 사실 이 같은 존재-무의 딜레마로 죽음을 환원하는 것은 일종의 뒤집힌 독단론이다. (가장 달콤한 인민의 아편이라는 영원의 불멸성을 내세운) 적극적 독단론에 대해 의심하는 한 세대 전체의 감정이 어떠하든지 간에 말이다.— p.18
시간에 대한 일상적인 이미지가 있다. 거기서 죽음은 시간의 단절 없는 흐름 속에서 한 존재의 지속이 맞게 되는 종말로 나타난다. 그럴 경우 죽음은 사물의 파괴가 된다. 하이데거에게서는 종말의 명확한 의미가 죽음과 결합되어 있다. 하이데거의 공헌은 시간 그 자체를 이러한 무화에 기반해서 다시 사유하고, 그럼으로써 시간과 죽음에 대한 통속적인 개념들을 철학적 개념들로 대체했다는 데 있다.— p.54
이제 우리는 존재론이 다 담아내지 못한 의미작용들, 오히려 (인간성을 포섭하는 시도라고 주장하는) 존재론을 의문시할 수 있는 의미작용들을 입증해 주는 철학사의 몇몇 측면들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하이데거를 통해 우리는 철학의 역사 속에서 존재의 역사를 탐구하는 데 익숙해졌다. 그의 모든 저작은 형이상학을 존재의 역사로 환원하는 데서부터 성립한다. 그러나 존재의 행적의 자리가 무엇이든 간에, 철학의 역사는 또 다른 불안정을 가리키지 않는가? 존재 너머는 존재의 행적 속에 기입되는가?— p.90
우리는 ‘죽음처럼 강한’ 사랑으로 되돌아온다. 여기서 문제는 나의 존재 속에 기입된 죽음을 물리칠 수 있는 어떤 힘이 아니다. 그렇다고 불안해하는 나의 비-존재가 문제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초점은 사랑받는 자 또는 타자의 비-존재, 나의 존재보다 더 사랑받는 타자의 비-존재다. 우리가 약간 혼탁한 말로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타자의 죽음이 나의 죽음보다 나에게 더 영향을 미친다는 바로 그 사실이다. 타자에 대한 사랑, 그것은 타자의 죽음에 대한 감정이다. 죽음에 대한 준거는 타인에 대한 나의 영접이지 나를 기다리는 죽음에 대한 불안이 아니다. 우리는 타인의 얼굴에서 죽음을 만난다.— p.157-158
선과 나의 관계, 이것은 타인으로의 나의 소환이다. 이 관계 속에서, 신의 죽음 뒤에도 살아남는 어떤 것이 발생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신의 죽음’을 일종의 ‘계기’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계기를 통해서는 한 충동을 유발하는 전적인 가치가 한 가치를 유발하는 한 충동으로 환원될 수 있다. 반면 이러한 동등성과 상호성이 거부되는 경우, 선이 이웃을 향하도록 나를 기울여 나를 변화시키는 경우, 통시성의 차이는 내가 받아들이기 이전에 나를 선출했던 선의 무관심하지-않음으로서 유지된다.— p.268
선의 선함은 그 선함이 초래하는 운동을 구부려서, 욕망할 수 있는 것으로서의 선에서 선함을 떼어 내어 타인으로 향하게 한다. 또 그럼으로써 오직 선으로 향하게 한다. 닿을 수 없는 직선성보다 더 높이 나아가는 비직선성이 여기에 있다. 이 비직선성 속에서 욕망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불러내는 욕망과의 관계로부터 분리된다. 그리고 이런 분리, 즉 성스러움을 통해, 욕망할 수 있는 것은 삼인칭으로 남는다. 즉 너의 바탕에 있는 그로 남는다. 그는 나를 선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야 할 선보다 더 나은 선함을 내게 강제한다. 선하다는 것, 그것은 존재에서는 결핍이고 쇠약이며 어리석음이다. 그것은 존재 너머의 탁월함이고 높음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윤리가 존재의 한 계기가 아니라는 것, 오히려 윤리는 존재와 달리이며 존재보다 더 나음이라는 것이다. — p.336
○ 출판사 서평
– 서구 사유의 자기중심성을 전복하는 타자성의 철학!
존재론적 전통이 곡해한 철학의 근본 주제들을 다시 사유하다!!
