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유동하는 공포
지그문트 바우만 / 산책자 / 2009.1.30
근대의 이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통제가능, 확정성 등의 선물을 안겨주었다. 알 수 없었던 대상으로부터 느꼈던 공포를 제거하고, 스스로의 삶을 지배하며 자연계와 사회적 세계에 도사리는 통제 불능의 힘을 길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의 오늘날 사람들은 왜 다시 공포를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가? 자연재해, 테러 등 형태와 시기 등 예고 없이 일어날 수 있는 위험을 붙잡고 끝없이 불안감을 느끼는가.
이성에 의한 확정성, 합리성이 근대의 모습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근대가 유동적이라고 말하면서 그 이유로는 본질을 꿰뚫는 합리성이 아닌 도구적 합리성에 치중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유동적 근대 (liquid modern age)의 특징으로 발생하는 불확실성으로 인해 공포를 느끼며, 그 위협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무력함을 공포라고 칭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공포를 해결하는 주체도 유동하는 공포를 만든 장본인인 인간이 해결할 수 있다고 제시하고 있다.
– ‘유동적 근대’의 악령, ‘공포’를 해부한다!
『유동하는 공포』. 사회이론가 지그문트 바우만이 ‘유동적 근대의 공포’를 총망라하여 살펴보고 분석한다. 이 책은 현대의 다양한 공포가 사실은 하나의 기원을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그러한 근원적인 공포를 무장 해제시키고 납득하게 만들 방법을 모색하고자 한다.
‘유동하는 공포’란 유동적 근대 (liquid modern age)의 특징인 ‘언제 어디에서나 출렁이는 위험’ 앞에서 우리가 겪는 불확실한 불안에 붙인 이름이며, 그 위협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우리의 인식 불능성에 붙인 이름이며, 그것에 대항해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 판단할 수 없는 우리의 무력함에 붙인 이름이다.
금융 위기, 음식 오염에 따른 불안과 불신, 환경 재앙에 따른 오염과 상실의 공포, 무차별적인 테러 공격에 따른 절멸과 고통의 공포 등 21세기는 수많은 공포로 휩싸여 있다. 저자는 공포라는 ‘작은 씨앗’이 대중의 불안을 먹고 자라 드리우는 ‘커다란 그늘’을 샅샅이 비춘다. 유동적 사회의 불안을 극복하도록 질문하고 답하고자 한 비평 에세이다.
○ 목차
서론 공포는 어디에서 와 어떻게 움직이는가
1 죽음의 공포
2 악과 공포
3 통제 불가능한 것과 공포
4 글로벌 공포
5 유동적 공포
잠정적 결론 공포에 맞서 무엇을 할 것인가
원주와 참고문헌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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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소개 : 지그문트 바우만 (Zygmunt Bauman, 1925 ~ 2017)
지그문트 바우만 (Zygmunt Bauman, 1925 ~ 2017)은 1925년 폴란드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를 피해 소련으로 도피한 후 소련군이 지휘하는 폴란드 의용군에 가담해 바르샤바로 귀환했다. 폴란드 사회과학원에서 사회학을 공부했고, 후에 바르샤바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1954년 바르샤바 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 활동했다. 1968년 공산당이 주도한 반유대 캠페인의 절정기에 교수직을 잃고 국적을 박탈당한 채 조국을 떠나, 이스라엘 텔아비브 대학에서 가르쳤다. 1971년 리즈대학 사회학과 교수로 부임하며 영국에 정착했고 1990년 정년퇴직 후 리즈대학과 바르샤바 대학 명예교수로 활발한 활동을 했으며 2017년 1월 9일 9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 역자 : 함규진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정약용의 정치사상을 주제로 정치외교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성균관대학교 국가경영전략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현재는 서울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조약으로 