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제국의 탈바꿈 : 1918년 헝가리 혁명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붕괴
시클로시 언드라시 / 보고사 / 2022.6.22
이 책은 1918년 헝가리 혁명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붕괴를 다루고 있는 서양사 책이다. 1918년 헝가리 혁명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어떻게 붕괴되었는지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다.
○ 목차
서론
1. 정치적 위기: 혁명적 상황
2. 승리한 혁명: 헝가리 공화국
3. 국제 정세와 헝가리의 상황: 카로이 정부의 외교 정책
4. 국내 정세
5. 다민족 국가의 붕괴
6. 헝가리 공산당과 비헝가리인 노동자의 공산주의 단체들
7. 붕괴의 특징 – 개관
○ 저자소개 : 시클로시 언드라시
역사학자, 출간작으로 『제국의 탈바꿈』 등이 있다.
– 역자: 김지영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85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여 철학과 정치학을 공부하였고, 1991년 같은 대학교 대학원 러시아 동구지역학과에서‘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왕국연구’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92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헝가리의 외트베시 로란드 대학교 (ELTE) 근현대 헝가리 역사학과 박사 과정에 입학하여 공부하였다. 1999년 10월에‘2차 세계대전기간 및 이후 강대국들의 트랜실바니아 정책’이라는 논문으로 최우등 (Summa Cum Laude)의 성적으로 역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이 박사 학위 논문은 1999년 헝가리 고등교육 및 연구재단에 의해 그 해의 우수 논문으로 선정되어,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1999년 가을 귀국하여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학종합연구센터 책임연구원, 대우교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관, 서강대학교 HK연구교수를 역임하였다. 현재는 한국외국어대학교 헝가리어과의 강사로 헝가리 역사를 가르치고 있으며, 헝가리 외교부 산하 국제문제연구소의 객원 연구원이기도 하다.
‘헝가리 전통문화연구’ (공저)‘, 중유럽 민족문제’ (공저)‘, 인물로 보는 유럽통합사’ (공저) 등 10여권의 저서가 있고, 헝가리-오스트리아 제국의 역사, 헝가리 사학사, 헝가리 현대사와 관련하여 20여 편의 논문을 썼다.
○ 독자의 평
이 책을 번역한 이유는 1918년 헝가리에서 일어났던 부르주아 혁명을 국내 연구자에게 소개하기 위해서이다. …사실 우리 서양사 학계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전간기, 특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제국의 붕괴로 성립된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연구가 극히 소략한 편이다. …동유럽 국가를 형성하게 하는 모태가 되었던 합스부르크 제국, 즉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역사에 대한 연구서는 몇 권이 되지 않는다. 한국에서 서양사 연구가 시작된 지 한 세기가 넘어가지만 제대로 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역사서가 하나도 없다는 것은 고민해야 할 지점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로 생겨난 후속 국가들, 즉 헝가리,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는 최소한 20세기 초반 이전까지는 상당 부분에서 역사를 공유한다. 따라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몰락과 해체, 그 이후에 동유럽 국가들이 생겨나는 과정에 대한 연구는 동유럽 지역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이 책은 헝가리 현대사학자인 시클로시 언드라시Siklós András가 저술한 ‘합스부르크 제국의 몰락'(A Habsburg birodalom felbomlása)의 제2장인 헝가리 혁명과 다민족 국가의 붕괴 1918(A Magyarországi Forradalom és a soknemzetiségű Magyarország felbomlása 1918)을 번역한 것이다. …
저자 시클로시는 이 책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와 동유럽 국가들의 성립 원인을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패배와 1918년 헝가리에서 발생했던 부르주아 시민 혁명, 그리고 주변 국가들과의 적대적 관계에서 찾는다. 특히 저자는 프랑스와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세르비아가 헝가리에 대해 적대적인 외교 정책을 폈으며, 이들의 외교 정책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를 가져온 원인이라고 본다. … – 제국의 탈바꿈 – 1918년 헝가리 혁명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붕괴, 시클로시 언드라시 지음, 김지영 옮김, 보고사, 2022, 7~8쪽, 역자 서문 -
헝가리는 1867년의 ‘타협’에 의해 1918년 11월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의 한 축을 이루었다. 헝가리가 독립국이 되기 전까지 헝가리에서 발생한 사건들이 라이타강 너머, 즉 합스부르크 제국의 오스트리아 쪽 절반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던 점은 분명하다. … – 같은 책 15쪽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비공식적으로는 오스트리아가 관할하는 라이타강 안(이쪽, 서쪽), 즉 시스라이타니아Cisleithania와 헝가리가 관할하는 라이타강 너머(저쪽, 동쪽), 즉 트란스라이타니아Transleithania로 나뉘었다. 보통은 합스부르크의 관점에 따라 이와 같이 호칭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헝가리의 입장에서 오스트리아를 라이타강 너머로 지칭하고 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내부의 정치적 상황이 불안정해지자 전쟁을 선포했다. 신속하고 성공적인 군사 작전을 통해 격심한 투쟁으로 분열된 내부 상황을 치유하고자 했던 것이다. 전쟁이 장기화하고 최종 승리의 가능성이 사라져 가면서 이러한 기대는 완전한 망상이었음이 드러났다. …
시간이 지날수록 파국 직전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살아날 길은 즉각적인 평화뿐이라는 점이 더욱 명확해졌다. 그러나 1917년부터 1918년에 걸친 겨울 동안 사태는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북이탈리아 카포레토Caporetto에서의 승리와 러시아의 전쟁 철수(휴전과 강화 조약이 브레스트-리토프스크Brest-Litovsk)에서 1917년 12월 14일과 1918년 3월 3일 체결되었음)로 무게 중심이 전쟁 지속과 승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옮겨 갔던 것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신임 외무장관 부리안 이슈트반(Burián István, 1851~1922)은 6월 22일 자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지독한 경솔과 무모함… 정치로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 아직 남아 있기는 한 걸까?”₁
대공세를 준비하고 실행하는 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내부 상황과 배후 사정은 경고음을 발하고 있었다.
원자재 부족, 전쟁 물자를 포함한 산업 생산의 급격한 하락, 운송 체계의 완전한 붕괴, 대도시의 기아와 불충분한 공급 등 경제적 어려움은 극복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악화하였다.
