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종교의 본질에 대하여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 한길사 / 2013.8.15
근대 독일의 철학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주저 중 하나이다. 포이어바흐는 헤겔과 마르크스를 잇는 다리 역할과도 같은 유물론/종교철학자이자, 기독교를 필두로 한 종교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가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 면에서 잘 알려진 그의 대표적인 저서 <기독교의 본질>이 그의 초기 사상을 집약하는 저서라면, <종교의 본질에 대하여>는 포이어바흐 후기의 가장 중요한 저술로 꼽힌다.
총 30강으로 구성되어 있는 구성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포이어바흐가 1848년 독일 하이델베르크 시청 강당에서 가진 강연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만큼 대학생과 지식인만이 아닌 일반인 청중까지도 고려한 강연으로 현학적이기보다는 평이하면서도 직설적인 해설이 특징이다.
초반부에서 포이어바흐는 자신의 철학적인 저술을 소개하고, 중반부에서는 정신과 자연의 관계를 논하며, 후반부에서는 종교가 인간의 상상력과 환상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기독교에 관한 충분한 학술적 연구가 뒷받침된 가운데 포이어바흐 특유의 유물론이 종교비판과 어떻게 결합하는지 살펴볼 수 있다.
○ 목차
포이어바흐와 종교철학 /강대석
엮은이의 말
제1강 나의 삶과 철학적 저술들
제2강 나의 종교에 관한 저술들
제3강 신학과 종교의 본질
제4강 종교의 근거로서의 종속감
제5강 자연종교의 본질
제6강 동물숭배와 종교의 관계
제7강 이기주의와 종교의 관계
제8강 종교에서 나타나는 제물의 의미
제9강 인간제물의 의미와 목적
제10강 종교의 근거로서의 자연
제11강 신의 존재에 대한 우주론적 증명
제12강 신의 힘과 자연의 힘
제13강 선한 신과 악한 신
제14강 신과 자연의 합목적성
제15강 섭리와 자연법칙
제16강 신과 자연의 상호배타성
제17강 신학적인 자연해명의 한계
제18강 합리주의와 변신론
제19강 자연종교와 정신종교
제20강 물신주의와 기적신앙
제21강 종교와 상상력
제22강 종교의 근원으로서의 행복욕
제23강 종교와 교양
제24강 종교감은 인간에게 고유한가
제25강 우상숭배와 신숭배
제26강 소원과 기적
제27강 기적신앙과 연관되는 의무와 행복
제28강 종교의 이상
제29강 신과 불멸성
제30강 종교의 본질에 관한 성찰과 그 실천적 의미
포이어바흐의 보충과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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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
○ 저자소개 :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독일의 유물론 철학자이며 종교철학자이다.
남부 독일의 작은 도시 란츠후트에서 법률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하이델베르크 대학 신학과에 입학했으나 맹목적인 신앙의 강조나 합리적인 짜깁기에 불과한 궤변으로 강의를 주도하는 신학 교수들에게 실망하고 베를린 대학으로 옮겨 헤겔 철학을 공부했다.
그후 점차 헤겔 철학에 대해 회의가 생겨 관념론 철학 일반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유물론 철학으로 넘어갔다.
‘죽음과 불멸성에 대한 고찰'(1830) 등의 비판적인 저술 때문에 대학 강단에 설 수 있는 길이 막혀버린 그는 부르크베르크라는 시골에 은거하면서 찰학사, 종교비판, 행복론 등의 광범위한 저술에 전념했다.
주요 저서로는 ‘기독교의 본질’, ‘베이컨에서 스피노자에 이르는 근세철학사’, ‘라이프니츠 철학의 서술과 비판’, ‘피에르 벨’ 등이 있다.
그의 철학 공적은 기독교 및 관념적인 헤겔 철학에 대한 비판을 통해 유물론적인 인간 중심의 철학을 제기한 데 있으며, 이는 뒷날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해 비판적으로 계승되었다.
