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존재의 이유 : 전도서 묵상
자끄 엘륄 / 대장간 / 2016.5.10
- 엘륄, 40년 전도서 묵상에서 참된 지혜를 만나다
전도서 묵상과 인간의 존재와 역사에 관한 성찰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는 현대의 질문과 “어떤 유익이 있는가?”라는 전도서의 질문 간의 모순은 ‘무엇에’를 ‘누구에게’로 바꾸면 해소된다. 누구에게 그게 소용이 있는가? 이는 전도서의 본문들이 주는 교훈이다. 우선적인 관심이 ‘누구’라는 인간에게 있다. ‘누구’라는 인격, 행위자, 살아있는 존재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다. 전도서는 ‘무엇’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것은 중립적인 것으로 사물이고 기구이고 소유물이고 수단으로서 인간이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인식하는 대상이다. 전도서는 우리의 질문들의 중심을 어긋나게 한다. 왜냐하면 깊은 성찰을 통해서 전도자가 한 것이 바로 이 질문의 전환이기 때문이다.
이 질문의 전환을 통해서 인간을 향한 전도서의 메시지가 임한다. 네가 너 자신을 창조주로 착각할 때마다, 너는 파괴하고 파멸시키는 존재가 된다. 반면에 인간이 침묵과 신중함과 겸손 속에서 은밀히 일하는 창조주의 형상을 따라서 행한 일은 다 긍정적이고 유익하고 활력을 준다. 인간이 자신을 창조주로 착각하여 권력으로 행한 일은 다 공허감을 불러일으키는 허무한 일이다.
여기서 전도자는 가차 없이 급진적으로 선언한다.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헛된 것이고 연기와 안개와 구름 같은 것이다. 덧없고 유사 (流砂)와 같은 우리의 삶에서 유일하게 안정적이고 확고한 것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라”는 말씀이 존재한다. 모든 인간의 존재는 이 말씀에 귀착된다. 다시 말해서 이 말씀에서 떠나있는 모든 사람은 아무런 존재도 아니다. 그는 아벨이다. 여기에 더도 없고 덜도 없고 절충도 없다. 인간을 존재하게 하는 것은, 인간에게 진리와 실재를 부여하는 것은, 돌연히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는 것은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이다. 그것이 인간의 전부이다.
할 말은 다 하였다.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라. 그분이 주신 계명을 지켜라.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해야 할 의무다” [전도서 12:13 새번역]
○ 목차
역자 서문
권두에 붙이는 논쟁적 후기
- 이 책의 저술 동기
- 또 하나의 역설
- 기존 연구의 전제들
- 전도서의 기원에 관한 논쟁
- 전도서의 저자
- 지혜의 성문서
- 전도서의 구도
- 모순성의 원리
- 전도서와 숙곳 절기
제1부 헛되고 헛되다
- ‘헤벨’
- 진보
- 묵상
- 권력
- 돈1
- 일
- 행복
- 선
- 인간의 응답
- 종합1
제2부 지혜와 철학
- 지혜와 실존
- 아이러니
- 참된 지혜
- 지혜의 시험
1) 말
2) 소유
3) 남자와 여자
4) 종합
5) 에필로그266
제3부 하나님
- 엘로힘
- 모순
- 베푸는 하나님
- 하나님을 향한 태도
- 완성
부록-자끄 엘륄과의 대담
엘륄 저서 및 연구서
○ 저자소개 : 자끄 엘륄 (Jacques Ellul, 1912 ~ 1994)
“사고는 세계적으로 행동은 지역적으로”라는 지성인의 행동강령을 말한 프랑스 지성으로, 마르크스의 사회경제학적 접근과 기독교의 가치관을 조화시킨 4개의 박사학위를 가진 학자이자 실천가이다. 1912년 1월 6일 프랑스 보르도에서 태어났다. 1937년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의 연구부장으로 지명되었으나 비시 프랑스 (Vichy France) 정부에 의해 해임되었다. 1936~1939년 사이에 프랑스 정계에 투신하여 활동하였고, 1940~1944년에는 레지스탕스 운동에 열렬히 가담했다. 1953년부터는 프랑스 개혁교회의 총회 임원으로 일하였다.
