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위대한 그리스도교 사상가들
한스 큉 / 크리스천헤럴드 / 2006.1.30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7인의 사상가들은 새로운 시대를 맞아 신학의 패러다임을 전환시켰던 인물들로 사도 바울, 오리겐, 어거스틴, 토마스 아퀴나스, 루터, 슐라이어마허, 바르트를 통해 개방적이고 에큐메니칼한 한 가톨릭 신학자의 위대한 해석과 통찰력을 만날 수 있을 것이며,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각 시대를 대표하는 위대한 인물들의 삶과 사상을 이해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신학의 대체적인 흐름과 개요를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 목차
저자서문
제1장 바울
세계종교가 된 그리스도교
제2장 오리겐
고대 사상과 그리스도교 정신의 위대한 결합
제3장 어거스틴
서방 라틴 신학의 아버지
제4장 토마스 아퀴나스
대학 중심의 학문과 교황청 신학
제5장 마틴 루터
복음으로의 복귀 – 패러다임 전환의 고전적 실례
제6장 슐라이어마허
근대 여명기의 신학
제7장 칼 바르트
포스트모던 신학적 패러다임의 선구자
맺는 글 – 현대 신학이 나아갈 길
역자후기
주
참고문헌

○ 저자소개 : 한스 큉 (Hans Kung)
현존하는 종교계의 최고 지성이라 불리는 한스 큉은 1928년 스위스에서 태어났다. 로마 교황청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뒤 1954년 가톨릭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파리의 소르본 대학교와 가톨릭 대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여 1957년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1959년까지 스위스 루체른에서 사목 활동을 하다가 1960년 독일 튀빙겐 대학교의 가톨릭 신학 교수가 되었다.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학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1979년 가톨릭교회의 전통 교리에 대한 비판이 파문을 일으켜 바티칸으로부터 신학 교수직을 박탈당했으며 이 일은 국제적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후 튀빙겐 대학교는 그를 신학 교수직이 아닌 개인적인 교회일치 신학 교수직에 임명하였다. 세계종교인평화회의 의장을 역임하였으며, 1996년 대학에서 퇴임한 후 세계윤리재단 회장으로 선출되어 여전히 충실한 가톨릭 신부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그의 저술과 강연은 가톨릭 신학의 영역을 뛰어넘어 세계 신학계 전반에 큰 도전이었다.
우리말로 번역된 그의 저서로는 『그리스도교』 『왜 그리스도인인가』 『교회란 무엇인가』 『신은 존재하는가』 『문학과 종교』 『중국 종교와 그리스도교』 『세속 안에서의 자유』 『세계 윤리 구상』 『믿나이다』 『한스 큉, 과학을 말하다』 『그리스도교 여성사』등이 있다.
– 역자 : 이양호
연세대학교 신학과와 동대학 연합신학대학원에서 수학하였고,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종교 개혁사를 연구하였으며, 호서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현재는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며, 신과대학 학장, 연합신학대학원 원장을 맡고 있다. 또한 한국교회사학회 회장, 전국신학대학협의회 부회장, 한국칼빈학회 부회장, 한국에드워즈학회 부회장, 한국교회사학연구원 부원장, 한국기독교학회 총무를 맡고 있다.

○ 출판사 서평
– 그리스도교 2천년사에 나타난 위대한 사상가 7인을 만난다!
이 책을 통해 당신은 2천년 그리스도교 역사를 움직인 위대한 사상가 7인의 신앙적 유산을 접하게 될 것이다.
– 세계를 움직인 사상가들 : 바울, 오리겐, 어거스틴, 토마스 아퀴나스, 루터, 슐라이어마허, 칼 바르트
나는 이 책이 그리스도교 신학의 중심 주제와 방법론에 관하여 간략하나마 독특한 성격의 지침서가 되기를 바란다.
지금까지 그리스도교 신학 분야에서는 개론적인 서적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고 그 대부분이 추상적인 방법론과 해석원리는 적용한 것들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에서 다소 색다른 방법으로 그리스도교 신학에 접근하였으며, 그 결과는 나에게 상당한 자부심을 갖게 해 주었다.
