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죽어가는 자의 고독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 문학동네 / 1998.5.7

죽음은 탄생과 더불어 시작한다.
생물학적인 진실은 그러나 명화가 어느 수준 이상으로 진행된 사회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선진 사회일수록 죽음은 탄생과 더불어 은폐되고 배제된다.
현대인의 죽음을 고찰함으로써 역설적으로 현대적 삶을 조명하는 문명사가 엘리아스의 이론적 역작이다.
- 말년에 이르러서야 서구 사회학계에 등재된 노베르트 엘리아스의 역작
‘죽어가는 자의 고독’은 문명화한 사회, 즉 서구 사회의 죽음에 대한 태도를 이전 사회와 비교 분석하면서 현대 사회가 저지른 치명적인 실패를 파헤친다.
그 실패가 바로 죽음과 노화를 은폐하고 배제하는 것으로 본다.
현대인의 죽음을 고찰함으로써 역설적으로 현대적 삶을 조명하고 있다.
○ 목차
- 죽어가는 자의 고독
- 노화와 죽음: 몇 가지 사회학적 문제들
- 노베르트 엘리아스 연보
- 해설/김수정 현대인들의 죽음에 대한 태도와 문명화 과정

○ 저자소개 :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Norbert Elias, 1897 ~ 1990)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Norbert Elias, 1897년 6월 22일 ~ 1990년 8월 1일)는 유대계 독일인 사회학자로, 나중에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Norbert Elias)는 1897년에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난 독일의 유대계 사회학자다.
브레슬라우 대학에서 철학과 의학을 공부했고, 1924년 신칸트학파 철학자 리하르트 회니히스발트를 지도교수로 하여 박사학위 논문으로 ‘이념과 개인 : Idee und Individuum’을 발표했다.
1925년 엘리아스는 당시 사회과학과 철학의 중심지였던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가서 사회학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에 저명한 경제학자이자 문화사회학자인 알프레트 베버 밑에서 근대 과학의 발달에 관해 연구했으나, 1930년 이를 포기하고 친구였던 젊은 교수 카를 만하임을 따라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그의 조교가 되었다.
엘리아스는 이곳에서 교수자격청구 논문으로 ‘궁정사회’를 집필하기 시작했으나, 1933년 나치 집권으로 만하임의 사회학연구소가 문을 닫으면서 엘리아스도 파리로 도피했다.
1935년 다시 영국으로 망명한 엘리아스는 대작 ‘문명화 과정’을 써서 1939년에 출판했다.
그후 케임브리지에 머물며 여러 곳에서 강의하면서 집단심리치료 공부도 했다.
1954년 레스터 대학에 전임강사로 임용되었고 1962년 정년퇴임 때까지 이곳에서 8년간 강의했다.
일부 사회학자와 역사학자 사이에서만 회자되던 ‘문명화 과정’이 1969년 재출간되면서 엘리아스는 뒤늦게 세계적 명성을 얻었고, 현대 사회학계의 거장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1977년에 ‘아도르노 상’을, 1987년엔 ‘사회학 및 사회과학 부문 유럽 아말피 상’을 수상했다.
그밖에 ‘사회학이란 무엇인가?’ (1970), ‘죽어가는 자의 고독’ (1982), ‘인간의 조건’ (1985), ‘개인의 사회’ (1987) 등을 저술을 남겼다.
1990년 8월 1일, 암스테르담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 역자 : 김수정

○ 책 속으로
우리 시대에 죽어가는 사람들 곁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각별하다고 할 당혹감은 죽음과 죽어가는 사람이 사회생활로부터 최대한 배제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다른 이들로부터 철저히 격리한다는 사람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사람들은 마땅히 할 말을 알지 못한다.
이 상황에 사용될 수 있는 어휘는 상대적으로 빈약하고 고통의 감정이 앞서서 언어를 억제한다.
죽어가는 이들에게 이것은 괴로운 경험일 것이다.
여전히 살아 숨쉬는데도 그들은 이미 버려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조차 죽어가는 것과 죽음이 남은 사람들에게 던지는 문제는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위중한 상태에 처한 사람들 앞에서 할말을 잊고 연민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하지 못하는 상황은 곡 누군가가 죽어가고 있거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 경우에 국한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시대가 도달한 문명 단계에서, 자제력을 잃지 않으면서도 강한 감정적 표현을 해야 하는 경우에도 이러한 상황이 발생한다.
