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이야기 세트 전3권
시오노 나나미 / 문학동네 / 2011.7.7
-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의 필생의 역작 『십자군 이야기 세트』
‘로마인 이야기’에 이어 ‘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를 탈고한 이후 새로 쓰기 시작한 시리즈물이다. 전체 시리즈는 3권으로 구성되었으며 한국에는 1권이 2011년 7월 7일에 정식 번역출간되었다.

이 책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인 200여 년 동안 치러진 전쟁이자 세계 2대 종교가 격돌한 십자군 전쟁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작가는 십자군 전쟁의 이야기를 통해 역사와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시각을 제시하고, 전쟁의 과정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처럼 박진감 넘치게 묘사하고 있다.
세계와 역사, 그 장대한 물결의 흐름을 바꿨던 십자군 전쟁을 보면서 독자들은 중세와 십자군의 역사뿐만 아니라 인간과 권력에 대한 통찰력을 깨우칠 수 있을 것이다.
1권에서는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라는 위력적인 한 마디로 촉발된 유럽의 봉건제후와 주교, 수도사와 기사, 그리고 빈민들로 구성된 제1차 십자군의 결성과 그들에 의해 십자군 국가가 성립하는 20여 년의 과정을 다룬다.
2권에서는 십자군의 제1세대가 모두 역사에서 퇴장한 뒤, 보두앵 2세가 예루살렘 왕으로 등극하는 1118년부터 시토파의 수도사인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의 제창에 의한 제2차 십자군의 결성과 퇴각(1146~1148),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정복함으로써 예루살렘을 십자군 시대 이전으로 되돌리는 1187년까지, 이슬람의 대반격이 시작되는 제2차 십자군 전후의 70여 년의 기간을 다루고 있다.
시오노 나나미의 압도적인 필력은 『십자군 이야기』 3권에서 최고의 클라이맥스를 만들어낸다. 인간의 욕망과 의지가 만들어 낸 장대한 드라마, 그 빛과 어둠 속에서 명멸하는 인간 군상의 스토리는 여전히 매혹적이다.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박진감, 그리고 핵심을 곧바로 파고드는 특유의 직관적인 문장은 독자들을 사로잡아 새로운 차원의 지적 쾌락을 선사한다. 이 압도적인 이야기와 서늘한 문장의 장관 속에서 날카롭게 빛나는 시오노 나나미의 역사의 흐름과 인간의 운명에 대한 통찰은 독자들을 전율하게 만들 것이다.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 vs “알라는 위대하시다!”
○ 목차

십자군 이야기 1
제1장 |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
카노사의 굴욕
성전을 호소하다
십자군의 탄생
은자 피에르
민중 십자군
제후들
툴루즈 백작 레몽 드 생질
로렌 공작 고드프루아 드 부용
풀리아 공작 보에몬드 디 알타빌라
제2장 | 우선 콘스탄티노플로
‘민중 십자군’의 운명
제후들, 속속 도착하다
황제 알렉시우스의 음모
제3장 | 안티오키아로 가는 긴 여정
프랑크인
니케아 공략
도릴라이움 전투
타우루스 산맥
에데사 탈취
교황 우르바누스의 설욕
제4장 | 안티오키아 공방전
이슬람 · 시리아의 영주들
십자군의 도착과 포진
식량 부족
이집트에서 온 사절
셀주크투르크, 일어나다
보에몬드의 계략
안티오키아 함락
투르크군의 도착과 포위
성스러운 창
십자군 대 투르크의 전투
안티오키아는 누구 손에?
아데마르 주교의 죽음
인육 사건
제5장 |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시리아에서 팔레스티나로
불의 시련
십자군 합류
당시의 팔레스티나
제6장 | 성도 예루살렘
성도를 둘러싼 공방
물 부족
공성용 탑
그리스의 불
예루살렘 해방
성묘의 수호자
이집트군의 접근
교황의 새로운 대리인이 오다
보에몬드와 보두앵, 성지순례에 오르다
탄크레디의 활약
고드프루아의 정복
이탈리아의 경제인들
고드프루아의 죽음
보에몬드, 붙잡히다
제7장 | 십자군 국가의 성립
보두앵, 예루살렘 왕이 되다
십자군의 젊은 세대
보에몬드의 복귀
레몽의 건투
보에몬드, 유럽으로 가다
함정
기묘한 전투
젊은 죽음
보두앵의 죽음
십자군 제1세대의 퇴장
도판 출처

십자군 이야기 2
제1장 | 수호의 시대
십자군의 제2세대
템플 기사단의 탄생
성 요한 기사단의 변모
보두앵 2세
십자군의 여자들
프랑스에서 온 예루살렘 왕
성채
제2장 | 이슬람의 반격이 시작되다
에데사 함락
수도사 베르나르두스
제2차 십자군
성지로 가는 길
다마스쿠스로
철수
심각한 영향
누레딘의 등장
십자군 국가의 실태
대지진
비잔틴식 외교
해군력=제해권
십자군과 십자군 사이의 시기
종교 기사단
‘템플 기사단’
‘병원 기사단’
십자군 시대의 성채
중세의 경제인들
해군력
거류지
상관
온건한 이슬람교도
제3장 | 살라딘의 등장
수니파와 시아파
파티마 왕조의 멸망
새로운 십자군의 계획과 좌절
젊은 살라딘
문둥이 왕 보두앵
이슬람 세계 통일로 가는 긴 도정
젊은 문둥이 왕의 끝없는 싸움
‘해시시를 피우는 남자들’
‘고삐 풀린 개’
제4장 | 성전(지하드)의 해
‘하틴 전투’
승자와 패자
발리앙 이벨린
예루살렘 공방
남자의 대결
예루살렘, 다시 이슬람의 손으로
도판 출처

십자군 이야기 3
제1장 | 사자심왕 리처드와 제3차 십자군
‘성도’를 잃다
영국
프랑스
리처드와 필리프
황제 ‘붉은 수염’
티루스 공방
몬페라토 후작 코라도
아코 탈환전
살라딘, 전장으로
전방의 적과 후방의 적
‘붉은 수염’의 최후
두 명의 젊은 왕
키프로스 섬
전장에 들어서다
탈환하다
프랑스 왕의 귀국
‘튜턴 기사단’의 탄생
리처드 대 살라딘
대결 제 1전 ‘아르수프’
싸움이 끝나고
야파 수복
‘성도’로 가는 길
불리한 현실
그래도 앞으로
모국에서 온 나쁜 소식
오른손에는 칼, 왼손에는……
대결 제2전 ‘야파’
강화를 향하여
살라딘의 리처드 평
그후의 리처드
제2장 | 베네치아 공화국과 제4차 십자군
수재 교황의 등장
도제 단돌로
술탄 알 아딜
프랑스의 젊은 제후들
‘바다의 도시’
베네치아의 참전
프랑스에서는
집결지 베네치아에서
출진
자라 공략
비잔틴제국 황자
행선지 변경
콘스탄티노플 공략
‘라틴제국’
‘지중해의 여왕’
제3장 | 로마 교황청과 제5차 십자군
‘성지’의 상황
‘소년 십자군’
왕들은 움직이지 않고
‘교황 대리’ 펠라조
다미에타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강화 제안 (1)
강화 제안 (2)
제5차 십자군의 최후
제4장 | 황제 프리드리히와 제6차 십자군
남쪽 섬 시칠리아
황제 즉위
원정은 언제?
