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카이사르의 내전기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 사이 / 2005.9.7
8년간의 갈리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카이사르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승리의 영광이 아니라 원로원과 폼페이우스의 배신이었다. 군대를 해산하고 원로원의 명령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국법을 어기고 동족간의 전쟁을 감수할 것인가. 카이사르는 결심한다.
“이 강을 건너면 인간 세계가 비참해지고, 건너지 않으면 내가 파멸한다. 나아가자, 신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주사위는 던져졌다!”
로마 역사 최대의 위기 내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여론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기』에 이어 『내전기』를 집필하게 된다. 로마 원로원들과 폼페이우스의 음모, 그리고 그에 대응하는 카이사르의 반격으로 시작하는 『내전기』는 내전의 완전 종결까지를 다루지 못하고 이집트의 내전 상황을 기록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내전이 끝난 지 일년 만에 카이사르가 원로원 의원들에게 암살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로마는 또 다른 내전에 휩싸이게 된다.
이 책의 앞부분에는 『내전기』 원본만으로는 내용을 알 수 없는 당시 로마의 정치적 상황과 카이사르의 삶을 설명하는 글과 카이사르가 암살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전에 출간된 『갈리아 전쟁기』가 그랬듯이 충실한 주석과 그림 자료로 2,000년 전의 이야기를 읽는 독자들이 책의 내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갈리아 전쟁기』를 읽고 카이사르의 또 다른 글을 기다려왔던 독자들에게 카이사르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기쁨을 선사하는 책이다.
– 카이사르가 긴박한 내전의 상황에서 직접 기록한 ‘내전기’를 번역한 책
카이사르가 집필한 책 중에서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책은 ‘갈리아 전쟁기’와 ‘내전기’ 단 두 권뿐이다.
‘내전기’는 ‘갈리아 전쟁기’에 이어 로마 원로원들과 폼페이우스의 음모, 그리고 그에 대응하는 카이사르의 반격으로 시작된다.
‘내전기’에는 기원전 49년부터 기원전 48년까지의 내전 상황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내전은 기원전 45년에 끝이 나지만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죽음과 자신이 알렉산드리아에 입성하게 되는 상황에서 집필을 끝낸다. 그리고 그는 내전이 종료된 후 일 년 만에 암살당한다.
이 번역서에는 카이사르의 암살 장면을 순간 포착하여 네 컷으로 연속적으로 표현한 그림과, 폼페이우스의 암살 장면, 그리고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가 처음 만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 등 진귀한 시각 자료들을 담았다.
또한 당시의 전투 상황을 보여주는 지도와 기원전 로마의 모습, 로마군의 무기 등의 그림들을 함께 실었다.
○ 목차
[서문]
위기의 로마, 누구에게 손을 내밀 것인가
반역자가 된 카이사르, 전쟁을 선포하다
카이사르, 그의 삶과 죽음
[제1권] 내전의 시작
로마 안에서의 음모
카이사르의 반격
코르피니움 정복
폼페이우스, 로마를 탈출하다
로마, 무혈입성하다
마실리아의 전운
일레르다, 카이사르를 고립시키다
브루투스의 해전 승전보
카이사르의 승리, 히스파이나 전투
[제2권] 승리와 패배
마실리아 공성전
히스파니아 최종 장악
마실리아, 백기를 들다
쿠리오의 아프리카 전투
쿠리오의 죽음, 패배의 시작
[제3권]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대격돌
전쟁을 준비하는 폼페이우스
에피루스 회담
카일리우스의 반란
안토니우스의 시련
마케도니아의 부정들
다라키움 공방전
카이사르의 작전, 실패하다
카이사르, 테살리아로 가다
품페이우스의 추격
최대의 결전, 파르살루스 대전투
폼페이우스의 최후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클레오파트라
카이사르 연표
○ 저자소개 :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Gaius Julius Caesar, BC 100년 7월 12일 – BC 44년 3월 15일)
고대 로마 공화정 말기의 군인·정치가. BC 100년 7월 13일에 태어났다. 7월을 가리키는 영어의 July는 카이사르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민중파인 마리우스와 인척 관계로 원로원파인 술라가 권력을 잡고 있을 때는 민중파인 아내와의 이혼 명령을 거부하고 여러 곳을 떠돌며 숨어 지냈다. BC 78년 술라가 죽은 뒤 로마로 귀환, 정치생활을 시작하였으며 BC 69년에는 재무관, BC 65년 안찰관(按察官)을 거쳐 BC 63년 종교상 최고직인 종신 대신관이 되었다. BC 60년에는 폼페이우스 및 크라수스와 동맹을 맺고 제1차 삼두정치를 시작하였다. BC 58년∼BC 50년, 속주 갈리아의 장관으로서 갈리아 전쟁을 수행, 브리튼과 게르만 족의 영지까지 아우르는 광대한 영토를 대부분 평정하였다.