결국, 이 책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각 시대를 대표하는 위대한 인물들의 삶과 사상을 이해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신학의 대체적인 흐름과 개요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 씌어진 책이라고 할 수 있다. – 저자 서문 중에서

○ 독자의 평
우리나라의 한 전직 대통령은 정치인은 부고란에만 나오지 않는다면, 신문에 자주 나올 수록 좋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만큼 정치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목받지 못하는 것이 가장 무서운 일이라는 뜻일 테지만, 어찌 그것이 정치판에만 한정된 이야기일까. 최근 들어서 종종 언론에 등장하는 교황님의 말씀을 듣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지금의 종교에 있어서도 가장 무서운 것은 그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무관심 자체일지 모른다는. 어쩌면 그분은 자신의 말이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을 기대하면서, 나날이 그토록 강고한 보수성을 과시하고 계시는 지도 모른다. 유럽에서 종교가 더 이상 중요 이슈가 아니라는 지적은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다. 물론 한국에 사는 우리들은 이러한 종교에 대한 무관심이 익숙하지 않은 문제일 수 있다. 한국에서는 그에 못지않은 – 실은 그보다 더할 수도 있는 – 보수적인 언사가 교회를 통해 심심치 않게 터져 나와도 그에 무관하게 기독교는 항상 관심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한국 기독교가 보여주는 이런 식의 의사표현은 유럽의 그것과는 반대로 하나의 과시차원이라고 생각한다. 자신들의 이러한 정견 (政見) – 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 를 따르는 자들이 이토록 많다는 걸 보여주려는 목적의. 물론 최근에 들어서는 한국에서도 기독교에 대한 관심의 양태가 전과는 사뭇 달라져서, 상당히 비판적으로 변하기는 했다. 그것도 어쩌면 그동안 자신들에게 쏠린 관심과 지지를 선용하지 못하고, 이날 이때까지 교묘하게 이용했던 귀결일지 모른다.
각설하고, 두 가지 양태가 모두 정상적이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무엇보다 그 원인은 기독교의 근본적인 교리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비신자인 내 입장에서도 기독교의 지향은 오늘날의 세계에서 현실적으로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동시에, 그것이 오용될 수 없도록 스스로를 규정하는 엄연한 질서를 지니고 있다. 서구의 기독교인들이 기독교가 더 이상의 효용성이 없다는 성급한 판단 속에서 그에 대한 관심을 거두었다면, 한국에서는 그 질서에 대한 이해를 등한히 한 채, 오직 그것이 우리의 삶에 의미가 있다는 그 사실에만 오로지 집착하고 있다. 더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 목자(牧者)들이 보이는 움직임은 기독교에 대한 오해를 그대로 고착화시킬 가능성이 있다. 로마 교황청의 보수적이기 그지없는 교의 (敎義)의 천명은 냉담한 사회의 관심을 끌고, 같은 생각을 가진 보수적인 신자의 결속은 도움이 될 수 있겠으나, 보편 교회를 자칭하는 근본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다. 아직까지 한국은 기독교가 우리에게 의미가 있다고 믿고 있어도, 교회의 일방적이고 편협한 해석과 주장에 대한 반발은 역시 점증하고 있는 추세다. 결국 유럽과 한국 모두에서 양과 목자 모두에게 기독교에 대한 오해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한국이 유럽처럼 변하는 결과만 남았는지도 모른다. 물론 미국처럼 그네들끼리 똘똘 뭉치면, 앞으로도 뜻대로 사회를 움직일 수 있겠지만, 그 역시 오래갈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 한스 큉은 다시 우리가 알고 또는 모르고 지나가버린 기독교의 옛 사상가들을 진지하게 초대한다. 2000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그분의 죽음을 통한 하나님의 뜻을 두고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전개해왔다. 저자가 그 시작으로 들고 있는 바울은 그러한 희생의 근본적인 의도-온 인류의 구원-를 통찰하고, 이를 성취하기 위해 율법의 행위로부터 분리된 믿음으로서의 득의 (得義)를 주장했다. 이는 율법 그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기독교의 뿌리이자 형제로서의 유대교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결국은 세부적인 율법의 행위가 지닌 폐쇄성이 결국은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불러왔다는 점에서 그 한계를 엄연히 지적하는 것이었다. 