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친애하는 빅브라더 Liquid Surveillance : 지그문트 바우만, 감시사회를 말하다
지그문트 바우만, 데이비드 라이언 / 오월의봄 / 2014.2.20
– 전화통화, 이메일, 신용카드 기록, CCTV … 왜 세상은 우리를 감시하는가? 왜 우리는 감시사회에 침묵하고 협조하는가? 지그문트 바우만이 밝히는 감시사회의 본질
우리 시대의 가장 명석한 사회 사상가 중 한 명인 지그문트 바우만이 ‘감시사회’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고찰하고 있는 책이다. 감시사회 전문가인 데이비드 라이언 캐나다 퀸즈 대학 교수와 대담한 책이다. 퀸즈 대학의 사회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는 그는 1990년대부터 감시 연구에 집중하며 많은 업적을 남겼다.
바우만은 이 책에서 위의 예시에서처럼 현대의 감시사회가 ‘빅브라더’로 상징되는 감시권력에 의해 이뤄지고 있기는 하나 현대인들의 ‘자발적 복종’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어판 제목을 친애하는 빅브라더라고 붙이게 되었다. 현대인들이 빅브라더로 대표되는 감시사회를 의식하고 비판하고 있긴 하지만, 빅브라더를 용인하고 오히려 이에 충성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바우만은 묻는다.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는 감시가 오늘날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정치적으로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현대인들이 이런 감시사회의 의미를 제대로 감지하고 있을까? 그러면서 감시의 기원을 탐구하면서 감시가 확장되는 것에 따른 정치적 물음들뿐만 아니라 윤리적 물음들도 제기하고 있다.
○ 목차
머리말과 감사의 글 7
서문|우리를 감시하는 세상 10
1장 무인비행체와 소셜미디어 33
2장 자기 스스로 감시하는 소비자들 81
3장 당신은 단추를 누를 때 이를 악물지 않는다 113
4장 불/안전을 감시하다 143
5장 나는 감시된다, 고로 존재한다 171
6장 감시를 윤리적으로 따져보기 187
7장 희망을 희망하다 201
옮긴이의 말 225
미주 231
찾아보기 242
○ 저자소개 : 지그문트 바우만, 데이비드 라이언
– 지그문트 바우만 (Zygmunt Bauman, 1925 ~ 2017)
지그문트 바우만 (Zygmunt Bauman, 1925 ~ 2017)은 1925년 폴란드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를 피해 소련으로 도피한 후 소련군이 지휘하는 폴란드 의용군에 가담해 바르샤바로 귀환했다. 폴란드 사회과학원에서 사회학을 공부했고, 후에 바르샤바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1954년 바르샤바 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 활동했다. 1968년 공산당이 주도한 반유대 캠페인의 절정기에 교수직을 잃고 국적을 박탈당한 채 조국을 떠나, 이스라엘 텔아비브 대학에서 가르쳤다. 1971년 리즈대학 사회학과 교수로 부임하며 영국에 정착했고 1990년 정년퇴직 후 리즈대학과 바르샤바 대학 명예교수로 활발한 활동을 했으며 2017년 1월 9일 9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 데이비드 라이언 (David Lyon)
데이비드 라이언 (David Lyon)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사회학자. 영국 브래드포드 대학에서 사회학과 역사학 분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캐나다 퀸즈 대학의 사회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1970년대에는 역사사회학에서 출발하여 현대사회의 세속화 과정을 연구했으며, 1990년대부터는 감시 연구에 집중하며 많은 업적을 남겼다. 저서로 《9월 11일 이후의 감시》(2003), 《정보사회 : 쟁점과 환상》(1988), 《감시사회 : 일상사의 모니터링》(2001), 《감시사회 : 개관》 (2007) 등이 있다.
– 역자 : 한길석
하버마스의 공영역 이론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한신대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관심 분야는 비판이론을 중심으로 한 사회철학과 정치철학이다. 대표 논문으로는 근대적 연대 형식과 그 도전들, 공영역과 다원사회의 도전 등이 있다. 지은 책으로는 《철학자의 서재》 (공저), 《다시 쓰는 서양 근대철학사》 (공저) 등이 있다.
