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차이의 존중 : 문명의 충돌을 넘어서
조너선 색스 / 말글빛냄 / 2007.8.2
인종 갈등과 문명 충돌, 테러 행위에 대한 종교적 정당화가 나날이 목소리를 높이는 이 시대에 서로가 ‘타자’를 위해 공간을 내주는 것, 즉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현재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외치는 책. 2004년 그라베 마이어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우리의 파괴 능력이 커진 만큼, 상상력의 관대함 또한 커져야 한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지은이가 보기에 자신이 속해 있는 유대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가치는 결국 화합이다. 문화와 종교를 초월한 화합이야말로 종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가치 중 하나이며, 이 책에서도 끊임없이 강조되는 단어이다.
영국 유대교 최고 지도자인 지은이는 종교와 문화를 모두 아우르는 객관적인 관점을 제시하여 읽는이를 설득하며, 자신의 종교도 비판적으로 점검하고 있다. 종교가 이 극단의 시대에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한 모색의 결실.
○ 목차
머리말 : 미래를 위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Chapter 01 서문: 문명의 충돌을 넘어서
세계화 시대와 종교의 역할
문명의 대화
정체성 정치의 시대
종교의 도덕 원리
대화의 기술
Chapter 02 세계화 속의 불만
시장의 지배
문명의 충돌
종교의 부활
Chapter 03 차이의 존엄: 플라톤의 유령 몰아내기
플라톤의 유령
최초의 세계화
인간의 보편성과 문화의 특수성
인간의 연대성
타자성의 용인
차이의 관용
천국의 진리와 지상의 진리
Chapter 04 통제: 책임의 의무
사회제도의 붕괴
선택과 책임
도덕성의 의미
대화의 미덕
책임의 윤리
Chapter 05 공헌: 시장 경제의 도덕
자본주의 정신
재산권과 경제적 독립
노동의 가치
리세즈 오블리주
희망의 경제학
Chapter 06 자선: 사회 정의
보의지 않는 손의 맹점
체다카와 미쉬파트
채무 면제의 의미
베풂의 가치
존엄함의 평등
체다카의 교훈
Chapter 07 창조성: 교육의 책무
문자의 탄생
알파벳의 발명
교육의 힘
Chapter 08 협동: 시민 사회와 그 제도
죄수의 딜레마
계약과 언약
신의의 퇴조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위하여
Chapter 09 보존 : 지속 가능한 환경
사람은 자연의 주인이자 하인이다
안식의 의미
자연의 권리
종교 전통에서 배우는 환경 윤리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Chapter 10 화해: 세상을 바꾸는 용서의 힘
관대한 팃포탯
다섯 가지 용서
정의와 용서
용서와 화해
Chapter 11 희망의 언약
종교의 지혜가 필요한 이유
근본주의와 상대주의를 넘어서
언약이란 무엇인가
희망의 언약
옮긴이의 말
주
참고자료
○ 저자소개 : 조너선 색스
철학자이며 신학자, 영연방 유대교 최고 지도자로 유대인 대학과 런던의 예시바 에츠 체임에서 랍비 서품을 받았으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랍비 학교인 런던의 유대인 대학의 총장을 역임했다. 1995년 유대인 공동체 생활을 발전시킨 공로로 예루살렘 상을 수상했고, 2001년 유대교 최고 지도자 재직 10주년을 기념하여 캔터베리 대주교로부터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4년에는 (국내번역: 차이의 존중)으로 종교 부문 노벨상으로 불리는 그라베마이어 상을 수상했으며, 2005년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2009년 현재 히브리 연합 성회 6대 최고 지도자로 16년째 재직하고 있으며 영국 기독교 유대교 협회 공동 대표를 수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차이의 존중> (The Dignity of Difference), <두려움 없는 미래를 맞는 방법> 등이 있다.
- 역자: 임재서
서울대학교 수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는 출판 기획과 번역에 주력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네덜란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사랑의 문화사>, , <위키드3>, <일년 동안의 과부>, <지식인>, <차이의 존중>, <크라카토아> 등이 있다.
○ 책 속으로
한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군대가 필요하다.
그러나 한 문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책이 필요하다. – 조너선 색스 -5쪽
<서문 : 문명의 충돌을 넘어서>
폭력을 막는 단 하나의 훌륭한 해독제는 ‘대화’이다. 서로서로 자신의 두려움을 이야기하고 타인의 두려움에 귀를 기울이며 서로의 연약함을 나누면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는 대화이다. -16쪽
하버드 대학교의 정치 철학자 존 롤스의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가 ‘공적 이성’이다. 그것은 정치 논쟁에서는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논리를 사용해야만 우리가 – 선지자 이사야의 말을 빌리면 – ‘서로 변론'(이사야 1장 18절)할 수 있다는 뜻을 함축한다. ‘서로 변론한다’는 생각은, 도덕적 언어가 붕괴하고 ‘나는 해야 한다’는 어법이 ‘나는 원한다’, ‘나는 선택한다’, ‘나는 느낀다’는 어법으로 바뀐 20세기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말았다. 의무는 우리가 서로 논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냥 만족하거나 만족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시각을 강조하는 텔레비젼은 소리의 문화가 아니라 보기의 문화를 만들어냈다. 이미지는 언어보다 크게 말하고 감정을 강하게 자극한다. 그 결과 가장 시각적인 항의나 가장 목소리가 큰 분노의 외침, 극단적인 구호 등이 승리하는 일이 벌어졌다. 만약 대결은 뉴스가 되고 화해는 뉴스가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대결의 문화를 갖게 될 것이다. 이는 우리의 미래를 좌우하게 될 우리 자신의 소중한 능력을 앗아갈 것이다. 그 능력이란 우리와 문화와 믿음, 가치관, 이해관계 등이 충돌하는 사람들, 따라서 우리가 반드시 이야기를 걸고 귀를 기울여야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또 그런 사람들에게 이해를 받을 수 있는 능력이다.-17-18쪽
‘(종교가) 서로를 미워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히 많지만 서로를 사랑하게 만들기에는 부족하다’ (조나단 스위프트)-19쪽
종교는 불화의 원천일 수 있다. 또한 종교는 갈등 해결의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전자다. 반면 종교를 갈등 해결에 사용하려는 시도는 매우 드물었다. 그러나 세계 도처에 존재하는 갈등과 반목을 해소할 수 있도록 인류의 연대를 튼튼히 하기 위해서는, 희망은 다른 어느 곳이 아닌 바로 여기서 찾아야 한다. 이제 위대한 종교들은 평화를 안착시키는 데, 그리고 평화의 필수 조건인 정의와 자비를 널리 퍼뜨리는 데 적극적으로 달려들어야 한다.-20쪽
‘전쟁은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된 것처럼 보이지만 평화는 근대의 발명품’ (헨리 메인 경)-26쪽
‘종교에서 말하는 고통은 현실에서 겪는 고통의 표현이자 그런 고통에 대한 항의이다. 종교는 학대받는 자들의 한숨이고 감정 없는 세상의 감정이며 영혼 없는 세계의 영혼이다.’ (칼 마르크스) -31쪽
어떤 사회에서도 하나의 제도가 본래의 경계를 뛰어넘어 자기와 논리나 동력이 다른 주변 영역을 식민화할 때는 위험하다. 중세 시대에는 종교가 그런 경우였다. 18세기에는 과학이 그러했고 19세기와 20세기에는 정치가 그러했다. 21세기에는 시장이 그렇다. 화폐교환은 전부가 아니라 일부의 거래에 대해서만 적합한 기제이다. 사회를 지탱하는 것은 가족이나 공동체, 교단, 자발적인 모임 등 경제적 계산과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인간관계이다. 이런 관계들은 시민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집단이지만, 소비 위주의 사회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고 말았다.-39쪽
내가 알고 존경했던 만년의 이사야 벌린 경은 훌륭한 에세이 <자유의 두 개념>에서 자유주의적 신조의 핵심을 이제는 유명해진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한 바 있다.
