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침묵
엔도 슈사쿠 / 홍성사 / 2005.7.29
– 일본이 자랑하는 현대 소설가 엔도 슈사쿠의 대표 작품 ‘침묵’
배경은 17세기 일본의 기독교 박해 시기. 많은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고 있던 포르투갈 예수회 소속 신부의 선교와 곧 이은 배교(背敎) 소식, 그 배교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잠복한 제자 신부가 겪는 고난과 갈등.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참히 죽어 가는 사람들의 아픔을 외면한 채 침묵만 하고 계신 하나님!
신학적으로 해결하기 난해한 문제, “고난의 순간에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라는 문제를 신앙을 부인해야만 살 수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고민하는 인물들의 내면 묘사를 통해 조용하지만 가슴 뜨겁게 그리고 있다.
– 일본의 소설가 엔도 슈사쿠, 여러 차례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된 적이 있으며, 종교소설과 세속소설의 차이를 무너뜨린 20세기 문학의 거장으로 평가받고 있는 저자의 대표작 『침묵』
이 작품은 그에게 다나자키 상을 안겨 준 것으로 오랫동안 신학적 주제가 되어 온 “하나님은 고통의 순간에 어디 계시는가?”라는 문제를 17세기 일본의 기독교 박해 상황을 토대로 진지하면서도 생동감 있게 그려냈다.
신앙을 부인해야만 살 수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고민하는 인물들에 대한 심리 묘사가 치밀하다는 평을 듣고 있으며, 절제된 고전 기법으로 묘사된 등장인물들의 시련, 일본 문화와 지극히 서양적인 종교 양식의 미묘한 대립 등을 눈여겨볼 만하다.
○ 저자소개 : 엔도 슈사쿠
일본의 대표적 현대 소설가. 1923년 도쿄 출생. 가톨릭 신자인 이모의 영향으로 어머니가 그리스도인이 된 뒤, 엔도도 어머니와 이모의 권유로 열한 살 때 세례를 받았다. 1949년에 게이오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 정부가 수여하는 장학금으로 프랑스 리옹 대학에서 프랑스 문학을 공부했다. 1955년 발표한 《백인》 (白ぃ人)으로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고 《바다와 독약》(海と毒藥)으로 일본 문학가로서 자리를 굳혔다. 여러 차례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었으며, 종교소설과 세속소설의 차이를 무너뜨린 20세기 문학의 거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1996년 사망.
대표작 《침묵》 (沈默)은 그에게 다니자키 상을 안겨 준 작품으로서 오랫동안 신학적 주제가 되어 온 “하나님은 고통의 순간에 어디 계신가?”라는 문제를 17세기 일본의 기독교 박해 상황을 토대로 진지하면서도 생동감 있게 그려 냈다. 신앙을 부인해야만 살 수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고민하는 인물들의 심리묘사가 치밀하다는 평을 듣고 있으며, 영어・ 독일어・프랑스어 등 세계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주요작품으로 《위대한 몰락》, 《예수의 생애》, 《그리스도의 탄생》, 《여자의 일생》, 《지금은 사랑할 때》, 《마음의 야상곡》, 《사해의 언저리》 등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다.
– 역자: 공문혜
○ 책 속으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두 종류가 있습니다. 즉 강한 자와 약한 자, 성자와 평범한 인간, 영웅과 용렬한 자. 그래서 강한 자는 이와 같이 박해받는 시대에도 신앙 때문에 불에 태워지고 바다에 던져져도 모든 것을 감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약자는 이 기치지로처럼 산속을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너는 어느 쪽 인간이냐? 만약 사제라는 자존심이나 의무감이 없다면 저 또한 기치지로와 똑같이 성화를 밟았을지도 모릅니다. -122~123쪽
“저는 신부님을 전부터 쭉 속여 왔습니다. 들어 주시는 겁니까? 신부님이 저를 경멸하셨다면…… 저 역시, 신부님도 동료 신도들도 미워하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성화도 밟았습니다. 네, 밟고말고요. 모기치나 이치소우는 강하지요. 나는 그렇게 강하지 못한 걸 어쩝니까?”
