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찰스 램 수필선
찰스 램 / 범우사 / 2001.11.30
본서는 일상의 이야기와 작가의 생각을 담은 에세이다.
문학에의 열망과 반복된 좌절, 처절한 사건과 뼈저린 고독, 정신증에 대한 공포와 재발의 두려움 속에서 생활해 나가야 했던 램에게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마음 곧추세우는 자기 제어적 절제와 금욕적 싸움이, 한편으로는 인생이란 모름지기 조용한 담소와 악의 없는 희롱을 나누고, 고궁과 고서의 아치를 맛보는 한 모퉁이의 행복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는 체관과 공존했던 것일 것이다. 그래서 그의 통찰력은 삶 속에 숨어 있는 작은 정의를 찾아내고, 그의 감수성은 그것들에서 진정한 삶의 향기를 느끼고, 그의 마음은 그에 대한 동경으로 가득 차 있었던 아닐까. 램의 수필은 바로 이 기쁨과 슬픔의 조화, 우인애의 경지에 이른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 기조를 이루고 있다.
○ 목차
이 책을 읽는 분에게
정년퇴직자
오래 된 도자기
제야
회복기의 환자
굴뚝 청소부 예찬
꿈속의 아이들
기혼자의 행동에 대한 어느 독신자의 불평
빈곤한 벗과 친척들
두 가지 인종
식사에 대한 감사기도
돼지구이에 관한 이야기
연보
○ 저자소개 : 찰스 램
영국 런던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빈민아동을 위한 학교인 크라이스트 호스피틀에 입학했지만 가정형편으로 자퇴하고 남양상사에서 근무하다 동인도회사의 회계원으로 취직해 1825년 은퇴할 때까지 근무했다. 회사일이 끝나면 친구들과 어울려 습작을 했는데 이때 평생의 친구 S. T.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를 만났고 다른 시인들과 교류하기도 했다. 1796년 누이인 메리가 심한 정신병 발작을 일으켜 어머니를 살해하고 난 뒤, 램은 자신에게도 병이 유전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평생 독신으로 누이를 돌보며 살았다. 1796년 콜리지가 낸 시집에 4편의 소네트를 발표하며 등단했고, 누이와 함께 어린이를 위한 《셰익스피어 이야기들》, 《율리시즈의 모험》 등을 출간했다. 1820년부터 ‘엘리아’라는 필명으로 월간지 〈런던 매거진〉에 에세이를 기고했는데, 이것들을 모아 1823년 《엘리아의 수필》, 1833년 《마지막 엘리아의 수필》을 펴냈고 수필가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1935년에는 《찰스 램 서간집》을 펴냈다. 평생 정신병으로 고통받았지만,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유머와 페이소스를 섞어 우아한 문체로 써내려간 그의 글은 영국 산문문학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 역자: 양병석
1934년 전남 보성 출생.
광주고등학교와 원광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및 대학원 졸업.
원광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및 미국 조지타운 대학 연구교수로 재직.
국제 소로 학회 회원.
현 원광대학교 명예교수.
역서로『찰스 램 수필선』(범우사) 등, 논문으로 <소로의 수사적 기예> 등 다수가 있음.
○ 출판사 서평
작가나 예술가의 생애를 음미할 때 우리는 흔히 가정적 (家庭的)인 상상을 하게 된다. 만일 셰익스피어가 그의 고향 마을에서 쫓겨나지 않았더라면, 만일 워즈워스에게 누이 도로시가 없었더라면, 그들의 삶과 문학은 어떤 것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만일 찰스 램에게 누이 메리가 없었더라면, 그녀가 정신발작을 일으켜 어머니를 살해했던 일이 그의 생애에서 발생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삶과 문학은 어떤 것이었을까? 아마도 그의 수필 <꿈속의 아이들>의 환상은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 되어 통속적인 의미의 보다 행복한 삶을 누렸을 것이요, 그의 문학적인 재능은 시 (詩)에 응결되었을지 몰라도 그의 수필은 없었을지 모른다. 거의 모든 문학작품이 작가의 삶의 소산임은 말할 것도 없지만 램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독특한 인정의 여운이 감도는 그의 문학의 성격은 몽테뉴처럼 여유 있고 온화한 삶의 소산이 아니라 생애중의 비통하고 무서운 운명적 사건들로 인해 조탁된 결과에서 나온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램은 1775년 런던의 이너 템플 법원가 (街)에서 존과 엘리자베스의 일곱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법학원 간부였던 사무얼 솔트 (Samuel Salt)의 서기 겸 가사를 돌보는 집사에 불과했다. 그들은 7남매를 낳았지만 성인으로 성장한 것은 찰스와 형 존 (John, 1763년생), 누이 메리 앤 (Mary Ann, 1764년생)뿐이었다. 부모 양쪽이 병약했으니 찰스에게는 선천적으로 허약한 체질이 유전된 것이다.
