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의 아가서 설교시리즈 세트 (전4권)
1.나에게 입맞춰 주세요 / 2.내 사랑아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 3.나는 들의 꽃 골짜기의 백합화 / 4.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 은성 / 2011.8.29
12세기 사상가들은 사랑이라는 문제에 몰두했다. 특히 베르나르는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교제로써 사랑에 대한 개념이 성욱해졌다. 베르나르는 사랑이 영혼의 추진력이라고 보았다. 베르나르의 내면생활은 자신이 제시한 사랑의 원리를 완벽하게 예증한다. … 사랑이 통일성을 회복하면 영혼 안에 자유가 생겨난다. 베르나르의 저술들은 그의 내면생활을 표현하며, 이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를 감상적으로 노래한다. 이 세상에서 성도들과 큰 죄인들만 자유를 안다고 했다.
“성도들의 경우에는 완전한 사랑이, 큰 죄인들의 경우에는 완전한 악이 모든 두려움을 내어쫓는다. 성도들의 경우에는 진리가 죄인들의 경우에는 소경됨이 완전한 안전감을 준다.”
베르나르는 86편의 아가서 설교를 통해 영적 신앙심과 하나님 체험을 생생하고 유감없이 표현하고 있다. 그의 아가서 설교를 듣는 청중들은 “사랑”에 매료되어 “벌꿀처럼 달다”고 했다. 사랑만이 온전히 하나님과의 연합이 가능하게 해 준다고 역설했다.
“여러분은 관상 속에서 쉬기를 원합니까?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아가서 설교 79:1). … 우리는 특별한 은혜인 입술의 입맞춤; 아버지와 아들의 호혜적인 지식과 사랑인 삼위일체의 생명에의 참여를 추구해야 한다 (아가서 설교 8:1)
○ 목차
- 나에게 입맞춰 주세요
설교 1: 아가서 표제에 관하여
설교 2: 입맞춤의 다양한 의미
설교 3: 주님의 입과 손과 발에 입맞춤
설교 4: 주님의 발과 손과 입술에 입맞춤
설교 5: 네 종류의 영에 대하여
설교 6: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 자비, 심판
설교 7: 하나님 사랑의 애무: 기도와 시편 안에서의 표현
설교 8: 성령: 입맞춤
설교 9: 신랑과 신부의 가슴에 관하여
설교 10: 가슴과 향 내음
설교 11: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감사
설교 12: 인자하심의 은혜
설교 13: 우리의 감사와 하나님의 영광
설교 14: 그리스도의 교회와 유대인들
설교 15: 예수의 이름
설교 16: “일곱”이라는 숫자의 의미와 참된 죄고백의 특성
설교 17: 성령의 방법과 마귀의 질투
설교 18: 성령의 두 가지 작용설교
설교 19: 천사들의 사랑
설교 20: 사랑의 세 가지 특성
- 내 사랑아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설교21 교회와 그리스도를 향한 신부의 사랑
설교22 신랑의 네 가지 기름과 네 가지 주요한 덕
설교23 왕의 방
설교24 비방, 그리고 사람의 의
설교25 신부가 검지만 아름다운 이유
설교26 게달의 장막과 신부의 검은피부
설교27 솔로몬의 휘장과 신부의 아름다움
설교28 신랑과 신부의 검음과 아름다움
설교29 교회와 공동체 내의 불화
설교30 신비한 포도원과 육의 구별
설교31 하나님을 보는 여러 가지 방법
설교32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은혜를 주시는 기리스도
설교33 추구해야 할 목적/신비한 정오/피해야 할 시험
설교34 참된 겸선
설교35 신랑의 착맹: 신부의 두 가지 무지
설교36 지식 습득
설교37 하나님과 자아에 대한 지식과 무지
설교38 하나님에 대한 무지는 절망으로 이어진다/신부의 아름다움
설교39 마귀와 그 군대
설교40 신부의 얼굴
설교41 지성, 믿음, 관상
설교42 사랑의 견책/두 종류의 겸손
설교43 그리스도의 고난
설교44 영혼의 아름다움 영혼과 말씀의 대화
설교45 열정의 포도주와 자비의 기름
설교46 교회와 사역자들/관상으로 이어지는 덕목들
- 나는 들의 꽃 골짜기의 백합화
설교 47 골짜기의 백합화
설교 48 믿음과 관상에 대하여
설교 49 왕이 나를 인도하여 잔칫집에 들어갔으니
설교 50 육체와 이성과 지헤의 삼중적 사랑
설교 51 신랑의 왼팔과 오른팔의 의미
설교 52 노루와 들사슴
설교 53 내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
설교 54 교만
설교 55 신랑이 노루와 어린 사슴에 비교되는 이유
설교 56 벽은 무엇인가?
