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장칭 : 정치적 마녀의 초상
로스 테릴 저자 / 교양인 / 2012.12.5
- 장칭을 통해 중국 정치를 들여다보다!
20세기 중국사의 대재앙인 ‘문화혁명’의 주역 장칭의 삶을 다룬 『장칭』. 1984년 출간 이후 장칭에 관한 가장 객관적이고 훌륭한 전기로 평가받고 있다. 저자는 마오쩌둥의 죽음 이후 중국에서 검열과 금지의 대상이 된 장칭 관련 자료들과 장칭 지인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영웅 마오쩌둥을 타락시킨 창녀’라는 오명에 가려진 장칭의 본 모습을 생생하게 되살려낸다.
산둥성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상하이, 옌안, 베이징으로 이어진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과 문화혁명, 마오의 죽음, 덩샤오핑의 집권에 이르기까지 20세기 중국사를 보여준다. 장애물에 맞서 평생 투쟁한 비범한 의지의 소유자 장칭을 통해 중국공산당 지도부에서 이루어지는 정치적 결정의 메커니즘을 이해할 수 있다.
○ 목차
ㆍ프롤로그 “나는 마오쩌둥의 개였다”
1장 집을 나온 ‘노라’(1914~1933)
전족을 풀어버린 아이 ┃ 배우가 되고 싶은 소녀
예술학교에 들어가다 ┃ 16살의 신부
공산주의에 눈뜨다
2장 상하이의 스타(1933~1937)
아마추어 혁명가 ┃ 감옥에서 보낸 시간
무대 위의 ‘노라’, 스타가 되다
상하이 영화배우 ┃ “나는 혁명가입니다”
카페의 보헤미안들 ┃ 어긋난 결혼
잡지에 글을 쓰다 ┃ 상하이를 떠나다
3장 마오쩌둥의 연인(1937~1949)
옌안으로 가는 길
당 학교에 들어가다 ┃ 마오쩌둥의 연인이 되다
허쯔전과 릴리 우 스캔들
최고 지도자의 아내 ┃ ‘장칭’으로 다시 태어나다
마오쩌둥의 충직한 비서 ┃ 인민해방군 정치 보조원
4장 와신상담(1949~1959)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 ┃ 공산주의 예술 운동
혁명의 길에서 밀려나다 ┃ 중난하이에 갇히다
소련에서의 투병 생활 ┃ 다시 마오의 동지로
5장 문화혁명의 주역(1959~1969)
정치 무대에 서다 ┃ 망치를 든 파괴자
문화혁명의 불을 놓다 ┃ “반란을 일으키라”
숙청과 복수의 심리학 ┃ 열정에 찬 혁명 연설가
류사오치와 왕광메이를 숙청하다
문화혁명과 장칭
6장 여제의 꿈(1970~1976)
라이벌 린뱌오의 최후
측천무후의 길을 따라 ┃ “아주 사악한 여자”
반(反)저우언라이 투쟁 ┃ “마오 주석을 대신하여”
덩샤오핑과 대결하다 ┃ “나는 이제 늙었소”
마오쩌둥의 마지막 경고 ┃ 저우언라이의 죽음
마오쩌둥의 유언과 쿠데타 실패
7장 재판정의 마담 마오(1977~1991)
감옥에 갇힌 ‘악녀’ ┃ 최후의 투쟁
“나는 굴복하지 않는다” ┃ ‘노라’의 죽음
ㆍ에필로그
주석 / 옮긴이 후기 / 장칭 연보
주요 인물 / 찾아보기
○ 저자소개 : 로스 테릴 (Ross Terrill)
저자 로스 테릴 (Ross Terrill)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태어났으며, 1970년에 하버드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학에서 정치 사상, 중국 정치, 국제 외교 등을 가르치면서 중국 관련 저서를 여러 권 출간했다. 현대 중국사와 정치 문제에 정통한 학자로서 현재 하버드대학 페어뱅크 동아시아 연구센터 연구원으로 있다. 1980년에 출간한 《마오쩌둥 (Mao : A Biography)》(1980)으로 “천재적인 전기 작가”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 뒤 마오쩌둥의 아내이자 ‘문화혁명’의 주역으로 알려진 ‘장칭’의 전기 작업에 착수했다. 장칭은 중국공산당에서 철저히 금기시하는 인물인 까닭에 사후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관련 자료가 대부분 검열과 비공개의 베일에 싸여 있다. 로스 테릴은 베이징 고위층에서 은밀히 회람되던 문건들을 입수하고, 장칭의 가족을 비롯해 그녀와 공적ㆍ사적으로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을 찾아 프랑스와 미국, 인도네시아, 중국 등지를 오갔다. 이렇게 직접 발로 뛰어 발굴해낸 수많은 자료와 생생한 인터뷰를 토대로 삼아 쓴 《장칭 (Madame Mao)》은 1984년 초판 출간 후 영국, 프랑스, 인도네시아, 에스파냐, 이탈리아 등 여러 나라에서 번역 출간되면서 “가장 신뢰할 만한 결정적 전기”라는 평가를 받았다. 중국에서는 당국의 정치적 압력 때문에 1994년에야 비로소 정식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 역자: 양현수
역자 양현수는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했고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정치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일하고 있다.
