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우리 사이
에마뉘엘 레비나스, 엠마누엘 레비나스 / 그린비 / 2019.4.1
1951년부터 1988년까지의 레비나스의 글과 대담을 연대순으로 모아놓은 책이다. ‘전체성과 무한’ 이전과 ‘존재와 다르게 또는 존재 사건을 넘어’ 이후의 큰 주제들 즉 종교, 새로운 합리성, 예수 그리스도의 신-인간 즉 성육신 사상, 메시아주의, 고통, 정의, 사랑, 비지향적 의식, 문화, 죽음, 인권, 유토피아 등을 깊이 파고들고 있어 레비나스의 사상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 목차
지은이 서문
존재론은 기초적인 것인가?
자아와 전체성
레비 브륄과 현대철학
신-인간?
새로운 합리성: 가브리엘 마르셀에 대해
해석학과 너머
철학과 깨어남
무의미한 고통
철학, 정의와 사랑
비지향적 의식
일자에서 타자로, 초월과 시간
통시성과 재현
문화의 관념에 대한 철학적 규정
유일성에 대해
‘누군가를 위한 죽음’
인권과 선의지
타자에-대한-사유에 관한 대화
우리 안에 있는 무한의 관념에 대해
『전체성과 무한』 독일어판 서문
타자, 유토피아와 정의
옮긴이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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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소개 : 에마뉘엘 레비나스, 엠마누엘 레비나스 (Emmanuel Levinas, 1906 ~ 1995)
에마뉘엘 레비나스 (Emmanuel Levinas)는 리투아니아에서 유태인 부모 아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3년 프랑스로 유학해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수학했고, 1928~1929년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후설과 하이데거로부터 현상학을 배운 뒤, 1930년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후설 현상학에서의 직관 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39년 프랑스 군인으로 2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어 종전과 함께 풀려났다. 1945년부터 파리의 유대인 학교(ENIO) 교장으로 오랫동안 일했다. 이 무렵의 저작으로는 『시간과 타자』(1947), 『존재에서 존재자로』(1947), 『후설과 하이데거와 함께 존재를 찾아서』(1949) 등이 있다.
1961년 첫번째 주저라 할 수 있는 『전체성과 무한』을 펴낸 이후 레비나스는 독자성을 지닌 철학자로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1974년에는 그의 두 번째 주저 격인 『존재와 달리 또는 존재성을 넘어』가 출판되었다. 그 밖의 중요한 저작들로는 『어려운 자유』(1963), 『관념에게 오는 신에 대해』(1982), 『주체 바깥』(1987), 『우리 사이』(1991) 등이 있다. 레비나스는 기존의 서양 철학을 자기중심적 지배를 확장하려 한 존재론이라고 비판하고 타자에 대한 책임을 우선시하는 윤리학을 제1철학으로 내세운다. 그는 1964년 푸아티에 대학에서 강의하기 시작하여 1967년 낭테르 대학 교수를 거쳐 1973년에서 1976년까지 소르본 대학 교수를 지냈다. 교수직을 은퇴한 후에도 강연과 집필 활동을 계속하다가 1995년 성탄절에 눈을 감는다.
– 역자 : 김성호
한신대학교 신학과 및 동 대학원(Th.M.)을 졸업하고 성공회대학교에서 손규태 명예교수의 지도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번역한 책으로는 『엠마누엘 레비나스: 타자를 향한 욕망』, 『존재한다는 것은 옳은가?: 레비나스와의 대담』(근간), 『성스러움에서 거룩으로: 다섯 편의 새로운 탈무드 강해』(근간)가 있다.
○ 책속에서
P.8
나는 존재가 말하자면 존재의 과정이나 존재 사건 또는 존재의 모험으로 암시되고 이해되는 그 말의 동사적 의미에서 존재로부터 출발할 것이다. 주목할 만한 모험! 존재 사건은 존재에 대한 염려[배려]에 있고, 존재 사건은 그와 같이 ‘본질적으로’ 유한하고 존재에 대한 염려에 완전히 흡수된 존재의 약동에만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존재 사건에서 오직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존재 자체다. 존재로서 존재한다는 것[존재한다는 것 그 자체]은 처음부터 존재를 염려하는 것[존재에 몰두하는 것]이다. 마치 존재가 여기서 존재를 염려하지 않고 ? 존재하는 동안 ? 여전히 있기 위해 어떤 긴장 완화 또는 어떤 ‘진정제’가 이미 필요한 것처럼.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존재에 대한 고집이다.
