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영원과 하루 : 토머스 모어 서한집, 토머스 모어 경의 생애
토머스 모어, 윌리엄 로퍼 / 정원 / 2012.4.27
토머스 모어 서한집 ‘영원과 하루’. 영국의 정치인이자 인문주의자인 토머스 모어 경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이다. 토머스 모어가 썼던 수천 통의 편지 중 현존하는 127편의 편지가 담겨 있다. 토머스 모어의 사위 윌리엄 로퍼가 편집한 이 책은 그에 관한 최초의 전기로, 이후 등장한 많은 전기들의 전거 자료로 평가되었다.
정치학자이자 인문주의자, 유능하고 공정한 법률가이자 행정가인 토머스 모어의 편지들이 현재 우리에게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대체로 그의 벗들의 깊은 존중심 덕택이다. 예를 들어 에라스무스와 뷔데는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서 모어에게서 받은 편지를 출판했다. 또한 메헬렌 대평의회 의원이었던 그의 또 다른 벗, 프란시스퀴스 판 크라네벨트는 모어의 편지를 다른 사람들의 편지들과 함께 연대순으로 정리해서 보관했다. 그래서 우리는 분명 모어가 썼을 수천 통의 편지들 가운데 현재 남아 있는 127편을 읽을 수 있다. 이들 가운데 몇몇은 그의 저작에 대한 서문이거나 헌사이다. 이 편지들은 학문적 가치를 가지는 한편 모어가 다른 학자들과 맺은 친분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그 자체로도 흥미롭다.
본서는 ‘유토피아’의 저자 토머스 모어의 삶과 사상에 대해 속속들이 알 수 있는 좋은 책이다. 기실 우리가 토머스 모어에 대하여 알고 있는 사실은 매우 미약하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로서 영국왕 헨리 8세의 이혼에 반대하다가 참수형을 당한 인물, 이 정도쯤. 이 책은 우리의 시야와 안목이 얼마나 협소한지 새삼 절감하게 만든다.
500쪽에 가까운 이 책은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전반부는 토머스 모어의 서한집이다. 모어가 가족과 지인들에게 보내고 받은 서한들이 빼곡하게 실려 있다. 모어의 현전하는 127편의 편지 중에서 선별된 66편과 가족의 편지 6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분량 상으로도 400쪽에 가까워 이 책의 핵심을 이룬다. 후반부는 그의 사위 윌리엄 로퍼-토머스 모어가 지극히 아끼던 맏딸의 남편-가 쓴 모어의 짤막한 전기다. 행장 (行狀)이라고 하는 편이 더 가까우리라. 굳이 순서를 정하자면 후반부의 전기를 읽은 후 서한들을 읽는 편이 이해에 보다 도움이 될 것이다.
모어의 삶은 외관상 굴곡과 부침이 두드러지지 않고 대체적으로 평온하였다. 일평생 법관으로 봉직하다가 최고 지위인 대법관에까지 오를 정도로 국왕의 신임을 얻은 그였다. 그런 그의 말년을 어지럽게 휩쓴 사건은 헨리 8세의 이혼 건이었다. 단순한 국왕의 개인사가 아니라 유럽의 정치 및 종교계와 밀접하게 연관된 사건으로 결국 영국 성공회가 출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혼 문제의 개입을 극구 피하려 했던 모어는 로마 교황이 아니라 영국 국왕이 영국 내 교회의 수장임을 선포한 수장령 (首長令)에 선서하기를 거부한다. 그는 종교 지도자가 아니었고 은퇴하였으므로 현직 고위관료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국왕은 그의 선서를 강력하게 요구하였으니 모어의 당대적 비중이 매우 지대하였음을 추론할 수 있다. 온갖 회유와 강압에도 그는 결국 죽음을 달게 선택하였는데, 그에게 이것은 정치와 종교적 관점을 떠나서 양심에 관한 중차대한 사안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유토피아’는 분명 흥미로운 저작이지만, 성격상 저자의 주관적이며 내밀한 감정과 사상이 온전히 드러나 있지 않다. 특정한 상대 또는 다중을 염두에 쓴 이 편지들은 그런 면에서 토머스 모어라는 세기적 인물의 생생한 면모를 자신의 육성과 필치로 직접 들어볼 수 있는 귀중한 계기가 될 것이다.
