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예수의 증언
E. 케제만 / 대한기독교서회 / 1982.3.20
본서는 요한의 신학 문제를 요한복음 17장을 중심으로 하여 주제별로 압축, 논의한 책이다.
저자 에른스트 케제만 (Ernst Käsemann, 1906년 7월 12일 ~ 1998년 2월 17일)은 루터교 신학자이자 신약학 교수로 마인츠 (1946~1951), 괴팅겐 (1951~1959), 튀빙겐 (1959~1971) 대학교에서 가르쳤다. 어네스트 푹스와 더불어 신해석학파이다.
○ 목차
문제성
그리스도의 영광
말씀 아래 있는 공동체
그리스도인의 하나됨
결론
○ 저자소개 : 에른스트 케제만 (Ernst Käsemann, 1906 ~ 1998)
에른스트 케제만 (Ernst Käsemann, 1906년 7월 12일 ~ 1998년 2월 17일)은 루터교 신학자이자 신약학 교수로 마인츠 (1946~1951), 괴팅겐 (1951~1959), 튀빙겐 (1959~1971) 대학교에서 가르쳤다. 어네스트 푹스와 더불어 신해석학파이다.
1931년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신약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학위 논문은 사도 바울의 교회론에 대한 것으로, 루돌프 불트만의 지도 아래 작성되었다. 케제만은 불트만 학파의 일원이며, 정치적으로는 좌파 학생운동의 중심인물로 널리 알려졌다. 케제만은 1933년 고백교회 운동에 동참했다.
불트만의 제자들은 역사적 예수와 부활 이후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에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역사적 예수에 대해 새로운 질문을 제기했다. 에른스트 케제만은 1953년 마르부르크에서 ‘역사적 예수의 문제’라는 강연을 통해, 역사적 예수 연구 제 3기가 시작되는 길을 열었다. 그는 스승 불트만에 반대하여 초대 교회가 예수의 생애에 대해 정말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예수의 생애에 대한 내러티브들을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슈바이처의 비판이후 한동안 역사적 예수 탐구는 불가능한 작업으로 인식되었다. 가장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예수의 이야기를 담고있는 가장 중요한 자료인 성경자체의 신빙성에 대해 회의적인 분위기가 학자들을 지배하고 있었고, 그 외에는 달리 연구할 자료가 없었기에 이 시기에 성경학자들은 고대 근동지방의 설화나 신화를 도입해서 이런 저런 이론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에른스트 케제만은 스승인 불트만과 다르게 생각하고, 그의 논문 “The Problem of the Historical Jesus” (1954)에서 역사적 예수의 탐구가 필요하고 유용하다고 주장하면서, 그 세가지 이유를 제시하였는데, 그것은 (1)구원 사건의 중요성, (2)시간과 공간에 오신 하나님의 성육신, 그리고 (3)예수와 우리의 연속성이다.
두 번째 역사적 예수 탐구 (흔히 ‘New Quest’라고 불렸다)는 신약의 신빙성에 대한 긍정에서 비롯되는데, 불트만의 수제자였던 에른스트 케제만 (Ernst Kasemann)은 1950년대에 자신의 스승의 견해에 반해서 성경 기록이 역사적 연구를 수행할만한 내용을 담고있다는 주장으로 다시한번 기독교의 기원에 대한 논의에 불을 지폈다.
케제만의 ‘역사적 예수의 문제’라는 강연을 계기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재발견하고자 하는 후기 불트만학파의 시대가 시작된다 (케제만, 보른캄, 에른스트 폭스, 에빌링, 콘첼만, 막센, 로빈슨, 브라운 등).
케제만의 저서로 ‘신의와 성예전’ (전경연 역, 대한기독교서회), ‘역사적 예수 연구’ (강한표 역, 대한기독교서회), ‘예수의 증언’ (박정진 역, 대한기독교서회), ‘예수는 자유를 의미한다’ (전경영 역, 대한기독교출판사), ‘바울신학의 주제’ (대한기독교서회) 등이 있다.
– 역자 : 박정진
○ 독자의 평
비전공의 평신도가 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어쩌면 무모한 일일지 모른다. 또는 지나친 교만일지 모른다.
기존의 정해진 교리의 틀안에서 축적되어온 신학적 지식에 살을 더하고 배경을 알고 하는 정도의 공부는 분명 도움이 된다.
성경의 참 뜻을 헤아리는 안목을 깊게 만들 수 잇다는 점에서 그렇다.
동시에 신학을 사회학적, 철학적으로 논증하는 공부도 도움이 된다. 예수 정신을 좀더 심층적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반면 교리 논쟁이나 성경해석의 논쟁 등으로 들어가는 것은 위험하다.
내용이 어려운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확증될 수 없는 학문적 변증의 구렁텅이 속으로 들어가 아무 것도 신뢰할 수 없다는 부정의 함정에 이르기가 쉽기 때문이다.
이 책이 그렇다. 내 얇은 지식으로는 저자가 말하는 ‘요한복음’의 모순을 수용하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요한복음에 대한 대책없는 의심만 커질 것 같아 중간쯤 읽다 덮는다.
나중에 내가 이러한 변증들을 감당할 만한 신학적 토대가 생겼을 때 마저 다시 읽기로 한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