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자유로부터의 도피
에리히 프롬 · 에릭 프롬 / YBM / 2001.5.31
1941년에 출간된 에리히 프롬의 대표작. 이 책은 유럽에서 나치즘이 창궐하던 시기에 나왔는데, 저자는 나치즘의 대두 원인을 사회심리학적 입장에서 분석하고, 그 기반을 제공한 현대 문명의 획일성과 인간의 소외 현상을 비판했다. 참다운 “자유”에 대한 개념과 인간의 존재 양상에 대한 새로운 반성을 촉구한 이 책은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켜 20세기의 고전으로 남게 되었다.
신프로이트학파에 속하는 저자는 위기상황에서 권위주의적 리더십이 등장하는 이유를 개성 상실의 현대사회에서 횡행하는 마조히즘과 새디즘의 측면에서 찾았다. 그의 해석에 의하면 나치즘은 히틀러에게 복종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한편, 약자인 유태인을 학대함으로써 욕구불만과 열등감을 해소하는 집단심리의 표현이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중세 사회의 붕괴로 생겨난 인간의 불안이라는 현상을 분석한 책이다. 수백 년 동안 열심히 노력한 끝에 인간은 물질적 부를 쌓고, 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했고, 최근에는 전체주의의 새로운 책동에 맞서 자신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저자 에리히 프롬이 분석하여 보여주려는 것은 근대인이 아직도 불안하다는 것이다. 불안한 인간은 온갖 부류의 독재자들에게 자신의 자유를 넘겨주거나, 스스로 기계의 작은 톱니가 되어 호의호식하지만, 자유로운 인간이 아니라 자동인형 같은 인간이 되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힌다.
문제의 중점은 르네상스 및 종교개혁 이래 인간을 종래의 속박으로부터 해방해온 자유의 원리와 인간에게 고독감과 무력감을 주는 부정적 측면이 서로 얽혀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데 있다.
그 결과 인간은 자유의 부담을 견디다 못해 나치즘 같은 전체주의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희구하게 되기까지 한다. 그래서 자유가 무거운 부담이 되는 곳에서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나치즘이나 파시즘의 심리적 온상이 존재한다.
○ 목차
제1장 자유-하나의 심리학적 문제인가?
제2장 개인의 출현과 자유의 다양선
제3장 종교개혁 시대의 자유
1. 중세적 배경과 르네상스
2. 종교개혁 시대
제4장 근대인이 관점에서 본 자유의 두 측면
제5장 도피의 매커니즘
1. 귄위주의
2. 피괴성
3. 자동인형적 순응
제6장 나치즘의 심리
제7장 자유와 민주주의
1. 개성의 환상
2. 자유와 자발성

○ 저자소개 : 에리히 프롬 · 에릭 프롬 (Erich Fromm)
에리히 프롬은 한평생 근대인에게 있어서 자유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물었으며 소외를 넘어선 인본주의적 공동체를 위해 보이지 않는 우리 마음 속의 적과 싸운 사람이었다. 그는 마르크스로부터 사회 구조의 변혁에 대한 감각을, 프로이트로부터 인간의 심연을 분석하고 해방하려는 의도를 배웠다. 방법론적으로는 ‘사회적 조건’과 ‘이데올로기’ 사이에 ‘사회적 성격’이라는 개념을 설정하였으며 이 3자의 역학관계에 의해 역사와 사회의 변동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그의 이러한 시도는 사회심리학이라는 새로운 장을 여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를 통해 근대 사회의 숨어있던 성격이 확연히 드러났다. 그는 이러한 방법론을 적용하여, 납득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광기로 가득찬 나치즘을 수용하고 지지한 대중들의 심리를 분석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나온 책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에리히 프롬의 이름을 전세계에 알림과 동시에 사회를 바라보는 새로운 방법론이 확립되었음을 선언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이 책은 감당할 수 없는 자유로부터 도피하고자 한 근대인의 심리적 기반이 나치즘이라는 우상을 수용했음을 밝힌 것이다.