사라센 거류지
나폴리 대학
살레르노 의학교
예루살렘 왕으로
적과의 접촉
교황 그레고리우스
첫 번째 ‘파문’
두 번째 ‘파문’
출발
아코 도착
접촉 재개
텔아비브와 사자 사이에서
강화 체결
반대의 소용돌이에서
‘성도’ 방문
교회와 모스크
‘그리스도의 적’
귀국
‘평화의 키스’
제5장 | 프랑스 왕 루이와 제7차 십자군
이상적인 군주
화려한 출진
이집트 상륙
강경한 진군
만수라의 참극
철수
미증유의 패배
제7차 십자군의 ‘성과’
제6장 | 최후의 반세기
몽골의 위협
몰골 대 맘루크
성왕 루이와 제8차 십자군
항구도시 아코
‘그리스도교도는 마지막 한 사람까지 지중해에 처넣어주겠다’
표적은 좁혀졌다
아코 공방전
최후의 날
제7장 | 십자군 후유증
‘로도스 기사단’에서 ‘몰타 기사단’으로
템플 기사단의 최후
‘아비뇽 유수’
이탈리아의 경제인들
성지순례
맺음말
연표
참고문헌
도판 출처

○ 저자소개 : 시오노 나나미
저자 시오노 나나미 鹽野七生는 1937년 7월 도쿄에서 태어났다. 가쿠슈인 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한 뒤 1963년부터 1968년까지 이탈리아에서 공부했다. 1968년에 집필 활동을 시작하여 「르네상스의 여인들」을 잡지 『주오코론 中央公論』에 발표했다. 첫 단행본인 『체사레 보르자 또는 우아한 냉혹』으로 1970년에 마이니치 출판문화상을 수상했다. 1970년 이후 이탈리아에서 살고 있다. 1982년 『바다의 도시 이야기』로 산토리 학예상, 1983년 기쿠치 간 상을 수상했다. 1992년부터 로마제국 흥망의 역사를 그린 『로마인 이야기』(전15권)에 몰두하여 1년에 한 권씩 집필했다. 1993년 『로마인 이야기 1』로 신초 학예상, 1999년 시바 료타로 상을 수상했다. 2001년 『시오노 나나미 르네상스 저작집』(전7권)을 간행했다. 2002년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국가공로훈장을 받았다. 2006년 『로마인 이야기 15』를 끝으로 이 시리즈를 완결했다. 2007년 문화공로자로 선정되었고, 2008~2009년에 『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전2권)를 간행했다. 2010년 『십자군 이야기』(전4권) 시리즈를 간행하기 시작해 2011년에 완결했다.
– 생애
시오노 나나미는 1937년 7월 7일 도쿄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시절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처음 읽고 유럽의 신화와 역사에 매료되었다. 1963년 가쿠슈인 대학교에서 철학과를 졸업했다. 대학교 시절 좌파학생운동에 깊이 참여했으나, 1960년 안보투쟁 이후 분열을 거듭, 목적성 없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학생 운동의 현실에 질려 발을 빼게 되었다. 졸업 후 다시 유럽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졸업 직후인 1964년 이탈리아로 건너갔다. 1968년까지 이탈리아에서 공부하는 동안 어떠한 공식 교육기관에도 적을 두지 않고 독학으로 르네상스와 로마 역사를 공부했으며, 이탈리아뿐만 아닌 유럽 전역, 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의 광범위한 지역을 여행하기도 했다.
1968년 일본으로 귀국, 문예지인 《중앙공론(추오코론)》에 《르네상스의 여자들》을 연재하면서 작가로서 데뷔했다. 1970년 두 번째 작품인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을 발표하여 명성을 쌓기 시작, 같은 해 이탈리아인 의사와 결혼하며 이탈리아피렌체에 정착한다. 이 결혼 생활에서 아들을 하나 두었으나 수 년 후 이혼했다. 그 후 아들과 함께 1993년 로마로 이주해 현재 그곳에 거주하며 집필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 작품 활동
초기 작품에서는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역사에 천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데뷔작인 《르네상스의 여자들》(1968)을 시작으로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1970), 《신의 대리인》(1972)은 모두 14-16세기 이탈리아의 역사를 주제로 한 팩션이며, 이 경향은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 《신의 대리인》 이후 큰 작품 활동을 하지 않던 시오노 나나미는 1980년, 10여년에 걸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베네치아 공화국의 역사를 서술한 이야기체 역사서인 《바다의 도시 이야기)》를 발표해 1982년 산토리 학예상을 받았다. 이후 70년대 10년간의 연구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역사소설인 《세 도시 이야기》(1993-1995), 《전쟁 3부작》(1983-1987)을 발표하였다. 이후 《로마인 이야기(ローマ人の物語)》를 쓰게 되는 것에까지 이르게 된다.