모어는 소탈한 성품으로 젠체하지 않는다. 가족과 지인에게 보내는 문구에는 유머와 따스한 애정이 깊이 배어있다. 용돈을 달라는 맏딸에게 더 많이 주고 싶지만 계속적으로 달콤한 요청을 받기 위해서 요구액만 주겠다고 답장한다. 에라스무스에겐 자신의 저술을 빗대어 인용하며 자신이 유토피아 왕국의 왕으로 지목되었다며 유쾌한 농담을 나열한다.
그와 에라스무스 사이의 우정은 각별하였다. 친우에 대한 세인들의 터무니없는 비판과 비방은 그는 좌시하지 않고 열정적으로 옹호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마르턴 도르프에게 보내는 편지와 수사에게 보내는 편지다. 일반적인 편지와는 달리 이 둘은 상당한 분량으로 쓰였는데 전자는 70여 쪽, 후자는 40쪽에 달할 정도로 장문이다. 분량과 내용으로 보건대 공개서한 형식의 논문이라고 하겠다. 에라스무스 비판자들의 요지는 ‘우신예찬’에서 그의 신학자 비판이 그릇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그가 희랍어 원전에서 직역한 라틴어 성경을 두고 희랍어 텍스트의 신뢰성이 의심된다는 점이다. 세밀하고 정확한 논리로 상대방 주장의 오류를 지적하고 에라스무스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점에서 과연 법률가이자 신학자 못지않은 종교인인 모어의 능력을 엿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극한까지 다그치지 않고 상대방이 운신한 수 있는 여지를 남기며 슬쩍 추켜올리는 것은 과연 그다움을 느끼게 된다.
모어의 여성관 및 교육관은 당대로서는 매우 선진적이었다. 그는 남과 여, 지위 고하의 구분 없이 동등한 교육을 몸소 실행하였다. 그는 자신의 집을 학교라고 불렀는데, 하녀조차도 교육의 기회를 부여하였을 정도다. 또한 여성을 무조건 폄하하지 않았다. 윌리엄 고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남녀 모두 인간으로서 이성을 지닌 존재이며, 학식을 통해서 이성이 계발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16세기 초 절대왕권의 시대임을 염두에 두면 혁신적임을 알 수 있다.
모어 사상의 토대는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앙이다. 그의 이성과 양심 역시 건전한 믿음에 기반한다. 종교에의 경도 (傾倒) 정도가 그와 에라스무스의 차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사도들에게 이어졌고 그 후대가 바로 로마 교황이다. 비록 정치적으로는 이해관계가 상이하여 대립될 수 있지만, 종교적으로는 그에 순응해야 한다. 그것은 교황 개인에 복종이 아니다. 공의회를 거쳐 공인된 교리와 가르침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루터 등 소위 종교개혁론자들을 거부한다. 그리스도 교단 내부적으로 존재하는 부패와 타락 등은 교회의 틀 내에서 바로잡으면 되지 그것을 빌미로 교황과 공의회의 적통성을 부인할 수 없다고 본다. 그가 츠빙글리의 죽음에 기쁨을 표시(요하네스 코클라이우스에게 보내는 편지)하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시각에서 분리론자들은 교회의 적인 것이다.
그의 입장은 헨리 8세의 이혼과 수장령 선포에도 여일하다. 국왕의 총신으로서 응당 수장령을 지지하고 선서해야 하였음에도 그는 이를 거부한다. 영국 의회의 법으로서 세계 보편의 법칙을 규제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며, 교황의 지상권은 불변의 권리임을 주장한다.
“모든 그리스도교 국가가 하나의 몸을 이루는데, 그것을 구성하는 한 부분이 어떻게 그 몸 전체의 공동의 동의 없이 그 공동의 머리에서 이탈할 수 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토마스 크롬웰에게 보내는 편지)
이러한 사상의 내면적 발로가 그의 양심론이다. 신앙에 관한 문제는 개인의 양심에 속하는 사안으로 강압할 수 없다고 한다. 이 양심은 단편적이고 즉흥적인 성격이 아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내 양심은 갑자기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 문제에 대해서 오랫동안 시간을 들여서 끈기 있게 탐구하면서 형성된 것이라고 말이지.”(마거릿 로퍼에게 보내는 편지)
“그것에 대해, 내 양심은 아주 오랫동안 부지런히 노력을 바쳐서 형성된 것이므로 나 자신의 구원과 일치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고 대답했단다.”(마거릿 로퍼에게 보내는 편지)
그가 런던탑에 투옥되고 처형되기까지 일년 여 동안 그가 주고받은 편지의 기본적 화두는 바로 양심이다. 국가가, 군주가 지배할 수 있는 개인의 영역의 한계, 그것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며 이를 밝히기 거부한다는 이유로 처벌하는 행위의 부당성. 진실로 근대 이전에 이처럼 처절하고 철두철미하게 개인의 양심을 옹호하고 부당한 간섭을 배제하기 위하여 몸 바친 인물이 있었던가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다.
