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 : 쇼펜하우어의 철학논문
(ber die vierfache Wurzel des Satzes vom zureichenden Grunde:Eine philosophische Abhandlung von Arthur Schopenhauer)
쇼펜하우어 / 나남 / 2010.6.5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는 쇼펜하우어가 1813년에 완성하여 1847년에 개정증보한 박사학위 논문으로, 인식주체의 선천적 능력에 관한 쇼펜하우어의 생각이 압축적으로 표현된, 그의 철학 전체의 핵심이 되는 작품이라 일컬어 진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이 논문은 그의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서론에 해당하는 것으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읽어줄 것을 그는 독자들에게 요청한다.
이 책에서 쇼펜하우어는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등 앞선 철학자들이 ‘원인’과 ‘인식이유’를 구별하지 않음으로써 철학적으로 심각한 혼란이 초래되고 그것이 허구적인 신의 존재증명으로 오용되었다고 지적하면서, 칸트를 비판적으로 계승하여 생성, 인식, 존재, 행위라는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대해 치밀하게 논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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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옮긴이 머리말
증보판 머리말
제1장
입문
제2장
충족이유율에 관해 지금까지 가르쳐진
핵심내용에 대한 개요
제3장
지금까지 서술된 것의 불충분함과
새로운 서술에 대한 구상
제4장
주체를 위한 객체의 첫 번째 단계와
그 안에서 지배적인 충족이유율의 형태에 관하여
제5장
주체를 위한 객체의 두 번째 단계와
그 안에서 지배적인 충족이유율의 형태에 관하여
제6장
주체를 위한 객체의 세 번째 단계와
그안에서 지배적인 충족이유율의 형태에 관하여
제7장
주체를 위한 객체의 네 번째 단계와
그안에서 지배적인 충족이유율의 형태에 관하여
제8장
일반적인 소견과 결론
옮긴이 해제
찾아보기
약력
○ 저자소개 :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Arthur Schopenhau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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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철학자이자 사상가. 유럽의 항구 도시인 단치히에서 상인이었던 아버지 하인리히 쇼펜하우어와 소설가인 어머니 요한나 쇼펜하우어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실존 철학은 물론 프로이트와 융의 심리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19세기 서양 철학계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흔히 염세주의자로 알려져 있지만, 인간 삶의 비극적 면면을 탐구한 사상가이며, 그의 철학은 근대 철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788년 단치히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793년 함부르크로 이주해 성장했고, 아버지의 바람에 따라 한동안 상인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1805년 아버지의 급작스러운 죽음을 계기로, 자신이 그토록 꿈꾸던 학자가 되기 위해 김나지움에 입학했다. 1811년 베를린대학교에 들어가 리히텐슈타인, 피셔, 피히테 등 여러 학자의 강의를 들었고, 1813년 베를린대학교 철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따기 위해 「충분근거율의 네 가지 뿌리에 대하여」를 집필, 우여곡절 끝에 예나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819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출간한 후 1820년부터 베를린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1839년 현상 논문 「인간 의지의 자유에 대하여」로 왕립 노르웨이 학회로부터 상을 받았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으며, 1860년 9월 21일 자주 가던 단골 식당에서 식사 중 폐렴으로 숨진 후 프랑크푸르트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주요 저서로는 『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충족이 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등이 있다.
– 역자 : 김미영
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했고 독일 뮌스터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홍익대 인문과학연구소에서 학술연구교수로 재직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쇼펜하우어의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가 있다.
○ 출판사 서평
쇼펜하우어 철학의 출발점이자 그의 철학 전체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담긴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가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자연과학의 여러 사례들을 통해 경험적 직관에 이미 인과법칙이 적용된다는 것을 증명하며, 궁극적으로 의지철학의 초석을 놓는다.
쇼펜하우어는 이 저서를 자신의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서론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내세우면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책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칸트철학의 직접적 계승자를 자처하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따라서 칸트철학과의 연관성 아래서 정확히 이해될 수 있는데, 칸트철학과 관련된 많은 부분이 이 책에서 이미 다루어져 주저에서는 생략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쇼펜하우어는 철학계에 만연한 칸트철학의 왜곡을 바로잡는 동시에 칸트철학 자체의 오류를 비판·수정하는 데 주력한다.
이 번역서는 1847년의 증보판을 번역대본으로 했다. 증보판은 초판에 비해 분량이 두 배가량으로 늘었을 뿐 아니라, 프랑스 유물론의 영향으로 달라진 쇼펜하우어의 후기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철저한 논증을 전개하는 엄밀한 철학서이지만, 책 곳곳에서 신랄한 독설과 유머를 구사하는 쇼펜하우어의 문필가적 재능이 빛을 발하기도 한다.
– 생성, 인식, 존재, 행위 :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를 밝히다!
