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
김경현 / 세창출판사 / 2019.12.12
잘 알려져 있듯, 초기 기독교는 수 세기간의 박해시대를 거쳐 마침내 서기 4세기에 로마제국의 국교로까지 성장했다. 기독교사의 이 대전환에서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 (재위 306 ~ 337년)의 역할이 결정적인 계기였다는 것은 오늘날 상식으로 통한다.
황제가 제국 통일 전쟁 중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승리한 뒤 기독교로 회심하고, 이어서 ‘밀라노 칙령’ (313년)으로 기독교를 공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역사적 상식을 배경으로, 최근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업적을 기리는 1700주년 기념행사들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다.
이 책은 이런 역사적 상식이 사실은 고대와 근대의 기독교사가들이 만들어 낸 일종의 ‘기독교 영웅 신화’였음을 보여 주는 신화해체 작업이다. 그렇다고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의 궁극적인 승리에 기여한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황제의 극적인 회심과 소위 ‘밀라노 칙령’이 사실이라기보다 기독교 역사가들이 그렇게 주장한 데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 주려 한다.
그러기 위해 이 책은 ‘콘스탄티누스의 전환’을 주장한 동시대 교회사가들의 기록을 면밀히 검토하고 해체한다. 동시에 이 책은 비기독교 측의 다양한 증거를 종합하여,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 신앙과 친기독교 정책을 취하기 전에 한동안 ‘불패의 태양신’의 숭배자였음을 입증하려 한다.
요약하면,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회심은 한순간의 계시를 통해 일어난 극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황제로서 자신과 제국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종교정책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점진적인 것이었다.

○ 목차
머리말 – 1700년 만의 콘스탄티누스 황제
1 부 | 시대배경- 서기 3세기의 로마 제국
1장 위기의 제국
2장 4인공치제의 실험
3장 이교의 지형
4장 기독교 대박해
2 부 | 서부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5장 황제의 아들
6장 동요하는 4인공치제 7장 이탈리아 침공과 서부제국의 통일
3 부 | 황제의 신앙과 종교정책
8장 황제와 기독교- 두 개의 신화
9장 황제와 불패의 태양신
10장 거대한 소용돌이- 태양신 숭배와 기독교
4 부 | 제국과 교회의 통일
11장 제국 통일 전쟁
12장 니카이아 종교회의
13장 유세비우스의 정치신학
14장 황실의 비극
5 부 |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최후와 유산
15장 새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16장 세례와 죽음
저자 후기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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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소개 : 김경현
홍익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영국 런던대학교 박사, 대표 논문으로 [고대 로마 세계 노인의 지위와 역할 : 조르주 미누아의 테제에 대한 비판적 검토], [안토니누스 역병의 역사적 배경과 영향] 등이 있고, 지은 책으로 [아우구스투스 연구] (공저), [동서양 역사 속의 공공건설과 국가경영] (공저), [유럽과 미국의 동아시아사 교육] (공저) 등이 있다.

○ 책 속으로
로마사회에서 종교와 미신은 국가의 공인 관리 여부로 구별되는 것이었다. 공식숭배와 관련해서, 비록 제정기가 시작될 때에야 생겼지만 제정기 내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종교현상에 대한 논의를 빼놓을 수 없다. 살아 있는 황제와 죽은 황제를 신처럼 숭배하는 것, 곧 황제숭배가 그것이다. (63p)
팔레스타인 주교 유세비우스의 ‘전기’에 의하면 황제, 부황제들은 콘스탄티누스를 질시하고 두려워해 온갖 음모를 꾸몄다. 그래서 그는 마치 모세처럼 하느님의 뜻에 따라 탈출을 감행해 부친에게 달려갔다. 다행히 그는 부친이 죽기 직전에 만났다. 그리고 콘스탄티우스는 마지막 순간에 자녀들에 둘러싸여 이렇게 유언했다.
“자연법에 따라 맏아들에게 제국을 물려주도록 하라.” (101p)
유세비우스가 보기에 콘스탄티누스가 최초의 기독교 황제가 된 것은 하느님이 정한 일이지 그의 의지나 성향 때문이 아니었다. ‘전기’는 물론 ‘교회사’에서도 콘스탄티누스는 제2의 모세로 묘사된다. 콘스탄티누스는 모세가 그랬듯 하느님의 종 (therapon)이었다. (123p)
콘스탄티누스가 이탈리아를 침공해 서부제국을 통일할 때 일어나 두 가지 사건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한다. 하나는 밀비우스 다리 전투 때(312년 10월)의 일이고, 다른 하나는 큰스탄티누스가 로마에서 전후처리를 끝내고 본거지인 갈리아의 트리어 황궁으로 돌아가던 도중 밀라노 시를 방문했을 때 (313년 2-3월경) 벌어진 일이다.

