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이념과 문학 : Marxism and Literature
레이먼드 윌리엄스 / 문학과지성사 / 1993.5.31
영국의 뛰어난 현대 문학 이론가인 저자의 1977년도 신간인 이 저서는 문학을 포함한 문화와 마르크시즘과의 관련성 문제를 기본 개념들, 문화 이론, 문학 이론에 걸쳐 이론적으로 탐구하면서 역사적, 총체적, 사회적, 물질적 차원의 접근을 해명한다.
○ 목차
Ⅰ. 기본개념들
Ⅰ-1. 문화
Ⅰ-2. 언어
Ⅰ-3. 문학
Ⅰ-4. 이데올로기
Ⅱ. 문화이론
Ⅱ-1. 기저와 상층구조
Ⅱ-2. 결정
Ⅱ-3. 생산력
Ⅱ-4. 반영에서 매개에 이르기까지
Ⅱ-5. 전형화와 상동관계
Ⅱ-6. 헤게모니
Ⅱ-7. 전통 제도, 그리고 형성물
Ⅱ-8. 지배적인 것, 잔여적인 것, 그리고 부상적인 것
Ⅱ-9. 정서와 구조들
Ⅱ-10. 문화 사회학
Ⅲ. 문화이론
Ⅲ-1. 글의 다양성
Ⅲ-2. 미적상황과 그 밖의 상황들
Ⅲ-3. 매개체에서 사회적 행위에까지
Ⅲ-4. 기호와 기호법
Ⅲ-5. 인습적 규칙들
Ⅲ-6. 쟝르
Ⅲ-7. 형식들
Ⅲ-8. 저자들
Ⅲ-9. 제휴와 참여
Ⅲ-10. 창조적 실제
○ 저자소개 : 레이먼드 윌리엄스 (Raymond Williams)
1921년에 태어나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하고, 1974년부터 1983년까지 케임브리지 대학의 연극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1988년 1월 26일 세상을 떠났다. 문화 연구에 끼친 윌리엄스의 영향은 엄청나다. 그는 문화 이론, 문화사, 텔레비전, 언론, 라디오와 광고에 대한 이해에 매우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앨런 오코너(Alan O’Connor)의 책의 참고문헌에 나오는 인쇄된 윌리엄스의 저작 목록만도 39쪽에 이른다.
그의 기여는 그가 웨일스 노동계급 출신(그의 아버지는 철도 신호수였다)이라는 것과 또 학자로서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연극과 교수였다는 사실을 두고 볼 때 더욱 놀랍다.
저서로는 『드라마와 공연(Drama in Performance)』(1954), 『문화와 사회(Culture and Society) 1780∼1950』(1958), 『장구한 혁명(The Long Revolution)』(1961), 『입센에서 브레히트까지의 희곡(Drama from Ibsen to Brecht)』(1968), 『시골과 도시(Country and City)』(1973), 『주요 어휘들(Key Words)』(1976), 『마르크스주의와 문학(Marxism and Literature)』(1977) 등이 있다.
○ 책 속으로
Ⅰ. 기본개념들
Ⅰ-1. 문화
지금은 하나의 개념처럼 붙여 다니는 사회․경제․문화라는 개념에 비교적 최근에 생긴 역사적 서술어이다. <사회>라는 말은 지금은 질서의 일반 체제를 기술하는 말이 되었지만 과거에는 능동적 친교, 교우 등의 <공통행위>를 뜻했다. <경제>라는 말은 지금은 생산․분배․교환의 인지된 체제를 기술하지만 과거에는 가계경영과 공동체의 경영을 뜻했다. <문화>라는 개념은 곡물과 동물들의 성장과 돌봄, 나아가 인간 능력의 성장과 돌봄을 뜻했다. 근대적 발전에 있어 이 세 가지 개념들은 나란히 움직인 것이 아니라 각각은 중요한 시점에서 다른 것들의 움직임에 영향을 입었다.
문화라는 개념은 역사적 발전이란 넓은 문맥에서 바라다보았을 때 다른 모든 개념들의 한정된 용어들에 대하여 강력한 압력을 발휘한다. 18세기까지 그것은 곡물․동물․마음 등을 기르는 과정을 뜻하는 명사였다. 문화라는 개념을 알기 위해서는 문명이라는 개념을 알아야만 한다. 인간을 사회 조직 내로 끌어들인다는 <문명화>의 개념은 그 어원에 질서 있는, 교육받은, 또는 공손한 뜻을 포함하고 있다.