– 수상
1970년 《르네상스의 여자들》로 받은 마이니치출판문화상을 시작으로 1982년 《바다의 도시 이야기》로 산토리 학예상, 1993년 신초 문예상 등을 수상했으며, 2000년에는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이탈리아의 역사와 문화를 일본에 전달하는 데 공을 세운 것을 인정받아 국민포장인 그란데 우피치알레 공로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이 외에도 2005년 일본 정부로부터 받은 자수 포장, 시바 료타로 문학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 평가
많은 비평가와 역사학자들은, 시오노의 작품이 엄밀히 말하면 역사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많은 독자가 이를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경계의 목소리를 낸 바 있다. 또한 시오노의 책에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부분(《로마인 이야기》의 경우 특히 고대 그리스를 서술한 부분이나 로마의 속주 통치를 미화한 부분)이 다수 있으며, 이것이 독자들에게 잘못된 정보와 그릇된 편견을 심어줄 수 있다는 점을 지적받은 바 있다.
다른 비평가들은, 시오노의 저작 전반에 있어 그 주제의식과 문체가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우경화되어 있으며, 이는 특히 청소년들에게 사상적으로 편향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특히 강대국의 제국주의와 작은정부를 지향하는 보수주의에 대한 옹호가 현저하다. 예를 들어 서울대학교서양사학과 교수 주경철의 경우, 자신의 저서 《테이레시아스의 역사》의 pp.130~148에서 시오노 나나미를 “일본 우익 제국주의 성향을 온전히 가지고 있는 작가”이며,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비판하였다. 책 곳곳에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것처럼 보이는 서술들이 상당수 있으며, 그리고 한일 양국의 역사문제에 관하여 “서로 각자 다른 버전의 역사교과서를 가지면 된다”고 역설, 일본측의 역사적 과오 반성이 필요없다고 주장하는 등, 역사의식에서 문제점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스스로 인정한 것과 같이 저작이 마키아벨리즘적이고, 권력에 대해 그다지 비판적이지 않은 문체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상당부분 마키아벨리를 오해한 입장으로, 마키아벨리즘은 “도덕과 정치를 분리” 시키자는 것이지 “도덕 자체를 인정하지 말” 자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오노 나나미의 입장을 “마키아벨리즘” 으로 정의하는 것은 무리가 있으며, 시오노는 오히려 그 왜곡된 의미로서의 마키아벨리스트라고 할 수 있다.
– 작품
르네상스 저작집 (塩野七生ルネサンス著作集)
《르네상스의 여인들》 (ルネサンスの女たち), 1968년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 (チェーザレ・ボルジアあるいは優雅なる冷酷), 1970년
《신의 대리인》 (神の代理人), 1972년
《바다의 도시 이야기》 (海の都の物語), 1980년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わが友マキアヴェッリ), 1987년
《르네상스를 만든 사람들》 (ルネサンスとは何であつたのか), 2001년
로마인 이야기 (ローマ人の物語)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ローマは一日にして成らず), 1992년
《한니발 전쟁》 (ハンニバル戦記), 1993년
《승자의 혼미》 (勝者の昏迷), 199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상》 (ユリウス・カエサル ルビコン以前), 1995년
《율리우스 카이사르·하》 (ユリウス・カエサル ルビコン以後), 1996년
《팍스 로마나》 (パクス・ロマーナ), 1997년
《악명높은 황제들》 (悪名高き皇帝たち), 1998년
《위기와 극복》 (危機と克服), 1999년
《현제의 세기》 (賢帝の世紀), 2000년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すべての道はローマに通ず), 2001년
《종말의 시작》 (終わりの始まり), 2002년
《위기로 치닫는 제국》 (迷走する帝国), 2003년
《최후의 노력》 (最後の努力), 2004년
《그리스도의 승리》 (キリストの勝利), 2005년
《로마 세계의 종언》 (ローマ世界の終焉), 2006년
전쟁 3부작(戦争三部作)
《콘스탄티노플 함락》 (コンスタンティノープルの陥落), 1983년
《로도스 섬 공방전》 (ロードス島攻防記), 1985년
《레판토 해전》 (レパントの海戦), 1987년
세 도시 이야기(三つの都の物語)
《주홍빛 베네치아》 (緋色のヴェネツィア·聖マルコ殺人事件), 1987년
《은빛 피렌체》 (銀色のフィレンツェ·メディチ家殺人事件), 1989년
《황금빛 로마》 (黄金のローマ·法王庁殺人事件), 1990년
– 역자 : 송태욱
역자 송태욱은 연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외국어 대학원 연구원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 『르네상스인 김승옥』(공저)이 있고, 옮긴 책으로 『사랑의 갈증』, 『비틀거리는 여인』, 『세설』, 『만년』, 『환상의 빛』, 『형태의 탄생』, 『포스트콜로니얼』, 『천천히 읽기를 권함』, 『번역과 번역가들』, 『연애의 불가능성에 대하여』, 『매혹의 인문학 사전』, 『안도 다다오』, 『빈곤론』, 『유럽 근대 문학의 태동』 등이 있다.
– 감수 : 차용구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파사우대학교에서 서양 중세사 연구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중앙대학교 인문대학 역사학과 교수로 재임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로마제국 사라지고 마르탱 게르 귀향하다』『중세 유럽 여성의 발견』이, 옮긴 책으로 『중세의 빛과 그림자』가 있고 「중세 문화 속의 그리스 신화」, 「필립 아리에스의 죽음관에 대한 연구」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 책 속으로
카노사의 굴욕
1077년,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카노사의 굴욕’이 알려지자 서유럽 전역의 선남선녀들은 경악한다. 황제가 행한 인사(人事)에 교황이 반대한 것이 발단이었는데, 교황은 자신의 반대를 무시한 황제를 곧바로 파문에 처한 것이다.