보는 세계사 강의』, 『리더가 읽어야 할 세계사 평행이론』, 『세계사를 바꾼 담판의 역사』, 『영조와 네 개의 죽음』, 『조선의 마지막 왕, 고종』, 『유대인의 초상』, 『정약용, 조선의 르네상스를 꿈꾸다』, 『왕의 밥상』(2010년 조선일보 논픽션 대상, 2010년 책따세 추천도서), 『역사를 바꾼 운명적 만남』, 『고종, 죽기로 결심하다』, 『왕이 못 된 세자들』 등의 책을 썼고, 『실패한 우파가 어떻게 승자가 되었나』, 『정치 질서의 기원』, 『대통령의 결단』, 『나는 죄없이 죽는다』,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 『죽음의 밥상』, 『팔레스타인』 등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 출판사 서평
– 한층 두텁고 전일적인 ‘21세기 공포의 시대’에 대한 최고 지성의 성찰 : 공포와 불안으로 가득한 ‘부정적 세계화’의 일상, 그 실체를 파헤치다
“가장 파급력이 있으며 어쩌면 가장 문제가 되기도 하는 결과는 현대의 ‘신뢰성 위기’ 다. 악이 도처에 숨어있음을 깨닫는 순간, 신뢰는 무너진다. 악인은 평범한 사람에 비해 뚜렷이 구분되는 것도 아니고, 두드러진 특징도 없고, 별도의 신분증을 가지고 있지 않다. 분명 모든 사람이 악의 종자로서 일할 수 있지는 않고, 일하려 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누가 그런 사람인지, 또 누가 그렇지 않은 사람, 즉 악의 계략에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인지 가려낼 방법이 없다는 게 요점이다.”
“시장의 힘을 규제하는 것을 포기하고 일방적인 ‘부정적’ 세계화 앞에 국가가 항복하는 일은 그 대가로 사회 불안과 붕괴를 가져왔다. 이로써 인간관계가 그 어느 때보다 취약해지면서, 공동체에 대한 충성심은 덧없는 것이 되고, 집단에 대한 열의와 연대성은 깨지기 쉽고 폐지가 가능한 것이 되었다.”
“우리 시대의 열린사회에 깃든 수많은 악령, 그중에서 가장 사악한 악령은 공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공포 가운데 가장 무서운 공포,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공포를 낳고 기르는 것은 현대의 불안과 미래의 불확실성이다. 불안과 불확실성은 또한 무력감의 소산이다.”
– 이 책을 말한다 : 지그문트 바우만이 폭로하는 ‘공포 권하는 사회’, 그 무엇도 예측할 수 없는 사회, 넘쳐 흐르는 이 공포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2009년은 출렁대는 공포와 함께 시작되었다. 작년부터 들썩대는 전 세계적 금융 위기와 경제 불황의 가시화 – 여전히 폭락한 주가와 반 토막 난 펀드, 비관적인 경제 전망 지표와 구조조정과 실업의 풍문들 – 로 불길하다. 거기에 더해, 미네르바의 구속과 용산 화재 참사 등 예측할 수 없거나 예측을 뛰어 넘는 불길한 사건들로 불안의 농도는 점점 짙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 공포의 정점에는 군포 연쇄살인범 강호순 검거가 있다. 대중들을 놀라게 한 것은 그의 끔찍한 범죄 행각보다 살인자의 외모와 일상과 그 이웃의 증언이었다. 선량하고 호감 가는 외모와 평소 온화한 태도로 이웃들을 대했다는 증언은 ‘우리 곁에 사는 악인’이라는 공포의 편재와 악의 우발성을 대중들에게 상기시켰다. 그렇게 ‘평범한 악의 전율’ 속에 대중들의 공포는 더욱 증폭되었으며, 여성들은 가스총이나 전기충격기 등 호신용품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들끓던 용산 화재 참사에 대한 관심은 연일 쏟아지는 강호순 관련 보도에 조용히 묻혔다. 공포가 이렇게 자본과 통제의 기제가 된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오늘날 가장 ‘안전한 (혹은 안전을 선전하는) 세상’에서 살아간다. 위급할 때 전화하면 달려오는 119구조대부터 SECOM에 이르기까지, 안전을 위한 장치와 서비스들이 넘쳐난다. 기근, 질병, 자연재해, 전쟁이나 학살 같은 위험들도 현대의 과학 기술과 사회 시스템을 통해 거뜬히 막아낼 수 있다고 우리는 믿고 있다. 이렇듯 위대한 진보, 즉 ‘근대화’라는 과정을 거치며 우리는 우리가 사는 환경과 사회가 안전해졌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언제나 공포에 떤다. 텔레비전을 비롯한 온갖 매체의 광고를 채우는 숱한 보험, 안전장치, 예금상품의 물결 속에 현대인의 ‘안전’에 대한 강박증이 엿보인다. 더 안전해진 사회에서 더 위험할까봐 공포에 휩싸인다는 이 모순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현대를 사는 대중이 사로잡힌‘공포’라는 감정을 탐구하여 그 실체를 분석하고 극복 방안을 모색하는 이 책은 공포의 기원과 논리, 그 파장에 대한 섬세한 사회학적인 성찰을 통해 현대인의 초상을 폭로하며 일깨우는 지적 진정제이다.