나아가 프롬은 사회심리학적 시각으로 현대인들의 소외의 양상을 유형별로 고찰하고 근대적 세계 속에서 인간이 참다운 자기를 실현하여 가는 길을 찾고자 하였다. 『소유냐 존재냐』, 『사랑의 기술』은 그러한 노력의 산물이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야말로 인간을 소외로 몰고 가는 근본적인 틀임이 거듭 밝혀지고, 이를 넘어서고자 할 때 인간 개인의 내면적 해방과 사회구조의 변혁이 동시에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고 프롬은 주장한다. 이를 통해 『건전한 사회』, 즉 인본주의적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 우리들의 임무요 삶의 보람이라는 것이 프롬의 생각이다.
이러한 프롬의 주장은 너무나 원론적인 것이어서 때로 공허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문제 인식과 방향 설정에 하나의 유효한 도구가 됨은 부인할 수 없겠다. 그 외 저서로 『너희도 신처럼 되리라』가 있다.

○ 책 속으로
그런데 그 새로운 적은 본질적으로 외부적인 속박이 아니라 개성(personality)의 자유를 충분히 실현하는 일을 방해하는 내부적인 요소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신앙의 자유가 자유의 궁극적인 승리라고 믿는다. 그러한 신앙의 자유는 사람들이 자기의 양심에 따라서 신앙을 갖는 것을 허용치 않았던 교회와 국가 권력에 대한 승리이긴 하지만, 현대인은 자연 과학적 방법에 의해서 증명되지 않는 사실을 믿는 내면적(內面的)인 능력도 크게 상실했다는 점은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언론의 자유가 자유의 최후 단계라고 느낀다.
비록 언론의 자유가 `낡은’ 속박에 대한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승리이긴 하지만, 현대인은 `자기’가 생각하고 말하고 있는 것의 대부분이 누구나 생각하고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다. 즉, 현대인은 독창적으로 생각하는 능력, 즉 자기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는데, 바로 이러한 독창적인 사고 방식이야말로 언론의 자유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것이다. — p.89
그런데 그 새로운 적은 본질적으로 외부적인 속박이 아니라 개성(personality)의 자유를 충분히 실현하는 일을 방해하는 내부적인 요소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신앙의 자유가 자유의 궁극적인 승리라고 믿는다. 그러한 신앙의 자유는 사람들이 자기의 양심에 따라서 신앙을 갖는 것을 허용치 않았던 교회와 국가 권력에 대한 승리이긴 하지만, 현대인은 자연 과학적 방법에 의해서 증명되지 않는 사실을 믿는 내면적(內面的)인 능력도 크게 상실했다는 점은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언론의 자유가 자유의 최후 단계라고 느낀다. 비록 언론의 자유가 `낡은’ 속박에 대한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승리이긴 하지만, 현대인은 `자기’가 생각하고 말하고 있는 것의 대부분이 누구나 생각하고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다. 즉, 현대인은 독창적으로 생각하는 능력, 즉 자기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는데, 바로 이러한 독창적인 사고 방식이야말로 언론의 자유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것이다.
“소비자의 욕망은 생산자에 의해서 만들어진다.”(p.256)
홈쇼핑 채널을 보다 충동적으로 물건을 산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스마트폰이나 자동차 같은 물건들을 신형으로 바꾼다, 옷장은 꽉 찼는데 항상 입을 옷이 없는 것 같다, 좀 더 좋은 동네 좋은 아파트를 찾아 이사를 다닌다. 한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얼마나 소유해야 하는 것일까? 소비와 소유를 따라 쫓기듯 직진하는 삶은 당연한 것일까? 우리는 이미 무수히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더 많은 것들을 원한다. 에리히 프롬은 이런 욕망은 우리 안에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소유냐 존재냐』(까치, 2018)는 『자유로부터의 도피』, 『사랑의 기술』로 잘 알려진 사회심리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 에리히 프롬이 사망하기 4년 전인 1976년에 쓴 책이다. To have or To be, 소유할 것인가 존재할 것인가! 어리석은 질문일 수 있다. 대답은 당연히 “둘 다” 아니겠는가. 생명체인 우리는 존재의 본능을 가지고 있고 현대 사회에서 소유 없이 존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에리히 프롬은 이 책에서 소유 지향의 삶이 우리와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소유 지향의 삶의 대안인 존재 지향의 삶은 어떤 것인지 짚어나간다.