문명과 문화는 다같이 성취된 상태와 발전의 성취된 상태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녔다. 문화 좀 더 특별히 한정지어 예술과 문학은 인간정신의 가장 깊은 기록, 가장 깊은 충동, 가장 깊은 원천으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문화는 보다 이전의 형이상학적 형태들의 세속화이자 자유화였고, 행위작용과 과정은 뚜렷이 인간적이었고 주관적인 것으로 일반화되었다.
문명은 한편으로 개화되고 점진적인 발전을 또 한편으로는 위협받는 성취된 상태를 나타내는 또 점점 회상적으로 되어 실제로는 흔히 과거의 전수된 영광과 동일시되는 그런 애매한 용어로 되어 버렸다.
특정하고 개별적인 삶의 방식들을 형성하는 근본적인 사회적 과정의 관념은 문화의 비교적인 사회적 의미의 실질적인 원천이 되었다. 이제 문화라는 개념은 지적인 삶과 예술에서의 행위 작용들로 특수화된 내적인 과정을 뜻하는 명사가 되었다. 문명의 현세적 의미와 인간발전의 해석이라는 문화의 비교적 현세적 의미를 구별해야 한다. 각각은 인간적 사회질서를 이해하고 세우려는 인간능력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근대적 관념이다. 이는 추정상의 종교적 혹은 형이상학적 상태들로부터 유래된 보다 이전의 사회적 개념들이나 사회질서로부터 그 두 관념들을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점이었다. <자신의 역사를 만드는 인간>의 이 현세적 과정에서 진정한 동기의 힘을 파악해야 한다. <자신의 역사를 만드는 인간>의 원관념은 자신의 삶의 수단을 생산함으로써 <자신을 만드는 인간>에 이처럼 강조를 둠으로써 전혀 새로운 내용을 띠게 되었다. 이것은 모든 근대 사회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지적 진보였다. 그것은 사회와 자연 사이의 분열을 극복하고 사회와 경제 사이의 새로운 구성관계를 발견할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다.
특정하고 상이한 삶의 방식을 만들어 내는 구성적인 사회 과정으로서의 문화 개념의 가능성이 오랫동안 실현되지 못했고 실질적으로 흔히 추상적인 단선적인 만인 공통주의에 의해 대치되었다. 그와 동시에 지적인 삶과 예술을 정의해 주는 또 다른 문화의 개념의 중요성도 명백히 상층 구조적인 위치로 환원됨으로써 손상을 입었고 그 개념을 관념화시키는 바로 그 과정을 통해 사회와 역사와의 필수 불가결한 관계를 끊어놓고 심리학․예술․신앙의 분야에서 인간적 삶의 구성과정 그 자체라는 또 다른 강력한 의미를 발전시킨 사람들에게 내맡겨졌다.
Ⅰ-2. 언어
언어에 대한 사고의 발전에 있어 마르크스주의가 기여한 것은 첫째 행위로서의 언어에 대해 강조한 것이고 둘째 언어의 역사에 대해 강조한 것이다. 이것은 정적인 사고방식에 의지하는 습관적인 언어 개념들을 변형시켰다. 행위로서의 언어에 대한 강조는 18세기에 시작되었다. 이것은 문화를 자신의 사회를 만드는 인간이라는 관념으로 정의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전의 지배적인 전통에서는 그 모든 변형들을 통해 언어와 현실이 결정적으로 분리되었고, 따라서 철학적 탐구는 처음부터 이 명백한 분리된 질서들에 대한 탐구였다. 플라톤은 언어를 명명하는 것에 대한 올바름에 대한 연구했다. 이것은 플라톤의 언어 또는 현실에 대한 탐구는 항상 근본적으로 이데아적인 형이상학적인 본형들에 대한 탐구였다. 언어는 논리로서 연구될 수 있고, 형식적이고 외적인 형태라는 의미에서 문법으로 연구될 수 있다. 언어는 도구로, 수사학으로, 시학으로 연구될 수 있다. 오랫동안 학구적이고 현학적인 발전을 통해 삼학(논리학, 문법, 수사학)의 커다란 분야들이 중세부터 연구되어왔다.