₁ ‘칼뱅파 만민 수녀원’ 문서고. 부리안 유산. 일기. 1918년 6월 22일. – 16 ~ 17쪽 -
이러한 붕괴 현상은 군대 내에도 퍼져 갔는데, 이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띠고 있었다. 공동 군대는 전쟁 시기이든 평화 시기이든 항상 분쟁에 시달리던 합스부르크 제국을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이었기 때문이다. …
……
처음에는 후방 지역만이 붕괴 현상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이탈리아 공격 실패 이후, 이러한 징후는 최전방 부대로도 퍼져 갔다. 국방부 공식 통계로는 유효 전투 병력이 1918년 7월 1일 현재 40만 6천 명이었으나, 10월 1일에는 23만 8천9백 명으로 줄어들었다.₁
9월 중순 협상국(Entente.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맞섰던 연합국으로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삼국협상이 주축이었음. 1915년 이탈리아가 협상국 측으로 전쟁에 참여했고, 일본, 벨기에,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그리스,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등이 포함됨-옮긴이) 세력의 마케도니아 공격(도브로폴리에Dobro Polje, 1918년 9월 14일)은 발칸 전선의 붕괴를 가져왔다. 전선의 붕괴와 함께 불가리아의 이탈과 불가리아 혁명-1918년 9월의 군인 봉기-이 이어졌다. …
……
극도로 모호한 내용의 평화 각서가 9월 14일 독일의 반대에도 공개되었으나, 결국 거부되고 말았다. 스위스 주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대사관에 전해진 프랑스의 답변에는 클레망소Clemenceau가 9월 17일 상원에서 행한 연설이 언급되어 있었다. “범죄와 법률 사이에 타협의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완전한 승리를 위해 전진합시다.”₂
……
11월 3일 파도바에서 정전停戰 협정이 조인되었다. 이것은 군 대다수가 전쟁 포로가 됨을 의미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는 외교적 승리로 비쳤다. 제국이 어떤 형태로든 계속 존속할 수 있음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종말은 멀리 있지 않았다. 정전 협정이 조인되던 순간, 사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더는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었고, 제국의 영토에는 중앙 권력과 완전히 관계를 끊은 독립 후속 국가들의 윤곽이 새롭게 드러나고 있었다.
……
체코슬로바키아 독립국의 선포와 분리로 합스부르크 제국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갈리치아를 잃는다고 해서 제국의 생존에 위협이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빈-부다페스트-프라하로 이어지는 삼각형 구도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근간이 되던 토대였던 것이다.
……
빈Wien에서는 10월 21일 라이히스라트(Reichsrat.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 시기의 오스트리아 의회-옮긴이)의 독일 대표들이 협의를 위해 하下오스트리아 주州의회 자리에 모였다. 이 회의에서 독일 사회민주당, 기독사회당, ‘독일 민족주의’ 정당들은 자신들을 임시 국회로 선언하고, 독일-오스트리아 독립 국가를 창설하기로 결의했다. 10월 30일 임시 국회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어떠한 권한이나 행정적 힘을 부여하지 않은 임시 헌법을 채택했다. 독일-오스트리아에서 10월 30일부터 정부 행정권이 임시 국회의 실행 위원회인 독일-오스트리아 20인 국가 위원회에 부여되었다.
헝가리에서 혁명과 붕괴의 과정은 오스트리아의 사태 전개와 평행하게 진행되었다. 9월 말 발칸 전선의 붕괴 소식은 이러한 진행 과정에 강력한 자극을 주었다. 그 내용이 이 책의 요지이다.
₁ Ő-U. Letzter Krieg Bd. Ⅶ. p.361.
₂ Journal officiel du 18 Septembre 1918. Session ordinaire du Senat. – 18 ~ 23쪽 -
의회 야당의 좌익 세력을 이끌었던 독보적인 인물이 카로이 미하이 (Károlyi Mihály, 1875~1955)이다.
…유슈트Justh당 성향이던 카로이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티서 이슈트반 Tisza István으로 대변되는 헝가리 지도층의 보수 정치에 대립각을 날카롭게 세웠다. 1913년 6월 독립당 세력들 사이의 합병(독립당 계열의 두 세력인 유슈트당과 코슈트Kossuth당의 합병 의미함-옮긴이) 이후, 카로이는 ‘통합 독립과 1848년당’의 당수가 되었다.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평화주의 신념과 반독일 감정이 커진 카로이는 개혁 및 참정권 관계 법령의 확대를 주장했고, 어포니Apponyi Albert의 영향하에 놓여 있던 독립당의 기회주의를 비난했다. 1916년 여름 카로이는 어포니와 관계를 청산하고, ‘독립과 48년당’이라는 새로운 정당을 설립했다. …
……
6월에 파업이 발생하자 카로이는 파업 노동자들을 지지했다. 동시에 그는 독일과의 동맹 ‘강화’에 반대함으로써 우파의 책략과 공격을 무시했다. 9월 8일 그는 체글레드Cegléd 선거구민에게 공개서한을 발송했다. 이 서한에서 카로이는 티서의 주전론과 타협을 허용하지 않는 태도를 날카롭고 확실하게 공격했다. 9월 16일 자신을 맞이하러 온 체글레드 대표단 앞에서 카로이는 부리안Rajeczi gróf Burián István의 평화각서를 비판하는 연설을 했다. 그는 효과도 없고 무의미한 각서 대신 윌슨의 14개 조항을 수용하자고 제안하면서, 구체적인 평화안을 작성할 것을 주장했다.
카로이는 트란실바니아에 있는 그의 장인 언드라시 줄러Andrássy Gyula의 두브린Dubrin 저택에서 불가리아 전선의 붕괴 소식을 들었다. 그는 놀라운 소식에 즉시 휴가를 중단하고 첫 기차로 부다페스트에 돌아왔다. 기차역에 마중 나온 대표단 앞에서 카로이는 자신의 프로그램을 ‘평화, 민주주의, 독립’으로 요약했다. 카로이가 의미하는 평화는 타협에 의한 평화로, 친협상국 기조를 통해 독일과의 동맹 파기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민주적 개혁을, 독립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공동 군주 체제인 ‘군합국君合國’을 의미했다.
……
베케를레Wekerle Sándor가 사임한 후 황제는 위에 언급한 계획을 추진하던 카로이를 받아들이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반反협상국 정책에 책임 있는 사람들이 계속 정권을 잡고 있다면 협상국 세력이 제시하는 조건은 더욱 가혹해질 것이다.”₁
……
10월 15일 빈에서 열린 헝가리 대표부 외무 분과 위원회의 마지막 회의에서 카로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전쟁 발발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헝가리가 전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여러 기회를 잡지 않았다는 이유로 친독일 지도자들을 공격했다. “우리는 당신들 때문에 전쟁에 패배했소. 그런데도 당신들이 여전히 그 상태를 유지한다면 우리는 평화마저 잃고 말 것이오… 손을 떼시오. 그래서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운명과 미래와 독립과 자유를 결정할 수 있게 하시오.”₂
……
정치 체제의 변화를 통해 헝가리가 심각한 손실 없이 전쟁에서 철수할 수 있으리라는 의견이 점점 힘을 얻었다. 윌슨의 14개 조항이 헝가리의 영토 보전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거듭된 단언을 포함한 카로이의 몇몇 주장은, 독립이 성취된다면 다민족 헝가리가 현재 모습 그대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희망을 더욱 강화시켰다.
민족주의를 끌어들인 카로이당의 평화주의 프로그램은 위기 속의 정치 체제를 급격하게 바꾸고자 했지만, 동시에 그 체제를 유지하려고도 했다. 지도층은 이를 거부했다. 티서와 국가노동당만이 아니라, 독립당 좌파의 급진주의를 위험하게 생각하던 언드라시의 온건 보수-자유 반대파도 카로이의 계획을 강력하게 반대했던 것이다.