파수꾼이 견디다 못해 몽둥이를 쥔 채 밖으로 나오자 기치지로는 도망가면서 계속 소리쳤다.
“그렇지만 제게도 할 말이 있어요. 성화를 밟은 자에게도 밟은 자로서의 할 말이 있어요. 성화를 제가 즐거워서 밟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밟은 이 발은 아픕니다, 아파요. 나를 약한 자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이 강한 자 흉내를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건 무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건 억지이고말고요.” -177쪽
그는 인간들을 위해 죽으려고 이 나라에 왔던 것인데, 사실은 일본인 신도들이 자기 때문에 잇달아 죽어 갔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행위란 오늘까지 교리에서 배워 온 것처럼, 이것이 옳고 이것이 나쁘고 이것이 선하고 이것이 악하다는 식으로 정확히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208쪽
신부는 발을 들었다. 발에 저린 듯한 무거운 통증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히 형식만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해 온 것, 가장 맑고 깨끗하다고 믿었던 것, 인간의 이상과 꿈이 담긴 것을 밟는 것이었다. 이 발의 아픔. 그때, 밟아도 좋다고, 동판에 새겨진 그분은 신부에게 말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신부가 성화에 발을 올려놓았을 때 아침이 왔다. 닭이 멀리서 울었다. -267쪽
그 성화 위에 나도 발을 놓았다. 그때 이 발도 움푹 들어간 그분의 얼굴 위에 있었다. 내가 수없이 생각한 얼굴 위에. 산속에서 방황하고 있을 때, 옥사에서 언제나 생각해 내며 따뜻한 위로를 받았던 그분의 얼굴 위에, 인간이 생존해 있는 한 선과 아름다움 그 자체인 얼굴 위에. 그리고 평생을 사랑만을 베풀려고 했던 그분의 얼굴 위에. 그 얼굴은 지금 성화판의 나무판자 속에서 닳고 패어 버린, 그리고 슬픈 듯한 눈을 하고 이쪽을 보고 있다. “밟아도 좋다”라고 슬픈 듯한 눈빛으로 나에게 말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은 지금 아플 것이다. 오늘까지 내 얼굴을 밟았던 인간들과 똑같이 아플 것이다. 하지만 그 발의 아픔만으로 이제는 충분하다. 나는 너희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겠다. 그것 때문에 내가 존재하니까.’
“주여, 당신이 언제나 침묵하고 계시는 것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었을 뿐.” -293쪽
○ 출판사 서평
- 일본이 낳은 최고 현대소설가 엔도 슈사쿠의 대표 작품
17세기 일본의 기독교 박해 상황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소설적 재미를 곁들여 진지하면서도 생동감 있게 서술하고 있다. 많은 사람에게 신뢰를 얻고 있던 포르투갈 예수회 소속 신부 페레이라의 선교와 곧 이은 배교(背敎) 소식, 그 배교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잠복한 제자 신부 로드리고가 겪는 고난과 갈등.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참히 죽어 가는 사람들의 아픔을 외면한 채 침묵하고만 계신 하나님!
신학적으로 해결하기 난해한 문제―“고난의 순간에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를, 신앙을 부인해야만 살 수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고민하는 인물들의 내면 묘사를 통해 조용하지만 가슴 뜨겁게 그리고 있다.
특별히 이번에 펴내는《침묵》개정증보판은 국내 유일의 정식 저작권 계약본으로서, 한국어판 출간 20주년을 기념하여 양장본과 보급판을 동시에 내 놓았다. 양장본과 보급판의 내용은 동일하며, 가볍게 들고 다니며 읽고자 하는 독자는 보급판을, 선물이나 소장을 목적으로 하는 독자는 양장본을 선택하면 된다. 또 이번 개정증보판에는 저자 후기와 해설을 수록, 우리말 표기법에 따라 인지명도 통일하였다.