언어와 현시 사이의 구분에 문제가 의식 속으로 끼여들고 그것을 강화시킨 것은 데카르트였다. 데카르트는 언어와 현실사이의 관련 기준이 형이상학적이거나 인습적이 아니라 과학적인 지식에 근거를 두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면서 기존의 해답들에 대한 그의 회의를 통해서 새로운 문제들을 야기시켰다. 그동안 인간은 어떤 명백한 의미로서도 물리적인 세계를 만든 것은 아니므로, 과학적 지식의 강력한 새로운 개념은 선험적으로 배제되었고 이전에 그랬듯이 신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우리가 만들었기 때문에 사회를 이해할 수 있다고, 추상적으로가 아니라 만드는 과정 그 자체를 통해 이해하여만 한다고, 그리고 언어의 행위가 이 과정에서 중심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한 사람은 비코였다. 그러면서 비코는 언어 발전단계를 세단계로 나누었다. 헤르더는 확고하게도 언어는 뚜렷이 인간적인 세계의 열음이요 세계에의 열음이며, 유별나거나 도구적인 능력이 아니라 구성적인 능력인 것이다.
이후 소쉬르는 언어의 사회적 성격은 안정되고 자율적이며 규범적으로 동일한 형태들로 만들어진 하나의 체계(langue)로 표현되며, 그 발화(parole)들은 어떤 정신적 물체적 메커니즘을 통해 가능해진 특별한 언어 규칙의 개별적 사용으로 여겨졌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마르크스는 ‘언어는 의식과 마찬가지로 단지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의 필요성으로부터 발생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실제적이고 구성적인 행동으로서의 언어에 대해 강조했다. 언어는 영속적인 유의 창조와 재창조로-역동적인 현존물로 그리고 지속적인 재생과정으로서-이해되어야만 한다.
블로시노프는 밀폐된 개인적 의식이나 내적 정신으로 특수화됨으로써 약화되고 사실상 거부되었던 행위로서의 그리고 실천적 의식으로서의 언어에 대한 강조를 완전히 회복시키려 노력했다. 그는 의미란 사회적 관계에 의존하는 필연적으로 사회적인 행동이라고 단언하였다. 블로시노프는 언어에서의 기호가 이원적 성격을 띤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이것은 언어기호가 그것이 지시하거나 표현하는 대상이나 성질과 동등한 것도 아니고 또 그것들의 단순한 반영도 아니라는 것이다. 형식적 요소와 이 요소가 지니는 의미와 기호내에서의 관계는 불가피하게 인습적이만 그 관계는 자의적이 아니며 고정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기호들은 능동적인 사회적 관계가 가정될 때에만 존재할 수 있다. 사용 가능한 기호는 어떤 지속적인 사회적 관계를 맺고 있는 실제적 개인들 사이의 지속적인 언어 행위의 산물이다. 여기서 우리는 능동적인 사회언어를 깨닫게 된다. 또한 이 언어는 <물질적 현실>의 단순한 <반영>도 아니고 <표현>도 아니다. 우리는 이 현실을 실천적 의식으로서, 생산 행위를 포함한 모든 사회적 행위에 스며들고 있고 또 그것이 스면든 언어를 통해 파악하는 것이다. 언어는 능동적이고 변화하는 경험의 명료화이며,세계 내의 역동적이고 명료화 된 사회적 현존물인 것이다.
기호화(의미화)는 형식적 기호들의 사용을 통한 의미의 사회적 창조이며, 실제적인 물질적인 행위이며, 생산수단이다. 그것은 모든 사회적인 물질적인 행위로부터 분리 불가능한 실천적 의식의 특정한 형태이다. 기호는 그 기호화 관계(형식적 요소와 의미 사이의 관계 뿐 아니라 실제 언어에서 현실적으로 그것을 사용함으로써 그것을 기호로 만드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라는 성질에 의해 존재하므로 그 형성 원칙인 사회 경험과 마찬가지로 변증법적이고 생성적인 특질을 지닌다. 기호는 사회적이며 기호로서의 성질 바로 그것에 의해 내면화가 가능할 뿐 아니라 명백히 전달행위에서 사회적으로 물질적으로 끊임없이 유용가능하다. 블로시노프의 이론을 따르면 모든 사회적 과정이 실제의 인간들 사이의 행위이듯이 개인성이란 언어의 완전한 사회적 사실에 의해 개인적 삶의 구현 수단인 사회적 능력을 독특한 물체적 존재내에 능동적으로 구성한 것이다. 바로 이 의미에서 의식은 사회적 존재인 것이다. 그것은 능동적이고 특징적인 사회적 발전과 관계들을 통해 기호체계인 엄밀한 사회적 능력을 소유한다.
