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프란츠 슈베르트
한스-요아힘 힌리히센 / 프란츠 / 2019.1.31
– 시대와 장르의 굴레를 슈베르트에게서 벗겨낸 수준 높은 음악 평전
탁월한 “음악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수많은 명곡을 창조해낸 프란츠 슈베르트(1797~1828)가 음악 역사상 대단히 중요한 작곡가라는 사실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31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살다 간 슈베르트의 작품 세계는 여러 가지 편견 속에서 잘못 이해되어오기도 했다. 특히 빼어난 문학적 감수성을 발휘한 ‘가곡 작곡가’라는 명성이 너무나 큰 나머지, 교향곡, 현악 4중주, 피아노 소나타 등에서 남긴 불멸의 기악 유산은 오랫동안 상대적으로 저평가되었다.
지난 1994년 국제 프란츠 슈베르트 연구소의 ‘프란츠 슈베르트 대상’을 받았고 지금은 『슈베르트 전망Schubert: Perspektiven』이라는 저널의 공동 편집인을 맡고 있기도 한 슈베르트 전문가 한스-요아힘 힌리히센 교수가 집필한 이 평전은 낭만적 이미지로 점철된 채 편파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슈베르트를 재조명했다. 슈베르트의 삶과 작품 세계에 대한 여러 가지 오해를 걷어내는 한편 지금까지 간과되어왔던 다양한 장르를 깊이 들여다보면서, 오랜 고민과 탐색의 시간을 거쳐 성숙한 작곡 역량을 한창 펼쳐내던 중 안타깝게 요절한 작곡가의 인생사를 재구성하고 있다.
○ 목차
머리말
1. 슈베르트의 빈
음악도시 빈
창작의 버팀목이 된 친구 그룹
최초의 프리랜서 작곡가?
비더마이어와 3월 혁명 이전기 사이: 음악적 사교 문화
2. 최초의 시도들과 대가의 기운
장르의 체계적인 섭렵
첫 번째 상징: 슈베르트의 가곡
초기 교향곡과 그 배경
3. 위기, 돌파, 자기 결정
베토벤 위기
많은 단편斷片들
미완성 속의 완벽함
4. 비운의 사랑: 음악극
징슈필에서 ‘영웅적, 낭만적 오페라’로
무대의 성공과 무너진 희망
5. 대중을 위한 작곡
대大교향곡을 향하여
실내악과 교향곡
작품 의뢰와 신앙고백 사이
6. 젊은 작곡가의 후기작
대규모 연가곡
미지의 작곡 세계와 마지막 프로젝트
뒤늦은 자각: 슈베르트와 출판업자들
7. 에필로그: 슈베르트 수용
옮긴이의 말
참고문헌
인명 찾아보기
○ 저자소개 : 한스-요아힘 힌리히센
1952년 독일 북부 쥘트섬에서 태어났다. 베를린 자유대에서 독문학과 역사학을 공부하고, 김나지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베를린 자유대에서 음악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9년부터 스위스 취리히 대학교 음악학 교수로 일하고 있는 그의 주된 연구 분야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와 프란츠 슈베르트, 음악분석학 등이다. 국제 프란츠 슈베르트 연구소의 ‘프란츠 슈베르트 대상’(1994)을 받은 한편, 유럽 아카데미와 오스트리아 학술원 회원에 선출되기도 했다.
슈베르트의 삶과 작품에 대한 간명하고 흥미로운 통찰을 제공하는 『슈베르트 전망Schubert: Perspektiven』 및 『음악학 논총Archiv f?r Musikwissenschaft』 같은 저널의 공동 편집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브루크너 교향곡: 음악적 안내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프란츠 슈베르트 기악의 소나타 형식 발전 연구』 등의 책을 집필했다.
– 역자: 홍은정
이화여자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2004년 독일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1960년대 현대음악에서의 그룹 임프로비제이션」이라는 논문으로 음악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하여 문화예술 교육 분야에서 일했으며, 음악 서적을 꾸준히 번역, 소개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베토벤』, 『젊은 예술가에게』, 『음반의 역사』, 『알프레트 브렌델 아름다운 불협음계』, 『리트, 독일예술가곡』, 『혹등고래가 오페라극장에 간다면』, 『그가 사랑한 클래식』, 『피아노를 듣는 시간』, 『현대미술에 관한 101가지 질문』, 『세계의 오케스트라』, 『클래식 음악에 관한 101가지 질문』, 『지휘의 거장들』, 『음악가의 탄생』 등이 있다.