○ 추천평
『침묵』에는 엔도 특유의 재능인 인상적인 발단, 대담한 역사적 상황 설정, 신학으로 해결하기 난해한 문제, 거리낌 없는 성격 묘사 등이 잘 나타난다. 절제된 고전 기법으로 묘사된 등장인물들의 시련, 일본 문화와 지극히 서양적인 종교 양식의 미묘한 대립 등이 엔도가 이 책에서 그려낸 업적이다. — 퍼블리셔스 위클리
이 작품의 기조 (基調)는 그렇게 잔인한 박해에서도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신봉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인지를 반문하는 데 있다. 어째서 이러한 시련을 견뎌야 하는지 물어도 하나님은 대답이 없으시다. 하나님이 대답하시지 않는 것은 거기에 하나님의 예지 (叡智)가 있고 하나님의 사랑이 있어서이지만, 엔도 씨의 작품은 그 점에 얽힌 또 다른 문화사적인 해답을 제시한 문제작이다. — 가와카미 테츠타로우
○ 독자의 평
- <침묵>의 시대적 배경
콜럼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게 된 배경에는 여러 가지 이설 (異說)이 있다. 사회학자들 중에 ‘지중해의 몰락’을 그 배경으로 지목하는 학자도 있다. 1453년 5월 29일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이스탄불)이 함락된 후 지중해는 이슬람의 앞마당이 되었다. 그 결과 경제도시 베네치아와 제노바에 어두운 서막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슬람에 의해 모든 여건이 불리해진 지중해는 부(富)의 축(軸)을 지중해의 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스페인과 포르투갈로 서서히 옮기게 만들었다. 결국 새로운 부를 찾아 새 바다를 찾아 나서게 됐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이슬람에게 두려움을 느낀 유럽인들에게 새로운 소문거리가 그들의 머릿속을 점령하기 시작한다.
이슬람이 이렇게 힘이 강한 것은 인도에 사탄이 정착하여 복음 전파와 예수 재림을 방해하기 때문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한몫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이슬람의 공포 속에 예수의 재림이 절망적으로 필요한 시기가 도래했다. 사탄을 처치하고 예수의 재림을 위해 인도로 가는 길을 찾아야 했다. 서쪽에 이어 동쪽으로 가는 방법도 그 대상이 되었다.
이슬람에 의해 빼앗긴 지중해에 대한 새로운 대안으로서 새로운 바다를 찾아서-그리고 그런 이슬람을 막아줄 재림하실 예수를 찾아서-그들은 새로운 곳을 향하기 시작한다. 인도를 찾아 서쪽 방향으로 대서양을 항해하고 반대의 경로를 찾아 동쪽으로 온다.
가톨릭 성인(聖人)중 한분이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자비엘) 신부는 그즈음 일본으로 온다. 예수의 재림을 방해하는 사탄을 찾아 복음을 전하고자 포르투갈 소속의 예수선교회 소속으로 인도를 거쳐 일본으로 온다. 소설<침묵>의 역사적 배경이다. 역사적으로 그 시기에 예수선교회와 파리외방선교회의 선교 싸움은 시작된다. 교황청과 정치적 갈등에서 밀린 예수선교회의 결과론적인 실패는 파리외방선교회의 입지를 굳히게 된다.
1549년 일본에 가톨릭이 전해졌을 때 일본 사람들은 가톨릭 신자들을 키리시탄 (切支丹-포르투갈 Christao에서 유래)이라 칭했다. 그 후 1612년 공식적으로 일본의 에도 막부(幕府)는 키리시탄 탄압에 들어간다.