촘스키 언어학은 예전의 객관주의적 체계들이 배제했었던 개인의 시도적이고 창조적인 실제의 가능성과 사실을 강조해 주는 체계의 개념에 대한 결정적인 진보가 있어 왔다.
Ⅰ-3. 문학
문학을 하나의 개념으로 보기는 상대적으로 어렵다. 개념으로서의 문학이 지니는 특수한 성질은 다른 개념들의 추상성과 일반성, 그리고 그 개념들이 내리고자 한 행위들의 추상성과 일반성에 대한 많은 특정한 명작들의 구체적인 업적에 중요한 업적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문학이란 언어의 사회적이고 형식적인 성질들 안에서 형식적 구성 과정이고 결과라는 필수적인 인식을 해야한다.
근대적 형태로서의 <문학>의 개념은 18세기쯤 되서야 생겨났다. 문학과 연관되는 통상적인 형용사인 리터리트(literate)는 17세기에 등장해서 18세기에 와서야 그 특수화된 근대적 의미를 얻게 되었다. 새로운 범주로서의 문학은 이전에 수사학과 문법으로 범주화되었던 분야가 특수화된 것으로서 읽음에로 그리고 인쇄의 발전이라는 물질적 상황에서 활자 특히 책으로 특수화된 것이었다. 문학은 생산보다 효용과 상태의 범주였다. 그것은 그때까지 하나의 행위 혹은 실천으로 여겨졌던 것의 특정한 특수화였고 사회계급이라는 견지에서 어쩔 수 없이 행해진 그 상황에서의 특수화였다. <읽고 쓰는 능력>이라는 낡은 의미를 넘어선 그 첫 번째 확대된 의미에 있어 그것은 <품위있는>,<고상한> 학식으로 정의되었고 따라서 한 특정한 사회적 구분을 명시해 주었다. 18세기까지 문학은 교육적 성취의 어떤 수준을 표현하는 일반화된 사회적 개념이었다. 이에는 <활자화 된 책들>로서의 문학이라는 잠재적인 그리고 결국엔 현실화된 또 다른 정의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후 문학은 문학의 질을 정의하는 기준이 <학식>에서 <감식안> 또는 <감수성>으로 바뀌었고, 문학이 점점 창조적인 또는 상상적인 작품들로 특수화된 것이고, <민족 문학>에 대한 보다 효력 있는 정의를 가능케 한 <전통>이란 개념의 민족적 용어들을 발전시키는 경향으로 바뀌었다.
<예술>은 일반적인 인간의 기술이라는 의미로부터 <상상력>과 <감수성>에 의해 정의되는 특별한 영역으로 바뀌었다. 같은 시대에 <심미적>이라는 말은 일반적인 지각의 의미로부터 <예술적>이고 <아름다운>이라는 특수화된 범주로 바뀌었다. <픽션>과 <신화>는 지배적인 계급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환상들> 또는 <거짓말들>로 여겨질 수도 있었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보았을 땐 <상상적 진실>의 운반자로 공경받았다. <로맨스>와 <로맨틱>은 새로이 특수화된 적극적 중요성을 부여받았다. <문학>은 이 모든 것들과 함께 움직였다.
Ⅰ-4.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의 개념 ‘①특정한 계급 또는 집단에 특정한 믿음의 체계 ②진정한 또는 과학적인 지식에 대비될 수 있는 허위 사상이나 허위 의식의 체계 ③의미와 사상을 산출하는 일반적 과정’이다.
