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윤리와 무한
에마뉘엘 레비나스, 엠마누엘 레비나스 / 다산글방 / 2000.7.31
– 1981년 프랑스 뀔뛰르 방송에서 레비나스와 필립 네모의 대담을 출판한 책
레비나스는 속 얘기를 하면서 자기 철학의 큰 주제들을 설명했다. 필립 네모의 질문에 따라 레비나스는 깊이 있는 얘기를 체계있게 들려주는데, 레비나스의 저작들을 보다 용이하게 읽을 수 있게 해주는 입문서로서 적절한 책이다.
○ 목차
편집자 해설
옮긴이 서문
필립 네모의 서문
1 성서와 철학
2 하이데거
3 ‘그저 있음’
4 ‘있음’은 ‘홀로 있음’이다
5 남녀의 사랑과 친자관계
6 비밀과 자유
7 얼굴
8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
9 증언의 영광
10 철학의 어려움과 종교의 위로
레비나스의 저서 목록
○ 저자소개 : 에마뉘엘 레비나스, 엠마누엘 레비나스 (Emmanuel Levinas, 1906 ~ 1995)
에마뉘엘 레비나스 (Emmanuel Levinas)는 리투아니아에서 유태인 부모 아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3년 프랑스로 유학해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수학했고, 1928~1929년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후설과 하이데거로부터 현상학을 배운 뒤, 1930년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후설 현상학에서의 직관 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39년 프랑스 군인으로 2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어 종전과 함께 풀려났다. 1945년부터 파리의 유대인 학교(ENIO) 교장으로 오랫동안 일했다. 이 무렵의 저작으로는 『시간과 타자』(1947), 『존재에서 존재자로』(1947), 『후설과 하이데거와 함께 존재를 찾아서』(1949) 등이 있다.
1961년 첫번째 주저라 할 수 있는 『전체성과 무한』을 펴낸 이후 레비나스는 독자성을 지닌 철학자로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1974년에는 그의 두 번째 주저 격인 『존재와 달리 또는 존재성을 넘어』가 출판되었다. 그 밖의 중요한 저작들로는 『어려운 자유』(1963), 『관념에게 오는 신에 대해』(1982), 『주체 바깥』(1987), 『우리 사이』(1991) 등이 있다. 레비나스는 기존의 서양 철학을 자기중심적 지배를 확장하려 한 존재론이라고 비판하고 타자에 대한 책임을 우선시하는 윤리학을 제1철학으로 내세운다. 그는 1964년 푸아티에 대학에서 강의하기 시작하여 1967년 낭테르 대학 교수를 거쳐 1973년에서 1976년까지 소르본 대학 교수를 지냈다. 교수직을 은퇴한 후에도 강연과 집필 활동을 계속하다가 1995년 성탄절에 눈을 감는다.
– 역자 : 양명수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감신대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개신교 신학부졸업)에서 신학박사 학위(학위논문- 윤리의 근거와 기술 유토피아)를 취득했다. 사회 정의론과 문명론, 프랑스 철학과 해석학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유학을 비롯한 한국 사상에 바탕을 둔 신학을 마련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다. 현재는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로 기독교윤리와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아무도 내게 명령할 수 없다』(이화여대 출판부),『나는 누구인가』(한동네),『퇴계 사상의 신학적 이해』(이화여대출판부),『한국교회 인문주의에서 배운다』(KMC),『호모 테크니쿠스 – 기술, 환경, 윤리』(한국신학연구소),『기독교 사회정의론 – 갸륵하신 하나님』(한국신학연구소), 『녹색윤리 – 인권과 자연권』(서광사) 등이 있으며, 역서로『악의상징』(문학과 지성사),『해석의 갈등』(아카넷),『인간현상』(한길사),『윤리와 무한』(다산글방) 외 다수가 있다.