천주교가 일본에서 초기선교활동에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개혁적 지식인들을 위한 새로운 지식의 원천으로서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고, 평민들은 처음으로 천주교 속에서 인간적인 따뜻함을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천주교 전래과정과 아주 흡사하다. 그러나 에도 막부는 쇄국정치를 선포하고 막강한 독재정치를 실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천주교를 금지하고 탄압한다. 기득권자들이 정치적으로 이용하고자 박해를 가했던 역사는 한일 양국이 똑같았다.
그 이전에 이미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나가사끼에서 사제와 신자 26명을 화형에 처하면서 향후 300년간 박해는 예고되었다. 1614년이 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아예 사제들과 골수 신자 70여명을 마카오와 마닐라로 강제 추방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처럼 억압과 탄압 속에서도 순교의 정신으로 신앙의 불꽃이 더욱 활활 타오르듯 일본신자들 역시 그랬다.
일본이 천주교를 버리고 쇄국으로 가는 길은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부귀와 영달을 위한 선택이었다. 전국시대 말기와 막부(幕府)시대 초기 일본은 포르투갈을 통해 서구문명을 받아들이지만 앞선 그들의 문물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는 곧 선진강대국의 문화흡수와 막부체제 유지의 두려움으로 나타났다.
이 시기에 신교 국가인 영국과 네덜란드, 천주교 국가인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개별적으로 일본인들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이에 막부는 권력과 체제 유지를 위해 심한 불안감을 들어냈다. 곧이어 쇄국 (鎖國)을 선포했다.
일본이 쇄국에 성공한 이유는 위 네 나라가 국제관계에 변화가 생기면서 일본에 대한 관심을 멀어지게 만들었고, 이어 극동이라는 지리적 요건은 한 번 더 그들의 충족권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 결과 일본은 외국인을 추방함과 동시에 가톨릭을 전면 금지 시켰다. 이런 권부(權府)의 선택은 일본경제의 몰락을 불러왔고, 후진농업경제로 전락하여 귀족이나 무사계급을 제외하고는 상상할 수 없는 고통속의 하층 농어민들을 양산했다.
- <침묵>이라는 소설
가톨릭이 금지된 가운데 <침묵>은 일본 가톨릭 신자들의 박해받는 역사를 고증적 입장에서 써나가고 있다. 역사소설이면서 신앙인들의 휴머니즘을 강렬하게 전달하고 있는 종교적 실존 소설이다.
16세기 중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자비엘) 신부의 선교로 시작된 예수회의 일본 천주교 선교 사업은 80여년의 세월이 흘러 주교 페레이라 크리스토반의 배교로 막을 내리게 된다. 소설은 1632년 크리스토반 주교의 박해보고서라는 실증적이며 역사적인 사실에서 시작된다.
따뜻한 로마에 앉아서 명령을 내리는 사제(司祭)들의 수장(首長)들은 머나먼 곳 일본에서 선교를 위해 애쓰다 배교(背敎)를 선택한 신부들을 단순히 하느님 앞의 배신자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배교를 택한 그들의 선택에는 하느님 앞에 단독자인 인간이 만들어낸 인간적인 고뇌의 아름다움이 숨어 있다. 바로 인간은 실존적 존재이기에 배교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배교 역시 실존의 문제로 고민하는 인간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이렇게 배교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주인공 신부 (神父) 로드리꼬의 고뇌를 박해 (迫害)와 배교 (背敎)의 관점에서 그려내고 있다.
작가는 배교의 타당성을 말하지 않지만 ’배교가 하느님이 보여주는 또 다른 사랑의 표현‘ 임을 묵시적으로 표현한다. 그렇다고 배교가 아름답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 앞에 나약한 인간의 선택인 것이다. 우리나라도 정약용 형제들의 배교와 순교가 있었고, 황사영의 백서 (帛書)사건, 이벽의 죽음, 모두 현실의 신앙 앞에 생과 사의 문제를 놓고 자기신앙 앞에 선택을 달리 하는 인간의 모습인 것이다. 김훈의 <흑산>이 이런 문제를 다뤘다고 하는데 아직 읽어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기찌기로의 배반으로 붙잡힌 로드리꼬 신부는 정통 신앙의 관점으로 보면 순교로서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배교한 주교 크리스토반 역시 그 길을 선택해야 했다. 그러나 가톨릭의 양심에서 보면, 순교는 순교라는 명예를 쓰고자, 순교라고 부르는 아름답고 고상한 죽음을 억지로라도 만들어 가야하기에 현실의 순교는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일 것이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이 자비의 하느님이시라면 자기를 믿다 목숨을 내놓은 힘없는 인간들에게 어떤 마음이 우러러 나올까? 하느님은 과연 그들에게 순교를 강요하실까? 이것이 작가가 던지는 화두 (話頭)다.