법학박사인 그는 다수의 책을 저술하여 사회학자, 신학자, 철학자로서 널리 알려졌다. 보르도대학에서 오랫동안 교수로 근무하였으며 ‘신앙과 삶’의 편집주간으로 활동하였다. 사후인 2002년 이스라엘의 얏 바셈 (Yad Vashem)재단에 의해 나치 치하의 유대인 가족들을 위험을 무릎쓰고 도와준 것이 밝혀져 “열방가운데 의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기술 (technique)에 대한 개념으로 현대사회를 설명하였으며, 법과 제도, 자유에 대한 탁월한 식견을 보였다. 또한 기독교인으로서의 다양한 저서를 집필하였는데, 한국에는 『세상속의 그리스도인』 (1990), 『뒤틀려진 기독교』(1991), 『하나님이냐 돈이냐』(1992) ,『의심을 거친 믿음』, 『머리 둘 곳 없던 예수』 등 주로 신학관련 서적이 소개되었다. 최근에는 기술체계, 마르크스와 예수 등 사회와 역사 분야의 서적이 소개되고 있으며, 특히 『이슬람과 기독교』(2009)는 엘륄의 유작으로 영미권보다 한국어로 먼저 번역 소개된 바 있다.
– 역자 : 김치수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1대학에서 수학하면서 영국과 프랑스의 국제관계사를 연구하였다. 뒤늦게 회심하면서, 보이는 세계의 역사가 아닌, 보이지 않는 세계의 역사에 몰두하게 되었다. 귀국하여 장신대 신대원에 입학하고 신학 수업을 받았다. 현재 한 작은 가정교회를 섬기며 그리스도 안에서 내적 여정을 돕는 교회를 모색하고 있다.
자끄 엘륄의 『우리의 기도』『개인과 역사와 하나님』을 우리말로 옮겼다.
○ 출판사 서평
- 자끄 엘륄이 말하는 이 책의 저술 동기
오늘날 전도서에 관해 또 하나의 책을 쓴다는 것은 유별나게 헛된 욕심을 가진 사람이거나 극히 무분별한 사람에게나 가능한 일이리라! 참고도서 목록만 해도 수많은 장이 할애되어야 하고, 하나같이 훌륭한 학자들이 쓴 주석들의 목록만 해도 수십 장에 이르는데 말이다 (라우하 [A. Lauha]는 200여 쪽을 인용하고 있다). 나는 학자도 주석가도 해석학자도 신학자도 아니다. 내가 여기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단지 전도서를 반세기가 넘게 읽고 묵상하며 기도해 왔다는 사실뿐이다. 내가 그토록 깊이 파고들고 또 그만큼 수확을 얻었던 성서 텍스트는 아마도 전도서가 유일할 것이다. 전도서만큼 나에게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건네준 책은 없었다. 여기서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 대화 내용이라고 해두자. 그리고 이 책의 전개 방식은 내가 다른 저서들에서 간혹 취하곤 했던 대학의 학문적인 방식과는 다르다는 점을 독자 여러분에게 미리 예고한다.
대학의 학문적인 방식은 주제에 관한 참고문헌을 작성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가능한 모든 자료들을 다 읽고, 분류 카드에 기록하고, 하나의 기본 구도를 수립한다. 그리고 다른 저자들의 연구 결과들을 확장하거나 또는 반박하는 내용으로 편집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런데 이 책의 전개방식은 정반대가 된다.
나는 미리 다른 관계서적들을 읽어서 예비지식을 습득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전도서의 텍스트와 일대일로 마주하고 싶었다. 히브리어 원문을 보았지만 그것을 읽는데 나는 아주 서툴렀다. 그래서 도움도 받고 점검도 받을 겸해서 9개의 번역판을 보았다. 그리고 나름대로의 텍스트를 써내려갔다. 내가 쓴 것이 외적인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걸 쓴 것은 이미 기존에 습득한 문화와 지식을 가진 개인으로서의 나 자신이지 어떤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다. 나는 아주 오래 전에 코헬레트 [역주] 앞의 일러두기에서 언급한 대로, 여기서는 ‘코헬레트’라는 호칭을 문맥에 맞게 코헬레트, 전도서, 전도서 기자, 지혜자 등으로 옮기기로 한다.
에 관한 몇 가지 논문들을 읽었었다. 『신앙과 삶』(Foi et Vie)에 실린 비셔 (Vischer)의 논문, “전도서와 몽테뉴” (L’Ecclesiaste et Montaigne)는 물론이고 페데르센 (Pedersen), 루티 (Luthi), 폰 라드 (von Rad)의 글들을 보았었다. 나중에 그 이유를 설명하겠지만, 반세기 전부터 전도서에 관해서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내게 있었다. 그래서 30년 전에는 델리취 (Franz Delitszch, Biblische Kommentar uber die poetischen Bu chern, Hohes Lied und Koheleth, 1875.)의 글을 요약하기도 했었다.
