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전체성과 무한 : 외재성에 대한 에세이
에마뉘엘 레비나스, 엠마누엘 레비나스 / 그린비 / 2018.11.30
레비나스의 주저임에도 번역되지 않아 독자들의 갈증이 컸던 ‘전체성과 무한’이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는 레비나스 철학의 중심 개념들, 이를테면 타자, 전체성, 무한, 초월, 책임, 향유, 맞아들임, 얼굴, 근접성 등이 망라되어 등장하며 또 체계적으로 엮여서 다루어진다.
‘전체성과 무한’ 이전의 저술들에서는 여기에서야 비로소 뚜렷한 모습을 드러내는 레비나스 철학의 본격적인 특징을 만나기 어렵고, 이후에 레비나스가 내놓은 책들은 여러 기회에 쓴 글들을 모아 놓은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전체성과 무한’ 만큼 자체의 완성도를 지니고 있다고 말하기 힘들다. 레비나스 사상의 독특함뿐만 아니라 그 얼개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이 책 ‘전체성과 무한’을 반드시 살펴야 하는 이유다.
○ 목차
서문
1부 동일자와 타자
A. 형이상학과 초월 / B. 분리와 대화 / C. 진리와 정의 / D. 분리와 절대
2부 내면성과 경제
A. 삶으로서의 분리 / B. 향유와 재현 / C. 나와 의존 / D. 거주 / E. 현상들의 세계와 표현
3부 얼굴과 외재성
A. 얼굴과 감성 / B. 얼굴과 윤리 / C. 윤리적 관계와 시간
4부 얼굴 너머
A. 사랑의 애매성 / B. 에로스의 현상학 / C. 번식성 / D. 에로스 속의 주체성 / E. 초월과 번식성 / F. 자식성과 형제애 / G. 시간의 무한
결론
독일어판 서문 |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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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소개 : 에마뉘엘 레비나스, 엠마누엘 레비나스 (Emmanuel Levinas, 1906 ~ 1995)
에마뉘엘 레비나스 (Emmanuel Levinas)는 리투아니아에서 유태인 부모 아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3년 프랑스로 유학해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수학했고, 1928~1929년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후설과 하이데거로부터 현상학을 배운 뒤, 1930년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후설 현상학에서의 직관 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39년 프랑스 군인으로 2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어 종전과 함께 풀려났다. 1945년부터 파리의 유대인 학교(ENIO) 교장으로 오랫동안 일했다. 이 무렵의 저작으로는 『시간과 타자』(1947), 『존재에서 존재자로』(1947), 『후설과 하이데거와 함께 존재를 찾아서』(1949) 등이 있다.
1961년 첫번째 주저라 할 수 있는 『전체성과 무한』을 펴낸 이후 레비나스는 독자성을 지닌 철학자로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1974년에는 그의 두 번째 주저 격인 『존재와 달리 또는 존재성을 넘어』가 출판되었다. 그 밖의 중요한 저작들로는 『어려운 자유』(1963), 『관념에게 오는 신에 대해』(1982), 『주체 바깥』(1987), 『우리 사이』(1991) 등이 있다. 레비나스는 기존의 서양 철학을 자기중심적 지배를 확장하려 한 존재론이라고 비판하고 타자에 대한 책임을 우선시하는 윤리학을 제1철학으로 내세운다. 그는 1964년 푸아티에 대학에서 강의하기 시작하여 1967년 낭테르 대학 교수를 거쳐 1973년에서 1976년까지 소르본 대학 교수를 지냈다. 교수직을 은퇴한 후에도 강연과 집필 활동을 계속하다가 1995년 성탄절에 눈을 감는다.
– 역자 : 김도형
부산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부산대, 부경대, 인제대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레비나스의 정의론 연구: 정의의 아포리, 코나투스를 넘어 타인의 선으로」, 「레비나스의 인권론 연구: 타인의 권리 그리고 타인의 인간주의에 관하여」, 「레비나스와 페미니즘 간의 대화(1): 레비나스에서 여성의 문제」 등이 있다. 지은 책으로 『레비나스와 정치적인 것: 타자 윤리의 정치철학적 함의』(2018), 옮긴 책으로는 레비나스의 『신, 죽음, 그리고 시간』(2013), 『전체성과 무한』(2018)이 있다.
