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지도를 만든 사람들 : 미지의 세계로 가는 길을 그리다
발 로스 / 아침이슬 / 2007.4.5
미지의 세계에 대한 과거 사람들의 열망은 끊임없는 탐험으로 이어졌고, 그 축적된 경험의 결과물은 지도였다. 이 책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으로 지도 제작 분야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물과 사건에 초점을 맞추어 지도의 역사와 그 의미를 살펴본다.
‘중세 세계를 그린 알 이드리시와 로제르2세’ 부터 ‘인류에게 새로운 눈을 제공한 항공사진과 인공위성’까지 모두 13개의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각각의 이야기를 연대기 식으로 나열하지 않고, 주제가 되는 장면을 먼저 제시한 뒤에 그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재구성해 읽는 이의 흥미를 돋구어주고 있다.
주제와 관련된 다양한 고지도와 사진자료, 논의되고 있는 오늘날 지도들을 모두 조망할 수 있다는 것, 프톨레마이오스, 고대 중국의 항해술, 카라벨 선, 카탈루냐 지도등 지도와 관련된 다양한 정보와 재미있는 뒷이야기들을 접할 수 있는 것은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덤이다.
○ 목차
지은이의 글
빈랜드 지도의 미스터리
중세 세계를 그린 로제르 2세와 알 이드리시
정화의 남해 원정
노예무역의 아버지 항해왕 엔리케
지도에 신앙을 그린 메르카토르
대를 이어 지도를 만든 카시니 일가
지구의 3분의 1을 그린 제임스 쿡
남미의 역사와 자연까지 그린 훔볼트
등기 문서 역할을 한 북아메리카 지도
바다 속 지도를 만든 사람들
스파이가 그린 비밀 지도들
지도로 돈을 번 필리스 페어설
항공사진과 인공위성
옮긴이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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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소개 : 발 로스
1950년 캐나다의 토론토에서 태어났다. 토론토대학교에서 공부한 후 캐나다 방송국(CBC)에서 일하는 한편 자유기고가로 활동했다. 지은 책으로 <지도를 만든 사람들>, 등이 있다.
– 역자: 홍영분
단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미주리 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을 공부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리더십 학교> <어린이를 위한 지도로 보는 한국사> 들이 있고, <우리 집은 아프리카에 있어요> <붉은 스카프> <지도를 만든 사람들> 들을 우리말로 옮겼습니다. 어린이책을 기획하고 집필하거나, 다른 나라의 책을 우리말로 옮겨 아이들이 좋은 책을 만날 수 있도록 힘쓰고 있습니다.
○ 책 속으로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려는 일본에 맞서 그들이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증거로 동해를 동해 혹은 한국해로 표기한 고지도들을 제시하는 것도 지도가 가진 입증하는 한 예일 것이다.-p21중에서
정화의 비극은 명나라 황제들이 그에게서 두 가지 중요한 것을 빼앗아 버린 데서 비롯된다. 한 가지는 어린 정화에게 생식기를 제거하는 궁형을 가해 후손을 가질 수 없도록 만든 점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정화가 남해 원정을 통해 이룩한 성과들이 후대로 전수되지 못하고 역사 속에 파묻히게 마들었다는 점이다.-p50-51중에서
1996년, 캐나다 대법원은 이야기와 노래로 전해 내려오는 구술 지도들도 유럽식 지도와 동일하게 고려되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은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 다른 부족들도 ‘델가무으크 판례’에 힘입어 조상들의 땅을 되찾게 된 것이다. … 인디언 원주민들의 지도는 결코 생명이 끊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 지도들은 단지 긴 잠에 빠져있다가 이제 막 깨어나기 시작했을 뿐이다.-p142중에서
○ 출판사 서평
- 지도의 역사적 가치와 권위를 보여주는 빈랜드 지도 이야기
1960년대 중반 예일대학교에 소장된 빈랜드 지도의 진위 여부를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졌다. 15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빈랜드 지도가 사실은 20세기에 그려진 것이라는 문제가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그토록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은 지도가 진짜일 경우 아메리카를 처음 발견한 것은 콜럼버스가 아니라 11세기에 그 땅에 도착한 바이킹들이라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빈랜드 지도의 미스터리를 두고 한 역사학자는 예수회 신부이자 고지도 학자인 피셔가 나치를 난처하게 만들 정치적 목적으로 지도를 위조했다는 가설을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이 지도의 진위 여부는 아직 가려지지 않았지만 빈랜드 지도를 둘러싼 수많은 논란은 지도의 역사적 가치와 중요성을 잘 말해준다.
