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인간의 정의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 ‘제노사이드’와 ‘인도에 반하는 죄’의 기원
필립 샌즈 / 더봄 / 2019.4.10
레온 부흐홀츠 (이 책의 저자인 필립 샌즈의 외할아버지)는 렘베르크에서 1904년 5월 출생하여 1937년 비엔나에서 리타 란데스와 결혼했고, 1년 후 필립의 어머니인 루스가 태어났다.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이후 레온은 혼자 파리로 떠났다. 1939년 여름, 루스는 누군지 모를 사람에 의해 파리에 있는 레온에게 보내지고, 리타는 유대인에게 위험한 도시 리비우에 남았다. 어린 시절 필립은 외할아버지로부터 엄혹한 가족사에 대해 아무런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결국 필립은 외할아버지의 불가사의한 삶과 나치 점령 하에서 살아남은 어머니의 어린 시절에 대한 탐구여행을 시작한다.
이 책은 홀로코스트의 피해자인 저자의 외할아버지 가족에 대한 회고록이자 인권과 정의에 대한 개념이 탄생한 뉘른베르크 재판을 둘러싼 국제정치 논픽션이자 유대인 학살을 명령한 전범들을 단죄하기 위한 인권 변호사의 법정 드라마다. 저자는 국제 인권법의 기원을 추적하는 이 과정을 통해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꿀 때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역설한다.
유럽의 주요 문화 중심지였지만 오늘날 거의 알려지지 않은 도시인 리비우는 우크라이나의 파리라고 불린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했던 리비우는 우크라이나인, 폴란드인, 유대인 등의 민족이 어우러져 살아온 땅으로, 시시각각 바뀌는 지배자의 언어에 따라 렘베르크, 로보프, 리보프, 리비우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며 역사의 격류에 휩쓸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리비우는 저자의 외할아버지의 고향만은 아니었다. 국제법의 중요한 개념인 ‘제노사이드 (집단학살)’와 ‘인도에 반하는 죄’를 연구한 두 명의 유대계 법학자, 즉 렘킨과 라우터파하트 역시 같은 도시에서 공부했다.
그런데 그들의 삶은 나치 독일의 전범들을 심판한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조우한다. 그곳에는 그들과는 악연인 한 사람의 중요한 인물이 있었는데, 히틀러의 개인변호사였고 나치 독일의 폴란드 총독을 지낸 한스 프랑크로, 그는 폴란드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의 말살을 명령한 장본인이다. 그에 따라 저자의 외할아버지 일가도, 두 법학자의 일가도 모두 죽임을 당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나치에 점령당한 유럽에서 가족들에게 닥친 가혹한 운명과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을 거치면서 국제인권법, 인류 정의의 기준의 기원과 탄생 과정을 동시에 추적한다.
○ 목차
독자들에게
한국어판 서문
주요 인물
프롤로그
Part Ⅰ 레온(LEON)
Part Ⅱ 라우터파하트(LAUTERPACHT)
Part Ⅲ 노리치의 미스 틸니(MISS TILNEY OF NORWICH)
Part Ⅳ 렘킨(LEMKIN)
Part Ⅴ 나비넥타이를 맨 남자(THE MAN IN A BOW TIE)
Part Ⅵ 한스 프랑크(FRANK)
Part Ⅶ 혼자 서 있는 아이(THE CHILD WHO STANDS ALONE)
Part Ⅷ 뉘른베르크(NUREMBERG)
Part Ⅸ 기억하지 않기로 선택한 소녀(THE GIRL WHO CHOSE NOTTO REMEMBER)
Part Ⅹ 판결(JUDGEMENT)
에필로그
감사의 글
옮긴이의 말
참고문헌
NOTES
ILLUSTRATION AND MAP CREDITS
○ 저자소개 : 필립 샌즈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UCL) 법학부 교수로, 세계적으로 저명한 국제인권법 권위자이자 인권변호사이다. 뉴욕대 (NYU) 교수와 토론토대, 멜버른대 및 소르본느대 등의 객원교수를 역임하였다. 2003년 영국의 왕실변호사로 임명되었다. 파이낸셜타임스, 타임스, 가디언 등에 기고를 하면서 CNN과 BBC World에 시사해설자로 자주 출연한다. 국제형사재판소 (ICC)의 의뢰를 받고 콩고, 유고슬라비아, 르완다, 이라크, 관타나모, 캄보디아 등 가장 중요한 국제인권변호 재판에도 적극 참여해 왔다.
저서『Lawless World』에서 “부시와 블레어가 사전에 이라크전을 공모, 조작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논픽션상인 ‘밸리 리포드 논픽션상 (전 새뮤얼 존슨 논픽션상)’을 받은 『EAST WEST STREET』는 독일, 이탈리아, 일본, 스페인, 프랑스, 중국, 덴마크, 폴란드, 스웨덴, 터키, 보스니아, 우크라이나 등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출간되었다. 현재 영국 펜클럽 (PEN CLUB) 회장이기도 한 그는 한국 작가 한강 소설의 예찬론자이기도 하다.
- 역자: 정철승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현재는 법무법인 ‘THE FIRM’ 대표 변호사이다. 만주의 신흥무관학교 교장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윤기섭 선생의 외손자이다. 독립유공자단체인 광복회와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 고문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중증장애인 봉사단체인 (사)스파인2000의 고문변호사, 탈북청소년 대안학교인 셋넷학교 후원회장, 산재심사위원회의 심사위원도 맡고 있다. 법조인들의 직무윤리를 관장하는 법조윤리협의회 위원을 역임했다. - 역자: 황문주
몬트레이 통번역대학원에서 통역과 번역을 전공하고, 2002년부터 농림부와 교보생명 등에서 통ㆍ번역사로 근무하였다. 한미FTA와 장관급 회담, SOFA 협상 등의 통역과 영어 프레젠테이션을 담당하였으며, 그 외에도 출판과 다양한 콘텐츠 작업에 참여하였다. 번역한 책으로는 『비밀 블로그-익명의 변호사』, 『브레이크노믹스』 등이 있다.
