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존재에서 존재자로
에마누엘 레비나스, 엠마누엘 레비나스 / 민음사 / 2003.3.28
‘존재에서 존재자로’는 레비나스가 자신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구축하려는 계획 아래 ‘통일적인 단일한 작품’으로 완성한 세 권 중 하나로, 국내에 처음 소개된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포로수용소에서 쓰여진 이 책은, 타자 (他者)를 동일자(나)로 환원하려는 서양 존재론의 전체주의적인 성격에 대한 비판을 그 배경으로 한다.
지금까지의 서양 존재론이 ‘나’ 중심의 이기적인 철학, ‘나’의 이익을 위해 타자를 지배하는 “전쟁의 철학”이었다면, 레비나스는 이러한 존재론을 극복하고 타자에 대한 윤리적 책임성 속에서 궁극적으로 내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찾고자 하는 ‘평화의 철학’을 설파한다.
레비나스의 개념을 이해할 수 있도록 유의할 주요 개념, 다른 외국 번역판과 비교한 용어 번역 등을 자세하게 주로 달았으며, ‘레비나스-하이데거-우리말 개념 대조표’ 등을 부록으로 넣어 이해를 돕고 있다.
○ 목차
서문
제2판 서문
제3판 서문
서론
1장 존재와 순간의 관계
1. 존재와의 관계
2. 피로와 순간
2장 세계
1. 지향들
2. 빛
3장 세계 없는 존재
1. 이국 정서
2. 존재자 없는 존재
4장 자기 정립
1. 불면
2. 자리 잡기
(1) 의식과 무의식
(2) 여기
(3) 잠과 장소
(4) 현재와 자기 정립
(5) 현재와 시간
(6) 현재와 ‘나’
(7) 현재와 자리
(8) 자기 정립의 의미
(9) 자기 정립과 자유
3. 시간을 향해서
(1) 실체로서의 ‘자아’와 인식
(2) 동일화 및 자기와의 결부로서의 ‘자아’
(3) 자유의 사유와 시간
(4) 속죄의 시간과 정의의 시간
(5) ‘나’와 시간
(6) 시간과 타자
(7) 타자와 함께함과 타자와 얼굴을 마주 대함
결론
부록
번역어에 대해서
레비나스 연보: 생애와 작품`
(옮긴이 해제) 타인과 초월
○ 저자소개 : 에마뉘엘 레비나스, 엠마누엘 레비나스 (Emmanuel Levinas, 1906 ~ 1995)
에마뉘엘 레비나스 (Emmanuel Levinas)는 리투아니아에서 유태인 부모 아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3년 프랑스로 유학해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수학했고, 1928~1929년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후설과 하이데거로부터 현상학을 배운 뒤, 1930년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후설 현상학에서의 직관 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39년 프랑스 군인으로 2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어 종전과 함께 풀려났다. 1945년부터 파리의 유대인 학교(ENIO) 교장으로 오랫동안 일했다. 이 무렵의 저작으로는 『시간과 타자』(1947), 『존재에서 존재자로』(1947), 『후설과 하이데거와 함께 존재를 찾아서』(1949) 등이 있다.
1961년 첫번째 주저라 할 수 있는 『전체성과 무한』을 펴낸 이후 레비나스는 독자성을 지닌 철학자로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1974년에는 그의 두 번째 주저 격인 『존재와 달리 또는 존재성을 넘어』가 출판되었다. 그 밖의 중요한 저작들로는 『어려운 자유』(1963), 『관념에게 오는 신에 대해』(1982), 『주체 바깥』(1987), 『우리 사이』(1991) 등이 있다. 레비나스는 기존의 서양 철학을 자기중심적 지배를 확장하려 한 존재론이라고 비판하고 타자에 대한 책임을 우선시하는 윤리학을 제1철학으로 내세운다. 그는 1964년 푸아티에 대학에서 강의하기 시작하여 1967년 낭테르 대학 교수를 거쳐 1973년에서 1976년까지 소르본 대학 교수를 지냈다. 교수직을 은퇴한 후에도 강연과 집필 활동을 계속하다가 1995년 성탄절에 눈을 감는다.