이는 궁극적으로 신 앞에서의 의로움을 얻는다는 궁극적인 목적의 근원으로서의 믿음을 강조하는 동시에, 그 믿음과 상충되지 않는 근본적인 하나님의 의지로서의 율법 자체를 인정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바로 이로서 기독교는 이후에도 자기 자신의 근본적인 교리를 지키면서도, 복음의 전파를 위한 변화를 거부하지 않을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항상 반발에 부딪히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기독교의 근본적인 보존은 항상 그러한 변화의 수용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오리겐의 경우에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헬레니즘 철학을 수용한 그의 신학 체계는 하나님의 존재를 지나치게 추상화 시켰으며, 그로 말미암아 기독교의 사유의 초점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루어진 구체적인 역사 (役事)의 차원이 아닌 그에 선행하는 삼위일체의 정적인 하나님을 수립했다는 점에서 비판의 소지가 있다. 결국 이러한 신학은 신에 대한 – 무엇보다 그 존재 형식에 있어서-사변적인 논의로 흐를 수밖에 없으며, 결국 다수 신자들의 신에 대한 이해를 돕지 못할뿐더러, 그들의 주관적인 감정 혹은 지식에 기반을 둔 신학 아닌 신학을 조장하는 결과를 불러오는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당시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오리겐의 신학은 바울의 노력을 통해 그 내부로부터 개방성을 표방한 기독교가 여전히 외부로부터 이를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이해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헬레니즘의 사유체계를 기독교의 틀 안에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보다 적극적으로 그들이 기독교를 인식하고 받아들이도록 했다는 의미는 오늘에 이르는 전체적인 신학의 역사 속에서 간과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신께서 예정하는 만물의 빠짐없는 구원 계획이라는 그가 보여준 회복에의 전망은 그것이 궁극적으로 낙관적인 측면에서 헬레니즘의 특성인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죽음으로부터 비롯된 인류를 위한 거대한 계획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그가 얼마나 온전하게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이라는, 기독교의 가장 근본적인 교리 자체를 이해하고 있었는지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어거스틴의 경우에는 많은 학자들이 인정하듯이 그 사상적 영향력에 있어서 단연 독보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앞선 두 사람과 비교해보더라도, 바울의 개방성은 기독교 자체를 위해서 중요했음에도 한편 기독교의 본질적 성격에서 볼 때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성격이 있고, 오리겐의 경우에는 앞서 지적한 시대적 한계와 헬레니즘 철학의 수용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어거스틴에 비해 독창성의 부족이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어거스틴 역시 주지하다시피 플라톤 철학의 수용이라는 면에서 중시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그는 그를 통해 자신만의 고유한 신학체계를 수립했다. 물론 그러한 고유성이 반드시 오늘날의 시대에 부합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나, 결과적으로 그러한 어거스틴만의 고유성으로 인해 그의 신학이 오늘날까지 존속하는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저자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서방교회에 있어서의 성적인 억압이라는 문제는 다름 아닌 어거스틴으로부터 파생된 것이었으며, 이는 무엇보다 그 자신의 개인적인 삶 속에서의 쾌락과 회심, 그리고 그로부터 절감한 인간의 무력함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는 점에서 더 없이 독창적이었다. 이것이 단순히 어느 한 시대에의 적응을 위한 것이거나, 어느 특정한 이론의 수용을 통한 것이 아닌 어거스틴 본인의 삶을 통한 교리 해석의 결과였다는 점에서 이것은 그러한 주장의 근거로 삼은 내용이 존재하는 한 정합성과 무관한 생명력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어거스틴에 이르러 본격화된 삼위일체의 교리 역시 오리겐이 이를 헬레니즘 철학의 수용으로부터 비롯된 신학의 형이상학화의 한 측면으로서 접근했다면, 그는 이 이론을 그 자체로 심화시켜 비로소 이 이론을 그 자체만으로 기능하도록 정립시켰다. 그런 까닭에 이후에 보다 본격적이고 구체적으로 펼쳐질 이에 관한 신의 위격과 내용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이론의 성과와 그로인한 책임은 상당부분 어거스틴에게 귀속되는 것이며, 무엇보다 그런 까닭에 그의 신학자로서의 위상과 영향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나 역시 이에 대해서는 저자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이것이 결국 사실상 이해하기 어려운 고도의 수학 (數學)과도 같은 이론인 동시에, 설명할 수 없는 분을 설명하려는 의욕만이 충만한 나머지 성경이라는 기반으로부터도 너무 멀리 떨어지는 결과를 불러왔다는 점에 동의한다. 