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우리는 모두 식인종이다
레비스트로스 / 아르테(arte) / 2015.9.30
- 거장 레비 스트로스의 시선으로 읽는 이 시대의 뜨거운 쟁점들! 20세기를 대표하는 석학이자 구조주의의 아버지,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의 유작 『우리는 모두 식인종이다』
장장 11년에 걸쳐 이탈리아 일간지 《라 레푸블리카 La Repubblica》에 기고한 글을 모아 발간된 책으로, 19세기를 관통한 서구 식민지배의 산실인 ‘문명(선)과 야만(악)의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에 종지부를 찍은 레비 스트로스의 연구가 망라된 역작이다.
시대의 뜨거운 쟁점을 담은 16 가지의 논쟁과 그에 대한 시평 앞에는 1952년에 발표한,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삶과 죽음의 역학관계로 풀어낸 「산타클로스의 처형」을 실어 인류학적 면에서 벗어남이 없도록 섬세하게 배치했다. 이른바 문명사회의 사례와 원시사회의 사례들을 두루 고찰한 저자의 메시지는 명징하다.
복잡한 사회와 ‘원시적이거나 태곳적’이라고 부당하게 일컬어지는 사회 간에는 일반적인 생각처럼 큰 차이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하나의 문화가 권위를 앞세워 다른 문화를 재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을 거부한 작가의 오랜 철학적 신념뿐만 아니라 “멀리 떨어진 것이 가까운 것을 밝혀주지만, 가까운 것도 멀리 떨어진 것을 밝혀줄 수 있다”라는 작가의 메시지를 볼 수 있다.
11편은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사회현상을 분석한 사례이며, 나머지 5편은 이론적인 접근에 가깝다. 저자는 사례 분석에서 소의 골분을 소에게 먹이고 그렇게 사육한 소를 도축해 먹는 인간은 문자 그대로의 식인종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느냐고 의문을 제기한다. 이론에 대한 접근에 가까운 5편의 글도 완전히 이론에만 집착하지는 않으며, 특히 구조주의 비판에 대한 응답으로 찰흙과 항문에 관련된 신화가 제시된다.
이른바 문명사회의 사례와 원시사회의 사례들을 두루 고찰한 저자의 메시지는 명징하다. 복잡한 사회와 ‘원시적이거나 태곳적’이라고 부당하게 일컬어지는 사회 간에는 일반적인 생각처럼 큰 차이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하나의 문화가 권위를 앞세워 다른 문화를 재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을 거부한 작가의 오랜 철학적 신념이 다시 한 번 드러나는 지점이다.
○ 목차
서문 _ 모리스 올랑데
산타클로스의 처형, 1952년
세상이 거꾸로 뒤집힌다면
발전에는 하나의 유형만이 존재하는 것일까?
여성 할례와 대리출산
『스라소니 이야기』
민족학자의 보석
예술가의 초상
몽테뉴와 아메리카 대륙
신화적 사고와 과학적 사고
우리는 모두 식인종이다
오귀스트 콩트와 이탈리아
푸생의 그림에 담긴 주제에 대한 다양한 해석
여성과 사회의 기원
‘미친 소’ 파동의 교훈
외삼촌의 귀환
새로운 신화를 통한 증명
순환론: 비코의 뒤를 쫓아서
○ 저자소개 :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언어학 모델을 인간 사회·문화 연구에 이식한 구조주의 방법론을 통해 20세기 후반부 서구 사상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프랑스의 인류학자이다. 파리대학에서 법학과 철학을 공부했으며, 사회주의 정당인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의 대학생 조직에 적극 참여하기도 했다. 1931년 철학 교수자격시험을 통과한 뒤 교편을 잡았으나, 자신이 가르치는 학문의 지적 무미건조함에 대한 회의와 로버트 로위의 『원시사회』(1919)와의 우연한 만남이 계기가 되어 민족학으로 방향을 틀었다. 1934년 뒤르켐과 모스의 동료였던 셀레스탱 부글레의 추천으로 브라질 상파울루대학의 사회학 교수가 되었다. 1935~6년과 1938년 두 차례 걸쳐 브라질의 카두베오족, 보로로족, 남비콰라족, 투피-카와히브족, 문데족 등을 방문 조사하였으며, 이때의 경험은 훗날 그에게 커다란 대중적 명성을 가져다준 『슬픈 열대』(1955)의 바탕이 된다. 1939년 프랑스로 돌아왔으나 1941년 유대인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 뉴욕 신사회조사연구원에서 연구와 강의를 병행하면서 다양한 국적의 지식인들과 폭넓게 교류하였다. 특히 러시아 태생의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과의 만남은 구조인류학의 탄생에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구조주의를 모색하고 실험하던 이른 시기의 논문들은 뒤에 『구조인류학』(1958)으로 묶여 출판되었다. 1949년 박사학위 논문이자 구조인류학의 첫 번째 ‘대작’인 『친족관계의 기본구조』(1949)를 출간했다. 1950년에는 『마르셀 모스 저작집 서문』을 작성하는 한편 과거 모스가 재직했던 고등실습연구원 종교학 분과 교수가 됨으로써 모스의 진정한 계승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메를로퐁티가 이러한 지적 계보를 “모스에서 레비스트로스에게로” (1959)라는 논문에서 확인한 그해, 레비스트로스는 역시 모스의 길을 따라 콜레주 드 프랑스의 사회인류학 교수로 선출된다. 『오늘날의 토테미즘』(1962), 『야생의 사고』(1962)를 쓴 뒤 아메리카 원주민의 신화 연구에 매진, 4권의 신화학 연작─『날 것과 익힌 것』(1964), 『꿀에서 재까지』(1967), 『식사예절의 기원』(1968), 『벌거벗은 인간』(1971)─을 펴냈다. 그밖에 『멀리서 보는 시선』(1983), 『질투하는 도공』(1985), 『보다 읽다 듣다』(1993) 등의 저서가 있다.접기