○ 내용
- 프롤로그 : 초대장
[1946년 10월 1일 화요일, 뉘른베르크 법원] 오후 3시가 조금 넘은 시간, 피고인석 뒤의 문이 열리고 한스 프랑크가 600호 법정으로 들어섰다. 한스 프랑크는 아돌프 히틀러의 변호인이었으며, 후에 독일이 점령한 폴란드에서 히틀러의 대리인 역할을 했다. 사람들로 가득한 그날의 법정에는 케임브리지대학의 국제법 교수인 허쉬 라우터파하트도 있었다. 그의 옆에는 유명한 영국 검사 팀이 자리하고 있었다. 라우터파하트 교수는 뉘른베르크 헌장에 ‘인도에 반하는 죄 (crimes against humanity)’라는 용어를 사용하자는 아이디어를 최초로 낸 사람인데, 이 용어는 폴란드에서 자행된 400만 유대인과 폴란드인에 대한 살상을 의미했다. 프랑크는 5년 동안 라우터파하트 교수의 부모와 형제자매, 그들의 아이들을 포함한 가족들이 살았던 렘베르크가 속한 지역의 나치 독일 총독이었다.
재판에 관심을 기울이는 또 다른 사람인 라파엘 렘킨은 프랑스 파리의 미군병원 침상에서 라디오로 판결을 들었다. 검사 출신으로, 후에 바르샤뱌에서 변호사가 된 그는 1939년 전쟁이 발발하자 폴란드에서 탈출하여 최종적으로 미국에 정착했다. 미국에서 그는 전범재판을 담당하는 미국 검사 팀의 일원으로 영국 검찰 팀과 함께 일했다. 재판이 진행된 오랜 기간 동안 그는 항상 서류들로 가득 찬 여러 개의 가방을 들고 다녔는데, 그중에는 프랑크가 서명한 많은 법령이 포함되어 있었다. 렘킨은 이 자료들을 검토하던 중 프랑크의 행동에서 일종의 패턴을 발견하였는데, 그가 저지른 범죄는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었다. 그는 프랑크의 범죄를 ‘제노사이드 (genocide, 집단학살)’라고 불렀다.
개인을 보호하는 것이 목적인 인도에 반하는 죄에 초점을 맞춘 라우터파하트와는 달리 렘킨은 집단의 보호에 더 집중했고, 프랑크의 재판에 제노사이드 범죄 혐의를 포함시키기 위해 혼신을 다해 노력했으나, 재판의 마지막 날에는 건강이 좋지 않아 참석할 수 없었다. 그는 리비우에서 몇 년을 살았으며, 그의 부모와 형제는 프랑크가 통치한 영토에서 자행되었다고 알려진 범죄에 휘말렸다.
“한스 프랑크!” 재판장이 불렀다. 프랑크가 크리스마스 때까지 살아 있을 수 있을 것인지, 그래서 그의 일곱 살짜리 아들에게 집에 돌아가겠다고 한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2014년 10월 16일 목요일, 뉘른베르크 법원] 그로부터 68년 후에, 나는 한스 프랑크의 아들 니클라스와 함께 600호 법정을 방문하였다. 나클라스가 마지막으로 이곳을 방문한 것은 1946년 9월이었다. 그는 말했다. “여기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아버지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곳이에요.” 그리고 니클라스는 아버지의 행동을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법률가였어요.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아버지가 인도에 반하는 죄와 제노사이드 혐의로 재판을 받는 동안 앉았던 자리로 갔다. 그는 나를 바라보고 법정을 둘러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니클라스와 내가 600호 법정에 함께 있게 된 이유는 몇 년 전 내가 받은 예상치 못한 초대장 때문이다. 지금은 리비우라고 알려진 도시의 대학 법학부에서 온 것이었는데, 인도에 반하는 죄와 제노사이드에 대한 내 연구를 주제로 공개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리비우로부터의 초대에 응했던 이유는 분명 내 저술활동보다는 법정변호사로서의 직무라는 이유가 더 컸다. 나는 또 다른 이유로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내 어머니의 아버지인 레온 부흐홀츠가 거기에서 태어났다. 나는 외할아버지인 그를 오랫동안 알았다. 그는 파리에서 1997년 사망하였다. 하지만 나는 1945년 이전의 그의 삶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외할아버지가 그 시절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나는 강연을 하기 위해 2010년 가을, 리비우에 도착했다. 그때까지 나는 궁금하지만 아직 언급되지 않은 사실을 파헤쳐 왔다. 뉘른베르크 재판에 인도에 반하는 죄와 제노사이드라는 기소항목을 도입한 두 남자, 허쉬 라우터파하트와 라파엘 렘킨은 폴란드 시인 비틀린 (『나의 리비우』의 저자)이 문학작품 활동을 하던 시기에 이 도시에서 살고 있었다. 강연이 끝나고 이 두 학자의 삶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지만, 나는 그런 질문에 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날 늦은 오후가 되어 한 여학생이 나에게 다가왔다.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사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우리는 외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녀는 리비우에 사는 어느 누구도 라우터파하트나 렘킨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들이 유대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말했다. “교수님 강의가 제게는 아주 중요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매우 중요합니다. 교수님께서 라우터파하트와 렘킨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을 이해합니다.” 그녀는 덧붙였다. “하지만 먼저 교수님의 외할아버지의 흔적부터 찾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 레온 (LEON)
리비우로 여행을 떠나기 몇 주 전에 나는 어머니와 마주 앉았다. 우리 앞에는 서류 가방이 놓여 있었는데, 거기에는 내 외할아버지 레온의 사진과 서류, 신문기사들과 전보, 여권, 신분증, 편지, 메모 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헤이그에서의 심리절차가 끝난 후 스케줄이 비는 틈을 이용하여 런던에서 리비우로 날아갔다. 나는 어머니와 외숙모 애니 그리고 15살짜리 아들과 함께 답사 여행을 했고, 이 여행 과정을 통해 재구성한 레온 가족 삶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나의 외할아버지 레온은 리타와 1937년에 비엔나에서 결혼했으며, 1년 후 독일군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기 위해 비엔나에 들어온 다음 몇 주 만에 그의 딸이자 내 어머니인 루스가 태어났다. 1939년에 그는 파리로 거처를 옮겼다. 리타는 내가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인 1986년에 돌아가셨다. 레온은 1993년 뉴욕에 있었던 내 결혼식에 참석했으며, 4년 뒤에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13년 1월, 레온의 누나 구스타는 렘베르크를 떠나 비엔나로 가서 주류판매상인 막스 그루버와 결혼을 했다. 1923년, 레온은 전기 및 기술에 대해 공부하면서 그의 매형인 막스의 주류상점에서 그를 도우며 아버지가 밟았던 교육 과정을 따라가기를 희망했다. 5년 후, 레온은 비엔나의 20번 구역 라우셔 거리 15번지에 자신의 상점을 가진 주류제조업자가 되었다.