– 역자 : 문성원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기대, 서울대, 서울시립대, 서울산업대 등에서 강의했으며, 2000년부터 부산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철학의 시추: 루이 알튀세르의 마르크스주의 철학』(1999), 『배제의 배제와 환대: 현대와 탈현대의 사회철학』(2000), 『해체와 윤리: 변화와 책임의 사회철학』(2012), 『철학자 구보 씨의 세상 생각』(2013), 『타자와 욕망』(2017), 『철학의 슬픔』(2019)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지그문트 바우만의 『자유』(2002), 자크 데리다의 『아듀 레비나스』(2016), 공역한 책으로는 『국가와 혁명』(1995), 『철학대사전』(1997),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의 역사』(2000), 『신, 죽음, 그리고 시간』(2013), 『전체성과 무한』(2018) 등이 있다.
– 역자 : 손영창
부산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레비나스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부산대, 인제대, 경남대 등에서 강의했고, 현재 한국기술교육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저서로 『프랑스철학의 위대한 시절』(공저), 『레비나스철학의 맥락들』(공저) 등이 있고, 번역서로 『전체성과 무한』, 『신?죽음?시간』 등이 있다.
○ 책 속으로
– 서문
우리는 도덕에 속기 쉽지 않을까? 그 여부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데는 누구나 쉽게 동의할 것이다.
밝음은, 곧 참인 것에 대한 정신의 열림은 전쟁의 영속적 가능성을 간취하는 데 있지 않을까? 전쟁 상태는 도덕을 중지시킨다.
전쟁상태는 영구적 제도와 의무에서 그 영원성을 벗겨 내고, 그렇게 하여 임시적인 것을 통해 무조건적 명령을 파기해 버린다.
전쟁 상태는 우선 인간들의 행위에 그 그림자를 던진다. 전쟁은 도덕이 겪는 시련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자리 잡는 데 그치지 않는다.
전쟁은 도덕을 가소로운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전쟁을 예측하고 모든 수단을 다해 승리하는 기술인 정치는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가 이성의 실행인 것처럼 행세한다. 철학이 어리석음에 맞서, 정치는 도덕에 맞선다.
철학적 사유의 눈에 존재가 전쟁으로 드러난다는 점을 입증하려고, 전쟁은 가장 공공연한 사실일 뿐만 아니라 실재의 공공연함 자체로 – 즉 진리로 – 존재에 관계한다는 점을 입증하려고 굳이 헤라클레이토스의 애매한 단편들을 끌어들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 서문
전쟁 속에서 현실은 자신을 가리는 온갖 말들과 이미지들을 찢어 버리고 적나라하고 모습을 드러낸다. 냉혹한 현실 (이것은 같은 말의 되풀이처럼 들린다!), 사물들의 냉혹한 교훈, 전쟁은 환상의 장막을 태워 버리는 전쟁의 번개가 치는 그 순간에 순수 존재의 순수 경험으로 나타난다.
이 어두운 명료함 가운데 뚜렷이 드러나는 존재론적 사건은 그때까지 자신의 정체성에 닻을 내리고 있던 존재들을 요동케 한다. 그것은 우리가 모면할 수 없는 객관적 질서에 의해 절대적인 것들이 움직이는 사태다.
힘의 시련은 실재의 시련이다. 그러나 폭력은 피 흘리게 하거나 죽이는 데서 생겨나기보다, 인격체들의 연속성을 중단시키는 데서 생겨난다. 인격체들이 더 이상 자신을 찾을 수 없는 역할을 하게 하는 데서, 그들로 하여금 약속뿐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실체를 배반하게 하는 데서, 모든 행위 가능성을 파괴해 버릴 행위들을 수행하게 하는 데서 생겨난다.
현대의 전쟁이 보여 주듯, 모든 전쟁은 이미,
그 무기를 쥔 사람에게 적대적으로 되돌아오는 무기를 사용하고 있다. 전쟁은 누구도 거리를 둘 수 없는 질서를 만들어 낸다. 이제는 아무것도 외부에 있지 않다. 전쟁은 외재성을 보여 주지 않으며, 타자로서의 타자를 보여 주지 않는다. 전쟁은 ‘동일자‘ (Merne)의 정체성을 파괴한다.
