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 / 을유문화사 / 2009.6.30
– 프랑크푸르트의 현자 쇼펜하우어의 대표작
쇼펜하우어는 헤겔로 대표되는 이성 철학을 거부하고 세계를 이성이 아니라 의지에 의해 파악하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이성은 두뇌현상일 뿐이고, 의지의 제약을 받는 것이며, 의지의 부산물에 불과하다. 따라서 세계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성이 아니라 의지를 통해 다가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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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지성을 통해 파악되는 세계는 의지의 세계가 아니라 표상의 세계일뿐이다. 이러한 표상의 세계는 마야의 베일이며 충분근거율에 의해 제약된 세계이다. 의지에 기여하는 지성을 통해 우리가 파악하는 세계는 표상일 뿐이며 이러한 표상의 세계가 지닌 여러 특성들은 세계의 본래적인 특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표상의 세계가 지닌 한계들을 올바르게 인식할 때 본래적인 세계, 즉 의지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토대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 목차
제1판 서문
제2판 서문
제3판 서문
제1권(1-16장)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1고찰
근거율에 종속된 표상 / 경험과 학문의 대상
제2권(17-29장) 의지로서의 세계, 제1고찰
의지의 객관화
제3권(30-52장)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2고찰
근거율에 의존하지 않는 표상 / 플라톤의 이데아, 예술의 대상
제4권(53-71장) 의지로서의 세계, 제2고찰
자기 인식에 도달한 경우 의지의 삶에 대한 긍정과 부정
프랑크푸르트의 현자 쇼펜하우어의 삶과 작품-홍성광
○ 저자소개 :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Arthur Schopenhauer)
독일의 철학자이자 사상가. 유럽의 항구 도시인 단치히에서 상인이었던 아버지 하인리히 쇼펜하우어와 소설가인 어머니 요한나 쇼펜하우어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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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 철학은 물론 프로이트와 융의 심리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19세기 서양 철학계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흔히 염세주의자로 알려져 있지만, 인간 삶의 비극적 면면을 탐구한 사상가이며, 그의 철학은 근대 철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788년 단치히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793년 함부르크로 이주해 성장했고, 아버지의 바람에 따라 한동안 상인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1805년 아버지의 급작스러운 죽음을 계기로, 자신이 그토록 꿈꾸던 학자가 되기 위해 김나지움에 입학했다. 1811년 베를린대학교에 들어가 리히텐슈타인, 피셔, 피히테 등 여러 학자의 강의를 들었고, 1813년 베를린대학교 철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따기 위해 「충분근거율의 네 가지 뿌리에 대하여」를 집필, 우여곡절 끝에 예나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819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출간한 후 1820년부터 베를린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1839년 현상 논문 「인간 의지의 자유에 대하여」로 왕립 노르웨이 학회로부터 상을 받았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으며, 1860년 9월 21일 자주 가던 단골 식당에서 식사 중 폐렴으로 숨진 후 프랑크푸르트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주요 저서로는 『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충족이 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등이 있다.
– 역자 : 홍성광
서울대학교 독문과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토마스 만의 장편 소설 『마의 산』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역서로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문장론』, 니체의 『니체의 지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도덕의 계보학』, 토마스 만의 『마의 산』(상·하),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젊은 베르터의 고뇌』, 헤세의 『헤세의 여행』 『헤세의 문장론』 『데미안』 『수레바퀴 밑에』 『싯다르타』 등이 있다.
○ 출판사 서평
– 의지의 세계는 살아 있는 자연의 세계이다
쇼펜하우어는 헤겔로 대표되는 이성 철학을 거부하고 세계를 이성이 아니라 의지에 의해 파악하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이성은 두뇌현상일 뿐이고, 의지의 제약을 받는 것이며, 의지의 부산물에 불과하다. 따라서 세계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성이 아니라 의지를 통해 다가가야 한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인식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 즉 지성이 제한적인 것이며 의지에 의해 생겨났다고 주장한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는 사물들을 통해 다양하게 객관화되는데, 이렇게 의지가 객관화된 세계를 쇼펜하우어는 표상의 세계라고 규정한다. 시간과 공간, 인과율의 제약을 받지 않는 의지의 세계의 존재를 우리는 신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세계를 의지로서 경험하는 것은 주관과 객관의 구분에서 출발하는 인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관이나 관조를 통해 가능하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지성을 통해 파악되는 세계는 의지의 세계가 아니라 표상의 세계일뿐이다. 이러한 표상의 세계는 마야의 베일이며 충분근거율에 의해 제약된 세계이다. 의지에 기여하는 지성을 통해 우리가 파악하는 세계는 표상일 뿐이며 이러한 표상의 세계가 지닌 여러 특성들은 세계의 본래적인 특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표상의 세계가 지닌 한계들을 올바르게 인식할 때 본래적인 세계, 즉 의지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토대를 발견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주관을 위한 표상들을 선천적이며 보편적으로 결합시키는 형태들을 바로 근거율(Satz vom Grund)이라고 칭한다. 여기서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주관의 능력을 쇼펜하우어는 “인식하는 의식”으로 칭한다. 인식하는 의식은 외적, 내적인 감성, 그리고 오성과 이성으로 나누어지며, 거기서 또한 감응과 직관이 서로 구분된다. 오성은 감성에 의한 감응의 내용을 작업하여 대상에 대한 직관을 가능하게 하며, 개념과 판단이라는 사고의 추상적 작용에 관계하지 않는다. 추상적 인식은 이성에 의한 2차적 자료로서의 개념과 단어의 매개에 의한 활동이다. 근거율은 바로 이러한 인식하는 의식에 의해 표상으로서의 대상과 주관을 결합하는 선천적인 원리인 것이다. 여기서 전개된 표상 이론은 ?충분근거율에 대한 네 가지 뿌리에 대하여?에서만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전체적인 사고의 건축물을 지탱하는 사고이기도 하다. 쇼펜하우어는 표상들이 결합하는 다양한 방식에 따라서 근거율을 네 가지 형태들, 즉 네 가지 범주로 나눈다. 이것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경험과 학문의 대상으로서의 주관에 의한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선천적 원리인 것이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이러한 네 개의 충분근거율은 생성, 인식, 존재, 행위의 충분근거율이다.