– 역자 : 서동욱
벨기에 루뱅 대학교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대 유럽 철학, 예술 철학 등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현재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차이와 타자』, 『들뢰즈의 철학』, 『일상의 모험』, 『익명의 밤』, 『철학 연습』, 『생활의 사상』 등을 쓰고 『싸우는 인문학』, 『미술은 철학의 눈이다』 등을 엮었다.
○ 출판사 서평
이 책은 레비나스가 자신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구축하려는 계획 아래 ‘통일적인 단일한 작품’으로 완성한 세 권 중 하나로, 레비나스가 직접 쓴 것으로는 국내에 처음 소개된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포로수용소에서 쓰여진 이 책은, 타자(他者)를 동일자(나)로 환원하려는 서양 존재론의 전체주의적인 성격에 대한 비판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레비나스는 인간이 타인에 대한 윤리적인 책임을 상실하고, 타인을 자신의 지배 아래 종속시키기 위해 전체주의적인 이념을 강요하는 일이 어떻게 생길 수 있는지 물었다. 그것은 단순히 정치 경제적인 비판이나 휴머니즘적인 대안으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닌, 서양 철학의 바탕에서 유래한 필연적인 결과였다. 이 책에서 레미나스는 주체의 계산과 규정 아래 환원되지 않는 ‘타자의 얼굴’을 말하면서, 이 무한한 타자를 통한 ‘나의 초월’을, 윤리적 책임 곧 구원이 되는 순간을 말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주요 개념 및 다른 외국 번역판과 비교한 용어 번역 등을 자세하게 주로 달았으며, ‘레비나스-하이데거-우리말 개념 대조표’ 등을 부록으로 넣었다.
○ 독자의 평 1
내가 여기에 ‘있음’ 혹은 그대가 거기에 ‘있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있음’이라고 하는 ‘존재’의 본질을 파악하기위해 레비나스는 존재자가 없는 존재에 대한 고찰에서 시작한다.
(존재)그것은 존재자라고 하는 아무것도 떠맡지 않은 익명적 존재, 존재자들도 존재하지 않는 존재, 끊임없는 ‘소란’ 블랑쇼의 은유를 다시 쓰자면, ‘비가 온다’, ‘밤이다’ 등과 같은 비인격적인 ‘있음’이다. 이 ‘있음’은 하이데거의 ‘있음’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하라니, 이건 무슨 말인가. 내 존재와 나의 있음이 분리될 수 있는 것인가. 어떻게 또는 왜 존재자를 구분하라는 말인가. 그 구분의 시도는 한없이 그리고 처음부터 회의적이다. 깊은 회의에서 시작한 이 책의 독서는 처음부터 잘 읽혀지지 않는다. 그것이 번역에서 가독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있는 듯하고, 철학에 대한 나의 독서력에 문제가 있기도 하겠고, 흥미나 관심과도 관련이 있는듯하다. 하여간 읽기 어려운 문장의 연속에서 현기증이 나고 구토가 날 지경이 되었다. 그것은 비단 나만의 문제가 아닌 것에 겨우 안도를 느껴야 할 것인가. 레비나스 역시 이 문제에 현기증이 난다고하니 말이다.
존재한다라는 동사의 공허함에 몰두할 때 사유는 현기증 같은 것을 느낀다. 이 동사는 오로지 그것이 분사적 형태(존재자)를 띨 때만, 즉 존재하는 것을 통해서만 언급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된다.(19 쪽)
존재를 지배하는 존재자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존재사건, 존재 일반이란 무엇인가. 레비나스는 존재를 현재의 시간개념과 자리의 장소개념과 연관을 시키고 존재의 일반 개념을 그 비인격성속에서 접근하려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인간 정신성에서 본질적인 사실은 세계를 구성하는 사물들과 우리가 맺는 관계 속에 있지 않다. 오히려 인간 정신성에서 본질적인 것은 존재가 있다는 사실 자체 및 이 단순한 사실의 꾸밈없음과 우리가 지금부터 유지하는 관계를 통해서 규정된다. 그리고 이 관계는 우리의 존재를 통해서 생겨난다는 것 등이다. (24쪽)
레비나스의 존재의 사유는 하이데거의 비극적인 존재와는 좀 다르다. 하이데거의 존재는 인간의 내던져진 유한성, 아무것도 없음 즉 무에 존재한다는 것에서 비극적인것이고, 존재의 불안은 이 무에 대한 이해로 비롯되므로 불안이 없는 존재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설령 불안 없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무한한 존재이며 이것이 그의 ‘존재와 무의 변증법’과 관련한다.
