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움베르토 에코 : 중세 컬렉션
움베르토 에코 편 / 시공사 / 2018.6
– 움베르토 에코가 기획하고 수백 명의 학자들이 참여한 중세의 결정판
“중세는 암흑기가 아니다. 암흑기라는 표현에서 끝없는 공포, 광신주의와 이교에 대한 편협성, 역병, 빈곤과 대량 학살로 인한 문화적이고 물질적인 쇠퇴기를 떠올린다면 … 이는 부분적으로만 적용할 수 있다. 그 시대가 남긴 유산 대부분을 우리는 아직도 사용한다 … 우리가 우리 시대의 것인 것처럼 아직도 사용하는 중세의 발명품은 끝이 없다.” _ 움베르토 에코, 전체 서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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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1: 세부 내용]
– “중세, 현재의 우리를 가능하게 한 찬란한 천 년” 중세의 시작과 중세에 대한 오해와 편견들
중세는 단지 ‘어둠의 시대’만이 아니었다.
476년은 서로마 제국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해다.
이후 11세기까지의 중세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게르만족을 중심으로 여러 야만족들이 대이동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로써 오늘날 우리가 ‘유럽’이라고 부르는 것이 시작되었다.
로마 제국을 침입했던 이민족들의 문화와, 그 문화들을 서로 연결시키는 역할을 했던 그리스도교와 라틴 문화가 결합하면서 모든 유럽 국가가 시작된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현재까지 쓰이는 유럽의 여러 언어, 제도, 법률 등이 형성되었다.
수백 년에 걸친 아랍-이슬람 문화와의 다양한 접촉은 (또한 분쟁 역시) 유럽인들에게 고대 지식과 배움을 전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역으로 유럽이라는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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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2: 세부 내용]
– “눈부신 천 년, 중세에서 발견한 현대의 기원” 부활의 시작을 알린 1000년 이후의 중세
움베르토 에코는 『중세』 1권의 전체 서문에서 중세에 대한 오해들 중 첫 번째로 “중세는 한 세기가 아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로마 제국이 몰락한 476년부터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된 1492년까지 천 년에 달하는 이 시기는 ‘암흑기’라는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없다.
천 년간 중세는 많은 변화를 겪었으며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중세의 유산들은 1000년 이후에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움베르토 에코의 중세 컬렉션’은 중세에 대한 우리의 오해와 편견들을 깨고 그 시대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우리 시대와는 무엇이 다른지를 역사, 철학, 과학과 기술, 문학과 연극, 시각예술, 음악 분야로 나누어 증명해 낸다.
그리고 근대를 거쳐 온 우리 시대가 당면한 여러 문제들을 풀어 나갈 지혜를 엿보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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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3: 세부 내용]
– “오늘의 눈으로 다시 바라본 중세, 가장 빛났던 천 년” 신을 떠나 인간에게로 향한 1200년 이후의 중세
움베르토 에코는 “중세는 암흑기가 아니다” 말하며 중세를 역병, 전쟁, 학살이 만연했던 어둠의 시대로 알고 있는 우리의 상식에 강렬한 질문을 던진다.
중세에도 황금기가 있었으며 어느 시대 못지않게 찬란했다.
특히 1200년 이후의 중세는 여러 분야에서 놀라운 발전을 경험했다.
여러 군주국이 형성되고 진정한 시민 계급이 탄생했으며 단테, 조토, 아퀴나스 같은 수많은 철학가와 문학가, 예술가가 활동했다.
안경, 단추, 아라비아 숫자 등 현대의 우리도 사용하는 도구와 관습이 이 시기에 시작되었다.
‘움베르토 에코의 중세 컬렉션’은 중세에 대한 우리의 오해와 편견들을 깨고 그 시대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우리 시대와는 무엇이 다른지를 역사, 철학, 과학과 기술, 문학과 연극, 시각예술, 음악 분야로 나누어 증명해 낸다.
그리고 근대를 거쳐 온 우리 시대가 당면한 여러 문제들을 풀어 나갈 지혜를 엿보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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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4: 세부 내용]
– “천 년을 품은 중세, 내일의 역사를 잉태한 과거” 고대의 이상을 계승하고 근대의 새로움을 고취시킨 마지막 1백 년
움베르토 에코의 중세 컬렉션의 마지막 책인 『중세 Ⅳ』가 다루는 1400년부터 1500년까지의 1백 년은 중세와 르네상스가 혼재된 시기다.