‘충족이유율’은 인식이나 사고, 사물 등에는 언제나 충분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법칙을 뜻하는 것으로, 모든 판단이나 현상에 대해 “왜”라고 물을 권리를 우리에게 부여한다는 점에서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된다. 그런데 쇼펜하우어는 철학사에서 ‘인식이유’와 ‘원인’이 혼동되어 왔으며, 특히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에게 이 혼동은 의도적인 면이 있다고 비판한다. 즉 데카르트는 ‘원인’을 제시해야 할 곳에 ‘인식이유’를 밀어 넣음으로써 신의 현존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의 길을 닦았고, 스피노자는 이 혼동을 범신론의 기초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 둘의 명확한 구분이 이루어진 것은 칸트가 “모든 명제는 그것의 이유를 가져야 한다”는 인식의 논리적 원칙과 “모든 사물은 그것의 이유를 가져야 한다”는 선험적 원칙을 구별하면서였다. 쇼펜하우어는 여기서 더 나아가 충족이유율을 생성, 인식, 존재, 행위 네 가지 형태로 구분한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생성의 이유율은 표상들을 인과적 방식으로 필연적으로 결합시키는 원리이고, 인식의 이유율은 표상들을 개념적으로, 존재의 이유율은 표상들을 공간적·시간적으로, 행위의 이유율은 표상들을 동기에 의해 필연적으로 결합시키는 원리이다. 충족이유율은 이처럼 전혀 다른 네 가지 관계들에 대한 공통의 표현인데, 전혀 다른 관계의 이 법칙들은 그것들이 충족이유율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표현되는 것처럼, 동일한 뿌리, 즉 우리의 인식능력 전체가 갖는 어떤 동일한 근원적 성질로부터 유래한다. 다시 말해 충족이유율은 우리의 지성에 뿌리를 둔다. 이런 관점에서 쇼펜하우어는 충족이유율이 적용될 수 없는 물자체의 세계에까지 사유의 영역을 확장하려는 강단철학의 월권행위를 비판하며, 그것은 곧 칸트철학의 성취를 왜곡하고 무효화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 오직 이성의 빛을 따라서… 타협을 모르는 ‘철학자’ 쇼펜하우어를 만나다!
우리는 쇼펜하우어를 보통 철학자로서보다는 인생과 사랑, 예술, 죽음 등에 대한 품격 있는 글들을 남긴 일종의 에세이스트로서 더 널리 받아들인다. 하지만 쇼펜하우어의 본령은 역시 철학이며,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는 이러한 철학자로서 그의 본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쇼펜하우어는 철학은 신학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또한 철학자는 자신의 철학이 “장관이나 의원의 마음에 드는지 혹은 그 시대의 이 교파나 저 교파에게 그들의 형편에서 맞는지를 묻지 않고” 오로지 이성의 빛을 따라가면서 거기서 나온 결과, 곧 진리를 정직하고 성실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세간의 여론이나 분위기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진리만을 추구하는 올곧은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모습을 우리는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다.
○ 충족이유율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철학논문에서 모든 학문의 기초인 충족이유율 (충분근거율이라고도 불린다)의 종류가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우선 쇼펜하우어는 옛 철학자들이 인식이유와 원인을 혼동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특히 그는 이 혼동을 데카르트와 스피노자가 의도적으로 범했는지 상세히 설명한다. 데카르트는 원인이 요구되는 곳에 인식이유를 밀어넣어서 신의 현존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의 길을 만들었고, 스피노자는 이 혼동을 범신론의 기초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라이프니츠는 충족이유율이 모든 학문의 핵심원칙이라는 것을 최초로 제시했지만, 이유율의 두가지 의미를 분명히 설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두 이유율의 차이를 처음으로 설명한 것은 크리스티안 볼프다. 그러나 볼프는 인식의 충족이유율과 원인작용의 충족이유율의 차이를 명백히 규정하지는 않았다. 칸트가 “모든 명제는 그것의 이유를 가져야한다”는 인식의 논리적 원칙과 “모든 사물은 그것의 이유를 가져야 한다”는 선험적 원칙을 구분할 것을 강조한 이후에 비로소 인식이유와 원인이 정확히 구분되었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인식이유와 원인간의 구분 외에 두 가지의 이유를 더 구분하여 생성, 인식, 존재, 행위라는 네 가지 충족이유율을 제시한다. 충족이유율은 표상 (Vorstellung)으로서의 세계가 따라야 하는 법칙이다. 생성의 이유율은 표상들을 인과적 방식으로 필연적으로 결합시키는 원리이고, 인식의 이유율은 표상들을 개념적으로, 존재의 이유율은 표상들을 공간적-시간적으로, 행위의 이유율은 표상들을 동기에 의해 필연적으로 결합시키는 원리다. 이와 같은 충족이유율을 해명함과 동시에 쇼펜하우어는 이유율이 적용될 수 없는 물자체의 세계에까지 사유의 영역을 확장하려는 당대의 강단철학, 즉 헤겔같은 학자들의 행태를 비판한다. 이로써 쇼펜하우어는 칸트철학의 본래적 의미가 현실적으로 왜곡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생성의 충족이유율과 관련하여 쇼펜하우어는 최초원인이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모든 원인은 하나의 변화로서, 인과관계를 파악한다는 것은 변화에 선행하는 변화를 무한히 찾는 것을 의미하므로, 변화하지 않는 질료의 최초상태는 생각될 수 없다는 것이다. 