○ 출판사 서평
“그들이 쓰러질 때까지 투쟁하고, 그들의 명성이 땅에 떨어질 때까지 투쟁하고, 그들의 위세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투쟁해야 한다.” (장칭)
“장칭은 아주 사악한 여자야. 말로 묘사하기 힘들 정도로 사악하지.” (덩샤오핑)
- 마오쩌둥의 아내이자 동지로서 ‘문화혁명’의 불을 놓은 극좌파의 선봉, 중국공산당 역사상 가장 위험하고 비범했던 여성 정치가, 마오 사상의 계승자에서 ‘인민의 적’으로, 다시 역사의 금기로 봉인된 ‘정치적 마녀’ 장칭에 관한 역동적이고 매혹적인 전기 !
이 책은 20세기 중국사의 대재앙으로 불리며 중국의 트라우마가 된 ‘문화혁명’의 주역 장칭의 삶을 다룬 전기이다. 오랫동안 중국 현대사와 중국공산당 정치를 연구해 온 저자 로스 테릴은 ‘영웅 마오쩌둥을 타락시킨 창녀’ ‘사악한 여자’라는 오명에 가려진 장칭의 본 모습을 생생하게 되살려낸다. 저자는 미국, 유럽, 중국 등 여러 대륙을 오가며 마오쩌둥 사후 중국에서 검열과 금지의 대상이 된 장칭 관련 자료들을 입수하고 장칭의 지인들과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1984년 출간 후 지금까지 장칭에 관한 가장 객관적이고 훌륭한 전기로 평가받는 이 책으로 우리는 어떠한 장애물 앞에서도 결코 굴복하지 않았던 비범한 의지의 소유자, 중국 대륙의 여제를 꿈꾸었던 정치적 인간의 맨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너희가 나를 체포하고 재판하는 것은 마오 주석을 모욕하는 것이고, 전 인민을 모욕하는 것이며, 전 인민이 참여한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을 모욕하는 것이다!”
1980년 11월에 시작된 일명 ‘4인방 재판’에서 피고석에 선 마오쩌둥의 미망인은 이렇게 자신을 기소한 검찰과 공산당 지도부를 향해 당당하게 거침없는 비난을 쏟아내며 재판부를 곤경에 빠뜨렸다. 정치 지도자들, 지식인들, 인민들을 ‘탄압’했으며, 당과 국가 권력의 ‘찬탈’을 기도했다는 것이 장칭의 주된 죄목이었다. 문화혁명이라는 마오쩌둥의 과오를 덮기 위해 준비된 이 한 편의 잘 짜인 정치 재판은 장칭이라는 돌발 변수로 인해 중국 정치 체제의 허점을 드러내는 폭로의 장이 되고 만다.
장칭은 마오쩌둥의 아내이자 가장 충직한 비서로서 혁명과 전쟁의 마지막 시기를 함께 겪었다.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마오가 위기에 놓인 순간, 장칭은 가장 든든한 조력자로 정치의 최전선에 등장한다. 상하이에서 온 배우 출신이라는 이유로 정치 무대에서 소외되었던 장칭에게 마침내 때가 온 것이다. 단숨에 기회를 움켜쥔 장칭은 전무후무한 내부 폭력의 광기로 치닫는 문화혁명의 포문을 열었다. 국가주석 류사오치를 주자파(走資派)로 몰아 숙청하는 데 앞장섰고, ‘비림비공운동’으로 저우언라이 총리를 공격했으며, 마오의 후계자로 떠오른 덩샤오핑을 “파시스트, 매국노”라고 비난하며 끝까지 대결했다.
이 책은 비범한 의지력을 지닌 한 정치적 인간의 초상이다. 언제나 자신의 자아가 최고의 가치였고, 타인에게 의지하는 나약함을 증오했으며, 누구도 감히 자신을 심판하도록 두지 않았다. 봉건적 사회, 목숨을 위협한 질병, 자신을 통제하려는 남자들에 맞서 장칭은 평생 투쟁했다. 역사라는 거대한 무대 위에 선 배우로서 장칭은 그 모든 순간에 오로지 자신의 의지라는 외줄을 타고 있었다. 줄의 한쪽 끝에는 명성과 권력이, 다른 쪽에는 치욕과 굴종이 기다리고 있었다.
타고난 여성적 매력과 무대 위에서 갈고 닦은 연기력, 활화산 같은 열정, 힘의 균형을 가늠하고 조정하는 정치적 능력, 적이 완전히 소멸하기 전까지 결코 공격을 멈추지 않는 끈질긴 복수심, 자신에게 주어진 한계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 용기, 정적을 제거하는 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자비함, 망설임 없이 자신을 내보이며 전력 질주하는 대담함이 더해져 중국 공산주의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냉혹한 여성 정치가 ‘장칭’이 탄생했다.
저자 로스 테릴은 수년에 걸친 철저한 자료 조사를 통해 차가운 어둠 속에 봉인된 장칭을 치명적인 매력과 결함을 동시에 지닌 매우 특별한 인격의 소유자로 되살려내는 데 성공했다. 산둥성 시골 마을에서 상하이, 옌안, 베이징으로 이어진 장칭의 파란만장한 삶과 함께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과 문화혁명, 마오의 죽음, 덩샤오핑의 집권에 이르는 20세기 중국사의 결정적 지점들이 한 편의 대하드라마처럼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이 책은 중국공산당 지도부에서 이루어지는 정치적 결정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데 더없이 좋은 지침서가 되어줄 것이다.