첫 번째 사건의 핵심은 로마 시를 향해 진격하던 콘스탄티누스가 환영(幻影 Vision)을 통해 승리의 표지를 받았다는 내용이다. 그 표지는 기독교의 신 혹은 예수가 준 것이어서, 큰스탄티누스는 그 환영과 승리를 계기로 기독교로 회심했다고 이야기되곤 한다. 로마 역사상 최초의 기독교 황제는 그처럼 극적인 전환을 통해 탄생했다.
두 번째 사건은 콘스탄티누스가 밀라노에서 리키니우스 황제와 만나 회당한 결과, 종교관용 칙령(밀라노 칙령)을 반호한 것을 가리킨다. 이로써 기독교는 마침내 합법적인 종교의 지위를 얻고, 4세기 말경에는 로마제국의 국교로까지 성장했다.
밀비우스 다리의 환영과 밀라노에서 반포한 칙령은 로마제국의 기독교화에 가장 결정적인 전환점들이었다는 것이다. (143-144p)
아우구스투스가 살해당한 양부 카이사르의 복수와 공화국의 회복을 내세웠다면 콘스탄티누스는 폭군 타도와 박해받는 기독교의 보호를 강조했다. 기독교 보호는 뒤늦게 추가된 구호였지만 통일 후에는 황제권과 제국의 안보에 가장 핵심적 전략이 되었다. (244p)
로마에 온 황제는 오만이 가득해, 황실 안에서도 불경한 짓을 저지를 기세였다. 황실의 비극이란 326년 중엽 맏아들 크리스푸스와 황후 파우스타가 차례로 처단된 사건이었다. 그 불경한 짓의 주역은 다름 아닌 황제로, 맏아들은 독살시키고 부인은 욕장에서 질식사시켰다. 6세기의 이교 역사가 조시무스는 이렇게 기록했다.
“황제는 자연의법을 고려하지 않고 맏아들 크리스푸스를 처형했다. 계모 파우스타와 정을 통했다는 협의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후 헬레나가 손자에 대한 잔혹행위로 슬픔에 잠겨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자, 마치 헬레나를 위로하려는 듯 황제는 중상보다 더 나쁜 치료법을 썼다. 욕탕을 아주 뜨겁게 달군 뒤 아내를 그 안에 가두어 죽게 했다.”
당대의 이교도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소문과 황제의 기독교 개종을 연계시켰다. 즉 황제가 가족을 죽인 되를 씻기 위해 무슨 죄 기독교로 돌아섰다고 말이다. (250-251p)
최후의 이교사가로 부르는 암미아누스는 그의 책 한 부분에서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이렇게 평했다.
“만사를 바꾸고 뒤집어 놓은 사람 (novator turbatorque rerum)”
로마인이 고대세계에서 가장 선조의 습속 (mosmaiorum)을 숭상해 온 민족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것은 거의 저주에 가까운 말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혹평의 이면에서 콘스탄티누스의 정력적인 통치자로서의 면모를 감지할 수 있다. (281p)
황제는 죽음이 임박함을 깨닫고 세례 받기를 결심했다. 세례 후 며칠 만에 황제는 향년 65세로 숨을 거두었다. 예수의 승천과 성령강림을 축하하는 오순절 마지막 날 (5월 22일)이었다. (289p)

○ 독자의 평
저자는 석학인문강좌 때는 물론 몇 차례 같은 주제로 강연을 할 때 강연 직후 청중 가운데 목회자나 평신도임을 밝힌 몇몇 분들이 불편한 감정을 드러낸 일이 있었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가 계시 받은 ‘하느님의 종’이 아니라 이교숭배에서 암중모색하며 기독교에 도달한 것으로 설명한 저자의 강연취지가 매우 듣기 거북했던 듯해서 말이다. 그러면서 신앙과 역사연구가 별개의 영역이라는 자명한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오래 전에 읽었던 교회사를 책장에서 꺼냈다. 함께 읽는 세계교회사 1, 2권 (전수홍 / 생활성서 / 2009)이다. 함께 읽는 세계교회사에서는 최초의 그리스도인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라고 소개하고 있다.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 (306 ~ 337)는 280년경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장군이었던 콘스탄티누스 클로루스와 헬레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311년부터 서로마를, 325년부터 337년 죽을 때까지 전 로마 제국을 다스렸다. 비록 그가 죽는 마지막 날까지 결코 참된 신앙을 가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를 최초의 그리스도인 황제라고 말하는 것은 옳다고 할 수 있다.
그는 312년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결정적인 전환을 맞이하게 되는데 자세하지는 않지만 그 후에 그가 그리스도교와 가까워졌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또한 그의 신앙심이 매우 불완전하게 표현된 것도 사실이다.
황제는 자신의 마지막 통치 10년간 많은 죄를 범하여 자신의 명예를 손상시켰다 (자신의 아들 크리스푸스, 부인 파우스타, 장인과 3명의 처남을 살해했다). 그러나 그는 어떤 정치적인 동기나 다른 목적 없이 죽는 순간에 세례를 받았다. 이는 당시 4세기 그리스도교에 상당히 퍼져 있던 관행의 영향으로 늦게 세례를 받은 것이기도 했지만 그가 가진 순수한 신심, 혹은 적어도 어떤 종교적인 불안 때문이었다고 이해된다. (함께 읽는 세계교회사Ⅰ / 전수홍 / 생활성서 / 2009 / 123 ~ 124p)
세계사 속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살았던 시대배경과 황제의 신앙과 종교정책에 대해 전에 읽었던 책 ‘함께 읽는 세계교회사’에서 채워지지 못했던 부분을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가 채워 주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는 신앙의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연구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