BC 53년 삼두체제의 한 중심인 크라수스가 동방원정에서 전사함으로써 원로원 보수파와 갈등을 빚기 시작했으며 BC 51년 원로원이 카이사르의 로마 소환과 군대해산을 결의하자, BC 49년 1월에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유명한 말과 함께 갈리아와 이탈리아 국경인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함으로써 내전을 시작하였다. BC 45년 3월에는 폼페이우스의 아들까지 진압함으로써 마침내 5년간의 내전을 종결시켰다. BC 46년에 10년 임기의 독재관이 되었고, 곧이어 BC 44년에는 종신 독재관이 되었다. 율리우스력을 제정하고 노예에게 관직을 허용함으로써 로마 시민권을 대폭 확대하는 한편 대규모 토목사업을 벌여 로마를 정비하는 등 개혁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지나친 권력의 집중을 견제하고자 했던 원로원 공화파와 공화정 지지자들에 의해 BC 44년 원로원에서 암살되었다. 그의 나이 56세 때였다.
– 역자 : 김한영
서울대 미학과 졸업. 서울예대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했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 역서로 『언어본능』, 『빈 서판』, 『본성과 양육』, 『에필로그』, 『사랑을 위한 과학』, 『디지털 생물학』, 『만화의 역사』, 『미국의 거짓말』 등이 있다. 『빈 서판』으로 45회 한국백상출판문화 번역상을 수상했다.
○ 책속으로
인간은 누구나 보이지 않는 것과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 때문에 지나친 자신감과 두려움을 품게 되는 오류를 범한다.— p.125~126
전쟁에서는 사소한 일들이 크게 확대되어 엉뚱하고 심각한 결과를 낳는 법이다.— p.63
훌륭한 사령관이라면 검을 휘두르기보다는 작전으로 더 큰 승리를 얻어야 하지 않겠는가?— p.107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믿는 경향이 있고, 다른 사람도 자신과 똑같이 생각하기를 바랐다.— p.149
행여 하늘이 잠시 우리를 외면한다면,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천운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당한 패배는 누구의 잘못도 아닌 우리 자신의 잘못이기 때문이다.— p.235
폼페이우스는 모든 병사들에게 전향한 두 기병대장을 자랑삼아 보여주었다. 두 사람은 귀족 출신으로 지위가 높았으며, 여러 명의 부하와 말을 대동했을 뿐 아니라 용맹함으로도 명성이 높아 카이사르가 특별히 아끼는 자들이었다. 게다가 이것은 처음 있는 특별한 사건이었다. 지금까지는 에피루스와 아이톨리아를 비롯해 최근에 카이사르의 수중에 들어오게 된 지역 출신의 병사들이 폼페이우스 진영에서 카이사르의 진영으로 넘어오는 사건은 매일 발생했지만, 보병이든 기병이든 카이사르의 진영에서 폼페이우스 진영으로 탈주한 자는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두 기병대장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카이사르의 포위망에서 어느 부분이 완성되지 않았는지 알고 있으며, 어느 분양의 군사전문가가 부족한지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아군의 일과표와 초소 간의 거리 그리고 각 초소를 맡은 지휘관의 기질이나 성실성과 그에 따른 경계 태세의 차이도 눈여겨 봐두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폼페이우스에게 보고했다.— p.225~226