램의 정식 교육은 일곱 살이 채 못 되어 들어갔던 크라이스트 호스피털 (Christ’ Hospital)초등부 7년이 전부였다. 재학중에는 수재로 글쓰는 재주도 뛰어나서 당연히 진학하여 성직자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일찍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어려서부터 말을 심히 더듬었고 그 언변상의 결함도 결함이려니와 집안을 돌봐야 할 처지였다. 사실 램의 가정은 빚을 지고 살 정도로 극빈한 것은 아니었지만 가난한 살림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솔트 씨의 저택 지하 행랑에서 살았고 솔트 씨가 죽은 뒤에는 셋집으로 전전했다. 또 그가 다녔던 크라이스트 호스피털도 그 당시에는 일종의 구빈 (救貧)학교에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 미루어 보다 가세를 짐작할 만하다.
램은 상점의 사환일과 형이 일했던 남해상회 (South-Sea House)을 거쳐 17세의 소년 사원으로 동인도 회사 회계사무원으로 입사한 후 50세로 은퇴하기까지 33년 동안 그곳에서 일했다. 그는 직업적인 문필가가 아니었으며 가계를 꾸려야 하는 생활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독서를 좋아 했고 그가 학문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부러워했던가는 후일의 그의 수필 <휴가중의 옥스퍼드>에 잘 나타나 있다.
그가 책을 좋아하게 된 것은 어려서 솔트 씨의 서재를 드나들 수 있었던 것이 계기가 된 것이라고 전해지거니와 거기에서 그는 많은 고전 (古典)을 접할 수 있었고, 어렸을 때부터 외할머니가 살았던 허트포드셔 (Hert fordshire)에 자주 갔었던 계기가 되어 귀족적인 저택의 공기에 친숙하게 된 것이다. 그의 외할머니 필드 (Field)부인은 허트포드셔의 블레이크스웨어 (Blakesware)에 플루머스 (Plu-mers)라는 귀족의 저택 가정부였다. 그의 수필에서 앨리스 윈터턴 (Alice Winterton)으로, 시에서 안나 (Anna)로 나오는 앤 시먼스 (Ann Simmons)를 만나 사랑에 빠진 것도 이 할머니 댁의 방문중에 있었던 일이다. 그들의 사랑은 결실을 보지 못하고 그녀는 전당포업을 하는 바트럼 (Bartram)에게 시집가고 말았다. 램은 혹스턴 (Hoxton)의 정신병원에 6주 동안 입원했던 일이 있는데 그것이 파혼의 원인이 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1796년은 램의 생애에 가장 비극적인 해였다. 이 무렵 램의 집에는 노망한 늙은 아버지, 병들어 누워 있는 병약한 어머니, 열 살 위인 누이 메리, 고모 헤티가 동거하고 있었고, 형 존은 가족과 떨어져 살고 있었다. 생계는 고모의 연금과 램의 급료에 메리의 바느질 보수로 충당하고 있었다. 메리는 몇 차례 정신 질환의 징후를 보였는데 그해 9월 22일 심상치 않은 징후가 있었다. 램은 출근길에 의사를 찾았지만 헛수고였다. 바로 지난해에 자신이 정신병원의 신세를 졌던 램으로서는 염려가 되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근무를 마치고 집에 들어섰을 때 그의 눈앞에는 믿기 어려운 끔찍스런 광경이 벌어져 있었던 것이다. 저녁밥상이 놓인 채 방은 온통 흐트러져 있었다. 피가 낭자한 방바닥에 고모는 의식을 잃고 누워 있었고, 아버지는 이마에 상처를 입고, 어머니는 의자에 앉은 채 메리의 칼에 찔린 것이다. 그때도 메리는 칼은 쥐고 서 있었다. 램은 그 비운의 흉기를 메리에게서 빼앗았지만 어머니는 이미 죽어 있었다.
