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아모르 문디, 한나 아렌트의 정치사상 세트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인간의 조건, 전체주의의 기원
한나 아렌트 / 이진우, 박미애, 김선욱 역 / 한길사 / 2017
『아모르 문디, 한나 아렌트의 정치사상 세트』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대표작 세 권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이 조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모은 것이다.
최근 아렌트의 정치사상을 인용한 기사들이 쏟아지고 있는 것은 지난해부터 많은 시민을 분노케 한 국정농단 사태 때문이다. 이와 관련한 청문회나 보도를 통해 우리는 가방끈 긴 부역자를 수없이 보았고 “나는 모른다”는 그들의 태도에 혀를 내둘렀다. ‘잘 짜인 범죄시스템’ ‘이를 비호하는 엘리트’는 특정 세력의 문제로 치부한다 해도 ‘잘못을 잘못으로 여기지 않는 뻔뻔함’은 이번 사태가 우리 사회의 민낯을 보여주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 정부가 어떻게 붕괴하고, 그것이 어떻게 전체주의로 비화하며, 이때 체제의 수호자들은 어떻게 사고하기를 멈추는지 분석한 아렌트의 정치사상이 필요하다. 게다가 아렌트는 어떠한 환경에서라도 인간다움을 지켜낼 ‘인간의 조건’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앞서 고민했던 것이다. 특히 ‘악의 평범성’ 개념은 체제의 수호자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사고의 불능성’의 원인을 밝힐 것이며, 행위에서 ‘인간의 조건’을 찾는 태도는 광장의 정치에 정당성을 부여할 것이다.
이에 한길사는 아렌트의 주저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모아 세트로 꾸렸다.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반양장으로 제작해 가격을 낮췄다. 기존 도서의 약 60퍼센트 가격으로 만나볼 수 있다.
– 목차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저자소개 :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
1906년 10월 14일 독일 하노버 근교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보냈는데, 이때 어머니를 통해 유대인의 삶을 이해하게 된다. 조숙하고 명석했던 그녀는 고등학교에서 교사에게 반항하다 퇴학당했지만, 가정교육과 베를린 대학교 청강을 거쳐 1924년 마부르크 대학교에 진학했다. 그곳에서 하이데거에게 수학하지만 현상학의 창시자인 후설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실존철학자 야스퍼스의 지도 아래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1929)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29년 스테른(Gunter Stern, 1936년 이혼)과 결혼하여 베를린에 정착한다. 이후 아렌트는 정치적 억압과 유대인 박해가 첨차 심해지던 독일에서 시온주의자들을 위해 활동하다 체포되어 심문을 받은 뒤, 1933년 모든 것을 뒤로하고 어머니와 함께 프랑스로 망명했다. 망명 후 발터 벤야민 등 많은 지식인을 만나 유대인 운동을 하던 아렌트는 다시 수용소에 갇혔다가 1940년에, 아렌트는 독일 시인이자 철학자인 하인리히 블뤼허와 결혼했다. 1941년에는 아렌트를 포함하여 2500명 정도 되는 유대계 망명자들에게 불법으로 비자를 발행해 준 미국 외교관 하이램 빙엄 4세의 도움으로 남편과 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다. 아렌트는 1951년에 이르러서야 미국 시민권을 얻게 되는데, 1959년에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완전한 교수직에 지명받은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프랑스와 미국에서 경험한 18년간의 무국적자 경험을 바탕으로 첫 번째 주저인 『전체주의의 기원』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1951)을 출간하고, 더불어 정치이론가로서 정치현상의 근본적 의미를 밝히는 데 전념하면서 본격적인 정치사상가의 길을 걷는다.