– 역자: 강대석
1943년 7월 29일 전남 장성출생으로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 및 동대학원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DAAD장학생으로 독일에 유학하여 Heidelberg대학에서 철학, 독문학, 독일사 공부(M.A.Heidelberg)하였고, 스위스 Basel대학에서 철학, 독문학 미학을 연구하였다. 광주 조선대학교 사범대학 독일어과 및 대구 효성여자대학교 철학과 교수를 거쳐 대구 가톨릭대학교 철학교수로 정년퇴임했다.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 창립회원으로 참여해 정년퇴임 때까지 민주화운동에 함께했으며, 통합진보당 대전시당 고문을 역임했고, 자주통일평화번영운동연대(6·15 10·4 국민연대) 상임고문으로 통일운동에 헌신했다. 박근혜 정권시기 일베 회원이 ‘종북좌팔 죄수번호 117’ 딱지를 붙여 고발한 뒤 자택 압수수색을 받고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4년 동안 경찰과 검찰의 조사를 받으면서 암이 발병해 신장을 하나 떼어내는 수술 후 투병생활을 하다가 2021년 2월 24일 밤 타계했다. 지은 책으로 『미학의 기초와 그 이론의 변천』(서광사, 1984), 『서양근세철학 – 베이컨에서 칸트까지』(서광사, 1985), 『니체와 현대철학』(한길사, 1986), 『그리스철학의 이해』(한길사, 1987), 『현대철학의 이해』(한길사, 1991), 『새로운 역사철학』(한길사, 1991), 『유물론과 휴머니즘』(이론과 실천, 1991), 『포이어바흐와 엥겔스』(이론과 실천, 1993), 『예술철학에의 초대』(동녘, 1993), 『예술 감상의 철학〉(문예미학사, 2000), 『김남주 평전』(한얼미디어, 2004),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한 시인 김남주』(작은 씨앗, 2006), 『왜 철학인가?』(중원문화, 2011), 『왜 인간인가?』(중원문화, 2012), 『왜 유물론인가?』(중원문화, 2012), 『니체의 고독』(중원문화, 2014), 『무신론자를 위한 철학』(중원문화, 2015), 『정보화시대의 철학』(중원문화, 2016), 『망치를 든 철학자 니체 vs. 불꽃을 품은 철학자 포이어바흐』(들녘, 2016), 『명언 철학사』(들녘, 2017), 『루소와 볼테르 빛고을 철학포럼』(들녘, 2017), 『사회주의 사상가들이 꿈꾼 유토피아』(한길사, 2018), 『카뮈와 사르트르 금강산 철학포럼』(들녘, 2019), 『유물론의 과거와 현재』(밥북, 2020), 『플레하노프 생애와 예술철학』(사람일보, 2021)이 있다. 역서로는 『칼 야스퍼스, 철학적 자서전』(이문출판사, 1984), 『발터 슈미트 외, 독일근대사』(한길사, 1996), 『이보 프렌첼, 니체』(한길사, 1997), 『G. 비더만, 헤겔』(서광사, 1999), 『포이어바흐, 종교의 본질에 대하여』(한길사, 2006), 『포이어바흐, 기독교의 본질』(한길사, 2008),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한길사, 2011)가 있다.
○ 책 속으로
P.47 : 자연과 직접적인 교제 속에서만 인간은 치유되며 모든 터무니없고 초자연적이거나 반자연적인 이념과 상상을 벗어던질 수 있다.
P.55 : 신학에서는 성스러운 것만이 진리이지만 철학에서는 진리만이 성스럽다.
P.63 : 신학은 인간학이다. 종교의 대상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본질에 불과하다. 또는 인간의 신은 인간을 신격화시킨 본질에 불과하다.
P.66 : 기독교는 바로 태양, 달, 별, 불, 흙, 공기가 아니라 자연과 구분하여 인간의 본질을 규명해주는 힘인 의지, 오성, 의식을 신성한 힘과 본질로서 경배한다.
