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주은래와 등영초
리훙 / 지식산업사 / 2006.5.25
중국에서 존경 받는 정치가인 주은래 총리와 그의 아내 등영초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는 책. 1994년에 이홍, 유준서, 주유황, 최영림 등이 엮어 북경의 중공중앙당교출판사가 펴낸 <주은래와 등영초>를 번역한 것이다. 주은래와 등영초의 존경하고 감탄할 만한 여러 가지 일화를 담고 있다. 이들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옮긴이가 따로 부록으로 주은래와 등영초의 생애를 간단하게 소개하였다.
○ 목차
옮긴이의 말
머리말
- 사랑과 결혼
- 혁명의 길
- 무자식과 양자
- 가정생활과 가풍
- 인재발탁과 등용
- 신념과 품격
부록
주은래의 생애
등영초의 생애
○ 저자소개 : 리훙
최근작 <주은래와 등영초>
– 역자: 이양자
부산 출신(1941년생), 경남여고 졸업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졸업 문학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사학과(동양사 전공) 문학석사
영남대학교 대학원 사학과(동양사 전공) 문학박사
2019년 현재 동의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전 중국사학회 회장, 현재 고문
전 한중인문학회 고문
중국근현대사학회, 동양사학회 평의원
여성문제연구회 부산지회 명예회장
저서: <송경령 연구>(1998), <역사를 움직인 중국 여성들>(2014), <자성의 길목에서>(2017), <20세기 중국을 빛낸 자매, 송경령과 송미령>(2019)
– 역자: 김형열
부산대 객원 연구원
○ 책 속으로
역자의 말
지금 현재 중국에서 가장 존경받고 있는 사람인 주은래 총리. 그리고 그의 이상을 공유하고 활동을 함께 하여 동지적 결합으로 유명한 그의 아내 등영초 여사. 이 두 사람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평소 편역자는 주은래 총리에 대해서 중국사의 인물 중 가장 좋아하는 사람으로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책을 번역하면서 너무나 감동하여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동지적 결합에 대해 그저 부러운 마음으로 지지를 보내고 있었는데, 실제 얼마나 두 사람이 아끼고 배려하고 사랑하였는가를 보면서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중국인 인기투표에서 단골 1위인 주은래 총리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모택동은 주은래 총리에 대해 “사리사욕이 전혀없는, 고상하고 순수하며 도덕적인 사람이고 또 인민해방을 위해 자신을 완전히 헌신한 사람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미국의 역사학자 페어뱅크 (John King Fairbank)는 “위대한 재능을 가진 매력적인 인물로, 본능적으로 항상 중립적인 위치를 고수했으며, 언제나 조직의 단합을 추구했다. 동시에 결코 최고의 자리를 노리는 경쟁자가 되려고 하지 않는 분별력을 지니고 있었다.”라고 예리하게 관찰을 하고 있다.
그리고 전쟁전문기자인 마사 겔흔은, “중국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은 바로 주은래다. 중국공산당원들이 모두 그와 같다면 중국의 미래는 분명히 그들의 것이 될 것이다.”라고 평했다.
이러한 평가는 주은래 총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그는 국내정치에서는 유연한 적응력과 탁월한 처세술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을 고립시키지 않고 자신과 상대를 날카롭게 대립시키지 않으려 노력했다. 자신이 투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을 때는 미련없이 제2선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충성을 바칠 때는 항상 제1선에서 솔선수범을 보임으로써 언제나 실권자로부터 없어서는 안 될 인물로 인정받았다.
