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칼 바르트 교의학 개요 : 사도신경에 담긴 기독교 진리
칼 바르트 / 복있는사람 / 2015.3.31
.심원한 바르트의 신학 세계로 안내하는 칼 바르트 교의학 입문서!
-새로운 번역과 장정으로 소개되는 독일어 원문에 충실한 완역본
-유해무, 이신건, 정성욱, 김진혁 교수 추천
“이 책은 바르트 신학 최고의 서론이며 정수다!” _더 타임스
‘교의학 개요’는 칼 바르트가 1946년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본(Bonn) 대학교에서 강의한 내용을 엮은 책이다. 1935년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추방된 후 처음으로 독일에 돌아온 그는, 쿠어휘어스텐 성의 반쯤 무너진 폐허에서 그리스도교적 믿음의 핵심 진술들을 생생한 육성으로 제시한다. 중요한 것은, 이 강의에서 바르트가 처음으로 강의록 없이 강의를 진행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도입 명제’만 미리 준비했고, 이어지는 강의 내용은 대단히 자유롭게 설명하는 형식을 취했다. 그 강의의 수기를 다듬어 정리한 이 책은, 사도신경의 실마리를 따라가며 기독교 신학의 근본 질문들에 대해 간결하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전망을 제공한다. 바르트는 기독교 역사를 통틀어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신학자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지만, 그 저술의 방대함과 문체의 난해함은 그의 신학에 깊이 다가가는 데 늘 방해가 되곤 했다. 그런 의미에서 현장 강의의 열정과 생생함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이 책은, 바르트 신학의 폭과 깊이를 제대로 맛보게 해주는 작지만 큰 책이라 할 수 있다.
바르트에게 있어 신학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성육신과 성서와 선포를 통해 인간에게 말을 건네시는 은혜의 사건을 믿음과 순종 속에서 서술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기독교 신앙에 대해 설명할 때 일반적인 ‘조직신학’ 방법론과 순서를 택하는 대신, ‘사도신경’의 틀을 통해 하나님 말씀을 풍성하고 다채롭게 풀어내곤 했다. 사도신경의 순서에 따라 교의학을 전개한 바르트의 강의들은 1935년, 1943년, 1947년 세 차례 출판된 바 있다. 세 권의 책은 통일성과 일관성도 보여주지만, 각각 서로 다른 시대 상황과 바르트 자신의 사상적 변화도 반영한다. 그중 마지막 작품인 『교의학 개요』는 사도신경의 한 구절 한 구절을 곱씹으면서 기독교 신앙의 주춧돌이 되는 중요한 교의학적 개념들을 체계적이면서도 친절히 설명해 준다. 특히 본 강연 당시 바르트의 대작 『교회교의학』이 절반가량 출판되었을 때여서, 『교의학 개요』를 읽다 보면 바르트의 성숙한 사상이 응축되어 가며 대가다운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바르트와 함께 사도신경의 믿음의 고백들을 따라가는 가운데, 독자들은 어느새 보다 넓고 심오한 신학의 세계로 나아갈 용기와 호기심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목차
머리말
01 교의학의 과제
02 믿음은 신뢰다
03 믿음은 앎이다
04 믿음은 고백이다
05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
06 아버지 하나님
07 전능하신 하나님
08 창조주 하나님
09 하늘과 땅
10 예수 그리스도
11 구원자요 하나님의 종
12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
13 우리의 주
14 성탄의 비밀과 기적
15 고난을 받으신 분
16 본디오 빌라도에게
17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시고 음부에 내려가시다
18 제3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다
19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시다
20 심판자 예수 그리스도의 미래
21 성령을 믿습니다
22 공동체 그 통일성, 거룩성, 보편성
23 죄의 용서
24 몸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
주
○ 저자소개: 칼 바르트 (Karl Barth)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스위스의 개혁교회 목사이자 신학자이다. 전지구적 차원에서 진행된 세속화 물결에 흔들리지 않고 예수의 복음과 신앙을 지키려 한 그의 신학을 일컬어 ‘신정통주의’라고 한다. 그의 완고한 신학은 때로는 자유주의 신학자와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개신교 근본주의와 복음주의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된다.
그는 스위스 바젤에서 태어나서 독일의 베르린, 튀빙겐, 마르부르그의 대학에서 공부한 후 스위스 자펜빌의 교구목사가 되었다. 거기서 그는 1918년 8월 『로마서 주석』을 완성하였다. 이 저서를 통해 자유주의와 단절하고 새로운 변증법적 신학의 기수가 되었다. 바르트는 이후 나치의 등장으로 1935년 스위스로 가 바젤대학의 신학교수가 되었다. 그는 1962년3월 은퇴할 때까지 그곳에 있었다. 1962년 4월 시카고 대학과 프린스턴 신학교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일련의 강연을 했는데, 그것이 『복음주의 신학 입문』이다. 그의 평생의 역작은 『교회 교의학』이라고 평가된다. 그 외 저서로는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 『로마서 강해』등이 있다.
