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조선혁명선언
신채호 / 범우사 / 2010.4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 언론인이었던 단재 丹齎 신채호 선생의 불후의 작품인 ‘조선혁명선언’과 ‘조선상고사’의 총론을 수록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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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혁명선언’은 독립운동가로서 일제를 타도하려는 이론적·실천적인 격문으로 일제를 조선의 국호와 국권과 생존권을 박탈해간 강도로 규정하고, 이를 타도하기 위한 폭력시위의 정당성을 알리고 민주주의 혁명을 선언하고 있다.
‘조선상고사’는 민족사학자로서 우리나라 상고 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 일제시대 우리 민족의 역사를 알려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단재사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두 명문을 한 책에 수록한 이 책은 우리 민족의 역사와 독립운동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 목차
‘조선혁명선언’의 이해를 위하여
조선혁명선언
조선상고사
제1장 사史의 정의와 조선사의 범위
제2장 사史의 3대 원소와 조선 구사舊史의 결점
제3장 구사舊史의 종류와 그 득실의 약평略評
제4장 사료의 수집과 선택
제5장 역사의 개조에 대한 우견愚見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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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소개 : 신채호
신채호 (申采浩, 1880∼1936)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사학자, 언론인이다. 지금의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서 신광식 (申光植)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일편단생 (一片丹生), 단생 (丹生), 단재 (丹齋), 금협산인 (錦頰山人), 무애생 (無涯生) 등이다.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조부에게 한학을 배웠는데, 13세에 사서삼경을 모두 읽어 신동으로 불렸고, 19세에 성균관에 입학해서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된다.
같은 해 장지연 (張志淵)이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을 쓰고 투옥되자, 그의 뒤를 이어서 논설위원으로 활동한다.
이듬해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 되었고, 『이태리 건국 삼걸전』을 광학서포에서 발행한다.
1907년 신채호는 비밀결사 단체 신민회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앞장선다.
1908년 신채호는 여성 계몽 잡지 『가정잡지』의 발행인이 됐고, 같은 해 『대한매일신보』에 5월부터 8월까지 『수군 제일 위인 이순신전』을 연재한다. 5월에는 『을지문덕』을 광학서포에서 발행했고 다음해 『동국거걸 최도통전』을 출간했다.
1910년 한일합방 후, 신채호는 안창호 (安昌浩), 이갑 (李甲) 등과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독립사상의 전파를 위해 『해조신문』를 발간한다.
1914년에 『조선사』의 저술을 시작한 신채호는 만주를 여행하면서 광개토왕 왕릉 등 고구려 고적을 답사한다. 다음해 북경 도서관에서 『조선상고사』의 집필을 위한 연구 자료를 수집한다. 또 박은식 (朴殷植), 문일평 (文一平) 등과 박달학원을 설립한다.
1919년 신채호는 임시정부 전원위원회 위원장으로, 비밀결사 대동청년단 단장으로 추대된다. 같은 해 『신대한』의 주필로 독립운동에 많은 영향을 주는 글을 썼고 대한 독립청년단 단장, 신대한동맹단의 부단주가 된다. 다음해, 보합단 (普合團)의 내임장으로 추대된 그는 독립군 자금을 모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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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북경에서 김정묵 (金正默), 박봉래 (朴鳳來)등과 통일책진회 (統一策進會)를 만들어 『통일책진회 발기 취지서』를 발표한다.
다음해 북경에서 조선 역사를 연구해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를 저술한다.
그리고 1923년 의열단 (義烈團)의 요청으로 『조선혁명선언』을 만들었고, 국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해 임시정부의 창조파로 활약한다.
다음해 관음사 (觀音寺)에서 역사 연구에 몰두한다.
1925년에는 1월부터 10월까지 『동아일보』에 『조선사연구초』를 연재하면서, 무정부주의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미발표 작품인 『전후 삼한고』를 쓴다.
1928년 대만의 무정부주의 비밀결사 사건에 연루된 신채호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0년 형을 받아 뤼순 감옥에서 복역한다. 다음해 『조선사연구초』가 동지들에 의해 서울에서 출판된다.
1931년에 그는 『조선일보』에 6월부터 10월까지 『조선사』를 연재했고, 10월부터 12월까지 『조선상고문화사』를 연재한다.
1936년 2월, 신채호의 나이 57세, 뤼순 감옥에서 뇌일혈로 의식을 잃은 후,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타국 땅에서 옥사한다.
1945년에는 신채호학사가 설립되었고, 다음해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조선사』의 서문을 『조선사론』으로 표제하여 광한서림에서 출판한다.
1948년 『조선상고사』를 종로서원에서 발행했고, 1955년 단재유고출판회에서 『을지문덕』을 순 한글로 번역 출판한다.
1962년 신채호에게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이 수여되었다.
그리고 2007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단재 신채호 전집』이 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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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혁명선언 (朝鮮革命宣言) 개관
조선혁명선언 (朝鮮革命宣言)은 1923년 중국 북경에 망명중이던 신채호 (申采浩)가 비밀 항일결사 단체인 의열단 (義烈團)의 선언문으로 작성한 글이다.
1919년 11월 10일에 창립되었던 의열단은 ① 왜놈들을 몰아내고 ② 조국을 되찾고 ③ 사회 계급을 없애고 ④ 평등을 추구하는 강령과 <천하 정의 (正義)의 율 (律)을 맹렬하게 실천함> 등의 공약 10조를 가지고 있었으며, 1923년 신채호에게 위촉하여 6천 4백여 자로 구성된 민족혁명주의적인 이 독립 선언문을 제시하였다. 이 선언문은 모든 의열단 단원들이 항상 소지하고 다녔을 뿐만 아니라, 1919년에 발표되었던 삼일 독립선언문 (三一獨立宣言文) 이후 가장 큰 역사적 의의를 지닌 독립사상을 밝힌 문헌으로 평가되었다. 이 선언에 제시된 독립사상은 1920년대 국내에서 일제를 비적국화 (非敵國化)하고 타협하려는 타협주의와 상해 임정 내의 외교노선주의론에 반대하여 폭력투쟁적인 항일투쟁노선을 정당화했을 뿐만 아니라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아 반강권 (反强權), 반엘리트주의로 ‘민중의 직접 혁명’의 이념을 제시하였다. 따라서 이 선언은 민중·폭력의 두 요소를 결합시킨 아니키즘적 민중혁명, 폭력의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문헌에서 신채호는 1905년 이래의 영웅사관적 (英雄史觀的) 색채를 가진 자강주의 (自强主義)를 극복하고 독립투쟁의 주체를 자강론적 엘리트에서 민중으로 전환시켰을 뿐만 아니라 온건한 실력양성주의에서 혁명적 민족주의로 그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이 민중·폭력의 아나키즘적 철학에 의해 “안중근·이재명 등 열사의 폭력적 행동이 열렬하였지만, 그 후면에 민중적 역량의 기초가 없으며 3·1운동이 만세 소리에 민중적 일치의 의기를 볼 수는 있었으나 또한 폭력적 중심을 가지지 못했다” (同宣言)라고 민족혁명주의적 독립투쟁의 역사관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상에는 리스청 (李石曾) 등의 중국 무정부주의의 영향이 인정될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의 주적인 일제 (日帝)를 아나키즘적인 반강권주의에 따라 그 절대적인 적으로 타도해야 할 대상으로 설정한 반제국주의 노선이 명백히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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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