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조지훈 전집 전9권
조지훈 / 나남 / 2007.2.13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는 시인이자 한국한의 토대를 마련한 학자로 꼽히는, 조지훈의 저작을 망라한 전집이다. 연구자의 자료가 되도록 판본들을 일일이 대조하여 결정본을 확정하고, 1973년판 전집에서 누락된 논설들과 한시들을 찾아 수록하였다. 전9권.
조지훈은 민속학과 역사학을 두 기둥으로 하는 한국문화사를 자신의 전공으로 여겼다. 조부 조인석과 부친 조헌영으로부터 한학과 절의를 배워 체득하였고, 혜화전문과 월정사에서 익힌 불경과 참선 또한 평생 연구했다. 여기에 조선어학회의 큰사전 원고를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익힌 국어학 지식이 더해져, 조지훈의 학문적 바탕이 형성되었다.
저자 조지훈 시인은 경상북도 영양 (英陽) 출생으로 엄격한 가풍 속에서 한학을 배우고 독학으로 중학과정을 마쳤다. 1941년 혜화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오대산 월정사 불교강원의 외전강사를 역임하였고 조선어학회 〈큰사전〉 편찬에도 참여했다. 1939년 〈고풍의상〉 (古風衣裳), 〈승무〉 (僧舞), 1940년 〈봉황수〉 (鳳凰愁)로 〈문장〉 (文章)지의 추천을 받아 시단에 데뷔했다. 고전적 풍물을 소재로 하여 우아하고 섬세하게 민족정서를 노래한 시풍으로 기대를 모았고, 박두진, 박목월과 함께 1946년 《청록집》 (靑鹿集)을 간행하여 ‘청록파’라 불렸다.
1948년 고려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4·19와 5·16을 계기로 현실에도 적극 참여하여 시집 《역사 (歷史) 앞에서》와 유명한 《지조론》 (志操論)을 썼다. 1963년에는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초대 소장에 취임하여 《한국문화사서설》 (韓國文化史序說), 《한국민족운동사》 (韓國民族運動史), 《한국학 연구》, 《채근담》 등의 논저를 남겼다.
○ 목차
- 시
- 시의 원리
- 문학론
- 수필의 미학
- 지조론
- 한국민족운동사
- 한국문화사서설
- 한국학 연구
- 채근담
○ 저자소개 : 조지훈
1920.12.3. 경북 영양군 (英陽郡) 일월면 (日月面) 주곡동 (注谷洞)에서 부 조헌영 (趙憲泳, 제헌 및 2대 국회의원, 6.25 때 납북됨) 모 유노미 (柳魯尾)의 3남 1녀 가운데 차남으로 출생.
1925.~1928. 조부 조인석 (趙寅錫)으로부터 한문 수학 (修學), 영양보통학교에 다님.
1929. 처음 동요를 지음. 메테를링크의 〈파랑새〉, 배리의 〈피터팬〉,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 등을 읽음.
1931. 형 세림 (世林;東振)과 ‘꽃탑’회 조직. 마을 소년 중심의 문집 〈꽃 탑〉 꾸며냄.
1934. 와세다대학 통신강의록 공부함.
1935. 시 습작에 손을 댐.
1936. 첫 상경 (上京), 오일도 (吳一島)의 시원사 (詩苑社)에서 머무름. 인사동에서 고서점 (古書店) ‘일월서방’ (日月書房)을 열다. 조선어학회에 관계함. 보들레르, 와일드, 도스토예프스키, 플로베르 읽음. 〈살로메〉를 번역함. 초기 작품〈춘일〉 (春日), 〈부시〉 (浮屍) 등을 씀. “된소리에 대한 일 고찰” 발표함.
1938. 한용운 (韓龍雲), 홍로작 (洪露雀) 선생 찾아봄.
1939. 《문장》 (文章) 3호에 〈고풍의상〉 (古風衣裳) 추천받음. 동인지 《백 지》 (白紙) 발간함 〔그 1집에 〈계산표〉 (計算表), 〈귀곡지〉 (鬼哭誌) 발표함〕. 〈승무〉 (僧舞) 추천받음 (12월).
1940. 〈봉황수〉 (鳳凰愁) 추천받음 (2월). 김위남 (金渭男;蘭姬)과 결혼함.
1941. 혜화전문학교 졸업 (3월). 오대산 월정사 (月精寺) 불교강원 (佛敎講院) 외전강사 (外典講師) 취임 (4월). 상경 (12월).
– 芝薰 趙東卓 先生 年譜
1942. 조선어학회 〈큰사전〉편찬원 (3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심문받음 (10월). 경주를 다녀옴. 목월( 木月)과 처음 교유.