한편 1933년 1월 말,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아돌프 히틀러를 독일의 총리로 임명한다. 레온은 당시 레오폴드슈타트 구역의 중심가에서 더 큰 상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주류 거래가 활성화되자 그는 근처 독일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두렵게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1933년 5월 13일 토요일, 새로운 독일 정부의 대표가 처음으로 오스트리아를 방문했다. 여기에는 새롭게 임명된 바이에른 주 법무장관이며 히틀러의 전 법률고문이자 친구인 한스 프랑크 박사가 이끄는 일곱 명의 나치 장관들이 타고 있었다. 프랑크가 도착하자 대규모의 지지자들이 집회를 시작했다.
그 후 1938년 3월 12일 아침, 독일군이 오스트리아를 침공해 비엔나로 행진하면서 엄청난 규모의 군중들로부터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다. 사흘 뒤 히틀러가 베인나에 도착하였고, 헬덴 광장에 모인 청중들에게 연설을 하였다. 그 후 며칠 만에 국민투표로 합병이 비준되고, 오스트리아 전역에 독일법이 적용되었다. 또 나치에 반대하는 151명의 오스트리아인이 비엔나에서 독일의 다하우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아울러 유대인들이 강제로 도로을 닦도록 학대하였으며, 대학 입학과 전문직 진출이 금지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유대인의 자산과 부동산, 사업 등록을 의무화했고, 이는 레온이 운영하는 주류상점의 종말을 뜻했다.
사업체는 아무런 보상 없이 몰수되었다.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총독의 새로운 정부는 ‘유대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 실행을 담당하는 기관인 유대인 이주 중앙본부의 운영을 아돌프 아이히만에게 일임했다. ‘자발적인’ 이민과 국외 추방과 함께 학대가 정책의 일부로 받아들여졌다. 자산 이전 사무소가 유대인의 자산을 비유대인에게 이전시켰다. 또 다른 위원회는 오토 폰 베히터가 이끄는 오스트리아 신정부 공작에서 유대인을 제거하는 일을 감독했다. 그러자 많은 유대인들이 이민을 가거나 그렇게 하려고 애썼다. 레온과 그의 처남들도 마찬가지였다. 레온의 세 조카, 즉 구스타와 막스의 세 딸들은 그곳을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들의 부모인 구스타와 막스는 비엔나에 남았다.
1938년 7월 17일, 리타는 내 어머니인 딸 루스를 낳았다. 네 달 뒤에 파리의 독일대사관에 근무하는 낮은 직급의 직원이 살해당하며 크리스탈나흐트 – Kristallnacht, 수정의 밤이라는 의미로, 나치 대원들이 독일 전역의 수만 개에 이르는 유대인 상점을 약탈하고 250여 개 시나고그 (유대교 회당)에 방화를 저지른 날을 말함 – 가 촉발되었고, 유대인의 재산과 사업의 종말이 시작되었다.
11월 9일, 거리의 유대교 회당이 불에 탔으며 수천 명이 체포되었다. 죽거나 ‘사라진’ 수백 명의 사람 중에 레온의 매형 두 명도 포함되었다. ‘수정의 밤’ 이후 리타는 그녀의 이름에 ‘사라’를 추가하여 유대인 출신임을 표시하도록 강요당했고, 출생신고서와 혼인신고서도 수정해야 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레온이나 그들의 딸은 이런 모욕을 당하지 않았다. 11월 25일, 비엔나 경찰청장인 오토 스타인하우스는 레온에게 추방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리타는 그녀의 어머니인 로사를 돕기 위해 남기로 했다.
한편 루스의 여권에는 그녀가 한참 시간이 지난 1939년 7월 22일 오스트리아를 떠나 다음날 프랑스에 입국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도장이 찍혀 있었다. 1939년 1월 말 레온이 파리에 도착했을 때 그의 나이는 서른네 살이었다. 레온은 그의 딸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고 프랑스 군대에 지원하여 독일과의 전투에 참전하였다. 프랑스군은 그에게 신분증을 발급해주었고, 그를 ‘전기기술자’라고 기재했다. 그런데 한 달도 되지 않아 그는 전투를 하기에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퇴역하였다. 전쟁은 6월 22일 휴전협정 체결과 함께 끝났다. 연대는 해산되었다. 레온은 1940년 6월 14일 파리로 돌아왔다.
한편 1941년 여름 비엔나에서 보낸 시간은 리타에게 힘든 시기였다. 레온과 그녀의 딸과 3년 가까이 만나지 못했다. 그녀는 친정어머니 로사와 시어머니 말케와 함께 살았다. 9월에 비엔나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노란색 별을 달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리고 살고 있는 지역을 허가 없이 떠날 수 없었다. 그런데 8월 14일, 리타는 1년간 독일제국의 안팎을 다닐 수 있는 외국인 여권을 발급받았고, 10월 10일, 비엔나 경찰청은 프랑스와 독일의 국경에 있는 자를란트 주의 하르가르텐 팔크를 통해 나라 밖으로 나가는 편도 여행을 허가하였다. 비엔나를 떠나기 위해 리타는 내부에 있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1941년 11월 9일 리타는 비엔나를 떠났다. 바로 그 다음날 난민을 대상으로 독일제국 국경이 폐쇄되었다. 말케는 이제 비엔나에 남아 있는 레온의 마지막 가족이었다.