전쟁에서 보이는 존재의 면모는 서양 철학을 지배하는 전체성 개념 속에 자리 잡는다. 여기서 개인들은 자신들이 모르는 사이에 그들에게 명령하는 힘들의 담지자로 환원된다. 개인들은 이 전체성으로부터 (이러한 전체성의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자신들의 의미를 빌려 온다. – 8쪽
현존하는 각각의 단일성은, 그것에서 객관적 의미를 끌어내도록 요청받은 미래에 끊임없이 자신을 바친다. 궁극적 의미만이 중요하고 마지막 행위만이 존재들을 그들 자신으로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이 존재들은 서사의 이미 조형된 형태들 속에서 등장하게 될 그 어떤 것에 해당한다.
도덕적 의식은 평화의 확실함이 전쟁의 명백함을 제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정치적 인간의 비웃는 시선을 견딜 수 없다. – 9쪽
A. 형이상학과 초월
1. 볼 수 없는 것을 향한 욕망
˝참된 삶은 부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 속에 있다. 형이상학은 이런 알리바이에서 출현하고, 이러한 알리바이 속에서 자신을 유지한다.
형이상학은 ‘다른 데‘로, ‘다르게‘로, ‘다른 것‘으로 향한다. 사유의 역사 속에서 형이상학이 취했던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볼 때, 형이상학은 우리에게 친숙한 세계 — 세계를 경계 짓거나 세계가 숨기고 있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땅들이 무엇이건 간에 로부터 출발하여,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자기 집‘chez. soi 으로부터 출발하여 낯선 자기-의-바깥hors de-soi 으로 나아가는, 저-la-bas 으로 나아가는 운동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운동의 도달점인 다른 데 있는 것 또는 다른 것은 탁월한 의미에서 타자라 불린다. 어떠한 여행도, 어떠한 기후의 변화와 환경의 변화도 타자로 향하는 욕망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1) 랭보의 시 ‘지옥에서 보낸 한 철’ (Une saison en enfer)의 한 구절 – 26쪽
형이상학적 욕망의 대상인 타자는 내가 먹는 빵, 내가 거주하는 땅, 내가 주시하는 풍것과 같은 타자‘가 아니며, 때로 -나 자신에 대한 나-자신과 같은 ‘타자‘ 이 ‘나‘, 이 ‘타자‘와 같은 ‘타자‘가 아니다.
나는 이러한 현실의 것들로 나를 먹일 수 있으며,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것들이 내게 단순히 결핍되어 있던 것인 양, 그것들로 나를 만족시킬 수 있다. 그럼으로써 그것들의 ‘타자성‘은 생각하는 나 또는 소유하는 나의 동일성으로 다시 흡수된다.
반면에 형이상학적 욕망은 전적으로 다른 것, 절대적으로다른 것으로 향한다. 하지만 욕망에 대한 관습적 분석은 이 욕망의 독특한 요구를 잘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해된 욕망의 기초로는 욕구를 들 수 있을 텐데, 그러한 욕망은 가난하고 불완전한 존재 또는 자신의 지난 영광에서 실추한 존재를 나타낼 것이다. 그 욕망은 잃어버린 것에 대한 의식과 일치할 것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향수고, 복귀를 갈망하는 병인 셈이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그와 같은 욕망은 진실로 타자인 것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 27쪽
○ 출판사 서평
– 동일자의 전체성을 넘어 타자의 무한에 응답하라!