1) 첫 번째 범주: 생성(Werden)에 대한 근거율이며, 오성에 의해 선천적으로 규정된다.
2) 두 번째 범주: 존재(Sein)에 대한 근거율이며, 이것은 내감과 외감이라는 감성에 의한 선천적인 직관의 형식이다.
3) 세 번째 범주: 인식(Erkenntnis)에 대한 근거율이며, 이성에 의한 개념과의 관계에 대한 법칙이다.
4) 네 번째 범주: 행위의 동기(Motiv)에 대한 근거율이며, 의욕(Wollen)의 필연적 법칙이다.
1) 생성의 충분근거율
이는 자연적인 사물들의 생성에 관한 것이다. 어떤 존재 사물도 충분한 근거 없이는 생성되지 않는다. 근거 없이 생성된 것은 하나도 없다. 주체에 대하여 객체는 ‘인과성의 법칙’이라는 충분근거율, 즉 생성의 충분근거율에 의하여 출현한다.
경험을 통하여 드러나는 실재적인 복합체에 대한 전체 표상은 그 안에서 객체들이 스스로 출현한 것이며, 그 때문에 그 상태들의 생성과 소멸은 시간의 흐름 안에서 상호 연결되어있다.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실재적 대상들 가운데서 하나의 새로운 상태가 나타나면 그것은 또 다시 다른 상태로 이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은 성과 중에서 우리는 전자를 원인, 후자를 결과라고 부른다. 모든 결과는 이전 상태의 것에 새로운 원인이 출현하여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다른 상태에 새로운 변화를 유발하는 원인으로 작용하는데 이 인과성의 사슬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2) 인식의 충분근거율
이것은 판단의 논리적 근거에 관한 것이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좁은 의미에서의 사유는 의식 안에 있는 추상적 개념들의 단순한 현존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판단 이론에서 논리학이 규정하는 수많은 한정들과 변형들을 통하여 둘 또는 그 이상의 판단들이 결합하고 분리되는 가운데 있다. 그처럼 분명하게 사유되고 진술된 개념 관계들이 바로 판단이다.
이러한 판단들과 관련하여 이유율이 타당성을 얻게 된다. 하나의 판단이 하나의 인식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충분한 근거를 가져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그 판단의 술어는 참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진리는 판단과 그 판단의 근거가 되는 다른 어떤 것과의 사이에서 성립되는 관계이다. 이 경우에 판단의 근거는 유형들의 의미 있는 다양성을 허용하고 있다. 그로부터 판단이 비롯되는 바로 그것은 언제나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근거라는 이름이 적합하다. 쇼펜하우어는 이와 같은 인식 근거를 이성이라고 부른다.
3) 존재의 충분근거율
이는 수학적 사태들의 연관에서의 존재 근거에 관한 것이다. 인식능력에 대하여 대상들이 드러나려면 시간과 공간이라는 완전한 표상들의 형식적인 부분, 즉 외적 감각과 내적 감각의 형식이 있어야 한다. 인과성의 지성 형식이 의식 안에서 인식의 질료들과 더불어 있는 것과 반대로, 그것은 순수직관으로 서 전적인 표상들과는 구분되며 표상능력의 대상들과 분리되어 있다.
시간과 공간은 그 모든 부분들이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 있으며, 각각의 부분들은 다른 부분들에 의하여 규정되고 제약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공간에서서의 그 관계는 위치이며, 시간에서는 연속이다. 이들 각 부분들 사이의 상호연결을 지배하는 법칙이 바로 존재의 충분근거율이다. 쇼펜하우어가 분류한 세 번째 대상들은 수학적인 것이고 기하학과 수학에 대한 인간의 지식은 이 법의 지배를 받는다고 한다.
4) 행위의 충분근거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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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심리적인 영역에서의 동기에 관한 것이다. 표상 능력의 4번 째 대상은 내점 감관의 직접적인 대상인 ‘의욕의 주체’이다. 이것은 인식하는 주체에 대한 대상이며, 공간 속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시간에서만 나타난다. 이는 인식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욕구하는 것으로서의 주체이다.
욕구 또는 의욕의 주체는 자의식에 직접적으로 주어져 있으므로 의욕이 무엇인지를 직접 기술할 수 없다. 우리는 인지된 모든 결정에 대해서 그 이유를 물으며, 그로부터 행위의 근거, 즉 지금 수행하고 있는 행위의 동기가 전제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동기는 내부에서 본 인과성’이다.