- “나는 마오쩌둥의 개였다! 그가 물라면 물었다.” :《장칭》을 통해 ‘죽의 장막’ 뒤 중국 정치를 들여다보다
과거사 속에 봉인되었던 인물이 하나의 상징으로서 새롭게 현실로 소환되는 경우가 간혹 있다. 마오쩌둥의 네 번째 아내이자 ‘4인방’의 핵심이었던 장칭이 바로 그런 경우다. 2012년 여름 “1989년 톈안먼 사건 이후 최대의 정치 사건”이라 불리는 ‘구카이라이 (谷開來) 사건’이 전 세계의 주목을 받으면서 장칭이라는 한동안 잊혔던 이름이 중요하게 거론되기 시작했다.
- 21세기판 ‘장칭 재판’
구카이라이 재판과 장칭 재판은 여러 면에서 닮은꼴로 비교된다. 우선, 장칭과 구카이라이는 모두 권력 실세인 남편의 후광을 업고 부와 권력을 누렸다. 급작스럽고 충격적인 방식으로 몰락했다는 점에서도 같다. 스스로 마오쩌둥의 후계자가 되려 했던 장칭은 마오쩌둥 사후 벌어진 치열한 권력 투쟁에서 패배하면서 곧바로 ‘반혁명분자’ ‘외국의 첩자’라는 오명을 쓴 채 투옥되었고, 유명한 변호사 출신으로서 ‘중국의 재클린 케네디’라는 별칭으로 불리던 구카이라이는 하루아침에 영국인 닐 헤이우드의 살인 용의자로 체포되었다. 2012년 8월에 열린 재판에서 구카이라이는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2012년 11월 현재 2년 집행 유예 상태에서 친청감옥에 수감되어 있다. 친청감옥은 고위층 정치범들이 수용되는 교도소인데 과거 장칭이 수감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향후 구카이라이 역시 장칭처럼 종신형으로 감형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두 사건 재판이 본질적으로 정치 재판이라는 점에서 같다고 말한다. 1980 ~ 1981년에 있었던 일명 ‘4인방 재판’에서 새로운 중국의 지도부가 문화혁명 당시 마오쩌둥의 과오를 덮고 모든 책임을 장칭에게 떠넘기려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 경우에도 사건이 외부로 공개된 초반에는 남편인 보시라이가 저지른 부정부패와 권력 투쟁을 둘러싼 월권 행위 등 정치적 과오를 가능한 한 공개하지 않고 아내 구카이라이의 살인 사건만 부각해 여론의 관심을 돌리려 했다. 전문가들은, 중국공산당이 지도부에 속한 인물이 저지른 잘못을 공개하는 것이 당과 지도부 전체에 정치적 부담이 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20세기 로스 테릴은 《장칭》을 통해, 당 지도부의 사생활은 물론이고 지도자 선출과 당내 권력 투쟁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정치적 과정이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는 중국 정치의 메커니즘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진실 창조자의 역할을 자처하는 공산당의 입장에서 본다면, 당 지도자들의 사생활은 결코 대중들에게 알리기에 적절한 사항이 아니다. 하지만 일단 어떤 지도자가 당의 비판을 받으면 그 사람의 ‘추악한’ 사생활은 생생하게 대중에게 전달된다. 이것은 분명 위선적 행동이긴 하지만 극히 표면적인 작은 문제에 불과하다. 정말로 추악한 일은 중국공산당이 대내외적으로 중국 정치의 기본 작동 과정을 외국 사람에게뿐 아니라 중국 사람에게도 숨기기 위해 치밀하게 계산된 조치를 취한다는 사실이다. – 프롤로그(18~19쪽)
- 중국 정치 체제의 허점을 드러낸 정치 재판 : 장칭, ‘마오쩌둥의 과오’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
1976년 10월 6일, 마오쩌둥 사후 중국의 최고 권력을 놓고 화궈펑 총리 일파와 대결하던 장칭과 장춘차오, 왕훙원, 야오원위안 등 ‘4인방’(또는 ‘상하이 4인조’)이 화궈펑의 명령으로 불시에 체포되었다. 9월 9일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불과 한 달도 안 되어 일어난 일이었다. 4인방에 대한 재판은 1980년 11월 20일에 시작되었다. 베이징 공안국 강당에서 열린 ‘린뱌오ㆍ장칭 반혁명 집단’에 대한 특별 재판은 이듬해 1981년 1월까지 이어졌다. 재판에서 장칭의 죄목은 간단히 말해 “무고한 사람에게 죄를 덮어씌웠고, 남편이 이끄는 정부에서 고위 인사로 행세하면서 이런저런 부당한 영향력을 과시한 죄와 마오쩌둥 이후 중국을 이끌 새로운 실용주의 지도자들을 모욕했다는 것”이었다. 검찰은 장칭이 문화혁명 과정에서 아무런 증거 없이 류사오치 국가주석과 그의 아내 왕광메이를 숙청했으며 그밖에 수많은 지식인, 예술가, 정치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고 주장했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장칭이 1930년대에 상하이에서 배우로 활동하던 시절부터 이미 국민당의 첩자였다는 주장도 내놓았다.
그러나 재판부의 기대와 달리 장칭은 순순히 자신의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장칭은 재판부를 향해 분노를 쏟아내고 호통을 치면서 자신은 마오쩌둥과 당의 노선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 재판은 매우 드물게도 중국 전역에 텔레비전 중계로 방영되었기 때문에 기세등등한 장칭의 모습을 전 인민이 지켜볼 수 있었다. 최후 진술에서 장칭은 “나는 마오쩌둥의 개였다! 그가 물라면 물었다.”라고 고함치듯이 이야기했다. 장칭은 재판 내내 피고가 아니라 재판의 지휘자처럼 행동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로스 테릴은 “장칭이 마오쩌둥의 미망인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일부 진실을 말했기 때문”이었다고 지적한다.