그러므로 나의 입장은 중립적일 수 없고 백지상태에서 출발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점점 써야할 시간이 다가오면서 나는 전도서에 관해서 다른 아무 것도 읽지 않도록 스스로 자제했다. 깊이 숙고하여 나만의 텍스트를 완성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눈에 띄는 모든 글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독서 중에 접한 책들 가운데 포드샤르 (Podechard), 스타인만 (Steiann), 바룩 (Barucq), 라우하 (Lauha) 등의 책들이 좀 무덤덤하게 느껴졌다면, 리스 (Lys)의 책과 마이요 (Maillot)의 책은 나로 하여금 모든 걸 포기하게 할 뻔했다. 그 두 책들은 각각의 장르에서 완벽하게 보였다. 리스는 학문과 주석학적인 엄정성과 완결성과 진실성의 모범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서문에서 모든 가설들을 검토하고, 각각의 용어에 관해서 해박한 설명을 쏟아놓으면서, 텍스트를 단어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치밀하게 구성하였다. 마이요는 나에게 번뜩이는 예언자적인 영감과 함께 텍스트에 대한 깊은 통찰을 훌륭하게 보여 주었다.
아주 다르지만 완벽하게 서로 보완하는 그 두 권의 책들을 앞에 두고서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제 나만의 텍스트가 있다. 십여 편이 넘는 주석들을 읽었지만 나는 내가 쓴 텍스트의 한 줄도 고치지 않았다. 이와 같은 나의 방식은 전도서의 말씀에도 들어맞는다고 본다. 경험과 지식을 어느 정도 가졌다면 남들의 말 (참고문헌: Andre Barucq, Ecclesiaste, Paris, Beauchesne, 1968; Aare L. Lauha, Kohelet, Munich, Neukirchener Verlag, 1978; Daniel Lys, L’Ecclesiaste, ou que vaut la vie, Paris, Letouzey, 1977; Alphonse Maillot, “La contestation. Commentaire de l’Ecclesiaste”, in Cahiers du Reveil, Lyon, 1971; E. Podechard, L’Ecclesiaste, Paris, Gabalda, 1912; J. Steinmann, Ainsi parlait Qohelet, Paris, Editions du Cerf, 1955.)을 모방하지 말고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
텍스트를 써가는 가운데 내가 “역사학자들과 주석학자들”의 견해를 넌지시 꺼낸다면, 그것은 보통 어디나 통용되는 사회통념들이거나 일반적인 이론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후에 읽은 훌륭한 책들에 대해서는 많은 각주들을 붙여 표시했다. 나는 그런 각주들 속에 나의 견해를 표명하여 입장을 정리했다. 이와 같이 전개해나간 것이 내가 취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서문이라고 해야 할 제목을 “후기”라고 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다. 또한 “논쟁적”이라고 한 것은 나중에 가서 몇몇 저자들을 비판한 데 따른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이 책의 한계들을 보여준다. 즉, 나는 전도서의 새로운 “주석”이나 “요점”이나 거기서 취합한 종교적 강론을 제시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한 작업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40년 동안 나는 전도서에 관한 실제적 묵상이 내가 마음속에 그리기 시작한 나의 모든 저서들 전체에 대한 적절한 결론이 될 거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그것은 지적이고 활동적인 내 삶의 여정이 끝날 무렵에 가서야 가능할 듯했다. 전도서라는 책은 하나의 결론이지 하나의 출발점일 수는 없다. 나는 그것이 전도서의 말씀에 부합한다고 본다. 전도서의 모든 긍정이나 부정은 일을 다 겪은 후에 일종의 마침표처럼 내려진다. 그것은 결과가 아니라 결론이다. 왜냐하면 내 생각에는 전도서를 기점으로 해서, 또는 전도서 이후로 거기에 덧붙일 만한 말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해서,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이 내가 집필하고자 했었던 모든 책들의 전체적인 서문이라고 한다면, 전도서는 마지막 결론에 해당할 것이다. 사실 나에게 아직 더 많이 쓸 수 있는 여력이 남아있는 것 같지 않다. 내가 마음속에 담아둔 계획을 모두 다 이룰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나님이 허락한다면 한두 권을 더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한두 권은 이미 저술한 책들을 보완하는데 그치고 말 것이다.
○ 독자의 평
우선 엘룰은 전도자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 1:2)를 삶의 의미 없음에 대한 한탄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이를 전도자가 인간의 삶 자체를 본질적으로 간파한 것으로 인간의 삶 너머에 있는 진리를 간접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이를 진지하게 듣는다면, 우리 자신을 결코 세상의 중심에 위치시킬 수 없음을 고백하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그 결과 중요한 문제는 나의 구원이 아니고, 모든 것이 되시고 모든 사람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을 온전히 넘겨 드리는 것이 라고 강조한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