○ 출판사 서평
– 전화통화, 이메일, 신용카드 기록, CCTV … 왜 세상은 우리를 감시하는가?
왜 우리는 감시사회에 침묵하고 협조하는가? 지그문트 바우만이 밝히는 감시사회의 본질
– 빅브라더, 우리를 감시하는 권력
#1 “내가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기록되는 세상에 살고 싶지 않았다.” 에드워드 스노든은 2013년 미 국가안보국(NSA)이 지구의 모든 데이터를 쓸어 모아 개인들을 감시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그러나 미국 국민의 60%는 스노든이 “국가안보에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고 응답했다. 국가안보를 위해 NSA의 감시활동이 필요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
#2 한 지역의 시민들은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CCTV 설치를 확대해달라고 정부에 요구했다. “안전에 대한 욕구는 중독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무슨 일이든 감시에 의존하게 되었습니다.”(150쪽)
#3 사람들은 주목을 받고자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에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를 올려놓는다. 사적인 것은 이미 가벼운 관계의 ‘사용자들’과 무수히 많은 ‘친구들’이 찬양하고 소비할 수 있는 공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4 한 무인비행체가 2011년 2월 아프가니스탄에 폭탄을 투하했다. 죽은 사람들은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22명의 결혼식 하객. 희생자 중에는 아이들도 있었다. 단추를 누른 조종자들은 ‘수많은 정보로 범벅이 된’ 화면 때문에 판단력을 잃어버렸다고 말했다.(130쪽)
#5 국민카드 등 카드 3사의 고객 정보가 유출되었다. 한국의 소비자들은 신용카드를 사용해야 해서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카드사가 요구한 개인 정보 제공에 동의한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려면 이렇게 자발적 감시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조지 오웰은 소설 1984에서 정보의 독점으로 사회를 통제하는 관리 권력을 ‘빅브라더’라고 불렀다. 에드워드 스노든이 미국 NSA의 ‘지구적 정보감시 체제’를 폭로하자 세계 각국의 언론은 ‘빅브라더’의 존재 자체를 다시금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다. 즉 감시 권력은 우리 주위에 분명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민등록번호만 알면 학교 생활기록부, 건강보험 정보, 은행 거래 내역 등 각종 정보와 인터넷 게시판에 쓴 글까지 알아낼 수 있는 한국에서도 유사한 사태가 연일 벌어지고 있다. 민간인 불법 사찰, 국정원의 감시체제, 경찰의 시위자 감시, 카드 3사의 고객 정보 유출 사태, 각 기업들의 노동자 감시 등. 그리고 ‘주민등록번호 체제를 재고하자’ 등 이에 대한 문제의식도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요즘 뉴스에서 감시에 대한 기사는 이처럼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이것은 감시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영역에서 급격한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는 현상을 반영한다. 오늘날의 시민들, 노동자들, 소비자들 그리고 여행자들은 자신들의 활동이 모니터되고, 추적되고, 조사당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런 ‘감시’가 그 자신들의 협조 덕분에 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 책은 우리 시대의 가장 명석한 사회 사상가 중 한 명인 지그문트 바우만이 이런 ‘감시사회’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고찰하고 있는 책이다(감시사회 전문가인 데이비드 라이언 캐나다 퀸즈 대학 교수와 대담한 책이다. 퀸즈 대학의 사회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는 그는 1990년대부터 감시 연구에 집중하며 많은 업적을 남겼다). 바우만은 이 책에서 위의 예시에서처럼 현대의 감시사회가 ‘빅브라더’로 상징되는 감시권력에 의해 이뤄지고 있기는 하나 현대인들의 ‘자발적 복종’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어판 제목을 친애하는 빅브라더 (원제는 유동하는 감시 : Liquid Surveillance)라고 붙이게 되었다. 현대인들이 빅브라더로 대표되는 감시사회를 의식하고 비판하고 있긴 하지만, 빅브라더를 용인하고 오히려 이에 충성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현대적 감시에서 전면으로 내세우는 이데올로기, 감시에 순응하고 그것에 약간의 의혹을 제기하지만 감시를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감시 게임에 가담하겠다고 결심하는 보통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우리는 시민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로서 역할을 하면서 끊임없이 점검과 감시, 시험을 받고, 평가되며, 값이 매겨지고, 판정을 받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바우만은 묻는다.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는 감시가 오늘날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정치적으로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현대인들이 이런 감시사회의 의미를 제대로 감지하고 있을까? 그러면서 감시의 기원을 탐구하면서 감시가 확장되는 것에 따른 정치적 물음들뿐만 아니라 윤리적 물음들도 제기하고 있다.