이 책 『신, 죽음 그리고 시간』(레비나스 선집 01)은 리투아니아 출신의 유대인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 (Emmanuel Levinas, 1906~1995)가 소르본 대학에서 1975~1976년간 행한 두 강의를 제자인 자크 롤랑 (Jacques Rolland, 1950~2002)이 엮은 것이다. 데카르트에서 출발해 하이데거에서 정점을 이루는 서구 사유의 자기중심적 경향을, 자기에 대한 타자의 근본적 우선성을 증명함으로써 철저히 비판하려 한 레비나스. 그는 이 책에서 ‘신’, ‘죽음’, ‘시간’이라는 시대를 초월한 철학적 주제들이 사실은 자기중심적 서구 철학에 의해 오염되어 왔다는 전복적 주장을 펼치며 자신의 전망을 제시한다.
레비나스 철학은 사물화·대상화될 수 없는 타인의 고유성과의 마주침을 ‘나’에게 던져지는 가장 강력한 질문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출발한다. 그리고 책의 제목으로 제시된 세 가지 철학적 개념―신, 죽음, 시간―은 이 질문 앞에서 이제까지의 철학과는 다르게, 새롭게 문제시된다. 첫 번째 강의 〈죽음과 시간〉은 죽음과 시간을, 두 번째 강의 〈신과 존재-신-론〉은 신을 각각 주제로 삼아, 기존의 철학이 이들 개념을 합당한 방식으로 다뤄 왔는지, 그렇지 않다면 이 개념들의 정당한 의미는 무엇인지를 탐구한다.
레비나스는 서구 문명의 파탄을 예감케 하는 나치즘과 파시즘을 겪으며, 서구 사유에 전체성과 동일성의 원리를 각인한 존재론적 철학 전통과 대결하는 것을 자기 철학의 제1목표로 삼았다. 동일자에게 결코 흡수될 수 없는 타자성이나 코나투스(conatus essendi; 존재하려는 자기보존 경향)에 앞서는 타자에 대한 나의 책임, 즉 윤리의 강조가 레비나스 철학의 중심을 이루는 것도 이 문제설정에 비추어 이해될 수 있다. 이런 레비나스의 사유는 블랑쇼나 데리다 같은 동시대인들에게 우정 어린 반향을 얻기도 했으며, 그 흔적 역시 이 책 『신, 죽음 그리고 시간』의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레비나스는 이 책에서 이제까지의 ‘정통’ 철학사를 의문에 부치고, 문명적 위기로부터의 탈출을 위한 사유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하려 한다.
– 죽음과 시간에 대한 다른 생각
첫 강의 〈죽음과 시간〉은 레비나스가 철학 저작들의 독해를 통해 다른 철학자들과 대화 또는 대결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특히 하이데거가 그 대화(대결)의 중심에 놓이고, 다음으로는 후설과 헤겔이, 그리스 고전철학자들이, 그리고 데카르트, 키르케고르, 칸트, 로젠츠바이크, 부버, 베르그송, 블로흐 등이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레비나스가 철학의 역사에 개입하는 방식을 볼 수 있다. 자크 롤랑에 따르면 이런 면모는 레비나스의 다른 저술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라 한다. 레비나스는 철학사 연구를 자신의 고유한 사유를 발전시키기 이전의 예비적 단계로 삼았고, 따라서 그의 저작들에서 다른 철학자와의 대결은 주로 “분석이라기보다는 암시의 방식으로”(341쪽) 나타난다는 것이다. 『신, 죽음 그리고 시간』은 그런 레비나스가 사유의 원숙기에 이르러 다른 철학자들에 대한 명시적인 입장을 밝히고 있어, 그의 저작들 사이에서도 독특한 위상을 점한다 할 수 있겠다.