– 현대 지성의 등대 지그문트 바우만, 85세 현역 사회학자의 지구적 근심과 지혜
우리 시대 최고의 사회이론가 중 하나인 지그문트 바우만이 쓴 『유동하는 공포 : Liquid Fear』는 ‘유동적 근대의 공포’를 총망라해 살피고 분석한다. 이 책은 현대의 다양한 공포가 사실은 하나의 기원을 가지고 있음을 들춰내며, 그런 공포를 무장 해제시키고 납득하게 만들 방법을 모색한다. 오늘날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공포와 불안에 대한 심원하고 명석한 논의를 통해, 바우만은 우리가 지금 몸을 실은 세기가 맞서야 할 과제가 얼마나 중차대한지 경고한다. 85세라는 고령이 무색한 바우만의 준절한 사유의 광휘는 공포라는 ‘작은 씨앗’이 대중의 불안을 먹고 자라 드리우는 ‘커다란 그늘’을 샅샅이 비춘다. 이 사유의 맞섬은 인간이 21세기를 보다 안심하고 자족할 수 있기를 바라는 ‘현역을 뛰는’ 노 (老) 지성의 지혜의 실천이다.
‘유동하는 공포’란 유동적 근대 (liquid modern age)의 특징인 ‘언제 어디에서나 출렁이는 위험’ 앞에서 우리가 겪는 불확실한 불안에 붙인 이름이며, 그 위협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우리의 인식 불능성에 붙인 이름이며, 그것에 대항해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 판단할 수 없는 우리의 무력함에 붙인 이름이다. 바우만에 따르면, 근대 (modernity)란 역사상 유일한 시대로, 과거에는 사회적 삶에 들러붙어 있던 공포를 제거하고, 인간이 마침내 스스로의 삶을 지배하며 자연계와 사회적 세계에 도사리는 통제 불능의 힘을 길들일 수 있게 된 시대로 여겨진다. 그러나 21세기의 첫 10년을 보내는 지금 우리는 다시금 공포의 시대를 살고 있다. 금융 위기에 따른 생활 기반의 붕괴 공포든, 음식 오염에 따른 불안과 불신이든, 자연 재해에 따른 위해와 박탈의 공포든, 환경 재앙에 따른 오염과 상실의 공포든, 무차별적인 테러 공격에 따른 절멸과 고통의 공포든, 지배 권력과 대중 매체의 파시즘적인 통제와 배제에 대한 두려움이든, 비정상인에 의한 돌발적인 생체 폭력이든 우리는 언제든 예고 없이 일어날 수 있는 위험에 끝없이 불안해하며 오늘을 산다. 어쩌면 막장 드라마 (침 튀기며 소리 지르는 주인공들을 보라)의 높은 인기는 이 공포 권하는 유동적 사회의 불안을 나타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우만은 이 사려깊은 비평 에세이에서 이 징후를 극복하는 방법을 질문하고 답하고자 한다.