설교 57 마리아, 나사로, 마르다
설교 58 영혼의 가지치기
설교 59 비둘기의 소리
설교 60 무화과나무와 푸른 열매
설교 61 바위틈에 있는 나의 비둘기
설교 62 비둘기가 거하는 틈의 의미
설교 63 여우가 허는 포도원
설교 64 네 종류의 유혹
설교 65 여우를 잡으라
설교 66 새로운 이단자들
-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설교67 선재적 은총과 뒤따르는 은총
설교68 신랑과 신부 상호간의 보살핌
설교69 영혼을 찾아오시는 아버지와 아들
설교70 백합화로 비유되는 진리
설교71 백합화의 향기와 밝음
설교72 영적인 낮과 그림자
설교73 베데르 산의 노루와 어린사슴
설교74 노루와 어린 사슴
설교75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
설교76 거리와 큰 길에서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노라
설교77 진리를 향한 사랑
설교78 하나님의 예정, 창조, 영감
설교79 사랑의 유대
설교80 말씀과 영혼
설교81 말씀을 닮은 영혼
설교82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모양
설교83 신부의 사랑
설교84 하나님을 사모하는 영혼
설교85 영혼이 말씀을 찾는 일곱 가지 이유
설교86 신부의 겸손
○ 저자소개 :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베르나르는 그의 나이 23세 때인 1112년에 시토회에 가입하여 수도원 개혁에 앞장선 사람이었다.
그는 마르다보다 마리아의 직분이 훨씬 더 우월한 것으로 확신하여 모든 시간을 ‘하나님의 사랑’ 에 대한 명상으로 보내는 것이 소원이었다.
특히 그는 그리스도의 인성 속에 게시된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수많은 종교적, 사회적 문제의 중재자 노릇을 하였으며, 교회 개혁의 지도자였고, 제2차 십자군 원정을 가능케한 명 설교자였으며, 관상과 영혼의 순례에 관해 많은 글을 저술하였고, 일체의 신학적 변화에 반대하는 보수주의자였다.
- 역자: 엄성옥
연세대학교 영문과 졸업.현재 은성출판사의 대표로 50여편의 번역서가 있다. - 역자: 장미숙
서울사대 영어교육과와 총신대학교 신대원 (M. Div.)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은바 있다. 역서로는 「여기 지금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 은성」,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라 : 은성」등이 있다.
○ 책 속으로
- 나는 들의 꽃 골짜기의 백합화
머리말
성 버나드는 아가서를 ‘관상적 (觀想的)인 설교’로 여겼고, 그의 여든 여섯 편의 설교에서 그것을 주석하면서 관상적인 사람들의 행동과 사고 방식을 설명하였다.1) 대부분의 저자들은 행동-관상 문제를 다루는 글에서 <아가서 설교>를 관상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을 위한 책으로 간주한다. 마찬가지로, 행동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은 그런 책이 자신의 기질에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버나드 자신은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그토록 어색하게 두 개의 삶으로 양분하는 것을 그리 지지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 그의 걸작이 한 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친 것이었다면, 기독교적 전통은 매우 빈약하게 되었을 것이다. 반대로, 그의 책은 이후 세대들의 일반적 경건에 미친 그것의 지대한 영향으로 그 시대의 어떤 다른 영적인 저서보다 더 큰 주목을 받아 왔다.