– ‘죽음에 대한 불안’에서 ‘미래에의 책임’으로
서구 철학에서 죽음과 시간은, 플라톤에 의해 질문으로서 제기되고 다시 그에 의해 해답을 얻은 이래, 헤겔과 하이데거라는 두 거장이 사유 전통 전체를 총괄·극복하겠다는 기획 하에 이 두 주제를 다시 수면으로 부상시킬 때까지 긴 시간 동안 수면 아래에 잠들어 있었던 주제이다. 때문에 레비나스 역시 이 주제들로 육박해 들어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이 두 사상가를 경유해야 했다. 특히 하이데거는 레비나스의 생애 속에서 그와 마주치며 사유 발달의 결절 지점을 형성케 한 이로서도 유명하다. 레비나스는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수학하던 시절(1928~1929년) 하이데거와 후설에게 현상학 수업을 받았는가 하면, 프랑스에 이들을 소개하는 역할도 했다. 그러나 이후 하이데거가 나치즘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면서 레비나스는 그의 철학과의 대결을 중요한 과제로 삼게 되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죽음과 시간〉은 하이데거의 시간·죽음관(觀)을 비판적으로 독해하는 데서 출발한다. 하이데거에 대해 우선 베르그송이, 다음으로는 칸트가 비교·대조된 다음, 이번에는 헤겔에 대한 비판적 독해를 거쳐 『희망의 원리』의 에른스트 블로흐를 유효한 전망으로 제시하는 구성을 취한다. 독해 가운데 레비나스는 자신의 철학적 입장으로부터 반박과 동조를 개진하면서 죽음과 시간에 관한 고유한 개념화들을 진전시켜 나가고, 그 결과 “죽음으로부터 시간을 사유한 하이데거와는 반대로, 시간으로부터 죽음을 사유”(159쪽)하기에 이른다.
레비나스가 보기에 죽음과 시간의 관계에 주목하는 것의 중요성을 인식한 것은 분명한 하이데거의 기여였으나, 그는 시간을 죽음 앞에 선 현존재의 불안으로부터 구성함으로써 죽음과 시간에 대한 이해를 동일자적 지평에 가두는 과오도 저질렀다. 즉 하이데거에게 죽음이라는 사건은 ‘죽음을 향한 존재’로서의 유일한 나를 자각하게 하는 계기이자, 이 나를 무(無)로 이끌어 세계를 체험하고 이해하는 활동에 종말을 고할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다. 그리고 시간은 이 유일한, 즉 홀로인 주체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겪는 시간이라는 개념에서 본질적으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비록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나’라는 개체의 배후에 있는 ‘존재’를 말함으로써 ‘나’를 절대화하는 단순한 유아론(唯我論)은 비껴가지만, 이렇게 나의 죽음이라는 사건에서 출발하는 사유는 끝내 동일성의 원리가 지배하는 의미지평에 머물 수밖에 없음이 드러난다. 이러한 하이데거 철학의 한계는 결정적으로 ‘새로움’과 그 원천인 미래에 대한 사유 불가능성을 노정하는 데서 분명해진다. 동일적 주체에 포섭될 수 없는, 근본적으로 비동일적인 것의 출현이 곧 새로움이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주제는 우리 삶의 유한성을 의식하게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유한성의 바깥, 말하자면 나의 죽음 바깥 (=존재의 의미지평 바깥)의 시간과 내가 관계를 맺는 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레비나스는 오히려 그 바깥과의 관계야말로 존재에 앞서는 것임을, 이 ‘나의 죽음’의 확실성에서 죽음에 접근하는 하이데거와 달리 ‘타인의 죽음’으로부터 죽음에 접근함으로써 보여 준다. 여기서 진정한 시간은 동일적 존재에 주어진 지평이 아니라 타자로부터(즉 ‘존재 너머’에서) 연원하는 것임이 드러나고, 우리는 항상 타자에 대해 갚을 수 없는 빚처럼 무한한 책임을 요구받음이 드러난다. 그리고 이 책임에 응답할 때 미래는 도래한다.
– 윤리로부터 신을 사유하다
‘신’을 주제로 삼는 2부(〈신과 존재-신-론〉)는 1부와는 또 다른 접근법을 보여 준다. 1부의 입론이 죽음과 시간의 개념이 철학 전통 안에서 너무 성급하게 결론지어졌다는 데서부터 출발했다면, 2부는 철학이 신 개념을 은폐해 버렸다는 데서 출발한다. 근대 이래의 서구 철학은 신학과 자신을 구분 지음으로써 성립한 면이 있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이렇게 신 개념을 자신의 철학 체계에 적극적으로 맞아들이려는 레비나스의 시도는 확실히 독특하다. 물론 신 개념의 정립에 있어서도 최대의 맞상대는 하이데거이다. 하이데거는 헤겔 독해를 거쳐 ‘형이상학의 존재-신-론적 구성’이라는 문제 설정을 얻는다. 형이상학(철학)은 신학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한 채 존재 사유를 존재-신-론으로 대체했다는 것이다(이것이 ‘존재 망각’이다). 그러나 존재 사유로 충분한 것일까? “존재-신-론에 따라 신을 사유하는 것은 존재를 잘못 사유하는 것인가, 아니면 신을 잘못 사유하는 것인가?”(188쪽) 이 책의 두 번째 강의는 하이데거적 “사유가 형이상학을 통해 부당한 특권을 가”지고서 “농락한 신의 자유를 신에게 돌려 주”려 한다(362쪽).
