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윤이상 : 상처 입은 용
윤이상, 루이제 린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11.13
– 동서양 음악의 경계를 융합한 윤이상의 음악적 시원 始元
.끝없는 우주를 담은 음악, 치열한 생의 기록
한국이 낳은 세계적 작곡가, 현대음악의 5대 거장 중 한 사람, 유럽평론가들이 꼽은 ‘20세기 주요 작곡가 56인’등 윤이상을 평가하는 수사는 엄청나다. 하지만 그런 명성에 비해서 한국 내에서는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윤이상을 기념하기 위한 ‘통영국제음악제’ 보도 등을 통해서 그 이름을 접해본 적이 있을 수도 있고,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른바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의 주요 인물로 알고 있을 수도 있지만 그의 음악이나 그 가치에 대해선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다. 동서양의 경계에 서 있는 그의 음악, 그 원천이 되었던 뜨거운 인간애와 민족애에 대해서는 지금껏 그에게 덧씌워진 정치적 이념으로 인해 온전히 평가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간 『윤이상, 상처 입은 용』은 윤이상의 음악적 시원이 된 모든 것, 그리고 그가 평생 동안 가슴에 품었던 ‘민족주의 운동가’로서의 굳건한 의지가 고스란히 담긴 책이다. 1977년 독일에서 출간된 이래, 지금까지도 윤이상에 관한 텍스로는 가장 탁월하다고 평가받고 있는 이 책을 윤이상 탄생 100주년을 맞아 새로이 펴냈다. 윤이상이 직접 자신의 생애 전반, 질곡의 시대를 넘어오며 겪었던 겪어야 했던 고초와 그 과정에서도 신념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원천에 대해 담담하지만 담대하게 들려준다.
○ 목차
윤이상 탄생100주년 기념 출간에 부쳐
서문
한국에서의 유년 시절
한국과 일본에서의 청춘기
천직과 자기 발견
유학, 그리고 첫 성공
납치
석방과 새출발
내가 만난 윤이상과 루이제 린저
윤이상 연보
윤이상 작품목록
○ 저자소개 : 윤이상, 루이제 린저
– 저자 : 윤이상 (Isang Yun)
윤이상 (尹伊桑, 독문명: Isang Yun, 1917년 9월 17일 ~ 1995년 11월 3일)은 서독과 통일 독일에서 활동한 대한민국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기타리스트 첼리스트 겸 현대 음악 작곡가이다.
본관은 함안 (咸安)이며 독일식 이름은 Isang Yun (상장 윤)이다.
경상남도 산청 출생이며 경상남도 통영에서 성장하였다.
서양 음악에 동양적인 요소를 쓴 독자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도교와 불교를 소재로 하는 곡이 많고, 성서의 글을 가사로 한 곡도 있다.
생애 대부분을 기독교 신자로 보냈고, 말년에 불교에 귀의하였다.
클러스터 기법 등 당대 최첨단 작곡 기법을 응용하여 서양 악기와 음악체계로 동양적인 음색과 미학을 표현할 수 있게 고안한 주요음 (Hauptton) 기법과 주요음향 (Hauptklang) 기법이라는 작곡기법을 개척했다.
– 저자 : 루이제 린저 (Luise Rinser)
1911년 4월 30일, 독일 피츨링에서 태어났다.
8살 때 처음으로 시를 썼지만 부모님이 그녀의 시를 듣고 웃는 바람에, 십대에 다시 시를 쓸 때에는 다른 사람 몰래 쓰게 되었다고 한다.
대학에서 교육학과 심리학을 전공하였으며 1935년에 학교 교사가 되었으나, 1939년에 나치의 억압으로 해직통보를 받게 된다.
첫 번째로 출간된 그녀의 책은 『유리반지』인데, 이 작품이 나오자마자 나치로부터 출판 금지를 당하게 되었다.
나치당에 대항한 것으로 유명하며, 반 나치 투쟁을 벌이다가 감옥에 가기도 했다.
번역가 전혜린의 소개로 더욱 유명해진 『생애 한 가운데』와 『덕성의 모험』, 『다니엘라』, 『잔잔한 가슴에 파문이 일 때』, 『완전한 기쁨』,『고독한 당신을 위하여』, 『미리암』, 『아벨라르의 사랑』과 프란치스코 성인의 이야기를 쓴 『꺼지지 않는 불』과 작곡가 윤이상과의 대담집인 『상처 입은 용』 등이 있다.