○ 책 속으로
주체는 자기에 대해 있지 않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주체는 처음부터 다른 사람에 대해 있다. 다른 사람이 내게 가까운 것은 그가 가까운 공간에 있다거나 또는 부모처럼 가까워져서가 아니다 내가 그에게 책임이 있는 한, 그가 내게 다가선다는 면에서 가까운 것이다. 그 구조는 지향성의 관계와 전혀 다르다. 지향성의 관계는 우리를 대상 – 사람이든 아니든 – 으로 갖다 붙인다. 가까움은 그런 지향성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내게 알려져서 가까운 것이 아니다. — p.125
○ 독자의 평 1
엠마누엘 레비나스의 철학은 가깝게는 하이데거의 철학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고 멀게는 서양철학 전체가 추구하던 존재론에 대한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근대 데카르트가 물꼬는 트고 칸트와 키에르케고르 그리고 그의 스승인 훗설의 철학의 중심 주제인, 주체의 문제를 다룬다. 이 주체가 도대체 이 세계 안에서 어떻게 존재하느냐를 문제삼았는데 이는 그의 스승인 훗설이 던진 질문이다. 이것을 이어받아 세계 내적 존재-현존재를 분석하여 기초 존재론을 구성한 것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다. 이것은 데카르트 이후의 철학의 중심주제인 이성 혹은 주체에 대한 분석이며, 키에르케고르가 던지 질문인 실존의 의미분석이며, 하이데거의 스승이 기초를 놓은 현상학적 해석학에 의한 분석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이데거의 철학은 주체와 이성 중심적 철학이며 이것은 철저히 서양철학의 전통을 반영한 것이다. 이것에 대한 반성으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엠마누엘 레비나스의 철학이다. 그의 철학은 두 가지 커다란 특징이 있다. 하이데거로 대표되는 주체중심의 철학에 대한 한 가지 대안이라는 점이다. 그의 철학은 전통적으로 본다면 이성중심의 존재론에 집중하는 희랍철학 전통에 대한 헤브라이즘적 반동으로 볼 수 있다. 희랍철학은 존재의 문제를 중심에 둔다. 그러나 헤브라이즘은 관계의 문제를 중심에 둔다. 희랍철학이 공간(존재)에 집중한 반면 그는 또한 시간의 문제를 통해 실존을 해석한다. 이러한 경향 모두 헤브라이즘적인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엠마누엘 레비나스의 철학은 서양의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하고 세계 전체에 대한 책임의 문제를 다룬다. 서구의 우월주의 혹은 닫힌 세계관을 해체하고 세계 전체를 향한 열린 주체를 이야기하고 있다. 극단적인 자기중심주의의 유령의 지배를 받는 우리에게는 사뭇 그의 책임윤리와 얼굴의 철학은 의의가 있다고 여겨진다.
○ 독자의 평 2
분명 앞으로 펴쳐질 100년 동안 윤리, 또는 윤리학은 첨예한 문제로 떠오를 것이다. 왜냐면 우리의 사유가 ‘존재’에서 시작되었기에 그 존재가 허무로 휩싸이는 순간을 견디지 못하고 여기저기서 퍽퍽 터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존재는 부정되기 시작했으며 존재가 부정되기 시작하는 순간 ‘생의 허무 (vanitas)’는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존재의 철학들 (이 말이 가능하다면!)은 대학 강단에서, 먼지로 뒤덮인 책 속에서 걸어나와 거리를 휩쓸고 지나갈 것이다. 레비나스는 그 철학들의 우두머리격이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몇몇 명징한 말들로 독자를 감동시킨다. 하지만 그 감동은 오래 가지 못하고 너무나도 착한 이 사람은 타자에 대한 책임만을 말할 뿐, 자기자신에 대한 책임은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책임성이란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성이다. 그러므로 내 문제가 아닌 것에 대한 책임성이요 얼핏 보면 나와 상관없는 것에 대한 책임성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나와 관계가 있고 내게 얼굴로 다가오는 것에 대한 책임이다. ‘타자에 대한 책임’이란 정말로 중요한 문구이다. 하지만 갑자기 ‘나’로 살아온 역사가 ‘나를 잊어버리고 타자만 배려하는’ 역사로 바뀔 수는 없는 것이다. 포스트모던이 ‘차이의 역사’를 증언한다면, 그래서 ‘타자의 배려’만을 강요한다면 그리고 레비나스가 이처럼 말하기를 계속한다면 나약하고 외롭고 지친 ‘나의 영혼’은 누가 돌볼 수 있는 것일까. 레비나스는 우리에게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친 학자이다. 그래서 그의 사유는 포스트모던의 주요 테마들을 스치고 지나간다. 하지만 그는 어떤 부정만을 우리에게 가르쳐줄 뿐이다. ‘있음’으로서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 그는 ‘윤리의 증언은 앎이 아닌 계시’이며 ‘윤리란 거룩함의 요청’이라고 말한다. 그가 끝내 의지하는 곳은 ‘성스러운 종교’이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장은 <철학의 어려움과 종교의 위로>이다. 왜 그는 종교로 발길을 돌릴 것일까. 이 세상은 다시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이 되었고 그것은 어떤 계시로 이루어진 세상이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해명을 구하고자 할 때 과거의 빛나는 철학적 영광은 이제 피바랜 청동거울로 변하고 오직 신만이 그 해답을 줄 수 있는 것으로 되기 때문이다. 다시 중세가 다가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는 옛 스승들이 그랬듯이 ‘불경’해져야 한다. 불경해져야 한다. 거친 황무지로 추방당한 존재로서 직접 맨 몸으로 세상과 대자적 위치에서 다시 존재를 세워야하는 것이다. 인생의 자그마한 위로로서의 종교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를, 이 세상을 해명하는 의미에서의 종교란 고귀한 것을 추구하는 학자에게 매우 치명적인 것이다.