빈랜드 지도의 미스터리와 그것을 만든 사람에 대한 시버의 해석에 대해서는 아직 최종적인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지도가 가짜이고, 한때 어마어마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은 지도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큰지를 잘 보여 준다.
지도에는 확실히 어떤 권위가 있다. 지도는 국가 간의 영토를 구분해 주고 땅에 대한 권리와 지나간 역사를 확인해 준다. 만일 어떤 지도가 우리가 바라는 역사적 사실을 증명해 줄 수 있다면 우리들은 주저 없이 그 지도에 엄청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할 것이다.(본문 20쪽)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려는 일본에 맞서 그들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증거로 동해를 동해 혹은 한국해로 표기한 고지도들을 제시하는 것도 지도가 가진 권위를 입증하는 한 예일 것이다.(동해를 한국해 Mer de Coree로 표기한 1748년 벨랭의 지도 참조. 본문 21쪽)
- 지도의 한계를 확장한 지도 밖의 지도 이야기
이처럼 지도가 가장 강력한 역사적 증거로 채택되는 것은 우리가 배우는 역사는 대개 글로 기록되지 않고 구전되는 이야기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반면, 각종 기록물이나 도표에는 권위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도가 꼭 그림이나 도표로 표시되는 것은 아니다. 인류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가장 적절하고 유용한 형태의 지도들을 만들어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자신들의 지도를 노랫말에 담았고, 태평양의 마셜 제도 사람들은 야자나무 줄기와 조개껍데기로 해류의 방향과 섬들의 위치를 표시했으며, 18세기 미국 남부의 도망 노예들은 누비이불 지도로 길을 찾고 정보를 교환했다. 지도의 범위가 양피지나 비단, 종이 위에 글과 그림으로 나타낸 전형적인 형태를 넘어 구술 지도, 목판 지도, 막대 지도까지 확장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리고 실제로 지도 밖의 지도가 법원에서 정식 증거로 인정된 판례가 있다. 이 이야기는 신대륙의 발견과 함께 시작된 인디언들의 슬픈 역사가 그 배경이다.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유럽인들은 원주민들의 도움으로 서부를 탐험해서 그 땅을 지도로 그리고, 그 지도를 근거로 원주민들을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에서 쫓아냈다. 사실 미국이 자랑하는 개척 정신의 이면에는 인디언들의 피와 눈물의 역사가 숨어 있다.
톰슨이 그랬듯 두 미국인도 맨던 인디언들에게 서쪽에 펼쳐져 있는 땅에 대해 묻고 또 물었다. 그들은 들소 가죽에 그려진 지도들을 유심히 들여다보고는 인디언들에게 지도를 더 그려 달라고 청한다. 맨던 인디언들은 모닥불이 타고 남은 잿더미 위에 지도를 그리거나 클라크의 펜을 빌려 종이 위에 나뭇가지처럼 뻗어 나간 강줄기들을 그리기도 한다. 맨던 족들은 지금 자기들이 돕고 있는 사람들의 임무가 무엇인지, 그들의 임무가 자신들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전혀 짐작하지 못한다. 아버지가 토지 측량사였던 미국의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은 서쪽으로 펼쳐진 광활한 땅을 미국이 먼저 차지하기 위해 디스커버리 탐험대를 파견하였다. 맨던 족을 비롯한 인디언 원주민들이 수천 년 동안 그 땅에 살아 왔다는 사실은 그다지 문제될 것이 없다. 왜냐하면 인디언들은 법적으로 그 땅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공식적인 지도가 없기 때문이다. 루이스와 클라크 일행은 장차 백인들이 이주해 정착할 수 있도록 북아메리카 대륙의 서부를 탐험하러 이곳에 온 것이다. (본문 127~128쪽)
루이스와 클라크가 만든 지도들은 오래전부터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살아온 인디언 원주민들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북아메리카 대륙은 더 이상 모든 이들의 땅이 아니었다. 이제 수많은 경선과 위선에 포획된 북아메리카 대륙 서부의 광활한 땅은 백인들의 손아귀로 들어갔다. 루이스와 클라크의 탐사 후 새로운 종류의 지도 제작자들이 수없이 서부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거리 측정기와 말뚝을 가져다가 새로 들어설 마을의 경계를 표시하고, 그 땅을 백인 정착민들에게 팔기 시작하였다.(본문140~141쪽)
그 후 수많은 인디언들이 서부에 정착하려는 백인들에게 저항하다 죽어 갔고, 남은 사람들은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이른바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이주해야 했다. 그러나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노랫말 지도는 그간의 오랜 잠에서 깨어나 인디언들의 슬픈 역사를 반전시킨다. 1987년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지역의 원주민들이 조상들의 땅을 되찾기 위해 벌인 소송에서 노랫말 지도가 증거로 채택된 것이다.
