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인간 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요
마르퀴 드 콩도르세 / 책세상 / 2002.1.1.
– 계몽이란 무엇인가?
칸트는 이를 인간이 자신의 열등성에서 벗어나는 것, 다시 말하면 권위에 맹족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해에 과감하게 봉사하는 능력으로 규정했다.
그러므로 계몽 정신이란 인간의 자유 의지로 성취되는 진보의 합리성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계몽주의자들은 지식의 진보와 이를 위한 판단과 비판의 자유를 주장한다.
이에 대해 계몽주의의 상속자인 마르퀴 드 콩도르세는, 인간 정신의 진보는 교육과 정치적 수단에 의해 가능하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마땅히 평등하게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의 이면에는 인간은 지적, 도덕적, 신체적으로 무한히 완전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라는 진보의 이념과 이를 통한 인간 해방이라는 사상이 내포되어 있다.
인간 정신의 진보를 주장하는 콩도르세의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진보란 무엇이며, 진보를 이루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게 될 것이다.

○ 목차
들어가는 말
제1장 공교육5론
- 사회는 인민에게 공교육을 제공해야 한다
(1) 현실적으로 권리의 평등을 가져오는 수단으로서 공교육은 시민에 대한 사회의 의무이다
(2) 도덕 감정의 차이를 낳는 불평등을 감소시키기 위하여
(3) 사회 안에 유용한 계몽의 총량을 증대시키기 위하여 - 사회는 동등하게 다양한 직업에 관련된 공교육을 제공해야 한다
(1)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사이에 평등을 더 유지하기 위하여
(2) 더 유용한 평등을 가져오기 위하여
(3) 사람들이 질병에 노출되는 위험을 감소시키기 위하여
(4) 그들의 진보를 가속화하기 위하여 - 사회는 여전히 인류를 완성시키는 수단으로서 공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1) 재능을 타고난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을 개발할 수 있게 함으로써
(2) 앞 세대의 문화를 통해 새로운 세대를 준비한다 - 공통 교육에 더 많은 단계를 설정하는 동기
(1) 시민들이 공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그 기능이 하나의 직업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2) 직업과 생업의 분할이 인민을 우둔함으로 이끌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3) 일반 교육을 통해 허영과 야심을 감소시키기 위하여 - 공교육은 지식 중심 교육에 한정되어야 한다
(1) 노동과 재산의 필연적 차이가 더 넓은 범위를 제공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2) 교육이 부모의 권리를 해칠 것이기 때문이다
(3) 공교육은 견해의 독립에 어긋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남성에게 주어지는 교육 역시 여성과 공유해야 한다
(1) 여성이 자녀의 교육을 보살필 수 있도록
(2) 여성을 교육시키지 않으면 가족의 행복에 대립되는 불평등을 가정 안에 끌어들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3) 이는 남자들이 젊은 날에 습득한 지식을 보존하도록 해주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4) 여성이 공교육에서 남성과 같은 권리를 갖기 때문이다 - 결론
제2장 인간 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요
해제 ― 마르퀴 드 콩도르세 : 정치, 역사의 진보
- 마르퀴 드 콩도르세의 생애와 활동
- 계몽과 교육
(1) 계몽의 이념
(2) 인권론
(3) 공교육의 원리
(4) 혁명 정치에서 교육론의 갈등 - 역사의 진보
(1) 인간의 완전 가능성
(2) 진보의 조건
(3) 보편 언어 - 맺는 말

○ 저자소개 : 마르퀴 드 콩도르세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여의고 신심 깊은 홀어머니와 소박하게 생활했다. 유년시절 수학적 세계에 눈을 뜬 그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기병장교가 되라는 주위의 권유를 뿌리치고 홀연 단신으로 파리로 간다.
그곳에서 튀르고와 달랑베르를 만나 자신의 수학적 재능과 신념을 인정받은 그는 달랑베르와 라 퐁텐의 후원으로 스물여섯의 나이에 왕립과학 학술원 회원으로 선임되고 종신 사무국장으로 활동한다. 그의 수학적 관심은 행정과 정치로 이어졌다.
그리하여 학술원 행정은 물론이고 조폐국장으로서 정치에 입문하여 정책과 관련된 논문을 많이 발표하고, 프랑스 대혁명의 발발과 함께 혁명정치에 참여한다. 이후 국민공회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교육개혁안과 헌법기획안을 제출한 그는, 이성이 관철되는 혁명을 모색하게 된다.