○ 책 속으로
이 책은 윤이상 선생과 루이제 린저의 대담집으로 윤이상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텍스트입니다. 단순히 한 음악가와 소설가의 대담집 성격을 넘어 선생의 인생과 정신을 중심으로 집약된 철학, 음악, 문화인류학, 한민족 통일문제 등 종횡무진 경계를 넘나드는 명저입니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하여 윤이상 선생의 현대음악사적 비중과 동서양 경계를 허무는 담대한 세계사적 비전을 엿볼 수 있습니다. 선생의 생애는 음악적 성과라는 일면만으로 단순하게 조명할 수 없습니다. 선생은 그 자신의 고백처럼 “음악을 통해 세상의 고통받는 이들에게 다가가 위로와 용기를 주고, 분단된 우리 민족에게 민족 화해와 문화 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을 일깨워주고자” 했던 민족운동가였습니다. — p.6~7
그런 윤이상에게 계속 이야기하도록 할 수 있었던 유일한 논리는 정치적·인도적인 것이었다. 즉 우리들의 절박한 목적은 작곡가 윤이상에 대해 쓰는 것이 아니고 독재 체제에 의해 자유를 빼앗긴 한 예술가, 그리고 그런 운명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과 운명을 함께한 하나의 모델이자 증인이며 고발자인 한 예술가에 대해 쓰는 것이라는 말이었다. — p.14
아버지는 종종 밤낚시를 하러 바다로 나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럴 때면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잠자코 배 위에 앉아 물고기가 헤엄치는 소리나 다른 어부들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 노랫 소리는 배에서 배로 이어져 갔습니다. 소위 말하는 남도창이라 불리는 침울한 노래인데, 수면이 그 울림을 멀리까지 전해 주었습니다. 바다는 공명판 같았고 하늘에는 별이 가득했습니다. — p.27~28
어린 나는 이 노래를 몇 시간이고 들었습니다. 보는 것으로도 음악으로도 아름다웠습니다. 무당은 자신을 황홀경으로 이끌어 신이 내릴 때까지 시시각각으로 노랫소리를 높여갔습니다. 내 작품 [나모]에서 나는 유년 시절의 이 인상을 현대음악의 언어로 바꾸었습니다. 따라서 내 작품 어디서든지 유년 시절의 청각적 인상의 명료한 흔적을 도출해 낼 수 있습니다. — p.37
우리는 나무 바닥에 몇 시간이고 부동자세로 앉아 있었습니다. 발에 감각이 없어졌습니다.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졌을 때 나는 스스로를 더욱 호되게 괴롭혔습니다. (…) 몸이 조금이라도 편해질 수 있는 것은 아무리 작은 몸놀림도 내 스스로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절대 지지 않겠다는 생각에 정신을 집중시켰습니다. — p.61~62
나는 북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정치적인 일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남과 북이 갈린 걸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나에게는 북한 사람도 동포입니다. — p.155
“당신이 저지른 일을 쓰시오.” 나는 또 똑같은 것을 썼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또 그 종이를 가져가고 새로운 종이를 가져와서 “당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쓰시오”라고 했습니다. 나는 또 썼습니다. “이건 사실이 아니야!”라고 그들은 말했습니다. 이렇게 만 하루가 지났습니다. 오후가 되자 그들은 나를 발로 차기 시작했는데 그때 그들은 “넌 북조선의 거물 간첩이야. 공산주의자라고. 당원이지. 넌 독일에서 간첩 조직을 만들어서 한국 정부를 무너뜨리려고 한 거야. 넌 그 조직의 두목이야”라고 했습니다. 나는 “전부 거짓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두꺼운 각목을 든 제3의 남자가 다가와 그 각목으로 내 대퇴부를 후려쳤고 나는 쓰러졌습니다. 나는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잠도 못 자고 게다가 이런 고문은 밤까지 계속되었습니다. 6월이었고 아주 더워서 그들은 한밤중이 되어서야 슬슬 본격적인 고문에 착수했습니다. 그들은 내 손발을 묶어 통나무에 매달았습니다. 땅에서 1미터 반 정도 높이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내 얼굴 위에 흠뻑 젖은 천을 놓고 그 위에 물뿌리개로 물을 뿌립니다. 그러면 천이 입과 코 위에 딱 달라붙어 질식할 것 같습니다. 내가 정신을 잃으면 그들은 묶은 것을 풀고 의사를 불러왔습니다. 의사는 나에게 주사를 놓고 내가 숨을 돌리면 또 물고문을 계속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주사를 놓으면서 고문을 했습니다. 죄수가 바로 죽어서는 안 되고 죄를 자백시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통나무에 매달리자 어린 시절에 본, 송아지나 돼지를 잡을 때 이렇게 매달았던 장면이 기억이 났습니다.