오늘날 버나드의 본문은 그것의 순수한 탁월성과 역사적 지위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근래에 그리스도인의 책임에 대한 평신도의 의식을 넓히기 위해 새로운 영성이 개발되고 있다. 그 지지자들 중 몇몇은 그 영성이 고전적인 양식들과는 전혀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따르면, 이 새로운 영성은 중세 영적인 저자들의 비성경적인 천사 인류학을 바로 잡는다.2) 그리고 보다 오래 된 영성이 무시되어도 좋을 만큼 심하게 곡해되지 않은 때에도, 새로운 영성의 적절성을 확립하는 것이 더 낫다.3)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압제 당하는 자들을 위해 열심을 낼 것을 주장하면서, 한편으로는 낡은 금욕적-신비적 범주들로 인해 당황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의 이전 세대들을 그토록 가볍게 이해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어쩌면 성령의 계속적인 임재를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모호해질 수도 있다. 버나드의 <아가서 설교>를 아는 것은 이 위험을 막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우리는 클레르보의 대 수도원장이 세상의 인정을 목적하거나 또는 인간 사회의 건설을 지향하는 식의 근대의 평신도 영성을 조금도 칭찬하지 않으리란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는 수도사로서의 소명과 수도원에서 삶의 배경을 통해서 인간의 경험에 대해 매우 다른 시각을 가진다. 그는 첫 부분의 설교들에서 그의 청중의 특별한 성격을 밝힌다: “형제들이여, 여러분들은 세상의 사람들이 논의하는 것과는 다른 것들을 논의해야 합니다. 또는 세상 사람들이 논의하는 것과 같은 것을 논의할 경우에는 적어도 그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논의해야 합니다.”4)
버나드를 떠올릴 때 우리는 곧 현재 질서에 대한 가장 필요한 참여 외에 모든 것을 반대하는 부단하고 엄격한 금욕적 경고들을 연상한다. 그것은 맞다. 사실상 그의 저서는 이 전형적인 수도자의 조언의 복음주의적 의미를 확언하는 데 있어서 탁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수도사가 아닌 전체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그 조언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버나드의 금욕주의는 세상의 인정을 목적하는 영성을 반박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을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는 방법은 <아가서 설교>에 나오는 관상 (觀想)의 개념을 그 영성과 비교하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먼저 버나드가 관상과 행동의 관계에 대해, 그 다음 관상과 금욕적 노력의 관계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였는지부터 살펴볼 것이다. 이 관상적인 수도자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행동에 어떤 성격을 부여하는가? 그리고 혼란스럽게도 그 전통 안팎의 사람들에게 하나의 주의, 즉 금욕주의라고 알려진 그리스도인의 노력에 대해 그는 어떤 특성을 부여하는가?
행동-관상이라는 구분은 그것에 따른 추상적 개념과 규범과 체계와 논란과 더불어 하나의 지적인 유희가 되어 왔다. 신학이 종교적 경험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탐구에 대한 흥미는 더욱 더 강력해진다. 불행한 의미에서, 인간은 공식에 따라 살기를 좋아한다. 인간은 삶의 흐름의 어떤 순간에도 교리의 정밀성이 보증하는 신중과 지혜를 가지기를 원한다. 이것은 그와 같은 삶이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 후에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영적인 저자들이 예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두 가지 말씀, 즉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눅 10:42)와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마 25:45)를 말씀하셨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신학자들은 그런 저자들의 책에 작용하는 사고체계를 식별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그러므로 <아가서 설교>처럼 그리스도인의 경험에 대한 탁월한 설명에서, 그와 같은 지적인 만족을 주는 체계들이 이 기독교적 경험을 적절하게 대변하였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증명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이것이 바로 내가 ‘관상 생활’을 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것이 진실로 그들의 책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이유이다.
관상과 행동
버나드는 관상과 인간의 삶에 필요한 활동을 결합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 이유는 관상에 대한 그의 소원을 진술한 데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는 ‘삶에서 일들이 주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생각에서 현실의 현상들에 휩싸이지’ 않기를 원한다.5) 후자는 인간적인 모든 일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는 그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잘 안다. 이 관상의 ‘정적(情的)인 자비’는 항상 이웃의 필요에 주의하는 ‘행동적인 자비’에 굴복해야 한다.6) 이것은 종종 독실한 영혼에게 정적인 결핍을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의 필요성을 설명한다: “참 자비는 여기에 있으니, 그것은 보다 궁핍한 사람이 먼저 도움을 받는 그것이다.”7)
버나드에게 있어 자주 그러하듯이, 생각의 깊이 ― 그것의 신학적 본질 ― 는 우리가 쉽게 간파하지 못하는 성경의 암시에 들어 있다. “참 자비는 여기에 있다”라는 말은 참 관상의 사랑은 영혼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사랑이라는 것과, 그와 같은 사랑은 사람이 다른 이들의 필요를 돕고자 하는 그 영혼의 움직임을 거부할 때 그 영혼 속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매우 분명하고 감동적으로 암시한다. 버나드의 주석에 따르면, 요한일서 4:10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 속에서 하나님이 ‘보다 궁핍한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바로 그 동일한 표징에 의해, 우리가 관상에서 감히 주장하는 자비를 완전히 변질시키지 않고서는 하나님이 우리의 행동을 통해 다른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을 거부할 수 없다.