₁ Károlyi, 1923, p.408.
₂ Világ, 1918년 10월 16일. Károlyi 1968, p.217. – 30 ~ 34쪽 -
20세기 초반 시작된 급진주의 움직임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을 불과 몇 달 앞두고 부르주아 급진당의 창설로 이어졌다. 당 정규 회의에서 당수였던 야시 오스카르(Jászi Oszkár, 1875~1957)는 토지 개혁, 민족 문제 해결, 공교육의 세 가지 항목을 당의 기본 목표로 제시했다. …부르주아 급진당은 “사람들을 갈라놓는 정치·경제적 장벽을 제거하고, 유럽 문화에 속한 모든 나라가 일반적인 무장 해제와 합병·배상 없는 평화를 기반으로 동맹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₁
……
프리 부르주아와 지식인 계급이라는 비교적 한정적인 집단으로 구성된 급진당은 실질적인 조직력이 부족했다. …
당을 이끌던 야시 오스카르는 민족 문제 전문가였다. 전쟁 마지막 해에 야시와 급진당이 민족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기 위해서는 1918년 여름 <20세기Huszadik Század> 지면에서 전개된 논쟁과 10월 초에 발간된 야시의 《제국의 미래A Monarchia jövője》를 언급해야만 한다.
급진주의 잡지인 <20세기>에서 벌어진 논쟁은 국가노동당의 이론가였던 레즈 미하이(Réz Mihály, 1878~1921)가 분석한 연구 주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야시는 (역사는 일련의 급진적 투쟁이며, 분쟁을 해결할 유일한 수단은 힘이라는) 민족 이기주의를 옹호한 레즈 미하이의 이론을 “대의로 무장한 독창적인 지식인이라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인류의 운명에 대한 비과학적이고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평가하며 거부했다. 그는 종족의 이기심과 경합하는 개인의 이기심이 결정적인 심리적·역사적 요소라고 주장했다. 그는 레즈 미하이의 견해와 다르게 역사를 “수준 향상과 민주화의 거대한 동화 과정”으로 묘사했는데, 그것은 “광범위한 문화적 협력 단위의 생성”을 의미했다.₂
1918년 초에 탈고한 《제국의 미래》는 1918년 가을이 되어서야 출판되었다. 달갑지 않은 지체였다. 이 책에서 야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의 소수 민족 문제에 관한 실질적 해결 방안을 제시했다. 야시의 구상은 5개의 연방 민족 국가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 창설되어 공동 내각으로 서로 연결되는 형식을 취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면 이후에 남게 될 민족 문제는 새로운 독자적 국가와 문화적·행정적 자치의 틀 안에 녹아들게 될 터였다. 그리고 소수 민족의 모든 ‘타당한’ 요구는 야시가 전체 계획의 전제 조건으로 생각하던 내부 민주화 과정에 수용될 것이었다. 5개의 연방 국가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보헤미아, 폴란드, 일리리아(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남슬라브인 통일체)이다. 이 책은 5개의 연방 국가가 현재의 ‘귀족적 이중二重 체제’를 ‘민주적 오중五重 체제’로 바꿈으로써 발칸 국가들을 끌어들이고, 초민족적 국가 창설의 전범典範을 제시하며, 궁극적으로 전 세계를 아우르는 연방 국가를 세울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₁ PI Archives, Leaflet Collection Ⅱ. 13/13. “급진당은 무엇을 원하는가?”, O. Jászi, “급진주의란 무엇인가?”, 표제지.
₂ Nemzetiségi Kérdés, 3., p.28. – 34 ~ 37쪽 -
《제국의 미래》를 저술하던 당시, 야시는 재구성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틀 안에서 헝가리의 미래를 바라보았다. 그는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의 분리에는 동의했다. 그러나 소수 민족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루마니아인, 슬라브인, 독일인의 문화적·합리적 행정 자치권은 인정하지만, 여전히 헝가리가 이들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20세기로 전환한 이후 제기된 수많은 계획 중에서 야시가 제시한 개념은 충분한 논의로 검증된, 의심할 여지없이 가장 훌륭한 계획 중 하나였다.
이 계획의 가장 큰 약점-이 책이 쓰이던 시기, 더 중요하게는 이 책이 출판된 시기에-은 그것이 잘못된 가정에 근거했다는 점이었다. 급진파는 한편으론 자유주의 세력 및 미국과 협상국의 윌슨주의 세력의 무게감과 영향력을, 다른 한편으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힘과 생존 능력을 너무 높게 평가했다. (야시는 합스부르크가 지배하는 입헌주의적 제국의 틀 안에서 자신의 민주적 연방 체제를 구상했다.) 결과적으로 모든 계획의 핵심인 이해와 타협에 기초한 평화의 가능성을 너무 과대평가했던 것이다.
야시는 또한 러시아 혁명의 가능성과 그 영향력을 과소평가했고, 이후 벌어지게 될 사건들의 근본 원인인 강력한 계급투쟁의 문제점을 파악하는 데 실패했다. 그는 저울의 한쪽에 놓인 ‘독일과 러시아라는 맷돌’에 대해 ‘도나우 연맹’이라는 평형추를 다른 한쪽에 놓는다면, 종족과 관계없이 독일의 패권을 거부하고 혁명을 두려워하던 부르주아 계급이 자신의 계획에 호감을 느낄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부르주아 계급의 이해와 지지에 의존했던 야시는 전쟁의 패배에 따른 무질서, 혁명에 대한 공포, 세력 균형의 변화 등이 소수 민족의 부르주아 계급-점점 모습을 드러내던 후속 국가들의 사회 지도층이었던-을 이전의 지배 민족과 압제자에게서 멀어지게 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못했다. 그들은 압제자와 타협하기보다는 자신들의 민족주의 열망과 열정을 자극하면서 좀 더 쉽고 단순하며 유리해보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단절을 선택했던 것이다.
야시가 소수 민족에 내부 연방 대신 단지 주州 차원의 문화적·행정적 자치를 약속한 사실과 ‘역사적 국경’이라는 영토 원칙-그의 책의 근본 개념이었던-을 주장한 것은 헝가리 민족주의에 대한 양보를 의미했다. 이로써 카로이의 ‘독립과 48년당’과의 밀접한 협력이 가능해졌다. 이런 점에서 영토 보전 주장이 현실적인 개념으로 생각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야시가 그런 해법으로 소수 민족을 만족하게 하리라고 생각하는 한, 그의 현실 판단은 잘못된 것이었다. – 37 ~ 38쪽 -
헝가리 사회민주당은 1918년 가을 보수·반동 세력에 대항하여 힘을 결집한 일련의 야당 세력을 대표하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노동조합 통계는 전쟁 말엽 사회민주당의 세력과 영향력이 크게 확대되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 노동조합 평의회의 발표를 따르면, 조합원 수는 1916년 55,338명에서 1917년 215,222명으로 증가했고, 1918년 가을의 비공식 통계는 그 수를 30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쟁 초기에 사회민주당은 이 전쟁을 ‘방어전’으로 간주해서 단지 전쟁 상황에 따른 경제적·사회적 복지 개혁만을 요구했다. 그러나 곧 빠른 평화 협상과 전쟁의 원래 목적 포기를 요구하는 쪽으로 태도를 바꾸었다. …반면, 국내 문제에 관해서는 과거의 선거 정책으로 회귀했다. 당 지도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던 거러미 에르뇌(Garami Ernő, 1876~1935)가 이 정책의 대표 주자였다.