바로 그때 카이사르는 제자리를 지키며 대기 중이던 제3열 병사들에게 진군명령을 내렸다. 부상을 당하지 않은 새 병력이 지친 병력의 자리를 메우고 또 다른 병력이 후방에서 공격을 퍼붓자 폼페이우스 군대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모두 등을 돌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카이사르가 병사들을 독려하면서 단언했듯이 그날의 승리는 역시 기병을 막기 위해 제4열에 배치한 대대들에게 달려 있었다. 폼페이우스의 기병을 격퇴한 것도 그들이었고, 투석병과 궁수들을 쓸어버린 것도 그들이었으며, 폼페이우스의 좌익을 포위하고 적을 패주시킨 것도 그들이었다. 패주하는 기병의 모습과 가장 믿었던 병력이 공포에 빠져 우왕좌왕하는 것을 눈앞에서 목격한 폼페이우스는 말을 몰고 곧장 진영으로 돌아가 진문 앞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백인대장들을 향해 모든 병사가 들을 만큼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적을 경계하고 온 힘을 다해 진영을 방어하라.” 그런 다음 사령부로 돌아가 그의 전운에 먹구름이 몰려오는 것을 느끼며 결과를 기다렸다.— p.255~256
○ 출판사 서평
– 로마 역사상 최대의 위기 상황, 카이사르를 배신한 폼페이우스, 루비콘 강을 건너 반역자가 된 카이사르, 그 한복판에서 카이사르가 직접 쓴 로마 내전의 생생한 기록
“이 강을 건너면 인간 세계가 비참해지고,
건너지 않으면 내가 파멸한다.
나아가자, 신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주사위는 던져졌다!” — 카이사르
– 루비콘 강 앞에 선 카이사르, 책을 집필하다
로마의 명장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49년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과 함께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시작되는 로마의 내전 상황을 카이사르 자신이 직접 기록한 『내전기』가 <사이>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 보기 힘들었던 다양한 시각 자료가 들어간 책
특히 이번에 출간된 『내전기』에는 <카이사르의 암살 장면>을 순간 포착하여 네 컷으로 연속적으로 표현한 그림과, 폼페이우스의 암살 장면, 또한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가 처음 만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 등 진귀한 시각 자료들이 풍성하게 들어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전투 상황을 보여주는 지도와 기원전 로마의 모습, 로마군의 무기 등의 그림들도 함께 실려 있어 독자들은 생생한 역사의 현장 속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 전쟁터에서도 붓을 놓지 않는 카이사르의 대표작
이 책은 무사 (武士)로서뿐 아니라 당대 최고의 문사 (文士)로서 뛰어난 문장력을 보이며 전쟁터에서도 집필을 멈추지 않았던 카이사르가, 긴박한 내전의 상황에서 직접 기록하여 2천 년 전에 출간한 책을 번역한 것이다. 카이사르는 여러 책을 집필했는데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책은 『갈리아 전쟁기』와 『내전기』 단 두 권뿐이다. 『갈리아 전쟁기』는 카이사르가 로마군을 이끌고 기원전 58년부터 8년간 지금의 서유럽 일대인 갈리아 지역을 정복하는 이야기를 담은 책으로, 객관적인 서술과 냉철한 관찰력, 절제된 문장 등으로 세계 전쟁 문학의 고전으로 손꼽힌다. 국내에서는 올 7월에 <사이> 출판사에서 소개되어 한 달 반 동안 5천 부가 판매되는 등 꾸준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 <갈리아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이젠 <내전>이다
『갈리아 전쟁기』의 끝과 『내전기』의 시작 부분은 서로 내용이 이어진다. 『갈리아 전쟁기』는 카이사르가 로마를 떠나 이민족들과 힘겨운 전쟁을 벌여 승리를 코앞에 두었을 때, 그를 해치기 위한 음모가 로마 안에서 진행되는 것을 카이사르가 알게 되는 상황에서 끝이 난다. 이어 『내전기』는 로마 원로원들과 폼페이우스의 음모, 그리고 그에 대응하는 카이사르의 반격으로 글이 시작된다. 따라서 연대순으로 기록된 이 두 권의 책은 독립된 별개의 책이라기보다 전편, 후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이민족과의 기나긴 전쟁>을 끝낸 카이사르 앞에 숨돌릴 틈도 없이 또 다른 전쟁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동족과의 전쟁>을 치러야 하는 <내전>이다.