이처럼 주체와 그 의지 행위의 연관성에 대한 인간의 지식을 지배하는 원리를 행위의 법칙, 즉 행위의 충분근거율이라고 한다. 인간이란 동기에 따라서 행위하며, 이 동기는 전혀 다른 매개체 안에서 전혀 다른 유형의 인식을 서술한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유형의 충분근거율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구성하는 선천적인 원칙이다. 충분근거율은 모든 객관의 본질적인 형식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세계에 대한 인식 조건인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충분근거율에 의하여 기술된 현상적 세계이며, 그것은 표상으로서의 세계, 즉 우리가 지각하는 객관 세계의 존재성은 세계를 지각하는 나의 정신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충분근거율은 스콜라철학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영원한 진리가 아니라, 공간과 시간의 필연적 연관으로서 나타나는 인과성 또는 인식 근거의 법칙으로서 상대적이며 제약된 현상에서만 타당하다. 세계의 내적 본질인 물자체는 결코 충족 이유율을 실마리로 하여 발견되는 것이 아니고, 이 원리 에 인도되어 도달한 것은 모두 그 자신도 의존적, 상대적이고 현상에 지나지 않으며 물자체는 아니다. 그리고 객관과 더불어 주관이 있고 주관과 더불어 객관이 있기 때문에 단순히 근거에 대한 귀결로서 객관을 주관에 또는 주관을 객관에 첨가할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선천적인 진리들이 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이미 전제하고 있다.
표상하는 자(주체)에게 나타나는 표상(객체)은 바로 세계이다. 표상은 시간, 공간, 인과성의 형식들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시간, 공간, 인과성은 근거율의 일반적 원리로서 주체와 객체의 상호의존성을 전제로 한다. 이처럼 경험의 실재성은 인과성의 법칙에 근거를 두고 있다. 객체와 표상은 동일한 것이고 직관적인 객체의 존재는 표상 작용이고, 그것이 사물의 현실성 을 구성한다.
그러므로 인과성으로 나타난 공간과 시간 속에 직관된 세계는 완전히 실재하고 있으며, 완전히 나타나 있는 그대로의 것이며, 오직 표상으로서 인과성의 법칙에 의하여 연관성을 가지며 나타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계의 경험적 실재성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객관 세계 전체는 어디까지나 주관의 제약을 받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은 동시에 선험적 관념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는 세계가 허위나 가상이라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세계는 있는 그대로의 것이며, 충분근거율을 공통적인 유대로 가지고 있는 표상인 것이다.
위에서 서술된 ?충분근거율에 대한 네 가지 뿌리에 대하여?에서 전개된 근거율의 네 가지 형태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1부에서 시간, 공간 인과성이란 선천적인 경험의 형식으로 압축된다. 여기서 시간, 공간 인과성이라는 선천적 형식은 근거율의 일반적 원리의 형태들이며, 항상 경험의 개별적인 경우에 적용된다. 따라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1권에서 주관에 의해 선천적으로 주어진 근거율에 의해 학문적 인식이 가능한 세계가 바로 현상(표상)의 세계라는 점에서 쇼펜하우어의 표상 이론은 물 자체가 아닌 현상의 세계에 대한 선천적인 인식 조건을 다룬 칸트의 인식 이론과 일치한다.
쇼펜하우어는 그의 초판 서문에서 자신의 철학사상의 원천이 플라톤, 칸트, 우파니샤드임을 밝히고 있다. 사실 그는 이 세 가지 사상을 바탕으로 철학체계를 세웠으며, 나아가서 자신의 독창적인 철학적 해성을 통해 이것들을 완전히 자신의 철학으로 체계화하였다.
제1권은 쇼펜하우어의 학문 이론으로서 그의 박사 논문인 ?충분근거율의 네 가지 뿌리에 대하여?에서 전개된 인식론을 기반으로 하여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는 명제로부터 출발한다. 표상의 세계는 경험과 과학적 지식의 대상으로서 주관의 인식 능력에 의한 “충분근거율”이라는 법칙 하에서 인식이 가능하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학문이란 단순한 인식의 축적이 아니라 결합된 인식의 전체며, 인식의 작용들을 규정하는 근거율로부터 결과되는 필연성에 대한 인식이다. 따라서 모든 이론적인 지식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율은 주관에 의해 선천적으로 주어진 인식을 위한 공통적인 표현인 것이다.
세계는 시간, 공간, 인과성 같은 지성의 구성물의 도움을 받아야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구성물들은 이 세계를 현상으로서, 즉 시간, 공간 면에서 병렬, 연속된 다수의 사물로서만 보여줄 뿐 칸트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물자체로서 보여주지는 않는다. 쇼펜하우어는 모든 것을 표상으로서, 주관에 대한 객관으로 고찰하고, 각 개인에게 세계에 대한 출발점이 되는 자신의 신체까지도 다른 모든 실재하는 객관처럼 인식할 수 있다고 하는 측면에서만 본다. 즉 신체는 우리에게 하나의 표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러한 객관을 객관에만 속하는 시간, 공간 및 인과성에서 고찰하며, 그의 관점은 결코 관념론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쇼펜하우어는 칸트와 마찬가지로 경험을 통하여 세상을 파악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때의 파악할 수 있는 세상은 실재가 아닌 현상, 관념으로서의 세계이다.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시간과 공간 형식은 받아들였으나 12개의 범주는 인과성이라는 하나의 범주, 즉 충분근거율 로 단순화하였다. 충족 이유율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반드시 그 존재의 이유와 근거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는 원리이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박사 논문인「충분근거율의 네 가지 뿌리에 대하여」에서 현상과 물자체의 구분에 겨냥하여 이성의 한계에 대한 논의를 통해 이성철학에서 의지철학으로 넘어간다. 이러한 충분근거율은 표상을 형성함에 있어 네 가지 단계로 진행되는데, 그것은 경험 전체를 완성하는 표상(실제적인 대상의 표상), 표상에 대한 표상(개념), 순수 직관의 표상, 의지의 주관이다.