과학의 관념을 이데올로기의 개념에 부정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이데올로기가 인간 발전의 실제적 과정에 대한 세세하고 연관된 지식이란 의미로서의 실제적이고 실증적인 과학과 대비된다면 이 구별은 그러한 세세하고 연관된 지식을 방해하거나 왜곡시키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가정들, 개념들, 관점들의 징후를 가질 수 있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20세기 개념들에서의 세 가지 다른 경향들이 있다. 첫째는 마르크스주의내에서 그리고 바깥에서 특정한 계급 또는 집단에 특정적인 믿음의 체계라는 비교적 중성적인 의미로 쓰여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중성적으로 또는 심지어 긍정적으로 얘기하는 것이 가느애진다. 둘째는 이데올로기는 실제적 경험, 실제적 정치학 그리고 실용주의라고 알려진 것과는 대비되는 것이다. 순이론적이고 교의적일 뿐 아니라 선험적이고 추상적이라는 이 일반적인 이데올로기의 의미는 그와 똑같이 일반적인 서술적 의미와 공존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가치들의 기호화를 포함한 모든 기호화의 산물들뿐 안라 과정들을 기술할 일반적인 용어가 명백히 필요한데,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이라는 말이 널리 쓰여지는 것이다.
Ⅱ. 문화이론
Ⅱ-1. 기저와 상층구조
Ⅱ-2. 결정
Ⅱ-3. 생산력
Ⅱ-4. 반영에서 매개에 이르기까지
Ⅱ-5. 전형화와 상동관계
Ⅱ-6. 헤게모니
Ⅱ-7. 전통 제도, 그리고 형성물
Ⅱ-8. 지배적인 것, 잔여적인 것, 그리고 부상적인 것
Ⅱ-9. 정서와 구조들
Ⅱ-10. 문화 사회학
Ⅲ. 문화이론
Ⅲ-1. 글의 다양성
Ⅲ-2. 미적상황과 그 밖의 상황들
Ⅲ-3. 매개체에서 사회적 행위에까지
Ⅲ-4. 기호와 기호법
Ⅲ-5. 인습적 규칙들
Ⅲ-6. 쟝르
Ⅲ-7. 형식들
Ⅲ-8. 저자들
Ⅲ-9. 제휴와 참여
Ⅲ-10. 창조적 실제
○ 독자의 평 1
‘문화’란 무엇인가? 늘상 사용하는 말이지만 막상 그럴듯하게 정의하려 할 때는 곤혹스럽게 마련이다. 문화라고 하면 으레 문학이나 클래식 음악 등의 예술작품을 떠올리게 된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는 문화의 의미를 온전히 설명했다고 하기엔 뭔가 부족한 느낌이다. 게다가 문학과 예술을 지칭하기에 더욱 적당한 ‘문예’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영국의 문화연구가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문화의 의미를 좀 더 폭넓게 사고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했다. 문화를 단순히 문예를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상류계층만이 전유하는 것을 대상으로 하는 편협한 시각이라는 것이다. 하여 그는 문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문화란 “특정하고 상이한 <삶의 방식>을 만들어내는 구성적인 사회 과정”을 뜻한다. 즉, 문화는 예술과 문학뿐만이 아니라 삶 전체, 물질적, 지적, 영적인 것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문화를 <삶의 방식>으로 이해할 때 대중의 취향을 반영하는 다양한 형태의 문화 생산물이 생산, 소비되는 사회적 과정과 배경을 분석해 낼 수 있다.
인간 삶의 다양한 방식과 그 속의 여러 요소들의 관계와 의미를 연구하는 학문을 문화연구(Cultural Studies)라 한다면, 위와 같은 문화에 대한 정의로 인해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문화연구의 태동에서 주요한 역할을 차지하게 된다. 그에 따르면 문화분석은 “삶을 구성하는 전 요소들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는 것이며 “이 관계들의 복합체인 조직의 본질을 발견하는 것”이다.