1943. 낙향함 (9월).
1945. 조선문화건설협의회 회원 (8월). 한글학회 〈국어교본〉 편찬원 (10월). 명륜전문학교 강사 (10월). 진단학회 〈국사교본〉 편찬원 (11월).
1946. 경기여고 교사 (2월). 전국문필가협회 중앙위원 (3월). 청년문학가협회 고전문학부장 (4월). 박두진 (朴斗鎭), 박목월 (朴木月)과의 3인 공저 《청록집》 (靑鹿集) 간행. 서울여자의전 (女子醫專) 교수 (9월).
1947.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창립위원 (2월). 동국대 강사 (4월).
1948.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교수 (10월).
1949. 한국문학가협회 창립위원 (10월).
1950. 문총구국대 (文總救國隊) 기획위원장 (7월). 종군 (從軍)하여 평양에 다녀옴 (10월).
1951. 종군문인단 (從軍文人團) 부단장 (5월).
1952. 제2시집 《풀잎 단장 (斷章)》 간행.
1953. 시론집 《시의 원리》간행.
1956. 제3시집 《조지훈 시선》 간행. 자유문학상 수상.
1958. 한용운 (韓龍雲) 전집 간행위원회를 만해 (萬海)의 지기 및 후학들과 함께 구성함. 수상집 (隨想集) 《창에 기대어》간행.
1959. 민권수호국민총연맹 중앙위원. 공명선거 전국위원회 중앙위원. 시론집 《시의 원리》 개정판 간행. 제4시집 《역사 앞에서》 간행. 수상집 《시와 인생》 간행. 번역서 《채근담》 (菜根譚) 간행.
1960. 한국교수협회 중앙위원. 세종대왕 기념사업회 이사. 3.1독립선언 기념비건립위원회 이사. 고려대아세아문제연구소 평의원.
1961. 세계문화 자유회의 한국본부 창립위원. 벨기에의 크노케에서 열린 국제시인회의에 한국대표로 참가. 한국 휴머니스트회 평의원.
1962. 고려대 한국고전국역위원장. 《지조론》 (志操論) 간행.
1963.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초대 소장. 《한국문화사대계》 (韓國文化史大系) 제6권 기획. 《한국민족운동사》 집필.
1964. 동국대 동국역경원 위원. 수상집 《돌의 미학》 간행.《한국문화사대계》 제1권 〈민족, 국가사〉 간행. 제5시집 《여운》 (餘韻) 간행. 《한국문화사서설》 (韓國文化史序說) 간행.
1965.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大東文化硏究院) 편찬위원.
1966. 민족문화추진위원회 편집위원.
1967. 한국시인협회 회장. 한국신시60년 기념사업회 회장.
1968. 5월 17일 새벽 5시 40분 기관지 확장으로 영면 (永眠). 경기도 양주군 마석리 (磨石里) 송라산 (松羅山)에 묻힘.
1972. 남산에 ‘조지훈 시비’가 세워짐.
1973.《조지훈 전집》 (全 7권)을 일지사 (一志社)에서 펴냄.
1978.《조지훈 연구》 (金宗吉 등)가 고려대학교 출판부에서 나옴.
1982. 향리 (鄕里)에 ‘지훈 조동탁 시비’를 세움.
.가족사항
미망인 김위남 (金渭男) 여사
장남 광열 (光烈,미국 체류) 자부 고부숙 (高富淑)
차남 학열 (學烈, 성산양행 상무이사) 자부 이명선 (李明善)
장녀 혜경 (惠璟) 사위 김승교 (金承敎)
삼남 태열 (兌烈, 외무부 통상2과장) 자부 김혜경 (金惠卿)
○ 출판사 서평
지훈 (芝薰) 조동탁 (趙東卓, 1920~1968)은 소월 (素月)과 영랑 (永郞)에서 비롯하여 서정주 (徐廷柱)와 유치환 (柳致環)을 거쳐 청록파 (靑鹿派)에 이르는 한국 현대시의 주류를 완성함으로써 20세기의 전반기와 후반기를 연결해 준 큰 시인이다.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지훈이 차지하는 위치는 어느 누구도 훼손하지 못할 만큼 확고부동하다.