반면에 레비나스의 존재는 우리를 전적으로 부여잡고 있어서 생기는 두려움과 죽음이 해결할 수 없는 것을 감추고 있는 존재에 대한 고찰이라는 면에서 차이가 있는 듯하다.
있음이 우리를 전적으로 부여잡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무와 죽음을 가볍게 받아들일 수 없으나 여전히 두 가지 이유로 두려움에 떤다. 무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가 존재 안에 연루되어 있음을 표시해줄 뿐이다. 존재의 유한성 때문이 아니라, 존재 바로 그 자체 때문에 죽음이 해결할 수 없는 비극을 존재는 자기 안에 감추고 있다.
존재란 무엇인가?하는 존재에 관한 물음은 존재의 낯섦 속에서 존재에 대한 경험 자체이다. 그러므로 물음은 존재를 떠맡는 방식이다. 이런 까닭에 존재에 대한 물음은 대답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는 대답없이 존재하는 것이고 대답을 계획할 수도 없다. 존재에 대한 물음은 존재와의 관계를 현시하는 자체이다. 존재자와 결합 전의 존재는 본질적으로 낯선 것이며 우리의 이해를 거역하며, 우리를 숨막히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레비나스는 존재의 악이라 규명한다. 만일 철학이 존재에 대한 물음을 한다면 철학은 존재를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존재를 파악하기 위해서 권태를 살펴본다. 권태란 무엇인가. 권태는 존재자를 거부하고 싶은 망설임이며, 존재함에 대한 거부의 현상이 실현되는 방식이다. 왜냐하면 존재에 빛이 한번 빛나는 것과 같은 한 순간의 시간이나 공간을 말하는 것이므로 그 순간에 그 곳에 거하는 존재자는 뭔가 ‘하고있음’이며, 어떤 열망이며 그것을 거부하고 떠나고 싶어하는 것이 권태인 것이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해야한다. 무엇인가 착수하고 열망해야한다. 판단하기를 중지해 버린 채 행위하고 열망하기를 기권해 버리는 완전한 회의론자의 그릇된 미소에도 불구하고 존재함에 대한 그 계약의 의무는 피할 길 없고 해야한다는 형식으로 부과된다. 반드시 무엇인가 행위하고 착수해야 한다는 점의 근본에 위치한 어떤 영혼처럼 현재는 이 행위와 착수의 불가피성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태는 이 궁극적인 의무에 대한 불가능한 거부이다. 권태 속에서 우리는 더욱 아름다운 곳을 동경하면서, 존재의 이런저런 모습들 가운데 하나로부터가 아니라 존재 자체로부터 도피하고자한다. 여행 안내서도 없고 기한도 정해지지 않은 도피, 그것은 어느곳엔가 정박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도피에서는 보들레르가 말하는 진정한 여행자처럼 오로지 떠나기 위한 떠남이 관건인 것이다.(35쪽)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 수록된 ‘여행’에서 그는 “그런데 진정한 여행자들은 떠나기위해 떠나는 자들이다.”라 했다. 존재에서 떠나는 존재자의 모습에 우리는 권태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무기력은 차이가 있다. 무기력은 한가함이나 주저함이나, 혹은 휴식과는 다르다. 무기력은 아침에 일어나야하는 의무와 침대밑으로 다리를 내려놓는 일 사이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레비나스는 설명한다. 이는 힘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육체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도 아니며 다만 일어나 다리를 내려놓은 수고를 하기 싫어하는 것이다.