저자가 말하는 소유는 존재에 필요한 기본적인(기능적인) 소유가 아니다. 끊임없이 더 많이 소유하고 싶어 하는 소유에 대한 욕망과 집착을 말하는 것이다. 존재가 사라지면 소유는 당연히 필요 없어진다. 하지만 소유가 사라진다고 해서 존재가 필요 없어지지는 않는다. 이것만으로도 둘 중에 무엇이 더 본질적이고 중요한지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주객이 전도되어 소유가 존재를 점령했다. “사람에 대해서도 ‘백만 달러의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사회”(p.33)가 되었다.
저자는 소유를 지향하는 삶과 존재를 지향하는 삶의 차이에 대해 영국 시인 테니슨과 일본 시인 바쇼가 쓴 시를 들어 분명하게 보여준다. 테니슨은 산책길에 마주친 아름다운 꽃을 소유하기 위해 뿌리째 뽑아내지만 바쇼는 꽃을 건드리지 않고 관조한다. 테니슨의 태도는 소유 지향이고 바쇼의 태도는 존재 지향이다. 소유 지향의 삶은 결국 꽃의 생명을 단절시키고 존재 지향의 삶은 꽃과 일체가 되기를 원한다. 두 삶의 양식이 세계에 가져오는 결과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저자는 소유 지향의 삶과 존재 지향의 삶이 문학뿐만 아니라 언어 관습, 철학 개념, 학습, 기억, 대화, 독서, 권위 행사, 지식, 신앙, 사랑 같은 우리 일상의 경험들 속에서도 차이를 보인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현대 영어에서는 소유를 나타내는 have 동사가 물건뿐만 아니라 생각, 갈망, 뜻, 문제 같은 실제로는 소유할 수 없는 개념들과도 함께 쓰인다.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영어권 국가에 소유 지향의 삶이 얼마나 깊이 파고들었는지 보여주는 예다. 하물며 “아무것도 없는 무 無”마저 가지고 싶어 하는 표현에서 (I have nothing.) 극단적인 소유 지향의 삶을 본다. 저자에 따르면 “지상의 많은 언어들이 ‘가지다’에 해당되는 말을 아예 가지고 있지 않다” (p.43)고 하니 소유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인간의 본성은 아닌 듯하다.
독서와 사랑에서는 이 두 삶의 양식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소유형 독서는 책의 내용을 습득하거나 기억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존재형 독서는 “소설의 주인공을 파악하여 인간의 본성을 통찰하고 스스로에 대해서도 무엇인가를 깨우친다.” (p.60) 소유형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구속하고 가두며 지배하지만” 존재형 사랑은 “대상을 소생시키고 대상의 생동감을 증대시킨다. 사랑은 소생과 생장을 낳는 과정이다.” (p.73) 사랑은 사물이 아니므로 소유할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하는 행위는 능동적이고 생산적인 활동이다. 소비나 사랑이라는 익숙한 주제뿐만 아니라 지식, 대화, 신앙, 기억, 학습 등에서 소유 지향의 삶과 존재 지향의 삶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분석한 저자의 통찰력이 돋보인다.