1996년, 캐나다 대법원은 이야기와 노래로 전해 내려오는 구술 지도들도 유럽식 지도와 동일하게 고려되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은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 다른 부족들도 ‘델가무우크 판례’에 힘입어 조상들의 땅을 되찾게 된 것이다. 그 한 예로 니스가 족은 브리티시 컬럼비아의 12만㎢에 이르는 나스 강 계곡의 땅을 되찾았다. 인디언 원주민들의 지도는 결코 생명이 끊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 지도들은 단지 긴 잠에 빠져 있다가 이제 막 깨어나기 시작했을 뿐이다.(본문 142쪽)
이처럼 양피지에 그려진 지도든 구술 지도든 지도를 만든 사람들은 그 땅을 아는 만큼 그렸고, 지도를 읽을 줄 아는 자가 그 땅을 찾았으며, 지도를 가진 자가 그 땅을 차지했다. 그러나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잃고 외부 세계로 나가는 통로를 차단한 나라는 엄청난 역사적 손실을 입게 된다.
- 정화의 남해 원정에도 불구하고 세계사의 뒷전으로 밀려난 명나라
이슬람교도로서 몽고족을 도와 대대로 운남성을 다스리던 가문에서 태어난 소년 정화는 한족의 반란으로 아버지를 잃고 생식기를 잘리는 궁형을 당한다. 그러나 후일 황제 (영락제)의 자리에 오르는 주체 왕자의 측근이 되어 동남아시아와 인도, 아프리카까지 항해하는 대원정을 지휘해 명나라가 바다를 통해 국세를 드높이는 데 큰 공을 세운다.
하지만 명나라는 영락제가 죽자 정화의 위업을 폄하하고 바닷길을 막아 마침내 신대륙 탐험에 열을 올리던 유럽 제국에 세계사의 주도권을 내주고 만다.
어쩌면 정화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원정에 나섰던 1405년에서 1433년까지의 시기에는 유럽 국가보다는 오히려 중국에 의해서 세계 지도가 그려졌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의 황제들이 수차에 걸친 대규모 해양 원정을 통해 정화가 수집한 정보와 기술들을 제대로 활용했다면, 아마도 유럽인이 아니라 중국인이 세계를 정복하고 식민지를 지배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영어가 아닌 중국어가 세계 공용어가 되어 우리들은 영어 대신 중국어를 배우려고 머리를 싸매고 있을 것이다.
정화의 비극은 명나라 황제들이 그에게서 두 가지 중요한 것을 빼앗아 버린 데서 비롯된다. 한 가지는 어린 정화에게 생식기를 제거하는 궁형을 가해 후손을 가질 수 없도록 만든 점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정화가 남해 원정을 통해 이룩한 성과들이 후대로 전수되지 못하고 역사 속에 파묻히게 만들었다는 점이다.(본문 50~51쪽)
이처럼 나침반과 뛰어난 선박 건조술과 항해술, 지도 제작 기술 등을 두루 갖춘 중국이 바깥 세계로 향하는 문을 굳게 닫아버림으로써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난 반면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앞 다투어 신대륙을 탐험하고 세계의 지도를 넓혔다.
- 항해왕 엔리케의 위업에 감추어진 처참한 노예무역의 역사
그러나 ‘지리상의 대발견’이 꼭 긍정적인 의미만 가지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땅을 개척해 식민지로 삼은 유럽인들에게는 서구 문명의 승리일지 모르지만 그로 인해 원주민들의 삶과 역사는 철저히 파괴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항해왕 엔리케의 위업에 감추어진 처참한 노예무역의 역사가 대표적인 예이다. 엔리케 왕자는 탐험대를 파견해 당시 세계의 끝으로 알려진 보자도르 곶을 넘어 아프리카 해안을 탐험하고, 지리상의 대발견 시대를 준비했지만 그로 인해 시작된 노예무역은 수천만에 달하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착취와 유랑의 길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엔리케 왕자는 후손을 남기지 않았지만 그의 선구자적인 면을 생각할 때 수많은 사람들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선박 건조자, 항해자, 지도 제작자들로 구성된 전문적인 해양 연구단을 최초로 조직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제대로 된 지도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가장 시급한 일이며, 그것이 포르투갈의 다음 세대들을 ‘대항해 시대’로 이끌게 되리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먼저 깨달은 사람이었다. (…)
그러나 엔리케 왕자는 ‘유럽 노예무역의 아버지’라는 악명을 결코 떨쳐 버릴 수 없다. 그가 시작한 노예무역은 이후 수천만에 이르는 아프리카 인들의 삶을 학대와 만행, 유랑의 길로 내모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엔리케 왕자가 이룩한 업적 곳곳에는 그의 형제들의 망령과 수많은 아프리카 노예들의 원혼이 불길하게 맴돌고 있다.(본문 66~67쪽)
- 지도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들
한 장의 지도에는 이 밖에도 수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중세 세계를 그린 알 이드리시의 ‘평면 구형도’에서는 관용과 진실한 우정의 가치를 읽을 수 있다. 기독교인들과 모슬렘이 끝없는 살육을 벌이던 십자군 전쟁 당시 기독교도 왕인 로제르 2세는 모슬렘 학자 알 이드리시를 초청해 세계 지도를 만든다. 그들은 미지의 세계를 그리고자 하는 꿈과 열망을 매개로 인간적인 신뢰를 구축했으며 서로 더불어 사는 관용의 문화를 만들어냈다.