○ 독자의 평 1
시시각각 스며드는 공포. 저자는 5가지 대표적인 공포에 대해 다루면서 현대의 공포가 액체처럼 스며들며 우리를 위협한다고 말한다. 공포는 모르기 때문에 생겨난다. 불확실하다는 것. 알 수 없는 것에서 부터 예측할 수 없는 것까지 우리가 대처하고, 통제할 수 없는 모든 곳에 공포가 존재한다. 그래서 공포는 어디에나 있다. 텔레비전 화면에도 있고, 침실에도 있고, 일터에도 있고, 지하철에도 공포가 존재한다. 기업은 공포로 소비를 조장한다. 사용하지 않으면 큰 일 날 것처럼 광고하고, 손해보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만든다. 소비경제의 성패는 소비자 창출에 달려 있고, 공포를 없애줄 상품에 갈급한, 공포에 빠진 소비자 창출에 달려 있다.
1. 죽음의 공포
죽음은 모든 걸 끝낸다. 인간만이 죽음의 불가피성을 인식하고 있다. 존재하는 이상 죽음에 대한 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문화는 죽음을 피할 수 없음에도 계속 살아가도록 해준다고 한다. 죽음이란 존재하는 유일한 세계에서 퇴출되는 것. 그리하여 소멸되고 무에 속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세계로 옮겨가서 계속해서 존재하게 된다. 육체적 존재는 사라질 수 있으며, 낡고 헐어빠진 육신은 해체될지 모른다고 한다.
2. 악과의 공포
악은 굉장히 평범하다고 한다. 신뢰성의 위기인 현대에 악인은 누구나가 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악의 군단의 예비군으로 언제든 그 군대에 현역으로 복무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누가 악의 계략에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가려낼 수 없다는 게 요점이다.
3. 통제불가능 한 것과 공포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은 우리에게 미지의 것이다. 그리고 미지의 것은 두렵다. 공포는 우리가 무방비 상태임을 의미한다. 저자는 허리캐인 커트리나를 예로 든다. 그러면서 피해를 본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난한 흑인들이었다고 한다. 가난한 도시들은 재정혜택을 적게 받아 재해에 취약했던 것이다.
4. 글로벌 공포
세계 어느 곳에서 테러가 발생하면 곧바로 전세계에 소식이 전해진다. 아무리 보잘것 없고, 하찮은 테러 행위라도 공포를 유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테러리즘의 최고 무기는 공포를 심는 것이었다. 상호의존성의 촘촘한 네트워크는 우리 모두가 서로의 불행에 객관적으로 책임이 있게끔 한다. 공포를 낳고 기르는 것은 현대의 불안과 불확실성이다. 불안과 불확실성은 또한 무력감의 소산이다.
5. 유동적 공포
공포에 대처하는 보호범위는 불명확하다. 개인주의화 되고 연대가 약화되는 현대 사회는 불평등과 불균형적이고, 약자에대한 착취를 동반한다. 빈곤에 대한 공포, 실업과 해고에 대한 공포 같은 문제들이 언제 닥칠지 모른다. 20세기 전체주의 국가에 대한 국민의 공포야 말로 국가 지배력의 기본, 아니 심지어 총체이며, 그것은 국가의 폭력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심지어 끊임없이 위협되는 것에서 발생한다고 했다.
○ 독자의 평 2
<타이타닉>은 우리다. 거들먹대는, 제 잘난 듯한, 눈뜬 장님인, 위선에 가득 찬 우리 사회다. 불쌍한 구성원들에게 냉혹한 사회, 모든 것이 예측되지만, 예측의 수단만큼은 예측되지 않는 사회다. … 우리는 모두 우리 앞에 빙산이 다가오고 있음을 짐작하고 있다. 어딘가 알 수 없는 미래가 도사리고 있는 위험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결국 우리와 충돌하고, 우리를 장엄한 음악 소리와 함께 물밑으로 가라앉힐 것이다. —자크 아탈리
“조직화된, 문명화된 삶의 기본 요소들을 하나씩 제거해보라. 먹을거리, 쉴 곳, 마실 물, 개인의 최소한의 안전보장 … 그러면 우리는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홉스적인 자연 상태로 되돌아갈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 대한 전쟁을 벌일 것이다.” — 티머시 애시
이 책은 루시앵 페브르의 다음과 같은 선언으로 시작한다.
“우리의 시대 역시 공포가 가득한 시대다.” (p.13)
16세기를 산다는 것이 “언제나, 어디에나 있는 공포”를 경험하는 것이었다면, 다섯 세기가 지난 지금 역시 그러하다는 것이다.