타자의 철학자 레비나스, 그의 사상의 정수가 담긴 현대철학의 고전
1995년 12월 27일, 레비나스의 장례식장에서 자크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그 독해에 수 세기가 걸리리라고 자신 있게 예측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이미 프랑스와 유럽의 경계를 넘어, 여러 언어로 된 다양한 저작들, 많은 번역서와 강의와 세미나와 학회 등등을 통해, 이 사유의 반향이 우리 시대의 철학적 반성의 흐름을, 그리고 철학에 대한 반성의 흐름을 바꾸리라는 무수한 조짐을 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철학을 윤리로, 윤리에 대한 다른 사유로 방향 짓는 것에 관한 숙고입니다. 책임, 정의, 국가 등등에 대한 다른 사유, 그리고 타자에 대한 다른 사유. 이것은 새로운 것들의 새로움보다 더 새롭다고 할 수 있는데요, 타인의 얼굴의 절대적 선행성을 향하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자크 데리다, 『아듀 레비나스』, 문성원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6, 16~17쪽)
여기서 데리다가 이야기하는 대상이 바로 레비나스의 주저 『전체성과 무한』이다.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그 중요성에 주목하고 최초로 본격적인 논평을 했던 데리다가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후에 이 책을 다시 읽고 배워야 할 필요가 있음을 이렇게 역설했던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다수의 타자와 그 어느 때보다 빈번한 접촉이 이루어지는 오늘날, “철학을 윤리로, 윤리에 대한 다른 사유로 방향 짓는” 레비나스의 철학은 더욱 가치를 조명받으며 관심을 끌고 있다. 한국에서도 그동안 레비나스의 초기작 몇 권과 강의록, 인터뷰 소책자 등이 번역되었으나, 레비나스의 이름을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전체성과 무한』은 정작 번역되지 않아 그의 사상에 다가가고픈 독자들의 갈증이 컸다. 바로 그 책이 2018년 겨울, 그린비출판사 <레비나스 선집>의 세 번째 권으로 출간되어 늦게나마 독자들의 부름에 응답하게 된 것이다.
이 책 『전체성과 무한』에서는 레비나스 철학의 중심 개념들, 이를테면 타자, 전체성, 무한, 초월, 책임, 향유, 맞아들임, 얼굴, 근접성 등이 망라되어 등장하며 또 체계적으로 엮여서 다루어진다. 『전체성과 무한』 이전의 저술들에서는 여기에서야 비로소 뚜렷한 모습을 드러내는 레비나스 철학의 본격적인 특징을 만나기 어렵고, 이후에 레비나스가 내놓은 책들은 여러 기회에 쓴 글들을 모아 놓은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전체성과 무한』만큼 자체의 완성도를 지니고 있다고 말하기 힘들다. 레비나스 사상의 독특함뿐만 아니라 그 얼개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이 책 『전체성과 무한』을 반드시 살펴야 하는 이유다.
– 윤리가 존재론에 앞선다
『전체성과 무한』에서 레비나스는 우리의 삶이 타자와 관계하는 데서 비롯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를 주체로 자리 잡게 하는 것은 바로 타자와의 관계다. 나의 삶은 독자적으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나 아닌 타자에 응답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진다. 이렇게 응답(response)해야 함이 바로 우리의 책임(responsibility)을 이루며, 윤리란 타자와 맺는 이 책임의 관계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처럼 타자와의 관계를 책임으로 놓는다는 것은 타자를 지배나 이용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음을 함축한다. 레비나스에게서 타자는 내게 익숙한 규정으로 파악될 수 없는 ‘다른’ 자이고 한정되지 않는 자이며, 그래서 무한한 자이다. 『전체성과 무한』이 내세우는 ‘무한’은 바로 이 타자의 무한이다.
반면에, 『전체성과 무한』이 문제 삼는 ‘전체성’은 나와 세계를 한정된 틀과 동일한 규정 안에 가두려는 데서 성립한다. 다름과 타자를 배제하고 같음을 통한 동일자의 자기중심적 지배를 확보하는 것이 이 전체성의 목표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존재론 중심의 서양 철학은 줄곧 이런 시도를 해왔다. 그것이 어떤 형태를 취하든, 이를테면 니체처럼 고정된 상태를 깨뜨리는 ‘힘을 향한 의지’를 앞세우든, 하이데거처럼 존재자들의 규정에 앞서는 ‘존재’를 앞세우든, 타자에 대한 책임이 아닌 존재론에서 출발하는 철학은 결국 지배를 지향하는 폭력적인 것이 되고 만다.
『전체성과 무한』은 이러한 대비를 통해 철학의, 또 문명의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촉구한다. 우리는 자기중심적 전체성을 깨뜨리고 타자의 무한을 받아들여야 한다.
– 정의가 자유에 앞선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는 무한하지만 위력적이지 않다. 힘이나 위세는 자기를 확장하려는 동일자가 추구하는 것일 따름이다. 강하다든가 풍요롭다든가 하는 견지에서 보면 그런 규정을 넘어서 있는 타자는 오히려 약하고 헐벗은 자다. 타자에 대한 책임 속에서 우리는 이 약하고 헐벗은 타자의 호소에 응답하지 않을 수 없다. 타자의 호소를 외면하지 않고 타자의 얼굴에 다가가는 것, 『전체성과 무한』에서 레비나스는 이것을 정의(正義)라고 부른다.