1453년의 콘스탄티노플 함락, 1455년의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 1492년의 그라나다 왕국의 함락과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까지 어디에서 중세가 끝나고 근대가 시작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이것이 어느 한 분야만의 업적이라거나 성과가 아니라는 점이다.
15세기가 되면 상업과 무역업의 외연이 확대되면서 공간에 대한 인식이 진일보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조감으로 본 풍경을 그림으로써 그림의 경계선 너머를 상상하도록 자극했다.
또한 항해 기술이 발전하면서 지금까지는 상상에서만 가능했던 원거리 여행이 가능해졌다.
여러 번의 전쟁과 종교 불화를 겪으며 중세인들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바람을 키웠고, 이 과정에서 근대 국가의 틀이 만들어졌다.
이들 모두가 르네상스의 문을 연 주인공이다.
○ 목차
중세 Ⅰ(476~1000): 야만인, 그리스도교도, 이슬람교도의 시대
중세 Ⅱ(1000~1200): 성당, 기사, 도시의 시대
중세 Ⅲ(1200~1400): 성, 상인, 시인의 시대
중세 Ⅳ(1400~1500): 탐험, 무역, 유토피아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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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소개 :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기호학자인 동시에 철학자, 역사학자, 미학자로 활동하고 있는 볼로냐대학교의 교수이다. 1932년 이탈리아 서북부의 피에몬테주 알레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변호사가 되길 원했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토리노 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중세 철학과 문학으로 전공을 선회, 1954년 토마스 아퀴나스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학위논문을 발간함으로써 문학비평 및 기호학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62년 토리노대학교와 밀라노대학교에서 미학 강의를 시작했으며, 최초의 주요 저서인 『열린 작품 Opera apertas』(1962)을 발간해 현대미학의 새로운 해석방법을 제시했다. 이어 『제임스 조이스의 시학 Le poetiche di James Joyce』(1965), 『예술의 정의 La definizione dell’arte』(1968) 등 새로운 이론서를 발표해 문학비평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1966년 상파울루대학교와 피렌체대학교에서 시각커뮤니케이션을 강의했으며, 1967년 『시각커뮤니케이션 기호학을 위한 노트』를 출간했다.
1968년 인간의 사고와 문화행위, 이념구성 등에 다양하게 관련되어 있는 기호를 개념, 유형, 의미론, 이데올로기 등으로 명쾌하게 분석 정리한 『텅빈 구조 La struttura assente』를 발간했으며, 이어서 『내용의 형식 Le forme del contenuto』(1971)을 발간한 후 이 두 저서의 내용을 증보해 영문판 『기호학이론 A Theory of Semiotics』(1976)을 발간함으로써 세계적인 기호학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는 Visio 문화, 즉 읽는 문화가 아니라 보는 문화의 전형적인 사례인 중세 미학과 러시아 형식주의, 그리고 아방가르드 문화로부터 출발했으며, 퍼스의 철학적 기호론을 통해 독특한 기호학 체계를 구축, 프랑스 중심의 언어학적 기호학이나 구조주의와 철저하게 맞대결하는 한편 프랑크푸르트 학파류의 마르크스주의와도 완연히 다른 예술 이해와 미학관을 보여주었다.
1971년 볼로냐대학교의 기호학 조교수로 임명되었으며, 세계 최초의 국제기호학 잡지 『베르수스』의 책임자로 활동했다. 1974년 밀라노에서 제1회 국제기호학 회의를 주관했으며, 1975년 볼로냐대학교의 기호학 정교수 및 커뮤니케이션·연극학 연구소장으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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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학과 미학의 세계에 열중하던 중 우연한 기회에 출판사에 근무하는 여자친구의 권유로 소설을 집필하게 되었다. 당시 원자핵의 확산과 환경오염 등으로 인한 세기말적인 위기를 문학으로 표현해보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그는 2년 반에 걸쳐 집필을 완료해 1980년 첫번째 장편소설 『장미의 이름 Il nome della rosa』을 발표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논리학,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경험주의 철학과 자신의 기호학 이론을 유감없이 발휘한 이 소설은 출간되자마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어 1988년 두 번째 장편소설 『푸코의 진자 Il pendolo di Foucauilt』를 발표해 프랑크푸르트 북페어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았으며, 1994년 자전적 작품인 세 번째 장편소설 『전날의 섬 L’isola del giornoprima』을 발표해 작가로서의 재능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 에코는 문학은 죽는 방법까지 가르쳐 준다고 말할 정도로 문학에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다. 그는 『움베르토 에코의 문학 강의』라는 책에서 문학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그리고 문학이 개인적 삶과 사회적 삶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를 웅변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문학의 몇 가지 기능에 대해’에서 시작하여 마르크스, 단테, 네르발, 와일드, 조이스, 보르헤스 등의 작품에 대한 비평과 문체, 상징, 형식, 아이러니 등 문학 이론의 핵심적인 개념들에 대한 기호학적 분석 등을 담고 있다.