고문은 계속되었습니다. 나는 견뎌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너의 범행을 자백하겠느냐고 물어볼 때마다 “아니야. 난 아무런 범행도 저지르지 않았어”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밤새도록 계속되었습니다. 얼굴 위에 물, 주사, 심문, 물, 주사……. 여섯 번인가 그 이상 주사를 맞았을 때 나는 죽음을 예감했습니다. — p.168~169
오늘날 독재와 그에 대한 저항의 역사에 드러난 많은 사례가, 정말로 다양하고, 동시에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면 세부까지 알리고, 증언하고, 기록한 하나의 사례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 이것은 많은 사례를 명백하게 하기 위한 하나의 본보기다. 그렇다면 이 책은 더욱 그 광범위한 정치적 배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 무렵 독일연방공화국에서 납치된 것은 한국인뿐만이 아니라 일련의 유사한 사건이 있었다. 따라서 한국의 사건은 연쇄의 한 고리에 지나지 않고 그런 까닭에 더욱 모델 사례로서 의미가 있다. — p.181
납치된 사람이 윤이상이라는 것이 밝혀지자마자 그의 친구들은 바로 국내외에서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여러 곳에 행동위원회를 결성하고 구체적인 정보를 입수해 잘못된 정보를 수정했고, 본에서, 워싱턴에서, 도쿄에서 정부에 항의했다. 음악가들은 유명무명을 불문하고 무상으로 연주회를 열었고, 많은 교회 단체가 기부금을 모았다. 1967년 10월에는 윤이상을 위원으로 뽑은 함부르크 예술아카데미의 회장 빌헬름 말러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항의 서한을 썼는데, 거기에는 161명의 국제적인 문화인이 서명을 했다. 그중에는 볼프강 포르트너, 마우리치오 카겔, 롤프 리버만, 칼하인 슈토크하우젠, 한스 베르너 헨체, 죄르지 리게티, 에른스트 크레네크, 얼 브라운, 에드워드 스템플리,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오토 클렘페러가 포함되어 있었다.— p.198
루이제 린저 _ 당신은 아프고, 투옥되어 있는 상태에서 그것도 사형이 구형될 것을 알면서 대체 어떻게 작업을 할 수 있었습니까?
윤이상_ 나는 그 전에 이미 오페라의 3분의 1을 쓴 상태였고, 그때는 기본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뒤를 어떻게 이어 써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루이제 린저 그렇습니까? 벌써 그렇게까지요? 하지만 당신도 아시겠지만, 나도 옥중에 있었고 나치의 국민재판소 재판을 앞두고 사형을 각오해야 했습니다. 나는 이러한 조건하에서는 도저히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 자기 자신과 이렇게 거리를 둘 수 있다니……. 게다가 희곡 오페라를 쓰다니요. 그것은 도교의 승리입니다. 인생을 한낱 꿈이라고 보는 의식, 모든 존재와 일체화하고 그런 까닭에 더욱 힘든 시련도 견딜 수 있는 의식입니다. 그것은 또 당신의 일을 방해한 모든 불쾌한 것에 대한 당신 창조력의 승리이기도 합니다. 당신의 창조적인 잠재력이 다시 활동하기 시작하는 데는 고작 숨 한번 크게 쉬는 정도로 이미 충분했던 겁니다.