– 나와 타자의 윤리적 관계를 주재하는 신
우선 확실히 해두어야 할 점은 레비나스의 ‘신’은 신앙의 대상과는 다르다는 사실이다. 레비나스에게 존재론과 신앙은 억견(doxa)의 구조를 갖는다는 점에서 동형적이다. 신은 세계에 군림하고 다스리는 절대적 존재자가 아니다. 유한한 우리 의식의 척도에 귀속되는 세계를 주재할 뿐인 신은 결국 존재의 내재성에 머무는 데 그치기 때문이다. 신이 진정으로 초월적이려면 존재의 내재성 바깥에 거할 수밖에 없다. 즉 존재 너머가 신의 영역이어야 하고 따라서 신은 증언될 수 없는 것이다.
존재-신-론이 신을 존재의 세계에 유폐시켰다면, 하이데거는 철학에서 신을 완전히 분리해 냄으로써 존재-신-론에 의한 존재 망각을 극복하고 존재 사유로 나아가려 했다. 그리고 레비나스는 존재 너머(즉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신 개념의 제자리를 찾으려 한다. 이 시도는 데카르트의 ‘무한’ 개념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무한이 존재 너머로의 초월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가 가르쳐 준 무한의 관념은 수동적인 주체 안에서 이 초월을 사유할 수 있게 해준다.”(214쪽) 그러나 데카르트는 무한을 말하는 동시에 동일자에 모든 타자를 통합하는 전체성을 부여하기도 했다. 레비나스는 이 지점을 바로잡음으로써 철학 안에 신 개념의 정당한 자리를 마련하려 한다. 즉 나와 타자의 윤리적 관계를 주재하는 제삼자로서의 신으로 말이다. ‘동일자의 왕국’에서 안온하고 게으른 휴식 속에 빠져드는 것, 레비나스에 의하면 이것이 ‘부르주아’가 되는 길이며, 나의 주체성을 존재의 코나투스에 종속시키는 길이다. 신은 이때 나를 깨워 타자의 호소를 향하게 하고, 내가 ‘타자에 우선하는 일자(一者)’가 아니라 ‘타자를 위한 일자’임을 일깨운다. 그리고 그 타자에의 책임을 짐으로써 나의 유일함, 나의 주체성이 확보된다는 것이다.
– 왜 레비나스인가?
그린비출판사는 이 책 『신, 죽음 그리고 시간』을 시작으로 미출간된 레비나스의 저작들을 속속 펴낼 예정이다. ‘타자’, ‘얼굴’, ‘바깥’, ‘초월’ 등의 독창적 개념화를 통해 자기를 중심에 두고서 모든 것을 동일화하는 서양 문명을 그 입각점으로부터 비판하려 한 레비나스의 철학적 기획은, 이후 ‘타자성의 철학’이라고 부를 만한 새로운 흐름의 초석이 되었다. 레비나스 사후 2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오늘날, 타자를 포식(捕食)적으로 동일화하며 지배력을 확장해 온 전 지구적 자본주의로부터의 탈출구를 마련하기 위한 철학적 자원으로서 레비나스 철학에 대한 관심은 더없이 높다. 그러나 그간 국내에서는 레비나스의 일부 저작만이 산발적으로 소개되는 데 그쳐, 체계적으로 그의 저작들과 철학이 소개 및 수용되어야 할 필요성이 거듭 말해졌다. 앞으로 계속될 ‘레비나스 선집’이 그런 필요성에 대한 한 가지 응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독자의 평 1
프랑스의 철학자 에마누엘 레비나스의 <신, 죽음 그리고 시간>이 나왔다. 그린비에서 새로 기획한 레비나스 선집 시리즈 첫 번째 책이다. 이 책은 1993년에 소르본 대학에서 마지막으로 강의한 강의록을 기반으로 엮은 책이다. 프랑스 철학을 알량하게 접해보긴 해서 대강의 계보를 읊자면 데카르트에서 쭉쭉쭉 내려오다 보면 퐁티 베르그송 바슐라르를 거쳐 비로소 레비나스에 도착하게 된다. 이 책에서 레비나스는 ‘신’과 ‘죽음’ ‘시간’이라는 주제가 서양의 관점에 의해 오염되어왔다고 지적한다고 한다. 서양철학자가 이런 시각을 갖기란 쉽지 않은 것 아닌가? 자기 학문이고 밥그릇인데! 내가 이 책을 보고 몇 퍼센트나 이해 할 수 있을 지모르지만 (철학은 백프로 이해한다는게 불가능하긴 하지만) 레비나스에 한 발 담궈보는 계기가 되었음 한다. 앞으로 출간 될 목록으로는 <후설 현상학에서의 직관 이론> <전체성과 무한> <타자성과 초월성> <우리 사이>가 예정되어있다. 레비나스는 ‘타자철학’이란 키워드가 중요한 철학자이기 때문에 <타자성과 초월성> 선집에서 가장 중요한 주저가 아닌가 싶다.