저자는 유대교, 기독교, 불교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 소유 지향의 삶 대신 존재 지향의 삶을 살도록 가르쳤다고 말한다. 구약성서는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떠나라, 모든 속박으로부터 너 자신을 풀어라, 존재하라!”고 가르쳤다.(p.78) 기독교의 주된 배경인 황야는 “도시도 부富도 없는 유목민의 땅”이자 “그 어떤 재산소유로도 속박받지 않는 자유로운 삶의 상징” (p.79)이다. “안식일에만은 모두가 마치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듯, 존재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목적도 추구하지 않는 듯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p.82) 석가모니 역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구도의 길을 떠났다.
이런 종교 지도자들은 물론 아리스토텔레스, 토마스 아퀴나스, 스피노자, 마르크스, 슈바이처 등 역사적으로 위대한 사상가들의 말을 통해 저자는 소유 지향의 삶과 존재 지향의 삶의 차이를 들려준다. 그리고 소유 지향의 삶이 중심이 되면 수동성, 박탈감, 패배감, 불안, 적대감, 파괴가 뒤따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사실이 이러하다면 소유 지향의 삶을 사는 것이 그다지 현명한 선택처럼 보이지 않는다. 소비와 소유가 중심이 된 삶에 피로를 느끼는 사람들이라면 아마 공감할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의 체험, 기쁨의 체험, 어떤 진리를 발견하는 체험”(p.185)을 가져다주고 존재 자체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존재 지향의 삶을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자는 “새로운 사회는 인간의 근본적인 내적 변화를 통해서만 이룩되며, 현존하는 헌신의 대상 대신 새로운 헌신의 대상이 등장해야만 한다.” (p.191)고 말한다. 그리고 불교의 사성제처럼 고통에 대한 네 가지 조건만 갖춰지면 인간의 근본적인 성격 변화가 가능하다고 본다. 그리고 새로운 인간의 모습을 21가지로 나눠 정리한다(pp.244 ~ 246). 그 중 하나를 보면 이렇다. “자기 것으로 만들고 세계를 지배하며 그래서 결국 자기 소유물의 노예가 되는 그런 소유에의 욕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에 대한 믿음과 관계에의 욕구, 관심, 사랑, 주변세계와의 연대감을 바탕으로 한 안정감, 자아 체험, 자신감” (p.244) 같은 것이 새로운 인간의 모습이다. 존재로 충만한 이런 삶을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안에서 어떤 근원적인 희열이 올라오지 않는가?
이런 새로운 인간의 도래는 필연적으로 사회 환경의 변화를 요구한다. 저자는 지금까지의 기술적 유토피아를 인간적 유토피아로 바꾸기 위해 극복해야 할 난제들을 제시하고 “인간이 자유로워지려면, 다시 말하면 병적 과소비로 산업을 추진시키는 악순환에서 빠져나오려면, 경제체제의 근본적 변혁이 있어야 한다.” (p.253)고 주장한다. 그에 해당하는 변화들로 ‘이윤’을 위한 생산이 아니라 ‘건전한 소비’를 위한 생산을 할 것, 이를 위해 기업 이익과 성장을 위해 생산하는 기업 경영인과 주주의 권리를 과감하게 제한할 것, 정치와 경제의 최대한의 분권화, 상업 광고와 정치 선전에서 세뇌적 방법 금지, 가부장적 지배에서 여성의 해방 등을 얘기한다.
이중 어느 하나 쉬워 보이는 변혁은 없지만 저자는 존재 지향의 삶이 중심이 되는 ‘존재의 도시’를 대안으로 제시하며 책을 마무리한다. 이 책이 나온 지 거의 반세기가 지난 지금 저자가 제안했던 방향으로 세상이 바뀐 것 같지는 않다. 소비와 소유의 지배는 더 강해졌고 이런 상황을 부추기는 지배 계급들의 힘은 더 막강해졌다. 테니슨의 손에 뿌리 뽑힌 꽃처럼 실제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존재를 빼앗기는 일들이 이제 일상처럼 일어난다. 소비와 소유, 물질의 밀림 속에서 길을 찾고 있는 이들, 자의든 타의든 내 자신의 삶이 아니라 타인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 어떻게 하면 자유롭게 살 수 있는지 고민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노예의 애굽을 떠나 내 온 존재를 느끼고 삶의 충만함을 찾을 수 있는 광야로 나아가는 길을 발견하길 바라며.