‘자기 신념의 상대적 타당성을 깨닫는 동시에 자기 신념을 결단코 포기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야만인과 구별되는 문명인의 태도이다.’ 이는 대단히 고귀한 감정이다. 그러나 자유주의에 대한 가장 신랄한 비판가인 마이클 샌들은 이말에 이렇게 대답했다. ‘신념이 상대적으로만 타당하다면 그것은 끈질기게 옹호할 까닭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는 널리 반향을 얻은 물음이었다. 언론과 결사의 자유가 단지 서양 현대성의 관례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을 퇴폐의 한 형태로서 거부하는 사람들을 내가 무슨 권리로 비판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생명에 대한 존중이 많은 가치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면, 다른 사람들을 살해함으로써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 자살 테러범을 내가 무슨 근거로 반대할 수 있겠는가? -43-44쪽
그것은 우리가 진리나 궁극적 실재를 찾기 위해서는 특수성에서 보편성으로 나아가야 하나는 것과 같은 생각이다. 이에 따르면, 특수성은 불완전한 것이고 오류와 편협과 편견의 원천인 반면, 진리는 추상적이고 시간을 초월하며 보편적이고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다. 특수성이 전쟁을 낳는다면 진리는 평화를 낳는다. 모든 사람이 진리를 이해하고 있다면 갈등은 저절로 해소될 것이기 때문이다.-45쪽
그러나 갈등의 시기에 표면에 드러나는 것은 그런 공통성이나 유사성이 아니다. 그 때에는 국외자에게는 사소한 차이로 보이는 것이 엄청난 의미를 띠면서 이웃을 분열시키고 예전의 친구를 적으로 만든다. 프로이트는 이를 두고 ‘작은 차이의 나르시즘’이라고 불렀다. 긴급한 상황에서는 아무리 사소한 차이점이라 해도 정체성의 표지, 그래서 서로를 소원하게 하게 특징을 변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통의 신학, 인류 보편의 신학 뿐만 아니라, 차이의 신학도 필요하다.-48-49쪽
하나의 문화가 종교의 이름으로 그러한 체계에 인위적인 통일성을 부여하려는 시도는 하나의 체계가 번창하기 위한 조건이 무엇인지를 오해한 비극에서 나온다. 우리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각자 나름대로 세상에 공헌하는 바가 있는 것이고 또 그렇게 공헌한 바는 하나같이 소중한 것이다. … 중략 … 차이가 전쟁으로 이어질 때는 쌍방 모두 패배한다. 거꾸로 차이가 서로의 삶을 풍요롭게 할 때는 양쪽 모두 승리하는 것이다.-50-51쪽
우리의 이야기와 심각한 충돌을 빚을지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마음을 열어야 하며, 때로는 그들의 고통과 모욕감과 원한을 귀담아 들을 줄도 알아야 하고, 그들이 생각하는 우리와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우리가 다르다는 사실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대화의 기술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류에 대한 논박에서 진리가 움터나온다는 소크라테스식 대화술이 아니다. 우리가 배워야 하는 대화의 기술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세상을 해석하는 타자들을 용인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 우리는 보편이 아니라 특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보편적인 문명이 서로 충돌하면, 세상이 흔들리고 많은 생명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많은 문화와 문명과 종교가 있지만, 하느님은 우리에게 함께 살아갈 하나의 세상만 주었다. 그 세상은 줄곧 작아지고 있다.-51-52쪽
<세계화 속의 불만>
세계화는 통합시키는 만큼 분열시킨다.