이때 램의 나이 겨우 21세였다. 형 존은 메리를 국비 요양원에 보내자고 주장했지만 램이 이를 극구 반대했기 때문에 결국 누이는 램이 맡게 되었다. 램은 그녀를 돌보는데 헌신하기로 결심을 했고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살면서 그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형의 말을 따랐으면 벗어버릴 수도 있는 짐을 램은 떠맡은 것이다. 그녀를 돌보며 함께 산다는 것이 부양을 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언제 또 엄청난 비극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안을 안고 있는 것이요, 그의 표현대로 ‘메리는 딱지를 달고 있어서’ 그들의 병력 (病歷)에 대한 끊임없는 주위의 수군대는 소리와 눈초리를 받는 고통까지 함께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무수히 집을 옮겨야 했다.
램의 인상은 ‘정답고 온순하다’. ‘연약한 몸체는 훅 불면 날아갈 듯하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그 속에 강철 같은 강한 의지와 투지가 들어 있지 않고서는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이같은 환경에서 그의 마음을 지탱시켜준 것은 친구들의 우정과 독서였다. 그는 평생 런던에서 거주했던 덕으로 크라이스트 호스피털 시절의 동문들과 계속적인 교우를 유지할 수 있었다. 특히 그는 화이트, 코올리지, 다이어와 친했다. 후에 램을 중심으로 그의 집에서 문학동호인의 모임이 이루어지고 여기에 당대의 일급 문인들 헤즈릿, 키인, 캠블, 고드윈, 헌트, 디 퀸시 등은 물론 워즈워스, 키츠까지도 참여했다. 그들 사이에 오고간 무수한 서신들의 수만 보아도 그들의 우정을 헤아릴 만하다. 특히 코울리지는 그의 필생의 친우였다. 그가 1834년 7월 세상을 떠나자 램은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말끝마다 ‘코울리지가 죽었다’고 비탄을 하다가 그해 12월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램의 문학에 대한 관심과 열망은 일찍부터 있었다. 그러나 문필가로 인정받기까지는 그는 그 어느 문필가보다 길고 힘든 노력의 과정을 겪어야 했다. 그들에 비해 터무니 없이 낮은 출생과 학력, 메리의 병원비까지 감당해야 하는 부담은 문학에 대한 열망과 생활이란 의무의 굴레 사이에서 심한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가 얼마나 심한 절망의 늪에 빠져들고 했는지는 그가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읽어볼 수 있다.
… 금요일 헤티(옮긴이 주: 늙은 하녀)가 죽었네….
과로와 근심으로 메리는 병에 다시 도졌네. 어제 병원으로 옮겨 가두어놓을 수밖에 없었네. 집에는 나 홀로 있네. 헤티의 시신이 곁에 있을 뿐이네…..
…..마음의 참담하이. 어디서 위로를 찾아야 할지 모르겠네. 메리는 다시 좋아질걸세. 하지만 계속 재발될 게 두렵네.
….나는 완전히 파산이 된 것일세. 내 머리도 아주 나빠졌네. 메리가 죽었으면 싶네…. (1800년 5월 12일 월요일. 코올리지에게 보낸 편지)
메리는 그 후에도 자주 병이 도졌고 그의 절망 또한 반복되는 것이었다.
그의 작품이 최초로 발표된 것은 코울리지의 시집에 함께 실린 4편의 단시 (短詩)다. 혹스턴의 요양원에서 나온 뒤 코울리지에게 보낸 것이다. 메리의 비극적 사건이 있던 무렵 그 시집의 간행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그 일이 일어나자 그에게는 시인이 되겠다는 꿈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을 진정시키는 일과 생계가 앞서는 것이었다. 사건 직후 코울리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시에 대해선 언급하지 말아주게. 그런 종류의 지난날의 허영을 완전히 부숴버렸네. ‘지금 내게는 종교적인 것 이외에는 다른 말은 말아 주게’하고 절규했다.