제2권에서는 표상된 개념들의 본질을 고찰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인간은 외적으로 몸 또는 현상으로서의 자신을 알고 있고 내적으로는 만물의 첫째가는 본질의 일부, 즉 의지가 바로 자신임을 알고 있다. 의지는 물자체이다. 즉 그것은 단일하고 헤아릴 수 없으며 변화할 수 없고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있으며 원인도 목적도 없다. 현상의 세계에서 그것은 현실화의 상승 계열 속에 반영되어 있다. 무기적 자연의 힘 속에 있는 맹목적인 충동에서 시작해서 유기적 자연(식물과 동물)을 거쳐 합리성에 따르는 인간 행동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욕망, 선동, 충돌의 거대한 사슬이 펼쳐져 있다. 이러한 사슬은 높은 형태가 낮은 형태를 상대로 벌이는 계속적인 싸움, 목표도 없이 줄기차게 이어지는 영원한 열망, 참상 및 불행과 떼래야 뗄 수 없게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이 사슬의 끝에는 죽음이 있다. 죽음은 살려는 의지에 가해지는 강력한 비난으로서, 각 개인에게 ‘이제 충분하냐’는 물음을 던진다. 의지가 개별적 대상을 통해 다양화되는 조건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별화의 원리다.
이러한 개별적 대상의 생성과 변화에 대한 인식은 오로지 주관에 의한 인과 법칙 하에서 가능하다. 하나의 통일적인 의지가 표현되는 가시성과 판명성의 정도에 따라서 가장 적합하게 의지가 객관화되는 다양한 단계가 있으며, 그 단계는 다시 개별화의 원리에 따라 무수한 개별자들 속에서 표현되는 것이다. 의지가 객관화되는 단계는 낮은 단계의 돌이나 식물로부터 높은 단계의 동물이나 인간에 이르기까지 무한한 등급을 지닌다. 의지가 객관화되는 각 단계마다 사물의 영원한 형식들이 있으며, 이러한 사물의 영원한 형식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별화의 원리와 인과 법칙에 종속되어 있지 않다. 사물의 영원한 형식은 플라톤적인 의미에서의 바로 이념들이며, 의지의 가장 적합한 객관화다. 이러한 이념들은 물 자체로서의 의지와 근거율에 종속된 표상의 세계에 속한 개별자들 사이를 매개한다. 이념들은 의지가 객관화되는 단계로서 플라톤적인 의미에서의 표본상들이며, 개별자들은 이러한 표본상들에 대한 일종의 모상들인 것이다.
의지가 객관화된 가장 낮은 단계는 합법칙적으로 표현되는 자연의 보편적인 근원적인 힘들로서 이념이다. 우리가 자연 법칙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자연력이 시간과 공간의 물질 속에서 출현하는 자연 현상의 변화에 대한 인과 법칙을 의미한다. 자연의 보편적인 힘들은 마치 중력, 불가입성처럼 모든 물질에 예외 없이 혹은 응집력, 유동성, 전기, 수축성, 자성처럼 특정한 물질의 특성에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 법칙에 따라 출현한다. 이러한 자연의 물질세계라는 가장 낮은 의지의 객관화의 단계에서 의지는 맹목적이고 둔감하며 인식 없는 충동으로 표현되며 미약하며 단순하다. 의지는 자연 속에서 개별적인 성격이 없이 합법칙적으로 출현하며, 물리학이나 화학은 이에 대한 법칙을 탐구하는 것이다.
식물의 영역에서 의지는 무기물에서보다 좀 더 분명하게 객관화된다. 거기서 자극은 의지의 현상에 대한 인과 형식이며, 의지는 어둡게 충동하는 힘으로 작용하면서 결국 동물적인 현상에서 영양을 섭취하는 부분으로 출현한다. 의지가 객관화되는 더 높은 단계에서는 결국 개별자는 단순히 자극에 따라 반응하면서 생존 보존만을 하지 않는다. 거기서 동기의 법칙에 따른 운동과 인식은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개별자는 자기 보존과 종족 보존이라는 생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무기체와 식물의 영역에서 의지는 확실성과 합법칙성을 가지고 현상하지만, 자신의 현상에 대한 표상을 지니지 못하며 순진하다. 그러나 동물과 인간이라는 의지의 객관화의 가장 높은 단계에서는 자신에 대한 표상과 개별자의 종족 보존을 위해서 인식은 필연적이다.
동물들은 단순히 지각의 활동이라는 오성의 작용에 속한 현재와 관련된 직관적 표상을 지닌다. 의지의 객관화의 최고 단계에 있는 인간은 이중적인 인식을 지니는데, 직관적 인식과 좀 더 높은 성찰 능력을 지닌다. 거기서 인간은 이성에 의해 추상적 능력에 의해 신중하게 미래를 예측하고 과거를 되돌아보며, 자신의 고유한 의지 현상을 분명하게 의식한다. 이성의 출현으로 모든 의지의 표현은 솔직성은 잃게 되지만, 이와 반대로 비유기적인 자연에서는 아주 엄격하게 합법칙적으로 개체성을 띠지 않은 채 나타난다. 인간에게 이성적이고 직관적인 인식은 근원적으로 의지 그 자체에서 출현하며, 의지가 객관화되는 최고 단계의 본질에 속한다. 이러한 인식은 모든 인간에게서 개별자의 생존 보존을 위한 수단으로 기여한다.