사랑과 정을 표현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 — p.35-36

○ 독자의 평 1
‘문명화과정’을 통해서 널리 알려진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는 해외에서도 그에 대한 논의가 비교적 뒤늦게 시작되었고, 국내에서도 다른 학자들에 비해서 많이 알려지지도 그리고 논의되지도 못했었기 때문에 그의 주요 저서인 ‘문명화과정’과 ‘궁정사회’ 정도만 알려졌지 그 외의 저서들은 번역이 되었어도 금방 절판되었거나 아직 번역조차 되지 못한 저서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죽어가는 자의 고독’은 생각보다 이른 시기에 번역되었고 여전히 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행스럽기도 하고 의외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몇 년 전에 읽어서 큰 놀라움을 안겨주었던 저작이고, 짧은 분량이지만 많은 고민들을 안겨주었던 내용이었기 때문에 항상 지금까지 읽은 책들 중 가장 인상적인 책으로 꼽고 있었는데, 최근 필립 아리에스의 ‘죽음 앞의 인간’을 읽고 다시 한번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금 책을 읽게 되었고, 여전히 처음 읽었던 때만큼 놀라움과 통찰력으로 가득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항상 갖고 있었고 … 지금도 여전히 그런 생각을 갖게 된다.
학술적인 저작이기 보다는 간략한 에세이나 대략적인 밑그림을 그리는 것 같은 느낌이기는 하지만 논의를 하고 있는 주제의 중요성이나 간략하게 검토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검토의 다양성과 폭넓음 그리고 통찰력은 많은 영감을 주고 있고, 큰 관심을 갖게 만드는 것 같다.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죽음’을 통해서 지금-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인식 그리고 태도를 논의하고 있으며, 이와 함께 죽어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는 ‘노화’와 이와 반대되는 ‘성’과 관련된 문제까지 다루고 있는 ‘죽어가는 자의 고독’은 필립 아리에스의 ‘죽음 앞의 인간’에 깊은 영향을 받은 저작으로 알려졌고, 노르베르트 엘리아스가 써낸 일종의 진지한 독후감 혹은 반박문과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물론, ‘죽음 앞의 인간’에 큰 영향을 받은 저작이기는 하지만 필립 아리에스의 입장에 동의하고 있다고는 볼 수 없을 것 같다.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는 필립 아리에스가 갖고 있는 현대인의 죽음에 대한 인식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에 일정부분 공감하기는 하지만 필립 아리에스가 갖고 있는 과거 중세시대의 죽음에 대한 인식을 옹호하는 복고주의 혹은 낭만적인 시각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갖고 있고, 중요한 것은 죽음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어떻게 변했는지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변화를 보이게 된 주된 이유가 무엇인지와 변화된 태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보다 집중하고 있다.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는 현대인이 과거와는 변화된 환경 속에서 (위생에 대한 강박관념 / 국가에 의한 폭력의 독점 그리고 엄청나게 늘어난 평균 수명 등) 어떻게 ‘죽음’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변하게 되었는지와 그렇게 변화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 논의를 하고 있고, 이를 통해서 현대인이 어떻게 ‘죽음’을 배제하고 있는지를 논의하고 있다.
그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주저인 ‘문명화과정’에서 다뤘던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죽음’이라는 주제를 갖고 논의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서 변화된 환경 속에서의 죽음에 대한 인식 / 태도와 그 변화가 어떤 문제점을 갖고 있는지를 논의하며 개선되어야 할 점들에 대해서 주장하고 있지만 그 개선의 여지가 과연 인위적으로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고민을 하며 자신의 논의를 마무리 짓고 있다.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문명화과정이라는 것 자체가 어떠한 목적성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집단 혹은 주체에 의해서 주도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이 아니기 때문에 그는 이러한 변화를 파악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변화로 인해 발생되는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운 접근을 보이고 있다.