레온과 리타가 함께 살았던 건물이자 내 어머니가 태어난 곳인 타보르 거리로 갔다. 그곳은 말케 (레온의 어머니)의 마지막 비엔나 집으로, 다른 노인들과 함께 살았던 셰어하우스였다. 그곳에서 1942년 7월 14일 아침에 시작된 마지막 날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도로는 탈출을 막기 위해 나치 친위대에 의해 봉쇄되었다. 말케는 일흔두 살이었으며, 동쪽으로 떠나는데 단 하나의 가방만이 허락되었다. 아슈팡역까지 감시를 받으며 이동하는 동안 구경꾼들은 그녀와 다른 강제추방자들에게 침을 뱉고 조롱하고 모욕을 가하였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말케가 혼자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리타의 어머니 로사와 함께였다. 두 연로한 여성이 작은 여행가방을 하나씩 들고, 동쪽으로 향하는 994명의 비엔나 노인들 속에 섞여 아슈팡역의 플랫폼에 서 있는 모습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미어진다.
그들은 24시간의 여정 끝에 프라하 북쪽 60킬로미터 지점인 테레지엥슈타트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몸수색을 당했다. 그런 뒤에 그들을 위한 구역으로 안내되었다. 그 뒤 로사는 몇 주 동안은 살아 있었다. 사망진단서에 따르면 그녀는 9월 16일 결장주위염으로 사망했다. 로사가 죽고 일주일 후 말케는 Bq 402를 타고 테레지엥슈타트에서 추방당했다. 그녀는 기차를 타고 바르샤바를 넘어 동쪽으로 달려 한스 프랑크가 통치하는 지역으로 들어갔다.
기차는 기차역에서 2.5킬로미터 떨어진 트레블링카라는 작은 도시의 강제수용소에 멈췄다. 그 후의 일정은 프란츠 슈탕글 수용소장의 직접적인 지휘 아래 늘 하던 대로 반복되었다. 그들은 플랫폼에서 남성과 여성으로 나눠 줄을 서서 강제로 옷을 모두 벗어야 했고, 알몸 상태로 걸어서 수용소에 들어갔다. 이발사가 여자들의 머리를 밀었으며, 그 머리카락은 묶음으로 포장되어 매트리스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말케의 삶은 열차에서 내린 뒤 15분 만에 끝이 났다.
- 라우터파하트 (LAUTERPACHT)
허쉬 라우터파하트는 1897년 8월 16일 주키에프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아론 라우터파하트와 데보라 터캔코프인데, 레온의 어머니와 먼 친척뻘인 바리흐 올란데르가 출생을 지켜보았다. 아론은 석유 판매업을 하며 제재소를 운영했다. 라우터파하트가 (家)는 대가족이고 중산층이며, 교양 있고 독실한 유대인 가정이었다. 라우터파하트의 여동생 사비나는 후에 잉카라는 이름의 딸을 낳았는데, 내가 잉카를 만났을 때 그녀는 아론과 데보라를 훌륭한 조부모님이라고 회상했다. 주키에프 토지대장 기록에 따르면, 라우터파하트 가족은 488구역의 158번지 집에 살았다. 이 집은 내 외증조모 말케 부흐홀츠가 살던 이스트 웨스트 거리의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네의 다른 한쪽 끝이었다.
라우터파하트는 1910년에 부모와 형제들과 함께 주키에프를 떠나 렘베르크로 이주했다. 그 뒤 1915년 6월, 라우터파하트는 대부분의 시간을 아버지의 제재소에 있는 임시 숙소에서 보냈지만, 곧 오스트리아 군대에 징집되었다. 이후 1915년 가을, 그는 렘베르크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였다. 라우터파하트의 삶은 렘베르크에서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 간의 유혈충돌을 촉발시킨 스물세 살의 ‘붉은 왕자’ 빌헬름 대공이 비밀리에 내린 결정 때문에 완전히 달라졌다.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민족 간의 전투가 이어졌고, 유대인은 그 사이에 끼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11월 11일, 폴란드가 독립을 선언한 날 독일과 연합국 간에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에도 갈등은 계속되었다. 라우터파하트가 살던 테아트랄나 거리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져 그의 집도 상당한 재산적 피해를 입었다.
1919년 당시 라우터파하트는 대학이 동부 갈리치아 유대인들에게 문을 닫아버렸기 때문에 작가 이스라엘 장윌의 조언에 따라 비엔나로 갔다. 그는 법과대학에 등록하였는데, 그의 스승이 바로 저명한 법철학자 한스 켈젠이다. 이를 계기로 라우터파하트는 개별 시민은 양도할 수 없는 헌법상의 권리를 가지며, 이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법원에 재판을 신청할 수 있다는, 유럽의 새로운 사상을 직접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켈젠은 렘베르크에서 온 라우터파하트의 비범한 지적 능력을 알아보았다.
대학 행사에서 인기 있는 연사가 된 라우터파하트는 지적이며 의지가 강한 매력적인 음대 학부생인 팔레스타인 출신 레이첼 슈타인버그를 소개받았고, 사랑을 고백했다. 이 커플은 1923년 3월 20일 화요일 결혼했다. 신혼부부는 1923년 4월 5일 영국 북동부 그림즈비 어항에 도착했다. 라우터파하트는 런던정치경제대학 (LSE)에 등록했고, 레이첼은 왕립음악학교에 등록했다. LSE에서 그는 스코틀랜드 명문가 출신으로, 국제법 전공인 아놀드 맥네어 교수 밑에서 공부하였다.
라우터파하트는 1928년 여름에는 국제법협회의 영국 대표로 컨퍼런스에 참석하기 위해 바르샤바를 방문하는 일로 바빴는데, 그는 바르샤바에서 로보프로 건너가 가족을 방문하였다. 라우터파하트는 그때까지 맥네어를 지도교수로 모시고 세 개의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국내법의 일반원칙을 국제법상의 의무를 강화하는 데 이용하자는 그의 논문은 1927년 5월에 출간되어 학계의 찬사를 받았다. 논문은 광범위한 인정을 받았고, 1928년 LSE (런던정치경제대학교)의 법학과 조교수 자리를 가져다주었다.