그러나 역으로 램의 마음을 지탱시켜준 것은 문학공부와 종교였다. 이때에 그는 엘리자베스 시대의 극문학과 고전을 탐독하고 그 속에서 위안의 요소들을 찾았던 것이요, 신학서적의 탐독에서 마음을 지탱할 수 있었다. 한편 시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한 그는 감상적(感傷的)인 소설 <로자먼드 그레이 (A Tale of Posamund Gray, 1798)>를 내놓아 다소의 호평을 받았다. 그 후 코올리지의 소개로 《모닝포스트》등 간행물에 여러 가지 산문들을 연재했던 것은 실제 생활에 도움을 얻고자 한 것이다. 1편에 6펜스의 고료를 받았던 것이요, 회사 퇴근 길에 매일 동전여섯 닢을 생각하면서 걸었다고 말했다. 그는 희곡을 시도하여 엘리자베스 시대풍의 시극(詩劇) <존 우드빌(John Woodvil, 1802)>을 썼으나 상연을 거절당하는 고배를 마셨고, 이어 소극(笑劇) 를 써서 상연은 하게 되지만 그 또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관객 속에 끼여 그 자신이 야유를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가 문필가로서 인정을 받고, 그 문필이 그에게 생활의 안정을 주게 된 것은 누이와 함께 집필하여 출판한 <셰익스피어의 이야기들 (The Tales from Shakespeare, 1807)>이 나오면서다. 그 책의 희극편은 메리가 쓰고 비극은 램이 썼다. 램은 누이가 쓴 부분이 자기가 쓴 부분보다 휠씬 뛰어나다고 자랑하곤 했다. 이어 《율리시즈의 모험 (A dventure of Ulysser, 1808)》, 《셰익스피어 시대의 극시인들의 표본 (Specimens of English Dramatic Poets who lived about the Time of Shakespeare, 1808)》이 나온 후에야 문예비평가의 위치와 명성을 얻기에 이른 것이다. 이때가 램의 나이 33세였으니, 긴 노력의 편력이었다.
그 후 여러 정기간행물에 평문들을 싣고 자서전적인 이야기들을 모은 《레스터 선생의 학교(Mr Leicester’s School 1809)》가 출판되고 리 헌트의 《리프렉터》(誌)지에 게릭 (Garrick)과 호가스(Hogarth)를 비롯한 평문들을 실을 때에는 그들 중심으로 많은 문필가들이 모여 ‘찰스 램이 아니라 찰스 램 회사줁가 된 것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그가 호평을 받은 것은 1820년에서 1823년말까지 《런던 매거진》에 정기적으로 엘리아라는 필명으로 발표하고, 후에 책으로 엮어진 《엘리아 수필집(Essays of Elia, 1823)》과 그 후의 것들이 모아진 《엘리아 수필 후집 (Essays of Elia, 1833)》이요, 이것들이 그들 문학사에서 불멸의 위치로 올려놓은 것이다.
램의 수필에는 거창한 철학적 사색이나, 사회라거나 역사라거나 시대적인 절박한 문제라거나, 위대한 인물이라거나 하는 크고 거창하고 센세이셔널한 것들이 다루어진 것이 아니다. 몇 편의 평론적인 글을 제외하면 거의 모두가 작고 사사로운 자기와 자기 주변의 이야기들이다. 문학으로 자신을 발산하고 싶었던 충동이 시와 희곡의 표류를 거쳐 수필이란 항구에 정박한 것이다. 상흔(傷痕)을 지닌 노병(老兵)이야말로 전기(戰記)를 써내기에 가장 알맞듯이, 인생의 큰 상흔을 지닌 그는 자기의 이야기에서 성공을 거둔 것이다. 신변적인 사소한 소재들이 그의 고아(古雅)한 문체와 유머와 위트와 농소(弄笑) 속에서 인생에 대한 예지와 인정의 온기(溫氣)가 독특한 색조(色調)로 확대 발효(醱酵)되어 독자에게 감동과 여운을 남겨준다.
그의 수필에는 자기 자신은 물론 가족, 친척, 친구, 직장의 동료, 거리의 행인, 아이들 – 굴뚝청소부, 거지, – 런던의 거리, 고궁, 고서, 고도자기, 극장, 화랑, 학교, – 인간 삶의 거의 모든 것들이 소재가 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수필은 거의 모두가 – 비록 이야기의 제목은 달리 붙여진 것일지라도 – 인간의 삶과 인간의 성격이 주제가 되어 있다. 그의 수필에는 사물이나 자연이 주제가 되어 있는 것이 없다. 그는 자연보다도 사람을 – 모든 계층의 사람을 – 그들의 장점은 물론 단점까지도, 아니 완벽성보다는 기형 (奇形), 기벽 (奇癖), 기행 (奇行), 우행 (遇行)을 더욱 사랑했다.