– 역자 : 신준호
서울대학교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신학과에 편입했다. 연세대학교 대학원 신학과를 졸업한 후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칼 바르트 교회교의학 안의 성령론」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연구원,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연구교수를 역임하고 현재 인천제일교회 교육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칼 바르트 교회교의학 해설』(뉴미션21), 『아픔의 신학』(한들출판사)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칼 바르트 개신교신학 입문』(복 있는 사람), 『교회교의학 I/2』『하나님의 영』(대한기독교서회) 등이 있다.
○ 책 속으로
하나님 말씀의 재현으로서 교회 안에서 마땅히 효력이 있어야 하는 것을 우리는 교의(Dogma)라고 부른다. 교회는 다음을 질문하며 또 반드시 지속적으로 질문해야 한다. 교회적 선포에서 발생하는 것은 교의에 어느 정도나 상응하는가? 질문의 목적은 단순히 교회적 선포를 더 낫게 만들려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것의 수정, 심화, 상세화는 오직 하나님의 고유하신 사역이지만, 그러나 인간적 노력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그 노력의 한 부분이 바로 교의학이다. —「교의학의 과제」중에서
신앙고백이 진지하고 분명한 곳에서 그 고백은 근본적으로 일반인의 언어 곧 거리에 지나는 남자와 여자의 언어로 번역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성경을 읽는 것과 찬송가를 따라 부르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의 언어이며, 전혀 다른 의미론을 갖고 전혀 다른 관심 영역을 가진 사람들의 언어를 뜻한다.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신 그 세상이라면, 우리 모두도 그 세상 안에 실존한다. 우리 중 누구도 다만 그리스도인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 모두는 세상의 한 조각이다. 그러므로 신앙고백이 세상의 견해들에 관계되고, 우리의 책임이 그 세상적 영역 안으로 번역되는 일은 필연적이다. —「믿음은 고백이다」중에서
교회와 세계는 모두 자신들이 유래한 근원인 그분을 자신의 앞에 두고 있다. 양쪽에 대한 기적은 다음 사실이다. 그 희망의 목적이 어떤 다른 곳에 있어서 우리가 노력하여 그곳에 이르는 길을 닦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목적은 “그분이 오실 것이다!”(venturus est!)라는 신앙고백 안에 있다. 우리가 가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이 오신다. —「심판자 예수 그리스도의 미래」중에서
○ 출판사 서평
.특징
– 20세기 위대한 신학자 칼 바르트 신학의 정수가 담긴 교의학 입문서
–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은 물론 그의 신학을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되는 책
– 새로운 번역과 장정으로 소개되는 독일어 원문에 충실한 완역본
.독자 대상
– 칼 바르트의 신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거나, 칼 바르트를 연구하는 이들
– 신학을 배우고 가르치는 신학생, 목회자, 신학자들
–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믿으려는 열망을 가진 모든 그리스도인들
.추천사
바르트 자신의 말처럼, 강의록 없이 사도신경을 강해한 『교의학 개요』는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이것이 이 책의 독특성이다. 이전 독일에서 시작한 현장의 신학이 평이한 문체로 숨을 고르면서 그가 전후 스위스에서 전개할 기독론적 화해의 내용을 지향한다. 구체적으로는,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믿음 위에 선 그의 신학과 교의학은 전쟁과 패전으로 피폐해진 독일을 향한 소망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저자는 교의학을 성경의 요약인 사도신경의 삼중 구조 위에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교의를 다루는 교회의 학문으로 정리하고, 세상 안에서 세상을 향한 교회의 선포를 돕는 교의학의 사명을 강조한다. 나아가 하나님의 자유에 포섭되어 자유롭게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하는 인간을 제시한다. 대대적 부흥 후 안팎으로 위기를 겪고 있는 한국교회에 본서는 신학적 반성을 자극하는 유익한 지침이 될 것이다. _유해무, 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 교수