○ 책 속으로
그가 선뜻 위험천만한 자유 예술가의 삶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기숙학교 시절부터 계속해서 열광적인 친구들과 추종자들을 겪어왔기 때문이다. 1816년 4월 슈파운은 슈베르트가 괴테의 시에 붙인 곡들을 한 권으로 모아 긴 편지와 함께 이 시성(詩聖)에게 보냈다. 슈파운은 여러 면에서 가장 용의주도하고 적극적인 친구였는데, 그 편지에 대한 답장은 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시도만으로도 벌써 확실해졌다. 처음 부모 집에서 나올 때 이미 슈베르트는 평생의 작곡 활동 중에서 상당 부분을 끝낸 상태였다(600개가 넘는 가곡 중에서 200개를 작곡했다). 리히텐탈 청중의 열광적인 반응과 친구들의 부단한 호응과 격려, 더 많은 지인으로부터 작곡 의뢰를 받으면 상당한 사례금을 벌어들일 수 있으리라는 전망 덕분에 어느 정도 안심한 상태에서 교사직을 포기할 수 있었다. -29쪽
처음 3년 동안의 초기 기악곡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슈베르트의 작업실에 대한 좀 더 깊은 통찰력을 가질 수 있다. 관찰자의 입장과 시각에 따라 그의 작업실은 어수선한 공작실로 비칠 수도 있고, 아니면 기발한 실험실로 보일 수도 있다. 많은 초기작에는 구조의 모호함을 지향하는 슈베르트의 야망이 드러나 있다. 나중에는 이 역시도 성숙한 작곡가의 핵심적인 미학적 특성으로 꼽힐 테지만, 아직은 이 모든 새로운 음조가 구조의 불명확함을 불러올 뿐이었다. 1813년 10월에 작곡한 교향곡 제1번(D. 82)에 가서야 비로소 구조에 대한 통찰력이 생기고(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돌파구였다), 작곡 수단도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된다. 이제 슈베르트가 기악에서 다루는 소나타 형식은 더 이상 제멋대로가 아니라 훨씬 명료해지고, 놀랄 만큼 독특한 음색이 더욱 두드러지게 된다. -43~44쪽
베토벤과의 대결이 불가피하다는 충격적인 깨달음은 슈베르트가 작곡가로 성장해나가는 과정에서 진작부터 싹텄다. 진지하고 믿음직한 목격자인 요제프 폰 슈파운은 어린 슈베르트가 남긴 유명한 말을 전해주었다. 그가 언제 그런 말을 했는지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아마 기숙학교 시절 초반이었을 것이다. “은밀하게, 나는 내가 무언가를 이룰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베토벤 이후에 누가 해낼 수 있단 말인가?” 앞뒤 맥락을 따져보면, 이 발언은 열 살 더 많은 슈파운이 슈베르트의 첫 가곡을 열광적으로 칭송한 데 대한 반응이었다. 슈베르트는 여기서 “베토벤 이후”의 근본적인 문제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며 비판적으로 이해했다. 비판적인 자기 이해가 이렇게나 일찍, 더군다나 가곡 분야에서 행해졌다는 사실이 어딘가 모르게 석연치 않아 보이지만, 자의식 강한 어린 작곡가의 한숨은 베토벤이라는 철옹성 같은 존재에 대한 깨달음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 당시 깨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베토벤의 의미를 이해했다. 그럼에도 슈베르트 초기작에서는 훗날 슈만과 브람스가 현악 4중주와 교향곡이라는 까다로운 장르를 개척해나가는 긴 여정에서 마주하게 되는 주저함이나 자기 의심 같은 것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67쪽
슈베르트는 1822년 10월 30일에 《미완성》 교향곡 b단조(D. 759)를 악보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가 로사우에 있는 본가에 잠시 돌아와 있을 때였다. 1821년 8월에 작곡한 교향곡 E장조에 이어, 베토벤 교향곡에서 등장한 적이 없는 조성으로 작곡하는 두 번째 시도였다. 우연은 아니었을 것이다. 《미완성》 교향곡의 첫 악장은 슈베르트가 처음으로 자기만의 선율적, 화성적 어법을, 베토벤에 의해 숭고하고 장대한 것으로 격상된 대규모 교향곡 형식과 설득력 있게 결합해낸 모델이다. 여기서 그가 찾아낸 해법은 앞서 현악 4중주 c단조나 교향곡 E장조의 첫 악장에서 시도했던 형식 실험의 성과가 직접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미완성》 교향곡은 깊숙한 저음부에서부터 서서히 상승하는 선율형으로 시작하는데, 여기에는 응축된 서주, 함축적인 주요 주제, 교향악의 모토 같은 다양한 기능이 구조적으로 융합되어 있다. 사실 이런 융합은 형식의 ‘이전’ 또는 ‘너머’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 동기가 울리고 나면, 특이한 화성 구조를 지닌 제시부의 두 주요 주제가 등장한다. b단조의 제1주제는 긴박하면서도 애수 어린 초조함이 두드러지는 반면, G장조의 제2주제는 흥겨우면서 거의 방만한 듯한 민요풍이다. 이 두 주제를 이어주는 것은 짧은 경과부인데, 홀로 울리는 호른 음향이 제2주제를 마법으로 불러내는 듯하고 여기서 슈베르트 특유의 ‘경이로운 조바꿈’이 등장한다. -76~77쪽