1977년에 출간된 <이념과 문학>은 원제(Marxism and Literature)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나듯이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이론을 확립한 저작이다. 서문에서 그는 ‘단순히 결정주의적이고 경제주의적이지 않은 비판적 마르크스주의의 새로운 사조-루카치, 알튀세르, 그람시, 골드만 등-에 눈 뜨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비판적 마르크스주의는 문화를 경제 구조의 결과물이 아니라 상대적 자율성을 지니고 자신의 결과물을 산출할 수 있는 생산적 층위로 파악한다. 윌리엄스는 이것이 문화를 “특수하고 다양한 <삶의 방식>을 창조하는 본질적인 사회 과정”이라고 보는 자신의 견해와 부합된다고 보았다. 하여 <이념과 문학>에서 그는 알튀세르의 ‘중층결정론’, 그람시의 ‘헤게모니론’ 등을 받아들인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은 역사적인 삶의 조건과 개인적이고 살아있는 경험의 독특한 복합성을 이해하는데 유용하다. 또한 그는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이 개인적인 경험을 역사 속에서 이해하고 문화를 특정 계급의 실제적인 지배와 피지배로 인식함으로써 역사와 경험, 정치 그리고 이데올로기를 일상생활 속에 연결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이념과 문학>의 또 하나의 특징은 그의 이전 저작-<문화와 사회>, <장구한 혁명>-들과는 달리 주로 이론적 차원에서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기저와 상층구조’, ‘정형화와 상동관계’, ‘지배세력/잔여세력/부상세력’, ‘정서의 구조’ 등 윌리엄스 이론의 정수가 담겨있다. 특히 ‘지배세력/잔여세력/부상세력’은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을 더욱 발전시킨 개념이다. ‘지배세력/잔여세력/부상세력’개념은 지배가 영속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언떤 생산 양식도, 어떤 지배적 사회질서도 현실적으로 모든 인간의 행위와 에너지, 의도를 완전히 포용할 수는 없다”.
살펴본 바와 같이 <이념과 문학>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받아들임으로써 문화분석에서 텍스트적 접근법을 거부하고 있다. <이념과 문학>은 문화를 다루는데 있어서 사회의 경제 기반은 여전히 가장 중요한 것이며, 문화란 단순히 개인의 창조적 정신의 산물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물질적인 것이라는 점을 일깨운다.
지각하는 책들이 있다. 허다한 고전들이 아직 번역되지 않은 형편이므로 제 때 나오지 않았다고 나무랄 수는 없겠다. 번역은 혁명만큼이나 기나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지도 모르는 일이고. 영국의 대표적인 좌파 문화비평가 레이먼드 윌리엄스(1921-1988)의 <기나긴 혁명>(문학동네)이 최근에 출간됐다(*보통은 ‘윌리엄즈’로 표기돼 왔지만 새 표기법에 따르면 ‘윌리엄스’인 모양이다). 원저는 1961년에 나왔으니 역자의 토로대로 “출간된 지 반세기가 다 되어가고, 저자가 사망한 지도 내년이면 20년이 된다.” 90년대 팽배했던 문화연구의 열풍이 한풀 꺾이고 나서야 영국 문화연구 ‘원조’의 주저가 나온 셈이니 말 그대로 ‘기나긴 시간’이었다.
저자에 따르면 이 책은 1958년에 나온 <문화와 사회 1780-1950>(이화여대출판부, 1988)의 연장선상에서 기획되고 쓰인 것이다(원저의 속편이 3년 만에 출간되었다면 한국어본의 속편은 20년 만에 나온 것이 된다). 국내에 그보다 먼저 소개되었던 책이 <이념과 문학>(문학과지성사, 1982)으로 번역된 <마르크시즘과 문학>(1977)이었다(이 책은 <문학과 문화이론>(경문사, 2003)이란 제목으로도 출간됐다. *번역은 모두 불만스럽다는 평이다). 연이어 <문화사회학>(까치, 1984) 등도 소개되었으니 한때 윌리엄스는 ‘상종가’였다. 그리고 20여년이 지나서 우리는 그 ‘전설’과 뒤늦게 재회하게 되었다.
흥미로운 건 윌리엄스의 선배비평가이자 라이벌이었던 F. R. 리비스(1895-1978)의 비평서 <영국소설의 위대한 전통>(나남)이 나란히 출간된 사실이다. 이 책은 1948년작이니까 거의 6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리비스와 윌리엄스를 다룬 연구서 <비평의 객관성과 실천적 비평>(창비, 1993)에서 김영희 교수는 “특히 리비스의 경우에는 소개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고 서문에 적었는데, 그 ‘소개’의 몫은 결국 저자 자신이 지게 되었다. 리비스와 윌리엄스를 ‘비판’하고 있는 다음 세대 비평가 테리 이글턴의 <문학이론입문>(창비, 1986)이 소개되고도 20년이 더 지난 뒤이다.