분열의 원인은 지구의 통합을 촉진하는 원인과 동일하다. – 지그문트 바우마 <세계화>-54쪽
20세기 초에 화이트헤드는 우리의 시간 경험에 질적인 변화가 일어났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과거에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는 시간이 한 사람의 일생보다 길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렸을 때나 늙었을 때나 별 변화가 없는 환경에서 살았다. 반면 ‘오늘날에는 변화의 시간이 한 사람의 일생보다 짧고’ 앞으로는 더욱 짧아질 것이다.-56쪽
매튜 아놀드의 말을 빌리면, 마치 우리는 ‘하나는 이미 죽었고 다른 하나는 아직 태어날 만큼 힘이 없는 두 세계’ 사이에 끼어 있는 처지이다. 현 상황의 특이성은 우리가 공통의 미래로 나아갈 길을 찾기 힘들 만큼 변화가 너무 빨리 진행된다는데 있다. 기술력은 나날이 커지고 있지만 우리의 도덕적 신념은 점점 더 갈피를 잃고 혼란에 빠져들고 있다.-57쪽
‘사실 우리는 도덕성의 시물라크르(환영)를 가지고 있고 도덕의 핵심용어들을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론저긍로나 실천적으로나 도덕성을 이해하는 능력을 – 완전히는 아니지만 거의 – 상실하고 말았다.’ (알래스테어 매킨타이어)-65쪽
세계화 시대에서는 무엇이 행동의 주역인가? 서양에서 지난 반 세기 동안 점점 더 강조된 것은 두 가지 제도이다. 하나는 시장이고 다른 하나는 정부이다. 그러나 어느 쪽도 현재 자신에게 지워지는 책임의 무게를 감당할 수는 없다. 시장은 본래 도덕과 상관없이 거래를 하는 곳이고 가치가 아니라 가격을 다루는 곳이다. 다시 말해 시장은 누가 무엇을 어떻게 교환하는가에 대해 아무런 판단도 내리지 않는 교환의 장일 뿐이다. 한편 서양에서 정치는 우리가 공동으로 만들어야 할 세상에 대한 실질적인 도덕적 질문을 건너뛴 채 오직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만 관심을 기울이면서 더욱 더 절차적으로 관리적인 무엇이 되고 말았다. 존 롤스는 현대의 자유주의의 신조 가운데 하나인 이런 점을 두고 ‘선보다 정당함이 우선한다’고 지적했다.-68쪽
사람에 관련된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과거에느 부의 소유주와 생산자 사이에 접촉이 활발했다. 봉건 영주와 산업 자본가는 비록 피고용인을 착취하기는 했어도 그들의 복지에 어느 정도 신경을 썼다. 오늘날의 글로벌 엘리트들은 그들의 결정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과 별다른 교섭이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상품을 생산하는 사람들과 같은 나라에 살지도 않는다. 자신들의 상품을 사는 사람들, 특히 인터넷으로 구매하는 사람들과도 거의 접촉이 없는 편이다. 이는 중요한 문제다. 도덕적 책임은 단지 추상 관념에 불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사이에서 움터나온다. 그런 관계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고 이 과정에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배우는 것이다. 현대 생활의 비인격화와 사람들 사이의 거리는 우리에게서 행동과 결과의 밀접한 관련성을 앗아갔고 이는 우리의 도덕감을 약화시켰다. -69-70쪽
간단히 말해서 시장은 빈부 격차만을 극대화 한 것이 아니다. 시자은 사회의 일원을 공통 운명으로 맺어주는 가족이나 지역 공동체와 같은 유대 관계를 파괴했고 지금까지 우리가 ‘나는 원한다’와 ‘나는 해야한다’ 사이의 비판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게 했던 도덕적 담론을 무력화했다. 시장은 집단적 의무로 묶인 위계를 개인적인 생활 방식과 취향을 누리는 슈퍼마켓으로 대체함으로써 공공선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허물었따. 여기서 공공선이란 공원에서부터 공공 서비스와 애국심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사거나 소유하거나 공유하지 않는 것들을 일컫는다. -71쪽
세계화는 심대한 불안을 자아낸다. 그것은 슘페터가 자본주의의 ‘끊임없는 창조적 파괴의 돌풍’이라 불렀던 것의 결정체이다. 변화에 직면해서 위협을 느끼는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 것의 표현이자 안정감의 원천인 종교로 몸을 돌린다. 세계 시장은 모든 것을 경제적 가치로 환원시키는 경향이 있다.-p77 중에서
우리는 유일하게 의미를 찾는 동물이다.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이며 ‘나는 어떤 이야기에 속하는가?’이다. 경제가 정치를 대체할 수 있고 사적 선택이 공공선을 대신할 수 있다는 자유주의적 상상력의 가장 원대한 희망은 실패할 수 밖에 없다. 경제 자체는 ‘누구’와 ‘왜’라는 커다란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교는 거기에 대답을 준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오늘날 종교가 갖고 있는 힘이 있다. 이데올로기 저치는 아마도 죽고 말겠지만, 그것을 대체한 것은 ‘역사의 종언’이 아니라 정체성 정치다. -79쪽
정치는 차이가 있는 곳에 거주하지만, 종교는 그 차이를 뛰어넘는다. 종교는 서로 다른 것들을 한데 묶는다. 정치는 중재하고 조정한다. 정치에서 타협, 다의성, 외교, 공존 같은 종교의 관점에서는 악덕으로 보이는 덕목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81쪽
종교와 정치는 인간 조건의 서로 다른 측면에 말을 건다. 하나는 사람들을 공동체에 묶어주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의 차이를 평화롭게 중재한다. 20세기의 커다란 비극은 정치가 종교화되었을 때, 국가(파시즘)나 이론체계(공산주의)가 절대화되고 신격화되었을 때 생겨났다. 21세기는 반대 상황이 발생할 때가 가장 위험하다. 즉, 정치가 종교화될 때가 아니라 종교가 정치화될 때다. 종교는 정치가 될 수 없다는 것,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공화국을 비판한 근거였다. <국가>에서 플라톤은 국가에 종교적 성격을 부여하려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차이가 없으면 정치도 있을 수 없다고 대답했다. 정치는 종교가 극복하려고 하는 것, 즉 의견의 다양성, 상충하는 이해관계, 복수성 등이 자리잡은 공간이다. 한때는 이러한 것들이 지역적인 차원에서 필요했지만, 이제는 범세계적인 차원에서 필요하다.-82쪽
<차이의 존엄 : 플라톤의 유령 몰아내기>
우리가 잘 아는 대답이 있다. 종교는 정체성에 관한 것이고 정체성은 배제하는 것이라는 대답이다. 모든 ‘우리’에는 우리와 같지 않은 사람들, 즉 ‘그들’이 있다. 혈족과 비혈족, 친구와 이방인, 형제와 남이 있고, 이러한 경계가 없다면 우리의 정체성도 없을 것이다. 어딘가에 속한다는 느낌은 무리의 일원이 아니면 생명을 지킬 수 없었던 인류사의 새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포식자가 우글거리는 세계에서 무리에 들어가지 못한 개인들은 생존이 불가능했다. 우리 내면에 깊이 잠재한 어떤 본능들은 이때부터 유쾌한 것이며, 그 본능들은 우리가 인간관계에 맺고 소속 집단에 애착과 충성심을 느끼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성향을 ‘부족적’이라고 부른다.
-87-88쪽
유대교는 한 분인 하느님을 믿지만 구원에 이르는 길이 오직 하나 뿐이라고 믿지는 않았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은 인류 전체의 하느님이지만, 이스라엘 민족에게 내려진 명령을 인류 전체가 따라야 할 필요는 없다. 실제로 유대교에는 extra ecclesam non est salus, 즉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에 해당되는 교리가 없다. 오히려 고대의 유대 현인들은 ‘여러 민족의 경건한 자들은 다음 세상에서 제 몫을 얻으리라’고 설파했다. 실제로 성경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오직 이스라엘만의 하느님이지 않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97-98쪽
마이클 왈저는 ‘얇은’ 혹은 보편적인 도덕성보다 ‘두꺼운’ 혹은 맥락으로 가득 찬 도덕성이 훨씬 더 근본적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각 사회는 특수할 수 밖에 없다. 각각의 사회는 저마다 고유의 성원과 기억, 다시 말해서 제 자신만의 삶이 아니라 사회 공통의 삶에 대한 기억까지 가지고 있는 성원들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이다. 반면 인류는 성원만 있고 기억은 없는, 따라서 역사도 문화도 관습도 익숙한 생활방식도 축제도 사회적 재화에 대한 공동의 이해도 없는 집단이다. 모름지기 인간이라면 이러한 것들을 갖는 게 당연하지만, 그 방식잉 하나일 수는 없다. 그러나 온갖 다양한 사회의 성원들은 인간이기에 서로의 다른 방식을 인정하고 다른 이들의 도움 요청에 응답하고 서로에게서 배울 점은 배우며 – 때로는 – 다른 이들의 행진에 동참할 줄도 아는 것이다.’