이후 『라헬 바른하겐 : 유대인 여성의 삶』 (Rahel Varnhagen : The Life of a Jewish Woman, 1958), 『인간의 조건』 (The Human Condition, 1958), 『과거와 미래 사이』 (Between Past and Future, 1961),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진부성에 대한 보고』 (Eichmann in Jerusalem :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 1963), 『혁명론』 (On Revolution, 1963),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Men in Dark Times, 1968), 『공화국의 위기』(Crises of the Republic: Lying in Politics, 1969), 『시민적 불복종』 (Civil Disobedience, 1969), 『폭력의 세기』 (On Violence, 1969) 등 중요 저작들을 연이어 출간한다. 이 가운데 『혁명론』에는 아렌트의 최종적인 ‘정치’ 사상이 담겨 있는데, 그가 1956년 헝가리 혁명을 계기로 혁명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프린스턴 대학 세미나에서 「미국과 혁명정신」이란 주제로 강연한 것을 정리해서 완결지은 것이다. 『혁명론』은 ‘새로운 시작’ 과 자유를 기리는 혁명송이자, 정치학도들에게 다양한 정치적 통찰력을 제공하는 귀중한 교과서로서 의미 있는 저작이다. 아렌트는 1973년 에버딘 대학에서 ‘정신의 삶―사유’라는 주제로 기퍼드 강의를 요청받은 후 사유 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했으며, 이듬해 ‘정신의 삶―의지’라는 주제로 다시 강의를 시작하면서 이 연구를 진행했다. ‘정신의 삶―판단’이라는 주제로 정신의 삶 3부작의 마지막 연구를 진행하던 중 1975년 12월 심근경색으로 생을 마쳤으며, 남편이 오랫동안 강의한 뉴욕주 허드슨 강 유역 애넌데일(Annandale-on-Hudson, New York)에 있는 바드 대학에 묻혔다. 그녀의 사후 『정신의 삶―사유』와 『정신의 삶―의지』가 1978년 출간되었으며, 완성되지 않은 3부에 해당하는 「판단」 부분은 유고집으로 『칸트 정치철학 강의』라는 제목으로 1982년 출간되었다. 그후 이미 발표된 글들 및 미발표 원고 등을 주제별로 편집하여 『이해에 대한 에세이』(1994), 『책임과 판단』(2003), 『정치의 약속』(2005), 『유대적 저술』(2007), 『문학과 문화에 대한 성찰』(2007) 등이 출간되었다.
.역자 : 이진우
이진우는 연세대학교 독문과를 졸업하고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대학에서 철학 석사 및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계명대학교 철학과 교수 및 동대학 총장, 니체전집 편집위원, 한국 니체학회 회장, 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 포스텍 인문사회학부장, 포스텍 인문기술융합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 철학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한길사에서 펴낸 『이성정치와 문화민주주의』를 비롯해 『니체의 인생강의』 『니체. 실험적 사유와 극단의사 상』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찾아서』 『테크노인문학』 『프라이버시의 철학』 『도덕의 담론』 『이성은 죽었는가』 『한국 인문학의 서양 콤플렉스』 『지상으로 내려온 철학』 『탈현대의 사회철학』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한길사에서 펴낸 『전체주의의 기원』(한나 아렌트),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페터 슬로터다이크)과 이외에도 『책임의 원칙』(한스 요나스),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위르겐 하버마스), 『덕의 상실』)(알레스데어 매킨타이어), 『냉소적 이성 비판』(페터 슬로터다이크), 『공산당 선언』(마르크스·엥겔스), 『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니체) 등이 있다.
.역자 : 박미애 (朴美愛)
1955년 경남 울산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대학에서 사회학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Patriarchat durch konfuzianische Anstandsnormen, 『인간복제에 관한 철학적 성찰-슬로터다이크 논쟁을 중심으로』(공저)가 있으며, 『막스 베버』 『새로운 불투명성』 『문명화 과정 1, 2』『로자 룩셈부르크』 『생각 붙잡기』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공역)『기득권자와 아웃사이더』 『냉소적 이성비판 1』(공역), 『전체주의의 기원』(공역)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 책속에서
‘악의 평범성’, 이는 단지 아주 사실적인 어떤 것, 엄청난 규모로 자행된 악행의 현상을 나타낼 뿐이다.
이 악행은 악행자의 어떤 특정한 약점이나 병리학적 측면, 또는이데올로기적 확신으로 그 근원을 따질 수 없는 것으로, 그 악행자의 유일한 인격적 특정은 아마도 특별한 정도의 천박성이라고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행위가 아무리 괴물 같다고 해도그 행위자는 괴물 같지도 또 악마적이지도 않았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머리카락을 곤두서게 하는 참상의 중압감 아래 무너진 것은 바로 이재판의 연극적 측면이었다.
재판이란 희생자가 아니라 행위자와 함께 시작되고 끝나는 연극과 흡사하다. (56p,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It was precisely the play aspect of the trial that collapsed under the weight of the hair-raising atrocities.
A trial resembles a play in that both begin and end with the doer, not with the victim. (8-9p, Eichmann in Jerusalem)
재판의 중심에는 행위자만이 존재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행위자는 연극의 주인공과 같다.
따라서 만일 그가 고통을 받는다면 그가 행한 일 때문에 고통을 받아야지, 그의 행위가 야기한 타인의 고통 때문에 고통을 받아서는 안 된다. (57p,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In the center of a trial can only be the one who didin this respect, he is like the hero in the play and if he suffers, he must suffer for what he has done, not for what he has caused others to suffer. (9p, Eichmann in Jerusalem)
따라서 이 재판은 결코 연극이 되지는 않았지만, 벤구리온이 처음에 염두에 두었던 쇼, 즉 그가 유대인과 이방인, 이스라엘인과 아랍인, 간단히 말해 전 세계에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교훈’을 담은 쇼는 이루어졌다.