장칭의 재판은 일정 부분 마오쩌둥에 대한 재판이기도 했다. 중국공산당은 마오의 실수를 모두 사인방에게 돌리는 편리한 해결 방법을 택했다. 하지만 장칭은 자신의 행동은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고 말함으로써 그런 해결 방법의 허점을 폭로했다. 당시 마오쩌둥의 판도라 상자가 아직 열리지 않은 상태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이제 장칭의 도전으로 상자가 확실하게 열린 것이었다. 장칭의 발언으로 사인방이 아니라 오인방이 존재했다는 이론이 더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 7장 재판정의 마담 마오(621쪽)
장칭 재판은 당시 중국 정치 지도부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재판이었다. 1978년 명실공히 중국의 최고 지도자가 된 덩샤오핑에게 이 재판은 사적으로는 자신을 비롯해 문화혁명 당시 고초를 겪은 사람들을 위한 복수였고, 공적으로는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데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재판의 주인공은 뜻밖에도 덩샤오핑이나 다른 인물이 아닌 장칭이었다. 장칭은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그것은 평생 오로지 자신의 의지와 가치관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해 온 사람에게 당연한 일이었다.
- 현대 중국 역사의 대재앙이자 금기로 남은 ‘문화혁명’의 선동가, ‘마오 사상으로 무장한 측천무후’가 되려 했던 문제적 인간 장칭!
2010년 11월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지난 세기 세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여성 25인”을 발표했다. 패션 디자이너 코코 샤넬, 미국의 가수 마돈나, 녹색 운동의 선구자 레이철 카슨,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 미 국무부 장관 힐러리 클린턴, 과학자 마리 퀴리, 흑인 인권운동가 로사 파크스 등 정치ㆍ사회ㆍ학문ㆍ예술 각 분야에서 지각 변동을 일으킨 여성들이 선정되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중국 내에서 금기시되는 인물인 ‘장칭’이 중국 여성으로는 유일하게 선정되었다.
이 기사가 실린 인터넷판 <타임>에 장칭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배우 활동과 실패한 결혼, 급진적 정치 활동 혐의로 감옥에 수감된 경력 등 파란만장한 젊은 시절을 보낸 후 1938년에 마오쩌둥의 아내가 되었다. 그녀는 공산당의 권력 사다리를 오르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했으며, 마침내 장춘차오, 야오원위안, 왕훙원 등 ‘4인방’을 이끄는 위치에 섰다. (후략)” 간략한 소개에서도 드러나듯이 장칭의 삶은 부침(浮沈)의 연속이었다.
- 전족을 풀어버린 아이
장칭은 1914년에 중국에서도 낙후된 지역에 속했던 산둥성의 주청에서 태어났다. 당시 중국은 신해혁명(1911년)으로 청 왕조가 무너진 직후였으며, 외세와 군벌, 혁명 세력이 중국의 패권을 두고 격돌하면서 혼란과 분열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있었다.
장칭의 일생은 자신을 옭아매려는 족쇄에서 벗어나기 위한 투쟁의 연속이었다. 족쇄는 태어나면서부터 그녀의 발목에 채워져 있었다. 첩의 딸로 태어난 장칭은 아무도 반기지 않는 아이였다. 장칭은 어려서부터 자기 주장이 강했고, 스스로 전족을 풀어버리기도 했다. 이후로 장칭은 언제나 남자의 조력자로 머물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빛나는 길을 찾으려 한다. 그것은 억압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어머니 때문이기도 했다.
오랜 세월 동안 어머니는 윈허 (장칭의 어린 시절 이름)의 보호자였다. 종종 윈허는 집에 홀로 앉아 쓸쓸히 어머니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혹시 어머니가 나쁜 남자를 만나 무슨 일을 당한 것은 아닌지, 영영 안 돌아오는 것은 아닌지 공포에 사로잡힌 적도 있었다. …… 어머니는 낡은 중국 사회에 희생된 여성이었으며, 윈허가 꿈꾸었던 진정으로 자유로운 인간이 될 수 없었다. 어머니의 고통을 보면서 윈허는 자신만은 반드시 어머니를 속박한 이 세계에서 탈출하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윈허는 무언가 새롭고 전혀 다른 일에 자기 자신을 던져 넣기로 했다. – 1장 집을 나온 ‘노라’(37쪽)
아버지가 휘두른 폭력 때문에 어머니는 5살 난 딸을 데리고 집을 나와 남의집살이로 연명하게 된다. 어린 장칭은 가난하고 불안정한 환경에서 자랐고, 학교도 제대로 다닐 수 없었다. 14살 무렵, 장칭은 외가에서 지내던 중 가출해 극단에서 배우 생활을 경험한다. 그리고 무대 위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한다.