P.66 : 여러분! 당신들이 말이 완전히 맞소. 나는 나를 비난하는 자들과 조소하는 자들에게 마음 속으로 말했다. 나는 그 자체만으로 존재하고 절대적인 것으로 상상된 인간의 본질이란 하나의 난센스이며 관념론적 괴물이라는 사실을 여러분과 똑같이 또는 여러분 이상으로 더 잘 알고 있소. 그러나 인간의 전제가 되고 인간이 필연적으로 관계하며 그것 없이는 인간의 실존이나 본질을 생각할 수 없는 본질은 여러분이 말하는 신이 아니라, 바로 ‘자연에 불과하오!‘
P
.68 : 나의 이론이나 이념은 그러므로 자연과 인간이라는 두 단어로 요약될 수 있다. 인간의 전제가 되는 본질, 인간의 원인과 근거가 되고 인간의 발생과 존속을 좌우하는 본질은 나에게 신이 아니고, 또 신으로 불리지 않으며 명백하고, 감성적이고, 이중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 말과 본질인 자연이다.
P.69 : 나에게 무엇보다 중요했고 중요한 것은 종교의 어두운 본질을 이성의 횃불로 밝혀주어 인간으로 하여금 마침내 지금까지 그리고 오늘날에도 종교의 몽매성을 인간의 억압에 사용하고 있는 저 모든 인간에 적대적인 세력의 먹이나 노리갯감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P.70 : 나의 강의와 저술의 목적은 다같이 인간을 신학자가 아닌 인간학자로 만들고, 신을 사랑하는 자에서 인간을 사랑하는 자로 만들고, 내세의 수험생에서 현세의 학생으로 만들고, 천상적이고 지상적인 군주제와 귀족제의 종교적 정치적 하인에서 자유롭게 자신감에 찬 지상의 시민을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는 긍정하기 위해 부정하는 것이다. 나는 인간의 참된 본질을 긍정하기 위해서 신학과 종교의 환상적이고 가상적인 본질을 거부할 뿐이다.
P.72 : ‘종속감‘이 종교의 근거이고 이러한 종속감의 근원적 대상이 자연이며 그러므로, 자연은 종교의 제1대상이다. 자연에 대한 공포가 처음으로 세상에 신들을 만들어냈다. 정신적으로 발달한 민족에게도 최고의 신성은 소나기, 번개, 천둥과 같은 최고도의 공포를 인간에게 일으키는 자연현상이 인격화된 것이다.
P.84 : 유신론이나 신학은 바로 인간을 세계와의 결합에서 분리시키고 고립시켜 자연을 넘어서는 오만한 자아나 본질로 만들고 있다. 다시 말하면 자연을 벗어나 있고 초자연적인 본질을 참되고 신성한 본질로 믿는 것과 일치된다. 그러나 종교는 근원적으로 인간이 자연이나 세게와 결합되고 일치된다는 감정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P.219 :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세계는 신 없이 해명될 수 없다. 그러나 바로 그 정반대가 진리다. 신이 있다면 세계의 존재가 해명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경우 세계는 완전히 무용지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계와 자연의 근거를 아무리 다른 곳에서 찾는다 할지라도 자연을 벗어나서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육체적, 자연적, 감성적 실존 이외에 어떤 것도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고 자연을 그 자체로 존재하게 하며 그러므로 자연의 근거에 대한 물음은 실존의 근거에 대한 물음과 일치한다는 것을 인식할 때만 세계와 자연은 해명될 수 있고 그 실존에 대한 합리적인 근거를 우리는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왜, 도대체 어떤 것이 실존하느냐는 물음은 어리석은 질문이다. 그러므로 이전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세계가 신 속에 근거를 갖는다는 것은 훨씬 더 오류이며, 신이 존재한다면 오히려 세계의 근거가 폐기된다.
P.395 : 기독교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인간의 소원을 성취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바로 그 때문에 이루어질 수 있는 인간의 소원을 등한시했다. 기독교는 인간에게 영생을 약속하면서 현세를 망가뜨렸고 신의 도움에 대한 신뢰를 통해서 인간 자신의 힘에 대한 신뢰를 망가뜨렸다. 또한 천상에서의 더 나은 삶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지상에서의 더 나은 삶에 대한 믿음과 그것을 실현하려는 노력을 망가뜨렸다. 기독교는 인간에게 상상 속에서 원하는 것을 부여했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진리와 현실 속에서 인간이 요구하고 원하는 것을 부여하지 못했다.