파문의 위력은, 파문당한 자와 관계를 지속하면 그 사람도 파문당해 그리스도교의 적으로 간주된다는 점이다. 중세 사람들은 신앙심이 깊었다. 당연히 가신과 병사들은 파문당한 주인을 떠난다. 즉 파문이란 사회로부터 전면적인 추방을 의미했던 것이다.
젊고 혈기가 드센 하인리히도 한동안은 버텼지만 끝내 항복한다.
독일에서 비밀리에 이탈리아로 들어온 황제는 교황이 체재중인 카노사 성 앞에 섰다.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자답게 얇고 수수한 옷차림으로, 줄기차게 쏟아지는 1월의 눈을 맞으며 내내 맨발로 서 있었다.
카노사 성은 이탈리아 중부에 광대한 영지를 갖고 있으며 개혁파의 지지자로 알려진 마틸데 백작부인이 거처하는 곳이었다. 그 성 안, 큼직한 난로에서 불이 기세 좋게 타오르는 따뜻한 거실에서 승리감을 만끽하는 쉰일곱 살의 교황. 한편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눈 속에 홀로 서 있는 스물일곱 살의 황제.
‘카노사의 굴욕’은 서유럽 전역의 그리스도교도에게 교황의 권위와 권력을 일깨운 일대 사건이 되었다. 파문은 풀렸으나 교황의 완승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후의 일은 세계사 교과서에 실려 있지 않은데, 그후 8년 동안 황제 하인리히는 교황 그레고리우스를 바싹 궁지로 몰아넣는다. 젊고 혈기가 드센 남자에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굴욕을 주고 치욕을 안기는 일은 현명한 방식이 아닌데, 교황 그레고리우스는 강단은 있었으나 정치적인 인간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나중에 로마 교회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오르게 되지만, 그가 죽은 곳은 그의 거처인 로마가 아니라 도피처였던 살레르노였다.
“나는 정의를 사랑하고 정의 아닌 것을 증오했다. 그래서 추방된 몸으로 죽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그렇지만 그레고리우스가 말한 ‘정의’는 어디까지나 로마 교회와 로마 교황이 모든 것 위에 있다는 생각과 다름없었다.
이 그레고리우스의 뒤를 이은 사람은 온후한 성격의 빅토르 3세였으나, 그는 황제와의 관계를 개선하지 못한 채 2년 만에 죽는다. 그 뒤를 이어 교황에 선출된 사람이 우르바누스 2세다. 1088년 봄, 젊은 수도사였던 그도 이제 마흔여섯 살이었다.
(…)
그레고리우스가 죽은 곳은 이탈리아 남부의 살레르노였는데, 우르바누스가 교황으로 선출된 곳도 그 근처 도시인 테라치나였다. 이 시기의 교황들에게는, 죽는 것도 교황이 되는 것도 로마 밖에서만 가능했던 것이다. 황제 하인리히는 아직 서른여덟 살. 카노사에서 당한 굴욕을 잊지 않은 황제는 군사력으로 교황을 몰아붙임과 동시에 교회 내부를 분열시킴으로써 대립교황을 선출하게 했다. 로마 교황이 지닌 권위를 뿌리째 무너뜨리는 책략을 부린 것이다.
(…)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증한 이래, 8백 년 가까운 세월 동안 로마 교황의 거처였던 라테라노 궁전에조차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교황. 이것이 프랑스 땅에서 십자군을 제창하기 전 우르바누스 2세가 처해 있던 실상이었다. 즉 교황이 직면한 가장 큰 난제는 신성로마제국이 지닌 강대한 힘으로부터 어떻게 로마 교황의 권위를 지켜내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황의 한복판에 살면서 황제나 왕, 제후 등 누구보다 더 광범위한 정보를 꿰뚫고 있던 사람은 로마 교황이었다. 신도가 사는 땅이라면 어디에나 있는 사제. 그런 그들을 통솔하는 주교. 군주들 가까이에 반드시 대기하고 있는 고해신부. 그리고 각 지방을 담당하는 주교를 통하지 않고 로마 교황과 직접 연결되어 있는 수도원. 이 수도원들은 그 지방의 생산기지이자 경제기지였다.
비록 로마에 있지 못하고 각지를 전전할 수밖에 없다 해도, 이러한 정보원들로부터 온갖 종류의 정보가 교황에게 집중되고 있었던 것이다. 중세는 정보를 전달하는 사람이 상인과 성직자라고 해도 좋은 시대였다. 더군다나 상인과 성직자의 관계는 의외로 밀접했다. 자주 입장이 바뀌었지만 상인과 성직자는 매도자와 매수자 관계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로마 교황은 폭넓은 시야로 책략을 세우는 데 누구보다도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또한 세속의 군주들에 비해 ‘학식’ 있는 이가 많았다.
우르바누스 2세는 교황에 취임한 해부터 프랑스에서 십자군 원정을 제창하기까지 7년 동안 로마에 거의 발을 들인 적이 없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가 서른여덟 살부터 마흔다섯 살이 될 때까지 여전히 교황에게 적대적인 자세를 누그러뜨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 이탈리아 각지를 전전하면서도 정보에는 부족함이 없는 상태에서, 이 명석한 두뇌의 그리스도교 세계 개혁론자는 나름의 생각이 있었던 게 아닐까. 당시의 군주들이 자기 영토에만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가운데, 지금으로 말하면 글로벌한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었던 사람은 로마 교황이었을 테니까.
(…)
교황과 황제의 권력 범위를 어디서 어떻게 선을 그어 구분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아직 해결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직후 시작된 황제 하인리히의 반격 기간과, 교황이면서도 로마에 있을 수 없었던 세월까지 총 15년 동안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거처가 정해지지 않은 생활’을 해왔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우르바누스는 그레고리우스에 비해 꽤 정치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상대가 가진 힘(군사력)에 대항하는 데 다른 군주의 군사력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가지려야 가질 수 없는 힘, 즉 교황만이 가질 수 있는 힘을 이용하여 상대를 약화시키려는 생각을 했던 게 아닐까. 제아무리 강력한 군사력을 갖고 있다 해도 황제는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는 말은 절대 할 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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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을 호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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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5년 11월 클레르몽에서 개최된 공의회의 주요 무대는 실내가 아니라 실외였다. 우르바누스 2세는 대성당 앞의 광장을 가득 메운 군중에게 직접 호소하는 방식을 택했던 것이다.