○ 출판사 서평
– 음악가의 자서전을 넘어선 역사의 기록
이 책은 윤이상의 어린 시절부터 대담자이자 공저자인 루이제 린저가 함께 이야기를 나눈 시점까지 윤이상의 일대기를 그 자신의 목소리로 연대순으로 풀어낸다. 거기에 르포작가의 역할을 자처한 루이제 린저가 윤이상의 작품, 그리고 그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짚어보아야 할 정치적 사건들에 대한 방대한 기록을 촘촘하게 정리해 넣었다.책의 구성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분해볼 수 있다. 어린 윤이상이 어떻게 음악을 만났는지, 청춘의 윤이상이 왜 항일운동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는지, 유학과 본격적인 음악활동의 시기, 마지막으로 동베를린 사건과 그 후이다. 이들 각각의 구분은 사실, 한 인간으로서의 성장 과정이기도 하지만 다시 음악가로서의 원천, 민족주의 운동가로서의 시발점, 음악가로의 성숙기, 통일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민족주의 운동가로서의 성숙기로 고찰해볼 수 있다. 이처럼 이 책은 윤이상을 규정하는 데 있어서 그 어떤 문헌보다 귀중한 자료이다. 동시에 현대음악사의 가장 중요한 장면들을 들려주는 텍스트이자, 한국 현대사를 고증하는 텍스트로 단순히 한 음악가의 자전적 이야기를 넘어선 역사적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 바닷소리를 들으며 음악을 그리던 아이
윤이상은 1917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통영에서 자란 그는 바닷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부들의 뱃노래부터 파도소리까지 모든 것은 음악적 영감을 주었다. 그가 어린 시절 통영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들이 그러했다. 무당의 노래는 그의 작품 [나모]의 모티브가 되었고, 친척집에서 처음 들은 합주단의 연주에서 자기 마음의 울림을 들었다. 그리고 신식학교에서 처음 들은 오르간 소리는 어린 소년을 흥분시켰다. 그 모든 것이 음악의 주제이자 노래가 되었다. 13살 무렵 도쿄에 유학을 다녀온 젊은 남자에게서 처음 바이올린을 배운 이래 독학으로 작곡을 시작했던 이야기, 완고했던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음악으로 향해 나아가던 열정 등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 항일 지하운동, 민족주의자로서의 시작
일제의 식민지배가 극악했던 시절 그는 민족이 처한 참담한 현실을 목도했고, 이에 눈감지 않는다. 당시 유학 중이던 윤이상은 재일 조선인 유학생들과 지하조직을 결성해 무장 투쟁을 준비했다. 생명을 존중하고 모든 폭력행위에 반대해 왔던 그는 조선 민족이 자기의 존엄성을 되돌리기 위해선 무력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절망의 순간 유일한 희망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거사는 실행되지 못한 채 그는 체포, 투옥되어 심한 고초를 겪는다. 통나무로 몸을 짓이기는 고문은 고통을 넘어선 두려움으로 다가왔지만 그는 지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스스로를 더욱 호되게 괴롭히며 정신을 깨웠다. 이후 신원 보증으로 석방되었지만, 한 기관에 징용되어 계속 감시를 받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다시 지하조직을 결성했다. 꺾을 수 없는 의지였다. 결국 도망자 신세가 되고 만 그는 서울로 향했는데, 계속되는 추격에도 자신 옆에 첼로를 포기하지 않았다. 윤이상은 당시를 이렇게 말한다. “첼로가 없었다면 난 너무 고독했을 겁니다. 첼로는 내 친구이고, 짝이었어요.” 그리고 마침내 병든 몸으로 병실에서 해방을 맞았다.
– 나이 마흔에 오른 유학길, 그리고 음악
해방 이후 그는 교편을 잡아 음악을 가르쳤고, 아내 이수자 여사를 만나 결혼하여 아이들도 얻었다. 조국 재건에 투신하겠다 마음 먹었었지만 한국전쟁 이후 정치활동은 전혀 하지 않았다. 분단 상황에서 벌어진 민족끼리의 싸움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민주주의, 사회주의의 이념 갈등보다 민족에 대한 사랑이 더 중요한 가치였다. 동시에 그는 음악에 대한 갈증, 채우지 못한 것들에 대한 갈급함이 있었다. 나이 마흔, 이미 두 아이의 아버지였던 그는 파리로 날아가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에서 처음 제대로 유럽 음악을 배웠다. 여전히 더 많은 것이 배우고 싶었던 그는 마침내 베를린으로 가서 보리스 블라허를 만났다. 보리스 블라허는 윤이상의 동양적인 음의 이미지를 좀더 분명하게 표현하도록 그를 이끌었다. 그 외에도 요제프 루퍼, 라인하르트 슈바르츠- 쉴링을 사사하며 빈 악파의 기법을 철저하게 익혔고, 마침내 쇤베르크의 12음계 기법에 한국의 정악(正樂) 색채를 담은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을 작곡하기에 이른다. 이 음악은 세상에 그를 알린 첫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음악을 시작으로 그는 유럽 각지의 음악제, 콩쿠르에서 동서양의 경계를 넘나드는 음악으로 세계 음악계를 사로잡았다. 동양의 사상과 음악기법을 서양 음악어법과 결합하여 완벽하게 표현한 최초의 작곡가라는 평가도 얻었다. 이 부분에서 윤이상은 자신의 세계관 동양적인 심미주의의 탐색, 서양악기와 동양음의 조화 등 그 음악의 모든 것을 세세하게 소개했다.