– 역자: 강주헌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프랑스 브장송 대학에서 수학한 후 한국외국어대학교와 건국대학교 등에서 언어학을 강의했으며, 뛰어난 영어와 불어 번역으로 2003년 ‘올해의 출판인 특별상’을 수상했다. 옮긴 책으로는 《습관의 힘》 《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행복을 풀다》 《총 균 쇠》 《12가지 인생의 법칙》 등 100여 권이 있으며, 지은 책으로는 《원서, 읽(힌)다》 《기획에는 국경도 없다》 《강주헌의 영어번역 테크닉》 등이 있다.
○ 책 속으로
P.14~15, 이번에 그들은 디종과 곳곳에서 위협받는 산타클로스의 보호자가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산타클로스가 무종교인들의 상징이 된 셈이다. 이번 사건에서는 교회가 정직함과 진실을 갈구하는 비판적 태도를 취한 반면에, 합리주의자들은 미신의 수호자로 행동하는 것처럼 모든 일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역할의 전도에서 이 단순한 행동에 훨씬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프랑스에서는 물론이고 다른 나라에서도 풍습과 믿음이 급속히 변해가고 있다는 징후들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민속학자가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어떤 관습, 심지어 어떤 종교 의식조차 급작스레 확장된 사례를 관찰할 기회를 얻는 게 흔히 있는 아니다.
P.65~66, 민족학자를 공공의 장에 몰아넣는 또 다른 분야가 있다. 새로운 대리출산 방법에 대한 의견을 여러 정부에 제시하려고 구성된 위원회에 참석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이 있는 민족학자가 적지 않을 것이다. 생물학이 발전하면서 대리출산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기 때문이다. 부부 모두, 혹은 부부 중 한 명이 불임일 때, 그런 부부에게 아기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이 제안된다. 인공수정, 난자 공여, 대리모 출산, 남편이나 다른 남자의 정자와 부인이나 다른 여자의 난자를 이용한 시험관 수정 등이다. 이 모든 방법을 허용해야만 할까? 어떤 방법은 허용하고 어떤 방법은 배제해야 할까? 그렇다면 어떤 기준에서 허용 여부를 결정해야 할까?
유럽에서 대리출산과 관련된 법이 규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전대미문의 법적인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현대사회에서도 혈통은 생물학적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이 사회적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생각보다 우세하다. 영국 법에는 사회적 부자 관계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따라서 정자 공여자는 합법적으로 자식에 대한 권리를 요구할 수 있고,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자식을 부양해야 한다. 프랑스의 경우, 나폴레옹 법전에 따르면 어머니의 남편이 아이의 합법적인 아버지였다. 따라서 나폴레옹 법전은 생물학적 부자 관계보다 사회적 부자 관계를 우선시했다.
(중략)
그런데 1972년의 법이 이 격언을 부인하며 친자 관계 확인 소송을 허용했다. 따라서 이제는 사회적 관계와 생물학적 관계 중 어느 쪽이 우선하는지 단언할 수 없다. 법적인 아버지가 아이를 낳게 해준 사람이 아니고, 어머니가 임신이 진행되는 자궁이나 난자를 제공하지 않은 경우, 즉 대리출산에서 제기되는 문제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P.128, 식인 풍습이 과거와 현재에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하는 학자들은, 식인 풍습이란 개념이 야만인과 문명인 간의 차이를 과장하려는 목적에서 조작해낸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양심적인 존재라고 자처하고 신앙에서 우리의 우월성을 확고히 하려고, 가증스런 풍습과 신앙을 야만인들의 것으로 돌려버린다.