로드리꼬 신부는 고뇌에 빠진다. 천주(天主)를 믿고 죽어서 천국에 가면 연공징수도 없고 계급의 귀천도 없고 굶주림, 질병, 고통도 없다는 말만 믿고 그를 따라 나섰던 선량한 농민들에게 이제 자신의 선교활동은 고통과 죽음을 연계시키는 다리가 되고 만다. 그로인한 자괴감과 나로 인해 남이 죽는다는 그 어떤 것도 정당화 시킬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된다.
로드리꼬 신부에게 배교를 강요하고 검문하는 심문관은 로드리꼬가 일본 땅에서 그토록 만보고 싶었던 페레이라 주교로 소설 속 반전은 일어난다. 배교 가능성이 없다고 믿었던 그는 사와노라는 일본인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페레이라는 그에게 일본인들의 신 (神) 관념에 대한 것을 설명하며 구원이 선택이라는 화두를 던진다. 결국 페레이라를 통해 신부의 배교는 결국 신자들을 살리기 위한 하느님의 선택적인 자비임을 작가는 전한다. 신자들을 살리는 것이 곧 신부로서 올바른 신앙의 행동이며 구원이지 모두를 죽이는 순교는 잘못된 선택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구멍매달기의 고통이라면 예수도 배교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작가에 의하면 온갖 고문과 배교의 권유로 배교를 선택한 페레이라신부의 행동은 다른 의미로 종교적 경건함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부의 배교는 신자들을 살리고 다시 그들에게 꺼져가는 신앙을 되돌리는 수단으로서 기능을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 하늘에 계신 높으신 분은 아무 대답도 없이 ‘침묵’으로만 일괄한다.
- 하느님의 침묵과 신정론 문제
항상 하느님은 옳으시다는 신정론 (神正論)이 옳은가? 이 문제는 항상 전능하신 하느님에 대한 집요한 반항아적인 질문이다. 그리고 교회는 대답 없이 침묵으로만 일관하는 하느님은 다만 때를 기다리실 뿐이지 항상 바른 길로 인도하신다는 둥글 넙적한 답변으로 신정론을 고수한다.
소설 속의 배교는 정말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교리가 금지하는 배교, 그래서 권장하는 순교의 사이에서 현실은 배교가 가까이 있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배교를 금지한다. 단 힌두교와 불교는 타종교와 비교해서 특별히 심한 말이 없다. 그러나 배교와 순교의 갈림길. 즉,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침묵으로만 지켜보고 계시는 하느님이 있다면 어느 길로 걸어들어 가야하나? 내 생각에는 용서를 빌고 배교의 길로 선택하기가 쉬울 것 같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뿐이지 순교할 만큼 신앙의 그릇이 아니기 때문이다.
<침묵>은 침묵하는 하느님이 과연 옳으신 하느님인가? 과연 전능하신 하느님인가? 라는 문제를 던진다. 이런 문제에 부딪히면 유신론자나 무신론자나 과연 교회가 가르치는 신정론은 허구가 아닌가? 라는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
이 소설을 통해, 지상의 고통에 대해 하느님의 ‘침묵’이 과연 신앙의 위험에 처한 그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렇다면 과연 하느님은 옳고 정당한지를 작가는 말하고 싶어 한다.