P.15
대철학을 통한 존재론의 재개에는 존재 일반에 대한 인식 ? 또는 기초 존재론 ? 이, 인식하는 정신을 위해 사실의 상황을 전제한다는 특수성이 있다. 시간의 우연성들로부터 해방된 이성 ? 관념들과 함께 영원히 공존하는 영혼 ? 은 자기를 모르거나 자기를 망각하는 이성, 소박한 이성이 자기 자신에 대해 갖는 이미지다. 소위 본래적 존재론은 시간적 실존의 현사실성과 일치한다. 존재를 존재로서 이해한다는 것은 이 세상(ici-bas)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이 그것이 강제하는 시련들을 통해 영혼을 높이고 정화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이 이 영혼으로 하여금 존재에 대한 수용성을 얻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의 진보만이 존재 사유가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들 그런 역사를 이 세상이 여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은 그것이 필요로 하는 고행으로부터도 그것이 낳는 문명으로부터도 자기의 존재론적 특권을 갖지 않는다. 이미 존재의 시간적 염려[배려]에서 존재 이해가 표현된다. 존재론은 인간의 조건에 대한 인간의 승리에서가 아니라 그런 조건 속에서 걱정하는 긴장 그 자체에서 확립된다.
P.33~34
본능의 내적 체계는 죽음 속에서 그 체계를 전복시키게 하는 전적으로 동화할 수 없는 장애물과 부딪칠 수 있는 것처럼 외부성과 부딪칠 수 있다. 죽음은 이런 의미에서 철저한 초월일 것이다. 그러나 외부성은 본능에 의미를 가질 수 없는데, 왜냐하면 외부성이 체계로 진입하는 것은 생명력 있는 의식 그 자체의 소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본능과 외부성의 관계는 지식이 아니라 죽음이다. 사는 존재는 죽음을 통해 전체성으로 들어가고 더는 아무것도 사유하지 않는다. 사유하는 동안 전체성 안에 있는 존재는 전체성에 흡수되지 않는다. 존재는 전체성과의 관계 속에 존재하지만 여기서 전체성과 분리된 채 있고, 곧 자아다.
P.43
종교의 위기는 우리 자신과 신을 분리시킬 수 없고 사랑의 대화 바깥에 남아 있는 모든 사람을 망각할 수 없음에서 생긴다. 참된 대화는 다른 곳에 있다. 우리는 물론 신과의 분리를 전체성을 포섭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지만, 이 주장에 신비적이고 성례전적 의미를 주지 않는다면, 제3자를 포함하는 사회의 불가피한 필연성으로부터 신과 신에 대한 예배라는 개념을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이것이 결코 시도되지 않았다는 것은 불확실하다). 그렇게 되면 신은 사랑의 배타적 친밀감 속에서 나의 상관자로 결코 나타나지 않을 것이고 세계가 빠질 현존으로 그리고 용서의 무한한 샘이 솟아나올 현존으로 결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 출판사 서평
– ‘존재의 고집’으로부터 ‘타자에 대한 책임’으로 나아가는 순수하고 거룩한 가능성!
『우리 사이: 타자 사유에 관한 에세이』는 레비나스가 죽기 4년 전인 1991년에 출판한 글 모음집으로, 1951년부터 1988년까지의 레비나스의 글과 대담을 연대순으로 모아놓은 책이다. 전체성과 무한』과 『존재와 다르게 또는 존재사건을 넘어』의 시기를 포함하여 『전체성과 무한』 이전과 『존재와 다르게 또는 존재 사건을 넘어』 이후에 레비나스의 사상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 존재론 너머의 윤리
『우리 사이』에서는 『전체성과 무한』과 『존재와 다르게 또는 존재 사건을 넘어』 이후의 큰 주제들 즉 종교, 새로운 합리성, 예수 그리스도의 신-인간 즉 성육신 사상, 메시아주의, 고통, 정의, 사랑, 비지향적 의식, 문화, 죽음, 인권, 유토피아 등을 깊이 파고들고 있다.
이 모든 주제를 관통하는 것은 존재론 너머의 윤리다. 그러나 레비나스가 『전체성과 무한』 독일어판 서문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그는 윤리와 정의를 구별하지 않고 사용한다. 우리가 윤리와 정의를 구별하는 습성에 젖어있다면 이것이 레비나스 독해를 방해할 것이다.