무기력은 시작할 수 없음이다. 또는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무기력은 시작의 달성이다. 아마도 무기력은 형성되어 가고 있는 행위에 내재한다. 그것은 분명 잘못 포장해 울퉁불퉁한 도로 위에서처럼, 각각이 다시 시작되는 그런 순간들을 통해서 흔들거리며 굴러가는 샐행이다. 일은 진행되지 않고 익숙해지지 않으며 자꾸 중단된다. 아 자꾸 중단되는 것, 즉 불연속성이 아마도 일의 본성 자체일 것이다. (37쪽)
존재자의 열망은 ‘해야만 한다’가 핵심이며 이는 ‘존재해야만 한다’가 선행해야 하는 것이다.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에 알아챔과 동시에 행위가 시작되며 행위는 존재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압도적인 의무는 피로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피로, 특히 쉽게 말해서 신체적인 피로에 대해서 말하자면, 우선 어떤 경직됨, 어떤 둔감해지는 마비, 어떤 식이든 움추려들게 하고 마비하게 하는 어떤것이다. 수고와 노동속에만 피로가 있다. 손으로 뭔가를 잡고 있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지 않기위해서 부여잡는 것에는 피로가 있다. 그 나른함으로 존재해야한다는 것을 포기하고 나른함, 그 피로에 몸을 맡기게 되면 신체적으로는 잠이 드는 것이고, 손에 들것은 놓쳐버리게 되는 것이며, 애인은 떠나보내게 된다. 이렇게 잠을 통해서 존재를 중지시키는 힘이 구성될 수 있다.
달성해야할 목적이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위해 수고하고 노동을 하는 강요와 강제를 갖게되고 우리는 노동에 자신을 묶어두게 된다. 우리는 그 작업에 우리의 존재를 맡기기 되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자유에도 불구하고 수고는 인간에게 형벌을 가하게 되는 것이고 이때 존재는 피로와 아픔의 갈등을 겪는 것이다. 피로는 존재함에 대해서 존재자가 지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연은 현재에 구성된다. 피로는 존재에서 존재자의 출현이다. 그렇다고 피로가 존재함의 중지가 아니라 이 머뭇거림은 순간에 존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포착하게 하는 순간인 것이다. 수고는 존재의 예속화라는 점에서 피로와 차이가 있다.
수고는 분명히 유죄 판결이다. 왜냐하면 수고는 피할 수 없는 하나의 현재로서 순간을 떠맡기 때문이다. 수고는 이 영원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하나의 불가능성이다. 왜냐하면 수고는 전적으로 순간을 떠맡고 있고, 순간 속에서 수고는 영원성의 진지함에 직면하기 때문에 즉 수고는 유죄 판결인것이다. —보들레르에게 존재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것이자 동시에 고통 속에 내던저진 것으로 나타난다. 끝없는 고통의 신음! 아마도 우리는 어떤 미지의 고장에서 다루기 힘든 땅을 파헤치고 우리는 헐벗고 피 흘리는 발 아래 무거운 가래를 박아넣어야 하리라. 그러므로 수고란 주인이 노예에게 속박의 표시를 남기기 위해 선호하는 그런 형식인 것은 아니다. 노동에서 가장 자유로운 동의가 있으며 가장 자발적인 수고 안에 누가 대속할 수 없고 모면할 수 없는 사건이 있는 것이다. 수고를 노예의 특성으로 만드는 것은 수고가 내포하고 있는 아픔이 아니다. 수고는 그 수고의 순간에 예속화되는 사건이기 때문에 아픔을 내포하는 것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존재를 떠맡는 일을 의미하며 존재자의 출현과 동일시 하게 된다면, 존재자의 존재는 본질적으로 행위이다. 따라서 심지어 비활동적일지라도 존재자는 행위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욕망하는 것, 전적으로 욕망에 몰입하는 것, 욕망에 무섭도록 솔직한 것, 욕망의 대상이 있는 것은 존재자가 가장 존재를 잘 떠맡게 하는 방법인 것이다. 