지도 제작은 목숨을 거는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지구의 경선과 위선을 직선으로 표시해 항해 지도에 많이 쓰이는 메르카토르 투영법으로 유명한 메르카토르는 지도에 자신의 신앙과 세계관을 그려 화형당할 위기에 처한다. 또한 대를 이어 프랑스 지도를 그린 유명한 카시니 가문의 카시니 4세는 프랑스 대혁명의 와중에서 학자들이 서로에게 칼날을 겨누는 현실에 회의를 느끼고 가업을 중단하기로 결정한다. 불굴의 의지와 호기심으로 남미 대륙을 탐험하고 주제 지도를 그린 훔볼트, 서부를 탐험해 북아메리카 내륙 지도를 그린 클라크 역시 탐험 과정에서 수없이 위험한 고비를 맞는다. 실제로 지구의 3분의 1을 그린 제임스 쿡 선장은 전설의 북대서양 항로를 개척하고 난 후 하와이 섬에서 원주민들에게 살해당했다.
비밀리에 티베트에 잠입해 지도를 그린 인도 사람 나인 싱 역시 지도 제작에 목숨을 걸었던 사람이다. 실제로 넘버원이라는 스파이 명으로 불린 나인 싱의 모험은 지도는 곧 정보이며, 정보는 곧 힘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인도를 지배해 오던 영국은 19세기 후반에 인도의 거의 전 지역을 측량해 지도를 완성하였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높은 히말라야 산맥이 가로막고 있는 북쪽 끝, 티베트만은 지도에 그려 넣을 수 없었다. 중앙아시아에 눈독을 들이는 러시아도 영국이 티베트 지역을 지도로 그리는 데 큰 장애물이었다. 한편 중국은 러시아든 영국이든, 티베트의 지형을 먼저 파악해 지도를 만드는 나라는 곧이어 그 땅을 집어삼킬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중국 황제는 당국의 허락 없이 티베트로 잠입하는 외국인, 특히 유럽인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사형에 처한다는 칙령을 공포하였다.(본문 158쪽)
티베트는 현재 중국의 한 자치구로 편입되었지만 달라이 라마를 중심으로 독립 운동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지금도 티베트 지역의 상세 지도는 구할 수 없다.
- 지도의 영역을 넓히다
미지의 세계는 땅에 국한되지 않는다. 지구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바다 속 세계는 19세기까지만 해도 인간에게는 미지와 금단의 영역이었다. 인류가 바다를 탐험하고 해저 세계를 그리기 위해서는 과학 기술의 발달이 뒷받침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에 시작된 본격적인 바다 속 탐험은 마침내 지구를 둘러싼 거대한 해저 산맥을 발견하고 해저 지도를 만들기에 이른다. 항공사진과 인공위성은 인간에게 새로운 눈을 부여함으로써 인간의 시선을 우주로 확대시키고 인간의 존재의식에 큰 변화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필리스 페어설은 이미 세계 곳곳이 다 밝혀지고 더 이상 탐험할 곳이 남아 있지 않은 20세기에 지도의 역할을 새롭게 부여한 여성이다. 그녀는 이제 세계 어느 곳이든 쉽게 갈 수 있는 보통 사람들을 위한 지도를 만들어 지도 제작을 하나의 사업으로 만들었다.
지도는 땅에 대한 권리를 확보해 준다. 그러나 필리스 이소벨 그로스 페어설은 정복자나 식민지 시대의 개척자가 아니었다. 그녀가 만든 지도들은 런던 시민이나 관광객 같은 보통 사람들이 복잡한 도시에서 길을 찾을 수 있는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본문 179쪽)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