바로 이 쇼에서 얻은 교훈은 교훈 받을 사람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했다. (57p,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This, the trial never became a play, but the show Ben Gurion had had in mind to begin with did take place, or, rather, the “lessons” he thought should be taught to Jews and Gentiles, to Israelis and Arabs, in short, to the world.
These lessons to be drawn from an identical show were meant to be different for the different recipients. (9p, Eichmann in Jerusalem)
시간의 회오리바람 속의 낙엽처럼 그는 마법으로 차려진 식탁에서통닭이 입으로 날아드는 환상세계인 슐라라피아(더 정확히 말하자면, 학위와 보장된 직업과 세련된 유머의식‘을 가진, 가장 큰 악덕이란 농담 섞인 장난을 치고 싶어 참을 수 없어하는 충동인, 존경받는 속물들 의 모임)에서, 정확히 12년 3개월간 지속된 천년제국의 행군 대열로 달려갔다. 어쨌든 간에 그는 신념을 가지고 당에 가입한 것도 아니었고, 또 어떤 신념에 설득된 적도 없었다. 당에 가입한 이유를 말해달라고하면 그는 언제나 베르사유 조약과 실업‘과 같은 똑같은 진부한 표현들(clichés)을 반복했다. 또는 그가 법정에서 ‘어떠한 기대나 사전 결심 없이 그냥 당에 의해서 집어삼켜진 것과 같았습니다. 너무도 빠르고, 갑작스럽게 일어났습니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87p)
그의 말을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말하는 데 무능력함(inability to speak)은 그의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inability to think),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그와는 어떠한 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거짓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말(the words)과 다른 사람들의 현존(the presence of others)을 막는, 따라서 현실 자체(reality as such)를 막는 튼튼한 벽으로 에워싸여있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106p)
“당시 나는 일종의 본디오 빌라도1)의 감정과 같은 것을 느꼈다. 나는 모든 죄로부터 자유롭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를 심판할 자가 누구인가?
‘이 문제에 있어서 (자기) 자신의 생각을 가진’ 자가 누구인가?
그는 조심성 때문에 패망하게 된 최초의 사람도 최후의 사람도 아니었다.
1) 예수 시절에 유대 지역을 다스리던 로마의 총독으로 유대인은 예수를 로마에 대한 반역죄로 몰아 빌라도에게 고발했다. 빌라도는 예수의 무죄를 확신했지만 유대인의 요구와 정치적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하도록 판결했는데, 이 판결 후 빌라도는 손을 물로 씻으면서 자신은 죄가 없다고 말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183-184)
자기 민족을 파괴하는 데 유대인 지도자들이 한 이러한 역할은 유대인에게는 의심할 여지 없이 이 모든 어두운 이야기 가운데 가장 어두운 장을 이룬다.
여기에 대해서는 내가 앞서 언급한 적이 있는 라울 힐베르크의 권위 있는 저술 『유럽 유대인의 파멸』(The Destruction of the European Jews)에서, 이전에도 알려져 있기는 했으나 이번에는 그의 병적이고도 지저분한 세부사항까지 처음으로 노출된 것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188p)
아이히만이 아는 한에서는 아무도 저항하지 않았고 아무도 협력을 거절하지 않았다. 1943년 베를린에서 한 유대인목격자가 쓴 것처럼 ˝매일매일 사람들은 자신의 장례식장을 향해 이곳을떠났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185p)
우리는 여기서 독일에서의 이른바 ‘내면적 이주‘ (inner emigration, 제3제국에서 종종 지위를 가졌던 사람들, 심지어 고위직을 가진 자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 자기 자신과 세계에 대해 자기들은 정권에 대해 항상 내면적으로 반대를 했다고 말한 사람들)에 대해 단지 스쳐 지나가면서 언급하도록 하겠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198p)
칸트의 철학에서 그 원천은 실천이성이었다.
아이히만이 말하는칸트의 가정적 사용에서 그 원천은 총통의 의지였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211p)
때문에, 이 수많은 범죄자들 가운데 희생자들을 실제로 죽인 것에서 얼마나 가까이 또는 멀리 있었던가 하는 것은, 그의 책임의 기준과 관련된 한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와 반대로, 일반적으로 살상도구를자신의 손으로 사용한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책임의 정도는 증가한다.(342p)
그는 자신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그는 완전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의 마지막 말로 남긴 기괴한 어리석음보다도 이 점을 더 분명히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없을 것 이다. 그는 자신이 신을 믿는 자라고 분명히 진술하면서 자기는 기독교인이 아니며 죽음 이후의 삶을 믿지 않는다는 점을 일반적인 나치스 식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그는 ˝잠시 후면, 여러분, 우리는 모두 다시 만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운명입니다. 독일 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 나는 이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고 말했다. 죽음을 앞두고 그는 장례 연설에서 사용되는 상투어를 생각해 냈다. 교수대에서 그의 기억은 그에게 마지막 속임수를 부렸던 것이다.