– 소수가 다수를 주시하는 파놉티콘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바우만은 ‘유동하는 현대 (Liquid Modern)’ 개념으로 유명하다. 즉 오늘날 현대사회는 너무나 가변적이어서 ‘고정되어 있지’ 않고 이리저리 흘러 다니고 움직이는 ‘유동’하는 단계에 있다는 것이다. 현대의 권력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자유로이 흘러 다닌다. 그러면서 장벽, 울타리, 국경 등을 초월하여 움직이고, 지역에 존재하고 있는 ‘단단한 결속’이나 연대를 깨뜨려버린다. 감시도 마찬가지로 유동하고 있다 (‘유동하는 감시’). “수많은 이론가들은 한때는 단단하고 고정된 것이었던 감시가 점점 더 신축성을 가지고 쉽게 변하며 잘 스며드는 현상, 나아가 삶의 중심 영역에 한정되지 않고 주변부 영역으로까지 퍼져나가고 있는 현상에 주목하고 있다.” 이전의 감시는 ‘고정된’ 것이었다. 이를테면 감시권력이 누구인지 파악이 가능했다. 그러나 ‘유동하는 현대’에 와서는 감시가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방식, 정보를 담아내는 그릇조차 없이 도처에 퍼져가고 있다. 특히 소비 영역에 이르면 감시가 잘 드러나지도 않는다.
제러미 벤담이 기안한 ‘파놉티콘’이라는 감옥을 생각해보자. 그리스어를 꿰맞춰서 만든 이 용어는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장소’ (‘pan’은 ‘모두’, ‘optic’은 ‘본다’를 뜻한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파놉티콘 감옥은 감방을 반원형으로 배열함으로써 통제력을 강화하도록 설계되었고, 중앙부의 ‘교도관’은 수감자들 쪽에서는 보이지 않으면서도 모든 감방을 감시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바우만에 따르면 오늘날의 세계는 탈파놉티콘적이다. 오늘날의 감시자들은 과거의 파놉티콘적 감시자들과는 달리 자리를 지키고 앉아 감시를 할 필요가 없다. 이제는 감시가 누구도 도달할 수 없는 영역으로 빠져나감으로써 홀연히 사라질 수 있다. 현대의 감시 권력은 장벽, 울타리, 국경 등을 초월해버린다. 이런 현상은 다른 얼굴을 한 통제 형식을 가능케 했다. 이제 디지털 기술과 통계적 추론을 활용한 감시는 노동 과정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측정하고, 노동자와 소비자가 스스로 감시받고, 감시하게 만든다.