위대한 군인이며 정치가이자 뛰어난 집필가인 <카이사르>, 해적 소탕과 오리엔트 제패로 국가적 영웅이 된 <폼페이우스>, 무대 위의 두 영웅, 그들 중 누가 살아남아 로마를 지배할 것인가?
– 이민족과의 전쟁으로 영웅이 된 카이사르, 로마는 그를 두려워한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로마는 도시 국가에서 벗어나 광범위한 제국을 건설할 기초를 세우게 된다. 그러나 로마 내에서는 <그의 대중적 지지도와 명성, 그리고 점차 증가하는 군사력에 위협감을 느끼기 시작>하여 그를 <공공의 적>으로 선언하려고 한다. 갈리아 전쟁이 끝날 즈음 로마의 원로원과 카이사르 반대파들은 원로원 체제를 무너뜨리려는 카이사르를 고립시키기 위해, 그에게 군대를 해산하고 군사 지휘권도 반납하여 정해진 날짜까지 로마로 혼자 귀환할 것을 명하는 <원로원 최종 권고>를 발동한다.
“카이사르는 정해진 날짜 이전에 군대를 해산해야 한다.
만약 군대를 해산하지 않으면 반역을 꾀하는 것으로 간주한다.”(본문 42쪽)
즉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개선식을 치러야 할 카이사르를 해임, 소환하려 한 것이다.
위기의 로마, 원로원은 누구에게 손을 내밀 것인가?
등 돌리는 폼페이우스, 카이사르와의 신뢰를 저버리다.
동시에 그들은 카이사르와 삼두동맹을 맺었으며 카이사르의 딸과 결혼하여 그의 사위가 된 폼페이우스에게 접근하여 카이사르를 배신하고 원로원과 힘을 합쳐 그를 몰아내자고 유혹한다. 카이사르의 승승장구에 위협을 느낀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의 손에 칼을 쥐어준다. 결국 양손에 군사력과 정치력을 동시에 쥐게 된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를 배신하게 된다.
카이사르는 이처럼 자신을 해치려는 음모가 진행 중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 루비콘 강 앞에서 망설이는 카이사르,
과연 동족과 전쟁을 치러야만 하는가…?
원로원 최종 권고는 국가 비상시에만 공포되는 것으로, 지키지 않으면 반역자로 몰린다. 카이사르가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면 그는 이제 <반역자, 반란자>의 신분이 된다. 그는 <갈리아와 로마의 국경인 루비콘 강> 앞에 선다. 그리고 망설인다.
“이 강을 건너면 인간 세계가 비참해지고,
건너지 않으면 내가 파멸한다.”
카이사르가 강을 건넌다는 것은 내전을 치르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내전의 진정한 비극>은 전쟁의 참혹한 실상뿐 아니라, 같은 민족이 둘로 나누어짐으로써 생겨가는 원한과 증오, 불신과 배신의 기나긴 여파다. 따라서 내전을 피하기 위해 루비콘 강을 건너지 말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정당한 권리와 로마 시민의 정당한 권리를 위해, 소수지도체제인 원로원 중심의 공화정 체제를 무너뜨리고 국가 체제의 개조를 위해 내전을 감수하고라도 루비콘 강을 건널 것인가? 카이사르는 결국 결심한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나아가자, 신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우리의 명예를 더럽힌 적이 기다리는 곳으로.
주사위는 던져졌다.”
기원전 49년 1월 12일, 카이사르의 나이 50세가 되던 해 한겨울, 그는 결국 루비콘 강을 건넌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카이사르의 루비콘 강 도하>는 이렇게 이루어진다.