이는 무엇보다도 기독교 신앙은 신학적 이론이 아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성령 안에서 행하신 계시와 구속과 해방의 역사에 대한 ‘믿음’ 그 자체가 중심이며, 어떤 이론도 이보다 선행할 수 없고, 모두 이 근본적인 믿음을 드러내는데 종사하여야만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한 나로서는 그동안 알지 못했던 어거스틴의 또 다른 신학적 면모를 접할 수 있었는데, 그것이 ‘예정된 구원’에 대한 그의 주장이다. 이는 그동안 들어왔던 칼빈의 예정설과 유사하다고 느껴졌는데, 신의 은총을 통한 구원을 향한 인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 이것이 이뤄지지 못하는 까닭에 대한 것이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천국에서 타락한 천사만큼의 숫자를 다른 이성적 존재들로 채워 넣기 위해서 소수에게는 축복을, 나머지에게는 저주를 예정하셨다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저자가 지적하듯이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배척하심으로써 당신의 의로우심을 드러내는 동시에, 세상에 존재하는 악은 신의 원치 않으심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로 인해 허용된다는 것이다. 이는 세상의 모순을 신의 책임으로부터 분리시킨다는 점에서는 일시적으로 훌륭해보일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는 사실상 인간의 손으로 신의 능력을 제한하는 것과 같다는 점에서 무의미한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하나님께서 이러한 세상의 구체적인 모순에 있어서까지 어거스틴의 변명을 빌어야 할 필요가 있으실까? 결국 그러한 모순은 그 자체로 신의 의지로서 궁극적인 구원을 향한 섭리에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신의 의지하신 바, 그 끝을 알 수 없는 인간으로서의 태도가 아닌가? 더구나 무엇보다 그 신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을 생각하면 말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오리겐의 구원계획이야말로, 이러한 어거스틴의 주장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은 무엇보다도 그가 당시에 보수적인 로마 가톨릭 교회 안에서 이단시되었던 아리스토텔레스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를 통해 그는 인간의 이성과 지식에 독자적인 지위를 부여할 수 있었다. 그런 까닭에 흔히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는 그의 주장을 흔히 신학 중심의 철학 비하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는 오히려 그때까지 오랫동안 신학과 동일시되었던 철학을 신학으로부터 분리하여 정의했다는 데 더욱더 큰 의미가 있는 것이며, 사실상 생존 당시부터 사망 이후에도 오랫동안 아퀴나스가 비난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그가 신학과 철학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정의했던-적어도 이 책에서는 그가 철학을 신학의 종속물로 생각했다고 명시하지는 않았다- 간에, 그가 신학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고유한 세계-밑으로부터 알 수 있는 지식, 자연적 진리-를 철학에 할당한 것만은 사실이다. 당시의 보수적인 신학자들은 이러한 주장 자체와 그 근거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신학을 충분히 이단으로 공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적 보수성이 오래가지는 않는다. 결국 교회가 원하는지에 상관없이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고전철학은 다시금 서구의 기본적 사유체계로 자리를 잡는다. 그 후에 아퀴나스는 오히려 신학이 보여줄 수 있는 시대에 대한 적극적인 적응과 탁월한 혁신의 상징으로 숭앙될 있게 되었다. 더구나 그에게는 이러한 학문적인 차원을 넘어서 결정적인 측면이 또 하나 있었다. 바로 그는 누구보다도 자신의 신학 체계 안에서 교황과 교황청의 절대적인 권위를 옹호했다. 따라서 로마 교황청의 일방적인 통치 구조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저자의 입장에서는-나 역시 그에 상당부분 동의한다― 아퀴나스가 오늘날 로마를 중심으로 하나의 절대적인 위상에 대한 의문이 도출될 수 밖에 없다. 교황제의 실제적, 이념적 공고화에 있어서 아퀴나스가 미친 막대한 영향을 감안할 때-단지 그것이 기반에 있기 때문에 쉽게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그의 현 위상은 단순히 그의 학문적 업적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거나 혹은 그 업적이 공교롭게 로마에 이익이 되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는 저자의 암시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아퀴나스의 모든 주장을 중세 교황 제도의 고전적인 문서이자, 프랑스 국왕과의 큰 정치적 대립을 몰고 왔던 ‘우남 상탐’의 이념적 준비과정으로 볼 수도 있다고까지 지적한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볼 때 결과적으로 보편교회의 수장으로서의 교황제의 권위를 일정부분 파괴한 루터의 등장은 필연적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루터가 추구했던 종교개혁의 패러다임은 그 자체로 볼 때 가톨릭교회가 받아들일 수 없는 성격의 것이라기‘보다는’-당연히 이 작은따옴표는 아직 이 사안에 대해 단정하기 어려운 나의 소극성을 반영한다― 결국 중세 이래로 더욱 강고해진 로마 교황청의 자기 논리의 결과였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루터는 종교의 개혁을 의도했을지언정 교회의 분열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 당시의 로마 가톨릭이 그들이 공식적으로 표방한 혹은 실천하고자 했던 목표 그대로를 지켜나갔다면 문제는 없었을지 모르지만, 그들도 자인하다시피-지난번 읽었던 토마스 모어의 전기에서- 그러한 개혁은 항상 실패하기만 했다. 