요한일서 4장과 행동과 관상의 관계는 반드시 연결되어야 한다. 그 질문에 대한 버나드의 신학적 개념이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8) 시토 수도회의 격언 “사랑 자체가 지적인 능력 (knowing faculty) 이다”라는 말 역시 근본적으로 여기서 유래한다.9)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활동은 관상의 활동과 동일하게 영혼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활동이다. 이와 같은 분명한 인식에서부터 버나드는 계속하여 관상하는 자들을 위해 사도적인 형제 사랑의 필요성을 여러 모로 단호하게 표현한다. 비록 상상을 방해하고 관상하는 사람의 힘을 고갈시킬지라도, 행동적인 형제 사랑은 참된 기도의 행위, 하나님의 역사이다.
행동과 관상의 대등한 성격은 영적 진보의 단계를 나타내는 이전의 상징들이10) 다음과 같은 상징들로 대치된 데서도 볼 수 있다: 쓸데없는 것들을 제거하고 동시에 밝게 비추는 불 (57.7);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식물 (47.5); 커지지만 가지 치기를 필요로 하는 나무 (58.8); 지금은 부재하지만 언제라도 찾아 올 수 있는 신랑 (17.1); 배우자이자 어머니인 연인 (10.1; 85.13); 머리와 몸의 기름 부음 (16.1); 관상의 적절한 대상과 의도로서 신부의 두 뺨 (40.3); 같은 집에 거하는 두 자매 마르다와 마리아 (51. 2);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는 빛, 또는 모든 사람 앞에서 비추는 빛 (51.2). 이것들 중 가장 상세하게 설명되는 것은 배우자와 어머니 상징이다. 아가서의 서정시에서 우리는 연인들을 만난다. 버나드의 주석에서 사랑받는 배우자는 많은 자손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관상의 입맞춤에서 그녀는 양육해야 하는 자녀들을 잉태한다 (9.7); 만약 그녀의 가슴이 자녀들을 양육할 수 없다면, 그녀는 아직 결혼할 연령이 아니다 (10.1); 그녀로 하여금 신랑에게 즐거움을 주게 하는 매력들은 그의 자녀들에게 유익한 것들이다 (10.1); 그녀는 자녀들을 젖 먹이기 위해 자주 그의 입맞춤을 받는 즐거움을 중단해야 한다 (4.16; cf. 9.8과 32.10). 신랑은 그녀의 피곤함을 이해하고 그녀가 그의 자녀들을 돌보는 것으로 인해 그녀를 사랑한다 (52.6). 버나드는 자신의 마지막 완전한 설교에서 이렇게 썼다: “그 어머니는 그의 자녀들을 기뻐하나, 그 배우자는 그의 포옹을 훨씬 더 기뻐한다.”11)
진정한 사랑이 비이기적이어야 하는 것처럼―버나드에게 있어 castus는 ‘비이기적인’을 의미한다12)―관상도 그래야만 한다: ‘참되고 순결한 (비이기적인) 관상’; ‘설교 준비를 위해 기꺼이 관상의 고요함을 중단해야 한다.’13) 왜냐하면 신부는 신랑을 사랑함으로써 그가 사랑하는 자들 역시 그를 사랑하게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버나드는 관상에 대한 간절함으로 인해 결코 그의 수도사들을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 (51.3; 52.6; 53.1).
배우자와 어머니라는 상징은 버나드가 매우 좋아하는 상징이다. 그는 아가서의 중심 상징에서 이용 가능한 모든 요지들과 함께 이 상징을 끝없이 상세하게 풀어낸다. 그것은 어떤 유용한 의인법을 기발하게 조작하는 것을 훨씬 능가한다. 배우자로 하여금 어머니가 되게 하는 사랑과 말씀의 관계는 인간 안에 존재하는 신적인 사랑의 결코 양분될 수 없는 두 차원이다. 다시 말해, 유일한 배우자인 교회의 지체로서 우리는 그 관계의 새로운 국면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동일한 국면이다.