의지 그 자체는 맹목적이며 그의 현상의 대부분이 무의식적으로 나타난다. 의지가 뇌를 산출하자마자 뇌 속에서 고유한 자아에 대한 의식, 즉 인식하는 자아와 의욕 하는 자아와의 일치가 이루어진다. 단순한 의지는 뇌를 통해 인식 의욕으로서 객관화된다. 의지의 객관화는 신체에 의해, 신체는 뇌를 통하여 조건지어진다. 즉, 동물에게서 그의 욕구에 따른 외적인 인상들의 수용성은 신경 체계와 뇌의 발전에 따라 상승하며, 뇌의 작용은 의식을 형성하게 하여 시간과 공간 인과성이라는 형식을 통해 세계를 표상한다. 지성은 상승된 욕구로부터 출현하는 의지의 우연적인 속성에 지나지 않으며, 갈망, 욕구 의욕, 거부감, 회피 등이 오히려 의지에 본질적인 것이며 모든 의식의 기반이다. 특히 인간에게서 의지의 표현은 이러한 고도의 인식 능력인 지성을 수단으로 인간의 개성 속에서 뚜렷하고 판명하게 나타나며, 의지와 인식의 불화는 바로 인간에게 고통, 불만족, 고뇌를 준다. 고유한 인간의 본질은 인식하는 의식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의지 그 자체에 있으며, 인간의 성찰하는 추상 능력도 오로지 의지의 도구일 뿐이다. 물론 인간만이 자기성찰 능력과 추상적인 개념적 사고 능력으로 다른 자연 현상에서의 의지의 가시성을 명료하고 의식적으로 벗겨낼 수 있지만, 그러나 이러한 능력 자체도 결국 의지를 표현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결국 자연계에서 수없이 많은 종들과 개별자들은 의지를 스스로 표현하는 데서 물질로부터 형태를 생성하기 위한 끊임없는 싸움을 벌인다. 다양성과 그 엄청난 차별성을 지니고 의지가 객관화되면서 개별자들은 서로 간에 끊임없이 화해할 줄 모르는 싸움을 벌이고 있다. 이러한 의지가 각 단계별로 객관화되는 과정에서 각 단계의 이념의 실현과 관계하여 의지의 가장 적합한 객관화를 추구하는 내적인 합목적성이 발견된다. 개별자는 경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개별화의 원칙에 종속되어 있으나, 예지적인 성격은 종이나 모든 보편적인 자연력에서 발견되며, 시간과 공간 속에서의 개별화의 원칙으로부터 해방되어 있다. 합목적성이란 바로 개별자가 이념으로 향하는 그러한 목적성을 의미한다. 의지의 자기표현뫀 가장 적합한 객관화를 향한 자신의 형태들과 물질과의 끊임없는 싸움이다. 이에 대해 쇼펜하우어는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종의 보존을 위해 동물들은 주저하지 않고 식물들을 자신의 식량으로 사용하고 인간 역시 서로를 탈취하는 자연의 충동의 사슬에 결속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 1·2권이 의지를 긍정적인 방식으로 다루는 반면, 미학과 윤리학을 다루는 제 3·4권은 의지의 부정이 해방 가능성임을 지적함으로써 앞의 2권을 넘어선다. 이 같은 부정을 보여주는 천재와 성인을 이 책의 주인공으로 불러옴으로써 이 책은 비존재가 존재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갖는다는 ‘염세주의적’ 세계관을 표방한다. 예술은 인간에게 열정이 더 이상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 의지 없는 사물관을 요구한다. 여러 수준의 예술은 의지 실현의 수준과 대응한다. 가장 낮은 수준의 예술은 건축학이며 그 다음은 시문학 예술이고, 가장 높은 수준의 예술은 음악이다. 그러나 인간은 예술을 통해서는 단지 순간적으로만 의지의 봉사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진정한 해방은 오직 자아에 의해 부과된 개체성의 경계를 무너뜨림으로써만 달성될 수 있다. 동정적이고 비이기적이며 친절한 행동에 공감하는 사람, 남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는 사람은 누구나 모든 민족과 모든 시대의 성인들이 금욕주의를 통해 달성한 것, 즉 생존하려는 의지의 포기에 가깝게 다가가 있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인간학과 사회학은 헤겔과는 달리 국가나 공동체에서 출발하지 않고 홀로 힘써 일하는 고통 받는 인간에 초점을 맞추어, 그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지키면서 남과 더불어 살 가능성을 보여준다.