레비나스가 사용하는 윤리는 “인간적인 것으로서의 인간성”이고 “인간이 자기보다 타자에게 우선권을 줄 가능성”이다. 예컨대, 성서에서 동생 아벨을 죽인 형 가인이 유지한 입장, 즉 나는 나이고 그는 그이다, 라는 존재론적 분리에 결핍된 것이 바로 윤리다. 레비나스는 윤리를 이렇게 정의한다.
“윤리는 자아를 통한 자아의 주권의 자리 없음에서, 가증스러운 자아의 양태에서 의미하지만 또한 어쩌면 영혼의 정신성 그 자체, 그리고 확실히 존재의 의미 곧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라는 존재의 부름에 대한 물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윤리는 무조건적이고 심지어 논리적으로 분간할 수 없는 동일성의 절정 곧 모든 기준 너머에 있는 자율의 절정에서 나로 불리는 동일성의 애매성을 통해 그러나 바로 이 무조건적인 동일성의 절정에서 또한 자기가 가증스러운 자아임을 고백할 수 있는 동일성의 애매성을 통해 의미한다.”(본문 226쪽)
이 윤리 또는 윤리적 관계가 후설과 하이데거에게 중심적 입장은 아니었다. 레비나스는 후설에게서 현존, 현재, 재현의 특권을 발견하면서 지향성을 이론적 지식, 객관화하고 주제화하는 지식으로 비판한다. 레비나스에게서 지향적 의식은 존재 속에서 존재자들의 존재가 펼쳐지고 모이고 드러나는 무대 위에서의 적극적 지배이다. 레비나스는 지식과 지배와 함께 정립되는 존재 안에서의 정립의 정의 (justice) 그 자체인 지향적 의식 대신에 비지향적 의식, 즉 처음부터 수동성인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의식을 내세운다. 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의식이 바로 내가 되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나로서의 나의 존재에 대한 긍정 속에서 나의 존재할 권리를 책임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또한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의 현존재의 존재론과 공동존재를 비판한다.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결국 존재의 부름과 자기 존재의 몸짓, 자기 존재 사건의 의무가 있는 존재 일반의 구조다. 반대로 레비나스의 경우 타인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 타자를 위한 죽음은 유한성 그 자체로 인해 자기의 유한성에 의해 움직이는 죽음을-향한-존재에 앞서고 초월한다. 그리고 하이데거의 공동존재 (miteinandersein)는 세계 내 현존의 한 순간일 뿐이다. 공동존재에서 함께(mit)는 늘 옆에 있음이지 얼굴은 아닌 것이다.
– ‘우리-사이’를 세우는 ‘타자를-위함’이라는 초월
레비나스의 사상에서 자주 언급되는 얼굴은 눈 색깔, 코의 형태, 뺨의 불그스레함 따위가 아니라 신의 말이 울려 퍼지는 방식이다. 신 (무한)의 말로 격상되는 얼굴과의 관계는 초상화와 같은 조형적 형태가 아니라 처음에 타인이 나와 무슨 관계인지를 묻지 않는 비대칭적 관계이고, 절대적으로 약하고, 벌거벗은 것과의 관계이며, 극도의 외로움을 겪는 것과의 관계다.
여기서 우리는 타인의 고통과 마주한다. 레비나스에게 타인의 고통은 무익하고 헛된 것이다. 반대로 타인의 정당화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한 내 안의 정당한 고통은 긍정된다. 그렇다면 레비나스의 사상은 대담자의 말에 동의한 “십자가의 광기”다. 고통과 관련하여 종교의 위기는 사랑의 대화 바깥에 남아 있는 모든 제3자들을 망각하는 것에서 생긴다. 이것은 종교가 역설적으로 사랑에 무관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레비나스는 가브리엘 마르셀이 말하는 사랑을 이렇게 번역한다. 즉 사랑은 너로서의 타인에 대한 환대, 차이 (무관심하지-않음)를 억압하지 않고 동일자에서 타자로 가는 말함, 이방인을 통한 나의 깨어남, 조국이 없는 무국적자를 통한 나의 깨어남, 이웃을 통한 나의 깨어남. 자기에 대한 반성도 아니고 보편화도 아닌 깨어남, 먹이고 입혀야 할 타인에 대한 책임, 타인에 대한 나의 대속, 고통에 대한 나의 속죄다.