움베르토 에코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에서 퍼스널컴퓨터에 이르기까지 기호학·철학·역사학·미학 등 다방면에 걸쳐 전문적 지식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모국어인 이탈리아어를 비롯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라틴어, 그리스어, 러시아어, 에스파냐어까지 통달한 언어의 천재이다. 이러한 이유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이래 최고의 르네상스적 인물이라는 칭호를 얻고 있다. 그의 기호학이론은 오늘날 세계 학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문학이론으로 평가받고 있다.
2005년 Prospect / Foreign Policy 공동 조사에게 움베르토 에코는 노엄 촘스키에 이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식인> 2위에 이름을 올렸다. 3위는 리처드 도킨스였다.
작품으로 장편소설 『장미의 이름』(1980) 과 『푸코의 진자』(1988), 『전날의 섬』(1994), 동화 『폭탄과 장군』(1988), 『세 우주 비행사』(1988), 이론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미학의 문제』, 『열린 작품』, 『대중의 슈퍼맨(대중문화의 이데올로기)』, 『논문 잘 쓰는 방법』 등이 있다.
2016년 2월 19일 향년 84세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밀라노 자택에서 타계했다.
– 감수 : 차용구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파사우 대학교에서 서양 중세사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8년 현재는 중앙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중세 유럽 여성의 발견》, 《로마 제국 사라지고 마르탱 게르 귀향하다》를 비롯하여 《가해와 피해 의 구분을 넘어: 독일/폴란드 역사 화해의 길》(공저), 《서양 중세사 강의》(공저)가 있다. 옮긴 책으로 《교황 의 역사》, 《중세 천년의 빛과 그림자》, 《국가의 탄생: 근대 국가의 중세적 기원》(공역)이 있다. 또한 국내에서 〈중세의 이단과 여성〉, 〈독일과 폴란드의 역사대화: 접경지역 역사서술을 중심으로〉 등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으며, 해외 학술지에 〈12세기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긴느의 볼드윈과 그의 장남 – The Relationship between Fathers and Sons in the Twelfth Century : Baldwin of Guines and his Eldest Son〉 등을 게재했다.
– 감수 : 박승찬
서울대학교 식품공학과를 졸업하고 가톨릭대학교 신학부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중에 중세 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8년 현재는 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의 ‘중세 철학사’ 강의는 2012년 11월에 SBS와 대학교육협의회에서 공동으로 주관하는 ‘대학 100대 명강의’로 선정되었다. 또한 SBS-CNBC ‘인문학 아고라’ 「어떻게 살 것인가」, EBS 특별 기획 「통찰」 등의 TV 방송 출연, 한겨레신문 연재, 다양한 강연 활동을 통해 사람들이 중세에 대해 갖는 편견을 깨고 중세 철학이 지닌 매력과 그 깊이를 알리는 데 주력하고 있다. 저서로 『생각하고 토론하는 서양 철학 이야기 2: 중세-신학과의 만남』(책세상, 2006), 『서양 중세의 아리스토텔레스 수용사: 토마스 아퀴나스를 중심으로』(누멘, 2010), 『철학의 멘토, 멘토의 철학』(공저,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3), 『알수록 재미있는 그리스도교 이야기』(전2권, 가톨릭출판사, 2015), 『서양고대철학 2』(공저, 도서출판 길, 2016),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삶의 길을 묻다』(가톨릭출판사, 2017)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라틴어 원문에서 번역한 『모놀로기온 & 프로슬로기온』(캔터베리의 안셀무스, 아카넷, 2002), 『신학요강』(토마스 아퀴나스, 나남출판, 2008), 『대이교도대전 Ⅱ』(토마스 아퀴나스, 분도출판사, 2015), 그리고 『토마스 아퀴나스의 형이상학』(레오 엘더스, 가톨릭출판사, 2003) 등이 있다.