제3권에서 표상은 지각되는 사건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이성의 산물로 이해되어야 한다. 여기서 플라톤의 이데아라는 개념이 엿보이며, 쇼펜하우어는 이 개념을 통해 자신의 예술론을 발전시키고 있다. 그렇지만 쇼펜하우어에게서 이념은 현상으로서의 대상에 대한 인식의 최고로 가능한 형식이기 때문에 분명히 플라톤의 이념과 다르다. 왜냐하면 플라톤에게서 이념에 대한 직시는 어떠한 현상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이념에 대한 자신의 개념을 이른바 생성, 변화, 소멸하는 대상에 대한 불변하는 형식인 플라톤의 이념과 동일시하고 있다. 플라톤의 이념들은 유기체와 비유기체에서의 모든 특정한 종들이며, 근원적으로 변하지 않는 형식이며 모든 자연적인 물체의 특성이며 또한 자연 법칙에 따라 스스로를 계시하는 보편적인 자연력들이다. 쇼펜하우어에게서 이념은 물 자체로서의 의지에 대한 가장 적합한 객체성으로서 이미 주관을 위한 직관적인 표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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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은 본질적으로 사물의 근원적인 통일이며, 주관의 인식의 조건을 통하여 개별적인 대상의 다양성으로 해체된다. 이성에 의한 성찰은 이러한 통일을 다시 수립하지만 단지 개념의 추상성에 의지하며, 이념의 직관성이 지니고 있지 않다. 이념은 근거율에 종속되어 있지 않고 시간, 공간 인과성에 묶여 있지 않다. 따라서 주관이 개별자로서 인식하는 한 모든 인식의 형식은 근거율에 종속되기 때문에, 개별자로서의 주관으로부터 해방될 때 이념은 비로소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념에 대한 인식은 “언제, 어디서, 왜, 무엇을 위해서”라는 사물의 관계성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자유롭다. 이것은 표상으로서의 개별적인 대상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해방된 일종의 예외적인 인식의 경우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이념에 대한 직관은 쇼펜하우어에게서 오로지 미적 직관에 의해 가능하다. 따라서 미적인 직관은 단순히 쇼펜하우어의 인식 이론에서 잘 알려진 오성의 인과성에 의한 직관의 개념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미적인 직관에서 공간, 시간, 인과성은 어떠한 역할도 하지 않으며, 지성은 의지와 더불어 근거율로부터 해방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적 직관은 항상 지적이기 때문에 또한 단순한 감각적 인상이 아니다. 주관이 대상에 대한 “명석한 거울”이 되며, 이것은 대상에 대한 전체적인 의식이다. 의지로부터 해방되어 대상에 완전히 몰입되어 인식되는 것은 더 이상 개별적 대상이 아니라 대상의 영원히 변하지 않는 형식, 즉 이념이다. 의지로부터 해방된 인식이란 바로 대상에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미적 직관으로부터 주관은 시간으로부터 해방된 순수한 의지 없는 인식의 주관이 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에게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인식하는 주관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인식의 형식들은 학문이며, 이것은 근거율에 의해 인식되는 항상 변화하는 개별적 현상과 관계한다. 이러한 학문은 순수한 주관에 의한 이념에 대한 인식으로 향하지 않는다.
예술의 과제는 사물의 내적인 본질로 향한 인식의 순간을 보존하여 순간의 무상성을 뛰어넘는 것이다. 모든 삶의 흐름에서 금방 사라지는 사사로운 개별적인 것은 예술을 통해 보편적인 전체로 재현된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예술작품은 인간들 중에서도 가장 객관적으로 사유하는 천재의 산물이고, 그 천재의 활동은 전적으로 지성 속에 집중잵어 나타나며, 창작된 작품 속에서 세계를 순수하게 객관적으로 포착한다. 일상적인 의미에서 볼 때 무용한 예술작품은 자율적이고 완전히 독립적인 산물이다. 그리고 천재는 그 산물을 통해 자신을 객관화시키며, 헤겔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신을 방출하는 것이다. 목적 없는 합목적성으로서의 예술, 관조로서의 무관심한 만족, 이것들이 서로 결합하고 뒤섞이는 가운데 예술의 영지적 성격이 강조된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칸트는 직관적이며 직접적인 아름다움 그 자체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미에 대한 판단, 이른바 매우 흉측한 취미 판단이라고 일컫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미적 판단이란 주관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과정에 대한 발언이며, 마치 사물의 특성에 대한 판단처럼 보편타당한 전달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칸트의 미에 대한 판단론을 마치 색을 보지도 않고 색에 대한 발언을 듣고 색에 대한 이론을 구성하는 최고로 이해력이 높은 장님이 만든 이론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칸트의 미적 판단론은 쇼펜하우어 미학에서의 순수 주관의 미적인 관조 상태에 영향을 미친다. 대상에 몰입하여 이념을 직관하는 순수 인식의 주관은 스스로 표상의 세계를 인식하는 개별자임을 잊고 의지로부터 해방된 무욕의 순간을 체험한다. 미적인 관조의 순간은 표상의 세계 속에서 지성에 의한 인식이 의지의 수단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오로지 이념에 대한 순수한 직관의 상태에서 획득되는 미적인 만족감이다. 이 순간이야말로 의지와 인식과의 자기 분열로부터 초래하는 욕구,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순간인 것이다.
칸트에게서 예술은 자연미를 표본으로 하여 미적 이념을 표현하는 천재의 능력을 통해 전개된다. 그러나 쇼펜하우어에게서 자연 혹은 현실 세계에서 발견되는 이념에 대한 인식으로서의 아름다움은 우연적이고 순간적이며, 다시 시간과 공간 인과율에 놓인 표상의 세계 속으로 금방 사라진다. 그러나 예술은 자연 속에서 발견한 이념을 예술 작품 속에 반복하여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으로 보관한다. 따라서 쇼펜하우어에게 예술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미의 형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자연미보다 우위에 있다.
숭고미의 체험을 칸트는 자연의 영역에 국한시켜 설명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예술 작품의 영역에까지 확대시킨다. 쇼펜하우어에게 자연에서의 숭고미는 자연의 무한한 크기와 위력에 직면하여 표상의 세계에서의 인식의 주관인 개별자로서의 무력함과 표상의 세계에 대한 무가치성을 깨닫고, 개별자로서의 의지의 체념을 거쳐 의지 없는 순수 주관으로의 고양되는 감정을 통해 체험된다. 이것은 예술 작품 중에 특히 비극 작품에서도 역력히 나타난다. 비극 작품에서 체험되는 것은 순수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바로 숭고미에 대한 체험인 것이다. 칸트에게서 숭고미는 현상으로서의 감성계에 속한 인간의 실존에 대한 철저한 한계 인식과 이에 대한 극복하는 도덕적 주체자가 자신의 내면의 도덕적 이념을 일깨워서 일어나는 정신적 감정이다. 쇼펜하우어에게서 숭고미는 표상의 세계에서의 개별자가 의지의 싸움을 거쳐 세계의 본질을 직관하는 순수 인식의 상태에서 일어나는 자기 고양 감정인 것이다.
