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알렉산드로스 대왕 전기
퀸투스 쿠르티우스 루푸스 / 충북대학교출판부 (CBNUPRESS) / 2010.12.20
『알렉산드로스 대왕 전기』의 필사본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서기 9세기쯤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123개 정도의 두루마리의 형태로만 남아 있다.

그리고 작품 전체가 다 전해 내려오는 것도 아니며 상당부분이 산실되었다.
가장 안타까운 부분은 첫 1-2권이 통째로 사라졌다는 점이다. 그 외에도 제5권의 마지막 부분과 제6권의 첫 부분, 제10권의 중간 부분 약간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사실 우리는 이 책의 원 제목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고, 저자의 이름도 완벽하게 확실할 수 없다.
알렉산드로스는 정신적으로 강인했고, 인내심도 강했다. 용맹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었고, 성품은 너그러웠다. 영광과 명예에 대한 추구는 한계를 넘어설 정도였지만, 위대한 업적을 생각해 본다면 이해할 만하다. 친구와 병사들에게 잘 대해줬으며, 통찰력도 뛰어났다. 책은 이러한 알렉산드로스의 모습을 상세히 묘사한다.
○ 목차
옮긴이의 서문
산실된 1-2권에 해당하는 대략의 줄거리
제3권
제4권
제5권
제6권
제7권
제8권
제9권
제10권
연표
색인

○ 저자소개 : 퀸투스 쿠르티우스 루푸스 (Quintus Curtius Rufus)
퀸투스 쿠르티오스 루포스 (Quintus Curtius Rufus)는 1세기의 로마의 역사가로 추정되며, 그의 유일한 저서인 《알렉산더 대왕의 역사》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저서는 마케도니아 알렉산더 대왕의 역사를 다룬 현존하는 모든 역사서이다. 많은 부분이 누락되었으며, 원고에 언급된 그의 이름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고전학자들은 시간의 우연성 때문에 그가 연결 고리가 깨진 다른 역사적 인물로 추정하고 있다.
쿠르티오스의 저서는 유일하다. 고대의 어떤 저서도 그것, 또는 그를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로마 원로원과 황제가 종종 저서를 검열해왔다는 것을 지적한 피터 프랫은 쿠르티오스가 생전에는 그 원고를 출판하고 있었고, 사후에는 황제가 보관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황제들은 그 저서를 유작으로 출간하려 했지만, 정치적 기회를 찾지 못했다. 황제들은 알렉산더 대왕의 정체를 그들 스스로 정하고 있었다. 마케도니아 제국의 영향이 남아 있던 지방은 통치하기가 쉽지 않아, 항상 반란에 시달리고 있었다.
쿠르티오스의 저서는 정치적 독립을 조장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평가받을 수가 없었다.
– 역자: 윤진
현 충북대학교 사학과 교수.
고려대학교 사학과 졸업.
「헬레니즘 시대 스파르타 ‘혁명’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음.
저서로는 『스파르타인, 스파르타역사』.
역서로는 『스파르타』 『서양 고대문명의 역사』.
논문으로는 「스파르타 혁명과 클레오메네스 3세」 「스파르타의 파이데라스티아」
「헬레니즘 시대의 스파르타 여성에 대한 고찰」 등 다수.

○ 출판사 서평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일대기를 수록한 이 책에의 특징은 저자가 로마의 원로원 계층이라는 계급의식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이 책에서 아첨에 대해 경멸감을 가지고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낮은 신분에서 출세한 자에 대해서도 얕잡아 보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또한 수사학자로서의 특징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 알렉산드로스, 제우스의 아들이라 불린자! 디오니소스의 위업을 넘어서려던 자 『알렉산드로스 대왕 전기』
기원전 356년 7월 20일 펠라에서 태어난 알렉산드로스는 20세의 나이로 아버지 필리포스 2세를 계승해 ‘바실레우스’가 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치세 기간 대부분을 서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미증유의 군사 정복 활동으로 보냈다. 30세가 되었을 때 그리스를 시작으로 남쪽으로는 이집트, 동쪽으로는 인도 북서부에까지 확장되었다. 그 이전까지 고대 서양에 전례가 없던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는 전투에서 패배한 적이 없고,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군사 지도자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만약 그가 신이 되고 싶다면, 우리는 그저 신이라고 불러주는 수 밖에.” _ 스파르타 사람 다미스 (Damis)의 말. 알렉산드로스가 도시국가들에게 자신을 신으로 대접하라는 명령문을 내리자 한 말.
풀네임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Ἀλέξανδρος Γ’ ο Μέγας). 영어식의 알렉산더 대왕 (Alexander the Great)으로 더 유명하다. 아랍어권에서는 이를 음역한 페르시아 어형인 이스칸다르 (الإسكندر)라고 부른다.
고대 그리스 마케도니아 왕국 아르게아스 왕조의 26대 왕이자 제2대 코린토스 동맹 의장이다.

고대사 정복 군주의 아이콘으로, 알렉산드로스는 즉위하기 이전부터 군사적인 능력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는데, 그가 즉위한 그 해에 아버지였던 필리포스 2세에 의해 강압적으로 코린토스 동맹을 맺은 고대 그리스 국가 중 하나였던 테베가 이러한 어린 왕의 즉위를 틈타 “마케도니아에 어린 아이가 올랐으니 혼란스러울 거라 판단”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소식을 듣고 알렉산드로스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반란을 진압했음은 물론 테베를 소멸시켜 버렸다. 이후 동쪽으로 오랫동안 그리스 영토를 칩입했던 페르시아 제국의 아케메네스 왕조를 무너뜨리고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자가 된 것도 모자라, 남쪽으로는 이집트를 정복하여 이집트 왕의 호칭인 파라오가 되었고, 나아가 지금의 인도 부근까지 정벌하여 고대 그리스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개척한 인물이다. 게다가 알렉산더의 정복은 단지 군사적인 업적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수학, 과학 기술의 발달과 그의 정복전쟁으로 인한 동•서양의 문화적, 경제적 교류와 이민족들에 대한 포용정책으로 인해 탄생한 세계시민 사상으로 대표되는 헬레니즘 문화가 탄생해 유럽은 물론 아시아까지도 크나큰 영향을 주게 된다. 이것이 알렉산드로스 그 자신의 군사적 업적을 능가하는 그의 더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석굴암 등에 지대한 영향을 준 간다라양식도 거슬러 올라가면 알렉산드로스의 업적과 관련된 것이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병으로 사망하였지만, 그가 짧은 인생 동안 남긴 업적은 매우 거대하다. 더불어 그의 극악무도한 악행들도 매우 거대하다.
한국에선 영어 발음인 알렉산더 대왕으로 통용된다.
그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플라톤이고, 플라톤의 제자가 아리스토텔레스인데 아리스토텔레스도 제자를 두었으니 그가 바로 알렉산드로스 3세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