여기에 비해 자유는 나로부터, 동일성의 질서로부터 출발한다. 물론, 참된 자유는 서로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것이므로 자유라는 가치에는 이미 타인에 대한 고려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레비나스의 눈으로 보면, 그런 자유도 동등한 권리라는 집단적 동일성의 틀에 갇혀 있다. 자유주의적 자유가 결국 자기중심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다. 이 같은 한계는 상호적 권리나 조건을 구실로 일정한 경계 너머의 호소를 외면하는 자유주의 세계의 냉혹함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전체성과 무한』은 우리 삶에서 과연 자유가 타자에 대한 책임보다 근본적인 가치인가를 묻는다. 공정한 거래나 계산에 앞서 약자를 돕는 것이, 그러한 의미의 정의가 더 소중하지 않은가를 묻는다.
– 향유, 환대, 그리고 평화의 철학
『전체성과 무한』이 윤리적 관계만 다루는 것은 아니다. 삶의 원초적 모습을 향유로 제시하기도 한다. 향유한다는 것, 즐긴다는 것은 지배한다는 것과 다르다. 어떤 것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장악해야 하지만, 즐기기 위해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하지만 향유는 불안정한 관계다. 향유의 요소들은 우리 밖에 있기에 우리의 통제를 받지 않으며 영속적인 관계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 이런 불안정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집을 짓고 울타리를 두르는데, 이 테두리는 동시에 배타적인 자리 잡음의 경계가 된다.
이해관계의 대립은 여기서 생겨난다. 울타리를 치고 담을 쌓음으로써 존재의 자리를 점령하고 독점한 결과 다툼이 생기고 전쟁이 생긴다. 안락함을 주는 나의 집은 다른 이들을 밀어내고 배척하는 장소일 수 있다. 환대는 이런 폐쇄성을 열어젖히고 타자를 내 집에 맞아들이는 행위다. 낯선 이를 기꺼이 받아들여 자리를 내주는 일이 환대다. 『전체성과 무한』에 등장하는 이 환대 개념은 오늘날에도 난민 문제와 같은 사회적 갈등을 깊이 있게 조망하는 데 큰 시사를 준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평화는 전쟁의 중지를 통해 확보되지 않는다. 이기심과 경쟁을 조절하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평화에 이를 수 없다. 『전체성과 무한』은 그 평화에 이르는 길이 동일자의 전체성을 넘어 타자의 무한을 향하는 데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개념과 테마 들이 엮여 있는 『전체성과 무한』은 결코 한 번 읽고 던져 버릴 수 있는 종류의 책이 아니다. 데리다의 말처럼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이며, 아직도 현대적 논의를 선도하는 책, 우리에게 새롭게 읽기를 끊임없이 요구하는 책인 것이다.
○ 독자의 평
레비나스의 주저 <전체성과 무한>(그린비)이 드디어 번역돼 나왔다. ‘레비나스 선집‘의 셋째 권이다. ‘드디어‘라고 적긴 했지만 제목이 너무 친숙하다 보니 이미 나온 걸로 착각하고 있었다. 레비나스의 주저는 <전체성과 무한>과 <존재와 다르게 혹은 본질의 저편>, 두 권으로 <존재와 다르게>(인간사랑)는 이미 출간되었다(지금 보니 품절상태다). 많이 읽혔던 <시간과 타자>나 <존재에서 존재자로>는 그에 비하면 부수적인 저작들이다.
레비나스에 관한 책이 너무 많이 나와있다 보니까(내가 읽은 책들 대부분이 그에 해당한다) 정작 레비나스의 저작을 직접 읽을 일이 드물었다(대담집은 예외다). ‘레비나스 선집‘은 그런 면에서 레비나스에 대한 진중한 독서를 새롭게 제안한다. 나로서도 레비나스를 읽은 게 20년쯤 전이다. 레비나스가 막 소개되는 즈음에 그의 ‘타자 철학‘에 빠져지냈던 기억이 있다. 레비나스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연관성도 그에 대한 관심을 더 강화시켜 주었고. 지금은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는데, 그에게서 과연 무엇을 더 배울 수 있는지 검토해보려 한다. ‘올드보이‘들이 귀환하고 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