그러나 욕망이 허기와 혼동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자에게서 체험하는 괴로움은 경제적인 용어로 소유라고 불리는 것에 선행할 뿐아니라, 소유 그 자체 속에서 다시 발견된다. 난잡한 애무에는 (사랑하는 자에 대한)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고백이 담겨있으며, 폭력은 실패하고 소유는 거부된다. 또한 키스와 물어뜯음 속에는 ‘먹는다’는 행위의 흉내(시뮬라크르)라는 어쩌구니없는 비극이 자리 잡고 있다. 사람들이 욕망의 본성을 무엇보다도 무엇인가 찾아 헤매는 허기와 혼동하여 잘못 이해해 왔으며 또 그런식으로 욕망의 본성을 없음에 대한 허기로 발견해 왔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런 욕망의 주체이며 욕망에 몰입하는 것이 가장 존재를 잘 떠맡는 방법일지라도 잘 존재한다는 것은 지향이다. 후설에 따르면 이 존재의 지향은 소유를 향하지만 소유물에 의해서 매몰되어 버리지 않는다. 자아는 대상에 대해 거리를 유지하며 지향을 향유와 구별하게 해주는 보류의 태도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간격을 유지하고 있는 소유, 양손을 자유롭게 한 상태에서의 소유가 지향의 지향성을 이룬다고 한다. 욕망의 존재가 은밀하게 존재할 때 살짝 나타나는 존재의 모습은 매력적일 수 있는 것이다.
옷을 입지 않은 존재는 그의 존재가 다른 곳에 있는 것처럼, 이면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잠옷 사이에 젖가슴이 내비치고 있을 때 깜짝 놀라는 것처럼 존재한다.
따라서 주체는 이미 모든 대상에서 자유로와야한다. 어떤 사건속에 얽혀들지 않는 힘을 유지하면서 사건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며, 대상에서 물러서는 방식이며, 모든 것에서 떨어져나와 오로지 자기로 머물수 있음이다. 이렇게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에 존재함에 있어서 머뭇거림이며 간격이다. 우리의 의식에 대해, 스스로를 중지시키는 의식의 힘에 대해서, 무의식에 빠져드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무의식에서 조차 자신을 연기하는 방식에 대해서 존재론적 모험의 역할이 있는 것이다.
존재함의 한복판에서 이루어지는 행동, 변화, 흐름, 명사가 되는 사건이 존재자의 역할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을 쪼개어 그 한 순간에 빛의 한번의 번쩍임처럼 일어나는 사건이다. 시간의 흐름을 설명하는 이미지, 흐름의 이미지는 시간이 존재에 작용한 것이지 시간 자체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은 강물처럼 흐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현재는 항상 예외적이며, 그 현재의 상황속에 우리는 순간의 이름을 부여할 수 있고, 그 순간에 일어나는 사건을 명사로 사유하며 그 지향적 특성이 있는 이 사건의 주도자이거나 혹은 부인하거나 거부하거나 피로해하거나 무기력해하거나 욕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인 하는 것,’ ‘거부하는것,’ ‘피로,’ ‘무기력,’ 그리고 ‘욕망’이 존재자를 분석하고 또는 이해하는 방식이 되는 것이다.
순간은 그것에 선행하거나 후행하는 다른 순간들과 관계를 맺기 이전에 존재를 획득하기 위한 하나의 행위를 내포하고 있다. 각각의 순간은 하나의 시작이며 탄생이다. 우리가 엄밀히 현상적 차원에 집중하고 말브랑슈가 순간 속에서 발견한 초재적 관계는 제쳐둔다고 해도 순간이 그 혼자만으로 하나의 관계, 하나의 정복이라는 점은 언제나 변함이 없다. 이때 이 관계는 미래나 과거와 관계하지 않으며 이 과거나 미래 속에 자리잡은 어떤 존재나 사건과도 관계하지 않는다. 시작이자 탄생으로서의 순간은 하나의 독자적인 관계, 존재와의 관계, 존재에로의 시작이다.