이러한 혁명적 이념에는 시대를 앞선 계몽의식이 기반하고 있었다. 인간 이성에 대한 영원한 진보, 즉 인간은 무한히 완전해질 수 있다고 믿었던 그는 볼테르와 달랑베르, 디드로를 계승하여 제2세대 계몽사상가로 활약하며 ‘계몽주의 엘리트 공화정’에 마지막 광채를 뿌렸다.
계몽사상가의 계보에서 마지막 세대인 콩도르세는 무엇보다 빈부와 인종을 넘어선 박애주의를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그의 흑인노예 해방론, 노예 폐지론, 여성 평등이라는 구체적인 방안으로 현실화되었다. 특히 여성 평등에 대한 그의 신념은 시대를 앞선 매우 진보적인 사상이었다.
당대에 가장 진보적인 사상가였던 그는 프랑스 대혁명 이후 루이 16세의 사형을 반대하게 되면서 로베스피에르와 대립하게 된다. 이후 공화국의 적이자 음모자로 내몰리게 되어 도망자 신세로 전락한다. 친척 집을 전전하는 와중에도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글로 남긴다. 8개월간의 도주 끝에 불심검문으로 체포된 지 이틀 후, 간직하고 있던 아편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의 진보 정신은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오귀스트 콩트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주요 저작으로는 《다수결 투표의 확률에서 해석학의 적용》, 《튀르고의 생애》, 《볼테르의 생애》 등이 있으며, 교육개혁과 관련된 기획안과 경제 정책 관련 논문을 여러 편 발표했다.
– 역자 : 장세룡
그는 조용한 시골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홀어머니께 효도할 작정으로 대구상업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취직공부는 하지 않고 낡아빠진 온갖 책들을 읽느라 주로 도서관에서 일상을 보냈다. 그때 읽은 책 가운데 조지 오웰의 ‘1984년’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 그것은 기이하게도 그 후의 인생 역정과 무관하지 않다.
몇 년간 방황하다 대학에 입학했다. 법학을 공부하여 출세하라는 주위의 권고와 기대를 배신하고 역사학을 선택했다. 역사가의 의무는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변혁하는 것이란 말에 매혹되었기 때문이다.
방위병 제대 후 인혁당 사건으로 초토화된 1970년대 후반 대구 영남대학교에서 학생운동을 한다고 동분서주하던 시기는 개인적으로 낭만적 소영웅주의의 시기였다. 박정희의 죽음 이후 이제는 좋은 세상이 오리라 믿고 경북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한 것은 바로 그런 소박한 마음의 발로였다. 그러나 5월 광주는 한 역사학도에게도 끈질기게 지속될 고난의 짐을 부과했다.
문화운동과 사투, 학원민주화와 사회운동의 현장에서 그는 삶에서 이론과 실천이란 무엇인가를 수없이 되물었다. 현장에서 좌절과 성취를 반복하면서 실천에 복무하는 학문만이 아니라 상처 입은 마음에 위안을 주는 학문의 역할도 수용하게 되었다. 또한 학문과 실천과의 관계에서 우회를 인정하고 현실을 여유 있게 보려는 모습도 생겨났다.
그리하여 다시 영남대학교로 돌아와 몽테스키외의 정치사상에 관해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지금까지는 시민 사회에서 욕망의 역할과 도덕의 계보를 논한 맨드빌, 벌린의 두 가지 자유의 개념, 고대인의 자유와 근대인의 자유를 비교한 콩스탕의 자유주의, 루소의 사상에서 일반의지와 투표의 관계 그리고 자유론, 여기에서 소개하는 콩도르세의 수학적 사회과학 등에 관심을 갖고 그에 관한 논문들을 썼으며, 프랑스 역사가 세르토 (Michel de Certeau)를 소개하는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 책 속으로
이 마지막 시대를 끝내면서 검토해야 할 문제는 이것이다. 진보의 적국에서 해방되듯이 우연의 제국에서 벗어나고 모든 족쇄에서 해방되며, 진실과 덕성과 행복의 길에서 확고부동한 발걸음으로 걷는 인류에 대한 이러한 도표가 철학자에게는 얼마나 좋은 구경거리가 되는가? 그리하여 여전히 대지를 더럽히고 자주 그를 희생물로 만드는 오류와 범죄와 불의에서 얼마나 그를 위로해주는가? 그가 이성의 진보와 자유의 방어를 위해 노력한 대가를 받는 것은 바로 이 도표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이다.