1917년 6월 사회민주당의 주도 아래 선거구가 획정劃定되었다. 사회민주당은 선거 개혁 약속에 대한 대가로 에슈테르하지(Esterházy Móric, 1881~1960) 정부와 그 뒤를 이은 베케를레 연립 내각을 꽤 오랫동안 지지했다.₁
러시아 차르 체제를 무너뜨린 2월 혁명과 독일 독립당의 출현에 뒤이어 헝가리 사회민주당에 중도파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탁월한 웅변가였던 쿤피 지그몬드(Kunfi Zsigmond,1879~1929)가 이 세력을 이끌었다.
선거 개혁을 위한 투쟁 과정에서 거러미 에르뇌는 자유주의적 온건 야당인 바조니(Vázsonyi Vilmos, 1868~1926)와 친해지게 되었다. 한편, 쿤피는 카로이와 동맹 관계를 맺으려 노력했다. 1918년 2월 개최된 사회민주당 임시 전당 대회에서 부르주아 정당과 “공식적인 또는 조직적인 관계를 청산하기”로 결의했지만, 바조니의 온건 야당 및 카로이의 의회 야당 좌파와의 관계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
사회민주당의 틀 밖에서 불법적으로 조직되어 서보 에르빈(Szabó Ervin, 1877~1918)의 후원을 받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매서운 선전 캠페인으로 좌파 운동의 세력 균형에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불법 전단을 통해 러시아의 예를 따를 것을 주장했다.
₁ 1917년 6월 15일 에슈테르하지 모리츠 백작은 티서 이슈트반 백작의 뒤를 이어 수상에 취임했다. 그러나 에슈테르하지 내각은 1917년 8월 20일 베케를레에게 정권을 내주며 단명했다. 이 내각은 여러 이유로 완전히 교체되었다. 베케를레는 1918년 10월 30일까지 이 정부의 수장을 맡았다. – 41 ~ 43쪽 -
10월 1일 사회민주당 기관지인 일간 <민중의 소리Népszava>는 날카로운 어투의 사설에서 “새로운 길로 접어든” 독일을 예로 들면서 베케를레, 티서, 부리안의 퇴출과 “기존 지배 계급 시스템”의 완전한 철폐를 주장했다.
10월 3일 이 신문은 오스트리아-독일 사회민주당이 요구한 평화조건의 세부 사항을 공개했다. 계속해서 10월 5일에는 오스트리아-독일 사회민주당 소속 의원들이 발표한 민족 자결권에 관한 성명을 보도했다. 이 성명은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독일 노동자를 대표해서 우리는 오스트리아에 사는 슬라브인과 루마니아인의 자결권을 인정하며,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에 사는 독일인에 대해서도 같은 권리를 요구한다.”
“우리는 이러한 기조 아래, 오스트리아가 어떻게 자유 민족 공동체 연방으로 변모할 수 있는지를 체코 및 남슬라브 민족 대표와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다. 슬라브 민족 대표가 이 협상을 거부하다면…오스트리아의 독일인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그들의 민족 자결권을 주장할 것이다.”
<민중의 소리>는 위 성명 내용에 관한 논평을 내고, 헝가리에 거주하는 소수 민족의 평등을 요구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여러 민족이 이러한 혼란 속에 동거하는 이 지역보다 더 열악한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이런 상황을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회주의의 전통적 해법, 즉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발칸 지역 인민들의 광범위한 연방뿐이다. 이외의 해결책은, 항상 분리만을 열망하는 민족 통일주의자와 억압받는 자 그리고 소수 민족을 새롭게 양산하게 될 것이다.” <민중의 소리>는 이와 관련하여 황제가 주도권을 장악하기를 기대하면서, 이후 진행해야 할 과제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황제는 민족 대표를 포함하는 새로운 정부를 구성해야 한다. 새 정부는 바로 비밀 투표에 의한 보통 선거를 도입한다. 즉시 선거를 하고 제헌 의회를 소집한다. 이러한 과정은 “헝가리인과 헝가리 영토 안에 사는 민족들 사이의 관계 및 헝가리 주변에 새롭게 나타나던 국가들 사이의 관계를, 최대한 넓은 지역을 포함하고 평등에 기초한 연방 국가의 틀 안에서” 조정하게 될 것이다.₁
₁ Népszava, 1918년 10월 5일. “길은 어디로 향하는가?” – 44 ~ 45쪽 -
1918년 10월 8일 <민중의 소리>는 가장 긴급한 과제를 10개 조항으로 요약한 “헝가리 인민에게”라는 성명문을 발표했다. 첫 번째 조항은 “전국의 모든 민주 계급 및 각 민족”의 대표들로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자는 주장이었다. 두 번째 조항은 여성 유권자를 포함하고 비밀 투표로 보장되는 보통 선거를 기반으로, 기존의 하원을 해산하고 새로운 국회를 소집하자는 제안이었다. 다른 조항들은 새로운 정부의 임무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었다. 러시아 혁명과 윌슨주의 원칙에 따른 평화, 공공 행정의 완전한 민주화, 결사·집회·조직의 자유,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토지 개혁, 단독 경영의 범위를 벗어나는 산업 시설의 국유화, 공평 과세, 고용 안정 및 사회 복지 체제 구축, 1일 8시간 근무제 도입, 참전 군인·장애인·미망인·고아 지원이 그것이었다. 소수 민족 문제에 관해서는, 한편으론 민족들을 억압하는 체제의 폐지와 모국어의 자유로운 사용을 주장했고, 다른 한편으론 “평등하고 자유로운 민주적 국가 연합에 기초한 헝가리”의 창설이라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
전당 대회의 연사로 나선 쿤피 지그몬드는 열정적인 연설에서, 외부 환경이 기존 시스템의 두 기둥인 이중 체제와 독일 동맹을 무너뜨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내부의 두 기둥이라 할 수 있는 민족 억압과 계급 억압은 그대로 남아 있으므로, 이를 허무는 것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과업이라고 설명했다. 쿤피는 공개적으로 공화국 선언을 옹호하지는 않았지만, 당이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공동 군주 체제라는 개념을 지지하지 않는다-왕권은 이미 허약하다고 판명되었다-고 설명하면서, 정부의 형태는 “미래의 헝가리 제헌 의회에서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소수 민족 문제와 관련하여 쿤피는 사회민주당이 모든 민족의 자결권과 그에 따른 모든 세부 사항을 인정한다고 강조했다. 사회민주당이 이곳에 남길 원하지 않는 사람들을 강제로 붙들지는 않겠지만, 헝가리가 “자유로운 협력에 기반을 둔 연방 인민 국가”가 될 것임으로 분리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
쿤피의 개회 연설에 이어 소수 민족 위원회 대표들의 발언이 이어졌다. 이들은 이전과 달리 간부석에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세르비아, 독일 대표는 사회민주당을 지지한다고 확실하게 말했지만, 부르주아 정당과의 연합 제안에는 명백하게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소위 ‘역사적 정당’이라는 부르주아 정당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소수 민족 대표들은 자신들이 헝가리에 속할 것인지 아닌지를 명확하게 밝히지는 않았다. …이들은 형세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만약 헝가리 노동자들이 헝가리 민족주의, 즉 헝가리 부르주아 정당과 연합한다면 자신들도 그와 똑같이 행동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
사회민주당은 이렇게 제안의 내용을 바꾸지 않은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부르주아 정당과의 연합을 끝내기로 했던 이전의 결의 사항을 무효로 하는 데 성공했고, 그 결과 부르주아 정당과의 연합을 재개할 수 있게 되었다.