–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내전, 탈출과 추격의 연속
로마로 진격하는 카이사르 vs. 로마를 탈출하는 폼페이우스
루비콘 강을 건넌 카이사르는 로마로 방향을 잡는다. 로마 내에서는 이미 카이사르가 진격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폼페이우스와 고위 관료들 대다수가 로마를 탈출한다. 이에 카이사르는 그들을 추격하여 지금의 스페인, 그리스로 이동한다. 도중에 폼페이우스 휘하의장수들이 수비하고 있는 스페인, 북아프리카 등지를 공격한다.
– 패배하는 카이사르, 위기를 맞다
카이사르는 내전을 치르는 동안 갈리아 전쟁에서처럼 승리의 연속을 구가하진 못한다. 그는 병사들의 수적 열세와 미숙하지 못한 전략 때문에 고전한다. 그의 부하장수들도 내전을 치르면서 전사한다. 그와 폼페이우스의 병력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각 총사령관의 나이는 폼페이우스 58세, 카이사르 52세로 서로 비슷했다. 그러나 육상 병력 <10 : 3>, 해상 전력 <10 : 2>, 자금 동원력 <10 : 2>, 고급장교 비율 <8 : 2>로 모두 폼페이우스 측이 우세했다. 다만 실전에서의 경험이 풍부한 병사들은 <2 : 10>으로 카이사르 군대가 우세했다. 카이사르는 병사들의 열의와 경험만으로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 일레르다 전투,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다
지금의 스페인인 히스파니아에서 폼페이우스 군대와 싸우게 된 카이사르는 때마침 불어닥친 폭우로 고립된다. 이것을 본 폼페이우스 진영에서는 환호성을 지르며 자신들의 이겼다는 성급한 급보를 로마에 보낸다. 이 소식에 아직 어느 쪽에 가담할지 아직 마음을 결정하지 못하던 원로원 의원들은 대부분 폼페이우스에게 합류한다. 키케로도 이때 폼페이우스에게로 마음을 정한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운하를 만들어 강의 물길을 바꾸어 오히려 적을 고립시킨다. 결국 폼페이우스 군대의 항복을 받아내면서 지중해 서쪽을 장악한다.
– 탈영하는 카이사르 휘하의 장교, 다량의 정보가 유출되다
이탈리아를 떠나 그리스의 디라키움으로 향한 폼페이우스를 추격하여 카이사르도 그리스에 도착한다. 그러나 카이사르 휘하의 기병대장 2명이 변절, 탈영하여 폼페이우스 측에 가담한다. 그들을 통해 디라키움 포위망에 대한 군사 정보가 다량으로 유출되면서 카이사르 군대는 무참히 죽게 된다. 단 하루 동안의 전투로 카이사르는 1000여 명의 병사와 32명의 군관과 백인대장을 읽었고, 33개의 부대기를 빼앗겼다. (225-233페이지)
또한 13년 동안 동고동락하며 갈리아 전쟁을 함께 치른 뛰어난 장수인 <티투스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와 함께 루비콘 강을 건너지 않는다. 그는 폼페이우스 측의 유혹에 넘어가 카이사를 배신하고 그들 편에 합류하여 내전 기간 동안 카이사르와 적대적 관계가 되어 치명적 패배를 안겨주기도 한다. 또한 폼페이우스 측은 카이사르가 제안하는 강화 협상을 끝내 모두 거부한다.
“더 이상 합의를 논하지 말라.
카이사르의 목을 가져오기 전에 강화란 있을 수 없다.”(187페이지)
–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대격돌, <파르살루스 대전투>
디라키움 공성전에서 무참히 패배한 카이사르는 그리스의 테살리아로 들어가 평평한 평지를 골라 그곳에서 폼페이우스를 맞아 결전을 치르기로 한다. 이 평원이 두 사람의 최대 격전지가 되면서 역사적으로 유명해진 <파르살루스 평원>이다.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선제 공격을 가한 카이사르 군대는 폼페이우스 기병을 인간 울타리에 몰아넣어 무력화시켜 결국 승리하게 된다. (245페이지)
이 전투를 지켜보던 폼페이우스는 패배를 직감하고 곡물 수송선에 몸을 숨겨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급히 도피한다. 기원전 48년 8월 9일에 치러진 이 전투는 결국 카이사르의 완승으로 끝나며, 내전에서의 승리를 위한 기초가 되었다.