이런 경향을 뒤집어 식인 풍습과 관련된 현상을 확대해서 생각해보자. 시간과 장소에 따라 무척 다양한 양상과 목적을 띠었지만, 인간에서 떼어낸 몸의 부분이나 물질을 다른 인간의 몸에 의도적으로 넣으려는 시도는 언제나 문제였다. 따라서 사회에서 축출되었던 식인 풍습이란 개념이 앞으로 상당히 흔한 현상으로 나타날 것이다. 장 자크 루소는 우리를 타인과 동일시하려는 감정에서 사회적 삶의 기원을 찾았다. 결국 타인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여전히 타인을 먹는 것이다.
P.164~165, 인간이 의식하든 않든 간에 살아 있는 생명체를 죽여서 영양을 취한다는 사실이 인간에게 철학적인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조금도 놀랍지 않다. 따라서 그런 철학적인 문제를 모든 사회가 나름대로 해결하려고 애썼다. 『구약성서』는 인간의 육식을 타락의 간접적인 결과로 해석한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채소와 열매만을 먹었다 (「창세기」1장 29절). 노아 이후에야 인간은 육식동물이 되었다 (「창세기」9장 3절). 인간과 다른 동물들 간의 이런 단절이 바벨탑 이야기 직전에 있었다는 게 의미심장하다. 바벨탑 사건은 인간들 간의 단절이기 때문에, 인간들 간의 단절은 앞서 있었던 인간과 다른 동물들 간의 단절에서 비롯된 결과이거나, 그런 단절의 한 특수한 사례쯤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생각하면 육식은 어떤 의미에서 채식의 보충이 된다. 반면에 문자가 없는 일부 종족은 육식이 식인 풍습을 어렵게 약화시킨 형태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사냥꾼 (혹은 어부)과 사냥감 간의 관계를 친척 관계에 근거해서 생각함으로써 그 관계를 인격화한다. 예컨대 결혼이나 더 직접적인 인연을 통해 맺어진 친척 관계, 혹은 부부 관계로 생각한다 (프랑스어도 그렇지만 세계의 모든 언어가 은어적 표현에서 먹는 행위와 성교 행위를 동일시한다). 따라서 사냥과 고기잡이는 같은 종족 내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식인 풍습으로 여긴다.
P.170~171, 광우병만이 우리에게 육류 섭취를 멀리하라고 경고하는 유일한 변수는 아니다. 앞으로 한 세기 내에 인구가 십중팔구 두 배로 증가할 세계에서, 가축들은 인간에게 무서운 경쟁자가 될 것이다. 현재에도 미국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3분의 2가 가축을 먹이는 데 사용된다.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가축이 생존 기간에 소비하는 칼로리 양이 살코기의 형태로 우리에게 돌려주는 칼로리 양보다 훨씬 많다는 것이다.
(중략)
인구는 증가하는 반면에, 침식과 도시화의 영향으로 경작 가능한 토지는 줄어들고, 석유 매장량과 수자원도 감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전문가들은 인간이 완전히 채식주의자가 되면 현재의 경작 면적으로도 두 배의 인구를 먹일 수 있다고 추정한다.
서구 사회가 식습관을 바꾸기 시작한 것처럼, 육류 소비량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이런 상황에서 광우병 파동은 육류 소비를 더더욱 억제하며 현재 진행 중인 변화를 가속화할 것이다. 또한 광우병 파동은 이런 변화에, 우리 인간이 자연계의 질서를 위반한 대가로 치르는 막연한 감정에서 비롯되는 신비로운 면을 더할 것이다.
○ 출판사 서평
- 서양 우월주의에 제동을 건 구조주의 인류학의 거장 레비 스트로스, 다양한 시대의 관심사를 담아낸 위대한 유작!
20세기를 대표하는 석학이자 구조주의의 아버지,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의 유작이 아르테에서 출간되었다. 장장 11년에 걸쳐 이탈리아 일간지 『라 레푸블리카 La Repubblica』에 기고한 글을 모아 발간된 이 책은 19세기를 관통한 서구 식민지배의 산실인 ‘문명(선)과 야만(악)의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에 종지부를 찍은 레비 스트로스의 연구가 망라된 역작이다.