1933년 1월, 라우터파하트가 우려하던 히틀러가 집권하는 일이 발생했다. 1935년에 라우터파하트의 부모인 아론과 데보라가 런던을 방문하여 로보프의 상황을 전했는데, 무너진 경제와 심각한 차별로 그곳에서의 삶은 말할 수 없이 어렵다고 했다. 한편 라우터파하트는 LSE에서 법학과 부교수로 승진하였으며 명성이 날로 높아졌다. 그리고 라우터파하트는 그 당시의 중요한 이슈를 회피하지 않았다.
그는 「독일에서의 유대인 학대」라는 제목의 논문을 작성하여 민족과 종교에 기반한 학대를 예방하기 위한 국제연맹 차원의 조치를 제안하였다. 한편 세계 정치의 우울함 속에서 라우터파하트는 그의 부모에게 영국으로 영구 이주하기를 권했다. 하지만 아론과 데보라는 그들의 고향인 로보프에 남기로 결정했다. 한편 라우터파하트는 그의 연구가 진척됨에 따라 더욱 성공하게 된다. 1937년 후반, 주키에프 출신의 소년은 케임브리지대학교의 명망 있는 국제법 담당 교수로 선임된다.
1941년 6월, 히틀러는 독-소 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독일군에게 동진하여 소비에트가 점령한 폴란드로 진격하라고 명령한다. 일주일 안에 주키에프와 리보프는 독일의 손에 넘어가고, 라우터파하트에게 오스트리아 사법 과목을 강의했던 로만 통샴 드베리에 교수를 포함한 학자들이 체포되었다. 그는 폴란드 지식인이라는 죄명으로 체포되어 세 아들과 함께 다음날 ‘리보프대학 교수 대량학살’의 일환으로 처형당했다. 라우터파하트의 조카 잉카는 그 시절의 생생한 체험담을 들려주었다.
1942년 여름, 그에게 새로운 프로젝트가 주어졌다. 미국 유대인위원회가 그에게 후한 원고료 (2,500달러에 기타 비용 포함)를 제시하며 국제인권법에 대한 책을 집필하도록 요청한 것이다. 그는 제안을 받아들이고, ‘개인의 국제법적 권리장전에 관하여’ 또는 그와 비슷한 주제로 책을 쓰겠다고 했다. 라우터파하트가 국제법적 권리장전 작업을 시작하는 순간에 프랑크는 반제 회의에서 합의된 갈리치아의 최종 해결책을 실행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는 라우터파하트 가족에게 즉각적이며 엄청난 영향을 미쳤는데, 잉카 카츠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주었다.
그녀의 할아버지 아론은 8월 16일 라우터파하트의 형 데이비드와 함께 지내던 아파트의 화장실 옷장 안에 숨어 있다가 끌려갔다고 했다. 잉카가 말했다. “이틀 후인 8월 18일, 라우터파하트의 여동생이자 내 어머니인 사비나가 독립군에게 끌려갔어요.” 그때 잉카의 나이는 12살이었다. 잉카는 그녀의 아버지가 진한 회색 양복을 입고 아내를 찾아 나선 것을 존경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버지도 끌려갔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잉카는 혼자 남았다. 라우터파하트는 아버지가 8월 16일 끌려간 사실을 알지 못했다. 9월에 영국 신문 《타임스》에 폴란드에서 자행되는 나치의 잔악한 행위에 대한 기사가 실렸는데, 그는 렘베르크에 대한 상황은 전혀 알지 못한 채 그곳의 데이비드(형) 앞으로 식료품 소포를 보냈다. 하지만 가족으로부터 소식을 듣지 못한 지 벌써 18개월이 흐르고 있었다.
라우터파하트는 인간의 권리에 대해 떠오르는 관념을 시험적으로 제시해보기 위해 여러 번의 강연을 진행하였다. 가장 어려운 문제는 새로운 법질서의 중심에 개인을 위치시킬 실질적인 방법을 찾는 일이었다. 런던에서 강의하고 케임브리지에서 또 다른 강의를 진행했다. 그리고 강의 중에 그는 국제법의 권리장전의 초안을 엄숙하게 읽었다. 강의를 듣던 어떤 사람은 이를 ‘역사적인 순간’이라고 표현하였다. 라우터파하트는 “권리장전이 효율적인 것이 되려면 국가당국뿐만 아니라 국제기관에 의해서도 집행 가능해야 한다.”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국제법원 창설의 필요성을 불러일으켰다.
1944년 3월, 그는 재판에서 최선의 판결을 이끌어내는 데 영향을 미치기를 희망하며 ‘중요한 원고’를 완성했다. 그는 잔학행위 수사와 관련하여 세계유대인의회를 지원했다. 뉴욕에서 돌아온 레이첼에게 세계유대인의회가 ‘독일이 유대인을 상대로 저지른 끔찍한 전쟁범죄’를 수사하기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생각하는 사람은 라우터파하트뿐만이 아니었다.
11월, 라파엘 렘킨이 쓴 책이 출판되었다. 그는 『추축국의 유럽 점령지 통치』라는 제목의 이 연구에서 집단을 파괴하는 새로운 범죄인 제노사이드라는 용어를 등장시켰다. 그러나 라우터파하트는 렘킨이 칭한 이 새로운 단어에 대해서 거리를 두고 미지근한 논조를 유지했다. 1945년 6월, 컬럼비아대학 출판부는 라우터파하트의 국제인권장전에 대한 책을 출판했다.
유엔 헌장과 이 책에 제시된 사상을 배경으로 라우터파하트는 전범재판 발상과 잭슨의 수석검사 임명을 환영했고, 잭슨은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들은 독일 수뇌부에 대한 재판을 담당할 최초의 국제 형사법원을 창설하기 위한 합의문 초안 작업이 시작될 무렵인 7월 1일 런던에서 만났다. 하지만 그는 렘베르크가 독일에서 해방되고 1년이 지난 그때까지도 가족에 대한 어떤 소식도 듣지 못했다.