– 폼페이우스의 죽음, 내전 제1막의 종료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뜻하지 않은 상황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파르살루스 대전투에서 전운에 먹구름이 끼는 것을 감지한 폼페이우스는 몇 명의 부하만을 데리고 급히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도피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는 이집트 장수들에 의해 배 위에서 목이 잘리면서 살해된다. (266-267페이지 그림)
폼페이우스를 쫓아 알렉산드리아에 입성한 카이사르에게 폼페이우스의 잘려진 목이 전달된다. 카이사르는 그것을 폼페이우스의 아내에게 전해준다. 그의 인생 최대 라이벌이 된 폼페이우스의 죽음을 알게 된 카이사르는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폼페이우스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라는 단 한 문장으로 그의 죽음을 서술한다. 최대 정적이었지만 그의 죽음 앞에서 그는 환호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슬픔을 느낀다. 단 한 문장으로 그의 죽음을 기록하며 슬픔을 억누른다. 이로써 기원전 49년에서 시작되어 기원전 48년까지 진행된 내전은 폼페이우스의 죽음으로 제1막이 끝나는 것이다
– 클레오파트라의 매력에 빠진 카이사르, 그리고 알렉산드리아 전쟁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한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 그녀의 남동생이 이집트 왕권을 놓고 벌이는 내전에 개입하게 된다. 클레오파트라를 지지하게 되면서 그는 이집트 내전에 개입하게 되면서 그곳에서 알렉산드리아 전쟁을 치르게 된다. 역사에 의하면, 클레오파트라의 매력에 빠진 카이사르가 로마의 내전 상황임에도 알렉산드리아 전쟁에 개입하여 그녀를 왕위에 오르게 했다고 전한다. 『내전기』도 전쟁 후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이집트를 유람하면서 기록한 것이라고도 한다. 카이사르는 그녀와의 사이에 아들 카이사리온을 낳고 내전이 종료된 후 그들을 로마로 불러들이기도 한다.
– 내전의 종료
폼페이우스의 죽음으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대결>은 끝이 나지만, 파르살루스 전투 이후 사방으로 흩어진 폼페이우스 측 잔당들과의 내전은 기원전 45년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쓴 『내전기』는 이후에 더 진행되는 <알렉산드리아 전쟁>, <스페인 전쟁>, <아프리카 전쟁> 등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고 있다. 이후의 전쟁에 대해서는 그의 부하들이 집필했다고 알려지고 있으나 정확히 누구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글과 비교해 문학성도 떨어지며 명확한 서술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 카이사르의 대표작 『내전기』
카이사르는 자신이 직접 쓴 『내전기』에서 기원전 49년부터 기원전 48년까지의 내전 상황만을 기록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내전은 기원전 45년에 끝이 나지만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죽음과 자신이 알렉산드리아에 입성하게 되는 상황에서 일단 집필을 끝낸다.
어쩌면 카이사르는 이후에 그가 치르게 된 전쟁들도 기록하려 했을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알렉산드리아 전쟁의 시작이었다.>로 끝을 맺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는 그에게 이후의 집필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내전이 종료된 후 일 년 만에 암살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은 『갈리아 전쟁기』와 함께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책으로, 내전 당시의 상황을 명확하게 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 “브루투스, 너마저!” 카이사르의 비극적 죽음
내전이 종료된 지 일년도 채 안되어 카이사르는 기원전 44년 3월 15일 원로원 회의장에서, 그것도 그의 정적이었던 폼페이우스의 입상 아래에서 23군데를 찔리면서 처참하게 죽음을 맞는다. 암살자 중엔 갈리아 전쟁과 내전을 함께 치른 그의 부하 장교들, 즉 마르크스 부루투스,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 데키우스 브루투스, 마누카우스 바실루스 등이 포함되었다. 결국 그의 시신은 그의 노예 세 명에 의해 쓸쓸히 실려나가는 운명을 맞게 된다. (36-37페이지 그림). 그렇게 그의 56년 삶은 마감되며 로마는 공화정 체제가 무너지면서 또 다른 내전에 휩싸이게 된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