따지고 보면 1960년대 영국의 이론적 정세는 ‘문학연구에서 문화연구로’란 방향설정이 우리의 90년대와도 흡사한데 이에 대한 풍부한 배경지식을 전해주는 책으로는 ‘1960년대 이후 영국 문학이론의 정치학’을 부제로 달고 있는, 김용규 교수의 <문학에서 문화로>(소명출판, 2004)가 있다 (*김영희 교수의 책과 마찬가지로 저자의 박사학위논문).
○ 독자의 평 2
레이몬드 윌리엄즈의 고도로 엄밀하고도 정치한 ‘문화 유물론’적 작업을 이해하고 정리하기란 쉽지 않다. ‘이념과 문학'(원제: Marxism and Literature, 1975)에서 행하는 그의 작업의 일차적인 목적은 근대의 정치, 경제, 사회와 문화(문학)적 실천을 구성하고 형성해온 주요개념들(책에서는 무려 24개의 key-words)에 대한 유물론적, 역사적 분석이다. 그의 이론적 전제는 다음과 같다.
“따라서 그 개념 자체에 대한 의식-우리가 알게 되겠지만, 역사적이어야만 하는 의식-을 향함이 없이는 어떤 진지한 문화 분석을 행할 수 없는 것이다(21쪽).”
그럼 왜 그런 필요가 발생하게 된 것일까. 예컨대, ‘문학’이라는 용어를 살펴보자. 한자로는 文學, 일어로는 분가쿠, 영어로는 literature라고 쓰는 문학에 대한 사람들의 통상적이고도 일반적인 이해는 그것이 예술의 한 분과로써 주로 (한 민족의) 언어의 심미적 실천을 통해 독자들에게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교훈)과 감동(쾌락)을 주는 언어예술(민족문학)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윌리엄즈 류의 작업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같이하려는 사람이라면, 그/그녀는 위에서 이해된 ‘문학’이라는 용어가 실제로는 근대문학을 지칭하고 있으며, 그러한 개념은 예술(혹은 문학)에 대한 복잡한 사회적 이해와 그 내부의 다양한 담론적 실천들과 역사적 변동들에 맞물려서야 형성된 것이며, 또한 그러한 문학개념의 형성은 각 민족국가에서도 다양하고도 상이한 이데올로기적/헤게모니적(제도적) 실천을 통해 가능했다는 역사적 인식을 함께 해야한다.
예컨대 위의 실천과 유사한 문학연구가 최근 몇 년 동안 한국근대문학연구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듯 한데, 그 성과물은 가히 적지 않다. 이광수의 ‘文學이란 何오'(매일신보, 1916)를 집중 분석함으로써 ‘한국”근대”문학’이라는 역사적 개념의 형성을 포착하는 황종연의 ‘문학이라는 역어(譯語)'(1998)는 그 최초의, 탁월한 성과다. 하지만 황종연의 작업은 윌리엄즈류의 문화유물론이나 맑시즘의 전통에 빚지고 있으면서도 그 전거를 거의 밝히지 않는다.(그의 방법은 보다 해체론적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탈식민주의적이다. 그럴 때도 그는 그런 이론들에 대한 저항의 제스쳐를 보인다. ‘정치적으로’ 불분명한 지나친 균형감각!)
레이몬드 윌리엄즈의 이론적 가설과 방법론은 맑스/엥겔스-레닌, 트로츠키-스탈린주의자들-로자 룩셈부르크-바흐친/볼로시노프-프랑크푸르트학파-루카치-브레히트-그람시-모택동-알튀세르 등으로 이어지는 맑스주의의 변증법적(유물론적) 전통에 확고하게 뿌리박고 있다. 그러면서 윌리엄즈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일정한 이해를 보여주지만 자신의 토대(하부구조)를 신비화시키는 매우 형이상학적인 관념론들과 기계적 유물론의 오랜 전통, 경직되고 결정론적인 조잡한 형태의 맑스주의적 사유, 비역사적이며 유아론적인 형식주의와 마찬가지로 인간적 실천에 회의를 보이는 구조주의적/기호학적 작업들과 변증법적으로 대결하면서 그 타자들을 때론 흡수하고 때론 비판하는 형태로 자신의 실천적 사유를 전개해나간다. 윌리엄즈의 문화 유물론의 분석은 가히 포괄적이면서 심도 있게 진행된다.