문혁의 와중에 4인방의 왕홍문이 주은래가 비밀음모를 획책하고 있다고 고자질하자 모택동은 짧고 냉소적인 말투로 “주총리는 음모를 꾸미지 않는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외교적인 면에서는 살용주의적인 실사구시의 입장을 취하면서 갈등과 대결보다는 화해와 타협을 모색하였다. 당시의 중국이 국제적인 갈등과 고립에서 벗어나 국제사회에 복귀함과 동시에 그 지위를 보장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주은래 총리의 노력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그의 온건하고 성실한 자세는 냉전시대의 서구 지도자들로 부터도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주은래 총리는 무엇보다 먼저 항상 그가 속한 조직속의 단결과 화해를 중시했으며 중재의 달인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최고의 재능이란, 최고의 인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경쟁하는 인물들끼리 서로 협력하게 만드는 것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그의 역할은 지배가 아니라 설득으로 지도층을 단합시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당내의 파벌싸움이나 분쟁을 해결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과시했다.
다음으로 결코 제1인자가 되려고 경쟁하지 않는 그의 분별력은 가난한 중국의 살림살이를 도맡아 꾸려나간 헌신적인 주부의 역할을 다하게 했다. 그는 마치 어머니와도 같은 자상한 보살핌과 강인한 인내심으로 수십년간에 걸친 국내외의 논란을 수습하고 중국으로 하여금 21세기를 준비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모택동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위대한 파괴자”였다면 주은래는 그 터전위에 건설의 세부계획을 수립한 “유능한 설계자”였다고 할 수 있다.
1972년 중국을 방문한 닉슨 미국 대통령은 “모택동이 없었다면 중국의 혁명은 결코 불붙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주은래가 없었다면 그 불길은 다 타서 재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라고 의미심장한 말을 한 바 있는데, 이는 서로 일맥상통하는 얘기다.
마지막으로 주은래 총리의 가장 큰 장점은 청빈함과 애국심에 있었다 할 것이다. 그는 일생동안 다른 사람이 믿기 어려울 정도의 검소한 생활과 청빈한 생활을 했다. 세계에서 보기 힘든 청렴과 총리였다.
그가 수십년을 하루같이 엄격히 실천하고 지켜온 10개조항의 가규(家規)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거나 특수화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이 그 골자다. 이와 같이 주총리는 멸사봉공 (滅私奉公), 국궁진췌 (鞠躬盡瘁)의 정신으로 사심없이 국가를 위해 온힘을 다하는 삶을 살았다.
천안문 광장에 있는 그의 추도시비에 새겨진 인민의 충심어린 사랑의 글귀는 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인민의 총리로 인민이 사랑하고, 인민의 총리로 인민을 사랑하고, 총리와 인민이 동고동락 하여, 인민과 총리의 마음이 이어졌다.”
이러한 남편과 50여년을 함께 산 부인 등영초 여사는 1949년, 부녀연합회 부주석을 지냈고, 1956년에는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위원의 요직을 맡았으며, 만년에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이러한 요직은 주은래 총리의 후광도 아니었으며, 끈질긴 그녀의 혁명 열정과 그리고 애국심, 성실함과 순박함, 겸허함과 대범한 태도의 결과였다. 그녀는 중국여성혁명가의 한 초상이라 일컬어진다.
미국의 저명한 저널리스트인 에드가 스노우는 “내가 만났던 중국의 여성 중에서 가장 예리한 정치적 두뇌를 소유한 사람이었다.”고 그녀를 평가하고 있다.
당부했고, 책, 문서를 포함한 모든 재산을 당에 기증한다고 했다.
등영초 또한 1992년 89세를 일기로 타계하면서 남긴 유서에서 유해는 의학용으로 해부한 뒤 화장하고, 뼈는 보관하지 말고 뿌려 없앨 것이며, 자신의 저택은 기념관으로 사용하지 말고, 친인척에게는 어떠한 혜택도 주지 말도록 하며, 수의도 새로 만들지 말고 30여 년간 입던 낡은 옷을 그냥 사용해 달라고 부탁했다 한다.