그 배우자-어머니는 경우에 따라서, 또는 그와의 관계에 보다 완전을 기하기 위해서 신랑의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감에서 그렇게 한다. 그들은 그녀의 자녀들이다. 버나드는 이웃에 대해 이런 태도를 가질 것을 거듭 가르친다. 어떤 경우 그는 관상을 위한 노력을 헛되게 하는 생활의 염려에 대해 오히려 호의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버나드의 작고한 형제 제라르는 책임감을 가지고 그 공동체를 섬겼던 사람이었다. 버나드는 감탄하여 “그는 그의 염려에 얼마나 주의하였던가!”14)라고 했다. “하나님으로 옷 입을 때, 비록 그가 우리를 돌보실지라도, 우리를 위해 염려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15) 일상의 필요한 일들에 대한 염려는 걱정을 낳을 수 있으며, 그것은 관상의 좌초라고 말해진다16)고 말한다. 그러나 버나드는 제라르에 대해 ‘나는 수도원장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그는 염려에 탁월하였다’17)고 했다. 물질과 관련된 염려를 피하라는 통상적 충고에도 불구하고, 그가 고인이 된 제라르의 염려에 대해 깊은 감사를 표한 데서 우리는 일상의 행정의 짐을 어느 정도 다른 사람에게 지워야 했던 수도원장 편의 송구함을 읽을 수 있다.
이전에 버나드는 다른 사람들에게 행정과 관리를 맡기고 관상에 전념하는 그의 수도사들에게 그들이 ‘지혜로운 자들과 어리석은 자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하였다.18) 관상하는 자들에게 열려 있는 성경의 창고에는 사람을 신민 (臣民)이 되게 하는 훈련의 포도주와, 동무가 되게 하는 자연이라는 연고와, 다스리는 자가 되게 하는 은혜의 향료가 들어 있다. 그 저자는 권위를 행사하는 데 있어 왜 은혜가 탁월하게 요청되는지를 설명한다: ‘오직 이것에서만 받을 수 있는 그 충만 때문에 …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습니다.’19)
버나드는 섬김이 성숙한 영혼의 한 표시라고 생각하였다 (9.1-3). 따라서 그는 감독자들이 감당한 섬김의 직무를 매우 감사하게 여겼다.20)
이 모두를 고려할 때, 우리는 버나드가 그의 수도사들에게 세상의 활동을 멀리하도록 권고한 것은 어떤 특별한 소명에 대해, 다른 기독교적 실재에 비해 보다 덜 시급하고 덜 중요한 행동적인 자비에 대한 일반적 평가에 견줄 수 없는, 어떤 특별한 종교적 경험으로 정당화되어야 하는 소명에 대해 말한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21)
관상과 금욕
행동과 관상의 통합을 보다 철저하게 하기 위해, 버나드는 금욕적인 노력을 행동과 결부시킨다. 초기에 헬라인 그리스도인들은 행동적인 삶을 덕을 쌓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praktik?.22) 이것을 그 통합에 추가함으로써, 버나드는 금욕이 단순히 예비적인 단계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사람은 영혼의 이 삼중의 선―한 가정에 나사로, 마리아, 마르다―을 소유하도록 애써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이웃의 필요를 채우는 능력을 가지는 한편 또 자신에 대해서 슬퍼하는 법과 동시에 하나님을 기뻐하는 법을 배우기 위함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자신에 대해 주의하고, 다른 이들에게 유용하게 되는 것이다.’23)
그렇다면 금욕은 행동적인 자비와 같은 방법으로 관상과 관련된다. 우리는 저자가 포도원의 일군들을 금욕주의자들로 묘사하고 관상의 열매에 대해 말하는 데서 이것을 본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아야 한다.’24) 금욕주의자와 사도가 함께 일하고 함께 그 열매를 나눈다. 여기서 공통된 것은 둘 다 말씀의 임재를 예비하기 위하여 노력한다는 것이다. 금욕주의자는 그 자신의 영혼에서, 사도는 다른 이들의 영혼에서.25)
버나드의 금욕주의를 그의 관상의 목적과 별도로 평가하는 것은 행동의 본질을 이루는 목표와 의도를 모른 채 행동에 대해 판단하는 것과 같다. 이런 반성을 너무도 분명한 것으로 무시하는 것은 경솔해 보인다. 사실 그것은 기독교적 금욕주의를 올바로 이해하는 길을 열어준다. 프리드리히 불프 (Friedrich Wulf)는 금욕주의가 도덕적인 것과 신비적인 것으로 양분되는데, ‘근대 금욕주의적 문학이 보여주는 대로, 전통적인 가톨릭 견해는 주요 강조점을 도덕적 금욕주의에 둔다’고 말한다.26) (물론 성 버나드의 <아가서 설교>와 같은 본문이나 혹은 보다 약한 증언들이 ‘전통적인 가톨릭 견해’를 확립할 수 있는지는 논란이 될 수 있다.) 버나드의 금욕주의가 신비적인 점을 입증하기는 어렵지 않다. 사실 그 적절한 배경에서 벗어날 때 그것은 쉽게 오해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비세속적인 권면들의 참된 의미를 인지한다면, 그것들의 긍정적인 내용을 새롭게 평가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는 첫 설교에서 자기 절제의 기독교적인 성격을 특히 강조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함이다. 저자는 독자가 솔로몬의 앞 선 두 책 전도서와 잠언서를 통달하였다는 것을 전제하고, 이제 아가서에서 영적인 것들을 다룰 것이라고 말한다 (1.2). 그것들을 통달한 독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모든 인간의 관심사와 세속적 열망들보다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27) 준비가 된 것이다. 비유적으로 말해, 그는 인간적인 것 이상의 무엇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 ‘이제 그는 역량을 갖추고 이 거룩한 관상적 설교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28) 그와 같은 준비가 없다면, 독자는 빛이 비취지만 그것을 보지 못하는 소경과 같다 (1.3).