……
사회민주당의 우파가 전당 대회에서 침묵을 지키고 뒤로 물러난 반면, 좌파는 제안을 주도하며 강력한 모습을 보였다. 러시아의 발전을 언급하면서 헝가리에 혁명적 상황이 도래했다는 점을 출발점으로 삼았던 좌익 반대파는 10월 성명문이 불만족스럽고 마음 내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사회민주당이 제시한 목표가 유리한 상황에 따른 기회를 쫓아가지 못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포가니 요제프(Pogány József, 1886~1939)는 연설에서, “오스트리아와의 군합국 체제, 독립 관세 지역, 독자적 군대를 요구하는 급진적이고 쇼비니즘적인 헝가리 정치 정당의 프로그램”에 공화국 체제, 자유 무역, 노동자 민병대 창설 요구로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
……
포가니는 부르주아 정당과의 연합 문제가 헝가리 노동자뿐만 아니라 소수 민족 노동자의 자의식을 자극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두 가지 전술을 동시에 추구할 수는 없습니다.” 사회민주당은 소수 민족의 부르주아나 “영토 보전을 주장하는 역사적 정당”과 연합하기보다는 조직화하지 못한 수십만 명의 노동자, 수백만 명의 농부, 수천만 명의 외국 노동자 그리고 러시아 혁명과 연합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도르 팔(Zádor Pál)은 사회민주당의 목표가 “헝가리에 사는 모든 민족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의한 국가 경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46 ~ 51쪽 -
쿤 벨러(Kun Béla, 1886~1938)가 이끌던 러시아의 헝가리 공산주의 세력도 사회민주당의 10월 강령과 전당 대회에서 채택된 결의 사항에 대해 견해를 밝혔다.
……
…헝가리 볼셰비키는 새로운 역사적 발전 현상에 주목했다. 제국주의, 세계대전,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수립으로 노동 운동이 근본적으로 새로운 환경에 직면하게 되자, 그들은 사회 혁명의 가능성, 즉 논의의 초점이던 권력 획득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당면한 목표로 선언하는 것이 더는 진보나 자유의 길을 의미하지 않고, “볼셰비즘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맞서, 몰락하고 있는 부르주아 국가 조직을 구하려는” 수단에 불과하게 되었던 것이다.₁
이러한 기조 위에 이 세력의 기관지인 주간 <사회 혁명>은 사회민주당의 10월 성명문을 반역 문서로 규정하면서, 사회민주당은 기회주의적이고 지배층과 음모를 꾸미고 있으며 계급투쟁을 포기했다고 비난했다. <사회 혁명>이 사회민주당에 가한 주된 비난은 첫째, 이 당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해 아무런 전망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과 둘째, 이들이 극히 중요한 민주적 전환 프로그램 요구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
즉, 이 10개 조항의 성명은 계급투쟁의 길을 벗어나 혁명의 기회를 놓쳤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국민의 보편적 무장과 교회 소유 토지의 몰수를 명확하게 적시摘示했던 사회민주당의 임시 강령도 포기한 것이다.
<사회 혁명>은 헝가리 독립 주장과 관련하여 자세한 논설을 게재하고, 부르주아 정당의 강령에 포함된 독립 주장이 “독일 제국주의와 동맹 관계의 헝가리”를 “반혁명·친협상국 정서의 헝가리”로 대체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₂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와 관련하여 이 신문은, 현 상황에서 민족 분할은 “명백하게 각 민족 부르주아의 열망이자 이익”이지만, 민족과 관계없이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대중에게는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다는 이유로 민족 분할에 반대하는 태도를 보였다.
₁ Szociális Forradalom, 1918년 10월 23일. 쿤 벨러, “볼셰비키의 심판.”
₂ Szociális Forradalom, 1918년 10월 16일. “헝가리 독립.” – 51 ~ 54쪽 -
베케를레에 이어 발언대에 오른 카로이 미하이는 정부가 제시한 책략의 목적뿐만 아니라 그 약점도 꿰뚫고 있었다. 그는, 지난날 이중 체제의 충실한 옹호자였던 사람들이 지금에 와서 군합국 체제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수상의 발표를 거부했다. 카로이 미하이는 청중들에게 베케를레가 이행하지 못할 약속을 종종 했던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는 모든 지연 사태에 반대를 표명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전쟁에서 패배했습니다. 이제 평화를 잃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카로이는 평화를 정착하는 데 필요한 요소의 목록을 제시했다. 새로운 외교 정책 도입(독일과 절교, 평화주의 태도 채택), 급진적·민주적인 방향으로 국내 정책 선회(보통·평등 참정권, 민주적 토지 정책), “헝가리의 영토 보전을 위한” 민족 문제의 새로운 접근이 그것이었다. – 58 ~ 59쪽 -
티서는 독일과 동맹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 동맹이 공격적인 러시아 독재 제국의 야망을 방어하기 위해 불가피했었지만, 전쟁의 와중에 차르 제국이 무너진 지금은 그 위험이 지나갔다.”고 주장했다.
사안의 중압감 때문에 티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과 독일 동맹에 대한 태도를 바꾸었다. 그러나 소수 민족 문제에 관해서는, “우리가 소수 민족을 박해한 적이 없고” 헝가리 내에 오직 “하나의 작은 소수자 세력”만이 “민족 국가의 근본 개념”에 반대하기 때문에 광범위한 변화는 필요하지 않다고 언급했다. 티서는 또한 참정권 확대 및 민주화에 대한 요구에도 등을 돌렸다. “우리는 민주화 방침을 채택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오래전에 그것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전쟁에 대한 그의 언급이 큰 파문을 일으켰다. “나는 말장난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어제 카로이 미하이 백작이 말한 바대로, 우리가 전쟁에 졌음을 인정합니다…”
이 선언은 대단한 혼란을 일으켰다. 확실히 티서의 선언은 카로이가 말했던 내용을 반복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까지 항상 승자의 평화를 언급하며 끝까지 인내하자고 주장하던, 그리고 9월 말까지도 남슬라브와의 협상을 힘으로 밀어붙이려던 정치 지도자의 입에서 나온 이러한 선언은, 어떤 경우에도 그 문제에 관해 자신의 견해를 숨기지 않던 야당 지도자의 연설과는 사뭇 다르게 들렸던 것이다.