7월 31일, 런던으로 돌아온 잭슨은 법령 초안의 개정본을 회람시켰다. 그는 라우터파하트의 표제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범죄의 새로운 정의를 포함시켰는데, 이것이 인도에 반하는 죄가 언급되어 인쇄된 최초의 자료이다. 8월 2일, 연합국 4대 열강은 합의를 위한 최종적인 노력을 경주하기 위해 만났다. 라우터파하트의 표제가 들어간 제6조 초안에 대한 논의는 논쟁의 여지가 많았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미뤄졌다. 치열한 논쟁 끝에 소비에트가 마침내 개인의 보호를 목적으로 인도에 반하는 죄가 국제법의 일부가 되는 것을 허용하기로 동의하였다. 1주일 후인 8월 8일, 최종 법안이 채택되고 서명 후 공개되었다. 역사적인 날이었다. 헌장의 제6조 ⓒ항에 의해 재판을 담당할 판사들은 인도에 반하는 죄를 범한 범죄자들을 단죄할 권리를 갖게 되었다.
신임 영국 법무장관 쇼크로스는 맥네어의 전쟁범죄위원회를 대체하는 새로운 영국 전쟁범죄집행부에 라우터파하트를 영입하였다. 헌장의 제6조는 실무적인 면이나 학술적인 측면에서는 의미가 컸다. 하지만 라우터파하트 개인적으로는 감사할 게 없었다. 4년이 지났지만 렘베르크와 주키에프에서는 전혀 소식이 없었다. 재판은 뉘른베르크 법원에서 1945년 11월에 열리기로 결정되었다.
- 렘킨 (LEMKIN)
라파엘 렘킨은 폴란드에서 태어났다. “나는 14년 동안 보우코비스크에서 14마일 떨어진 오제리스코라는 농장에서 살았다.” 렘킨은 그의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지금은 벨라루스의 아지아리스카인 오제리스코는 너무 작아서 거의 표시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이곳이 벨라와 요제프의 세 아들 가운데 둘째인 렘킨이 태어난 곳이다. 6살에 시작한 성경공부를 통해 렘킨은 사람들 사이에 정의를 설파하고 국가 간에 평화를 도모하는 예언자들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는 조부모가 하숙집을 운영하는 옆 동네에서 학교를 졸업했고, 책을 아주 많이 읽는 어머니 벨라에게서 이반 크릴로프의 ‘정의의 실망’에 대한 우화를 들었다. 하지만 그때의 생활이 목가적이지만은 않았다. 렘킨은 유대인에 대한 집단학살과 폭도들의 난동에 대해 들었다. 1906년, 렘킨이 여섯 살이었을 때 비아위스토크에서 100명의 유대인이 한 사건으로 떼죽음을 당했다.
1910년, 렘킨은 오제리스코를 떠나 보우코비스크 근처의 다른 농장으로 이사한다. 그런데 1915년 제1차 세계대전이 보우코비스크까지 번졌다. 그의 회고록에서 렘킨은 독일군이 도착하자 가족농장이 파괴되었고, 1918년 그들이 떠났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고 적었다. 전쟁이 끝나면서 보우코비스크는 폴란드의 일부가 되었으며, 렘킨은 라우터파하트와 레온과 마찬가지로 폴란드 국적을 취득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렘킨의 가족에게 또 다른 비극이 찾아왔다. 1918년 7월, 전 세계적으로 유행한 인플루엔자가 보우코비스크에서도 번졌고, 많은 사망자 가운데 렘킨의 남동생 사무엘도 포함되었다. 그때부터 렘킨은 집단의 파괴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한 가지 핵심 포인트는 뉴스에 나왔던 1915년 여름에 있었던 아르메니아인 대량학살이었다. “120만 명 이상의 아르메니아인이 살해당했으며, 이유는 단지 그들이 기독교인이기 때문이었다”라고 그는 덧붙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의 시기에 대한 렘킨의 이야기는 가볍게 넘어간다. 로보프에서 공부한 이야기와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그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더해도 렘킨이 철학을 공부했다는 정도일 뿐 자세한 내용은 없다. 그러다 내가 대학의 졸업 앨범에서 1926년 여름 렘킨에게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는 자료를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지도교수는 율리우스 마카레비츠 박사로, 라우터파하트에게 형법을 가르쳤던 교수이다. 뉘른베르크 재판과 국제법에 제노사이드와 인도에 반하는 죄를 도입한 이 두 사람이 같은 스승에게서 배웠다니! 호기심을 자극했고 심지어 놀랍기까지 했다.
렘킨은 1926년에 대학을 졸업했다. 그 시기쯤에 그는 비알리크의 중편소설을 번역하고, 러시아 형법과 소비에트 형법에 대한 원고 집필을 완료했다. 이후 히틀러가 권력을 잡을 무렵, 렘킨은 검사로 6년째 근무하고 있었다. 보우코비스크 농장 출신 소년이 폴란드의 최고 법조인, 정치인, 판사들과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공고히 하고 있었다. 그는 소비에트 형사법,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형법 그리고 분석적이기보다는 기술적으로 설명하는 폴란드의 혁명적인 사면법에 대한 책을 출판했다.
한편 그는 적극적으로 회의에 참여하여 유럽의 학자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국제연맹의 형법 발전 노력에 동참한다. 1933년 봄, 그는 10월에 마드리드에서 회의가 열릴 것을 예상하고 ‘잔학행위 (Barbarism)’와 ‘반달리즘 (Vandalism)’을 금지하는 새로운 국제규정을 만들 것을 제안하는 팸플릿을 작성한다. 그는 유대인과 다른 소수민족에 대한 공격이 히틀러의 그늘 아래 점점 늘어나는 상황에서 이런 작업이 그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믿었다.