이 비유는 중요하다. 악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영혼은 영적인 시각 자체를 갖지 못한다. 그것은 윤리적인 정직의 크고 작은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버나드가 뜻하는 의미를 그의 진술에서 분명히 읽는다: ‘자연인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지각하지 못한다.’29) 인간의 노력으로 쌓은 덕은 독자로 하여금 ‘역량을 갖추고’ 관상적인 설교로 옮겨가게 할 수 없다. 이것들은 성령과의 협동을 나타내지만, 그 새로운 역량 혹은 능력은 spiritus 그 자체, 즉 영혼 안에서 성령의 활동이다. 버나드는 수도사들에게 그 승리가 ‘여러분의 믿음’30)이라고 말한다. 그는 준비를 숙련이나 좋은 습관 또는 상당한 도덕적 정열을 낳는 활동들과 관련 짓지 않는다. 그 잘못된 조건의 특징은 ‘죄로 눌리고 육체의 정욕으로 여전히 상한 영혼’31)이라고 묘사될 수 있다. 그러나 올바른 조건은 방법적인 진보이기보다 돌이켜 새로운 방향으로 향하는 것 즉 ‘회개하려는 의지’32)이다.
버나드는 이 선결 조건에 관한 서론적인 논의에서조차 금욕적인 노력을 단순히 도덕적인 의미에서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죄를 피하려는 초보적인 도덕적 금욕주의까지도 관상과 연관시킨다. 이것은 영혼의 포기가 하나님을 보는 것 즉 최후의 만남에 대한 기대를 설명한다는 시각을 확립한다.
버나드는 아가서의 서언 ‘오, 그가 내게 입 맞추기를 원하노라!’33)에 대한 주석에서 이 사실을 지적한다. 신의 입맞춤을 향한 소원은 궁극적인 관상적 연합을 향한 소원이다: ‘입술의 부딪힘은 영혼의 포옹을 의미한다.’34)
<아가서 설교>에서 (두번째 설교 전체) 광범위하게 취급된 첫 주제는 소원 (desire) 즉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다. 거룩한 사람은 ‘소원의 사람’이다.35) 버나드의 언어로, 영혼의 금욕적 노력을 다스리는 소원은 하향적이기보다 상향적이다. 그것은 하나의 시각을 확립한다. 자주 독자를 격려할 내용은 ‘은혜가 앞서감’36)으로 말미암아, 소원은 이미 말씀의 임재라는 것이다: ‘이는 그분의 소원이 여러분의 소원을 창조하기 때문입니다.’37) 이것을 단언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57.6; cf. 요일 4:10). 아무도 스스로 갈망함으로, 즉 ‘영혼의 자연적인 움직임에서부터’38) 신의 입맞춤을 향한 소원을 형성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일단 그 입맞춤을 받으면, 그 경험이 그로 하여금 자유롭게 그것의 반복을 원하게 한다: ‘오직 먹는 자만이 배 고플 것입니다.’39) 이 선행하는 사랑이 회심과 덕의 성장을 설명한다: ‘회개하려는 의지를 주신 그 분이 절제를 유지할 수 있는 힘을 더해 주셔야 합니다.’40) 버나드는 어거스틴과 매우 흡사하여 덕을 신의 사랑의 선물 이외의 것으로는 결코 생각할 수 없었다.41)
소원과 그것의 성취인 금욕과 관상의 상호 관련은 다른 식으로도 표현된다. 관상은 자기를 아는 겸손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버나드의 과정의 개념을 이해하는 열쇠이다.42) 겸손한 영혼은 이미 진리를 소유한다. 혹은 덕을 획득하는 것은 영이 자라도록 필요 없는 것들을 제거하는 문제 즉 ‘육체의 불필요한 것들을 가지 치는’43) 문제이다. 그는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하십시오, 그러면 유익한 것이 자랄 것입니다.’44)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금욕적인 가지 치기는 항상 필요하다 (58.10). 이것을 말하는 또 다른 방법은 영혼이 말씀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 영혼을 볼 때…그것을 말씀에 시집 간 배우자로 아십시오.’45) 각 상징에서 금욕적 행위의 본질이 관상의 목표에서 확립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이 상호 관련의 표현들은 버나드의 금욕주의의 다른 국면을 말해준다. 즉 그것은 금욕과 관상은 그리스도인이 성숙하는 과정의 연속체라는 것이다. 