P.398 : 신이란 추상화되고, 환상적인, 상상력을 통해서 독자화된 인간과 자연의 본질에 불과하다. 유신론은 그러므로 사물과 인간의 구체적인 삶과 본질을 단순한 사유상의 환상적인 본질을 위해 희생한다. 무신론은 이에 반해 구체적인 삶과 본질을 위해 사유상의 환상적인 본질을 희생한다. 무신론은 그러므로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다. 무신론은 유신론이 자연과 인류에게서 박탈해간 의미와 존엄성을 자연과 인류에게 되돌려준다. 무신론은 유신론이 최상의 힘을 흡수해가버린 자연과 인간에 생기를 불어넣으려 한다.
○ 독자의 평
“인간이란 자기가 먹는 단백질과 다르지 않다,”는 극단적인 문장으로 잘 알려진 포이어바흐. 그는 종교가 발생하는 원인을 다음의 네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인간의 자기중심적 제한성. 인간은 삶을 살아가면서 미래의 재앙을 막연히 두려워하는 공포심으로 인해 자신에게 재앙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를 상정한다. 기쁨, 사랑과 같은 긍정적인 감정역시 마찬가지여서, 그 존재를 통해 내가 행복할 수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러한 ‘종속감’은 인간에게 삶을 즐기는 수단을 제공하거나 그것을 빼앗을 수 있는 힘을 지닌 자를 두려워하게 함으로서 종교를 완성한다. 또한 우리는 신이 인간의 삶과 직간접적으로 연관 있을 때에만 비로소 숭배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신의 ‘유용성’은, 신의 기준이 인간의 충동, 욕구의 차이에 따라 상정되며, 신은 인간에게 봉사하고 유용하며 인간의 욕구에 부합할 때 숭배됨을 알 수 있다. 둘째, 인간의 무지. 인간의 사고는 한정되어 있기도 하거니와 편리함을 추구한다. 이로 인해 인간은 역동적인 자연법칙 대신 안정된 신성을, 천상의 영원을 숭배하게 된다. 끝없는 원인을 소급하여 최초에는 하느님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증명한 아우구스투스와 같이, 인간은 상호연관적인 복잡한 자연의 법칙을 탐구하는 대신, 한편으론 무지 때문에, 다른 한편으론 편리함 때문에 하나의 원인, 이름만을 설정한다. 한 시대를 설명하는데도 중요한 몇 가지 사건 내지는 인물로 표현하는데, 하물며 신의 존재, 우주(세계)창조와 같은 거대담론은 어떠하랴. 오늘날에도 인간이 모르는 물리적 법칙, 원인은 상당수 있다. 그러나 설명할 수 없단 이유로 그것을 신학이나 신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다. 셋째, 인간의 상상력(환상). 이것은 상상속의 존재인 신을 실재적인 존재로 둔갑시킨다. 우리는 고대의 미개민족들의 사례에서 상상인 일종인 터부(taboo)가 인간의 생사까지도 좌우지 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는 고등종교인 기독교에서도 잘 나타난다. 루터는 말한다. “그대가 그를 하나의 신으로 간주한다면 그는 그대에게 하나의 신처럼 행동할 것이다.(p.267)” 예수께서도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고 말씀 하셨듯이, 신은 내가 있다고 믿을 때에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만큼 상상력(환상)에 의존한 믿음이 또 있을까. 결국 종교는 죽음에 대한 불안감 또는 해악에 대한 공포가 상상력과 결부돼 빚어진 산물이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행복욕. 인간이라면 누구나 불쾌감 대신 유쾌함을, 갖고 싶은 것을 가지려 하고 나쁜 것을 부정하려는 본능을 갖고 있다. 유쾌한 것을 추구하고 불쾌한 것을 배제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자신의 삶을 지도하고 보장해줄 수 있는 종교로 귀착된다. 이는 현세보다 내세(來世)에 높은 가치를 두는 기독교에서도 잘 드러난다. 간절한 소원성취를 보여주는 기적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라고 순종을 맹세할 때조차도 신의 뜻이 인간의 최고 행복, 즉 영생과 구원을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게르하르트(P. Gerhardt)의 노래가 이것을 잘 보여준다.