또한 죽음과 함께 죽어가는 과정인 노화와 성에 대한 변화된 시각 그리고 윤리 의식 등 깊이 있게 접근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가 논의하는 죽음 이외의 주제들도 꽤 의미 있는 내용들이고 접근이기 때문에 간략하게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큰 아쉬움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좀 더 깊이 있는 논의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삶의 끝자락에서 ‘죽음’이라는 주제를 통해서 지금-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식과 태도의 변화를 촉구하는 그의 통찰력에 큰 울림을 느끼게 되고, 그의 시각에 의지해서 죽음에 대한 자신만의 입장을 정리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짧은 분량으로 쉽게 그리고 빨리 읽어낼 수 있기는 하지만 읽은 뒤의 여운은 그 어떤 책들에 비해서도 강렬한 것 같다.
참고 : 내용 중 현대인의 감정과 정서에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외로움’에 대한 논의는 가볍게 논의를 정리하고 있기는 하지만 매우 흥미로운 접근을 보이고 있다.

○ 독자의 평 2
파슨즈의 <사회적 행위의 이론>과 더불어 1930년대의 2대 사회학 저서 중 하나인 <문명화 과정>의 저자 노베르트 엘리아스는 뒤늦게 학계의 조명을 받은 잘 아려지지 않은 현대 사회학의 거장이다. 때문에 그의 문명화 과정 이론은 우리 학계에서도 아직 생소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읽은 이 <죽어가는 자의 고독>은, 물론 그의 이론적 논의를 죽음에 적용한 것이긴 해도 여든의 나이에 천착한 대사회학자의 노작답게 전문적이기보다는 죽음과 현대 사회라는 심오한 주제를 철학적인 통찰력으로 꿰뚫은 시선이 보다 돋보이는 글이다. 이 저서에서도 드러나지만 엘리아스의 이론적 틀은 ‘문명’이라 불려온 서구의 독특한 생활 양식과 국가구조의 발전과의 관계 양상을 분석하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전의 <문명화 과정>이라는 저작에서는 문화라는 생활 양식의 변모란 곧 동물적인 것의 사회적인 장면으로부터의 배제라는 명제를 토대로 예법과 문화의 변천사와 그것이 사회 구조와 가지는 내재적 연관을 밝히고 일상적 삶에서의 폭력성의 배제와 국가의 폭력 독점의 역사와의 관계까지 거시적으로 해명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죽어가는 자의 고독>에서도 역시 같은 이론적 틀이 융통성 있게 적용됨을 볼 수 있다. 죽음이란 사실 인간에게는 숙명이며 유기체적인 인간 존재를 환기시키는 절대적인 사건이라고 할 때 그의 이론에 따른다면 문명화 과정의 억압 기제가 죽음을 배제하리라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이런 장면을 그려볼 수 있다. 어느 휴일 봄날 아침, 막 집을 나서는 나들이길 가족은 같은 아파트촌에 살다 간밤 죽은 어느 노인의 장사 행렬과 단지 내에서 마주쳤을 때 화급히 아이들의 눈을 가리고 자리를 피한다. 어쩌면 부모는 상서롭지 못한 일로 부정탄다 생각하여 그날 나들이 계획을 포기할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무의식 속에 죽음이 아닌 ‘죽은 자’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꺼려해야’ 하는 경험을 체득한다. 이것이 현대 사회에서의 죽음의 문명화 또는 사회화 과정, 더 정확히는 죽음의 배제화 과정의 일상적 풍경이다.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죽음에 대한 태도에 어떤 변천사가 있었던 것일까. 중세나 고대에는 지금과는 다르게 사람들은 죽음을 받아들였을까. ‘죽음’의 변천사에 대해서는 일찍이 필리페 아리에스가 <우리들 죽음의 시간>이라는 저서를 발표하고 역사적인 비교 고찰을 통해 깊이 있게 다룬 업적이 있는 바다. 엘리아스도 아리에스의 작업을 일부 받아들이면서도 핵심에서는 그의 작업을 비판하였다. 즉 에리아스에게는 단순 고지식한 이론 틀이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현대는 삭막하기만 한 반면 중세로 말해지는 옛날이 좋았다는 식의 낭만주의적 정서가 그것이다. 엘리아스는 에리아스의 주장대로 분명 중세에는 현재보다 죽음과 죽어가는 과정이 공공연하고 빈번하게 말해졌음을 인정하지만 그것으로 죽음이 평화로웠다는 것은 증명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히려 중세는 현재보다 죽음의 위험은 통제 불가능했고 죽음은 고통스러웠으며 사람들은 죄의식과 종교적인 사후 처벌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오늘날 공공연하던 죽음은 사회 생활의 배후로 밀려났고 죽어가는 자는 고독하게 그리고 위생적으로 제거된다. 