종교 문제, ‘광우병’ 파동, 여성의 지위와 관련된 문제, 문화권마다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는 식인 풍습, 다민족 국가에서 벌어지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의 편견…. 『우리는 모두 식인종이다』에 실린 논쟁들은 폭넓으면서도 자못 도전적이다. 이같이 시대의 뜨거운 쟁점을 담은 열여섯 가지의 논쟁과 그에 대한 시평 앞에는 1952년에 발표한,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삶과 죽음의 역학관계로 풀어낸 「산타클로스의 처형」을 실어 인류학적 면에서 벗어남이 없도록 섬세하게 배치했다. 이른바 문명사회의 사례와 원시사회의 사례들을 두루 고찰한 저자의 메시지는 명징하다. 복잡한 사회와 ‘원시적이거나 태곳적’이라고 부당하게 일컬어지는 사회 간에는 일반적인 생각처럼 큰 차이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하나의 문화가 권위를 앞세워 다른 문화를 재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을 거부한 작가의 오랜 철학적 신념뿐만 아니라 “멀리 떨어진 것이 가까운 것을 밝혀주지만, 가까운 것도 멀리 떨어진 것을 밝혀줄 수 있다”라는 작가의 메시지가 다시 한 번 드러나는 지점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책에 실린 시평들이 20세기 후반에 쓰였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쟁점들은 2015년 현재에도 여전히 뜨겁게 전 세계를 관통하고 있다. 시대를 꿰뚫는 위대한 인류학자의 통찰력이 우리가 사는 21세기 문화비평의 발판이 되는 순간이다. 작가의 오랜 벗이자 프랑스 철학자인 카트린 클레망은 작가 사후 그를 추모하며 이 같은 평을 남겼다. “레비 스트로스가 원시적 사유는 원시인의 사유가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원시적 사유라고 설명할 때 원시인과 우리 사이에 어떤 정신적 기능의 차이도 없어졌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지적 혁명이다.” 이 책에 대한 보다 자세한 소개는 이 책의 옮긴이이자 불문학자이며 촘스키 등 여러 학자들의 저서를 두루 연구하고 옮긴 번역가 강주헌의 글로 대신한다.
- 야만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문명이란 무엇인가? _ 강주헌
‘야만적’이란 것은 과연 무엇일까? 테크놀로지의 수준을 기준으로 한다면, 현재보다 과거는 분명히 야만적이다. 삶의 방식에서는 야만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지금처럼 분열된 가족 구조가 과거의 대가족 구조보다 문명화되고 덜 야만적인 것일까? 인간의 삶에서는 기준을 정할 수 없는 것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른바 자기민족주의에 사로잡혀 “자신의 관습에 속하지 않은 것은 야만적인 것” (몽테뉴)이라고 생각한다. 결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다름의 문제인 것까지 선악을 따지려 한다. 이런 습성을 극복하는 방법론의 하나로 레비 스트로스는 구조주의적 분석을 제시한다. 요컨대 사회현상은 그 현상이 해당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가 1989년부터 2000년까지 이탈리아 일간지 『라 레푸블리카 La Repubblica』에 기고한 16편의 글을 새롭게 편찬한 것이지만, 1952년 『현대』에 발표한 「산타클로스의 처형」을 첫머리에 소개하는 형식을 취했다. 이처럼 40년 전에 쓴 글을 첫머리에 배치한 것에서도 ‘구조주의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라는 레비 스트로스의 의도가 읽혀지는 듯하다.
이 책에서 소개되는 16편도 흥미롭다. 11편은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사회현상을 분석한 사례이며, 나머지 5편은 이론적인 접근에 가깝다. 특히 사례 분석에서 ‘식인종’과 ‘미친 소’를 관련짓고, 소의 골분을 소에게 먹이고 그렇게 사육한 소를 도축해 먹는 인간은 문자 그대로의 식인종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느냐고 제기하는 의문에서 “우리는 모두 식인종”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마야문명을 대상으로 ‘발전에는 하나의 유형만이 존재하는 것일까?’라는 문제를 분석해가는 과정도 무척 흥미롭다. 수렵과 채집 종족들은 농업을 몰랐기 때문에 그런 삶에 만족했던 걸까? 생산성을 앞세운 삶 자체를 멀리하고 싶었던 것일까? 생산성을 추구하는 원칙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만의 독점물은 아니었다는 게 마야문명 분석에서 확인된다. 결국 “멀리 떨어진 것이 가까운 것을 밝혀주지만, 가까운 것도 멀리 떨어진 것을 밝혀줄 수 있다”라는 레비 스트로스의 주장이 다시 증명되는 셈이다.
이론에 대한 접근에 가까운 5편의 글 (신화적 사고와 과학적 사고, 몽테뉴와 아메리카 대륙, 오귀스트 콩트와 이탈리아, 순환론: 비코, 새로운 신화를 통한 증명)도 완전히 이론에만 집착하지는 않는다. 여기에서도 흥미로운 사례가 소개된다. 특히 구조주의 비판에 대한 응답으로 제시되는 찰흙과 항문에 관련된 신화는 무척 흥미롭다.
구조주의가 구시대적인 냄새를 풍긴다며,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현실 세계를 제대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고 평가하는 이론가들이 많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을 번역한 나 자신도 페르디낭 드 소쉬르를 읽으며 오염되지 않은 본래의 구조주의를 배운 까닭에, 이 글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구조주의의 설득력을 다시 한 번 실감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