……
…티서의 선언으로 부르주아 및 프티 부르주아 계급은 뭔가 중대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고, 정부를 의심하지 않던 사람들은 허를 찔리고 말았던 것이다. – 61 ~ 63쪽 -
10월 초에 민족주의 정당의 활동과 조직 문제는 부차적 사안인 듯했다. …의회에서는 40명의 세르비아-크로아티아 의원, 4명의 루마니아 의원, 2명의 슬로바키아 의원이 소수 민족 정당을 대표했다. 전체 400명의 헝가리 의회에서 루마니아와 슬로바키아 의원의 숫자가 극미했다는 사실 자체가, 티서의 견해와는 달리, 소수 민족 문제의 해결이 요원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에 충분했다.
회의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던 세르비아-크로아티아 의원들은 회의에 불참함으로써 헝가리와 자신들의 연계 고리가 끊어졌음을 알렸다.
버이더 샨도르Vajda Sándor가 루마니아 국민당을 대표하여 의회에서 연설했다. 그는 10월 12일 너지바러드Nagyvárad에서 루마니아 국민당 실행 위원회가 회의를 개최하여 선언문을 채택했음을 발표했다. 그가 읽어 나간 선언문은 헝가리와 트란실바니아에 사는 루마니아인의 자결권을 요구하면서 헝가리 정부와 의회가 루마니아 민족을 대신하여 말할 권리가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트란실바니아의 루마니아 의회가 장래에 루마니아인을 대표할 유일한 권리를 지니고 있으며, 의회가 소집될 때까지는 루마니아 국민당의 실행 위원회가 그들을 대신할 권리를 가진다고 공표했다.
– 63 ~ 64쪽 –
하루 뒤인 10월 19일, 슬로바키아 국민당을 대표하여 유리거 난도르Juriga Nándor가 자신의 견해를 설명했다. 그는 “헝가리에 거주하는 슬로바키아인의 국민 위원회”의 이름으로, 루마니아인처럼, 슬로바키아인의 자결권을 요구하는 선언문을 낭독했다. 유리거는, 슬로바키아인은 자신들의 정착 지역에서 국가 공동체를 형성하기 원하고, 헝가리 정부나 의회에 슬로바키아 민족을 대표하는 권한을 인정할 수 없으며, 슬로바키아 국민 위원회 이외에는 누구도 슬로바키아 문제를 협상할 권리가 없다고 강조해서 말했다.
유리거는 긴 연설 도중 자신은 카로이당도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그는 소수 민족 문제에 관한 카로이당의 태도가 국가노동당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다고 말했다. “그들은 다른 전략을 쓰고 있을 뿐, 오십보백보입니다.”
역사 속에서 슬로바키아인은 쿠루츠Kuruc와 러번츠Labanc 모두에게 고통받았다(쿠루츠는 17~8세기에 합스부르크 황실에 저항했던 헝가리 왕국의 귀족, 농노, 프로테스탄트 농부, 슬라브인 등을 지칭하는 단어이며, 이에 맞선 오스트리아 황실과 지지자를 러번츠라고 부름-옮긴이). 쿠루츠나 러번츠가 트렌첸Trencsén 주州(슬로바키아 서쪽 지역에 있던 헝가리 왕국의 행정 주.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체코슬로바키아에 편입되었고, 현재는 슬로바키아의 영토임-옮긴이)에 진입할 때면, 그들은 항상 주민에게 쿠루츠를 지지하는지 러번츠를 지지하는지 물었다. 주민은 결국 이렇게 답변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에게 쿠루츠인지 러번츠인지 더는 묻지 말고, 그냥 우리를 휘젓고 지나가시오. 없는 사람은 항상 당하기만 하는 법이니…”₁
₁ Képviselőházi napló, XL Ⅰ. p.308. – 65 ~ 66쪽 -
10월 초에 분출하여 해결되지 않고 미루어졌던 정부 위기가 베케를레 정부의 사임으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10월 초에는 국가노동당과 온건 야당이 정치적 주도권을 잡기 위해 논쟁했지만, 이제 국가노동당과 48년 헌법당이 합병-이 합병의 결과로 국가노동당은 주도권을 잃게 되었다-을 하게 되자 권력 투쟁은 언드라시와 카로이에 집중되었다. …
……
곧 언드라시의 계획은 실패로 드러났다. 10월 25일, 언드라시는 그가 그렇게도 강력하게 밀어붙이던 새 정부의 구성을 매듭짓지 못하고 빈으로 향했다. …
10월 22일 저녁 카로이당, 부르주아 급진당, 사회민주당의 대표들이 카로이의 저택에 모였다. 참가자들은 세 정당이 헝가리 국민 위원회를 구성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데 동의했다. …10월 25일, 국민 위원회가 공식으로 발족하였다.
세 정당은 국민 위원회의 발족을 설명서로 발표했다. …야시가 작성하고 쿤피가 수정한 이 성명서는 12개 항목으로 세부 정치 강령을 요약하고 있었다.
이 성명서는 사회민주당이 10월 8일 선언문에서 주장했던 사항인 정부의 퇴출, 하원 해산, 비밀 투표에 의한 보통 선거, 급진적인 토지 개혁과 사회 복지 확대 개혁, 자결권 및 “평등한 인민의 형제 연방”, 강압보다는 상식과 공동 경제와 지리적 유대에 기반을 둔 영토 보전 등을 반복해서 요구하고 있었다. 즉, 성명서는 사회민주당의 강령에 카로이당과 급진당의 몇몇 급진적인 요구사항이 첨가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정국의 최근 전개 상황에 따라 급부상한 새로운 요구 사항도 다수 포함되었다. 헝가리의 완전한 독립, 헝가리에서 군대 철수, 독일과의 동맹 파기, 브레스트 및 부쿠레슈티 조약의 무효화, 적대 행위의 즉각적인 중지, 평화 회의에 민주적 정치인을 대표로 내세울 것, 주변국과 정치·경제적 유대 관계 형성, 정치범에 대한 일반 사면, 집회 및 결사의 자유, 검열 폐지 등이 이러한 요구 사항이었다.
……
후에 국민 위원회 지도자들이 회고록에, 자신들은 “혁명이 아니라 진화”를 원했고 혁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혁명을 피하고자 국민 위원회를 조직했다고 기록한 내용은 확실히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도자들의 의도와 달리 국민 위원회의 설립은 그 자체로 혁명적 행위였다.