○ 독자의 평 3
엠마누엘 레비나스의 철학은 가깝게는 하이데거의 철학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고 멀게는 서양철학 전체가 추구하던 존재론에 대한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근대 데카르트가 물꼬는 트고 칸트와 키에르케고르 그리고 그의 스승인 훗설의 철학의 중심 주제인, 주체의 문제를 다룬다. 이 주체가 도대체 이 세계 안에서 어떻게 존재하느냐를 문제삼았는데 이는 그의 스승인 훗설이 던진 질문이다. 이것을 이어받아 세계 내적 존재-현존재를 분석하여 기초 존재론을 구성한 것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다. 이것은 데카르트 이후의 철학의 중심주제인 이성 혹은 주체에 대한 분석이며, 키에르케고르가 던지 질문인 실존의 의미분석이며, 하이데거의 스승이 기초를 놓은 현상학적 해석학에 의한 분석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이데거의 철학은 주체와 이성 중심적 철학이며 이것은 철저히 서양철학의 전통을 반영한 것이다. 이것에 대한 반성으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엠마누엘 레비나스의 철학이다. 그의 철학은 두 가지 커다란 특징이 있다. 하이데거로 대표되는 주체중심의 철학에 대한 한 가지 대안이라는 점이다. 그의 철학은 전통적으로 본다면 이성중심의 존재론에 집중하는 희랍철학 전통에 대한 헤브라이즘적 반동으로 볼 수 있다. 희랍철학은 존재의 문제를 중심에 둔다. 그러나 헤브라이즘은 관계의 문제를 중심에 둔다. 희랍철학이 공간(존재)에 집중한 반면 그는 또한 시간의 문제를 통해 실존을 해석한다. 이러한 경향 모두 헤브라이즘적인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엠마누엘 레비나스의 철학은 서양의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하고 세계 전체에 대한 책임의 문제를 다룬다. 서구의 우월주의 혹은 닫힌 세계관을 해체하고 세계 전체를 향한 열린 주체를 이야기하고 있다. 극단적인 자기중심주의의 유령의 지배를 받는 우리에게는 사뭇 그의 책임윤리와 얼굴의 철학은 의의가 있다고 여겨진다.
○ 독자의 평 4
근현대의 철학적 주류는 인식론이다. 데리다가 인식론적 형이상학에 대한 실날한 조소를 보내는 등 인식론의 제국주의에 대한 공격이 날고 거세지고 있지만 여전히 인지과학과 철학의 연계에 철학자들의 관심이 쏠려 있는 것을 보면 인식론의 지배는 여전한 듯 보인다. 그러나 그 놈의 인식란 것… 따지고 보면 우스운 거다. 도데체 인식이 존재(심지어 실존)에 대해 뭘 안다고 할 수 있나? 기껏해야 몸의 생존을 위한 도구 밖에 더 되는가? 그걸 러셀처럼 악으로 깡으로 수학적 집합론을 매개로 인식론의 세계상을 절대화하려는 꼴같잖은 짓은 집어치워주시라. 내 생각으론 인간의 인식이란 도구적인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도구적인 한계에 갇힌 인식이 자신을 ‘절대’라고 참칭할 때 무슨 해괴망칙한 일이 벌어질까? 다들 알 것이다. 현대사의 꼬락서니를… 나는 레비나스의 철학은 포스트모던 철학이란 배들이 아직 다다르지 못한 항구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푸코도 말년에 ‘윤리’의 문제로 나아가지 않았던가?
– 인상깊은 구절
주체는 자기에 대해 있지 않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주체는 처음부터 다른 사람에 대해 있다. 다른 사람이 내게 가까운 것은 그가 가까운 공간에 있다거나 또는 부모처럼 가까워져서가 아니다 내가 그에게 책임이 있는 한, 그가 내게 다가선다는 면에서 가까운 것이다. 그 구조는 지향성의 관계와 전혀 다르다. 지향성의 관계는 우리를 대상 – 사람이든 아니든 – 으로 갖다 붙인다. 가까움은 그런 지향성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내게 알려져서 가까운 것이 아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