윈허는 새로운 것들을 사랑했고, 환상 속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극단 시절은 윈허에게 그녀가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다른 세계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주었다. 이 세계에는 집이나 학교와는 달리 제약과 구속이 거의 없었다. 새로운 세상에서 윈허는 자기 안에 숨어 있던 충동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었다. 바깥 세상에서 사회 관습의 틀 때문에 힘들어했던 윈허는, 새로운 연극의 세계에서는 한결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었다. – 1장 집을 나온 ‘노라’(39쪽)
- 집을 나온 ‘노라’
장칭은 삶의 쓰라린 좌절을 환상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음을 알았다. 1929년 초, 15살의 장칭은 지난 시에 새로 설립된 ‘산둥실험극원’이라는 예술 학교에 지원해 합격한다. 장칭은 외국어를 배우지 못했고 대학에서 정식 교육을 받은 적도 없다. 하지만 실험극원에서 받은 교육은 흥미진진했다. 여기서 장칭은 음악과 연기를 배웠는데, 특히 헨리크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을 좋아했다고 한다.
실험극원에서는 연극을 사회 변혁을 위한 투쟁에서 긴요한 무기로 여겼다. 훗날 공산당의 반(反)봉건 연극과 맥을 같이한다. 윈허는 중국 전통과 달리 개인 의지를 강조하는 외국 문학을 읽었다. 입센이 쓴 《인형의 집》은 윈허가 삶을 대하는 태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윈허는 《인형의 집》을 읽자마자 노라 역할을 맡고 싶어 했습니다. ‘인형의 집’의 문을 부수고 나가겠다는 의지를 분명하게 밝히는 노라, 윈허는 자신이 바로 노라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동급생의 회고다. – 1장 집을 나온 ‘노라’(44쪽)
그러나 정치적 이유로 학교가 불과 1년여 만에 문을 닫자, 장칭은 달리 할 일이 없었다. 몇 달간 베이징에 가서 배우가 될 길을 찾아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때 장칭은 “자신이 정식 중등 교육을 받지 못했고 좋은 집안 출신이 아니라는 사실이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고 오로지 자신의 재능과 개성과 노력으로 자기 손 안에 움켜쥔 것만이 자신의 소유물임을 깨달았다.”
당장 기댈 만한 가족도 직업도 없었던 장칭은 16살에 부유한 상인의 아들과 결혼한다. 그러나 장칭은 전통적인 현모양처를 원하는 남편의 요구에 따를 수 없었고, 결국 결혼은 몇 달 만에 막을 내린다. 17살에 혼자가 된 장칭은 1931년에 예술 학교 시절의 은사 자오타이머우 교수를 찾아 홀로 칭다오로 향한다.
장칭은 칭다오에서 커다란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젊은 공산주의자 위치웨이를 만나 공산주의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칭다오대학 도서관에서 일하면서 청강생으로 수업을 듣던 장칭은 위치웨이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칭다오대학에 재학 중이던 위치웨이는 유서 깊은 명문가 출신이면서 급진적인 혁명 활동에 투신한, 열정과 재능을 겸비한 젊은이였다. “위치웨이는 윈허를 매혹시켰고 새롭게 등장한 공산주의 운동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바라보게 해주었다.” 1933년 2월, 장칭은 중국공산당에 입당한다.
윈허 (장칭)가 중국의 낡은 사회 질서를 증오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공산주의로 기울 수 있는 자연스러운 조건이기는 해도 충분한 조건은 아니었다. 위치웨이가 아니었다면 윈허는 이렇게 창고 건물에 숨어들어 중국 혁명의 대의에 동참하겠다는 서약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중요한 문턱을 넘는 순간에도 윈허의 가슴은 여전히 무대에서 찾을 수 있는 자유와 환상의 세계를 향해 있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는 예술을 한다는 것이 곧 좌익 활동을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열혈 청년이 굳이 무대의 자기 표현과 공산당의 자기 희생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필요는 없었다. – 1장 집을 나온 ‘노라’(60~61쪽)
그러나 행복한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위치웨이가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뒤 베이징으로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혼자가 된 장칭은 다시 한 번 과거를 버리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 떠난다. 그 새로운 세계는 상하이였다. 당시 상하이는 서양 세력이 중국에 진출하는 발판이자 중국 기업가들이 몰려드는 돈의 도시였으며, 연극을 비롯한 무대 예술이 활발하게 펼쳐지고, 영화 산업이 우후죽순처럼 이제 막 태어나 성장하던 곳이었다. 19살의 아마추어 공산주의자이자 배우 지망생인 장칭에게 상하이는 자신의 운명을 시험해볼 새로운 무대였다.
- 상하이의 스타
1933년, 상하이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 장칭은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이후 1934년까지 장칭은 생계를 위해 야학 교사로 일하면서 무명 배우로서 좌익 연극 단체에서 항일 의지를 선전하는 연극에 출연하곤 했다. 그러던 중 1934년 10월에는 좌익 활동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어 몇 달간 감옥에 수감되기도 한다.
감옥에서 석방된 뒤 배우로서 성공하려는 강한 의지와 끈질긴 노력 덕에 마침내 장칭은 기회를 잡는다. 1935년 6월, 예술학교 시절부터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었던 <인형의 집>의 주인공 ‘노라’ 역할을 맡아 성공을 거두면서 영화계에까지 진출하게 된 것이다. 한편, 이 시기에 상하이의 저명한 예술 평론가이자 기자인 탕나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했으나 불화를 겪은 후 장칭 스스로 관계를 정리하기도 했다. 장칭은 자신만큼이나 의지가 강한 남자를 원했지만 탕나는 그런 이상형과 거리가 먼 섬세한 예술가였다.