‘유토피아’의 저자인 르네상스 인문주의자 토마스 모어는 빙산의 일각이다. 그의 삶의 중요한 행로였던 법률가와 진실한 종교인의 관점도 그의 전모 파악에는 부족하다. 차라리 그는 인간의 고유한 가치를 인식하고 옹호한 최초의 근대적 인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의 실체는 의외로 거대하다.
○ 목차
서문
토머스 모어 서한집
1. 존 홀트에게. <런던, 1501년 11월경>.
2. 존 콜레트에게. 런던, <1504년> 10월 23일.
3. 존 콜레트에게. <런던? 1512년? 3월경>.
4. 마르턴 도르프에게. 브뤼헤, <1515년> 10월 21일.
5. 에라스뮈스에게. 런던, 1516년 2월 17일경.
6. 에라스뮈스에게. 런던, <1516년> 9월 3일.
7. 에라스뮈스에게. 런던, <1516년 9월 20일경>.
8. 에라스뮈스에게. 런던, <1516년 9월 22일>.
9. 에라스뮈스에게. 런던, <1516년> 10월 31일.
10. 커스버트 턴스톨에게. <런던 1516년 11월경>.
11. 에라스뮈스에게. <런던 1516년 12월 4일경>.
12. 에라스뮈스에게. 런던, <1516년> 12월 15일.
13. 윌리엄 워럼에게. <런던, 1517년 1월>.
14. 왕좌 재판소 판사에게. <런던, 1517년 1월>.
15. 안토니오 에게. <런던, 1517년 1월?>.
16. 커스버트 턴스톨에게. <런던, 1517년?>.
17. 딸들과 마거릿 자이지에게. <1517년?>.
18. 존 피셔에게. <1517-1518년경>.
19. 옥스퍼드 대학교에. 애빙던 <1518년> 3월 29일.
20. 윌리엄 고넬에게. 궁정에서 <1518년?> 5월 22일.
21. 윌리엄 부다에우스에게. <1518년 8월경>.
22. 마거릿 모어에게. <1518년>.
23. 마거릿 모어에게. <1518년>.
24. 에라스뮈스에게. <런던? 1518년?>.
25. 마르턴 도르프에게. <런던, 1519년>.
26. 수사에게. <1519-20년>.
27. 윌리엄 부다에우스에게. <칼레, 1520년 6월경>.
28. 윌리엄 부다에우스에게. <칼레, 1520년 6월경>.
29. 모어의 학교에. 궁정에서, <1521년> 3월 23일.
30. 존 피셔에게. <1521년>.
31. 마거릿 로퍼에게. <1521년?>.
32. 자식들과 마거릿 자이지에게. 궁정에서, <1522년?> 9월 3일.
33. 마거릿 <로퍼>에게. 궁정에서, <1522년?> 9월 11일.
34. 콘라트 고클레니우스에게. 런던, <1522년 11월경>.
35. 마거릿 로퍼에게. <우드스톡? 1523년 가을>.
36. 옥스퍼드 대학교에. 런던, <1524년> 7월 26일.
37. 울지에게. 하트퍼드 <1524년> 11월 29일.
38. 에라스뮈스에게. 그리니치, <1526년> 12월 18일.
39. 옥스퍼드 대학교에. 리치몬드, <1527년?> 3월 11일.
40. 크라네벨트에게. 칼레, <1527년> 7월 14일.
41. 요하네스 코클라이우스에게. <1528년?>.
42. 레이디 모어에게. 우드스톡, <1529년> 9월 3일.
43. 에라스뮈스에게. <첼시>, <1529년> 10월 28일.
44. 에라스뮈스에게. 첼시, 1532년 6월 14일.
45. 요하네스 코클라이우스에게. 첼시, <1532년> 6월 14일.
46. 에라스뮈스에게. 첼시, <1533년 6월?>.
47. 엘리자베스 바튼에게. 첼시, <1533년?> 화요일.
48. 존 해리스에게. 윌레스덴, 일요일 <1534년? 1월-4월>.
49. 토머스 크롬웰에게. 첼시, 2월 1일 <1533/4년>.