‘자유주의 신학’의 도도한 물줄기를 과감히 되돌리고, 이른바 ‘신정통주의 신학’의 새로운 흐름을 힘차게 주도했을 뿐 아니라, 그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을 만큼 위대한 작품을 통해 현대 신학계에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떨친 바르트의 책이 또다시 충실한 독일어 원문으로 번역·출간되니, 참으로 기쁘고 반갑다. 바르트도 직접 고백했듯이, 그의 글과 사상은 대부분 너무 무겁고 장황하기 때문에 접근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이 책은 이런 약점을 보완하고 독자들에게 매우 쉽게 다가갈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다른 책과는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장점을 지닌다. 신학생들에게 권장할 만한 필독서가 하나 더 늘어나 흐뭇하지만, 평신도에게 선물로 주어도 매우 좋을 것이다. 목회자가 이 책을 읽고 잘 소화한다면, 복음의 진수를 더 깊이 맛보게 되어 복음을 더 힘차게 설교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_이신건, 서울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전통 개혁 신학과 복음주의 신학의 관점에서 칼 바르트는 항상 뜨거운 감자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를 읽어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여전히 그의 저작들 속에서 성경적이고 심오한 통찰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특히 『교의학 개요』는 바르트 신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걸출한 작품이다. 그러므로 바르트의 사상에 동의하는 사람이든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든 모두에게 이 책을 적극 추천한다. 독자들은 바르트와의 지적 씨름을 통해 예기치 못한 큰 유익을 누리게 될 것이다. _ 정성욱, 덴버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나는 믿습니다!” 신앙의 신비를 이 책만큼 아름답고 다채롭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이 책에서 전개되는 바르트 신학은 깊이가 있되 무겁지 않고, 넓지만 산만치 않으며, 전통에 깊이 침착하지만 현대적이고 상황적이다. 한 거장의 깊은 연구와 고민이 연단과 정화를 거쳐 그 정수만 남아 빛을 발하고 있는 듯하다. 진리에 목말라하는 이들, 기독교를 더 깊이 알고 싶지만 길잡이가 없어 방황하던 이들, 일상의 비루함 속에서도 희망을 꿈꾸던 이들, 종교에 대한 환멸마저 무감각해져 버린 이들, 바르트와 함께 신학의 지평을 넓혀 가고자 하는 이들, 모두 이 책을 통해 신앙의 역동성과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새롭게 경험해 보기 바란다. _김진혁,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 독자의 평 1
영원히 유일회적으로 발생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목적은 부활의 증인들에게 맡겨진 앎에 의한 교회의 건립이다.
그 증인들은 하나님의 전능성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작용하고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이고 동일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 사역의 마지막은 동시에 종말의 시간, 곧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전능성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온 세상에 전해야 하는 시간의 시작이다.
[교의학 개요 p.197 / 칼 바르트]
교회의 모습에 대해서 생각 해본다면 분명히 알고 인식해야 하는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머리가 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할때면 교회의 모습은 반듯이 말씀에 기반이 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그 교회에 대해서 ‘그리스도적 교회’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교회’라는 단어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생각해보아야 하는 부분임을 생각해본다. 단지 교회의 어떠함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나는 이런 교회를 원해요!”라는 말에 적어도 교회의 주체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 주체에 따라 움직이는지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다. 그곳에서 교회로서 또한 각자의 역할은 다를테지만 단지 성경에 적혀있는 말씀 몇구절로 자신의 생각에 옷을 입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물론 모든 교회가 교회로서의 역할을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후에 내가 잘하면 된다 몇번이고 다짐하지만.. ‘교회로서의 역할이 무엇일까’ 마음 속으로 투정섞인 질문하게 하는 교회들의 모습을 볼때면 세상속에서의 거대한 메시지들 앞에서 벌써 내가 두려워하는 모습이 참 많이 밉기도 하다.
‘칼 바르트’의 ‘교의학 개요’ 안에서 “교의학의 주체는 그리스도교적 교회다”(p.11)라는 말로서 이 책은 시작된다. 이 말을 볼 때 ‘칼 바르트’에게 있어서 세워진 교회의 모습은 ‘그 모습은 철저하게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야 한다.’ 라는 말을 대변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에따라 교회의 역할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말씀이 세상 안으로 울려 퍼지게 하는 장소여야 한다.” 다시 말해서 교회의 역할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가 이해되는 장소(p.23)여야 하고, 그 믿음이 실제가 되어야 하는 장소여야 하는 것이다.
‘교의학’이라는 학문을 생각하게 될 때에 물론 인간의 일로 완성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오류를 범할 수 있음에 대해서 인정하고 그러기에 ‘교의학’이라는 신학적 학문이 비판적인 학문이라 말하고는 있다.