란핑 (장칭의 배우 시절 이름)은 탕나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강한 인물이었다. 상하이 극장 무대는 란핑이 야망을 펼치기에는 너무 좁았다. 다음 남편은 아주 강하고 힘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다음 무대는 란핑이 이제까지 서보지 못한 엄청나게 넓은 무대여야 했다. 란핑은 몇 시간 동안 수백 명의 관객을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실제로 통제하는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란핑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절대로 잊지 마세요. 아름다움은 권력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 2장 상하이의 스타(174~175쪽)
변화무쌍한 영화계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장칭의 정신 세계는 활짝 꽃피었다. 하지만 장칭은 여배우로서 심각한 모순을 경험해야 했다. 당시 상하이에서 여배우는 관객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사회적으로는 ‘창녀’나 ‘부랑자’와 같은 낮은 지위였다. 또 배우는 감독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인형’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장칭은 누구도 자신을 ‘통제’하거나 ‘소유’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1937년에 장칭은 <우리의 삶>이라는 글을 써 강한 의지력의 가치, 여배우의 창조성, 정신과 영혼의 독립성을 강조했다. 이 글에 나타나는 장칭의 전투적인 자세와 배우로서 지닌 강한 자의식은 훗날 정치의 영역으로 고스란히 옮겨졌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1960년대의 문화혁명이라는 일종의 ‘무대 연출’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장칭은 <우리의 삶>에서 제시한 원칙들을 문화혁명에서 실천에 옮겼다. 마오쩌둥이 대본 작가이자 연출자였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 배우의 권리와 자존심을 옹호해 온 사람으로서 장칭은, 이 한 편의 정치 드라마에 출연하는 자신과 다른 등장인물들이 단순히 감독의 고함소리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매일매일 새롭게 펼쳐지는 이 ‘새로운 정치’를 감독과 함께 창조하는 역할을 맡도록 힘썼다. 결국 이 ‘새로운 정치’는 마오쩌둥의 창조물일 뿐 아니라 그들의, 즉 장칭을 비롯한 다른 등장인물들의 창조물이기도 했다. – 2장 상하이의 스타(171쪽)
1937년 여름, 상하이가 일본의 침공으로 위기에 빠지자 상하이 예술가들은 서둘러 탈출한다. 다른 배우들은 당시 국민당 정부가 있었던 난징으로 갔으나, 장칭은 홀로 옌안 행을 택한다. 당시 옌안은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있는 지역이었다. 마오쩌둥이 대장정을 마치고 옌안에 근거지를 마련한 후 중국 전역에서 혁명적 사상을 지닌 젊은이들이 옌안으로 모여들었는데, 장칭 역시 그런 젊은이들 중 한 명이었다.
- 마오쩌둥과 결혼하다
1937년 여름, 옌안에 도착한 장칭은 완전히 낯선 세계에서 자신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전 남편인 위치웨이와 고향 사람이면서 공산당에서 높은 위치에 있던 캉성 등의 도움으로 장칭은 당원 자격을 다시 인정받고 당 학교에도 입학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기댈 수 있는 가장 큰 산을 만나게 된다. 바로 중국혁명의 최고 지도자 마오쩌둥이었다. 농민의 아들인 마오쩌둥은 상하이라는 밝은 빛의 세계에서 갓 도착한 이 여인과 사랑에 빠졌고, 두 사람은 1939년에 정식으로 결혼한다.
그러나 결혼이 이루어지기까지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마오쩌둥은 장칭과 결혼하려면 당시 별거 중이던 허쯔전과 이혼해야 했는데, 공산당 지도부는 마오쩌둥의 이혼과 재혼을 극구 반대했다. 간신히 결혼을 허가받았을 때, 공산당 지도부는 장칭에게 굴욕적인 조건을 내걸었다.
드디어 란핑(장칭)은 마오쩌둥의 정식 부인이 되었으며 마오는 사생활에서 오는 부담을 벗어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치러야 할 대가가 있었다. 당은 란핑에게 두 가지 조건을 요구했다. 첫째 란핑은 앞으로 자신의 모든 힘을 마오를 보살피는 데 쏟아야 하며, 둘째 향후 30년간 어떤 정치 활동도 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었다. 이런 조건이라면 어쩌면 란핑은 아직 공산당 최고 지도자의 정식 부인이 되지 못한 것이 아닐까? 당은 란핑이 당 조직 활동으로 경력을 쌓은 여전사가 아니기 때문에 정치적 역할을 승인하지 않았던 것이다. – 3장 마오쩌둥의 연인(233쪽)
마오쩌둥의 네 번째 아내가 되면서 장칭은 자유분방했던 과거의 삶과 결별해야 했고, 언제나 자기 자신을 세계 속에서 당당하게 표현하겠다는 포부를 내려놓아야 했다. 게다가 중국의 전통적인 가부장에 가까웠던 마오쩌둥은 장칭을 동지가 아니라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여인이자 단순한 조력자로 대했다. 1939년에 장칭은 가정주부의 역할을 받아들였고, 이후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을 거치는 동안에는 인민해방군 정치 보조원을 비롯해 마오의 비서 역할을 하면서 조용히 자신의 시대가 오기를 기다렸다.
1949년, 마침내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이 국민당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두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한다. 그러나 마오의 승리는 곧 장칭의 쇠락으로 이어졌다. 부부 관계가 멀어졌고, 문화 예술계와 관련된 직책을 맡고 싶어 했으나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장칭은 1950년대 초에 영화지도위원회와 중소우호협회 소속으로 일을 했고 당 중앙위원회 판공청 비서국장에 임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직책도 오래 맡을 수 없었다. 때로는 관료들이, 때로는 마오가 장칭을 사적인 역할에 묶어 두려고 했다. 장칭이 보기에 자신은 마오쩌둥의 ‘비서’였다. 마오의 눈에는 그저 ‘마오의 여자’일 뿐이었다. 한동안 장칭은 허공에 붕 뜬 사람이었다. 건강도 악화되었다. 1950년대에 장칭은 질병 치료를 위해 네 차례에 걸쳐 소련에 머물게 되는데, 장칭의 소련 체류는 자기 의지라기보다 정치적인 이유와 건강상의 이유가 결합된 강요된 요양이었다.