– 다수가 소수를 주시하는 시놉티콘과 소셜미디어
유동하는 현대세계는 소비자로 이루어진 사회이다. 현대세계에서 감시는 색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제 파놉티콘 방식에서 시놉티콘 방식으로 이동했다. 노르웨이 출신의 사회학자 토마스 마티센이 말한 시놉티콘은 ‘소수가 다수를 주시’하던 파놉티콘과 달리 ‘다수가 소수를 주시’하는 오늘날의 매스미디어를 대비시키면서 만든 말이다. 즉 정보화 시대가 도래하면서 인터넷의 익명성을 통해 다수가 소수를 주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바우만은 시놉티콘이 ‘DIY식 파놉티콘’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즉 유동하는 현대를 구성하고 있는 소비자가 스스로 감시사회를 만들어간다고 것이다. 이전의 감시 권력은 많은 비용을 들여 다수를 감시했지만, 이제는 그 감시를 소비자 자신에게 전가시켜 스스로를 감시사회에 협조하고 충성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구글이나 페이스북을 활용하는 이들은 고백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제 감시는 공포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버려지지 않고, 무시받지 않고, 방치되지 않고, 가입이 거부되지 않는 희망을 재구성하게 된다. 즉 주목받는다는 사실에서 오는 즐거움이 폭로의 두려움을 억제하는 것이다. 페이스북 등 소셜커머스에서 사적인 것을 공개적으로 노출시키는 것을 공적 미덕이자 책무로 알고 살아간다. 그들은 상품 홍보자인 동시에 그들이 홍보하는 상품 자체인 것이다.
바우만은 소셜미디어의 긍정적인 측면도 언급하고 있다. ‘아랍의 봄’과 ‘점거운동’ 과정에서 드러난 대중 참여에서 이루어진 연대와 정치적 조직화가 그 예일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이러한 가능성은 제한적이라고 언급한다. 소셜미디어의 탄생 자체가 상업적 목적에 의해 이루어졌고 (“소셜미디어는 사용자에 대한 모니터링과 타인에게 데이터를 판매하는 것에 의존하여 존재한다”), 거기에 참여하고 있는 다수의 소비자들 또한 별다른 저항 없이 그 소비사회에 의해 스스로를 감금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유동화된 세계에서는 결속을 위한 원천이 없는데다가, 소셜미디어에 내재되어 있는 감시 권력의 존재는 고질적인 것이자 소셜미디어 자체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 바놉티콘과 배제된 사람들
이 책에서 저자들은 오늘날의 감시가 조지 오웰이나 푸코 등이 상상했던 모습과 많이 달라졌다는 입장을 제시한다. 이른바 ‘단단히 고정된 근대’의 파놉티콘적 감시와 달리 ‘유동하는 현대’의 조건 속에 존재하는 현대의 감시는 이 존재 조건의 변화에 상응하여 몇 가지 상이한 질적 특성을 갖추게 되었다.
‘유동하는 현대’의 감시는 일차적으로 ‘배제’의 방식으로 작동한다. 소비사회의 무분별한 경쟁 과정에서 결함 있는 이들로 판정된 사람들은 체계적 분류를 통해 정상사회로의 진입이 거부되어 내던져진 사람들로 영원히 배제된다. 현대의 감시는 이 배제의 과정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도록 새롭게 조정되었다. 이러한 감시 유형은 바놉티콘이라는 용어로 설명된다. “바놉티콘 개념은 아감벤의 영향을 받아 장 뤽 낭시가 발전시킨 ‘추방 (ban)’ 개념과 푸코의 ‘옵티콘 (opticon)’ 개념을 연결시켜 만든 것입니다. 이 장치는 배제되는 사람의 범주를 만들어냄으로써 누가 환영받고 그렇지 않은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국민국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비교적 확실한 형태를 갖추지 못한, 그리고 연합 집단을 형성하지는 못한 세계적 권력으로부터 제공되는 것입니다. 바놉티콘의 주요 목적은 쓰레기를 적절한 제품에서 떼어놓아 쓰레기 처리장으로 이송시킬 것을 확실히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동하는 현대’에서 이루어지는 배제적 감시의 동학은 국가와 같은 거대한 억압적 통치 기구에 의해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체들의 참여를 통해 의도하지 않게 작동된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유동하는 현대’에서 각 개체들은 각 기업과 기관들이 자신의 신상 정보와 행동 궤적을 전자적 데이터로 수집하고 분석하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일정한 서비스를 제공받는 데에 익숙해져 있다. 물론 감시가 불행한 사고를 방지해줌으로써 안전한 삶을 영위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그런 면에서 현대의 감시는 지배와 억압으로서만이 아니라 안전과 돌봄이라는 모습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편리, 안전, 돌봄이라는 이익을 이유로 감시를 허용하는 것은 프라이버시의 자유의 유예 혹은 포기를 의미한다. 각 기업과 국가 및 사회 기관에게 자신의 신상 정보와 사생활을 자발적 혹은 자동적으로 노출시키기 때문이다. 이렇듯 현대인들은 이미 감시의 자발적 용인이 제도화된 사회에 살고 있다.