이 모든것들을 기반으로 사도신경을 통해서 세워져야 할 ‘그리스도적 교회’가 어떠한 모습인지 ‘칼 바르트’가 이야기 하고 있는 책이다. 몇페이지 안되는 책 안에 얼마나 많은 것들을 담아낼까 펴본 책 안에는 그저 시작이 되는 ‘개요’안에서부터 칼 바르트의 신학적 사고와 깊이가 얼마나 넓은지 왜 그렇게 당대의 천재라 불렸는지 감탄하면서 밖에 읽을 수 없는 책이다.
칼 바르트는 이 책을 ‘개요’라 말하지만 그 깊이는 해저 이만 리 쯤 되는듯 싶으며, 셀 수 없을 만큼 우려도 결코옅어질 수 없을것들로 꽉 차있는 뼈와 같다.
○ 독자의 평 2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했다. 지식 사회에서 정보는 곧 힘이고 권력이며 경제력이다. 생각해 보니 신앙도 비슷하다. ‘아는 만큼 믿을 수 있다.’ 아니 ‘아는 만큼 살아낼 수 있다.’ 확실히 그러하다. 예수께서는 1세기 종교 지도자들에게 경고하셨다. ‘너희는 나를 오해하였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결국 예수를 십자가에 넘겼다. 역사의 수많은 이단들의 발흥도 결국 잘 못 암에 있었다. 마크 트웨인은 ‘무엇을 모르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잘 못 아는 것에 대한 지나친 확신’이라고 경고했다. 바로 알아야 바로 믿고, 바로 믿어야 바로 살아낸다. 확실히 그렇다.
그러던 차에 칼 바르트의 ‘교의학 개요’를 집어 들었다. 칼 바르트, 20세기 최고의 신학자요, 자유주의자들의 놀이터에 폭탄을 투하한 자요, 신정통주의의 기치를 든 사람이다. 걸어다니는 신학자요, 사상의 결정체다. 우선 책을 집어 들기가 쉽지 않았다. ‘너무 어렵지는 않을까? 이해하기에 너무 힘들지는 않을까? 몇 페이지나 읽을 수 있을까?’ 그런데 이런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의외로? 책이 너무 술술 읽혀지고 한 장 한 장이 기대되면서 흥분되었다. 누군가 그랬다. 지적 호기심이야말로 최고의 쾌락이라고, 바로 그런 경험을 하게 된다.
바르트는 이 강연을 2차 대전 직후에 했다고 한다. 폐허가 되어 버린 교정의 한 복판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강연을 했다. 그것도 강의안 없이, 교재 없이 했다. 실로 대단하지 않을 수 없다. 바르트의 관심은 무너진 교회의 재건에 있었다. 주지하는 바 독일교회는 나찌 정권에 부역 했다. 그 폐해가 심히 컸다. 결국 그 원인은 잘못된 신학, 잘못된 신앙고백에 있었다.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뜻을 분별하지 못했다. 하나님 나라와 제3제국을 구분하지 못했다. 하여 그는 우리가 믿는 바 가장 기본인 사도신경의 해석이 필요했다. 사도신경이야말로 2천여년 교회역사가 지켜온 바요, 시대마다 교회의 오류를 바로 잡아 준 고백이기 때문이다.
바르트의 사도신경 해설을 따라 가다 보면 어느 새 나의 시각이 교정된다. 우리가 매 주일 외우며 고백하는 바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열린다. 형식적인 되새김에서 깊이 있는 고백으로 나아간다. 그게 바르트의 이 책이 갖는 힘이다. 바르트도 말했듯이 신앙고백은 결국 믿음의 문제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바를 고백하며 그 믿음은 나의 지, 정, 의를 동반한다. 우리의 공적 고백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헌신, 우리의 삶과 연결되며 이는 곧 교회 공동체의 성격을 규정한다. 우리가 함께 믿는 바 대로 우리는 우리가 위치한 사회 속에서 우리의 자리를 찾는다.
한 구절, 한 구절의 해석을 따라 가다 보니 어느 한 구절도 버릴 게 없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요 주옥이다. 해서 책이 온통 줄긋기가 되어 버린다. 그게 바르트의 힘이요, 독일인의 특징인 듯 하다. 한 구절도 허튼 말이 없다. 그러나 그 중에서 핵심 중 핵심을 뽑으면, ‘예수가 우리 주시다.’로 귀결된다. 이는 초대 교회의 핵심 고백이며, 이 고백 위에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이 아버지로 위치한다. 그리고 성령께서 교회의 위로자로, 예수의 증거자로 계신다.