금욕이 단순히 관상에 선행하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금욕적 행위 안에는 사랑, 임재, 소유, 보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이 행동은 관상이다. 시토 수도회의 격언을 부연 설명하면, 사랑은 그 자체로 알고-보고-관상하는 능력이다 (Amor ipse intellectus est). 물론 버나드는 최고의 완전한 사랑과 특별한 은사들을 관상으로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모든 영혼들에게 관상을 격려하기 때문에 (62.6; 83.1), 그것의 연속적인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을 보는 것에 대한 다음의 말들을 생각해 보라: 인간은 다른 사람들이나 책으로부터, 또는 ‘피조된 사물들을 통하여’46)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교회 내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의 비밀들을 꿰뚫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47) 많은 이들에게는 단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만이 주어진다.48) ‘이는 믿는 것은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망의 기쁨이 영혼 속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49) 관상의 입맞춤은 하나님의 발에 입맞춤―대화―으로 시작된다 (3.2). 마음의 청결을 얻는 것을 목적한 금욕적 행위는 지식의 조건일 뿐 아니라 이미 그것이 지식이다.50)
금욕과 사랑의 관계는 그것과 관상과의 관계보다 이해하기가 쉽다. 그것은 사랑이 의도에 대해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상 (intellecuts)이 사랑인 버나드에게 있어, 그것들의 관계는 동일하다. 한 상징이 두 가지 불―사랑의 열정이자 관상의 빛―을 연합한다. 둘 다 그것들을 선행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금욕 속에 존재한다. 버나드의 말을 빌자면, 이는 ‘여러분은 불이 그 분 앞에서 선행한다는 것과 그 분 자신이 불이라는 것을 읽기 때문입니다.’51) 금욕 안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구하는 영혼은 (57.5) 하나님의 정의이신 말씀 자신을 찾는다 (80.2).
이 동격 관계에 대한 가장 통상적인 접근은 의지의 순응을 중시한다. 버나드는 우리가 그를 볼 것이며 또 그와 같이 될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 닮음은 무엇보다 의지와 관련된다. 그는 ‘우리가 순응할 때, 우리는 변화됩니다,’52) ‘그와 같은 순응은 영혼을 말씀과 결혼시킵니다’53)라고 말한다. 이 결혼의 포옹이 관상이듯이, 의지의 순응은 금욕의 전부이다. 혹은 버나드가 말하는 대로, ‘원하는 것도 같고 원하지 않는 것도 같게 되는 그 포옹은 두 영을 하나로 만듭니다.’54) 어떤 이들이 기독교적 ‘신비주의’ (관상으로 이해되는)를 오도한 것과 같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같은 것을 원하는 것이 인간성의 말살에 대한 갈망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 질서에 대한 경멸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관상에 대한 버나드의 개념을 숙고한 데서 두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째, 관상과 행동의 관계에 대하여: 소위 그의 영성주의 (spiritualism)가 충분히 작용하는 주제에 있어서도 (버나드는 물질적 현상의 상징들이 그의 기도에 들어오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52.5]!) 그는 행동적인 형제 사랑에 품위를 부여함으로써 최고의 신학적 수준에서 배태되는 인간적 결속을 보여준다. 기도의 정적인 자비와 형제를 돌보는 행동적인 자비는 동일한 성령의 움직임이다.
둘째, 관상과 금욕의 관련에 대하여: 금욕적 노력의 특성은 그것이 관상을 지향하는 데 있다. 그것은 이미 관상인 사랑이다.