– 감시에 대한 도덕적 무감각 : 누구도 감시에 따른 배제에 의문을 표하지 않는다
감시에 대한 이러한 무감각은 배제를 용인하게 만든다. 국가는 자신에게 자발적으로 제공된 개인 정보를 기초로 하여 ‘테러 용의자’나 ‘사회적 쓰레기들’을 ‘정상인들’과 구분하여 배제할 수 있다. 기업은 자동적으로 제공된 신상 정보를 통해 소비 능력을 상실했거나 정상적 소비를 지속할 능력이 없는 이들을 선별하여 서비스 제공에서 배제한다. 배제의 공포를 갖게 된 사람들은 국가나 기업이 제공하는 ‘서비스’에서 누락되지 않기 위해 경쟁한다. 누구도 감시에 따른 배제에 의문을 표하지 않으며, 누구도 경쟁에서 탈락한 이들의 미래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는다. 다만 자신이 아직은 쓸모 있음을 증명함으로써 서비스 제공 기간을 갱신하는 경쟁에 전력을 다할 뿐이다. 이른바 ‘유동하는 현대’판 ‘자발적 복종’이다.
한 무인비행체가 2011년 2월 아프가니스탄에 폭탄을 투하했다. 죽은 사람들은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22명의 결혼식 하객. 희생자 중에는 아이들도 있었다. 단추를 누른 조종자들은 ‘수많은 정보로 범벅이 된’ 화면 때문에 판단력을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문화와 정치적인 이유로 망명을 신청한 이가 본국으로 송환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는데도 출입국 심사자는 입국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런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이제 감시는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다. 그래서 도덕적으로 무감각하기까지 하다.
– 그럼에도 희망을 희망하자
현대의 감시는 이처럼 복합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바우만은 현대의 감시가 비록 긍정적 잠재력을 지닐지언정 그것이 유동하는 현대인의 특징인 도덕적 무감각의 조건 속에서 이루어지는 한 긍정적 잠재력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입장을 내보인다. 그렇다면 도덕적 무감각의 조건을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이 현대인에게 부여되고 있는가? 인류의 사회와 삶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실천하게끔 격려해주고 가르침을 주었던 모든 것은 사라졌다. 종교적 믿음은 소멸했으며, 정치적 이념은 붕괴되었다. 도덕적 규범의 신성성을 간직했던 모든 것은 유동하는 현대의 세속화 과정에 직면하자마자 힘없이 쓰러졌다. 인류에게는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럼에도 바우만은 희망을 희망하자고 말한다. 다만 희망에 대한 무조건적 신뢰는 삼가야 한다고 말한다. 희망을 희망하면서도 그것을 의심하면서 희망하자. 의심은 우리의 믿음을 무너뜨리기보다는 그것을 건강하게 해주므로. 바우만이 인용한 역사학자 토니 주트의 말에 바우만의 뜻이 담겨 있는 듯하다. “지금 우리에게는 마치 우리가 미래에도 계속 살아갈 수 있을 것처럼, 그리하여 우리가 하는 말과 행위에 계속 책임을 질 수 있을 것처럼 행동해야 마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 수 있는 미래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행위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미래를 실제로 살지는 못해도 그것을 살아간다는 느낌은 갖게 되는 것입니다.”