라이타강 너머 오스트리아 지역에서는 라이히스라트 의원으로 구성된 국민 협의회가 합법적인 국민 위원회로 기능하고 있었다. …헝가리는 상황이 달랐다. 헝가리는, 제국이 최근에 자유를 얻게 된 오스트리아 거주 민족에게 성명을 통해 약속했던 독립의 요건을 이미 수십 년간 충족하고 있었다. 헝가리는 진작 독자적인 의회와 정부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헝가리 국민 위원회는 법적인 근거가 없었고, 언론은 10월 26일 성명서 전문을 게재하면서 이러한 사실을 공개적으로 논평했다. “…국민 위원회의 설립을 언급한 법률은 존재하지 않는다… 국민 위원회의 존재는 그 자체로 하나의 법이다… 우크라이나, 폴란드, 체코, 슬로베니아가 제국의 칙령에 근거해 국민 위원회를 구성한다면, 헝가리는 인민의 의지에 근거해 국민 위원회를 구성해야 한다.”₁
₁ Pesti Napló, 1918년 10월 26일. “국민 위원회 출범.” – 69 ~ 73쪽 -
정부 위기의 분출과 이에 대한 정부의 미적지근한 대응이 막 날개가 돋친 대중 운동에 힘을 더해 주었다.
10월 24일, 수백 명의 대학생들이 카로이의 저택으로 행진했는데, 그들 중 상당수는 그날 수업이 없던 예비 장교였다. 카로이는 그들에게 격려 연설을 한 뒤, 깃발을 건네주었다.
다음 날 학생들은 박물관 광장에서 회의를 열고, 황제와 내각 회의에 자신들의 요구를 주장하기 위해 왕의 성으로 열을 지어 행진했다. …
……
저녁때 의회 광장에서, 그 후에는 기젤러Gizella 광장의 카로이당 본부 앞에서 주도권은 다시 좌익의 손에 넘어갔다. 의회 광장에서 회합한 후 갈릴레이단 지도부는 엄청난 군중과 함께 언케르 뮤스로 가서 폐쇄된 자신들의 건물을 점거했다.
“일간 신문은 언론의 자유를, 학생들은 집회의 자유를 선언했다. 이제 갈릴레이단은 결사의 자유를 선언한다.” 난간에서 연설하던 젊은이가 열광적으로 환호하는 군중에게 이렇게 선포했다.
학생과 군인을 모집하고 조직하기 위한 학생 위원회와 군인 위원회가 그날 밤늦게 설립되었다. 공군 대위 체르냐크 임레Csernyák Imre가 위원장을 맡은 군인 위원회는 …이들 예비 장교의 상당수는 러시아에 전쟁 포로로 있다가 최근에 돌아온 사람들이었다. 위원회로 모여든 장교들이 곧 부다페스트에 주둔하는 대부분의 군부대에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군인 위원회의 설립은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또한, 군인 위원회가 당시 국방부에서 예비 소위로 근무하던 산토 벨러Szántó Béla를 통해 사회민주당의 좌익 세력인 혁명 사회주의자 및 공장에서 근무하던 야당의 노조 대표와 접촉할 수 있었던 점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 – 75 ~ 76쪽 -
10월 27일 일요일, 국민 위원회는 의회 광장에서 집회를 열었다. …
카로이 미하이가 빈에서 저녁 기차로 도착한다는 발표에 따라 집회 후에 엄청난 인파가 서부역 근처로 몰려들었다. …
기차에서 내린 카로이는 로바시 마르톤Lovászy Márton을 위시한 위원회의 환영을 받았다. 그 자리에서 로바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귀하가 황제의 의지로 수상에 임명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인민의 의지로 귀하를 수상으로 만들 것입니다.”₁ …
10월 28일 오후, 국민 위원회 대표들이 중대한 발표를 할 계획이라는 소문에 엄청난 군중이 기젤러 광장의 카로이당 본부 앞에 모였다. …이에 집회에 참석 중이던 카로이당의 지도자 프리드리히 이슈트반(Friedrich István, 1883~1951), 부저 버르너(Buza Barna, 1873~1944), 버시 야노시Vass János, 페녜시 라슬로Fényes László 등은 시위 행렬을 이끌고 부다에 있는 요제프 대공에게 가서 카로이의 수상 임명을 요구하기로 했다. 사슬 다리로 이어지는 길목에 진을 치고 있던 일단의 군인들은 시위대가 지나가도록 해주었지만, 사슬 다리 입구에 집결해 있던 무장 경찰은 시위대의 길을 막아섰다. 기마경찰이 군중 속으로 달려들었고, 다리 첫 어귀에 포진한 경찰관은 시위대에 발포했다.
3명이 사망하고 부상자가 다수 발생했다. …
10월 28일의 유혈 사태, 소위 “사슬 다리 전투”는 긴장 상태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다. …
그날 발생한 두 사건으로 구질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이 분명해졌다. 첫 번째 사건은 쇼로크샤리Soroksári 거리에 있는 무기 공장에서 발생했다. 항의 파업이 진행되는 동안 노동자들이 무기 창고를 점령하고 소총, 권총, 탄약을 손에 넣었다.