50. 토머스 크롬웰에게. 첼시, 1533/4년 <2월-3월>, 토요일.
51. 토머스 크롬웰에게. <1534년 3월?>.
52. 헨리 8세에게. 첼시, <1534년> 3월 5일.
53. 토머스 크롬웰에게. 첼시, <1534년> 3월 5일.
54. 마거릿 로퍼에게. <런던탑, 1534년 4월 17일경>.
55. 마거릿 로퍼에게. 런던탑, <1534년 4월-5월?>.
56. 마거릿 로퍼에게. 런던탑, 1534년 5월?.
57. 마거릿 로퍼로부터. 1534년 5월?.
58. 모든 친구들에게. 런던탑, <1534년>.
59. 앨리스 앨링턴이 마거릿 로퍼에게. 1534년 8월 17일.
60. 마거릿 로퍼가 앨리스 앨링턴에게. 1534년 8월.
61. 니콜라스 윌슨 박사에게. 런던탑, 1534년.
62. 니콜라스 윌슨 박사에게. 런던탑, 1534년.
63. 마거릿 로퍼로부터. 1534년.
64. 마거릿 로퍼에게. 런던탑, 1534년.
65. 마거릿 로퍼에게. 런던탑, 1534년.
66. 모어 부인이 헨리 8세에게. 1534년 크리스마스 무렵.
67. 레이더 씨에게. 런던탑, 1534/5년 1월 16일 토요일.
68. 마거릿 로퍼에게. 런던탑, 1535년 5월 2일 혹은 3일.
69. 모어 부인이 토머스 크롬웰에게. 1535년 5월.
70. 마거릿 로퍼에게. 런던탑, 1535년 6월 3일.
71. 안토니오 본비지에게. 런던탑, 1535년.
72. 마거릿 로퍼에게. 런던탑, 1535년 7월 5일.
토머스 모어 경의 생애
옮긴이의 말
참고 문헌
○ 저자소개 : 토머스 모어, 윌리엄 로퍼
– 저자 : 토머스 모어 (Sir Thomas More, 1478 ~ 1535)
토머스 모어 경 (Sir Thomas More, 1478년 2월 7일 ~ 1535년 7월 6일) 또는 성 토마스 모어 (라: Sanctus Thomas Morus, 영: Saint Thomas More)는 영국의 대법관이자 인문주의자이며 주저인 ‘유토피아’ (Utopia)로 인해 유토피아 사상의 창시자로 평가고 있는 인물이다.
1478년 2월 6일 런던에서 법률가의 아들로 태어나 성 앤서니 학교를 거쳐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했으나 아버지의 뜻에 따라 학교를 중퇴한 후 링컨 법학원에서 공부했다. 1501년 정식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여 법률가로서의 직업에 충실하면서도 신학, 철학, 예술, 문학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던 그는 한때 성소를 느끼고 이에 응답하고자 4년 동안 카르투지오회 수도자들의 영성 수련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평신도의 길을 선택했고 일생 동안 기도와 단식을 충실히 함으로써 하느님을 자신의 삶의 중심에 둔 참된 신앙인으로 살았다.
헨리 8세가 영국국교회의 수장이 되는 것에 반대하여 1535년 7월 6일 반역죄로 참수형에 처해진 그는 1935년 5월 20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의 저서로는 『피코 델라 미란돌라전 (傳)』 (1510년)과 『유토피아』 (1516년), 그리고 미완성인 채로 남았지만 후대 역사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리처드 3세전 (傳)』 (1543년) 등이 있다.
– 저자 : 윌리엄 로퍼
최근작 ‘영원과 하루’ 등
– 역자 : 이미애
현대 영미 소설 전공으로 서울대학교 영문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동 대학교에서 강사 및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조지프 콘래드, 제인 오스틴, 존 파울즈, 카리브 지역의 영어권 작가들에 대한 논문을 썼다. 역서로는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과 『등대로』, J. R. R. 톨킨의 『호빗』, 『반지의 제왕』(공역), 『위험천만 왕국 이야기』, 『톨킨의 그림들』, 제인 오스틴의 『설득』, 『엠마』, 조지 엘리엇의 『아담 비드』, 토머스 모어의 서한집 『영원과 하루』, 리처드 앨릭의 『빅토리아 시대의 사람들과 사상』, 폴 서루의 『세상의 끝』 등이 있다.