– 역자 : 김효정
1967년생으로, 한국외국어대학교 이탈리아어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엠사 모란테의 역사의 서사적 특성과 낙관적 비극성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또한 동 대학원 비교문학과를 수료하였으며, 현재 한국외대 이탈리아어과 강사로 활동하면서 번역활동에 집중하고 있다.
역서로는 『아름다운 여름』, 『당신의 고향』, 『사라진 도서관』, 『추억의 학교』(우리교육), 『약혼자』(문학과 지성사), 『레오나르도 다빈치 펜으로 과학을 그리다』(김영사 어린이), 『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문학과 지성사), 『피노키오』(대교) 등이 있다.
– 역자 : 최병진
한국외국어대학교 이탈리아어과 조교수로 일하고 있다. 로마 라 사피엔자 국립대학교와 피렌체 국립대학교에서 미술사와 박물관학을 공부했다. 《미켈란젤로, 고난을 딛고 예술혼을 피어올리다》와 《레오나르도다빈치, 상상의 나래를 활짝 펼치다》 등이 있다.
○ 출판사 서평
– 움베르토 에코의 중세 컬렉션 소개
중세 Ⅰ(476~1000): 야만인, 그리스도교도, 이슬람교도의 시대
중세 Ⅱ(1000~1200): 성당, 기사, 도시의 시대
중세 Ⅲ(1200~1400): 성, 상인, 시인의 시대
중세 Ⅳ(1400~1500): 탐험, 무역, 유토피아의 시대
움베르토 에코의 중세 컬렉션’은 세계적인 석학 움베르토 에코가 기획하고 수백 명의 학자들이 참여해 중세의 모든 것을 다룬 인문 시리즈로, 시기에 따라 총 4권으로 구성된다. 역사와 철학에서 과학과 기술, 문학과 연극, 시각예술, 음악까지 현재 우리 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중세의 다양한 사건, 사상, 제도, 문화, 예술 등이 촘촘하게 소개된다.
흔히 암흑기라고 알려진 이 시기가 사실은 얼마나 풍요로운 결실을 맺어 왔는지, 또 근현대의 여러 분야가 정착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 기틀을 마련해 왔는지를 알려 준다. 기획자와 집필자들의 국제적인 명성, 방대하고도 세밀한 자료 등에서 다른 책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중세의 결정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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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자의 평
유럽(EU)법의 역사 : <중세> 속의 로마법, 게르만 관습법 그리고 교회법의 역사 새창으로 보기
국가연합에서 유럽연합의 헌법을 제정할 때에는 특별히 중세와 근세 유럽 문화의 딸과 같은 각국의 고유 문화를 옹호하는 방법으로 공통 규범을 제공하도록 장려되었습니다. 이러한 통합 과정이 유럽연합의 헌법에 담겨 있는데, 그것이 바로 로마법의 전통과 게르만법, 보통법 Ius commune의 정신에서 유래합니다. 특히 로마법과 게르만법의 전통 외에도 보통법이라는 새로운 학문적 개념에 주목할 만합니다.(p26) <법으로 읽는 유럽사> 中
<법으로 읽은 유럽사>에서는 유럽연합(EU) 헌법의 정신을 로마법과 게르만법, 그리고 보통법에서 찾고 있는데, 본문에서는 각각의 법(法)의 기원과 법의 변천을 통해 유럽이 어떻게 규정되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과 같은 추천의 글을 통해서도 확인하게 된다.