……
두 번째 사건은 경찰의 혁명 참여였다. 박봉과 불충분한 보급에 시달리고 24시간 근무로 한계 상황에 다다른 하위직 경찰들이 27일 모쇼니Mosonyi 거리의 경찰 막사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사슬 다리 전투” 이후로 공무원과 형사 집단도 불만 세력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
₁ Magyarország, 1918년 10월 29일. “카로이 미하이 백작 도착.” – 77 ~ 79쪽 -
10월 30일, 대립하던 두 진영은 요제프 대공이 임명한 허디크 야노시Hadik János 수상의 강력한 노력 덕분에 온건 야당이 장관과 차관 자리를 공유하는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는 것으로 자리매김하였다. …
허디크는 당시 의회 내에서 다수파 소속이었지만, 새로운 정부가 대중으로부터 공감을 얻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사실이 별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
‘합법 정부’가 의지할 수 있는 공권력은 부다페스트에 집결한 군대와 무장 경찰이었다. 어떤 자료는 당시 부다페스트의 군 병력을 1만 8천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고, 또 다른 자료는 그보다는 훨씬 많았다고 어림하고 있다.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발생한 폭동을 막기 위해 특별히 훈련받은 무장 경찰 중대 81개와 기관총 부대 37개가 있었다. …
평화 시기라면 이러한 공권력으로 어떤 혁명 활동이라도 쉽게 진압했을 것이다. 그러나 4년간의 전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결딴난 상황에서 사정은 매우 달랐다. 열악한 숙박 시설과 형편없는 의복 등 전쟁의 끝없는 고통에 시달리던 일반 사병들은 오히려 혁명 이념을 받아들이고 대중, 그중에서도 가장 불만에 차있고 가장 행동적이었던 사람들과 반복해서 접촉했다. 무장 경찰 임무를 부여받은 많은 예비 장교도 국민 위원회에 공감하기 시작했다. …사령관 대다수는 헝가리인이 아니었다. 다른 상황이었다면 헝가리어를 할 줄 모르는 장교들의 존재는 집권자에게 명백하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1918년 10월, 도시 사령부나 다른 군사 본부에 소속된 독일, 체코, 남슬라브 출신의 야전 장교들은 헝가리의 혁명을 막거나 진압하는 데 더는 관심이 없었다. …
……
새 정부의 장래는 앞에서 언급한 경찰의 행동, 즉 경찰관 대다수가 국민 위원회에 참여한 사실 때문에 더욱 악화하였다. …경찰력이 마비되고 30일에는 시위 군중 속 이외의 거리에서 경찰을 찾아볼 수 없었던 점이, 전투에 적합하여 부다페스트에 파견된 군 부대원과 헌병의 행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집권 세력의 지속적인 상황 악화와 새 정부의 고립은 상대적으로 국민 위원회의 증대하는 힘과 국민 위원회를 둘러싼 혁명 세력의 갑작스러운 부상을 의미했다. …국민 위원회는 조직적인 노동 계급의 지지를 받았는데, 그들 중 일부는 무장한 채 대기하고 있었다. 당시의 자료는 부다페스트에 무장한 노동자가 3만 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
10월 30일, 국민 위원회의 요청을 받은 전화 교환원들도 혁명에 참여했다. …
당시 자료에 의하면, 10월 30일에는 80~90개의 주둔 부대 및 파견 부대가 군인 위원회의 수중에 넘어왔다. …
10월 30일 아침 부다페스트 거리는 전체적으로 평온해 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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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으로 평온했던 오전과 달리, 오후가 되자 거리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모습을 드러낸 시위 군중이 여러 전단을 돌렸다. 이러한 전단 중 이른 아침에 군 막사에 뿌려진 전단은 군인 위원회의 전언을 담고 있었다. “병사들이여!… 국민 위원회가 그대들을 오래된 충성 맹세의 구속에서 해방해 줄 것이다. 지금 이 순간부터 국민 위원회에 충성을 맹세하라… 국민 위원회 참여하기를 명령한다!”₁ …9시가 조금 넘자 군중은 적색-백색-녹색 깃발과 적색 깃발을 들고 혁명 노래를 부르면서 기젤러 광장에서 다시 어슈토리어Astoria 호텔 쪽으로 행진했다. …
기젤러 광장과 어슈토리어 호텔 앞에서 국민 위원회 지도부는 즉각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흥분한 군중을 가라앉히려 애쓰고 있었다. …
그날 밤 어슈토리어 호텔은 혁명의 중심지였다. 사람들로 가득찬 국민 위원회 사무국과 실행 위원회 본부가 1층에 자리 잡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저녁때 혁명 좌파와 군인 위원회 대표들도 본부를 이 호텔로 옮겼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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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슈토리어에서는 현장에 도착한 군인들이 공격을 감행하여 근처에 있는 부다페스트 군 사령부를 점령해 버렸다. 경비병은 저항하지 않았고, 연병장에 있던 헌병 대대는 봉기에 동참했다. 도시 군사령관 바르코니 얼베르트Várkonyi Albert 장군은 포로로 잡혀서 어슈토리어 호텔로 이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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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기가 성공적으로 진행되는 동안 부다페스트 군사령관 루커치치Lukachich Géza는 속수무책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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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제프 대공이 카로이와 전화로 협상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살피고 있던 이른 아침에 루커치치는 버티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이 무렵 부다 쪽과 성 주변은 여전히 그의 통제 아래에 있었고, 여러 병영이 아직 반란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빈의 국방부는 즉각적인 도움을 약속하고 있었다. 다만, 이런 약속에서 무언가 결과물이 나올 수 있을 것인지, 그것이 문제였다.
₁ A katonatanácsról, p.89. 전단은 Siklós A.의 Az 1918~1919. évi magyarországi – 82 ~ 93쪽 -
이러한 상황에 강력한 추진력을 제공한 사건이 이어졌다. 젊은 언론인 제트버이 야노시Gyetvai János의 제안에 따라 한밤중에 <민중의 소리>를 찍어내던 인쇄기로 전단을 인쇄하기 시작한 것이다. “혁명은 진행중이다!”라는 말로 시작해서 그 밤의 사건을 간추려 소개한 이 유명한 호소문은 노동자에게 혁명 참여를 독려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이여! 동지들이여! 이제 당신들 차례다! 반혁명 세력은 틀림없이 다시 권력을 잡으려 획책할 것이다. 일을 멈추어라! 거리로 나서라!”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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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31일 업무는 시작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혁명 노래를 부르며 도시 중심부로 행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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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7시쯤 카로이는 요제프 대공의 요청에 응해 야시와 쿤피를 대동하고 대공 관저를 방문했다. 허디크는 사의를 표명했고, 대공은 참석자들에게 자신이 왕으로부터 카로이를 수상으로 임명할 권한을 부여받았다고 말하면서, 카로이에게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라고 요청했다. 카로이와 쿤피는 루커치치가 저항을 멈추고 병사들을 병영으로 돌려보낸다면 법과 질서를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아침에 국민 위원회의 실행 위원회가 본부를 시청으로 옮겼다. 카로이가 돌아와 그곳에서 간단한 회의를 가진 뒤 새 정부를 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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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료들은 요제프 대공 앞에서 서약했다. 곧이어 부다 성城의 수상 집무실에서 첫 번째 내각 회의가 열렸다. 카로이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프로그램을 요약했다. 독립을 위한 법률 제정, 참정권(지방정부와 마을 포함), 군인과 시민의 즉각적인 사면, 외국 포로의 즉각적인 석방, 언론의 자유, 일반 배심 제도, 집회 및 결사의 자유, 전쟁과 평화에 관한 의회의 결정 권한, 노동복지부의 설립, 대중에게 토지를 배분하는 급진적 토지 정책, 헝가리 외무장관의 즉각적인 임명, 수상에게 헝가리 외무부 수장의 권한 위임, 독자적인 헝가리 외무부 설립을 위한 법령 준비, 언제라도 의회 해산에 활용할 수 있는 법령집 출간. 카로이는 다음과 같이 덧붙여 말했다. “현재의 과도한 흥분과 전반적인 친공화국 분위기를 고려할 때, 정부 정책에 군합국 체제를 포함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황제 폐하가 우리의 왕이며, 동시에 황제 폐하가 다른 나라의 군주가 되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 단, 이러한 체제가 헝가리의 완전한 독립을 저해해서는 안 된다…”₂
₁ PI Archives, Pamphlet and Leaflet Collection/Ⅱ, 11/1918/X/4254. 이 전단은 Siklós A.: Az 1918~1919. évi magyarországi forradalmak, p.111쪽에 원본 그대로 실려 있다. 호소문은 <민중의 소리>의 부편집장이었던 벨트네르 여커브Weltner Jakab가 기안한 듯 하며, 그가 지적한 대로 “당 지도부는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Weltner, p.57.)
₂ OL K 27. Minisztertanácsi jegyzőkönyvek. 1918년 10월 31일. – 93 ~ 95쪽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