이 사랑과 타인에 대한 책임은 예수 그리스도인 신-인간 즉 성육신 사상에 대한 논의에서도 반복된다. 레비나스는 이 문제를 두 가지로 압축한다. 첫째, 신-인간 사상은 신의 낮아짐, 곧 “가느다란 침묵의 목소리처럼 자기의 비천함에서 나타나는 진리의 관념, 곧 박해받은 진리의 관념”으로서 “초월의 가능한 유일한 형태”다. 성육신 곧 내재성을 돌파하는 초월과 열림은,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예수처럼 정복당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쫓기는 사람들과 결합된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성육신, 비천함, 초월, 열림은 소통의 조건이다. 구체적으로 신은 얼굴과 결합한다. 그러나 신은 동화할 수 없는 타자성, 절대 차이다. 신은 절대적으로 지나간 흔적이다. 흔적은 나의 이웃의 얼굴에서의 신의 근접성이다. 둘째, 신-인간 사상은 창조주의 피조물로의 실체변화로서 동일성의 원리를 훼손하는데 어느 정도 타자들을 위한 대속과 속죄, 인간의 인간성을 표현한다. 이는 메시아주의와도 상통한다. “메시아주의, 그것은 내 안에 시작하는 존재 안에서의 이 절정―‘자기의 존재를 보존하는’ 존재의 전복―이다.”
레비나스는 지식과 기술, 예술의 문화와 대조적으로 윤리적 문화를 강조하는데, 윤리적 문화는 타인의 얼굴을 통해 나의 동일성의 권력을 문제 삼는 문화, 인간성이 존재의 야만에 구멍을 내는 문화, 즉 ‘존재와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과 정의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해가능성과 이론과 객관성, 법과 정치, 평등의 토대인 정의에 대한 염려는 관계로부터 즉 얼굴과 유일한 타인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구성된다. 즉 정의는 사랑에서 나오며 정의와 자비는 낯설어 보이지만 분리할 수 없고 동시적이다. 정의는 자비가 없다면 변질되고 자비는 정의가 없다면 불가능하게 된다. 레비나스는 구체적으로 경제 정의의 활동이 정신적 존재의 서막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신적 존재를 완성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레비나스는 정치의 구멍들 (정지 기간)에서 높아지는 외침들과 인권을 옹호하는 외침들, 시인들의 노래를 지지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외침과 노래가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에 기반한 예언자적 목소리, 예언자적 정신, 인간 안에 있는 종교적 호흡이기 때문이다.
존재론은 시대를 초월한 풍조다. 이 존재론의 풍조를 거스르는 것이 메시아주의다. 레비나스의 사상은 우리에게 불편하기에 찬사와 비난에 모두 열려 있다.
○ 독자의 평
프랑스 철학자 에마누엘 레비나스 선집의 하나로 대담집 <우리 사이>(그린비)가 출간되있다. 주저 <전체성과 무한>에 뒤이은 것인데 읽는 순서로는 먼저 읽어볼 만하다. 아무래도 대담집이 접근과 이해에 더 용이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레비나스를 열심히 읽던 게 20년 전이다. 지난 세기말에 대학원생이면서 초년 강사시절에 탐독하면서 강의중에도 그의 타자 철학을 자주 들먹였던 것 같다. 국내에서도 레비나스 수용 초창기였다. 이제 20년이 지나고 예전보다 훨씬 많은 책들이 나왔기에 독서 여건은 좋아졌다. 하지만 예전만큼의 열의는 갖게 되지 않는다. <우리 사이>도 진작에 영어본을 구한 책이지만 지금은 어느 구석에 꽂혀 있을지도 가늠이 되지 않는다 (당장 내일모레 강의할 책도 못 찾고 있는 형편이다).
그래도 옛정을 생각해 다시 손에 든다면 <전체성과 무한>을 들고 씨름하기보다는 <우리 사이>를 손에 들고 산보에 나서는 것이 훨씬 낫겠다 싶다. 레비나스 입문서에 해당하는 책으로는 최근에도 박남희의 <레비나스, 그는 누구인가> (세창출판사)가 나왔는데 처음 읽을 독자들을 겨냥한 책으로 보인다.
아예 콜린 데이비스의 <처음 읽는 레비나스> (동녘)처럼 대놓고 입문서를 자처하는 책도 있다. 원저는 영어권의 대표 입문서로 20년 전에 열독한 책이었다. 번역본은 두 종이 있는데 앞선 것은 오류가 많았다. 뒤에 나온 책도 갖고 있지만 이때부터는 유심히 보지 않았다. 도스토예프스키와의 관련으로도 다시 읽어볼까 싶다. <우리 사이>를 보자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라 적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