이후 상법 분야 변호사로 전직한 렘킨은 바르샤바에 사무실을 열었다. 렘킨은 여러 건의 정치적 살인이 증가하는 시점에 법의 개혁과 테러리즘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반영하여 1년에 한 권씩 책을 출판하려고 노력했다. 이후 렘킨의 인맥은 점차 넓어졌고 그에게 매력적인 제안을 하기 위해 멀리서 찾아오는 손님들도 있었다. 노스캐롤라이나의 듀크대학교 말콤 맥더못 교수는 바르샤바로 찾아와 렘킨의 책을 영어로 번역하고 듀크대에서 가르칠 수 있는 기회를 제안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폴란드에 같이 머물기를 원했기 때문에 렘킨의 제안을 거절했다.
1939년 독일은 폴란드를 침략했다. 독일은 바르샤바, 크라쿠프 그리고 로보프와 주키에프를 포함한 폴란드 동쪽 도시에 폭탄을 투하하여 공포를 조성했다. 렘킨은 5일 동안 바르샤바에 머물다 독일군이 도시 가까이로 진격하자 9월 6일 그곳을 떠났다. 10월 26일, 한스 프랑크가 서쪽 새로운 국경까지 독일이 점령한 폴란드의 총독으로 지명되었다. 렘킨은 소비에트 편에 속한 보우코비스크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기차는 통행금지 시간에 도착했고, 렘킨은 체포를 피하기 위해 역의 화장실에 숨어 밤을 보냈다. 아침 일찍 그는 주요 도로를 피해 코치우시코가에 있는 동생 엘리아스의 집으로 걸어갔다.
벨라와 요제프는 보우코비스크는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렘킨과 함께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이제 은퇴하여 더는 자본가가 아니라고 요제프가 말했다. 엘리아스는 월급쟁이일 뿐이고, 그는 가게 소유권을 포기했고, 소비에트 정부는 그들을 건드리지 않았다. 렘킨만이 요제프의 동생인 이시도르가 사는 미국으로 떠나기로 했다. 렘킨은 미국이라는 먼 곳으로 가면 부모님을 돌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걱정에 가슴이 찢어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벨라와 요제프 모두 그에게 가야 한다고 권했다.
미국으로 가는 여정 또한 쉽지 않았다. 그는 야로슬라브스키에서 출발하여 열흘에 걸쳐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기차 여정을 시작했다. 그리고 일본 후쿠이현 쓰루가로 향하는 배를 탔고, 배는 1941년 4월 초에 쓰루가에 도착했다. 그리고 요코하마에서 헤이안 마루호에 탑승하여 미국으로의 마지막 여정을 시작했다. 헤이안 마루호는 밴쿠버에서 잠깐 정착한 후, 시애틀을 향해 마지막 기지개를 켰다. 렘킨은 시애틀에서 하루를 보내고 시카고로 가는 밤기차를 탔다. 기차는 4월 21일 더럼역에 도착했다.
렘킨은 기다리고 있던 맥더멋을 발견했다. 5년이 지났지만 대화는 끊어졌던 곳에서부터 바로 다시 이어졌다. 마침내 캠퍼스에 도착한 렘킨은 눈물을 흘렸다. 쉴 시간이 없었다. 대학 총장이 그에게 만찬 연설을 부탁하며 그가 떠나온 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해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렘킨은 히틀러라는 사람이 영토를 확장하고 소수민족을 말살하는 이야기를 했다. 이후 맥더멋은 렘킨을 국제연맹 시절의 동료들과 다시 만나게 해주었고, 그의 연구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만들었다. 게다가 미국 육군 법무감실의 전쟁계획국 국장인 아치볼드 킹 대령을 소개해 주었다. 렘킨은 잔학행위와 반달리즘에 대한 자신의 아이디어를 킹 대령에게 이야기했다.
미국에 도착한 지 5개월이 지난 9월, 렘킨은 듀크대학에서 그의 첫 번째 수업을 진행했다. 같은 달, 그는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열린 미국 변호사 협회 연례 컨퍼런스에 참석해 전체주의적 통제에 대해 강의를 하고, 독일의 잔학행위를 비난하는 존 벤스의 결의서에 자신의 이름을 더했다. 미국 연방 대법관 로버트 잭슨은 ‘국제적 무법상태의 과제’라는 제목으로 만찬 연설을 했다. 이 연설은 렘킨이 곧 알게 될 연구자인 라우터파하트의 사상과 맥락을 같이 했다. 그러나 렘킨은 로보프대학의 학생이었던 또 다른 학자가 잭슨의 연설문 작성에 일정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한편 렘킨은 1944년 11월에 카네기 재단의 지원을 받아『추축국의 유럽 점령지 통치』라는 원고를 완성했다. 이 원고의 1장부터 8장까지는 ‘독일의 점령 기술’에 대해 다루며 행정적인 문제, 법과 법원의 역할 그리고 재정, 노동, 자산과 같은 다양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유대인의 법적 신분’을 다루는 짧은 장도 있다. 제9장에서 렘킨은 ‘잔학행위’와 ‘반달리즘’을 버리고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내는데, 그리스 단어 ‘genos(종족 또는 민족)’와 라틴어인 ‘cide(살인)’를 결합한 단어이다.
그는 이 장의 표제를 제노사이드로 정했다. 제노사이드는 직접적으로 개인을 대상으로 하지만 개인의 자질이 아니라 국가적 집단의 일원으로서 당하는 행위와 관련된다고 렘킨은 9장에 적었다. 책의 두 번째 부분에서는 알바니아에서 유고슬라비아까지 독일이 점령한 17개 국가에서 실행된 조치들을 설명했다. 각 나라별로 유대인, 폴란드인 등 각 집단이 박해당한 단계를 자세히 설명했다.