반종교개혁의 입장에서는 항상 그 당시 교회의 모순이 주장되는 것만큼 크지 않았고, 가톨릭 교리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다는 주장을 한다. 그런데 교회의 모순이 크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의 일방적인 평가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며-독일에서 판매한 면죄부만으로도 기독교 세계 전체에 불신을 주기에 부족함은 없다고 볼 수 있으나―, 끊임없는 개혁의 실패와 빈발하는 기독교 세계와 교회에서의 모순을 생각할 때 그것이 어디까지나 적용의 문제이며 교리의 문제가 아니라는 주장 역시 일방적일 수밖에 없다. 가톨릭 교리의 문제는 그 자체만이 아니라, 그것이 적용되는 제도와 현실을 통해서도 논의가 판단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 내부의 논리적 정합성만으로 고칠 것이 없는 교리를 강변하며, 루터의 주장을 억지로 몰아세우거나, 이미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명목상의 원칙을 내세우면서 실제적인 미실행과 괴리를 회피하는 동시에 루터의 요구를 과격한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기나긴 역사 속에서 기독교 자체의 존립을 위해서 노력했으며, 동시에 그 교회의 존립이 바로 기독교의 존립이었던 가톨릭교회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기존에 수립된 질서와 관례야말로 복음 그 자체의 보존과 전파를 위한 것이었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은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반드시 그러한 질서와 관례가 복음 그 자체와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할 수는 없다. 그러한 질서와 관례가 복음의 존립을 위해 보여주었던 역할과 그때까지의 역사적 축적에 몰입하여,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를 수립하는 데만 급급한 나머지, 정작 그것이 그 시대에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은 것이다. 루터가 전적인 믿음과 신에 전속 (全屬)된 은총, 무엇보다도 그러한 믿음과 은총을 통해서 가능한 득의를 설파하면서 의도한 것은 분명 가톨릭교회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그들이 복음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 루터에게는 더 이상 의미가 없었음은 부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루터의 기준이 아니더라도, 그 당시 가톨릭교회가 짊어지고 있던 그 모든 것들이 진정 필요하고 의미 있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최소한 버릴 것은 버려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했나? 그것도 아닌 듯싶다. 오히려 그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더 쌓아 올렸다. 물론 최근에는 버려야 할 것을 버릴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받아들이긴 했지만-2차 바티칸 공의회- 요즘에는 다시 반대의 논리를 쌓아올리고 있다.
이제 나머지 두 사람은 이전의 사람들에 비해 가톨릭과의 관계가 현저히 옅어진 사람들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이 책을 통해 접하기 전까지는 그저 이름만 들었던 이라고 생각하는데, 알고 보니 신학자라고 한다. 간단하게, ‘근대적인 종교인’으로서 살았으며, 동시에 그러한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해시키려 했던 사람이었다. 그가 종교를 정의한 바 ‘절대 의존의 감정’이라는 명제는 종교 자체의 절대성과 동시에, 그 신자에 대한 종교의 의존성-의존할 사람이 있어야 성립될 테니까-을 동시에 설명했다는 점에서 종교의 위상을 재정립하고자 했던 근대의 이념을 잘 표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개별 인간이 체험하는 ‘절대 의존의 감정’이라는 지평에서 종교의 존립 기반을 바라본다. 이들이 느끼는 이러한 감정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체를 통한 구속에 대한 교회 공동체의 의식으로 수렴됨으로써 기독교의 존립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체험의 역할이 강화되는 순간, 그리스도교에서 신자들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부여하는 예수님의 역할은 신자 자신의 개인적 경험에 밀려나게 된다.