이때 했던 연설의 정확한 내용은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연대기 작가가 남긴 기록을 참조하면 교황의 ‘호소’는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어 진행됐던 것 같다. 이제 쉰세 살이 된 옛 클뤼니 수도원의 수도사는, 그에게 인생의 승부처인 이 클레르몽에서 모든 청중을 향해 강력하게 설파한다.
먼저 전반부에서는 현재 그리스도교 세계를 뒤덮고 있는 윤리의 타락을 개탄한다. 신의 가르침에 반하는 이기적인 행위가 횡행하고 있는 현 상황을 규탄하고, 이대로 방치하면 신의 노여움을 살 것이라고 질책한다. 그리고 그러한 사태를 막는 수단으로 ‘신의 휴전’을 제창했다. 같은 그리스도교도들이므로, 영토의 보존을 위해서든 확장을 위해서든 전쟁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교황은 연설 전반부에서 그리스도교도를 비난했지만, 후반부에서는 그 공격의 화살을 이교도에게 돌린다. 그리스도교도들 사이에서 ‘휴전’이 실현된다 해도, 우리에게는 아직 중요한 일이 남아 있다며 말을 이었다. 동방에서 끊임없이 도움을 청하고 있는 ‘형제’에게 달려가, 이 신앙의 동포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고. 그리고 왜냐하면, 이라고 말한 뒤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
“이슬람교도는 지중해까지 세력을 확장해 너희 형제를 공격하고, 죽이고, 납치해 노예로 삼고, 교회를 파괴하고, 파괴하지 않은 곳은 모스크로 바꾸고 있다. 그들의 폭력을 더 이상 용납해서는 안 된다. 지금이야말로 그들에게 맞서 일어설 때다.” 그리고 한층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이것은 내가 명하는 것이 아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명하는 것이다. 그 땅으로 가서 이교도와 싸워라. 설사 그곳에서 목숨을 잃는다 해도 너희의 죄를 완전히 용서받게 될 것이다. 신께 부여받은 권한으로, 나는 여기서 그것을 분명히 약속한다.
어제까지 도적이었던 자가 그리스도 전사가 되고, 형제나 친지와 다투던 자가 이교도와의 정당한 싸움터에서 그 분노와 원한을 풀 날이 온 것이다. 지금까지는 푼돈을 받고 하찮은 일을 하며 세월을 보내던 자도, 이제부터는 신이 바라시는 사업에 참가하여 영원한 보수를 받게 될 것이다.
출발을 미뤄서는 안 된다. 각자 집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곧장 주 예수 그리스도가 이끄는 대로 동방을 향한 진군을 시작한다. 신이 바라시는 성스러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연설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감동했다. 군중 사이에서 자연스레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Deus lo vult)”라는 함성이 터져나왔고, 그 커다란 함성 속에서 한 사람이 막 연설을 끝낸 교황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교황 앞에 무릎을 꿇고 원정에 참가하겠다는 서약을 했다. (…) — 십자군 이야기 1 pp.15~25
십자군의 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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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리 인간세계에 눈을 돌리면 인재가 마치 분수처럼 한 시대에 한꺼번에 배출되는 현상이 종종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역시 분수처럼 많은 물을 기세 좋게 뿜어올리고는 소리 없이 떨어지며 인재 고갈의 시대로 접어든다.
이런 현상이 끼치는 영향이 국내에만 한정된다면 문제해결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이전 시대에 축적해놓은 것을 갉아먹으며 차분히 앉아 다음 분수가 뿜어져오르기를 기다리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인간세계에서는 한 나라의 인재 배출과 인재 고갈의 순환이 다른 나라에서도 같은 시기에 일어나지는 않는다. 한쪽은 인재 고갈 시대에 접어들었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인재 배출의 시대를 맞이하는 일이 상당한 비율로 일어나는 것이 인간세계이다.
유럽을 떠난 1096년부터 1099년 예루살렘 정복을 거쳐 보두앵 1세가 죽은 1118년까지의 22년은, 십자군측에서 인재가 배출된 시대였다.
연구자들은 제1차 십자군의 성공요인으로 두 가지를 든다.
하나는, 허를 찔린 이슬람측에 방어준비가 불충분했다는 것.
또 하나는, 각 영지의 태수와 영주 사이의 불화와, 그에 따른 이슬람측의 분열.
둘 다 옳다. 십자군의 공격을 받은 이슬람측은 그들을 단순한 침략자로 생각했으므로 평소 사이가 나쁜 인근 도시의 영주가 공격받는 것을 손놓고 지켜보기만 했고, 자신이 공격을 받아 맞서 싸우게 되면 이번에는 다른 영주들이 가만히 지켜보는 식이었다. 이렇듯 그들에게 통일된 방어전 같은 것은 꿈같은 이야기였는데, 이는 제1차 십자군이 성공할 수 있었던 한 요인이었다.
그러나 그에 앞서 말할 게 있다. 뛰어난 인재에게 요구되는 조건이 일관된 의지와 자신이 지닌 힘을 충분히 활용할 줄 아는 능력이라면, 제1차 십자군 시대의 이슬람측에는 그런 인재가 없었다. 이슬람측에 유능한 지도자가 없었다는 것이 십자군측에 성공을 가져다준 것이다.