1755년 리스본을 강타한 지진으로 하루 밤사이에 이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일시에 목숨을 잃었다. 리스본 참사를 보면서 유럽인들은 전설로만 떠돌던 폼페이 (1755년은 아직 발굴 전이다)의 멸망과 아틀란티스의 침몰, 크레타 문명의 말살이 현실에도 일어난다는 공포심이 급격히 팽배해기지 시작했다. 이런 공포를 보며 지식인들은 계몽주의 정신과 맞물려 신정론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일기 시작했다.
니체는 19세기 사회가 아직까지 종교적인 구습의 힘을 사용해 인간의 개성을 죽이는 것을 보고 초인(超人)의 도래를 학수고대하며 “신은 죽었다.”를 외쳤다. 일이차 세계대전과 아우슈비츠의 고통, 히로시마의 원폭을 보면서 비기독교인들과 기독교인들에게 신을 과연 옳은가? ‘악은 선의 양념’, ‘악은 선이 잘못된 것’ 이라는 말로 신정론을 정당화할 수 없음을 남겼다. 아무리 신정론을 외쳐도 악의 존재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이미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가 악을 인정하고, 죄인들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용서하시고 사람들이 하느님에게 믿음을 가지는 순간 인간은 의롭게 (의화, 義化) 된다는 구체적인 관계로 악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하더라도 현실 속의 악은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신정론을 위협하는 악의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난 이유기도 하다.
왜 내가 신정론에 대해 언급을 하냐하면 페레이라와 로드리꼬의 배교에는 신정론이라는 무거운 주제가 담겨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전지전능하신 분이 왜 고통을 만들었으며 고통을 보면서 아무런 대답을 못하는가? 침묵으로만 일관하는가? 라는 문제는 신 존재가 부존 (不存)함을 증명하기에 필요충분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하는 작가의 구성력은 다음의 글귀에서 작가의 천재성을 나타낸다고 나는 단언한다. 바로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고 핵심이다.
‘그때, 밟아도 좋다고 동판에 새겨진 그 분은 신부에게 말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서 태어났고, 너희들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신부가 성화에 발을 올려놓았을 때 아침이 왔다. 닭이 멀리서 울었다.’
침묵하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희열의 순간이다. 로드리꼬 신부가 자기 내면에서 튀어나오는 하느님과 그의 외아들의 음성을 듣는 순간이다. 그 순간 배교는 자비로 거룩하게 변화고, 순교를 버림으로서 많은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올바른 신앙의 행동임이 분명해진다.
나는 여기서 작가의 위대한 힘을 보았다. 위기에 몰렸던 신정 (神正) 문제가 일시에 해결되는 것이다. 결국 배교를 선택한 신부를 통해 하느님과 가장 신앙적이게 통교 (通交)하는 것이다. 신앙과 배교는 하나라는 의미를 선포하고 있다. 베드로가 배반의 눈물을 흘렸던 닭 울음소리가 아니라, 배교를 통해 하느님을 만나는 신 (新) 새벽을 알리는 닭 울음소리다.
성화를 밟음으로서 로드리꼬는 사제로서 모든 것을 잃었다. 그러나 그는 스승 페레이라를 진정으로 알게 되었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났다. 이보다 더 인간적일 수는 없다. 배교를 통해 하느님 앞에 단독자로서 가장 떳떳하게 서는 순간이다. 하느님의 침묵은 배교도 진정한 신앙임을 침묵하시는 것이다.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땅에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타고난 행복이다. 시간을 거꾸로 돌려 천주교를 금지시켰던 조선 말기나, 국교로 정한 종교 외에 타 종교를 가질 수 없는 나라나, 종교적 소수자들에게 핍박을 가하는 나라에 태어났다면 나라는 사람은 어떤 행동을 취했을까? 나도 모르겠다. 다만 죽음이 무서워 신앙을 포기했을 것이고, 종교권력이 무서워 국가가 정한 종교를 억지로 믿었을 것이며, 핍박이 두려워 배교를 택하고 다수의 종교로 가지 않았을까? 라고 단언한다. 그러니 지금 모든 이의 신앙은 상황에 따라서는 배교자가 될 수도 있다는 나의 영역 밖의 생각도 해본다. 설사 그렇다 치더라도 <침묵>은 어떤 배교자가 되어야하는지 그 방향을 인도하는 등불이 된다. 내가 살기위해 남을 죽이는 배교자가 아닌, 나로 인해 내 안에 나의 것이 지켜지며 타인들을 살리는 방법으로…
4.읽기를 마치며
어떤 책을 읽다 빠져들면 그 책의 작가가 좋아지고 그 작가의 출판된 작품을 전부 읽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에게 <침묵>의 작가 엔도 슈사꾸 역시 그런 작가들 중에 한명이다.