로마 교황청의 대법원인 로타 로마나의 변호사인 저자는 유럽법의 핵심에는 로마법과 교회법이 있으며, 이 두 요소가 중세에 보통법이라는 모습으로 통합되었음을 잘 설명하고 있다. <법으로 읽은 유럽사> 추천의 글 中
로마법학은 당대에 구체적인 법 규범을 규정하는 학문이라기보다는 지성적인 학문, 즉 원칙과 이론의 총체로서의 ‘기록된 이성 ratio scipta’을 구성했습니다. 반면 교회법학은 그 원칙들을 현실에 확대 적용한 그 시대의 법 규범이었습니다. 이러한 사고를 바탕으로 중세 유럽에서 보통법이 태동하게 됩니다(p295) <법으로 읽는 유럽사> 中
추천사에서처럼 <법으로 읽는 유럽사>에서는 학문으로서 정립된 ‘로마법’이 로마제국 멸망 후 게르만의 ‘관습법’을 만나 교회에 의해 ‘보통법’으로 종합되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다만, 책 중간에 삽입된 라틴어 법률 조항은 비전문가들의 읽는 속도를 현저하게 떨어뜨리는 면이 있다. 그래서, 이번 페이퍼에서는 법률 조항에 관련된 사항은 걷어 내고 로마법과 게르만 관습법이 어떻게 결합되었는지를 움베르트 에코(Umberto Eco, 1932 ~ 2016)의 <중세> 시리즈를 통해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로마법의 정리 : 유스티아누스
<법으로 읽는 유럽사>에서 저자는 로마법은 원칙과 이성 그리고 보편적인 가치와 이상을 담은 형이상학적 원리가 담겨진 법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실상 로마법은 동로마 황제 유스티아누스 대제(Flavius Petrus Sabbatius Iustinianus, AD 482 ~ AD 565)에 의해 〈칙법휘찬〉(Codex Constitutionum), 〈학설휘찬〉(Digesta, Pandectae), 〈법학제요〉(Institutiones)가 편찬될 때까지 통일된 법이 아니었다. 사고를 규정하던 로마법은 유스티아누스의 집대성 이후에야 오늘날 <로마법 대전(Corpus Juris Civilis)>이라 부르는 법전의 모습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로마가 법으로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법의 내용이 시대를 초월해 인류가 추구해야 할 보편적인 가치와 이상을 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사법과 로마민법은 개인의 자유와 이익을 보장하고 보호하면서, 역사의 계속성을 유지해왔고, 로마법은 인류 보편의 이상을 향해 발전해나갔기 때문에 시공을 초월한 법문화의 가치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p87) <법으로 읽는 유럽사> 中
로마법은 늘 동일한 특성을 지니지 않았으며, 단 한 번도 법전으로 편찬된 적이 없었다. 5세기에 서로마 제국이 결정적으로 쇠퇴의 길로 접어들자, 동로마 제국에서는 로마 제국의 법률 자료를 편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이후로 공표한 제국의 법률에 한정하기 때문에 지극히 일부만 편찬되었다. 그러나 6세기에 동로마 제국 황제인 유스티아누스는 법률뿐 아니라 로마의 판례까지 포함하여 많은 자료를 한데 모으면서, 매우 귀중한 법률 자산을 후세에 전해 주었다. 이것을 통해 유럽의 수많은 국가는 수백 년 동안 현행법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p114) <중세1 476 ~1000 : 야만인,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도의 시대> 中
2. 게르만 관습법
동로마 제국에서 로마법이 정리되고 있을 때 서유럽에서는 게르만 민족에 의한 유럽의 지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결과 게르만 민족의 전통과 관습에 기반한 통치가 서유럽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게르만 관습법의 전통은 오늘날 영미법(英美法, Anglo-American law)에 남아 있는 불문법(不文法)적 요소가 된다. 이러한 대륙과 다른 법체계로 인해 생긴 대륙-영국의 차이가 지난 2016년 브렉시트(Brexit)가 이루어진 100가지 이유 중 하나의 이유는 되지 않을까…
로마에서는 법학자들이 구체적인 사건 해결을 위해 형성한 법규를 그 근거로 삼았다면, 영국에서는 법원이 사건 해결을 한정했습니다. 다시 말해 영국의 판례법 case law이 법원의 판결들로 구성된 사례라면, 로마의 사례법은 대부분 법학자가 이론적 논술을 위해 만들어놓은 사례인 것입니다. 고유한 가치와 사유 체계는 삶의 자리 sitz im Leben에 따라 형성되고, 법학도 그러한 삶의 자리를 떠나서 판단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p145) <법으로 읽는 유럽사> 中
유럽의 보통법과는 달리 잉글랜드의 보통법은 학리상이 아닌 판례상의 모체를 공유하고 있었다. 유럽의 보통법과는 달리 잉글랜드의 보통법은 프랑스 혁명에 의해 생겨난 독점적인 입법의 사법체계에 대한 대안적인 본보기로서 근대성이 훼손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이르렀다.(p251) <중세2 1000 ~ 1200 : 성당, 기사, 도시의 시대> 中
라틴족과 이민족이 설립한 왕국에서 카롤링거 왕조의 제국에 이르기까지, 중세 유럽의 권력자들은 사회적 관계를 구성하는 데 필요한 동일하고 보편적인 규칙을 자신이 지배하는 영토 전체에 적용하지 않았다. 그 결과 등장한 법적 다양성은 중세 법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p233)… 중세의 법적 전통이 다양성을 지닌다는 점은 단순히 국가가 다양한 법을 제정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당대의 법에서 관찰할 수 있는 특징은 관습이 가장 중요한 위상을 지닌다는 점이며, 이는 법제가 지역적 전통과 결합해 발전하는 원인이 되었다.(p236) <중세1 476 ~1000 : 야만인,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도의 시대> 中
3. 교회에 의한 보통법(Common law) 등장
다른 한편으로, 게르만 민족에 의한 서유럽 지배는 성(聖)과 속(俗)의 분리를 가져왔다. 세속적으로는 여러 나라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신앙으로 서유럽인들은 하나의 왕국(王國)에 속한 형제자매들이었으며, 그 중심에는 교회(敎會 Ecclesia)가 자리했다.