그래서 그는 감히 인류 운명의 영원한 사슬에 진보를 연결한다. 바로 거기서 그는 덕성에 대한 진정한 보답과 선을 지속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기쁨을, 더 이상 어떤 숙명도 편견과 예속을 다시 불러와 어떤 해로운 보상으로 이것들을 파괴하지는 못할 것임을 발견한다. 이런 성찰은 그에게는 하나의 피신처이다. 그곳에서는 그를 박해하던 자들에 대한 기억이 그를 따라올 수 없다. 그곳에서 그는 본성의 존엄성과 권리들을 복권한 인간에 대한 생각을 갖고 살며, 탐욕, 두려움, 시샘이 순환하고 부패한다는 생각을 잊는다. 그곳은 바로 그의 이성이 스스로 창조해낸 낙원이며, 인간에 대한 그의 사랑이 순수하게 향유되는 곳이다.

○ 출판사 서평
마르퀴 드 콩도르세는 우리에게는 꽤 낯선 사상가이다. 콩도르세는 디드로와 함께 백과전서 운동에 참여했으며, 이들의 계몽주의적이고 진보적인 사상을 정치제도를 통해 현실화하려 한 사상가이다. 흑인노예 폐지론, 여성의 평등을 주장했던 그는 공교육을 통해 만인이 평등하게 교육받기를 원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루이 16세의 처형을 반대하면서부터 로베스피에르와 대립하게 된다. 이후 신망 높은 국민공회 의원에서 도망자의 신세로 전락한다. 8개월 간의 도주 끝에 체포된 그는 간직하고 있던 아편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의 진보 정신은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오귀스트 콩트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의 주요 저작으로는’다수결 투표의 확률에서 해석학의 적용’, ‘튀르고의 생애’, ‘볼테르의 생애’ 등이 있으며, 교육 개혁과 관련된 기획안과 경제 정책 관련 논문을 여러 편 발표했다.
‘마지막 계몽주의자’로 불리우는 마르퀴 드 콩도르세의 저작. 인간 이성에 대한 영원한 진보, 즉 인간은 무한히 완전해질 수 있다고 믿었던 그는 볼테르와 달랑베르, 디드로를 계승하여 제2세대 계몽사상가로 활약하며 ‘계몽주의 엘리트 공화정’에 공헌하였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인간 정신의 진보는 교육과 정치적 수단에 의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교육을 받아야 함은 마땅하다. 책의 앞부분에 해당하는 ‘공교육5론’에서는 그는 모든 인민에게 제공되어야 할 공교육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의 이면에는 인간은 지적, 도덕적, 신체적으로 무한히 완전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라는 진보의 이념과 이를 통한 인간 해방이라는 사상이 내포되어 있다. 콩도르세는 진정한 진보란 무엇이며, 진보를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를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당대에 가장 진보적인 사상가였던 저자는 프랑스 대혁명 이후 루이 16세의 사형을 반대하게 되면서 로베스피에르와 대립한다. 이후 도망자 신세로 전락한 콩도르세는 불심검문으로 체포되자 가지고 있던 아편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불행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 독자의 평 1
콩도르세는 역사를 열개의 시대로 나누었는데 그중에서 여덟번째 시대 (인쇄술의 발명)는 지식의 대중화로 인해 교회와 국가의 족쇄로부터 해방된 계기가 된다고 보았다.
아홉번째 시대는 데카르트에서 프랑스 대혁명에 이르는 폭발적 진보의 정점이며, 열번째 시대 (미래의 인간 정신의 진보)는 합리적 예언에 기초한 인류의 무한한 진보와 완전해질 가능성에 대한 낙관적인 예보이며, 바로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자연은 우리 인간들의 능력의 완전성에 대한 조건을 설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이 완전해질 가능성은 실로 무한하다. 이러한 완전가능성의 진보는 당장 그 진보를 중단시키고자 하는 어떤 힘으로부터도 독립적이다.
자연이 우리에게 준 이 지구가 존속하는 동안에는 어떠한 한계도 없을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완전가능성”은 베이컨의 새로운 아틀란티스에서 제시된것처럼 자연과학의 발전을 통해서 언젠가는 지상천국을 만들수 있다는 계몽주의자들의 진보의 신념이었다.