최초원인 (제1원인이라고도 불린다)으로서의 신을 설정하는 우주론적 증명을 칸트가 논파했는데도 “절대자”가 최초원인으로 제시되는 것을 쇼펜하우어는 강력히 비판한다. 인과관계에 대한 기존의 광범위하고 애매한 표현은 숨겨진 신학적 의도에서 기인하며, 변화에 선행하는 실체를 원인으로 간주하는 것에는 신학자들의 의도가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물질과 자연력이 모든 인과관계에서의 본질이라고 본다. 물질은 모든 변화의 담지자이며, 자연력은 모든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인식의 충족이유율과 관련하여 쇼펜하우어는 오성 (Verstand)에 의해 만들어진 표상을 결합하는 이성 (Vernunft)의 역할만을 인정하고 ‘실재를 직접적으로 인식하는 이성의 능력’을 부정한다. 우리의 인식에 있어서 경험으로부터 독립적인 선천적인 것은 인식의 형식적 부분에 제한되어 있을 뿐, 인식의 재료는 예외없이 외부로부터, 즉 감각으로부터 시작하는 물체계에 대한 객관적 직관으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이 직관을 개념으로 가공하는 것이 이성이다. 따라서 이성은 전혀 아무런 내용도 갖고 있지 않고 형식을 가질뿐, 내용은 전적으로 외부로부터, 즉 오성이 만들어낸 직관적 표상으로부터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다.
존재의 충족이유율과 관련하여 쇼펜하우어는 공간과 시간에서의 관계들이 단순한 개념을 통해서가 아니라 선천적 순수직관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존재의 이유는 선천적으로 주어진 직관 안에서 직접적으로 제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기하학적 명제의 진리가 인식이유에 의존하지 않고, 직관을 통해 인식된 존재이유에 의해 비로소 확증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든 기하학적 명제는 직관으로 소급되고, 기하학적 증명은 오직 직관에 좌우되는 관계를 드러내는 것에서 성립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제시되는 기하학의 증명에서는 정리를 위한 증거로 인식이유가 주어질 뿐, 직관을 매개로 하는 선험적 진리가 제시되지 않음으로써 정리에 대한 확신이 제공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한다.
행위의 충족이유율과 관련하여 쇼펜하우어는 사물의 본질에 접근하는 전혀 다른 방식의 인식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인식하는 주체가 의욕하는 자신을 직접적으로 인식하는 방식이다. 쇼펜하우어는 우리 자신의 모든 결정에 대해서도 우리는 “왜?”라고 질문할 수 있다고 본다. 행위의 결정에는 행위의 동기가 반드시 선행하며, 동기가 없다면 행위는 생각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이 없다면 생명없는 물체의 움직임을 생각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따라서 동기도 원인에 속한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행위의 동기만이 갖는 특성을 이야기한다. 다른 원인에서와는 달리 행위의 동기에 대해서는 내부로의 통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모든 원인은 사건의 조건이지만 외부로부터 첨가되는 것이어서 사건의 내부는 우리에게 비밀로 머무른다. 우리는 원인이 필연적으로 작용을 일으키는 것을 보지만, 무엇이 그 내부에서 일어나는지를 경험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기계적, 물리적, 화학적 작용, 그리고 자극의 작용이 그 원인에 언제나 따르는 것을 보지만, 한 번이라도 그 사건을 철저히 이해하진 못하고, 그것을 물체의 성질, 자연력, 생명력의 공으로 돌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내부로의 통찰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도 원인이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는지를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내적 경험으로부터 자신의 의지작용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동기의 작용이 다른 원인들과 같이 외부로부터 간접적으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직접적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동기에 있어서 우리는 전혀 다른 길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원인이 가장 내부의 본질에 따라 작용을 일으키는 방법의 비밀을 경험한다. 인과성은 여기서 전혀 다른 종류의 인식을 위해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적용되는 인과성을 쇼펜하우어는 행위의 충족이유율이라고 부른다.
행위의 충족이유율은 인식하는 주체에 적용되는 이유율이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인식주체는 자신을 오직 의욕하는 것으로서 인식한다. 의욕은 우리의 모든 인식에서 가장 직접적인 것이다. 의욕의 주체는 자기의식에 직접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지 상세히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의욕이 갖는 직접성은 간접적인 모든 것에 빛을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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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