1957년 봄, 자궁경부암을 치료하기 위한 네 번째 소련 체류를 마치고 베이징으로 돌아왔을 때, 장칭은 죽음이 가깝다고 느꼈다. 몸보다 정신이 더 쇠약한 상태였다. 마오쩌둥은 장칭을 쳐다보는 것 같지도 않았다. 아무 직업도, 할 일도 없는 장칭은 중국혁명에서 낙오한 사람이었다. 장칭은 이제 삶의 목적을 잃고 완전히 끝난 여인처럼 보였다. 하지만 1960년대에 들어설 무렵, 장칭은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자신에게 숭고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 믿음이 실현될 조짐이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1950년대 말에 이르러 마오가 정치적 난관에 빠진 것이다.
- 문화혁명과 장칭
마오쩌둥은 대약진 운동이 실패로 끝난 뒤 류사오치, 덩샤오핑처럼 정치 ‘질서’와 경제를 중시하는 관료들과 권력을 나누어야 했는데, 이 상황이 위기의식을 불러왔다. 마오가 보기에 그것은 자신의 위기이자 중국 사회주의의 위기였다. 곤경에 빠진 마오는 장칭을 동지로 선택했으며, 장칭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1960년대 초반에는 일종의 세력 균형이 이루어졌다. 마오쩌둥은 장칭 등 새롭게 등장한 인물들을 모아 최측근 그룹을 만들었고 극좌 사상을 발전시켰다. 계급 투쟁이 점점 더 치열해지고 있고, 예술에 이념 성향이 풍부해지도록 개혁해야 하며, 공산주의 정치 체제가 들어선 것으로 모든 목적을 달성했다고 보는 관료주의에 반대한다는 마오의 사상은 결국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으로 대표되는 기존 국가 관료 세력에 도전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 장칭은 마오의 사상에 크게 고무되었다. 이 사상은 전통 파괴적인, 즉 기존 예술 관념을 적대시하는 경향을 품고 있었으며 이는 장칭에게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 5장 문화혁명의 주역 (379~380쪽)
1965년 11월 문화혁명의 불을 놓은 사건이 일어난다. 희곡 <해서파관>을 비판하는 글이 상하이의 신문 <문회보>에 실린 것이다. <해서파관>은 1961년 베이징 부시장인 우한이 쓴 희곡인데, 명나라 시대 훌륭한 관헌 해서가 너무 비판적이어서 황제에게 파면당했다는 줄거리였다. 마오쩌둥과 장칭은 이 연극이 정치적 쟁점을 다루고 있다고 보았다. 마오가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국방부장 펑더화이를 해임한 일을 은유적으로 비판했다는 의심이었다.
마오쩌둥과 장칭은 문화적, 정치적, 외교적 쟁점들을 합쳐서 거대한 쟁점으로 만들려 했다. 그리하여 누구라도 어떤 연극의 장점이나 대외 정책에 이견을 제시하면, 심지어 금지된 책을 도서관에서 대출하려고 하기만 해도, 곧바로 ‘계급의 적’ 딱지가 붙기 시작했다. 장칭은 이렇게 문화혁명의 불을 놓았으며, 문화혁명의 선봉대가 된 어린 홍위병들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을 독려하는 연설을 하면서 혁명의 불길이 더 크게 타오르도록 동력을 제공했다.
문화혁명은 정치적으로 어려움에 빠진 마오가 장칭을 공동 작업자로 의지하기 시작하며 전에 없을 정도로 강하게 아내에게 정신적 영향을 받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문화혁명의 내용 역시 장칭이 특별하게 관심을 보였던 분야에 영향을 받았다. 장칭은 중국의 문제를 풀 열쇠로 사상과 예술을 지목했던 것이다. …… 문화혁명을 통해 마오쩌둥은 정치인에서 신적 존재로 격상되었다. 개인 숭배 관념이 생겨난 데에도 장칭의 역할이 컸다. 장칭은 마오가 높은 존재가 될수록 자신에게 더 많은 영광이 돌아오리라고 생각했다. 공산당 자체를 비난하고 깎아내리는 일도 문화혁명의 주제였는데, 이 역시 옌안 시절의 결혼 약정 조건에 복수하려는 장칭의 강한 욕구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 5장 문화혁명의 주역(463쪽)
1960년대가 저물면서 장칭은 중국의 최고 지도자 가운데 하나라는 공식적 권력을 쥐게 되었다. 중국 전체에서 확연하게 눈에 띄는 높은 위치였다. 1969년 4월 제9차 중국공산당대회에서 공산당 정치국 사상 최초로 장칭이 정치국원으로 선출된 것이다. 이로써 장칭은 중국의 최고 통치 집단에 들어갔다.