인재가 많았던 제1차 십자군 시대가 끝난 후 공식무대에 등장한 것이 3대 예루살렘 왕이 된 보두앵 2세다. 하지만 이 사람은 1096년에 로렌 공작 고드프루아를 따라 오리엔트로 온 십자군 기사 중 하나였으므로, 엄밀히 말하자면 제1차 십자군 세대 중 아직 남아 있는 사람에 속한다. 또한 조슬랭 드 쿠르트네라는 맹우가 목숨을 구해주기도 했다. 이 보두앵 2세의 시대에는, 그 높이와 기세는 뚝 떨어졌을지언정 분수가 아직 물을 내뿜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십자군이 유럽을 떠나던 해에 겨우 다섯 살이었고, 그후 30년 넘게 프랑스 왕가의 일원으로 지낸 사람이 예루살렘 왕이 되었을 때, 분수는 물을 내뿜기를 멈추었다. 그런데 이슬람측에서는 이 시기부터 물을 높이 뿜어올리게 된다. 역사의 불가사의, 하지만 이것은 인간세계의 부조리이기도 하다. — 십자군 이야기 2 pp.46~48
수도사 베르나르두스
중근동의 십자군 국가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에데사 백작령, 안티오키아 공작령, 트리폴리 백작령, 예루살렘 왕령 네 국가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중 하나를 적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을 맞닥뜨린 그리스도교도들은 신앙심이 깊은 사람일수록 더 강하게, 이제 신은 우리를 지켜주지 않는 것인가, 하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이런 공포는 한 나라의 왕이든 일개 서민이든 다르지 않았다.
이러한 유럽의 그리스도교 세계에 수도사 베르나르두스의 목소리가 한층 높이 울려퍼졌다. 제1차 십자군은 클뤼니 수도원 관계자들의 호소로 시작되었는데, 제2차 십자군은 클뤼니파의 그리스도교 세계 개혁안을 미온적이라 비판하며 설립된, 프랑스의 수도회에서도 보다 급진적인 성향을 띤 시토파 수도원 관계자들에 의해 일어나게 된다.
후에 가톨릭교회의 성인 반열에 올라 ‘성 베르나르두스’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은 이 사람은 1090년 프랑스 북동부 샹파뉴 지방에서 태어났다. 이 지역에서도 제1차 십자군에 참가한 사람이 많았는데, 베르나르두스는 오리엔트를 향해 떠나는 그리스도 전사들의 긴 행렬을 여섯 살 무렵에 본 셈이다.
(…)
중세 유럽은 ‘수도원의 시대’라고도 불린다. 수도원이 세속 사람들에게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기 때문인데, 그중에서도 성 베네딕투스가 이탈리아 남부의 몬테 카시노에 창설한 이래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간 베네딕토파 수도원의 힘은 절대적이었다. 클뤼니 수도원도 베네딕토파에 속하므로, 창시자인 성 베네딕투스가 정한 수도원의 기본원칙, 청빈과 복종과 정결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제1차 십자군 성공의 공로를 대접받게 된 후 클뤼니 수도원에 모여든 것은 사람들의 신앙심만이 아니었다. 이들의 기부도 급증한 것이다. 이 시기 프랑스 남부를 휩쓸던 북아프리카 해적이 로마를 향해 여행중이던 클뤼니 수도원 원장 일행을 습격하여 엄청난 수확을 거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클뤼니 수도원 고위 사제들의 사치스러움은 로마 교황을 능가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 한 가지만 가지고 클뤼니 수도원을 비난했다면 베르나르두스는 고지식한 원리주의자에 머물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원리주의자 중에서도 과격한 원리주의자였다. 자기 혼자만 원리원칙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끌어들인다는 의미에서.
베네딕토파 수도원에는 앞서 말한 3대 원칙 외에 라틴어로 ‘스타빌리타스(정주)’라 불리는 규칙도 있었다. 베르나르두스는 청빈 같은 것보다 특히 이 규칙을 싫어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베네딕토가 생각한 ‘정주’는 세상의 잡사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며, 신에게 가까이 가는 노력을 게을리해선 안 된다는 것이었는데, 수도사 베르나르두스는 성직자가 세상의 잡사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는 한 그리스도교 세계를 성서의 뜻대로 다스릴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
인간세계에서는 소리 높여 주장하면 할수록 대중의 이목을 끌기 쉽다. 베르나르두스에게 심취한 사람이 늘고 베르나르두스파 수도원에 들어오는 기부도 늘어만 갔다. 유럽은 클뤼니파 대신 베르나르두스가 이끄는 시토파가 지배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리고 1144년 말에 일어난 에데사 함락 소식이 아직 유럽에 전해지지 않았던 1145년 2월 초, 베르나르두스에게 심취했던 사람 중 하나가 에우게니우스 3세라는 이름으로 로마 교황에 취임한다.
제자의 교황 취임을 축하하며 보낸 편지에서, 성직계의 최하위층에 속하는 이 수도사는 최상위에 있는 로마 교황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무슨 문제든 나와 상담해주시오.”
이것이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가 가지고 있던 ‘힘’이었다. 제1차 십자군의 원동력은 로마 교황 우르바누스 2세였지만, 베르나르두스는 교황이 아니다. 대주교도 주교도 아니었다. 세상에서는 한낱 수도사에 지나지 않던 이 사람이 제2차 십자군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
당시 기록에서는 이런 베르나르두스를 홀쭉하게 여윈 몸을 허름한 수도복으로 감싸고 지팡이에 의지해 휘청휘청 걸어다녔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빈약하고 허약한 외모는, 영양이 충분한 몸에 옷을 몇 겹씩 껴입은 황제나 왕과 대면하는 순간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당시의 권력자들은 베르나르두스의 이런 외모에 압도당했을 것이다. 호화로운 옷을 껴입은 몸을 부끄럽게 여길 것까진 없더라도 왠지 모를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리고 뒤이어 그리스도교도라면 누구에게나 마땅한 정론이 날카롭게 설파된다. 이래서야 설득당하는 것도 당연했을 것이다. — 십자군 이야기 2 pp.77~84
종교 기사단
(…) 신에게 평생을 바친 수도사이자 신을 위해 싸우는 기사이기도 한 남자들을 결집한 종교 기사단은 십자군 시대의 특산물이다.
이들의 대표격을 꼽는다면 당시의 그리스도교도들이 ‘성지’라고 부르던 중근동을 본거지로 하고 이 성지를 지키기 위해 창설된 템플 기사단과 성 요한 기사단을 들 수 있다.