오늘날 많은 이들은 이런 사상들이 바로 클레르보의 버나드와 같은 고전적인 중세 수도사들의 사상인 것을 알게 될 때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우리는 기독교적 완전함이라는 이상, 신비적인 물러남, 거룩 증후군, 세상을 멸시함 등의 구시대성에 대해 많은 것을 들으며, 또 이런 것들이 중세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읽는다. 혹 우리는 이런 역사관 중 상당 부분을 우리의 종교적 변증의 토대로 삼고 그것을 방해하는 시각을 참지 못할 수 있다. 또 현재의 입장들을 명료히 하려는 노력에서 우리는 역사를 다른 것을 돋보이게 하는 방편으로 배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교회에 대한 최소한의 감각이라도 지닌다면, 과거가 완전히 소모품만은 아닐 것이라는 의심을 가지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제의 그리스도인과 대화함으로, 오늘의 그리스도인은 없어서는 안될 매우 긴요한 유산과 만난다. 예를 들어, 전통적으로 믿음 생활에 있어 노력과 투쟁은, <아가서 설교>에서와 같이, 심오하게 숙고되어 왔다. 만약 우리가 이 노력을 금욕주의로 부른다면 (만약 금욕주의와 같이 전통적인 개념이 현재를 위해 정당한 것으로 인정될 수 있으려면, 아마 우리는 이 노력을 금욕주의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조사되지 않은 바를 쉽게 버리는 데서 상실의 위기를 맞고 있는 많은 부요한 경험을 재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사회 정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오늘날의 신념은 이전 시대 그리스도인들이 그와 같은 행동과 관상, 그리고 금욕적 노력과 관상의 관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였는지를 앎으로써 그 깊이를 더할 필요가 있다. 성 버나드의 본문에서 그 두 관계는 금욕과 행동적 자비가 단순히 관상에서 구해지는 신적인 사랑의 두 가지 현시―하나는 자아에 대한 유익한 사랑, 다른 하나는 이웃에 대한 사랑―라는 깨달음을 통해 하나로 합쳐진다. 그 둘을 한 계명으로 만드는 것은 성경의 사상이다. 만약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내성적 모범으로 역할해야 하는 것이 바로 자아에 대한 사랑이라면, 자아에 대한 사랑이 금욕적으로 충분하지 못한 사람이 크게 고통하는 세상과 만나게 될 때, 그는 그리스도의 형상에 미흡한 자가 된다.
버나드의 관상적 저술을 읽을 때, 우리는 세속 사회에서 하나님의 일의 범위에 대해 그가 가진 의식이 오늘날 우리가 가지는 의식과 갖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행동의 열매는 그것의 모태인 나무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알았다. 성 버나드를 아는 근대의 사도라면, 권력을 의존하는 과, 비겁한 과정을 승인하는 변화무쌍한 논리, 자아-추구의 헛된 노력, 동정심이 없는 이념, 원수를 사랑하지 못하는 메시아 사상 등을 경계할 것이다. 그리고, 보다 긍정적으로, 그가 버나드가 등을 돌렸던 세속적 관심사들에 대해 열정적으로 말할 때,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실한 깨달음의 필요를 더 이상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이는 버나드에게 있어 행동적 자비는 관상의 기도와 쉽게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신의 사랑이 공평하게 나타나기를 요구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그가 스스로 이 시각을 상실할 수는 없다. 심지어 참 진보도 그 자체로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진보를 위한 그의 노력이 압제받는 자들과 굶주린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생수의 샘과 연결되기 위해 이 관상적인 <아가서 설교>로 돌아갈 수 있다. 그리고 굶주린 자들에게 돌아갈 때, 그는 또 누룩과 가루, 빵과 돌의 차이도 알게 될 것이다.
에메로 스티그만(Emoro Stiegman)
세인트 메리 대학교
Halifax, Nova Scotia.
○ 출판사 서평
클레르보의 버나드는 12세기 유럽사회에서 거장이다. 그는 명설교자로서 당시 국왕과 교황의 조언자 역할도 담당했다. 성 버나드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초월하시면서 모든 것 안에 임재하시는 분, 그러면서도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로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시는 분이심을 깨달았던 심오한 신비가이다. 그의 아가서 설교는 당시 중세 사회에서 얼마나 인기가 좋았는지 그의 설교를 들으려고 유럽 각처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사람들은 그의 설교를 평하여 마치 “꿀과 같이 달다”고 했다. 설교자 버나드는 신랑되시는 주님과 그의 연인인 인간과의 연애하는 감정과 언어를 빌려 설교한 것으로, 그는 명철한 풍유와 비유를 들어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사랑에 흠뻑 빠지게 한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