○ 출판사 서평
자유로부터의 도피 (Escape from Freedom)는 에리히 프롬이 1941년 출판한 책이다. 첫째는 나치즘의 이상심리 (異常心理)에 대한 분석, 또는 나치즘 성립과정의 사회심리학적 분석이라는 점에서, 둘째는 사회적 성격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탄생시켰다는 점에서 특색을 갖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사회경제적 분석은 마르크스에 의거하고 사회구조적 분석은 막스 베버에 의거하며, 다시 여기에 프로이트의 방법을 가해서 분석을 한다.
프롬에 의하면 나치즘 성립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중산계급이며, 중산계급이 사회경제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화의 길을 걸으면서 정치적으로는 나치즘에 흡수되어 나치즘을 지탱하게 된 과정에 주목하고, 이러한 사태를 발생시킨 요인인 중산계급의 사회적 성격이 사회구조상으로 보아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임을 밝히려고 노력하였다. 아마도 이 개념은 베버의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배운 것으로 생각되며, 종래의 마르크스주의의 토대와 의식, 또는 하부구조의 상부구조에 대한 규정성(規定性)에 관한 견해에 대해 제3의 요인으로서 생각해 낸 것이다. 그는 나치즘의 분석에 주안을 두면서 현대사회에 있어서의 ‘자유’ 문제를 다루며, 자본주의의 현대에 있어서의 기구와 이를 초래하는 노동·집단·조직의 기계화에 의한 자기소외 (自己疏外)의 요인을 중요시하고, 사회경제적 요인과 이데올로기적 요소와의 관계, 상호규정성 (相互規定性) 등을 밝히려고 한다.
– 현대인의 정신적 상황에 대한 강력한 통찰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중세 사회의 붕괴로 생겨난 인간의 불안이라는 현상을 분석한 책이다. 중세 사회에는 많은 위험이 존재했지만, 인간은 그 안에서 보호를 받으며 안전하다고 느꼈다. 수백 년 동안 열심히 노력한 끝에 인간은 꿈도 꾸어보지 못했던 물질적 부를 쌓아올리는 데 성공했다. 인간은 세계 곳곳에 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했고, 최근에는 전체주의의 새로운 책동에 맞서 자신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저자 에리히 프롬이 분석하여 보여주려는 것은 근대인이 아직도 불안하다는 것이다. 불안한 인간은 온갖 부류의 독재자들에게 자신의 자유를 넘겨주거나, 스스로 기계의 작은 톱니가 되어 호의호식하지만, 자유로운 인간이 아니라 자동인형 같은 인간이 되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힌다.
– 두 개의 길
자유는 근대인에게 독립성과 합리성을 가져다주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개인을 고립시키고 그로 말미암아 개인을 불안하고 무기력한 존재로 만들었다. 그 세계에서의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이 도구화되었고, 그는 자기 손으로 만든 기계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그는 자기가 생각하고 느끼고 원해야 한다고 믿는 것을 생각하고 느끼고 원한다. 바로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자아를 상실하지만 자유로운 개인의 진정한 안전은 모두 그 자아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개인이 고립에서 벗어나려면, 자유라는 무거운 부담을 피해 다시 의존과 복종으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인간의 독자성과 개인성에 바탕을 둔 적극적인 자유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그중 하나의 길을 통해서 그는 “적극적인 자유”로 나아갈 수 있고, 사랑과 일 속에서 자신의 감정적·감각적·지적 능력을 진정으로 표현하면서 바깥 세계와 자연스럽게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며, 그리하여 자신의 개체적 자아의 독립성과 본래의 모습을 포기하지 않고도 인간과 자연 및 그 자신과 다시 일체가 될 수 있다.