교회는 법의 세계에 단순히 도덕적이거나 문화적 헤게모니로서 제한된 영향만 끼쳤던 것이 아니었다. 교회는 그 자체로 독창적이고 독자적인 법질서를 구축했으며, 교회의 규범들은 성직 제도의 구성만큼이나 종교적/윤리적 관점에서 신자들의 공동체에 질서를 부여하는 고해성사와 연관되어 있었다.(p238) <중세1 476 ~ 1000 : 야만인,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도의 시대> 中
교회법은 단순히 신앙공동체의 생활을 규정하는 도덕체계가 아니었다. 서유럽 전체가 거대한 신앙 공동체였던 중세에서 교회법은 제국의 법률과 같은 영향력을 가졌다. 교회의 이러한 영향력은 12세기에 동로마로부터 <유스티아누스 대법전>이 전파되면서 새롭게 변모하게 된다. 이 법전에 주석을 다는 것으로부터 유럽의 법학은 새롭게 태어났고 그 중심지는 이탈리아의 볼로냐(Bologna) 대학이 있었다.
교회법은 로마법, 게르만법과 함께 서구의 법 전통을 이루는 또다른 한 축으로, 교회법이 일반시민법에 끼친 영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방대합니다. 일례로 한국의 민사소송법도 교회법의 소송절차법에서 그 역사적 뿌리를 찾을 수 있지요.(p198)… 교회법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윤리신학에 바탕을 두다고 점차 법적 성격을 띠는 법제도로 발전했습니다. 그 가운데 원상회복, 무죄추정의 원칙, 기득권 보호, 다수결의 원리, 고리대금업의 금지, 계약 충실의 원칙, 소송 대리인 제도, 입법 사상의 형성, 불법 행위의 금지, 긴급 피난 등의 법제도는 오늘날의 법이 형성되는 데 영향을 미쳤습니다.(p199) <법으로 읽는 유럽사> 中
이론적인 전통의 정수가 집대성되어 있던 아쿠르시우스(Accursius, AD 1182 ~ AD 1260)의 위대한 작품에서 절정에 달한 주석학파는 그 규정과 원칙들을 글자 그대로 이해해야 하고, 그것들의 상관관계 속에서 해석되어야 할 유효할 법률로 인식된 <로마법 대전>을 법학 교육과 연구의 중심에 두었다. <유스티아누스 대법전>의 여백에 작성된 주석들은 단어와 구문의 의미를 명확히 해 줄 뿐 아니라 주석, 즉 분석 중인 주제와 관련한 규정들을 포함하고 있는 다른 저작물의 출전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었다.(p248)… 교회법은 로마법과 동등하게 대학 교육 과목으로 등극했으며, 로마법과 더불어 보통법의 권위를 지닌 한층 강조된 법질서의 다원주의 속에 편입됨으로써 중세의 법체계에 골고루 스며들었다(p250) <중세2 1000 ~ 1200 : 성당, 기사, 도시의 시대> 中
4. 중세의 붕괴와 근대의 시작
<법으로 읽는 유럽사>에서는 교회법이 후세에 미치는 영향으로 원상회복, 무죄추정의 원칙 등을 들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영향은 긍정적인 발전의 결과물이 아니었다. 비록 <법으로 읽는 유럽사>에는 다루어지지 않았지만, 무죄추정의 원칙 등 형사재판(刑事裁判)의 원칙등은 중세를 암흑으로 규정한 사건, 종교재판(宗敎裁判 Inquisitio)에 대한 일종의 반작용(反作用)이었다.