슈베르트는 깊이 있는 화성과 복잡한 구조로 유절가곡이라는 모델에 얼마나 다채로운 변화를 줄 수 있는지를 확실히 보여주었다. 《겨울 나그네》의 첫 곡은 음울한 현악 4중주 D. 810과 같은 d단조인데, 4절에서 갑자기 D장조로 바뀌었다가 다시 쓸쓸한 단조로 복귀한다. 이처럼 시시각각 다채롭게 변하는 화성은 슈베르트의 또 다른 특성이며, 이는 1820년대 후반에 나온 거의 모든 주요 작품에 영향을 끼쳤다. 이것 말고도 이 노래는 ‘창작의 핵’(아마 이것이 가장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을 다루는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연속적인 8분음표의 방랑자 리듬이 가곡 전체에 깔려 있다. 이 리듬은 단순한 음화(音?)가 아니라 부단한 시도와 노력의 결과로 얻어진 음악적 상징이다. 불안감을 자아내는 마지막 노래 <거리의 악사>도 마찬가지인데, 피아노 저음부에서 계속되는 공허한 5도 음정은 뚜렷한 이미지를 갖고 있으며 화성과 모티프의 최소 단위로서 곡 전체의 분위기를 이끄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까지 급진적인 모델은 아마 음악사 전체를 통틀어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슈베르트 연가곡은 정교하고 체계적인 구조를 지닌 예술품이며, 물론 뮐러의 시 또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방랑은 방아꾼의 즐거움Das Wandern ist des M?llers Lust>이나 <보리수Der Lindenbaum> 같은 노래는 이후 새로운 선율을 덧붙이거나 살짝 편곡해서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민요가 되었다. -140~141쪽
1828년 7월 프롭스트 출판사는 피아노 3중주를 누구에게 헌정하고 작품번호를 어떻게 매길 것인지 물어왔고, 슈베르트는 8월에 이에 대해 간결하지만 의미심장한 답신을 보냈다. 최초의 프리랜서 작곡가의 기념비를 세울 때 같이 새겨 넣어도 좋을 만큼 중요한 문구이다.
“존경하는 귀하께! 3중주의 작품번호는 100번입니다. 이 판본이 한 치의 흠도 없었으면 하고, 그렇게 출판되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습니다. 이 곡은 이를 마음에 들어 할 사람들에게만 헌정될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수익을 낳는 헌사일 것입니다. / 프란츠 슈베르트 삼가 올림”
이제껏 출판된 작품번호 중에서 가장 높은 100에는 명백한 상징성이 깃들어 있다. 슈베르트는 외국에서 출판되는 첫 악보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자기 음악을 이해해줄 광범위한 대중을 위해 개인을 겨냥한 헌정을 자랑스럽게 포기했다. 이제 막 국제 무대로 날아오르려는 작곡가의 최후는 그러나 안타까웠다. 피아노 3중주의 견본 악보가 11월 빈에 도착했을 때, 슈베르트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161~162쪽
20세기 중반부터 슈베르트 음악의 학문적인 수용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지금까지 독보적으로 군림하던 가곡 작곡의 영역을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서거 100주년을 맞은 1927~1928년 무렵만 해도 슈베르트가 기악에서 베토벤의 아류라 할 만한 성과만을 이루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여기에는 고전적인 소나타 형식을 제멋대로 다루는 그의 방식이 언제나 주요 논거로 제시되었다. 1820년 이전에 작곡된 초기 작품에서 딸림조로 시작하는 재현부라든가, 원숙기 작품에서 드러나는 여러 독특한 형식적, 화성적 특성 같은 그만의 독창적인 개성은 이해받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의 서투른 기법을 비판하거나 혹은 그의 사랑스러운 기묘함을 관대하게 용서했다. 불필요한 옹호와 부당한 비판이 오랫동안 슈베르트 음악에 대한 극단적인 토론을 부추겨왔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사례들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지금은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가 웬만한 피아니스트라면 한번쯤은 도전하는 레퍼토리가 되었지만, 이것은 선구자 아르투어 슈나벨(1882~1951)의 고독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해진 것이었다. 교향곡 C장조 《그레이트》에 대한 로베르트 슈만의 감격적인 표현인 ‘천상의 길이’조차도 왜곡과 조작을 통해 과도한 ‘길이’로, 악의적으로 변질되기도 했다. -168쪽
○ 출판사 서평
– 슈베르트의 생애를 바라보는 이들의 해묵은 편견과 클리셰
19세기 초반, 나폴레옹 전쟁에 이어 도래한 왕정복고 시대의 억압적 분위기가 지배하던 오스트리아 빈에서 탁월한 감수성과 “음악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수많은 명곡을 창조해낸 프란츠 슈베르트가 음악 역사상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라는 사실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31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살다 간 슈베르트의 작품 세계는 여러 가지 편견 속에서 일부 측면만 부각되어왔고, 그의 전기들 또한 클리셰로 뒤덮여 있다.