– 납치,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
음악적 성취를 이뤄가던 시기 그는 정치적인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언제나 민족의 운명에 대해 걱정했던 그였다. 하지만 박정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후는 상황이 달랐다. 그는 독일에서 한국인협회를 설립하고 한국의 민주주의 회복의 필요성과 가능성에 대해 토론했다. 신문지상 보도와 다른 일들이 고국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윤이상은 정권에 대한 비판적 자세를 유지했다. 그러던 중 어릴 적 고향친구를 만나기 위해 북한에 다녀왔는데 그 일은 여러모로 눈엣가시였던 그에게 간첩혐의를 씌우는 빌미가 되었다. 그리고 1967년 6월 17일 그는 베를린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비서라는 자의 연락을 받고 집을 나섰다가 그 길로 납치되어 한국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서울로 옮겨진 그는 중앙정보부(KCIA)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겪는다. 정권이 조작한 이른바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의 시작이었다. 이 책에서 윤이상은 동베를린 사건과 관련된 자신의 경험을 매우 담담하게 인간적인 관점에서 고백한다. 고뇌와 갈등, 옥중에서도 꺾을 수 없었던 음악에 대한 열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한편 이 부분에 관한 이야기에서는 루이제 린저의 르포를 집중해 보아야 한다. 루이제 린저는 당시의 신문, 정부 문서 등 방대한 문헌자료를 기반으로 ‘동베를린 사건’의 전모를 속속들이 파헤쳤다. 평범한 유학생, 학자, 예술가, 이민자들이 어떻게 한순간 간첩단으로 조작되었는지, 그 과정에 공모한 외부세력은 없었는지, 독일 정부와 미국의 개입과 묵인에 대한 조명, 한국 정부와의 협상 과정까지 면밀하게 짚어낸다. 이 기록은 그 자체로 한국 현대사의 본모습을 확인하게 해주는 사료로서 역할을 한다.
– 다시 돌아보아야 할 우리의 음악가 윤이상의 위업, 그의 재평가에 공헌하기를 바라며
이 책은 이처럼 일제치하, 한국전쟁, 박정희의 군부독재 시절까지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을 온몸으로 겪어낸 한 예술가의 생의 기록인 동시에 세계가 아끼고 인정하는 한 음악가의 작품에 대한 음악적 평론이며, 한국 역사의 민낯을 면면히 보여주는 르포르타쥬이다. 다만 이 책에서는 석방 이후 윤이상의 활발한 음악적 활동까지에서 끝을 맺고, 모든 문제의 근원이 민족의 분단에서 비롯됐다는 생각에 기반한 민족주의 운동가로서의 면모까지는 다루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그를 다시 돌아보고 재평가하는 데는 충분한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생의 한가운데』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독일의 여류작가 루이제 린저는 철학, 음악, 역사, 심리학, 문화인류학 등을 넘나드는 막강한 지식과 방대한 자료를 기반으로 윤이상의 마음을 편안히 어루만지기도 하고, 심리적 기저를 파고들기도 하면서 뼈대를 만든다. 여기에 윤이상의 진솔하면서도 강인한 면모가 더해지면서 생명력이 생겨난다. 현대음악사와 동양철학, 한국 역사와 세계사적 비전에 대한 윤이상의 종횡무진한 답을 듣고 있노라면 그의 예술가적 위업보다 더 위대한 인류애와 민족애가 고스란히 느껴질 것이라 확신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가치는 루이제 린저가 서문에서 밝힌 내용을 통해 갈음한다.
“유럽화된 윤이상은 이 전기가 나오길 간절히 바랐지만, 그 안에 담긴 동양적 기질은 거기에 강하게 저항했다 … 그런 윤이상에게 계속 이야기하도록 할 수 있었던 유일한 논리는 정치적? 인도적인 것이었다. 우리들의 절박한 목적은 작고가 윤이상에 대해 쓰는 것이 아니고, 독제 체제에 의해 자유를 빼앗긴 한 예술가, 그리고 그런 운명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과 운명을 함께한 하나의 모델이자 증인이며 고발자인 한 예술가에 쓰는 것이라는 말이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