스스로 유일한 칸트주의자라고 말한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철학 사상에 대한 수용 과정을 거쳐 독자적인 의지의 형이상학이라는 체계 속에서 자신의 미학 사상을 전개해간다. 쇼펜하우어는 칸트철학에 힘입어 표상의 세계의 배후에 세계의 근원으로 가정한 의지를 칸트의 물 자체와 비유하였으며, 이러한 세계의 근원인 의지가 가장 완전하게 표현된 이념을 예술의 대상으로 한 예술철학을 전개시켰다. 그리고 그의 미학은 니체의 미학 사상으로 넘어가는 매우 중요한 교량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제4권에서 쇼펜하우어는 맹목적인 의지의 단념에 대해 상세히 고찰한다. 여기서 쇼펜하우어는 부정과 단념에 과한 동양의 종교적, 철학적 견해를 강조하고 있다. 쇼펜하우어는 생식 행위가 삶에의 의지의 단적인 표현이라는 이론을 전개한다. 그의 이론은 리비도(Libido)가 인간의 보편적 충동이라고 설명하는 프로이트를 연상시킨다. 현상계 안에서 자신의 의지를 지각하는 개별자들은 스스로를 위해 모든 것을 욕구하는데,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방식으로 이기심이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세계의 원인이 되는 맹목적인 삶에 대한 의지에서 출발하여 인과적 연쇄에 의해 사로잡히지 않고 벗어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남는다. 그러나 삶은 끊임없는 욕구의 계속이며, 따라서 삶은 고통일 수밖에 없으므로, 이로부터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무욕구의 상태, 즉 이 의지가 부정되고 세계가 무로 돌아가는 것으로만 가능하다. 이렇게 하여 엄격한 금욕을 바탕으로 인도 철학에서 말하는 해탈과 정적의 획득을 궁극적인 이상의 경지로 제시하는 쇼펜하우어는 자아의 고통에서 벗어나면서부터 시작되는 타컀의 고통에 대한 동정, 즉 연민을 최고의 덕이자 근본윤리로 본다.
서구의 전통에서 철학자들은 인간을 영혼(정신)과 신체로 나누어, 영혼에는 불멸성과 완전성의 지위를, 신체에는 유한성과 불완전성의 지위를 부여했다. 그리하여 신체는 영혼이나 정신보다 열등하고 항상 오류와 죄를 이끄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일찍이 스피노자는 이러한 생각에 반대하여『에티카』에서 “사람들은 많은 것이 정신의 결단에 담겨 있다고 말하지만, 반대로 경험은 신체가 활발하지 못할 때 정신이 적합한 사유를 하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가?”라고 말하면서 사람들의 무지를 비판하고 있다.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 나오는 ‘마부와 그의 마차를 끄는 두 마리의 말’에서, 한 마리는 마부에게 순응하는 아름답고 기품 있는 말이고, 다른 한 마리는 성격이 사나워 다루기가 쉽지 않은 말이다. 한 마리는 이성의 세계를 구현하고 있고, 다른 한 마리는 욕ㅁ아과 충동의 세계를 구현하고 있다.
근대 철학자 데카르트는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전 철학자들보다 더 분명하게 영혼과 신체를 분리해냈다. 그에게 정신은 지적 능력을 나타내는 말인 반면, 신체는 하나의 기계에 불과했다. 정신과 신체를 철저히 나누고 앎의 문제를 정신에만 한정함으로써 데카르트는 나중에 감각으로부터 분리된 순수한 인식을 얻고자 한 많은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의 성직자들 역시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 속한다. 성경은 신이 인간을 흙으로 빚고 나서 자신의 숨결을 불어넣었다고 말한다. 영혼은 신에서 직접 나온 것이므로 그 자체로 영원불멸할 것이다. 프로테스탄트들도 신체 속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욕망이나 충동을 사악한 것으로 규정하여 금욕주의를 생활지침으로 삼고 있다.
쇼펜하우어가 주된 관심을 가지는 의지의 세계는 살아 있는 자연의 세계이다. 생물이 태어나고 자라며 번식하는 생명 현상의 본질을 그는 의지로 파악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자연의 의지를 우리 자신의 자연인 몸을 통해 직접 경험한다. 우리가 몸 안에서 느끼는 온갖 충동과 본능, 욕망, 격정 및 성적 에너지 등은 바로 몸이라는 인간적 자연의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인간 생명의 본질을 이루는 적나라한 요소들이다. “그 때문에 신체의 부분들은 의지를 발현시키는 주된 욕구와 완전히 상응해야 하며, 그러한 욕구의 가시적인 표현이어야 한다. 즉 치아, 목구멍, 장기는 객관화된 배고픔이고, 생식기는 객관화된 성욕이다.” 따라서 삶에 대한 의지란 성을 매개로 특정한 개체 속에 자신을 객관화하고자 하는 개체화의 의지이다.