○ 독자의 평
지그문트 바우만은 한 가지 주제에 대해서 세계적인 학자들과 대담형식으로 나눈 이야기들을 책으로 내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 혼자 저술한 책들도 많다). 이 책도 그 책 중 하나인데, 지그문트 바우만의 독특한 개념들인 ‘유동하는 현대성’, ‘권력과 정치의 이별’ 등을 이전의 그의 책들에서 반복해서 읽어왔기 때문에 그의 사상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있었기 때문인지 이 책은 그리 어렵지 않게 읽혔던 것 같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 책이 다른 지그문트 바우만의 책과는 다르게 번역이 상당히 매끄러웠던 것 같다. 어떤 지그문트 바우만의 책은 번역투의 문체가 너무나도 심하여 가독성이 떨어져서 읽는데 한참을 낑낑거렸었는데, 이 책은 그에 비해 번역이 상당히 읽기 좋게 되어있었던 것 같다.
우리사회에 만연해 있는 양날의 칼과 같은 감시의 문제. 어떤 이는 반기고 어떤 이는 우려를 표하지만, 확실한건 이 문제를 무자르듯이 쉽게 해결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인권 침해냐 범죄 예방이냐를 놓고 봤을때, ‘감시’라는 측면이 주는 ‘긍정적인 효과’ 또한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고, 문제는 ‘자발적 복종’의 개념처럼 어떤 사람들은 기꺼이 스스로 자신의 정보를 제공하는것을 정말로 ‘즐기기’ 때문이다 (SNS).
개인적으로는 정보유출이나 감시당한다고 여겨지는 것을 불쾌하게 느끼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시놉티콘’ (개념의 뜻은 책에 나온다) 화 (化) 되는 것을 반갑게 여기지는 않지만, 내가 또 다른 입장이나 환경에 놓여지게 된다면 나도 다른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이는 단순히 장, 단점의 문제로만 살펴볼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겨있는 철학적 가치들을 생각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두려움은 공포를 낳고, 공포는 불안을 낳고, 불안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공포를 낳고 … 이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될 뿐이다.
타자에 대한 공포는 인류가 존재했던 이래로 계속되어왔던 문제지만, 이렇게 나 아닌 모든 사람을 나와는 다르다는 이유로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는 적은 있었던가 싶다.
감시가 만연하게 된 인류사적으로 고찰해본 철학적 이유는 1. 인간은 긍정적인 점보다 부정적인 점에 대한 충격을 더욱 크게 받는다 2. 인간은 두려움에 압도되기 쉽고 한 번 두려움에 휩싸이면 그것을 극복하기 쉽지 않다. 더군다나 집단 전체가 두려움에 휩싸였을때는 그런 상태를 ‘지속하는’것이 정상적일 뿐만 아니라 장려되기도 한다 3. 인간은 좀 더 용기가 필요하다 4. 불안은 감염되는 측면이 있다.
우리가 부디 용기를 가지고 우리 사이에 놓인 장벽을 허물어버릴 수 있기를. 인간성의 진정한 회복이 되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 독자의 평 2
파놉티콘. 실제로 감시하는 사람이 없어도 죄수들은 움츠러들었다. 누가 누구를 바라보고 있는지를 알 길이 없기에, 그들은 항시 감시하는 존재를 염두에 두고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 놀라운 구조를 고안한 사람은 벤담이었으나 이를 세상에 널리 알린 이는 푸코였다. 푸코는 1984년 세상을 떠났다. 스마트폰은커녕 개개인이 폰을 들고 다닌다는 개념조차도 성립하기 힘들었던 시대였다. 오늘날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앉은 사람들의 풍경을 푸코가 보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해 본다. 복잡한 파놉티콘 형태의 구조물을 만들지 않아도 사람들은 편리함을 누리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정보를 불특정 다수에게 내어준다. 그 결과가 엄밀히 말해 감시라 할지라도, 자신이 그로 인해 어떤 문제점을 겪게 될지 훤히 앎에도.
감시는 지그문트 바우만이 수십 년 동안 연구해 온 분야다. 1925년 태어난 그에게 시도때도 없이 변모하는 오늘날을 연구한다는 것은 쉽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감시야말로 그가 살아온 시대로부터 현재까지를 아우를 수 있는 보편적인 주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감시의 이면에는 ‘권력’이 살아 숨쉬기 때문이다. 누가 누구를 감시하느냐의 문제는 곧 권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감시할 힘을 지닌 존재와 감시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 이는 전형적인 국가 권력이 비대했던 오래된 과거에도 존재했으며, 자본의 힘을 등에 얻은 다국적기업 등이 판을 치는 현 시점에서도 유효하다.