아무튼 우리 주이신 예수님의 아들되심과 동정녀 탄생, 그리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 받으심, 죽은 바 되었다 부활하심, 그리고 심판의 주로써 다시 오심의 주제들이 깊이 있고 명확하게 펼쳐진다. 어렵다 생각한 책은 의외로 잘 읽혀지고, 읽혀질 뿐 아니라 가슴을 뜨겁게 한다. 그리하여 곱씹으며 다시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프다. 아니 그래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주일에 사도신경을 다시 고백할 수 있으며, 제대로 된 고백을 통해 제대로 된 삶을 살아낸다. 아니 살아내야 한다.
지금 미지근한 신앙 가운데 있는 자, 교회의 회복을 꿈꾸는 자, 대 사회적 책임을 하려는 자 이 책을 권한다. 읽어가는 동안 가슴이 뛰며 삶이 쿰틀거림을 경험하게 될 터다. 이 주옥같은 책을 늘 가까이 두고 재확인하며 나의 지식으로 확립하여 바로 살아내어야 할 터다. 모처럼 가슴이 뛰며 흥분되는 좋은 경험이다. 이 어려운 책을 쉽고 명확하게 번역해 준 역자에게 감사하고 출판사에게 감사하다. 복이 있기를 기도한다.
○ 독자의 평 3
잘 아는 것처럼 바르트는 당시 자유주의 신학으로부터 교회를 지켜냈다. 하지만 정작 보수신학은 그를 자유주의 신학자라며 반기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한국의 보수신학은 바르트를 읽지 않는다. 읽더라도 배우기 위해 읽는 것이 아니라 비판하기 위해 읽는다. 당연히 바르트의 신학은 완벽한 것이 아니다. 그가 지적했듯이 ‘교의학은 언제나 상대적이고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사고와 연구와 서술에 그칠’(13) 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피조물 곧 불충분한 자의 공간 안에서 그분 자신을 계시하는 일을 기뻐하셨다(35)’ 그렇다면 바르트 신학의 비판적 수용은 합당하다.
그렇다면 그를 읽어야 하는데 이것 역시 쉽지 않다. 그의 대표작인 <교회교의학>은 무려 13권이나 된다. 한국말로 모두 번역된 것도 아니다. 번역된 한국말로 읽기에도 숨이 찰 지경이다. 한자 한자 꼭 씹어 읽어야 그의 논리를 따라갈 수 있다. 물론 시간을 들여 <교회 교의학>에 도전해보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다. 그것이 힘에 부친다면 이번에 새롭게 번역 출판된 <교의학개요>가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도입명제만 준비하고 강의록 없이 강의한 것으로 유명한 이 책은 바르트의 신학의 면모를 살피기에 손색이 없어 보인다.
우선 주목하는 것은 <교의학개요>의 줄기가 칼뱅의 <기독교 강요>와 마찬가지로 사도신경이라는 점이다. 물론 그의 <교회 교의학>도 이 구조를 견지한다. 이것은 그가 교의학을 더 나아가 신학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준다. 사도신경을 교의학의 기본으로 삼은 것은 교의학이 사변으로 흐르는 것을 막아주고 교의학이 교회를 위해 더 나아가 예배를 위해 섬길 수 있게 한다. 이처럼 그는 교회를 위한 신학을 추구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공공성을 향하지 않는 어떤 믿음, 그러한 어려움을 회피하는 어떤 믿음은 그 자체가 이미 불신앙, 잘못된 믿음, 미신이다(42)’고 하면서 교회가 울타리를 깨고 밖으로 나오기를 촉구한다. 또한 ‘(교회의 신앙)고백은 일반인의 언어 곧 남자와 여자의 언어로 번역될 수 있어야 한다(47)’며 교회가 세상을 더 적극적으로 섬길 것을 요구한다. 교회 안에 갇혀 있으면서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는 오늘 한국의 교회가 바르트를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이 필요한 또 다른 이유는 신학적 사유의 근력을 키워준다는 것이다. 목회현장은 아무래도 이런 근력을 키우는데 적합하지 않다. 손에 쉽게 잡히는 목회방법론을 쫒아가다 보면 이내 신학적 사유의 근력이 시들해버린다. 이는 신학의 빈곤으로 이어지는데 그 불이익은 고스란이 교회와 성도의 몫이다. 바르트는 사도신경의 모든 단어와 문장에 집중한다.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그리고 그 깊은 의미를 우리들에게 전달한다. 그를 따라 한 문장 한 단어를 꼭 씹어 읽다보면 그의 생각에 공감하며 무릎을 치기도 한다. 이것이 이런 의미였구나! 하고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은 한 번 만 읽을 것이 아니라 늘 곁에 두고 읽어야 할 책이다. 그렇게 읽는다면 바르트의 신학을 이해하는데 어쩌면 이 책으로 충분할 수도 있겠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