문학사에서 지훈의 평가가 나날이 높아가는 것을 지켜보며 기뻐해 마지 않으면서도, 아직도 한국 근대정신사에 마땅히 마련되어야 할 지훈의 위치는 그 자리를 바로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가 하는 걱정이 없지 않다. 매천 (梅泉) 황현 (黃玹)과 만해 (萬海) 한용운 (韓龍雲)을 이어 지훈은 지조를 목숨처럼 중히 여기는 지사의 전형을 보여 주었다. 서대문 감옥에서 옥사한 일송 (一松) 김동삼 (金東三)의 시신을 만해가 거두어 장례를 치를 때 심우장 (尋牛莊)에 참례 (參禮)한 것이 열일곱 (1937년)이었으니 지훈이 뜻을 세운 시기가 얼마나 일렀던가를 알 수 있다.
지훈은 민속학과 역사학을 두 기둥으로 하는 한국문화사를 스스로 자신의 전공이라고 여기었다. 우리는 한국학의 토대를 마련한 지훈의 학문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조부 조인석 (趙寅錫)과 부친 조헌영 (趙憲泳)으로부터 한학과 절의 (節義)를 배워 체득하였고, 혜화전문과 월정사에서 익힌 불경과 참선 또한 평생토록 연찬하였다. 여기에 조선어학회의 큰사전 원고를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익힌 국어학 지식이 더해져서 형성된 지훈의 학문적 바탕은 현대교육만 받은 사람들로서는 감히 짐작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넓고 깊었다.
지훈은 6.25동란중에 조부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부친과 매부가 납북되고 아우가 세상을 뜨는 비극을 겪었다. 《지조론》에 나타나는 추상 같은 질책은 민족 전체의 생존을 위해 도저히 참을 수 없어 터뜨린 장렬한 양심의 절규였다. 일찍이 오대산 월정사 외전강사 (外典講師) 시절 지훈은 일제가 싱가포르 함락을 축하하는 행렬을 주지에게 강요한다는 말을 듣고 종일 통음하다 피를 토한 적도 있었다. 자유당의 독재와 공화당의 찬탈에 아부하는 지식인의 세태는 지훈을 한 시대의 가장 격렬한 비판자로 만들고 말았다. 이 나라 지식인 사회를 모독한 박정희 대통령의 진해 발언에 대해 이는 학자와 학생과 기자를 버리고 정치를 하려 드는 어리석은 짓이라고 비판한 지훈은 그로 인해 정치교수로 몰렸고 늘 사직서를 지니고 다녔다. 지훈은 언제고 진리와 허위, 정의와 불의를 준엄하게 판별하였고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엄격하게 구별하여 과감하게 행동하였다. _ 조지훈 전집 서문
지훈은 근면하면서 여유 있고 정직하면서 관대하고 근엄하면서 소탈한 현대의 선비였다. 매천이 절명 (絶命)의 순간에도 ‘창공을 비추는 촛불’ (輝輝風燭照蒼天)로 자신의 죽음을 표현하였듯이 지훈은 나라 잃은 시대에도 “태초에 멋이 있었다”는 신념을 지니고 초연한 기품을 잃지 않았다. 지훈에게 멋은 저항과 죽음의 자리에서도 지녀야 할 삶의 척도이었다. 호탕한 멋과 준엄한 원칙 위에 재능과 교양과 인품이 조화를 이룬 대인을 우리는 아마 다시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른바 근대교육에는 사람을 왜소하게 만드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지훈의 기백은 산악을 무너뜨릴 만했고 지훈의 변론은 강물을 터놓을 만했다. 역사를 논하는 지훈의 시각은 통찰력과 비판력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다정하고 자상한 스승이었기에 지훈은 불의에 맞서 학생들이 일어서면 누구보다도 앞에 나아가 학생들을 격려하였다. 지훈은 제자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서로 속마음을 털어놓기도 했고 손을 맞잡고 한숨을 쉬기도 했다. 위기와 동요의 시대인 20세기 후반기에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상처를 지훈은 자신의 상처로 겪어냈다.
지훈은 항상 현실을 토대로 하여 사물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려 하였고 멋을 척도로 하여 인간을 전체적으로 포착하려 하였다. 지훈은 전체가 부분의 집합보다 큰 인물이었다. 지훈의 면모를 알기 위해서는 그의 전체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현대사를 연구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한국현대정신사의 지형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지훈의 전집이 한국현대정신사의 지도를 완성하는 데 기여하리라고 확신하고, 지훈이 걸은 자취를 따르려는 사람들뿐 아니라 지훈을 비판하고 극복하려는 사람들에게도 지훈의 전모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오래 전에 절판된 지훈의 전집을 새롭게 편찬하기로 하였다. 이 전집은 세대를 넘어 오래 읽히도록 편집에 공을 들이었고, 연구자의 자료가 되도록 판본들을 일일이 대조하여 결정본을 확정하였고 1973년판 전집에 누락된 논설들과 한시들을 찾아 수록하였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