발전소가 폭발하고, 석유 매장량이 동이 나며, 주식시장이 붕괴하고, 든든해 보이던 수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져버리고, 제트여객기끼리 충돌해 수백 명의 승객들이 죽고, 시장 가격이 미쳐버려 소중한 자산들이 물거품이 된다.
이것이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직면하는 공포의 정체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근대는 유동적이고, 유동적 근대 (liquid modern age)의 특징으로 발생하는 불확실성이 우리에게 공포를 야기하며, 그 위협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무력과 무기력감이 공포가 주는 가장 두려운 영향력이라고 설명한다.
‘세월호 참사’에서 보았듯이 국가는 국민의 안전에 대한 보장을 더 이상 확언하지 못한다. 국가는 지속가능성, 안정성, 생존, 지위나 정체성의 위협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지 못한다.
국가는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을 존재 이유로 하며, 그 때문에 국민의 복종을 요구할 수 있다. 하지만 더 이상 보장이 불가능하고 보장을 확언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국가는 공포와의 싸움을 개개인의 ‘생활 정치’ 차원으로 ‘격하’시켜 (p.15) 버렸다. 이제 국가는 더 이상 그 영토를 지배하는 전능한 존재가 아니다. 급속한 세계화와 갈수록 강해지는 해외 시장의 영향력 앞에서, 닐 로슨의 평가대로 정부는 “글로벌 경제의 하녀로 전락했다”(p.220).
오늘날까지, 우리의 세계화는 부정적인 세계화였다. 그리고 우리가 직면한 공포는 ‘부정적 세계화’의 부작용이다. 교역과 자본, 탐사와 정보, 억압과 무력, 범죄와 테러 등등이 고도로 불평등하게 세계화된다. 따라서 요컨대 한쪽에는 더 많은 부가 쌓이는 동안 다른 한쪽에는 더 많은 가난과 억압이 쌓인다. 이러한 불평등에는 대가가 따른다. 소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추구하는 “편향적 발전”이 “그 과정에서 각종 위험한 부산물들, 즉 민족주의, 종교적 광신, 파시즘, 테러리즘 등등”(p.162)을 양산하는 것이다.
유동적 근대 세계에서는 위험과 공포조차 유동적이다. 냉정하게 말해 ‘부정적인 세계화’ 아래서 “달아날 곳은 아무 데도 없다”. 우리 모두 위험에 처해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은 세 가지뿐이다. 가해자, 피해자 그리고 ‘부수적 피해자’(p.163).
이 책은 유동적 근대의 여러 공포를 보여주는 책이다. 그리고 그 공통의 근원을 찾고, 그 발견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밝히며, 이를 무력화하거나 무해하게 만들 방법을 모색한다. 달리 말하면, 이 책은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을 촉구하는 책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 책의 목적이 “이번 세기에 들어와 대부분 부딪칠 것이 확실시되는 과제의 무시무시함을 경고하려는 것, 그리하여 인류가 이 세기의 흐름을 똑바로 보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시작 당시보다 안전과 만족을 누릴 수 있게 하려는 것”(p.42)이라고 말한다.
자연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이룩한 근대의 문명은 결과적으로 공포에 맞닥뜨렸다. 그리고 인간은 ‘유동하는 공포’의 공포를 느낀다. 근대 문명의 이면엔 불확정성과 통제 불능성이 도사리고 있다. 근대는 도구적 합리성에 치중했기 때문에 ‘유동적’이 되었고, 우리가 소위 근대의 발전이라고 믿었던 것은 우회 (detour)일 따름이다. ‘세계화’ 역시 수익성을 높이고 리스크를 줄이려던 ‘우회’의 방편이었다.세계화는 의도하지 않았던 위험을 초래하고 있다. 세계화는 거대한 불평등과 불균형을 초래하였고, 인류는 이로 인한 공포에 직면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공포에 맞서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책의 잠정적 결론으로 지그문트 바우만이 제시하는 것은 지식인의 역할이다.
다가오는 공포, 우리의 힘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공포에 대한 유일한 치료법, 그 시작은 그것을 바로 보는 것 (p.286)이다. 그 뿌리를 캐고 들어가는 것이다.