○ 책 속으로
모어의 편지들이 우리에게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대체로 그의 벗들이 그에 대해서 품었던 깊은 존중심 덕택이다. 예를 들어 에라스뮈스와 뷔데는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서 모어에게서 받은 편지를 출판했다. 또한 모어의 또 다른 벗으로서 메헬렌 대평의회 의원이었던 프란시스퀴스 판 크라네벨트는 모어의 편지를 다른 사람들에게서 받은 편지들과 함께 연대순으로 정리해서 보관했다. 그의 후손들은 대대로 이 편지들을 물려받았고, 1914년에 어느 후손이 이 소장품을 편집해서 출판하도록 루뱅 대학교의 두 학자에게 넘겨주었다. 1914년에 루뱅이 점령되어 약탈당하자 그 학자들 중 한 명인 드 보흐트 교수는 그 편지 꾸러미를 가지고 도피했다. 그 편지들은 1928년에 인쇄되었고 그 가운데 모어의 편지 여섯 편이 끼어 있었다. 사적 교분을 맺은 벗들이 이처럼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더라면 이 편지들 가운데 유실된 것들이 많았을 것이다. 모어가 재판과 선고를 받은 후에 그의 서류들이 국왕과 토머스 크롬웰에 의해 압류되었고, 모어가 쓴 편지의 초고들은 그 압류된 서류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어의 서신들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은 가족에게 보낸 편지다. 그가 죽은 후 그의 딸 마거릿 로퍼는 체포되고 잠시 투옥되었으며 모어의 서류를 모두 양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마거릿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편지들이 그저 사적인 것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으므로 그것들을 간직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간청했다. 후에 모어의 친지들이 에드워드 6세 치하에서, 그리고 또 다시 엘리자베스 여왕 치하에서 종교적 이유로 망명을 떠났을 때 그들은 이 편지들을 가지고 대륙으로 건너갔다. – 서문 중에서
경은 간수의 호송을 받아 런던탑을 나와 형장으로 가셨다. 형장에 이르러 단두대에 올라갈 때 계단이 흔들리며 무너질 듯이 보이자 경은 간수에게 유쾌하게 말하셨다.
“내가 무사히 올라가도록 보살펴주시게. 내려올 때는 나 혼자 해보겠네.”
그런 다음 경은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고 나서 칼잡이를 바라보며 유쾌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기운 내게. 겁내지 말고 자네의 소임을 다 하게. 내 목은 무척 짧다네. 자네의 평판에 누가 되지 않도록, 잘못 치지 않게 조심하게나.” – 본문 중에서
○ 출판사 서평
– 토머스 모어 사한집 『영원과 하루』
영국의 정치인이자 인문주의자인 토머스 모어 경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이다. 토머스 모어가 썼던 수천 통의 편지 중 현존하는 127편의 편지가 담겨 있다. 토머스 모어의 사위 윌리엄 로퍼가 쓴 이 책은 그에 관한 최초의 전기로, 이후 등장한 많은 전기들의 전거 자료로 평가되었다.
– 14~15C 지성인과의 대화, 토머스 모어 서한 모음집
성 토머스 모어는 14~15세기 격동의 시기에 종교와 양심의 자유를 선언하다 순교한 인물이다. 또한 모어는 생전에, 에라스뮈스와 기욤 뷔데 등 당대 최고의 지성인들과 친밀한 교우관계를 맺으며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중 현재 우리가 자유롭게 볼 수 있도록 전해지는 편지는 아쉽게도 127편뿐이다.
「영원과 하루」에서는 남아있는 편지들 중 선별된 70여 편을 소개한다.
선별된 편지들은 모어가 20대 초반 젊은 나이에 쓴 밝고 정감적인 편지에서부터 57세 나이로 처형되기 전날까지의 자기고백으로 이어져 더욱 관심을 모은다.
특히 각각의 편지를 통해 당대 신학자들의 공허한 신학 논쟁과 권위주의에 대한 비판, 수도자들의 무지몽매한 파벌주의에 대한 비판, 영혼의 미덕을 가르치는 인문학의 필요성에 대한 역설 등을 비롯해 모어의 휴머니즘을 폭넓게 들여다볼 수 있다.
이 책은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 토머스 모어의 서한들에 이어 전기도 한데 엮어 선보인다. 뒷부분에 실린 ‘토머스 모어의 생애’는 그의 사위인 윌리엄 로퍼가 쓴 세계 최초의 전기로, 이후 등장한 많은 전기들의 전거 자료이기도 하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