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에서 흘리는 눈물은 영원한 슬픔이 아닌, 그리스도의 동산에서 완전한 쾌락을 의미한다.(포이어바흐의 보충과 주 28)” 결국 종교(신)의 본질은 인간의 본질이며, 자연의 본질인 것이다. 신의 선함은 인간에게 유용하고 유익한 것으로부터 연유하며 그러한 자연현상으로부터 도출되고, 인간에게 적대적이고 파괴적인 것은 악한 것으로 여겨졌다. 뿐만 아니라 구약성서에 자주 등장하는 질투, 복수심에 불타는 신이라던가, 신약성서에서 인간의 가장 원초적 감정인 사랑을 기치로 등장하는 예수까지, 신은 너무나 인간적인 감정들로 충만해있다. 예수의 기적 역시 항상 인간을 수단으로 하거나 매개할 경우에만 가능할 수 있었다. 아직까지는 자연의 법칙을 알지 못한 태초의 인간은 사물 역시 의인화하여 정신과 물질로 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들은 자연물도 인간이 만든 사물처럼 생각했고, 예컨대 인간이 만든 집에는 그것의 목적이 있듯이 자연 또한 그것이 존재하는 어떠한 목적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 때 인간이 만든 사물보다 월등히 거대한 자연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들의 힘과 능력을 능가하는 무한한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게 하였고, 이러한 본질을 신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에서 추론된 다신교적 심성은, 정신에서 물질이 탄생한 것으로 역전된다. 정신이 물질로부터 승리하고, 보편성이 다양성을 지배하는 시대! 이제 현실에서의 삶이 아니라 죽은 이후의 삶이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어졌다.(기독교 성인의 경우 일반적으로 죽은 날짜를 기념하지 않는가) 그러나 포이어바흐의 말처럼 인간의 능동적인 삶은 초월적(보편적)인 존재를 통해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의 주관을 갖고 현실에 대처할 경우에만 가능하다. 유일신의 영광과 천국을 찬미할 때 그것은 신의 진리가 위대해진 것이 아니라, 우리들 삶이 ‘부정’되고 ‘작아진’ 것이다. 말년의 도스토예프스키는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대심문관」편에서 예수가 수난 기간 중 악마의 세 가지 유혹에 굴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기적을 좇는 맹목적인 신앙이 아닌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를 신뢰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이에 종교재판관은 어리석은 민중은 결코 당신<예수>이 생각한 것만큼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며, 자유를 향유할 능력이 없는 그들에게 자유는 고통이라고 말한다) 말년의 니체 역시 『안티크리스트』에서 예수의 본질을 발견한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죄의식을 심어 줄 생각이 없었으며, 천국에 이르는 길이 ‘회개’나 ‘용서의 기도’를 통해서가 아닌 ‘삶의 실천’을 통해 얻어진다고 했다는 것이다. “구원이란 하나의 새로운 변화인 것이지, 새로운 신앙은 아니다.(『안티크리스트』)” 예수 스스로도 성경에서 말하지 않던가. “하느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루카 17;20-21)” 결국 포이어바흐가 말하고자 한 것은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는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초월자(보편성)를 통해 자신의 고유한 차이와 다양성을 사라지고 현세를 부정하는 결핍된 삶이 아니라, 스스로 주인이 되는 능동적인 삶! 그것은 초월적인 존재(신)로부터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닌, 우리의 고유한 본질로부터 발견하며, 또한 그러할 경우에만 가능할 것이다.
[인상깊은구절]
“참된 자유는 인간이 종교적 편견에서 자유로운 곳에서만 존재한다. 참된 교양은 인간이 스스로의 종교적 편견이나 상상력을 제어할 수 있는 곳에서만 가능하다.(p.314)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