정치 제도의 발전, 새로운 법학의 확립, 로마 교회의 활력적인 규정은 중세 후반의 사법 구조와 활동 변화에 기여하며 타성과 저항 사이에서 점진적으로 근대 유럽을 특징짓게 될 사법적 범례를 형성했다. 사법적 논쟁들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의 신명 재판이 점차 사라지며 게르만족의 전형인 세계관 Weltanschauung의 위기가 명백히 드러났고, 새로운 이성이 등장했다… 중세 후반기의 문명은 증거에 기초하는 공적 재판 형태에 대한 신뢰를 상실했다. 책임을 밝히려는 노력은 심판의 결투와 연옥의 맹세, 그리고 심판이 무시무시한 도전에 임한 자의 육신에 자연 요인이 미치는 결과를 통해 드러난다는 끓는 물과 불타는 석탄, 뜨겁게 달구어진 쇠의 신명 심판과는 또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p238)… 심문 수단으로서의 고문을 거부하고 고백의 증거적 가치를 비판하는 것은 이단 심문에 대한 논쟁의 주된 주제였다. 논쟁은 로마- 교회의 전형에 대치되는 처벌 절차에 대한 계몽주의적 관점을 통해 최고조에 이르게 될 것이었다. 즉 결백을 추정하는 원칙을 고수하고 양측의 형평성과 대립구도, 재판의 공개성과 구두 진행, 재판관의 제3자적 입장과 공평성에 근거하는 보장성 유형이었다.(p241) <중세3 1200 ~ 1400 : 성, 상인, 시인의 시대> 中
‘종교 재판’과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바로 ‘마녀사냥(Witch Hunts)’일 것이다. 중세를 연상시키는 핵심적인 단어 중 하나인 ‘마녀(魔女)사냥’은 실상 1,000여년에 걸친 중세 기간 내내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중세 후반기 알프스 이북의 게르만 민족의 세계관이 붕괴되었을 때, 사회 통제를 위해 이루어진 일련의 비합리적 행위는 중세(中世) 전체를 암흑의 시대로 규정하게 되었고, 이어지는 계몽시대(啓蒙時代 Siecle des Lumieres)를 더욱 빛나게 만들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반의 종교 재판 역사에서 크게 주목할 점은 종교 재판관과 세속 재판관이 악마의 축제를 발견한 것이었다. 그렇게 유럽의 역사에 가장 어두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마녀와 마법사의 비밀 결사는 문화 구조이고, 복합적인 신화이며, 알프스 산 양쪽 지역에서 시작되었다가 점차 유럽으로 확산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마녀사냥은 종교적인 요인때문에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고 사회적-정치적인 이유도 있었으며, 개인적인 복수와 공공질서 회복과도 관련이 있었다.(p238)… 결국 마술을 믿는 신앙이 성공한 것은 불행을 설명하기 위함이었으며, 집단의 통합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통제 수단이었을 것이다. 공동체는 마녀에게 타격을 가하면서 악의 원인을 막을 방법을 찾았다.(p239) <중세4 1400 ~ 1500 : 탐험, 무역, 유토피아의 시대> 中
<법으로 읽는 유럽사>와 <중세> 시리즈를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오늘날 EU의 정신을 이루고 있는 EU 헌법의 근간에는 로마법, 게르만 관습법 그리고 이들을 아우르는 보통법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오늘날 근대 시민법의 형성에는 중세의 아픔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동시에 우리는 새로운 과제를 확인하게 된다. 위에서처럼 법(法)이 제도(制度)를 만들고, 제도가 사상(思想)을 만들고, 사상이 역사(歷史)를 만들고, 역사가 오늘의 우리를 만들고, 오놀의 우리가 다시 법을 만든다면, 미래(未來)를 위해서는 오늘의 우리가 우리의 모습이 담긴 법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모처럼 개헌(改憲)에 대해 생각하면서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ps. 최근 완간된 <중세4>를 통해 중세 1,000년의 기간에서 고대와 근세의 접점을 보다 면밀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개인적으로 얻은 작은 수확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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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