특히 “추도식 같은 것은 삼가해 주십시오. 이것은 먼저 간 은래 동지와의 약속입니다.” 라고 썼다. 물론 모든 것은 그들의 유언대로 시행되었다. 주은래와 등영초 동지는 그들의 깨끗한 사생활 때문에 중국에서 가장 사랑 받는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근래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해 역사를 왜곡하며 고구려사를 자국사라고 밀어붙이고 있다. 그런데 1963년 주은래는 “역사는 왜곡할 수 없다. 도문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 이래 중국땅이었다 거나, 심지어 고대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바로 시정해야한다.”고 갈파한 바 있다. 주은래의 대인다운 풍모는 여기서도 볼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올바른 정치가 한 두 사람이 나라를 구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갈등과 대립과 부패로 얼룩진 오늘날 우리의 정치사회를 보면서 주은래, 등영초 같은 정치가가 나타나길 간절히 소망해 본다.
○ 언론소개
- 주은래와 등영초
이런 부부가 또 있을까. 결혼할 때 선포한 ‘8호’ (八互)정신, 즉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며 신뢰하고 격려하며 돕고 의논하고 용서하고 이해하자는 정신으로 역사와 인생을 함께 한 부부가 있었다. 바로 중국의 저우언라이 (周恩來) 총리와 덩잉차오 (鄧穎超) 부부다.
중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저우언라이 총리, 그와 이상을 공유한 영원한 반려자 덩잉차오 여사는 1919년 애국학생운동을 하면서 서로를 알게 됐다. 6년 후 두 사람은 각각 27세와 21세의 나이에 결혼해 50여 년을 함께 했다.
자녀는 없었다. 하지만 순국 동지들의 자식을 7명이나 양자로 키웠다. 여기에 사생활까지 깨끗했다.
두 사람이 중국인들로부터 존경받는 부부임을 잘 나타내는 에피소드가 있다. 문화혁명 직전 어느날 중국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대강당 엘리베이터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안내자의 제지로 총리가 오기 전까지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까이 온 그는 “내가 총리가 된 것은 인민들을 위해 일하기 위해서인데 어찌 내가 먼저 지나가겠다고 다른 사람들을 비키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고, 당시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대표였던 덩잉차오는 “이분이 어딜 가시든 이분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방해 받아서는 안됩니다”라며 한목소리를 냈다. 결국 모두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고 한다.
저우언라이 총리는 자신의 아내에 대해 “정열적이고 이지적이다. 두 가지 성품이 이처럼 철저하게 결합돼 있는 것은 정말 기적이다”라고 평했다.
덩잉차오는 애국심, 성실함과 순박함, 겸허함과 대범함을 모두 갖춘 여성혁명가로 일컬어진다. 그녀는 1949년 부녀연합회 부주석을 지냈고 1956년에는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에서 요직을 맡았다.
두 사람은 죽은 뒤에도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1976년, 78세로 사망한 저우언라이는 유언장에 추도식을 크게 벌이지 말고 시신을 화장해 조국의 강산에 뿌려달라고 적었다.
1992년, 89세로 숨진 덩잉차오는 자신의 시신을 의학용으로 해부한 뒤 화장하고 남편과의 약속이라며 추도식 같은 것은 하지 말라고 유언했다.
저우언라이의 말은 최근 중국의 역사왜곡과 관련, 국내에서도 회자된다. “역사는 왜곡할 수 없다. 도문강과 압록강 서쪽은 역사 이래 중국땅이었다거나, 심지어 고대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다.”
이같은 내용으로 지식산업사가 최근 펴낸 ‘주은래와 등영초’는 1994년 베이징의 한 출판사가 만든 같은 제목의 책을 번역한 것이다.
글을 옮긴 이양자 동의대 교수와 김형열 부산대 객원 연구원은 “저우언라이가 배우 뺨치는 미남이었다면, 덩잉차오는 그 반대의 외모를 가졌다는 점에서도 이 부부의 모습은 관심을 불러일으키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동지적 결합의 전형이라는 점”이라고 적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