그렇게 해서 어떤 잘게 부서진 한 순간의 시간에 그리고 한 존재에 존재자가 거하게 되면 존재자는 정립하게 되며 정립된 존재자는 존재론적인 의미를 연역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정립을 통해 익명적인 ‘있음’ 익명적인 ‘존재’는 그것이 가졌던 있음의 성격을 잃어버리고 존재자 즉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다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존재자는 존재의 숙명을 지배하게 되는것이고, 존재는 존재자의 속성이 된다. 존재하는 누군가가 존재를 인수하고 떠맡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존재는 그의 ‘존재,’ 즉 그의 ‘존재자’가 되는 것이다. _ 2012. 3.
○ 독자의 평 2
“탈출은 그 자신으로부터의 일탈에 대한 필요이다. 즉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모면할 수 없는 관계를 부수는 것, 자아가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뜨리는 것에 대한 필요이다.’ “
빛은 빛나며 자연적으로 이해된다. 빛은 이해의 사실 자체이다. … 빛은 밤과 섞여 있다. … 우리는 밤처럼 숨막히는 존재의 속박을 감내한다. 그러나 존재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것이 존재의 악(le mal)이다.
모든 것들과 모든 사람에 대한 권태가 존재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권태가 존재한다. … 권태롭게 하는 것은 우리 삶, 우리 환경의 어떤 특별한 형식이 아니다. … 권태는 존재 자체를 겨냥하고 있다. … 권태 속의 존재는 계속 존재함에 연루되어 있음을 상기시켜주는 자와 같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무엇인가 착수해야 하고 열망해야 한다. 판단하기를 중지해 버린 채 행위하고 열망하기를 기권해 버리는 완전한 회의론자의 그릇된 미소에도 불구하고, 그 계약의 의무는 피할 길 없는 ‘해야 한다’로 부과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태는 이 궁극적인 의무에 대한 불가능한 거부이다.
시작의 순간에는 이미 잃어버리는 무언가가 있다. 왜냐하면 이미 소유된 어떤 것이 있기 때문인데, 그 소유된 것이란 오로지 이 순간 자체이다. 시작은 단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으로 복귀하는 가운데 스스로를 소유한다. … 우리는 여행 중인 것처럼 존재한다.
실패는 모험의 일부를 이룬다. 중단된 것은 놀이에서와 달리 무 속으로 침몰해 버리지 않는다. 다시 말해 행위는 존재 안에 기입된 것 그 자체이다. 그리고 행위로부터의 물러섬으로서 무기력은 존재 앞에서의 머뭇거림, 즉 존재함에 대한 무기력이다.
이 상태가 잠이나 졸음이 쏟아지는 상태가 아닌 한에서 그것은 평화가 아니다. … “살려고 해봐야 한다.”는 <해변의 묘지>의 한 구절인데, 이 말은 근심처럼 스며들어 오며, 그럼으로써 존재에 대한 관계와 행위에 대한 관계가 가장 부드러운 무기력의 한복판에서 노출된다. 무기력이 우리를 휩쓸어버리고 따분함은 무게를 더하며 지루하게 만든다.
존재는 자신을 지칠 줄 모르고 따라다니는 그림자를 던지고 있다. 자신의 이미지를 사랑했던 나르키소스의 순진함과 달리 존재는 자신의 그림자에 스스로의 모습을 비추어 보지 못한다. 대신에 존재는 그림자와 더불어 자기의 순진함의 실패를 깨닫는다.
존재가 질질 끌고 다니는 무거운 중량은 바로 그 자신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 무거운 중량은 존재의 여행을 복잡하게 만들어버린다. 존재는 그 자신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그 자신의 모든 것을 짊어지고 다닌다.
무기력은 짐으로서의 존재 자체에 대한 기쁨 없는 무력한 반발이다. 그것은 산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인데, 그 두려움을 느끼는 일 역시 삶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