그의 수필에는 차분하고 조용히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탈속 (脫俗) · 오도 (悟道)의 정조 (情調)가 감도는가 하면 어느 것에서는 열렬한 투사적인 기개가 엿보이기도 한다.
문학에의 열망과 반복된 좌절, 처절한 사건과 뼈저린 고독, 정신증에 대한 공포와 재발의 두려움 속에서 생활해 나가야 했던 램에게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마음 곧추 세우는 자기 제어적 절제와 금욕적 싸움이, 한편으로는 인생이란 모름지기 조용한 담소와 악의 없는 희롱 (戱弄)을 나누고, 고궁 (古宮)과 고서(古書)의 아치 (雅致)를 맛보는 한 모퉁이의 행복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는 체관 (諦觀)과 공존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의 통찰력은 삶 속에 숨어 있는 작은 정의 (情誼)를 찾아내고, 그의 감수성은 그것들에서 진정한 삶의 향기를 느끼고, 그의 마음은 그에 대한 동경 (憧憬)으로 가득 차 있었던 건 아닐까?
“태양, 하늘, 소슬바람, 홀로 걷는 산책, 여름 휴가, 푸르른 초원, 맛있는 주스와 고기, 친구들, 유쾌한 술잔, 불켜진 촛불, 노변 (爐邊)의 이야기, 악의 없는 자만, 농담, 풍자 – 이 모든 것들이 (죽으면) 삶과 함께 사라져버리는가?” 하고 그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의 말기의 수필에는 추풍낙조 (秋風落照)의 가락이 짙어져 인생의 고독과 허무함을 보이지만 감상 (感傷)과 비애 (悲哀)에 치우침이 없이 리얼한 묘사와 유머로 삶의 향기를 풍겨준다. 그의 글은 언제나 애수 (哀愁) 속에 기쁨이 있고, 재기 발랄한 농소 속에 애조 (哀調)를 띤다. 웃음과 눈물이 교묘하게 혼효되어 독특한 풍미와 향취를 풍겨주는 것이다.
램의 수필은 바로 이 기쁨과 슬픔의 조화, 우인애 (愚人愛)의 경지에 이른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 기조를 이루고 있다. 램의 생애에서 그의 마음속에 이들을 가장 크게 발효시켜놓은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누이 메리가 아니었을까 싶다.
램의 친구 헤즈릿이 메리를 자기가 알고 있는 여인들 중에서 가장 현명하고 가장 이성적인 여인이라고 말했듯이 그녀는 발병하지 않을 때에는 매우 감수성이 예민하고 사리 밝은 여인으로 램에게는 다정한 누이요 문학의 조언자였다. 누이는 동생의 헌신에 그를 정성으로 보살피는 것으로 보답했다. 상호이해와 의존의 상보적 생활을 하는 이 오누이가 얼굴을 맞대로 앉아 오순도순 글을 쓰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 흐뭇한 온정을 느끼게 했던 반면 가슴이 젖어오는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함께 앉아 있는 우리를 보면 웃음이 나오거나 울거나 – 어쩌면 웃다가 울지 몰라. 길게 늘어뜨린 가엾은 얼굴을 하고 서로를 바라보며 ‘괜찮아?’라고 묻고 ‘내일은 더 좋아질 거야’라고 말하고선 울음을 터뜨리고 말지. 찰스는 ‘친구는 잇몸을 앓고 우리는 이를 않는 거와 같다’고 하지. 편안하지만 불안한 편안이야”라고 스토다트 양 (Miss Stoddart:헤즈릿의 부인이 됨)에게 보낸 메리의 편지처럼 정신질환의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서로를 위로하는 모습은 연민의 정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다.
누이가 발작을 일으켰을 때에는 그녀가 차라리 죽었으면 싶기까지 했던 램에게 그녀가 제정신을 되찾았을 때 그녀에 대한 측음함과 사랑과 생에 대한 긍정이 몇 곱절로 증폭되었을 것이요, 그 연민의 정이 자신에게, 형에게, 친구에게, 모든 사람에게 확대되어, 결함과 어리석음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인간애로 발전되어 희비가 조화된 수필을 낳게 한 것은 아닐까? 메리는 1847년 사망했으니 램보다 10여 년을 더 산 샘이다. _ 양병석/원광대학교 교수 ·영문학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