(…)
중근동의 십자군 국가에서 생겨난 양대 종교 기사단인 템플 기사단과 성 요한 기사단 역시 세속의 삶을 버리고 수도사가 된 남자들의 집단이다. 유럽에 있는 동종의 수도회와 다른 점은 오직 한 가지, 이슬람 교도를 상대로 싸운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이 양대 종교 기사단은 본부를 예루살렘에 두었음에도 예루살렘의 대주교가 내리는 명령도, 예루살렘 왕의 명령도 따를 필요가 없었다. 사실상 완전히 독립된 집단이었다. 이와 관련해 누레딘이 이끄는 다마스쿠스군이 접근해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그들이 어떻게 움직였을지 상상해보자.
예루살렘 왕과 공동으로 싸워야 할지 말지 로마 교황에게 지시를 받고 싶어도 그 전에 당장 행동을 개시하지 않으면 모두 죽임을 당하고 만다. 이것이 그들이 처한 상황이었다. 자주적으로 판단하고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독립성 덕분에 종교 기사단은 수세로 돌아선 십자군 국가의 ‘칼’이 될 수 있었다. 평화로운 시대에는 칼을 빼지 않고 차고 있는 것만으로도 억지력이 된다. 하지만 난세에는 유사시에 주저 없이 칼을 빼지 않으면 곧장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십자군 국가의 두 자루 ‘칼’인 템플 기사단과 성 요한 기사단이 전투 집단으로 창설된 시기는 1118년이다. 1118년은 제1차 십자군 세대의 마지막 인물인 예루살렘 왕 보두앵 1세가 죽은 해이고, 그때까지 20년 동안 확립한 십자군 국가들이 수세로 돌아서는 경계가 된 해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실이 보여주는 것처럼, 종교 기사단은 수세로 돌아선 시대의 중근동 십자군 세력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 십자군 이야기 2 pp.153~155
젊은 문둥이 왕의 끝없는 싸움
예루살렘의 왕 보두앵 4세는 죽기 전까지 11년간의 치세 기간 내내 병 때문에 왕궁에 틀어박혀 있었던 것은 전혀 아니었다.
(…)
전장에서는 항상 말을 타? 최전선에 섰고, 적이 공격해와도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병이 악화되었을 때는 안장에 자기 몸을 묶어서라도 지휘를 했다. 말이 쓰러지면 사람도 운명을 함께하게 되니 위험하다며 만류하는 측근의 충고도 보두앵 4세의 마음을 바꾸지 못했다.
젊은 문둥이 왕의 이런 기백에 항상 출격에 동행하던 장병들이 감동받은 것은 당연했다. 또한 직접적으로 왕의 지휘를 받지 않는 ‘템플 기사단’과 ‘병원 기사단’의 기사들도 자신들보다 훨씬 어린 왕의 말에 순수하고 진지한 태도로 귀를 기울였다. 왕의 병이 이 사람들에게 불안을 안겨준 일은 없었다. 모두가 보두앵의 병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감염이 두려워 왕에게 다가가기를 꺼리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1177년, 보두앵 4세가 열여섯 살 때의 일이다.
살라딘이 2만 6천 명이나 되는 병사를 이끌고서 카이로를 떠나 북상하기 시작했다. 바다를 왼편에 두고 가자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예루살렘 시내는 공포에 휩싸였다. 이대로라면 곧 적군이 예루살렘에 다다르게 된다.
이때 보두앵은 아스칼론에 있었다. 살라딘이 카이로에서 출발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의 목적이 이집트가 호시탐탐 노리던 항구도시 아스칼론일 거라 생각하고는, 아스칼론의 방어를 위한 1천4백 명의 병사를 이끌고 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살라딘은 바다 쪽을 동시에 공격하지 않고서는 항구도시 공략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살라딘의 의도는 예루살렘을 노리는 척하면서 아스칼론에서 예루살렘군을 끌어내, 도망갈 곳 없는 평원에서 큰 전투를 벌여 괴멸시키려는 것이었다. 예루살렘 내의 방어 병력이 얼마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생각해낸 계책이었다.
열여섯 살의 보두앵은 이 계책에 속아넘어갔다. 하지만 기병만으로 공격하겠다는 결정은 칭찬받아도 좋은 전술이었다. 그리고 살라딘은 이때도 역시나 어린 문둥이 왕을 가볍게 보고 있었다.
그는 2만 6천 명이나 되는 병사의 절반을 주변 지대에서 공포작전을 펼치는 데 내보냈다. 약탈과 화공을 저지르면 예루살렘과 아스칼론의 주민들이 공포에 질려 스스로 성문을 열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절반이라고 해도 1만 3천 명이나 된다. 그리고 살라딘이 직접 지휘하는 이 1만 3천 명의 병사를 쫓는 형국이 된 보두앵의 병력은, 예루살렘 국왕의 기병 5백 명과 ‘템플 기사단’ 기병 80명에 지나지 않았다.
적군이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왕을 선두로 한 580명의 기병이 한꺼번에 살라딘의 군대를 향해 돌진했다. 작전이고 뭐고 없었다. 기력만 가지고서 닥치는 대로 쳐들어간 것이다. 그 지나친 만용에 살라딘의 친위대인 쿠르드 기병대까지 도망치기 시작했고, 용맹하기로 소문난 살라딘군도 도망쳐, 하마터면 술탄이 포로가 될 뻔한 참상을 남기고서 이 몽기사르 전투는 끝이 났다.
군대를 물린 일은 있어도 도망친 적은 없었던 살라딘이 서른아홉 살에 처음으로 맛본 패전이었다. — 십자군 이야기 2 pp.268~270
역사에 대한 글을 쓰면서 통감하는 것 중 하나는, 정보란 그 중요성을 인식한 자에게만 올바로 전해진다는 사실이다.…
고대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렇게 말했다.