그러나 적어도 슐라이어마허 자신은 그러한 믿음의 의식 안에서 근원적인 출발점으로서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에 대한 ‘의식’을 고수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러한 두 가지 요소-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의식-의 조화가 누구에게도 쉬운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분명한 것은 그것이 결국 슐라이어마허가 근대에 있어서 생각한 최선의 신앙이었으며, 동시에 그것이 근대에 가장 적합한 동시에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가 있는 신앙이라는 것이다. 그가 보여준 시대의 요구 및 흐름과 온전하게 소통하는 신학의 면모는 단순히 사교적인 목사의 세련됨이 아닌 신앙을 지키기 위한 진정한 시대와의 소통으로서의 기풍이 있었다. 그에 대해서는 앞으로 기회가 닿는 대로 더 접근해보려 한다.
마지막 인물이 바로 칼 바르트다. 고등학교 무렵에 모차르트에 대해 저술한 아주 짧은 에세이를 접하면서 흥미를 느꼈던 인물인데, 신학자로서의 그에 대한 글을 읽는 것은 처음이었다. 저자인 한스 큉과는 에큐메디컬 운동을 통해서 이미 가까운 사이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 까닭에 저자는 단순히 개신교 사이에서의 통합을 넘어서 오직 복음을 중심으로 하여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를 포괄하는 진정 보편적이고 에큐메디컬한 교회를 주장했던 바르트의 신학을 이야기한다. 특히 저자가 서술하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한 바르트의 호평은 그 공의회가 보여준 넓은 지평만큼이나 폭넓은 그의 시야를 인정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막연하게 그를 개신교 지향의 신학자로만 단정했던 내게는 더욱 감탄할 만한 일이었다. 이렇듯 그의 신학은 교파나 시대 같은 주변의 요구에 영합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 모든 교파와 시대를 염려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일견 그는 오직 기독교라는 종교만을 바라보는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신학자로 보일 수 있지만, 그는 결국 그러한 자신의 신학을 통해서 교회는 물론이고, 사회까지도 감싸 안는 신학을 보일 수 있었다. 결국 기독교의 하나님 그분은 모든 교회에 임재하시며, 이 세상을 누구보다도 걱정하고 돌봐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결국 세상을 걱정한다고 자처한 신학자들이 결국 시류에 휩쓸려버린 동안, 오직 신의 뜻에 천착했던 그는 누구보다도 세상의 걱정을 걱정했으며, 또 그 걱정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온전한 신의 뜻을 받들기 위해 그 어떤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동시에 신에 대한 믿음을 위해서 그 모든 것을 버리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신학적 전당에 모든 것을 거두어, 또한 믿음으로써 그 모든 것을 신께 바쳤다. 그러한 그의 신학이야말로, 바르트가 말했고 큉이 인용했듯이, 중심을 알고서 작곡했던 모차르트와 같은 위대하고 자유로운 객관성을 다시 한 번 증거 하는 것이었다. 그는 위대한 동시에, 그 위대함에도 구애되지 않았다.
책은 명확하게 나눠진 장, 절과 주제, 그리고 명료하게 제시된 논점과 질문에 따라서 각 신학자들의 세계를 명료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단순한 요약정리가 아닌, 저자인 한스 큉의 관점에 입각한 분명한 해석과 지적이 담겨 있다. 더욱이나 어렵지 않으면서도 균형 잡힌 시각을 접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안다면, 이러한 그의 서술은 감탄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물론 그러한 시각으로 바라본 전망을 성취한다는 것은, 마지막에 붙어있는 저자의 현대 신학이 나아갈 길에 대한 제언처럼 참으로 아득하고 쉽지 않은 길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 길이 새겨진 이 균형 잡힌 지도나마 없다면, 앞으로 정녕 어디로 가야하겠는가.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