1944년 11월, 렘킨의 책이 출판되었다. 이 책이 출판되고 6개월 뒤에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났지만, 렘킨은 그의 가족 소식을 듣지 못한 채 독일 수뇌부를 전쟁범죄 재판에 세우겠다는 트루먼 대통령의 의지를 실현시키는 일에 몰두했다. 이 일은 로버트 잭슨이 수석검사로서 진행하고 있었다. 5월 14일, 잭슨 팀은 계획표를 완성하였다. 여기에는 각 개인을 ‘소수인종 차별’로 기소하는 데 필요한 증거가 요약되어 있었지만 제노사이드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이틀 뒤 잭슨은 계획표 초안을 가지고 대법원에 있는 그의 법무 팀을 만났고, 개인적으로 가능한 기소조항 목록에 제노사이드를 추가하였다.
10월 6일, 연합국 4대 열강은 네 가지 기소조항이 들어있는 공소장에 합의했다. 마지막은 인도에 반하는 죄였다. 렘킨이 바라던 대로 제노사이드가 첫 번째 죄목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세 번째 전쟁범죄에 포함되었다. 전쟁범죄에는 점령한 영토에서의 민간인 학대와 살해 그리고 피고인이 고의적이며 체계적인 제노사이드를 자행했다는 혐의가 포함되었다. 제노사이드는 다음을 뜻한다. ‘특정 민족과 계급의 사람들 그리고 국가, 민족 또는 종교집단, 특히 유대인, 폴란드인, 집시 및 다른 집단을 파괴하기 위한 목적으로 특정 점령 지역의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민족과 종교 집단의 말살.’
- 판결(JUDGEMENT)
심리가 종결될 때까지 렘킨은 가족에 대한 소식을 듣지 못했다. 재판이 휴정 중이던 9월 중순에야 그는 벨라와 요제프에게서 무슨 일이 닥쳤었는지 알게 되었다. 뮌헨에서 재회한 그의 남동생 엘리아스를 통해 그의 가족이 ‘뉘른베르크 재판 기록’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9월 30일과 10월 1일 이틀에 걸쳐 판결 선고가 내려졌다. 라우터파하트는 영국에서 출발하여 판결 선고 이틀 전에 도착했다. 9월 30일, 렘킨은 파리에서 열린 평화 회의에 참석했다. 그는 최종의견서에 제노사이드에 대한 몇 개의 단어라도 포함시키자고 대표단을 설득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다시 한 번 그는 미국 군병원의 도움을 받았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침대 바로 옆에 놓인 라디오를 통해 판결 선고를 들었다. 레온 역시 파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강제추방자와 난민들을 돌려보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판결은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첫 번째 날인 9월 30일은 전체적인 사실관계와 법리 판시에 집중했다. 각 피고인의 유죄 여부는 두 번째 날 발표될 것이었다.
이튿날 로렌스 재판장이 오전 9시 30분에 스물한 명의 피고인들 각각에 대한 판결 선고를 위해 법정에 입장하였다. 프랑크는 첫 번째 줄 중간에 앉아 있었다. 라우터파하트는 피고인의 자리와 멀지 않은 영국 검사 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렘킨은 파리에서 라디오를 가까이 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로렌스 재판장은 괴링부터 판결 선고를 시작했다. “모든 혐의에 대해 유죄.” 로렌스 경이 이어서 다음 다섯 명에 대한 판결을 선고했다. “모두 유죄.” 니키첸코 판사는 로젠베르크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이제 프랑크 차례다. 비들 판사가 판결문을 읽었다. 비들은 1927년 프랑크가 나치당에 가입했을 때부터 독일법학회의 회장직을 거쳐 총독에 임명될 때까지 법률가로서 프랑크의 역할을 간략히 요약하였다.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프랑크는 첫 번째 공소사실에 대해서는 유죄를 면했다. 침략전쟁을 음모하는 결정에 관여했다는 증거가 없다. 잠깐 한숨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비들은 세 번째 공소사실(전쟁범죄)과 네 번째 공소사실(인도에 반하는 죄)에 대해 선고를 시작하였다. “그는 전쟁범죄와 인도에 반하는 죄에 관해 유죄이다.” 스물한 명의 피고인들 가운데 세 명이 무죄를 선고받았다. 제노사이드 혐의가 인정되어 유죄 판결이 내려진 피고인은 없었다. 그 용어는 사용되지 않았다. 점심을 먹기 위해 잠시 휴정하였다. 형량은 점심시간 이후 선고될 예정이었다.
판결 선고는 오후 2시 50분에 재개되었다. 처음 6명 중에 5명은 사형이 선고되었다. 괴링, 리벤트로프, 키이텔, 칼텐부르너 그리고 로젠베르크였다. 루돌프 헤스는 사형은 면하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프랑크의 순서는 일곱 번째였다. 로렌스 재판장은 몇 마디로 판결 선고를 마쳤다. “피고인이 유죄 판결을 받은 혐의들에 대해 재판부는 교수형을 선고한다.”
판결은 라우터파하트에게 위안이 되었다. 재판부의 지지를 받은 인도에 반하는 죄에 대한 그의 주장은 이제 국제법의 일부가 되었다. 렘킨의 반응은 달랐다. 그는 제노사이드에 대한 침묵에 절망했다. 렘킨은 판결 선고가 있던 날이 인생에서 가장 비극적인 날이었다고 고백했다. 레온은 파리에서 판결 소식을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이웃에 사는 젊은 여성 루세트가 레온이 기도중인 것을 보았다. 매일 아침 일정하게 하는 이 의식을 레온은 “내 어머니에게 ‘이미 사라진 집단의 일원이라는 소속감’을 느끼기 위해 한다”고 설명했다. 레온은 그렇게 하는 것이 책임을 묻는 방법으로 적절했는지 여부를 포함하여 재판이나 판결에 대해 내게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다.
열두 명의 피고인들은 항소권 없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교황은 프랑크에 대해 자비를 베풀어줄 것을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2주 후인 10월 16일 아침, 《데일리 익스프레스》에 헤드라인이 떴다. “오전 1시, 괴링이 가장 먼저 사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나머지 10명의 피고인들이 뒤를 이었다고 보도되었다. 그 기사는 아주 유명한 오보이다. 괴링은 교수형을 피해 사형 집행 직전에 자살했다. 리벤트로프가 처음으로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프랑크는 순서가 앞당겨져 다섯 번째였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