“현실의 모든 것이 누구에게나 보이는 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현실만 본다. 보고 싶지 않는 현실도 직시해야만 정보를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_『십자군 이야기 Ⅲ』 p.380
옳은 것만 말하는 신이 바란 일이니 옳은 전쟁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따라서 신의 존재가 후퇴한 후에도 ‘옳은 전쟁’만은 남았다. 아니, 적어도 이 정도는 남기고 싶다고 인간이 생각했기에 남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20세기에 맹위를 떨치고 21세기인 지금까지 계속 남아, 전쟁을 이끌어내는 측이나 이끌려나간 측 모두, 옳은가 옳지 않은가 하는 문제를 두고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다. _『십자군 이야기 Ⅲ』p.560

○ 출판사 서평
- 소설가 김훈, 앵커 김주하, 연세대 윤혜준 교수, 고려대 민경현 교수, 서울대 박태균 교수 : 우리 시대 멘토들의 강력 추천!
“시대가 공유하는 신념이 역사 위에 펼쳐놓는 광기는 장관이다. 그 광기를 들추어내는 시오노 나나미의 문장은 서늘하다.” _ 김훈 (소설가)
“『십자군 이야기』는 역사책이 아니다. 때문에 단순히 과거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현재이자 미래를 이야기하는 책, 나도 모르게 그 과거와 현재, 미래에 들어와 있음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_ 김주하 (앵커)
“역사는 지속된다. 과거는 남는다. 과거는 돌아온다. 십자군 이야기의 종결편인 이 책에서 다루는 사건들은 20세기 후반 이후 이어진 중동 사태, 동유럽과 서유럽의 대립, 중국의 위협의 시발점들이다. 오늘의 세계 정세를 읽고 미래를 예견하는 작업은 십자군 역사의 과거에서 시작해야 한다.”_ 윤혜준 (연세대 영문학과 교수)
“무거운 역사책과 어두운 박물관에서 잠자던 십자군과 이슬람 전사들을 세상에 끌어낸 이야기의 그물망은 마법이다. 8백 년 잠에서 깨어난 전사들이 다시 칼과 창을 들었다. 급박한 박자에 맞춰 얽히고설킨 전쟁의 곡선으로 전진하고 후퇴하는 장면을 숨 쉴 틈도 없이 따라가게 만드는 저 이야기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_ 민경현 (고려대 사학과 교수)
“천 년 전의 전쟁에서 오늘을 본다. 『십자군 이야기』의 무대는 지금도 여전히 세계의 뇌관인 곳이다. 이 책은 이념 전쟁이라는 과거와 현재를 경험하고 있는 우리에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소중한 교훈을 제시한다.” _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 인류 역사의 흐름을 바꾼 십자군 전쟁, 그 진정한 승자는 누구인가? 압도적인 이야기의 힘과 서늘한 문장의 장관, 그 속에서 빛나는 날카로운 통찰
그 어떤 누구도 중세를, 십자군을, 십자군 전쟁을
이처럼 생동감 있게, 박력 있게, 매력적으로 그려내지 못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로마인 이야기』의 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필생의 역작이자 2011년 한 해 동안 대한민국 독자들을 흥분시켰던 장대한 시리즈가 완간되었다.
인류 역사상 2백 년이라는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치러진 전쟁이자 세계 2대 종교가 격돌한 인류 역사의 대사건, 십자군 전쟁. 세계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십자군 전쟁. 현대의 다양한 문화산업에서 변형되어 재생산되는, 상상력의 원천인 십자군 전쟁.
하지만 십자군 전쟁에 대한 기존의 연구서들은 서구 중심 혹은 이슬람 중심의 시각틀 내지 보수적이거나 진보적인 시각틀에 갇혀 그 진면목을 보여주지 못했다. 시오노 나나미는 그 전쟁을 실제로 일으키고 그 역사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움직였던, 그리하여 그들 각자의 독특하고도 다른 개성으로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또다른 국면을 만들고 서로의 관계 속에서 상황을 변화시키는 변수로 작용했던 인물들을 전면에 내세워, 그들의 이상과 욕망, 성공과 좌절의 명암을 통해 십자군 전쟁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십자군 전쟁을 새롭게 조명해낸다. 시오노 나나미에 의해 십자군 이야기가 9백 년이라는 시간을 건너뛰어 현대적 이야기로 부활한 것이다.
1권에서는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라는 위력적인 한 마디로 촉발된 유럽의 봉건제후와 주교, 수도사와 기사, 그리고 빈민들로 구성된 제1차 십자군의 결성과 그들에 의해 십자군 국가가 성립하는 20여 년의 과정을 다뤘다.
2권에서는 십자군의 제1세대가 모두 역사에서 퇴장한 뒤, 보두앵 2세가 예루살렘 왕으로 등극하는 1118년부터 시토파의 수도사인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의 제창에 의한 제2차 십자군의 결성과 퇴각 (1146 ~ 1148),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정복함으로써 예루살렘을 십자군 시대 이전으로 되돌리는 1187년까지, 이슬람의 대반격이 시작되는 제2차 십자군 전후의 70여 년의 기간을 다뤘다.
완결편인 3권에서는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과 격돌한 하틴 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뒤 십자군 국가가 성도 예루살렘을 비롯한 대부분의 영토를 잃은 채 안티오키아와 트리폴리, 티루스 일대로 축소되자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해 유럽에서 속속 일어났던 3차에서 8차까지의 십자군 원정과 십자군 국가에 남겨진 최후의 도시 아코에서 벌어진 공방전 그리고 십자군 전쟁이 끝난 뒤 남겨진 기사단의 운명까지 1백여 년 동안의 기간을 다뤘다.
저자의 전작 『로마인 이야기』가 로마 시대와 로마인에 대한 단순히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물들을 중심에 놓은 새로운 역사서로 읽혀 큰 공감과 반향을 일으켰던 것과 마찬가지로, 『십자군 이야기』 역시 중세와 십자군 전쟁에 대한 뛰어난 역사서임에 틀림 없다. 아니, 그 이상이다. 그 누구도 저자만큼 십자군 이야기를 이렇게 매력적으로, 박진감 넘치게, 생생하게 쓰지 못할 것이다. 독자들은 중세와 십자군의 역사, 더 나아가 인간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게 됨은 물론이고, 현재의 다양한 문화산업에서 변형되어 재생산되는 상상력의 원천으로서의 중세와 십자군 이야기의 매력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