그에게 열려 있는 또 하나의 길은 뒤로 물러나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그의 개체적 자아와 세계 사이에 생겨난 간격을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외로움을 극복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이 두 번째 길은 그가 “개인”으로 결합되기 전과 같은 방식으로 세계와 그를 다시 통합시키지 못한다. 그와 세계의 분리는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두 번째 길은 참을 수 없는 상황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그 상황이 오래 계속되면 도저히 살 수가 없기 때문에 거기에서 도피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두 번째 길을 특징짓는 것은 그 강박적인 성격이다. 또 다른 특징은 개성과 자아의 본모습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이다. 인간은 이제 더 이상, 자기가 만든 세계의 주인이 아니다. 반대로 인간이 만든 세계가 그의 주인이 되었다.
– 심리학적인 각도에서 자유의 문제에 접근하다
프롬이 서 있는 심리학적 입장은 이른바 신프로이트학파 또는 프로이트 좌파라고도 불리는 입장이다. 간단히 말하면 신프로이트학파는 사회학화된 프로이트주의다. 프로이트는 리비도를 생물학적이고 성욕에 뿌리를 둔 근본 충동으로 가정하고 있지만, 신프로이트학파에서는 사회적인 인간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충동이나 욕구를 상정함으로써, 프로이트의 모든 것을 성으로 뒤덮어버리는 범성주의를 극복하고 있다. 이런 극복을 통해 프로이트의 천재적 통찰을 충분히 살리는 동시에 프로이트의 사회적 반동성을 극복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과연 무엇인가?
프롬에 따르면 그것은 사회경제적 조건, 이데올로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회적 성격”이다. 이 사회적 성격이라는 개념을 새로 제시한 데 이 책의 큰 매력이 있다. 이것은 ‘부록’으로 딸린 ‘성격과 사회 과정’에 자세히 나오지만, 여기에서 세 명의 거인 사상가인 마르크스, 막스 베버, 프로이트를 인용하고 있는 점에 유념해주기 바란다. 말할 것도 없이, 역사를 움직이는 최종적인, 또는 특히 유력한 요인으로서 사회경제적인 것을 생각한 사람은 마르크스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것을 생각한 사람은 베버이고, 인간의 심층 깊숙한 곳에 있는 근원적 충동 (여기에서 개성이라는 개념과 사회적 성격이라는 개념이 생겨난다)을 생각한 사람은 프로이트이다. 프롬은 그중 어느 것이 결정적인 최종적 요인이라고 단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프롬이 특히 주의를 환기시키려 한 것은 사회경제적 요인과 이데올로기와 함께 역사에서 맡고 있는 사회적 성격의 역할이었다.
– 자유의 심리학적 측면을 분석하다
문제의 중점은 르네상스 및 종교개혁 이래 인간을 종래의 속박으로부터 해방해온 자유의 원리와 인간에게 고독감과 무력감을 주는 부정적 측면이 서로 얽혀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데 있다. 그 결과 인간은 자유의 부담을 견디다 못해 나치즘 같은 전체주의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희구하게 되기까지 한다. 그래서 자유가 무거운 부담이 되는 곳에서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나치즘이나 파시즘의 심리적 온상이 존재한다.
프롬이 현대인의 운명에 대해 논하고 있는 점은, 충분히 민주주의적이지도 않고 충분히 기계주의적이지도 않은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충분히 민주주의적이지 않은 사회에서는 위에서 강제된 ‘민주주의’는 더욱 획일적이 될 것이고, 충분히 기계주의적이지 않은 사회에서는 간신히 작동되는 기계는 더욱 불쾌한 독소를 내뿜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매스컴이 조장하고 있는 현대인의 최면 상태는 동서양을 불문하고 공통된 현상이다. 따라서 자유가 주어져 있느냐 하는 문제와 함께 자유를 보람 있게 쓸 수 있느냐가 당연히 큰 과제가 된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