현대 자본주의 세계의 구석구석에서 일어나는 전반적인 문화현상에 대한 총체적 분석에서 각각의 분석 부분들은 그 자체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분석들과 연결되어 하나의 해석적 고리를 이루고 또한 어떤 통합적인 전체(총체성)와 매개된다. 이때 총체성은 이론적 가설이나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대상물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이며 최종심급인 자본이 만들어내는 불투과적인 현실의 제반관계들에 대한 변증법적 통찰에 수반하는 어떤 관념이다. 즉 자본주의를 통찰하지 않고 억압적인 현실과 그런 역사를 분석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데서 총체성은 하나의 이념으로 상정할 만 하다. 그래서 그 전체란 변증법적 사유속에서 하나의 고정된 대상적 형성물이 아니라, 그것을 이루는 각각의 부분적 형상들이 역사적이며 유동적 과정의 산물이며 현재에도 형성중인 것임과 마찬가지로 역사적으로 변화하는 것임을 윌리엄즈는 알려준다. 말하자면, 그러한 부분들과 (매개되는) 전체는 윌리엄즈의 언제나 최종의 결정적이며 유효한 분석틀인 역사적, 유물론적 개념의 분석 앞에 노출되고 마는 것이다. 이런 과정속에서 다양한 형태의 부르조아적 관념론의 인간과 세계에 대한 해석적 신비화 작업, 비역사적 형태분석 등의 모든 베일들은 수치스럽게 벌거벗겨지고 만다. 즉 여기엔 “항상 역사화하라!(Always historicize!)”(프레드릭 제임슨, <정치적 무의식>)라는 실천적 모토가 최종적으로 주어져 있다. 그것은 이론내부에서의 계급투쟁(알튀세르)의 성격을 띠고 있다[물론 윌리엄즈 이후의 문화 유물론은 그 급진적인 성격을 상실하고, 상대적 자율성을 지닌 문화에 대한 분석에서 하부구조에 대한 통찰을 점점 더 잃어가고 있고 이론내에서의 계급투쟁이라는 편안한 위치(내 글쓰기는 곧 현실을 바꾸는 일이다!)에서 자족하고 있다고 한다=우리나라의 문화비평가들의 글들을 살펴볼 것].
현재적 의미에서 윌리엄즈의 탈신비화하는 분석방법은 최근의 탈구조주의적 해석학과 해체론의 분석방법(계보학과 미시적 담론분석)과도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레이몬드 윌리엄즈는 이들이 배제하는 ‘사회를 형성하고 역사를 만들어나가는’ 오랜 맑스주의 전통의 “인간적 실천”의 창조적 작업을 계승한다는 점에서 일련의 탈구조주의적 분석들과도 거리를 둔다. 물론 그의 작업이 탈구조주의와 해체론과의 본격적인 충돌이전의 것이긴 하지만. 비평가 테리 이글턴이 그의 스승 윌리엄즈의 바톤을 이어받아 현재에 이러한 작업을 계속 진행중이다. 최근의 그의 책 ‘포스트모더니즘의 환상’은 맑스주의의 비판적, 창조적 전통 속에서’ 역사 이후를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포스트모더니즘, 탈구조주의, 해체론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허구를 후기 자본주의에 대한 역사적 분석을 통해 철저히 역사화한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스승의 초기저서에 나타나는 휴머니즘을 수용한다. 그나마 서유럽의 역사의 흐름에서 비판적 이성에 대한 신념과 끈을 놓지않고 윤리적인 문제(타자)에 대한 가장 상세한 관심을 보여주었다는 의미에서의 휴머니즘말이다. 그 휴머니즘의 정체는 솔직히 불분명하게 보인다. 고심끝에 나온 결론이다, 라기보다는 현실에 대한 분석의 최종지점에서 망설이는 유보조항 같아서 말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