도덕적 배려의 보편성은 우리가 보편적인 존재가 되어야 배우는 게 아니라 특수한 존재가 되어야 배우는 것이다. 이는 부모가 되어 내 아이를 사랑할 줄 알게 된 다음에야 제 자식을 사랑하는 다른 부모의 마음도 헤아릴 줄 알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도덕적 특수성에서 시작하지 않고서는 인간의 연대성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찾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우리는 각자 자식이 되고 부모가 되고 이웃이 되고 친구가 되어서 그게 무슨 뜻인지 안 다음에야 인간의 연대성을 이해하게 된다.-106-107쪽
<통제 : 책임의 의무>
20세기 초반에 윌리엄 오그번은 ‘문화지체’라는 개념을 만들었는데, 이는 오늘날처럼 기술을 비롯한 물질문화가 통치 방법이나 사회 규범 같은 비물질 문화에 비해 빠르게 변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바깥 세계가 우리의 내부 세계(정신적, 정서적 반응)보다 빠르게 변할 때 우리의 환경은 당혹스럽고 위협적이다. 사회는 변화에 시간이 걸린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125-126쪽
과거에는 엘빈 토플러가 ‘안정적인 사적 영역’이라고 부른 것이 존재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변화에 대처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삶에는 변하지 않는 측면이 있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평생 종사하는 직업이고 평생 지속되는 결혼 생활이며 평생 살아가는 장소이다. 이것들은 누구에게나 허용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희귀한 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여기에서 경제적, 개인적, 지리적 연속성의 느낌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들은 사람들에게 낯선 것에 대처할 힘을 주는 친숙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은 그런 것을 찾아보기가 점점 더 힘든 실정이다.-127쪽
고도의 소비문화를 지탱하는 것은, 인위적으로 부추기고 일시적으로 만족되는 욕망의 급속한 변천이다. 시장이 교환의 메커니즘이 아니라 인생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이 되면, 의미 자체가 허물어진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인상적인 표현에 따르면 우리는 ‘순례자’에서 ‘여행자’로 변한 것이다. 사회는 점차 가정이 아니라 호텔을 닮아간다. 우리는 우리가 아무 데도 속하지 않는 상태, 아무에게도 진실한 애정을 갖지 않고 어느 누구의 진실한 애정도 받지 않는 상태, 아무와도 운명을 공유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영속적인 의미가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하는 상태에 접근하고 있다. 삶은 자아 너머의 보다 견고하고 영속적인 것과 점차 멀어지면서 점점 더 가벼워진다.-135-136쪽
인간관계가 정체성과 자존감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던 것은 그것이 계약과 시자 거래의 영역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 친구, 이웃, 조언자들은 우리와 도덕적 호혜성으로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은 좋을 때만이 아니라 나쁠 때도, 다시 말해 그들에게 대가를 지불할 수 있을 때가 아니라 그들이 필요할 때 곁에 있어주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듣기 싫은 충고를 해준다. 이런 면을 로버트 라이시가 인용하는 ‘개인 코치’ 광고의 상품화된 우정과 비교해 보라. ‘절친한 친구가 있다는 건 멋진 일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절친한 친구가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일을 함께 할 정도로 믿음이 가는 전문가입니까?’ 이 수사적인 질문에 대한 답은 ‘예스’다. 우리가 친구를 믿는 것은 우정에 대해 대가를 지불하지 않기 때문이다. – 137-138쪽
‘부자와 권력자를 부러워하고 숭배하다시피 하지만 가난하고 하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경멸하거나 무시하는 성향은 우리의 도덕감이 타락하게 된 가장 일반적인 원인이다.’ (애덤 스미스)-138쪽
우리한테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우리의 통제력 바깥에 있다는 사실, 다시말해 우리가 겪는 많은 일들이 우리가 절대 만날 리가 없고 누군지 알 수도 없는 사람들이 내리는 경제적 선택이나 정치적 결정의 결과라는 사실은 우리 문화권에 속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자아의 좁아터진 영역 너머에 하나의 세상이 있고, 그 세상에서 우리는 행위의 주역이 아니라 대상이다. 여기서 절망이 생긴다. -140쪽
도덕은 희망의 생태학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다. 도덕은 우리의 행동으로, 우리가 지키며 살아가는 원칙으로, 우리가 만드는 인간관계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신념에 입각해 있는 까닭이다. 도덕은 우리를 경제 체제의 대체가능한 부속품으로 간주하지 않는다.-p143 중에서
단순한 논쟁이 아니라 예의를 갖추어서 내 의견을 정확히 전달하고(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내 의견을 이해시키고) 남의 의견에 귀 기울이는 게 필요하다. 둘 다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배려하며 내 생각과는 다른 의견에도 가치를 부여하는 태도이다. 논쟁에서는 한쪽이 승리하고 다른 한쪽이 패배하지만 애초의 의견을 바꾸지는 않는다. 대화는 어느 쪽도 패배하지 않지만 양쪽 다 변화한다. 이제는 다른 관점에서 보는 현실이 어떤지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어느 쪽도 애초에 가졌던 확신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건 대화가 아니다. 남의 의견도 용인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상대방도 – 내 의견에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면 – 그래야 한다는 걸 깨달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이것이 다원 사회에서 공공도덕이 성립되는 방식이다. 즉 하나의 목소리가 앞장서거나 도덕 문제를 가정이나 지역 주민에게 일임하는 방식이 아니라, 차이의 경계를 넘어서 서로 이해하고 이해받으려는 꾸준한 노력을 통해서만 공공도덕은 성립할 수 있다. -146-147쪽
