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인간의 사명 (Die Bestimmung des Menschen)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 1799
독일의 철학자 피히테의 저서이다. 1798년에 피히테는 <신의 세계 통치에 속한 우리 신앙의 기초에 대하여>라는 논문으로, 도덕적 세계질서가 있다는 것은 확실한 일이며 이 질서 자체가 신이고 우리는 그 외에 신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또한 포착할 수도 없다고 말하였다.
그는 칸트주의자로 감성적(感性的)인 존재만을 현실 존재라고 생각하였으므로 이와 같은 의미에서의 실재성은 절대자에게 적용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신의 실재를 부인한 것이 되어 이른바 무신론 논쟁이 일어났다.
피히테가 베를린에 정주한 후에 이 논쟁을 반성·정리한 것이 이 저서이다.
본서는 ‘회의(懷疑)’, ‘지식’, ‘신앙’의 3편으로 되어 있다.
인간의 사명은 ‘인간의 본질’을 묻는 것에서 시작되는데 인간의 실재론적 규정은 오성(悟性)을 만족시켜도 기필코 자유를 추구해 마지않는 우리의 마음을 충족시키는 것은 아니다.
자연의 체계를 취하느냐 또는 자유의 체계를 취하느냐 하는 양자택일의 결정에 망설일 때 우리는 ‘회의’에 빠진다.
이 ‘회의’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우리의 인식 능력의 본성을 알고 외적 사물의 인식이 우리 자신의 표상능력의 소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이 관념론적 입장을 끝까지 추구하게 되면 모든 실재를 부정하는 결과에 이른다.
관념론의 입장이 실재성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되는가.
피히테에게 있어서 가장 확실한 것은 “양심이 우리에게 도덕적 의무를 명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의무의 객체(客體) 내지 영역이 실재적인 세계가 된다.
그러나 양심의 명령에 오직 복종하는 것만으로는 인간의 사명으로서 불충분하다.
왜냐하면 지상세계의 목적 달성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관계 없이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더욱 바람직한 것은 의지가 지배하는 초지상적(超地上的) 세계에 소용되는 것이며, 그것은 도덕법칙에 의하여 요청되는 것이고 그 실재성이 확신되고 신앙되어야 한다.
이 ‘신앙’으로써 진정 인간의 사명은 다해진다고 하였다.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1762년 5월 19일 – 1814년 1월 27일)는 독일 철학자이다. 헤겔, 프리드리히 셸링과 더불어 독일 관념론을 대표하는 사상가다. 철학사적으로는 지식학(Die Wissenschaftslehre)을 주로 하였으며 칸트의 비판철학의 계승자 또는 칸트로부터 헤겔에로의 다리 역할을 한 철학자로 인정되고 있다.
–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출생: 1762년 5월 19일 작센 선제후국 라메나우
.사망: 1814년 1월 27일(51세)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
단지 일반적으로는 통속철학의 저작이 유명하게 된 경우가 많아 당시 나폴레옹 1세에 점령되어 있던 베를린에서 행한 교육 등에 관한 강의록 의 강의자로서 유명하게 되었다.
피히테는 가난한 삼베직인의 아들로 태어나 예나 대학 신학과에 입학하였다. 그 후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전학하였고, 졸업 후 가정교사 시절에 저술한 ‘종교와 이신론(理神論)에 관한 아포리즘'(1790)은 B.스피노자의 결정론의 영향을 받았으나, 1791년에 칸트 철학을 알게 됨에 따라, 특히 그 실천이성의 자율과 자유 사상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 후 쾨니히스베르크로 임마누엘 칸트를 찾아 그의 주선으로 ‘모든 계시의 비판 시도'(1792)를 익명으로 출판하였는데, 사람들은 처음에 칸트의 저서로 알고 있었으나, 칸트 자신의 정정과 천거에 의해 피히테의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1792년에 예나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1793년 한(Johaanna Hahn)과 결혼하고 1797년에 ‘지식학’에 대해서 몇 가지 중요한 논고를 발표하였다. 1798년 철학잡지에 포르베르크의 논문에 서문으로 발표한 ‘신의 세계지배에 대한 우리들의 신앙 근거에 관하여’라는 논문이 무신론이라는 의혹을 받아, 유명한 무신론 논쟁을 야기시켰으며, 결국 1799년 예나대학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 후 베를린에서 슐레겔 형제를 비롯하여 낭만파 사람들과 교유하였고, 사상적으로는 신비적·종교적 색채를 더해 갔으나, 동시에 시국 정치문제에도 활발한 발언을 시도하였고, 특히 나폴레옹 전쟁에서 패한 프로이센의 위기에 처하여 행한 “독일 국민에게 고함”(Reden an die Deutsche Nation, 1807년 ∼1808년)이란 강연은 너무나 유명하다. 종군간호사가 된 부인에게서 옮은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죽었다.
– 생애
수공업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780년부터 예나, 비텐베르크, 라이프치히 대학 등에서 신학과 법학을 공부했다. 이후 가정교사 생활을 하면서 스피노자의 결정론에 영향을 받았으나, 1791년에 칸트 철학을 접하고 칸트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된다.
1792년에 익명으로 ‘모든 계시의 비판 시도’라는 논문을 출판했는데, 이것이 칸트의 종교철학 논문으로 오인되면서 유명해졌다. 이후 예나 대학에서 교수가 되었으나 1798년에 출판한 논문이 무신론 의혹을 받아 무신론 논쟁을 야기했고 결국 1799년에 교수직에서 물러난다. 이후 저술과 강의 활동을 하다가 1810년부터 베를린 대학에서 활동했다. 이후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종군간호사가 된 부인에게서 옮은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죽었다.