다가오는 세기는 궁극적인 재앙의 시대가 되거나 지식인과 민중 사이에 새로운 협약이 이루어지는 시대가 될 것이다. 이 두 개의 미래에 대해, 아직 우리에게 선택의 기회가 남아 있다면,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 독자의 평 3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모더니즘 대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에 있어서 친포스트모더니즘 진영의 학자로 분류된다. 데니스 스미스 (Dennis Smith)는 바우만을 가리켜 ‘탈근대성의 예언자’로 부르기도 했다. 19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바우만의 전기시대라면, 2000년 이후의 작품은 바우만 후기에 속한다. 60년대, 바우만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영국 노동운동과 계급 문제를 중점적으로 연구했다. 비판이론과 후기구조주의가 범람하던 80년대를 넘어, 90년대에 이르자, 바우만은 ‘탈근대성’으로 향하는 순례길을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한다. 학술적으로 아도르노, 하버마스, 푸코, 리오타르 등의 인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포스트모더니즘과 그 불만’이 그의 문제의식이 된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 바우만은 ‘액체’ 라는 명사 또는 ‘유동하는’이라는 형용사를 핵심어로 하는 일련의 포스트모던적 기획들을 전개해 나간다. 가령 《액체근대》(Liquid Modernity, 2000),《리퀴드 러브》(Liquid Love, 2003), 《유동하는 삶》(Liquid Life, 2005), 《유동하는 공포》(Liquid Fear, 2006), 《모두스 비벤디》(Liquid Times: Living in an Age of Uncertainty, 2006) 등이 그러하다. 이 모두 유동하는 근대성이란 ‘코끼리’를 보다 밀도있게 심도있게 그리려는 바우만 스타일의 탈근대적 성찰의 결실들이다.
이 책 《유동하는 공포》(산책자, 2009)는 엄정한 이론적 틀에 따른 서술과 해설이 아닌 에세이 풍의 산문체가 특징이다. 핵심명제는 간단하다. 우리의 시대는 공포가 가득한 시대이고, 그 공포는 원시적 공포와 파생적 공포를 넘어선 유동하는 공포다. 이 책은 유동적 공포의 여러 국면을 보여 준다. 유동적 근대 세계에서는 공포와의 싸움이란 평생 끝나지 않는 과업이다. 그래서 인생은 끝없는 수색정찰의 과정, 임박한 위험에서 일시적으로나마 피할 수 있는 다양한 선택과 대책을 시도하는 과정이다. 바우만이 제시한 액체 근대성 혹은 유동적 근대사회 자체가 공포를 다스리기 위해 고안된 사회적 구성물이다.
“다른 모든 인간 공생 (共生)의 형태가 그렇듯, 우리의 유동적 근대사회 역시 삶을 공포와 더불어 살 만하게 만들기 위한 고안물이다. 달리 말해, 위험에 대한 두려움을 무장해제하고 항복시킬 수 있는 듯한 고안물이자, 그런 공포를 낳는 위험이란 효과적으로 예방되기만 한다면 사회질서를 뒤흔들 수 없다며, 아니면 뒤흔들 수 없어야 한다며 공포에 침묵을 명령하는 고안물이다.”(17-8쪽)
오늘날 유동하는 공포는 ‘타이타닉 신드롬’을 재생산한다. 타이타닉 신드롬은 문명화된 삶의 기본요소들이 여지없이 제거된 무의 한복판으로 추락하는 것에 대한 공포를 말한다. 그러나 공황에 이를 정도는 아니다. 확실성, 안전성, 보안성이 지속적으로 위협을 받게 되지만 공포가 도처에 은닉하고 있다 해도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온갖 공포가 우리 삶에 스며들 때 그 치유법과 함께 스며들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것에 공포를 느끼기도 전에 그것이 치유된다는 약속을 미리 보장받기 때문이다. 그런 약속 가운데 하나가 바로 소비주의 이데올로기다. 카르페 디엠, 지금 즐겨라, 대가는 나중에라는 격언이 오늘날 공포에 대한 한 가지 해독제가 되고 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