‘나’를 기꺼이 ‘우리’에 맞추어 형성하려는 태도에서 공동체가 이루어지듯, 사회 역시 개별 공동체의 ‘우리’가 기꺼이 다른 공동체들과 그들의 굳건한 믿음을 용인하려는 태도를 보여야 이루어진다. 사회는 수많은 목소리가 들리는 대화이다. 하지만 우리가 경제적 힘이라는 바람에 날리는 먼지가 아니라 미래를 함께 써가는 공동 저자가 되는 것은 바로 이런 대화를 통해서다. 상대에 대한 존경과 열성이 담긴 대화, 한없는 공감과 이해가 필요한 대화야말로 차이의 존엄함이 다스리는 세상의 도덕적 형식이다.-147-148쪽
<공헌 : 시장 경제의 도덕>
시장 경제가 다른 어떤 제도보다 역사에 기여한 것은 그것이 태곳적부터 전해 오는 인간의 싸움 본능을 억제하는 힘이었다는 점이다. 일찍이 18세기에 몽테스키외는 이렇게 예언했다. ‘상업의 자연스러운 영향은 평화를 안착시키는 데 있다. 무역을 하는 나라는 서로에게 의지한다. 한 나라가 파는 데에서 이득을 본다면 다른 나라는 사는 데에서 이득을 본다. 모든 제휴와 연합은 상호 필요에 기반을 둔다. 지난 세기에 두 번에 걸친 대전쟁을 일으킨 유럽 국가들이 화폐 통합을 이룬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토머스 프리드먼은 맥도날드 매장이 있는 두 나라가 서로 전쟁한 경우가 없다는 이른바 ‘글로벌 아치’이론을 만들어냈다.-177-178쪽
1999년에 유엔 개발 계획 UN Development Programme은 세계 3대 부자가 빈곤국에 사는 6억 명보다 재산이 많다고 추산했다. 최고 억만장자 358명의 재산을 합치면, 지구 인구의 거의 반에 이르는 사람들의 재산을 합친 것보다 많다. 한편 선진국의 원조 금액은 매우 낮은 실정이다. 서양의 겨우 네 나라(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네덜란드)만이 유엔이 목표로 정한 국민소득의 0.7퍼센트를 해외 원조에 쓰고 있을 뿐이다. 세계에서 가장 부자 나라인 미국은 겨우 0.1퍼센트만을 쓰고 있다. 선진국 중 가장 낮은 수준이다. 그러나 유엔 개발 계획의 계산에 따르면, 최고 부자 225명의 재산은 세계의 모든 빈민들에게 기초적인 교육 및 의학 시설과 적당한 음식을 제공하기에 충분하다. — p. 184~185
<자선 : 사회 정의>
이(체다카)는 점유와 소유의 차이를 강조한 유대 신학에서 나온 개념이다. 궁극적으로 세상 만물의 주인은 창조주 하느님이다. 우리는 점유하고 있을 뿐 소유한 게 아니다. 하느님이 맡긴 것을 보관하고 있을 뿐이다. <레위기>의 말씀이 명확한 사례다. ‘토지를 영영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잠시 머무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25장 23절) 우리에게 절대적인 소유권이 있다면, 정의(억지로 주어야 하는 행위)와 자선(아량으로 베푸는 행위)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전자는 법률적으로 강제되는 의무이며, 후자는 도덕적인 의무, 자비와 연민의 촉구이다. 그러나 유대교에서는 우리는 재산의 주인이 아니라 하느님을 대신한 관리인에 불과하므로 신탁의 조건에 충실해야 하는데, 그 조건 중 하나가 우리가 가진 것의 일부를 궁핍한 자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점이다. 유대교에서는 다른 법체계에서 자선으로 간주되는 것이 법의 엄격한 요구 사항이며 필요할 때면 법정이 강제로 시행할 수 있는 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체다카는 흔히 ‘사회 정의’라고 부르는 것이니 누구나 삶의 기본 요건을 갖추며 살아야 하며 필요한 것보다 많이 가진 자들은 잉여의 일부를 덜 가진 자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열망하던 사회, 즉 누구나 존엄한 삶을 살 기본 권리를 가지고 있고 모두가 하느님의 주권 아래 언약으로 맺은 공동체에서 평등한 시민이 되는 사회를 이루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이다.-195-196쪽
자신이 앓고 있는 병을 치료할 의료 수단이 없는 사람은 막을 수 있는 병과 피할 수 있는 죽음의 희생자만 되는 게 아니라, 책임 있는 인간으로서 자기를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잃는 것이기도 하다. 반노예살이나 마찬가지인 채무 노동자, 억압적인 사회에 숨이 막히는 여자 어린이, 실질적인 벌이 수단이 없는 가난뱅이 노동자들은 행복이라는 면에서도 책임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여기에는 기본적인 자유가 꼭 필요하다)이라는 면에서도 모든 걸 빼앗긴 이들이다. 책임 있는 삶에는 자유가 필요하다. (아마르티아 센)
센의 말은 절대적으로 옿다. 개인의 자유는 이사야 벌린이 ‘소극적 자유’라고 부른 것, 그러니까 제약에서 벗어난 없는 상태(성경의 초페쉬)를 뜻한다. 집단의 자유(성경의 체루트)는 그와 다르다. 무엇보다도 나의 자유는 너의 자유를 희생하여 얻는 게 아니다. 다수가 굶는 마당에 소수가 잘 사는 사회, 전부가 아니라 일부만 좋은 교육과 적절한 의료 혜택과 쾌적한 편의 시설을 누리는 사회는 자유로운 해방의 땅이 아니다. 자유로운 사회가 되려면 억압과 압제가 없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책임 있는 시민이 되는 길을 막는 모든 장애물이 없어야 한다. -198쪽
빈곤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 번째 (‘그가 필요한 것을 넉넉히’)는 최저 생활 수준을 가리킨다. 이는 유대 율법에서 음식과 주거와 기본 가구나 결혼식 비용 등을 의미했다. 두 번째 (‘그에게 없는 것’)는 상대적 빈곤을 뜻한다. 여기서 상대적이라 함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예전 생활 수준에 대해 상대적이라는 뜻이다. 이는 랍비들이 빈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열쇠가 무엇인지를 처음으로 시사해주는 대목이다. 사람에게는 단순한 물리적 욕구 이상의 심리적인 욕구가 있다는 인식이다. 가난은 사람을 부끄럽게 하고, 좋은 사회는 그런 수치를 겪지 않게 하는 사회다.-203쪽
체다카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자선’을 뜻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고 남에게 베푸는 자의 선의에 달린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율법이 강제하는 의무이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경제 원리에 의존하는 개념은 아니다. 그것은 시장 고유의 한계를 인식하면서도 자유 시장과 양립하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아래에 인용하는 조지 소로스의 말은 옳다.