- 여러국가 사이의 불평등의 파괴
- 한 국민 내에서의 평등의 진보
- 인간의 현실적 완성(자연적 유기체의 완성)”
콩도르세는 이 세가지가 성취되면 미래사회의 진보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할 원동력은 “자연과학”이다
자연과학에서 믿음의 유일한 기초는, 알려졌든 알려지지 않았든 우주의 현상을 지배하는 일반법칙이 필연적이고 항구적이라는 생각이다.
자연과학의 법칙에 근거한 인간정신의 진보를 주장하며, 나아가서는 인간 신체의 능력을 과학적으로 개조하는것.
콩도르세를 비롯하여 당시 계몽철학자들이 공감했던 미래사회는 과학과 이성의 힘으로 탐욕, 두려움, 시샘없는 완전한 인간에 의해 존엄성과 권리가 지켜지는 아름다운 사회일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과학혁명과 계몽주의야말로 서구 근대제국주의의 근본적인 바탕이 되었으며, 이러한 이념의 결과는 대규모 전쟁과 살육이었음이 제1, 2차 세계대전을 통해 드러났다.

○ 독자의 평 2
어느 시대에나 그 시대를 앞서나가는 인물은 있기 마련이다. 18세기를 살아간 마르퀴 드 콩도르세 역시도 그러한 인물들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가 살았던 프랑스 사회는 혁명의 기운이 고조되고 있었다. 학문의 상아탑 속에서도 사회 변혁에 대한 꿈을 저버리지 않았던 그는 머지 않은 미래에 이룩될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사회를 꿈꾸었던 것 같다. ‘인간 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요’라는 긴 제목은 앞으로 도래할 사회에 대한 그의 유토피아적 발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태양이 인간의 이성 외에는 다른 주인을 알지 못하는 때가 도래할 것이라는 그의 예언 속에는 인간의 이성에 대한 그의 무한한 신뢰가 담겨 있었다. 물론, 그가 살았던 시대적 상황으로 인한 한계점은 존재한다. 예를 들어 그는 유럽 제국주의의 속성을 간파하지 못했다. 아프리카 대륙의 설탕 재배 문화가 약탈행위를 방지할 것이며, 유럽의 지배가 아시아, 식민지 대륙 민중들을 압제자로부터 해방시킬 것이라는 식의 고찰은 그 시대엔 뛰어넘을 수 없는 진리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는 사회의 진보를 위하여 경제적 부, 생계수단 그리고 교육에 있어서의 불평등이 완화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특히, 그가 제시한 노년에 이른 사람에게 여러 개인의 저축으로 증가된 구호품을 보장해주는 등의 방안은 우리 시대의 연금이나 사회보험에 해당하는 요소들이었기에 너무도 놀라웠다. 그에게 있어서 사회의 진보는 이성에 기초한 과학, 언어, 법률 등 모든 분야에서 우연적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공교육에 대한 강조를 하였으며, 이는 그의 글 ‘공교육5론’에 잘 나타나 있었다. 불평등의 약화, 개인의 재능 개발 등의 차원뿐만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 있어서 계몽의 총량 증대를 이유로 그는 평등한 교육을 의미하는 공교육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단순히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을 뛰어넘어 사람들이 지식을 얻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을 사회의 의무로 해석한 그의 관점은 오늘날 붕괴한 공교육을 바라봄에 있어서 참고되어져야 할 듯 싶다. 그는 공교육이 다양한 직업에 동등하게 적용되어야 하며, 공교육을 통해 이루어진 직업의 진보는 공공복지에의 기여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몇 세기 전에 이미 공교육의 중요성을 설파했던 그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경영과 경제 등을 제외한 모든 학문의 말살을 불러오고 있는 현대의 교육은 이미 공적 성격을 상실하지 않았나 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그는 공교육을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어져야 하는 보편적인 교육,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개발할 수 있는 다양성에 기반한 교육, 그리고 학문 그 자체의 발전을 위한 순수한 상아탑적 교육으로 구분하였다. 우리나라의 교육은 그의 구분 중 첫번째, 특히 직업에서 요구되는 지식을 갖추어주는 것-전공과목보다 영어나 컴퓨터 등을 중시하는 등-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또한 우리는 제도권적인 의미의 한시적 교육에만 중점을 두고 있지만, 그는 교육은 양성한 사람들을 다시 무지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도 포함한다고 보았다. 