그의 모든 작품에는 하느님과 진한 휴머니즘이 등장한다.
일본 초기의 천주교 선교사와 박해를 다룬 작품으로 <침묵>이외에 <여자의 일생>, <위대한 몰락 – (원제목, 시(侍)-사무라이)>이 있다.
<여자의 일생>은 사랑하는 이가 키리시탄-천주교 신자-이기에, 그 남자가 받는 온갖 형벌에서 그를 구해내려하다 죽어가는 성 (聖)스러운 매춘부의 일생을 그렸다.
<위대한 몰락>은 일본 선교 활동의 대가로 주교 자리를 노리던 신부가 결국 막부의 박해로 본인이 몰락한 후 비로소 하느님에 대한 참 신앙에 눈을 뜨는 이야기다. 신앙을 증거하며 살다간 사람들의 초여름 풀잎에 맺힌 이슬과도 같은 이야기다. 아쉽게도 두 권의 책이 지금 절판인 것으로 알고 있다.
작가에게 하느님은 항상 사랑과 선의 하느님이며, 성스러운 하느님이고, 인격적인 하느님이다. 작가는 예수의 생애를 다루는 글도 남겼다. <사해의 언저리>와 <예수의 생애>다.
전작은 이상 (理想)으로 대하는 예수가 아닌 예수 시대의 현실적 예수를 그리고 있다. 신격화 되어있는 예수가 아닌 인간 예수에 치중하고 있다. 후작 <예수의 생애>역시 인간적인 예수를 그리고 있다. 두 책 다 신격화된 예수보다는 고뇌하는 인간적 모습의 예수를 그린다. 신화를 배제하고 인간화를 추구하는 사실적이고 역사적인 예수에 많은 비중을 둔다.
이제껏 예수의 일생을 다룬 저작물 중 최고의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는 예수의 일대기가 에르네스트 르낭의 <예수전>이다. 이 역시 교회가 전통적인 교리에서 신앙의 대상으로서 다루는 신성화된 예수가 아니라 고뇌하는 인간적 예수를 다루고 있다. 르낭의 사상적 흐름과 엔도 슈사꾸의 사상적 흐름의 맥락은 많은 부분이 일치한다. 정통 신학적 관점과 다르게 균형에 벗어나 신성 (神性)보다는 인성 (人性)의 예수를 지나치게 다루므로 논쟁의 여지는 있다. 르낭과 엔도 슈사꾸, 둘이 어떤 신학적 사조(思潮)에 영향을 받았던 아니던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투사한 예수에 집착한다.
그러나 엔도 슈사꾸의 모든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서로 주고받는 사랑의 메아리다, 라고 단언한다. 그중에 <침묵>이 최고의 압권이다.
이 소설은 하느님의 침묵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로드리꼬를 통해 해명한다. 나는 로드리꼬처럼 그런 음성을 듣지 못했다. 솔직히 들으려고 절박하게 매달려보지도 않았다. 그런 나를 위해 로드리꼬 신부는 대신 말해준다. 하느님은 길을 가도 계시고 잠을 자도 계시다는…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