레비나스를 이해하는 데 있어 도움이 될 만한 책은 <레비나스 평전>과 <레비나스의 타자철학> 그리고 <타인의 얼굴>이다. 이 책들은 레비나스가 직접 쓴 책들이 아니라서 레비나스에 대한 적절한 평가와 더불어 그의 사상을 짜임새 있게 설명하고 있다. <레비나스의 타자철학>같은 경우 국내저자의 책이고 레비나스의 제자의 제자가 쓴 책이라 신뢰가 간다. 또한 강영안 서강대 철학과 교수가 쓴 <타인의 얼굴> 레비나스 철학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긴요한 길잡이가 될 수 있다. 국내저자의 책이 워낙 흔치가 않은 탓이다.
○ 독자의 평 2
– 신, 죽음 그리고 시간
[죽음이 확실함일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하지 않으며, 또 죽음이 무화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도 확실하지 않다. 죽음과 나의 관계는 또한 타자의 죽음에 대한 앎에서 오는 감정적이거나 지적인 반향으로 만들어진다. …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예감되는 죽음과의 관계, 죽음이 우리의 삶에 자국을 남기는 방식, 우리가 살아 나가는 시간의 지속에 죽음이 가하는 충격, 시간 속으로의 죽음의 침입은 여전히 앎과 동화될 수 있는가? 21
죽음은 죽음의 경험과는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것은 타인의 죽음으로부터 오는 의미, 타인의 죽음이라는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에게 관계하는 것으로부터 오는 의미다. 22
인간의 삶은 ‘가리는 것‘, ‘옷입는 것‘이며, 동시에 ‘벌거벗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은 일종의 ‘엮임‘이기 때문이다. 23
자신을 표현하는 어떤 이는 나와 다른 자, 나와 구분되는 자다. 그는 내게 무관하지 – 않은 존재로, 나를 지탱하는 자로 자신을 표현한다. … 그 어떤 이는 곧바로 생물학적 과정 너머에 있는 자이며, 어떤 이로서 나와 엮여 있는 자이다. 24
데카르트가 조종실 속에 있는 항해사의 이미지에 반대해서 실체화한 것, 라이프니츠가 모나드로 설정한 것, 플라톤이 이데아들을 관조하는 영혼으로 놓은 것, 스피노자가 사유의 양태로 생각한 것, 이 모든 것이 현상학적으로는 얼굴로 기술된다. … 그래서 여기서는 존재하느냐 또는 존재하지 – 않느냐 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가, 그러한 질문에 앞선 문제가 제기된다. 24
타자의 죽음으로서의 죽음은 자아로서의 나의 동일성에 영향을 미친다. 타자의 죽음이 의미를 지니는 것은 그것이 동일자와 단절하는 가운데서며, 나의 자아 속의 동일자와 단절하는 가운데서다. 26
죽음을 어떤 무규정성의 물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까? 즉 주어진 것들에서 출발하는 문제로 설정된다고 할 수 없는 그런 무규정성의 물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까? 죽음이란 되돌아오지 않는 떠남, 주어진 자료 없는 질문, 순수한 물음표인 셈이다. 28
죽음에 의한 정감은 정감성이고 수동성이며 척도를 벗어나는 정감, 현존하지 – 않는 자에 의해 현존하는 자가 가지는 정감이다. … 죽음과 맺는 관계는 모든 경험에 앞선 것으로, 존재나 무에 대한 비전이 아니다. 지향성은 인간적인 것의 비밀이 아니다. 인간의 존재는 코나투스가 아니라 탈이해관심이며 작별 인사다. 29