즉, 교육은 완성되어진 그 자체가 아니라 완성을 향해가는 과정이라고 본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오늘날에도 충분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놀라웠던 것은 공교육에 대한 그의 주장들이었다. 그는 공교육이 특정한 종교나 정치사상 등을 진리라고 명명하는 것이어서는 안 되며, 그러기 위해서는 지식 중심으로 한정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특정 견해를 진리라고 가르칠 권리가 공교육에는 없다고 본 그의 주장은 한가지 정답만을 강요하는 획일화된 우리 사회의 교육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주장 중 가장 놀라웠던 것은 교육을 영속적인 단체에 위임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한 부분이었다. 그는 공권력이 교육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자본주의 경쟁 논리 속에서 교육 역시도 하나의 시장상품화 되어 버린 현실에 대한 따끔한 충고랄까. 그는 교육이 가지는 공적 의미를 너무도 잘 간파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 시대로선 조금은 이르다 싶은 교육에 있어서의 남녀 평등도 주창하고 있었다. 물론, 이 주장에는 약간의 의문이 들었다. 특히 여성에게 공교육을 적용하는 것이 자녀의 가정 교육을 보장하고, 남성의 지식 보존에 유용하기 때문에 필요하다는 주장은 오늘날에는 적용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논리가 조금은 이상했지만-그의 주장에서 공교육의 성평등이 필요한 가장 큰 이유는 여성이 공교육에서 남성과 같은 권리를 갖기 때문이라고 본 것은 그 시대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발상이지 않나 생각한다. 지난 역사 속에서 인간은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신 중심의 세계관에서 인간 중심의 세계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때론 폭력과 비극의 나날들을 보냈지만 우리는 진보해왔고, 그 진보는 우리의 삶을 과거에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그 진보 속에서 개개인에게 드리워진 불평등의 정도는 교묘하게 상승된 듯 하다. 노예제를 위시한 신분제만큼의 절대 의문시되어지지 않는 관계는 사라졌지만, 자본의 유무 혹은 정도로 인해 나뉘어지는 계급적 의미의 불평등은 점차적으로 가속화되고 있다. 경쟁의 정도가 심화되고 극소수에게 부가 집중되는 지금의 사회 속에서 단순히 진보를 이야기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그 진보가 누구에 의해서 이루어진 진보인지, 그 진보로 인한 혜택이 누구에게 돌아가는지를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와 함께 우리는 진보로 인한 수혜의 영역을 확대하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콩도르세의 공교육에 대한 주장들은 사회에 만연해 있는 불평등적 요소를 줄일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이기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공교육이 붕괴하고 있는 지금의 사회 속에서 그의 주장은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진보하는가? 이 질문에 그렇다고 자신있게 답할 수 있는 우리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것은 인류가 이룩한 지난 역사에 대한 인정이며, 앞으로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이 이룩할 역사에 대한 자신감일 테니 말이다.

○ 독자의 평 3
이제까지 읽어왔던 오뒷세이아부터 시작을 한다면 뭔가 신이 인간을 두고 장난을 치는 기분이고, 거기서 인간의 운명은 이리저리 휩쓸린다. 거기서 셰익스피어로 넘어오면 인간이 운명이 이런 것만은 아닌데 하면서 스스로 고뇌하고 자기의 길을 선택하거나 깨우쳐가거나 한다. 신의 뜻을 따르자니 그렇고 인간이 뜻대로 하자니 그렇고 하는 어중간한 상황을 가장 잘 집약한 작품이 셰익스피어의 마지막 작품인 맥베스이다. 그 다음으로 넘어가니 신은 빠지고 인간들끼리 모여서 어떻게 사회를 이루고 제도를 이루어서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가, 무엇이 가능하게 만드는가 하다보니 사회계약론이 나온다. 인간 이성에 대한 신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콩도르세에 이르러서는 사람 사는 세상은 역사적으로 어떻게 진보해 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까지 온다. 신이 없어도 인간이 스스로 이성의 진보와 합리성에 의해서 진보할 수 있다는 것. 지난 시간에는 평등이라는 새로운 가치에 대해서 배웠다. 그리고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공교육을 국가에서 해야 된다고 말했다. 공교육은 평등하기 위해서 누구나 다 여기까지는 설정해서 이르도록 하는 지식교육이다.