- 무너진 여제의 꿈
1970년대 들어 마오쩌둥이 쇠약해지면서 장칭은 자신이 남편의 후계자가 되고자 했다. “마오쩌둥의 죽음을 앞두고 장칭은 자신이 여제(女帝)의 길을 가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1,300년 전 측천무후가 여인의 몸으로 중국을 잘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았던가? 명민하고 종종 말을 돌려서 하는 데다 고압적인 인물인 마오쩌둥 곁에서 38년이란 긴 세월 동안 견습 기간을 거치지 않았던가?”
후계 구도가 확실히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당 지도부 내에서 치열한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장칭을 비롯한 4인방은 “장칭을 당 주석으로, 장춘차오를 국무원 총리로, 왕훙원을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의장으로 임명”할 것을 당 정치국에 제안했다. 4인방은 상하이 민병대를 비롯해 군 세력을 은밀히 모았고, 화궈펑과 예젠잉 등 상대 진영도 마찬가지였다. 승리는 더 빨리 움직인 화궈펑 측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체포되는 그 순간부터 장칭은 ‘마오쩌둥 사상의 후계자’가 아니라 ‘창녀’ ‘사악한 여자’ ‘요괴’로 불리기 시작했다.
장칭을 조롱하는 만화가 신문에 갑자기 실리기 시작했다. 장칭 이름은 이제 보통 붓으로 쓰이지 않았고 뼈로 그려졌다. 예순두 살의 미망인은 이제 마녀처럼 그려졌다. 혀는 불쑥 튀어나오고 왼손에는 진리를, 오른손에는 거짓을 붙잡고 있었다. 장칭은 거울 앞에서 뒤에 꼬리가 달리고 입술을 음탕하게 내밀고 공연을 앞두고 서양식 무대의상을 뽐내면서 서 있는 모습이었다. 내일이면 여자 황제가 될 사람이라고 칭송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장칭을 쥐새끼로 묘사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베이징 거리를 행진하며 이렇게 소리치면서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장칭의 몸에 1만 개의 칼을 꽂아라!” 이 사람들은 그 여자를 38년 동안 아내로 삼아 같이 살았던 남자의 사진을 높이 들고 그에게는 맹목적 충성의 구호를 외쳤다. 장칭에게는 《서유기》에서 삼장법사를 현혹했던 요괴인 ‘백골정(白骨精)’이란 별명이 붙었다. – 6장 여제의 꿈(589쪽)
1980년 11월에 시작된 일명 ‘4인방 재판’에서 장칭은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1983년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 그리고 1991년 5월 14일 77살의 나이에 스스로 목을 매 자살하기까지 줄곧 교도소와 병원을 오가는 감금 상태에 있었다.
감옥에 갇혀 노년을 보내게 된 장칭은 마오쩌둥을 자주 그리워했다고 한다. “장칭은 베개 옆에 마오의 글을 두었으며 재킷과 셔츠에도 마오 배지를 달았다. 1991년이면 중국에서도 마오 배지는 골동품 취급을 받았다. 침대 옆 탁자에는 중난하이에서 마오와 함께 아침 산책을 하는 사진을 올려놓았다. 아침마다 장칭은 첫 일과로 마오의 시를 읽거나 《마오쩌둥 선집》을 읽었다.” 자살하기 며칠 전 장칭은 이러한 글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마오 주석, 당신의 제자이자 전우였던 제가 이제 당신을 만나러 갑니다.”
○ 《장칭》에 쏟아진 찬사
한번 읽기 시작하면 결코 쉽게 내려놓을 수 없다. 단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도록 몰입시키는 책. – Professor Eric Widmer, Brown University
장칭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만이 아니라, 마오쩌둥을 숭배하는 사람들도 빠짐없이 읽어야 하는 책이다. – Professor Michel Oksenberg, University Of Michigan
압도적이고 환상적이다! 이 책으로 마침내 장칭이 비범한 인물이었음이 드러난다. – New York Times
로스 테릴은, 치명적인 결함과 매력을 동시에 지닌 장칭을 다룬 모든 책들을 통틀어 가장 완벽한 전기를 탄생시켰다. – Philadelphia Inquirer
독자의 마음을 완벽하게 사로잡는 책 ! 탄탄한 조사와 최고 수준의 저널리즘이 만났다. – Melbourne Sun
도저히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흥미로운 사실들을 보여주는 책. …… 어떤 점에선 잔다르크 같고, 엘리너 루스벨트와 닮았으며, 에바 페론을 떠올리게 만드는 아주 특별한 인물에 관한 스케치. – Boston Herald
장칭의 놀라운 삶을 가장 포괄적으로 설명한 책이다. …… 장칭의 활화산 같은 성격과 굽힘 없는 용기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 Newsweek
사람을 완전히 빠져들게 만드는 전기. …… 마오쩌둥이 통치하는 동안 중국을 움직인 정치 메커니즘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읽어야 한다. – The Financial Times
권위 있는 중국학자 로스 테릴이 쓴 이 열정적인 전기는, 풍부한 문서 자료와 장칭의 옛 지인들을 직접 만나 나눈 인터뷰를 통해 탄생했다. 이 책에서 테릴은 포기를 모르는 장칭의 특별한 인격을 눈에 보이듯 선명하게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 – Booksellers.
이 책은 혁명을 다룬 딱딱하고 재미없는 대하소설이 아니다. 로스 테릴은 혁명기 중국과 마오쩌둥이 이끄는 새로운 정권에서 벌어진 음모와 책략에 관한 비밀스럽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 아마도 장칭을 좋아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녀를 움직인 강한 동력을 설명함으로써 장칭을 진정으로 매력적인 인물로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 – Sunday Press, Melbourne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