시체는 행여 옛날처럼 거적에 덮여 길거리에 방치되지 않고 악취 없이 신속하고 완벽하게 무덤까지 기술적으로 처리된다. 문명이 죽음을 배제한다는 것은 인간이 개인의 삶의 유한성을 배제하고 은폐하게 되었다는 말의 뒷면이다. 어느 시대보다 오늘날의 개인은 생명을 위협하는 폭력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되고 있고 폭력은 국가 구조에게 독점되어 있다. 또한 현대 의학의 발전으로 기대 수명이 중세보다 무려 두 배 가까이 연장된 사실, 다시 말해 죽음과의 시간적 거리는 갈수록 멀어지고 죽음은 연기될 수 있다는 것, 또 안락사의 경우처럼 점점 죽음에 대한 공포와 고통도 잊을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자연 죽음과 함께 죽음의 이미지를 환기시키는 모든 것, 죽어가는 자와 노화된 인간마저 사회 생활로부터 최대한 배제되고 격리된다는 것. 그리하여 오늘날 개인들은 곧 영원히 헤어질 사람과의 감정 표현이나 진실한 고백을 할 언어를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엘리아스는 말한다. 엘리아스가 진정 근심어린 노안으로 걱정하는 것은 이 단절감일 것이다. 이것은 단지 죽은 자와의 단절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들간의 단절을 걱정하는 엘리아스의 통찰력이 담긴 시선이다. 다시 말해서 그가 문화라 규정한 것, 즉 국가 구조와 생활 양식 간의 모종의 결합물일 뿐인 문화와 발전된 문명이 인간에게 사회적 수준의 죽음의 배제, 즉 의학 발달과 폭력을 독점한 국가의 사회 구조 속에서 죽음에의 망각과 죽음에 대한 꺼림, 죽음에 대한 부끄럽고 당혹스럽고 더럽고 잔혹스러운 이미지의 조건 반사적 고정관념 따위로 인해 사람들이 죽은 자와 노인을 비롯한 죽음의 이미지와 결부된 모든 것을 배제하는 사고 방식의 확장은 결국 ‘살아있는 자들’이 문명화된 감각으로 휘두르는 암묵적인 권력이 인간 사회의 또다른 집단에 대한 사회적 억압을 조장, 방조하는 사회 분열 현상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엘리아스는 우리에게 어떤 정답 같은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죽음의 본질에 대해서, 유한자인 인간이 느끼는 불안에 대해서, 죽어가는 고통을 덜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그는 기원주의자나 본질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죽음을 둘러싼 우리들의 자화상을 음영이 뚜렷하게 그려서 보여줄 뿐이다. 그 그림에는 분명 우리들의 모습이 있을 것이고 반드시 죽음의 그림자만이 가득하지는 않다. 그의 사상이 우리에게 잘 알려지기도 전에 그는 죽었지만 그의 글은 뒤늦게 도착하여 서로 분열된 우리를 살게 하는 지침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상깊은 구절]
우리 시대에 죽어가는 사람들 곁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각별하다고 할 당혹감은 죽음과 죽어가는 사람이 사회생활로부터 최대한 배제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다른 이들로부터 철저히 격리한다는 사람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사람들은 마땅히 할 말을 알지 못한다. 이 상황에 사용될 수 있는 어휘는 상대적으로 빈약하고 고통의 감정이 앞서서 언어를 억제한다. 죽어가는 이들에게 이것은 괴로운 경험일 것이다. 여전히 살아 숨쉬는데도 그들은 이미 버려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조차 죽어가는 것과 죽음이 남은 사람들에게 던지는 문제는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위중한 상태에 처한 사람들 앞에서 할말을 잊고 연민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하지 못하는 상황은 곡 누군가가 죽어가고 있거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 경우에 국한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시대가 도달한 문명 단계에서, 자제력을 잃지 않으면서도 강한 감정적 표현을 해야 하는 경우에도 이러한 상황이 발생한다. 사랑과 정을 표현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