‘국제 무역과 세계 금융 시장은 부를 창출하는 데는 뛰어나지만, 평화 유지나 빈곤 완화, 환경 보호, 노동 조건 개선, 인권 보호와 같은 다른 사회적 요구, 일괄해서 ‘공공선’이라 불리는 것에는 신경 쓸 능력이 없다.-208쪽
극단적인 가난과 기아를 종식시키고 기본적인 교육을 실시하고 막을 수 있는 질병에 맞서 싸우고 유아 사망률을 낮추고 노동 조건을 개선하고 실패한 경제를 복구하기 위해서는 선진국의 경제적 잉여를 개발도상국에 더 많이 투자해야 한다. 그리하여 체다카가 보여주는 것처럼 가난한 개인뿐만 아니라 가난한 국가의 존엄과 독립성도 회복해야 한다. 이것은 시급한 요청이다. 통신과 무역, 문화의 세계화는 인간의 책임도 세계화한다. 다수를 가난과 무지와 질병의 노예로 만드는 대가로 소수의 자유를 사는 일은 없어야 한다.-209-210쪽
<창조성 : 교육의 책무>
월터 J. 옹의 말을 빌리면 ‘글은 의식을 재구조화한다.’ 구술 문화에서는 지식의 전달이 언제나 인간적인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즉, 특정한 때에 특정 장소에서 화자와 청자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반면에 저자는 누가 자기 글을 읽는지 굳이 알 필요가 없고 독자도 보통은 눈앞에 저자를 두고 구절마다 무슨 뜻인지 물어보며 글을 읽지는 않는다.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서 소크라테스는 글의 모든 관행에 반대한다. 그에 따르면, 글은 기억력의 상실과 수동적인 배움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논쟁을 낳는다. 양자가 만나서 결론에 이를 때까지 논의하지 않고 끝도 없이 서로가 쓴 글에 대해 반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분명 글은 추상화하는 경향이 크다. 말은 모든 인간 집단이 사용한다는 의미에서 자연적인데 반해 글은 인공적이다. 게다가 규칙과 관례가 필요하며 이것들은 의식적으로 배워야 한다. 그러나 글은 추상적 사고를 촉진하고, 이야기의 반복으로만 과거를 알 수 있는 구술 문화로서는 불가능한 방법으로 과거를 고정시킬 수 있다. -219쪽
<협동 : 시민 사회와 그 제도>
계약이 자아에 관한 것이라면, 언약은 우리가 그 안에 정체성을 키우는 보다 큰 집단에 관한 것이다. 언약 안에서 ‘나’는 ‘우리’를 발견한다. 언약의 관계는 신뢰로 유지된다.-249쪽
언약은 이해관계나 이익에 따라 묶인 유대 관계가 아니다. 언약은 소속감으로 묶인 관계다. 둘 이상의 사람이 모여 ‘우리’를 이룰 때 언약이 맺어진다. 언약은 제한이 없고 영속적이라는 점에서 계약과 다르다. 언약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헌신의 의미를 수반하며, 어려운 상황에도 곁에 있어 주는 신의의 개념을 내포한다. 언약은 때로 자기희생을 요구한다.-251쪽
<보존 : 지속 가능한 환경>
‘우리는 윤리가 전부라는 근본적인 원리를 배우고 있다. … 우리는 – 철부지 아이가 아니라(옮긴이) – 언약이야말로 우리의 생존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거룩한 맹세로써 그 언약을 지켜낼 필요성을 받아들인 어른이다. … 우리의 유전적 본성을 기계의 도움을 빌린 추론에 내맡긴다면, 그리고 신이나 된 것처럼 착각해서 오래된 유산에서 벗어나와 진보의 이름으로 우리의 윤리와 예술과 우리 자신의 의미를 그 기계적인 추론에만 맡긴다면, 우리는 결국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될 것이다.’ (에드워드 윌슨 <통섭>) -284쪽
<화해 : 세상을 바꾸는 용서의 힘>
‘핍박을 받은 모든 종교는 핍박을 가한다. 어떤 우연한 사건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핍박에서 벗어나자마자 자기를 핍박한 종교를 공격하기 때문이다.’ (몽테스키외)
‘(민족주의는) 보통한 나라가 다른 나라의 자존심이나 영토에 가한 상처의 산물(이다)’ (이사야 벌린) -294쪽
정의는 죄를 개인적인 보복 행위(복수)로 앙갚음하지 않고 비개인적인 법적 절차(응보)에 따라 취급한다. 용서는 정의만으로는 피해자의 감저을 가라앉힐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인저을 바탕으로 한다. 증거를 구하고 평결을 내리고 형을 선고해도 피해자의 마음에는 고통과 슬픔의 앙금이 남아 있다. 정의는 비개인적인 도덕 질서의 회복이며 용서는 개인적인 도덕 질서의 회복이다. 정의는 잘못을 바로잡고, 용서는 깨진 관계를 회복한다.-307쪽
<희망의 언약>
언약은 계약이 아니다. 그것은 세 가지 점에서 계약과 다르다. 첫째, 언약은 특정한 조건과 상황에 제약되지 않는다. 둘째, 언약은 한계가 없고 오래 지속된다. 셋째, 언약은 다른 면에서는 서로 관련이 없는,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두 개인의 만남이라는 생각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언약은 ‘나’에게 정체성을 주는 ‘우리’에 관한 것이다. 계약에는 그것을 맺는 장소가 선행하지만, 언약은 무엇보다 우선적이고 무엇보다 근본적이다. 그것은 계약 관계가 존재할 수 있는 영역인 상호성의 모형이다.-331-332쪽
‘모든 진정한 언약은 도덕성의 기본적인 측면을 재진술하고 재확인한다. 자율적 의지 너머에 존재하는 판단의 원천에 대한 존경, 건설적인 자애심, 타인의 행복에 대한 배려가 그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특정 생활 방식의 원천을 수립한다. … 그것은 추상적인 도덕이 아니다.’ (필립 셀즈닉) -332쪽
낙관은 상황이 나아지라라는 믿음이다. 희망은 우리가 힘을 합쳐 더 나은 상황을 맏늘 수 있다는 신념이다. 낙관이 수동적인 덕목이라면 희망은 능동적인 덕목이다. 낙관론자가 되기 위해 용기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희망을 갖기 위해서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다. – 338쪽
희망은 텅 빈 개념에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문화에서 생기지도 않는다. 그것은 행동의 원천이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믿음에서 태어난다. 우리는 맹목적인 원인에서 저도 모르게 생겨난 산물이 아니다. 즉, 이기적 유전자나 다윈 생존 투쟁, 헤겔의 역사 변증법, 마르크스의 계급투쟁, 니체의 권력의지, 뒤르켕의 사회 경향, 프로이트의 심리적 충동 등 우리가 희미하게만 의식하는 원인에서 생겨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행동의 원천을 우리 바깥에 두고 우리의 운명 fate을 -기껏해야 달랠 수 있기를 바랄 뿐이고 최악의 경우에는 그저 굴복하는 수밖에 없는- 운수 fortune의 바람과 물결에 맡기는 세계관을 잃는다고 해서 결코 실망한 적이 없다. 희망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과거의 실수에서 배워 다음에는 달리 행동할 수 있음을 아는 것이며, 때로는 역사가 에서 벗어나기도 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꺾어들기도 하지만 조지프 헬러Joshep Heller가 말한 ‘바람에 날리는 우연의 쓰레기봉투’가 아니라 구원을 향해 가는 오래고 느린 여정임을 아는 것이다. — p. 338~339
<옮긴이의 말>
부족주의와 보편주의는 둘 다 자기만이 옳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절대주의에 가깝다. 그러므로 지은이는 한편으로는 상대주의와 절대주의 사이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부족주의 (<문명의 충돌>)와 보편주의 (<역사의 종언>)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는 셈인데, 그 외줄타기의 이름이 바로 ‘차이의 존엄’이며 그 중심 논리는 ‘나도 옳고 너도 옳다’이다.