– 철학
칸트로부터 촉발되어 발전해나간 근대 독일 관념론의 대표적인 철학자들 중 한 명으로 그의 사상의 정수는 주관적 관념론(주관속에서 모든 것이 가능)이다. 그에 이어 쉘링은 객관적 관념론(객관속에서 모든 것이 가능)을 내세웠고, 헤겔은 피히테와 쉘링의 철학을 정리하여 절대적 관념론을 내세워 근대철학의 하나의 완결된 형태의 것을 창출해내었다.
피히테는 칸트의 오성과 이성에 대한 개념 구분이 애매하다고 생각했고 필연성의 세계를 다루는 순수이성과 자유의 세계를 다루는 실천이성이 모순적인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피히테의 철학은 그것을 해결하려는 데서 출발하게 되는데, 그는 이성이 윤리의 세계뿐만 아니라 필연성에 관계하는 학문의 영역에 적극적으로 관계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피히테에게 있어 경험은 대상에 대한 경험이 아니라 앎(Wissen)에 대한 경험인데, 이에 따라 그는 앎을 대상으로 하는 철학인 지식학(Wissenschaftslehre)을 정초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자아는 앎의 출발점인데 이는 더이상의 전제를 가지지 않는, 모든 앎이 이끌려나올 수 있는 원칙으로서, 데카르트의 것과 유사한 면모가 있다. 자아는 단순히 사유하는 주관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자아아며, 자아는 절대적으로 독자적으로 활동하며, 자아의 활동은 무한한 것이다. 자아는 결코 외부의 어떤 것에 의하여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끊임없는 활동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다.
피히테의 자아의 본질은 하나의 고착화된 사실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는 역동적인 작용인데, 이를 사행(Tathandlung)이라 한다. 사실이라는 것은 이러한 자아의 적극적인 행위, 즉 사행의 결과이며, 자아는 자기의식(Selbstbewußtsein)으로 표현된다. 사행은 판단, 추리하는 이론적인 힘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정립하는 실천적인 힘이다.
사행을 근본적인 존재특성으로 가지는 자아엔 지식학을 가능케 하는 근본적인 도구로서의 세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로, 자아는 스스로를 정립한다.(동일률의 근거) 이것은 범주의 하나로서 실제성을 유도한다. 둘째로, 자아에 대하여 비아가 정립된다.(모순율의 근거) 이것은 범주로서 부정성(Negation)을 유도한다. 셋째로, 자아는 나눌 수 있는 자아에게 나눌 수 있는 비아를 정립한다.(근거율의 근거) 이것은 자아에게나 비아에게만 머무르는 정립이 아니라 양자를 모두 포괄하는 정립으로 제한(Limitation)의 범주를 유도한다.
자아(Ich)는 자신을 정립하면서 세계와 관계하고, 자아의 정립하는 활동에 거스르는 비아(Nicht-ich)가 다가오는데, 비아는 자아에 속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사행을 통한 자아의 자기정립에 거슬러 자아에 대해 반정립한다. 비아의 반정립은 이미 자아의 정립을 전제로 하기에 첫번째 원칙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자아와 비아는 갈등관계이다.
피히테의 철학을 종합하자면, 자아의 정립과 비아의 반정립이 대립하는 구도에서 절대적 자아가 그 대립을 지양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비아가 자아를 제한 또는 규정하는 것은 이론적인 것이며 이론적 학문을 성립시키고, 자아가 비아를 규정하는 것은 실천적인 것이며, 자아의 정립을 통해 대상인 비아를 규정하고 제한하는 실천적 학문을 정립시킨다. 그런데 이 구분은 자아가 비아와 관계하는 방식을 통해 구분되는 것일 뿐이다.
피히테는 자아의 정립하는 행위를 근본적으로 긍정하였고, 실천적 자아의 우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이를 통하여 칸트의 철학에 있어서의 이론이성과 실천이성간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비아는 모든 대상들의 전체를 의미하며 자아의 적극적인 활동에 의해 생기고, 자아의 존재는 궁극적인 출발점이 되는데 여기서 ‘궁극적 자아’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궁극적 자아는 비아에 의하여 생기는 부정과 갈등을 넘어 자신의 존재를 궁극적으로 정립하는 탁월한 자아이다. 피히테의 철학은 자기 자신만을 정립하는 유한한 자아가 비아의 저항과 부정을 제거하고 자신을 정립시키는 절대적인 자아로 나아가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절대적인 자아는 실체로서 스스로를 정립하는 자아, 즉 절대자인데 이는 신과 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비주의적인 개념이 아니고, 자아의 사유활동과 능동적으로 자신을 정립시키는 도덕적인 행위를 통해 드러나는, 자아 속에 숨은 신이다. 여기서 사행은 변증법적인 것으로서 자아와 비아의 갈등을 거쳐서 자기자신을 무제약적으로 정립시키는 탁월한 능력이다. 자아의 자기정립은 비아와의 대립을 넘어 절대적 자신을 정립하는 것으로서, 절대적인 자아를 논리적으로 전제해야 한다. 즉 이미 자아 속에 비아의 반정립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내재되어 있어야 한다.
저서로는 프러시아 학사원에서 행한 연설을 책으로 묶은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 단연 유명하다. 이 책에서 그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독일이 패배한 근본적인 원인은 이기심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국민 교육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