죽음의 예-외 속에서 죽음과 맺는 관계는 순수하게 감정적인 관계다. 그것은 한 감정으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지만, 그 감정은 어떤 앞선 앎이 우리의 감성과 지성에 반향함으로써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죽음의 예-외 속에서 죽음과 맺는 관계는 미지의 것 속에서의 감정이고, 운동이고, 불안정이다. 31
시간은 존재의 제한이 아니라 무한과 맺는 존재의 관계다 죽음은 무화가 아니라 질문이다. 무한과의 관계 즉 시간이 생산되는 데 필수적인 질문이다. 34
언어가 죽음이라 부르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옮겨질 수 있는 사건성이기도 할 것이다. 이 옮김은 기계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아 – 자신의 얽힘 또는 뒤얽힘에 속하는 것이며, 나의 고유한 지속의 선을 절단하는 것, 또는 이러한 선에 매듭을 만드는 것이다. 마치 내가 지속하는 그 시간이 어떤 길이만큼 끌리는 것처럼. 34
자아 (또는 나의 독특성 안의 나)는 그 개념을 빠져나가는 누군가이다. 자아는 책임 가운데 타인에 응답함으로써만 자신의 유일성 속에서 나타난다. 이때의 책임은 결코 회피할 수 없는 것이며, 나는 그 책임으로부터 결코 면제될 수 없다. 자아는 자신의 대체 불가능성으로 이뤄지는 자기-자신의 동일성이다. 즉 자아는 모든 빚 너머의 의무이며, 그래서 어떠한 떠맡음도 그 수동성을 부인할 수 없는 인내다. 36
볕뉘.
0. 설거지, 가을꽃을 담은 2리터 생수병으로 꽃화분을 만들고, 청소한 뒤 마실이다. 동네 천장이 아주 높고, 그 높이까지 책장이 있는 카페다. 조심스레 읽다.
1. 그는 너무도 쉽게 하이데거의 존재를 넘는다. 죽음이라는 것도. 생명에 갇힌 순수지속으로서 시간에도 균열을 내버린다. 나라는 것이 너와 다른 ‘곳’에 빚지고 있음을 말한다.
2. 가까운 지인의 죽음으로 그 말없는 자의 부름에 곤혹스러웠다. 명절 만난 지인은 그 의례를 밟지 못해 아직 그 그물에서 있는 듯 싶었다. 일사와 하는 일, 하고싶은 일이 겹쳤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여실히 겪고 있는 셈인 것이다.그래서 이리로 끌려온 것인지, 생명과 삶의 충만성에 돌다리를 건너다 이렇게 덥썩 물린 것이다. 다음 징검다리로 건너 뛰어야 할지, 아니면 밟아야할지 모르겠다. 물이 흘러 잠긴 징검다리.. 신발이 젖든… 생략하고 뛰다보면 온몸이 젖을 수도 있는 그런 디딤돌이다.
3. 이렇게 간편하게 코나투스의 쓸모를 버리는 것을 보라. 그의 바둑판이란 19*19칸이 아니라 곁에 하나 더 있는 듯싶다.
○ 독자의 평 3
타자성과 윤리라는 키워드로 재구성한 레비나스의 서양 근대철학 강의라고 봐도 좋겠다. 레비나스의 주요 개념들이 어떤 철학적 대결들을 거쳐 형성되었는지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문제의식을 폭넓게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특히 전반부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곁에 두고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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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의 존재론을 읽으면서 내용도 중요하지만 편집상에서 읽기 편안한 상태를 고려하지 않아 읽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중요한 부분을 읽으려면 글씨가 작으므로 한 눈에 들어오지 않으며 내용을 많이 수록하려고 하는 것은 있으나 책의 편집상에서 글씨를 크게해 주고 간격을 넓혀주면 책을 읽을 때 편할 것 같다.
종교적 시각에서 보다도 교양적으로 꼭 필요한 것 같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