서양 근대 사상이 자랑하는 ‘관용’의 원칙과 비슷한 듯 보이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으니 그것은 ‘옳다’라는 단언에 담긴 무게이다. 관용의 원칙은 ‘나는 옳다’는 확신보다는 ‘내가 틀린지도 모른다’는 회의에 더 바탕을 둔 가치이다. 이른바 데카르트의 ‘잠정적 도덕’의 논리이다. 그러나 지은이에 따르면 극단적인 부족주의가 만연하는 오늘날에는 그런 정도의 원칙만으로 부족하다. 관용의 원칙은 조금만 발을 헛디디면 남의 일에 상관 않는 개인주의(혹은 냉소주의, 더나아가서는 허무주의)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종교적 열정의 폭풍우를 막기 위해서는 오직 그에 못지 않은 반대 열정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옳다’는 확고한 가치관 위에서 세계 자본주의의 여러 폐해들 (경제적, 정치적, 환경적)을 시정해야 한다는 확고한 목소리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은이는 자신이 속한 유대교 전통에서 여러 가지 개념들 (체다카, 언약, 시장친화적 태도 등)을 뽑아내고 풀어내면서, 그가 우리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가자 시급하다고 본 인류의 대화에 참여한 것이리라. -351-352
○ 출판사 서평
부족주의와 보편주의는 둘 다 자기만이 옳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절대주의에 가깝다. 그러므로 지은이는 한편으로는 상대주의와 절대주의 사이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부족주의 (<문명의 충돌>)와 보편주의 (<역사의 종언>)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는 셈인데, 그 외줄타기의 이름이 바로 ‘차이의 존엄’이며 그 중심 논리는 ‘나도 옳고 너도 옳다’이다.
서양 근대 사상이 자랑하는 ‘관용’의 원칙과 비슷한 듯 보이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으니 그것은 ‘옳다’라는 단언에 담긴 무게이다. 관용의 원칙은 ‘나는 옳다’는 확신보다는 ‘내가 틀린지도 모른다’는 회의에 더 바탕을 둔 가치이다. 이른바 데카르트의 ‘잠정적 도덕’의 논리이다. 그러나 지은이에 따르면 극단적인 부족주의가 만연하는 오늘날에는 그런 정도의 원칙만으로 부족하다. 관용의 원칙은 조금만 발을 헛디디면 남의 일에 상관 않는 개인주의 (혹은 냉소주의, 더나아가서는 허무주의)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종교적 열정의 폭풍우를 막기 위해서는 오직 그에 못지 않은 반대 열정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옳다’는 확고한 가치관 위에서 세계 자본주의의 여러 폐해들 (경제적, 정치적, 환경적)을 시정해야 한다는 확고한 목소리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은이는 자신이 속한 유대교 전통에서 여러 가지 개념들 (체다카, 언약, 시장친화적 태도 등)을 뽑아내고 풀어내면서, 그가 우리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가자 시급하다고 본 인류의 대화에 참여한 것이리라. – <옮긴이의 말> 중에서
- 가속하는 세계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세계화는 특정한 나라들에 더 높은 생활수준이나 더욱 자유로운 상황을 부여했다. 하지만 매우 차별적이고 불안정한 결과도 빚어냈다. 혜택이 세계 곳곳에 골고루 퍼지지 않은 것이다. 국가 간 승자와 패자가 확연히 갈렸으며, 정보의 격차는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켰다. 벤자민 바버Benjamin Barber가 ‘맥월드’라고 명명한 이미지와 상품의 국제화는 보존된 지역전통을 궤멸시키고 있다. 또한 비서구 문명의 고귀함과 존엄함에 심각한 위협을 가하고 있다. 시장이 주도하는 소비문화는 사회 환경을 해치고 있고, 미래의 자원인 도덕적 어휘마저 파괴했다.
우리는 이미 자연 환경을 파괴하고 변형시키고 있다. 세계화 시대에서의 행동의 주역은 시장이고 정부이다. 그러나 어느 쪽도 현재 자신에게 지워지는 책임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다. 또 현대 생활의 비인격화와 사람들 사이의 거리는 우리에게서 행동과 결과의 밀접한 관련성을 앗아갔고 이는 우리의 도덕감을 약화시켰다. 세계화 문제 해법의 중심에는 정치와 종교가 있다. 정치는 차이가 있는 곳에 거주하지만, 종교는 그 차이를 뛰어넘는다. 종교와 정치는 인간 조건의 서로 다른 측면에 말을 건다. 하나는 사람들을 공동체에 묶어주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의 차이를 평화롭게 중재한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차이가 없으면 정치도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정치는 종교가 극복하려는 것, 즉 의견의 다양성, 상충하는 이해관계, 복수성 등이 자리 잡은 공간이다. 한때는 이러한 것들이 지역적인 차원에서 필요했지만, 이제는 범세계적인 차원에서 필요하다. 오늘날 과학과 정치학과 경제학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 적절한 해답을 준다는 이유로 종교가 엄청난 힘을 가지고 부활했다. 그렇다면 종교는 신자가 아닌 사람들, 다른 노래를 부르고 다른 음악을 듣고 다른 이야기를 말하는 사람들에게도 공간을 내줄 수 있을까? 바로 이 질문에 21세기의 운명이 걸려 있다.
- “내로우캐스팅 narrowcasting을 지양하고 브로드캐스팅 broadcasting을 지향하라”
이 책은 유대인만을 위해 쓴 것도, 종교적인 사안만을 염두에 두고 쓰인 것도 아니다. 자기 집단에게만 말을 하는 오늘날의 커뮤니케이션 경로의 확대를 꾀한다. 기독교도는 기독교도에게만 말을 걸고, 유대교도는 유대교도에게만, 이슬람교도는 이슬람교도에게만 말을 건다. 세계화에 관한 견해도 마찬가지다. 찬성론자는 찬성론자끼리, 반대론자는 그들끼리만 소통한다.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의 공론의 장이 필요하다. 의견은 대개 폭력과 항의의 형태로, 즉 극단적 이미지로 포착되는 사건을 통해 관철된다.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경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로우캐스팅할 뿐이다.