지그문트 바우만과 함께 감시를 논한 인물은 데이비드 라이언이다. 그는 1970년대 말부터 다양한 분야에 걸친 토론을 바우만과 진행해왔다. 소재가 끊임없이 달라지는 가운데서도 한 가지 변치 않는 게 있었으니 바로 ‘감시’였다.
이제 감시는 형태를 달리해 이전보다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저자들의 대담에서 접할 수 있었던 ‘유동하는 감시 : liquid survilliance’가 얼마나 끔찍한 것일지를 상상해 본다. 도처에 널려 있는 CCTV가 우리의 안전을 지켜줄 것인가. 국가 권력이 아닐지라도 사람들은 제 안위를 위해 이 괴물체(!)의 필요성을 옹호한다. 감시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이 우리의 마음에 거대한 안정감을 선사한다니, 그야 말로 아이러니다. 그나마 CCTV는 형체라도 파악이 가능하다. ‘감시’라는 목적을 직접적으로 제시하지 않아도 우리의 삶, 일거수일투족이 지금도 읽히고 있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무언가를 구입해본 사람이라면 다음 번 접속시 자신이 좋아할 만한 무언가를 추천하는 쇼핑몰의 친절을 경험할 수 있다. 신기하게도 제 마음에 꼭 드는 물건들을 눈앞에 제시해 놓았다. 알파고도 활동하는 세상이 뭔들 못하리. 그러나 이는 기기의 번뜩이는 창의력이나 추리력이 낳은 결과물이 결코 아니다. 내가 무언가를 구입하는 행위 역시도 나를 설명해주는 무언가다. 저들은 내 무의미해 보이는 행동을 오랜 기간 감시한 끝에 나의 기호를 파악한 것이다. 신용카드를 사용하며 위치와 취향을 읽히고, SNS를 사용하며 내 인간관계와 관심사를 들키고야 만다. 도대체 누가 날 감시하고 있는 건지 유심히 살피다 보면 제 발이 저려올 것이다. 도둑은 바로 우리 자신이니까.
익숙해진다는 건 무서운 것이기도 하다. 학살이 지속될수록 나치에 몸담은 사람들이 무감각해졌듯 감시의 연속 속에서 사람들은 감시의 강도가 짙어진다는 것에 대해 하등의 문제의식도 드러내지 않을지 모른다. 감시가 일상이 되고, 내 간과 쓸개, 그 이상을 상대에게 내어준 뒤에도 더 내어줄 무언가가 혹 있지는 않을까 사방을 살피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 이른바 빅브라더 영접이다. 내 자신이 빅브라더가 되어 남 아닌 나를 감시한다. 감시의 주체도 나요, 객체도 나인 상황이다 보니 감시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제기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해감서 우리는 관찰 당하고 싶어하던(?), 평소 우리가 품은 욕망을 충족시키기도 한다. 사회가 우리에게 부여한 욕구, 무의식적으로 우리 안에 키워 온 바로 그 욕구가 우리 자신에 의해 채워진다. 이쯤 되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헷갈리는 게 당연하다.
두 인물이 대담을 한 시점은 2011년이다. 그로부터 다시금 5년의 시간이 흘렀다. 나빠졌으면 나빠졌지 나아지진 않았으리란 생각이 든다. 조금 더 세련된 기제를 사용해 세상은 우리의 숨통을 옭아매고 있다. 그들의 기술은 실로 정교해서 우리를 질식시키지 아니하며, 심지어 우리에게 어떠한 갑갑함도 제공치 않는다. 감시를 당하는 것으로부터 존재의 이유를 발견하기까지 하는 현대인을 어리석다 말할 순 없다. 알고 보면 우리 자신도 끊임없이 감시 당하고 있으며, 감시 당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기에.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