‘인간 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요’. 콩도르세는 계몽주의 정점에 있다. 프랑스혁명 때문에 실패하고 감옥에 가서 쓴 글. 프랑스혁명이라는 것이 계몽주의가 보여줄 수 있는 양극단을 다 보여준다. 인간이 이성을 가지고 세상을 계획하고 실현하기 위해서 실천을 하다 보면 어떤 무리수를 둘 수 있는가, 그리고 그 계몽이라고 하는 것이 가지고 있는 폭력적인 측면은 어떤 것인가를 다 보여준다. 사실 1789년 프랑스혁명이라고 하는 것이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모습을 자코뱅 독재가 가지고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서 몸에 붙어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몇 십 년 만에 계획에 의해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단두대와 독가스가 대체로 상응한다.
계몽과 이성의 시대가 활짝 꽃을 핀다는 것은 과학적 이성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계몽주의는 근대의 과학에 바탕을 둔 사회사상이다. 다시말해서 과학혁명의 성과가 프랑스로 건너 오면서 사회적으로 적용된 사례가 계몽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까닭에 17세기 과학형명, 18세기 계몽주의를 묶어서 이성의 시대라고 한다.
문제는 계몽주의자들의 이성이라는 것이 사회에 지식을 널리 전파해서 사람들을 깨우치려고 했다. 굉장히 탁월하고도 좋은 이성의 사회적 기능, 즉 올바른 지식을 공급함으로써 사고방식의 변혁을 목표로 하고 그것의 성과로서 그 유명한 백과전서가 있다. 백과전서에 실린 도판만 묶어서 따로 출간된 것이 있다. 이 해설집이 한국에서도 번역된 것이 있다.
루소 때는 교육이라는 것이 훈육이라든가 하는 감정교육이 있는데, 콩도르세로 넘어오면 많이 드라이하다. 오늘날 프랑스 사람들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다. 프랑스 사람들은 굉장히 감성적이다, 예술과 낭만을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프랑스에서 예술과 낭만의 감성을 꽃피운 사람들은 프랑스 바깥에서 프랑스로 왔던 사람들이다. 파리는 시장이었고 모딜리아니이라든가 고흐라든가 피카소 모두 프랑스 사람이 아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과학적이고 기계적이다. 그것이 프랑스 유물론이다.
‘인간 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요’는 분류하자면 철학책으로 분류하는 것이 정확하다. 사실 철학은 판타지이기 때문에 이를 역사책이라고 하면 모독이 된다. 콩도르세가 가지고 있는 이성적 세계. 시작부터 끝까지 과학적 이성이 작동을 하는 세계를 목표로 하고 그런 세계를 구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책에서는 큰 그림이 그려진다. 우선 출발점이 콩도르세의 얘기를 보면 “자연은 우리 인간들의 능력의 완전성에 대한 조건을 설정하지 않는다.”로 시작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간의 능력은 자연적인 한계가 없다는 것. 인간이 완전해질 가능성은 무한하다. 이러한 완전가능성에 대한 진보는 당장 그 진보를 중단시키고자 하느 어떤 힘으로부터도 독립적이다.
유발 하라리의 ‘호모데우스’를 보면 인간이 요즘 가진 목표가 신적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콩도르세가 말한 것이 떠오른다. 자연과학이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능력치를 극대화해서 진보가 거대한 우주에서 지구가 현재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동안에는 결코 역전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의 일반법칙이 산출되는 동안에는 어떠한 파국적 변화도 현재 인류가 지닌 능력과 자원을 박탈할 수 없을 것이다. 꼭 유발 하라리의 말 같다. 콩도르세를 읽을 때는 판타지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유발 하라리 책을 읽으면서 이런 식의 심성구조를 가진 사람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원칙적으로 인간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이해하고 있고 그 이성을 바탕으로 문제가 생기면 다 솔루션을 제시해서 해결할 수 있는 존재다라는 것. 예들면 제레미 벤담의 ‘파놉티콘’. 우리는 원형감옥이라고 하면 나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벤담은 전혀 나쁜 의도에서 그것을 구상한 것이 아니다. 과학적인 원리와 실천을 통해서 죄수들의 나쁜 마음을 없애고 교화를 잘할 수 있고 그에 따라 죄수를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어서 사회를 더 좋게 만드려는 의도였다. 벤담이 1832년에 죽었는데 1930-40년대 일본에서 한참 자연과학이 발전하던 시기에는 벤담의 아이디어가 만주국 같은 데서 실현되고, 옛 서대문 형무소 또는 학교건물에 일본을 통해서 수입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악을 물리치고 사회를 개조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의 원조가 프란시스 베이컨이다. ‘새로운 아틀란티스’가 사실 왕립 과학 아카데미들이 다 들어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