종교는 불화의 원천일 수 있다. 또한 종교는 갈등 해결의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신앙을 전쟁의 대의로 사용한다면, 그에 못지않게 평화의 이름으로 호소하는 목소리도 나와야 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종교는 그것이 해답의 일부가 되지 않으면 문제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차이의 존엄은 종교적 이념 이상이지만,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종교적이든 세속적이든- 전통 안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모습을 보고 놀랄 준비를 해야 한다.
- 문명의 충돌
9·11 테러를 포함한 무슬림 관련 심각한 테러는 쉽게 들여다보면 종교와 종교 간의 뿌리 깊은 분쟁에 의한 충돌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심각하게 서로를 위협하고 있는 세계 자본주의와 극단적 형태의 이슬람교라는 보편적인 두 문화가 충돌해서 발생한 것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문화가 충돌하면 세계는 무참하게 흔들린다. 양자의 균형을 유지하고 우리의 공통성과 차이, 보편과 특수에 정당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모든 문화적·정신적 과제 가운데서도 가장 어려운 것이지만, 그것만이 문명의 충돌을 피하는 길이다. 자연환경이 생물다양성에 의존하듯 인간환경도 문화 다양성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어떤 하나의 문명도 전 인류의 정신적·윤리적·예술적 표현을 모두 포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시장경제는 제로섬 게임 아닌 모두의 승리 패러다임
저자는 통제와 공헌, 자선, 창조성, 협동, 보존, 화해, 희망의 언약을 우리에게 제안한다. 통제란 책임의 의무로, 선택에 의한 결과를 회피하지 말고 최선의 선택을 해 후세에게 좀더 평등한 세상을 물려주라고 강조한다. 선택은 타인에게 영향을 주고 나아가 여론을 조성하기 때문인데, 인간의 존엄함을 최대한 증진하는 경제체제를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행할 수 있는 최고의 미덕이라고 역설한다.
또한 ‘리세즈 오블리주Richess oblige’를 비롯한 시장 경제의 도덕성을 지키라고 강조한다. 랍비들이 시장과 경쟁을 선호한 것은 그것이 부를 창출하고 가격을 낮춰 절대 빈곤을 완화시켰기 때문이지, 작금의 현실과 같은 극심한 빈부격차를 야기하기 위함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시장 경제는 모두가 승리하는 패러다임인 것이지 인간관계의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반드시 네 손을 가난한 자에게 펴서 그에게 없는 것 중에서 그에게 필요한 것을 넉넉히 주라”라는 유대 율법은 자선 행위를 하되, 수혜자가 인간의 존엄함을 보호하고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게 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자원의 공정한 분배를 인간 존엄성을 지키는 차원에서 행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공공선이다. 이 책에서 유대교는 평등 관념에 대해서도 매우 독특한 발상을 보여주는데, 부의 평등이나 기회의 평등이 아닌 동등한 존엄함을 최고의 평등으로 보고 있다.
- 교육의 평등은 모든 것의 평등
교육과 경제적 성취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교육은 인간의 존엄함에 본질적인 요소이다. 그것은 또한 창조성을 여는 열쇠이며 창조성은 곧 21세기에 번영을 이룰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되었다. 유대 공동체는 3세기에 학교를 짓지 못하는 공동체를 파멸한다는 규정을 두고 모든 이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틀을 마련했다. 지식은 서로 나누면서 커진다. 다른 어떤 개입도 교육에 대한 투자만큼 모든 사람에게 경제적 기회를 제공할 가능성을 높이지는 못할 것이며, 인간의 존엄함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향한 우리의 오래고 힘든 여정에 그만큼 보탬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여러 면에서 세계화 반대론자들의 말은 옳다. 여전히 많은 집단이 혜택의 분배에서 제외되어 있고, 그 중 많은 사람들은 한 세대 이전보다 열악한 처지에 내몰려 있다. 호혜적 이타주의로 맺어진 타인과의 관계는 이러한 상황에서의 용서를 가능케 한다. 세상을 바꾸는 용서의 힘, 즉 화해는 절망의 땅에서 희망을 솟아나게 하며 적을 친구로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준다. 그것은 비극에 맞서는 희망이며, 공존의 열린 공간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다.
희망은 텅 빈 개념에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문화에서 생기지도 않는다. 그것은 행동의 원천이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믿음에서 태어난다. 희망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과거의 실수에서 배워 다음에는 달리 행동할 수 있음을 아는 것이다. 우리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꿈꾸고 희망하고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다. 마지막으로 남은 최선의 희망은 초현대성의 한복판에서 책임과 희망의 세계 언약을 맺으라는 오래고 새로운 요구에 귀를 기울이는 데 있다.
차이의 존엄이라는 이념에 상대주의 같은 건 조금도 없다. 차이의 존엄은 생명 형태의 놀라운 다양성을 가진 이 세계,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보유한 이 세계에서 근본적으로 초월한 존재라는 생각에 토대를 두고 있다. 전 인류가 동일한 신앙을 믿게끔 이교도와 전쟁을 하는 것은 잘못이다. 제국주의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생활 방식을 다원적인 세계에 강요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6,000개 언어가 우리를 풍요롭게 하듯이, 차이는 우리를 작게 하는 게 아니라 크게 하는 것임을 인정할 수 있을까? 차이의 존엄을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다양성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도 배울 것이다. 서로의 차이를 존중할 줄 아는 사람들끼리 소통하는 이와 같은 깊은 이해야말로 오늘날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희망의 열쇠일 것이다.
○ 추천평
조너선 색스는 오늘날 영국에서 가장 지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는 각기 다른 분야를 너무나 쉽게 넘나들면서 이 능력을 자신만의 독특한 점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특히 종교적 통찰력을 현대 사회와 연관시켜서 신뢰와 관용에 관한 그의 외침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 토니 블레어 (前 영국총리)
『차이의 존중』은 세계화의 정치와 경제에 대한 통쾌한 윤리적 비판이면서 역사에 대한 통찰로 가득 차 있다. 작은 분량에 깊은 내용을 심오하게 다룬 훌륭한 책이다. — <타임즈>
『차이의 존중』은 그 내용이나 우아함에서 세계화와 문명 충돌을 다룬 어떤 책보다 뛰어나다. 그가 쓴 예언적인 이 책에서 랍비 색스는 길을 잃고 헤매는 자에게 등불을 밝혀준다. — <데일리 텔레그래프>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