이처럼 신체와 성에 주목하고 있는 쇼펜하우어의 의지 철학은 당대 생물학 연구의 성과를 철학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은 당대의 자연과학적 발전에 대한 철학적 응답이었고, 자연과학 및 실증주의 시대의 형이상학이었다. 그리고 그의 의지 철학은 서구 철학의 역사에서 그동안 주목을 받지 못했던 신체와 성이 본격적인 철학적 담론의 주제로 떠오르게 되는 계기를 제공하게 되며, 이후 니체와 삶 철학을 거쳐 하이데거, 가다머로 이어지는 반합리주의의 노선의 출발점이 된다. 또한 쇼펜하우어의 의지 개념은 현대의 문화적.예술적 담론에서 주요 범주로 다루어지는 욕망의 범주에도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이리하여 신체와 성을 자연적 본질로 하는 쇼펜하우어의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성에 따라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정신적인 존재이기에 앞서 감성에 따라 충동적으로 살아가는 육체적 존재로 이해된다. 그동안 인간의 이성과 인간 정신의 자유의지가 인간의 행동과 삶을 지배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으나 이제 그것이 착각이자 허구임이 폭로되면서, 신체의 의지가 지배하는 욕망의 현실이 인간적 삶의 본질적 모습임이 입증된다. 의지 그 자체는 궁극적으로 자기 충족이라는 자기 목적 이외에 다른 어떤 목적도 지향하지 않으며 아무런 근거나 이유도 없이 맹목적으로 움직이는 자생적인 힘인 것이다. 일시적 충족은 가능하나 영원한 충족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맹목적 의지에 따라 살아가는 삶이란 필연적으로 고통과 고뇌의 연속일 뿐이라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의지 철학은 성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던 세기 전환기에 이르러 열광적으로 수용된다. 당시의 논의에 그의 철학이 강력한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의 의지 철학에 영향을 받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오히려 영혼이야말로 신체 속에 들어 있는 그 어떤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차라투스트라에게 신체는 영혼이나 정신보다 큰 개념이다. 이러한 신체를 그는 자아와 구별하여 자기(Selbst)라고 부른다. 니체는『힘에의 의지』에서 “정신을 믿는 것보다 우리의 가장 원초적인 소유물이자 가장 확실한 존재인 신체를 믿는 쪽이 낫다”고 말한다. 그는 정신이나 영혼, 주체에 대한 비판을 통해 신체의 중요성을 복원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신체는 정신의 상대물인 육신이 아니라 정신이나 육신보다 높은 차원의 것이다. 토마스 만은 에세이 「프로이트와 미래」(1936)에서 “수천 년 간의 믿음을 뒤엎고 정신과 이성에대한 자연적 본능의 우월권”을 관철시킨 “어두운 혁명”의 공로자로 프로이트에 앞서 쇼펜하우어를 지목하였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쇼펜하우어의 의지 철학이 이루어놓은 혁명을 계승한 것임을 분명히 언급한다. 쇼펜하우어가 무의식을 뚜렷한 개념어로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물 자체로서의 의지는 파괴할 수 없는 인간의 진정한 내적 본질을 이룬다. 그러나 의지는 그 자체로 무의식적이다”라는 말에서 볼 때 그의 의지 개념이 무의식 개념을 함축하고 있는 것은 명백하다. 이로써 무의식 세계인 의지의 세계가 의식 세계인 표상의 세계를 지배한다는 쇼펜하우어의 의지 철학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을 철학적으로 선취하고 있는 셈이다. 다만 프로이트의 무의식이 주로 인간에게만 한정되어 인간의 의식적 삶을 결정짓는 심리학적 개념이라면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인간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의 내적 본질을 일컫는 형이상학적 개념이다.
○ 추천평
쇼펜하우어의 사상은 무한히 현실적이다. … 그의 철학은 젊은이가 오늘날 예감하고 있는 것을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다. – 막스 호르크하이머
나는 쇼펜하우어를 ‘현대적’이라고 불렀다…그를 미래적이라 불러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개성의 요소들, 그것의 어스름한 연관성, 그의 내부에서의 볼테르와 야콥 뵈메의 혼합, 가장 하부에 있는 것과 가장 어두운 것을 알리는 고전적이고 명료한 그의 산문의 역설, 인간의 이념에 대한 경외심을 결코 부정하지는 않는 그의 자존심 강한 인간 혐오, 요컨대 내가 그의 비관적 인도주의 정신이라 칭한 것이 내게는 미래의 분위기가 가득한 것으로 생각된다. – 토마스 만
나는『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고 즉각 ‘그래, 바로 이것이야’라고 생각했다. – 앙드레 지드
이보게, ‘글을 잘 쓴다’고 해서 정말이지 쇼펜하우어 철학 체계에 대한 비판의 글을 쓰는 것이 정당화되지는 않아. 게다가 이미 이야기된 엄청난 양의 쓰레기 더미를 내던지는 나의 능력을 자네가 믿는다면, 내가 이 ‘일급의 천재’에게 품고 있는 존경심을 자네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을 거야. – 프리드리히 니체
무의식적 정신 과정을 가정한 사실이 학문과 삶에 커다란 파장을 가져올 것임을 분명히 의식한 사람은 극소수였다. 그런데 덧붙여 말하자면 정신분석이 맨 먼저 이런 일을 한 것이 아니었다. 몇몇 유명한 철학자, 무엇보다도 위대한 사상가 쇼펜하우어를 그 선구자로 들 수 있다. 그의 무의식적인 ‘의지’는 정신 분석에서 말하는 정신적 충동과 같은 말이다. 그것 말고도 그 사상가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과소평가되는 성적 본능 의미를 거듭 강조하여 상기시켜주었다. – 지그문트 프로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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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