그의 ‘정신은 의기양양하게 되었고’, 그는 이것이 자신의 장례식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349p)
– 출판사 서평
.전체주의의 기원 :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이해하려는 시도
1951년에 출간된 전체주의의 기원은 아렌트의 첫 저서다. 미국에서 유대인 학살 소식을 접한 아렌트는 “이 있을 수 없는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책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이해란 잔악무도함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간단히 말해 이해란 현실에, 그것이 무엇이든, 미리 계획하지는 않았지만 주의 깊게 맞서는 것이며 현실을 견뎌내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시도는 무모한 낙관주의를 표시하는 것도 분별없는 절망을 외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정치적·정신적 세계의 모든 전통적 요소가 어떻게 그 고유한 가치를 상실하고 인간적인 목적을 파괴하는 데 쓰이게 되었는지 그 과정에 작용한 은밀한 메커니즘을 발견해야 한다는 확신을 표현하는 것뿐이다.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은 단순한 역사기록서가 아니라 현실을 능동적으로 살았던 아렌트의 삶처럼 살아 꿈틀대는 사상서다. 아렌트는 역사적 사실을 인과론적으로 기술하는 데서 벗어나 정치적 자유라는 대주제를 일관되게 역설하고 있다. 전체주의의 배경을 이해하고 이 절대악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현상임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조건인 ‘자유’를 지키는 길이다.
.인간의 기원 : 절대악의 구렁텅이에서 인간다운 삶을 고민하다
아렌트는 유대인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 학살이라는 근대적 근본악을 온몸으로 경험했다. 철학자로서 그는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인간의 조건’에 대해 사유했다. 그에게 “어떻게 근본악이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중요한 철학적 화두였다. 인간의 조건은 전체주의의 기원과 정신의 삶에 이르기까지의 철학적 여정에서 관심을 놓지 않은 ‘근본악’을 깊이 탐구한다. 무엇보다도 이 책의 의의는 세계에 관해 단순히 관조하고 성찰하는 형이상학적 전통을 넘어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실천철학적 방향을 제시한다는 데 있다.
그의 다른 저작들처럼 인간의 조건은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었다. 이 작품만큼 엇갈린 평가를 받은 정치이론서는 거의 없다. 우선 ‘노동하는 동물’(animal laborans)에 관한 논의와 사회적 관심에 대한 분석으로 아렌트는 대다수 좌파에게 인기를 잃었다. 그러나 행위에 관한 설명은 다른 급진주의자들에게 희망의 메시지와 격려를 보내주었다. 1960년대 학생 운동 시기에는 인간의 조건이 참여 민주주의의 교본으로 취급되었다.
인간의 조건에서 가장 용기를 북돋워주는 것은 인간 탄생성과 시작의 기적을 상기시키는 메시지다. 우리의 사멸성을 강조하는 하이데거와는 대조적으로 아렌트는 새로운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세계에 태어난다는 사실에서 인간사의 믿음과 희망이 계속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 책의 운명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즉 미래의 독자들은 이 비범한 책에서 다양한 주제를 찾아내 발전시킬 것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악의 평범성을 해부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지난 뒤 유대인 학살 소식이 전 세계에 알려졌을 때,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렌트도 처음에는 그것이 진실이라고는 믿지 못했다. 그러던 중 유대인 학살의 주범이라 할 수 있는 아이히만(Adolf Eichmann)이 이스라엘 비밀경찰에게 붙잡혀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게 된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아렌트는 예정되었던 대학 강의를 취소하고, 미국의 교양잡지 뉴요커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특파원 자격으로 재판을 참관하게 된다. 이렇게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탄생한 것이다.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하면서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언급했다. 이는 어떠한 이론이나 사상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아주 사실적인 어떤 것, 엄청난 규모로 자행된 악행의 현상 자체를 나타내고자 만든 용어다. 이때 악행은 악행자의 어떤 특정한 약점이나 병리학적 측면 또는 이데올로기적 확신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없는 것으로, 그 악행자의 유일한 인격적 특징은 ‘천박함’이라고 할 수 있다. 행위가 아무리 잔혹하더라도 행위자는 괴물 같지도 악마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악행자는 일종의 ‘불능성’마저 지니는데, 이것은 어리석음이나 멍청함과는 차원이 다른 ‘사유의 불능성’ (inability to think)이다. 이 역시 재판과정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한때 자기가 의무로 여겼던 것이 이제는 범죄로 불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아이히만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곧바로 새로운 규칙을 마치 외국어 단어를 외우듯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였던 것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