스위스 취리히 대학교의 음악학 교수 한스-요아힘 힌리히센은 이를 두고, “슈베르트는 19세기 후반에 도시성벽이 철거되고 링슈트라세(순환도로)가 새로 들어서면서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린 옛 빈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엄격한 통제와 검열이 판을 치던 사회 속에서 정치적인 것을 멀리하고 소시민적 안락함을 추구하던 이른바 ‘비더마이어’적 풍조를 대표하는 예술가라는 이미지가 따라붙은 것이다. 슈베르트와 함께 어울렸던 친구들이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수십 년이 지나 당시를 회고하면서 어느 정도 미화를 한 탓도 있을 것이다. 특히 빼어난 문학적 감수성을 발휘한 ‘가곡 작곡가’라는 슈베르트의 명성이 너무나 큰 나머지, 교향곡, 현악 4중주, 피아노 소나타 등에서 남긴 불멸의 기악 유산은 오랫동안 상대적으로 저평가되었다.
– 친구들의 힘을 믿고 프리랜서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하다
슈베르트가 태어난 1797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은 이미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등 걸출한 음악가들의 활동 무대로 각광받는 음악의 도시로서 명성을 쌓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의 이른바 ‘빈 고전주의’ 시대를 지나,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열린 빈 회의 이후 밀어닥친 정치적, 사회적 변화와 함께 음악계 또한 새로운 토대 위에 놓이게 되었다.
1800년 이전의 음악 생활이 대체로 귀족이 주도하는 소수 중심의 활동이었다면, 이제 음악은 시민계급의 주도 아래 가정이라는 사적인 영역을 무대로 펼쳐지기 시작했다. “1790년대에 귀족의 체계적인 비호 덕분에 비교적 일찍부터 견고한 명성을 얻었던 베토벤은, 이미 안정적인 작곡가로서 기존 제도의 붕괴를 무사히 견뎌낼 수 있었다. 반면 슈베르트가 음악적으로 성장한 시기는 정확히 반나폴레옹적인 왕정복고의 전성기에 해당했고, 빈 소시민계급 출신인 슈베르트는 비더마이어 시대의 가정 중심의 음악 문화와 더불어 성장했다.” 한마디로 말해, “베토벤의 빈은 슈베르트의 빈이었지만, 슈베르트의 빈은 베토벤의 빈이 아니었다.”
이런 음악 문화 속에서 아버지와 형들에게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배운 슈베르트는 그 재능을 인정받고 음악 영재들을 위한 빈 기숙학교에 입학했다. 여기서 그는 요제프 폰 슈파운을 비롯한 여러 친구들을 사귀었는데, 학업을 다 마치지 못하고 학교를 그만둔 뒤에도 이 교우 관계는 꾸준히 지속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슈베르트를 중심으로 하는 여러 모임이 계속 생겨났다. 이런 네트워크는 그의 길지 않았던 삶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교사 집안에서 태어나 교사를 천직으로 알며 자란 슈베르트가 작곡가의 길로 나서기로 결심했던 것도 이러한 친구들의 존재 덕분이었다. “슈베르트는 여러 그룹과 모임 덕분에 사회적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었고, 그 덕에 생활해나갈 수 있었다. 부모에게서 독립한 첫해만 해도 그는 돈 한 푼 내지 않고 쇼버와 같이 지냈다. 슈베르트가 온전히 홀로 산 것은 세 번에 불과한데, 그것도 아주 잠깐 동안씩이었다. 안정적인 교사직을 과감히 포기할 때에도, 그는 틀림없이 이 네트워크가 자신의 가장 중요한 보호막이 되어주리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슈베르트의 앞 세대 음악가인 모차르트는 연주회와 레슨을 하거나 궁정에서 일하며 돈을 벌어야 했고, 베토벤도 젊은 시절 연주 활동을 하면서 마지못해 다른 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하지만 “슈베르트는 프리랜서 작곡가라는 모델을 조금씩 성공적으로 실현해나갈 수 있었던 최초의 작곡가에 해당한다.” 몇 차례에 걸쳐 잠깐씩 맡았던 “에스테르하지 백작의 음악 가정교사 자리를 제외하면, 그가 부모에게서 완전히 독립한 이후로 작곡이 아닌 다른 수입원에 의존한 적은 없었다.”
– 위대한 가곡의 그늘에 가려진 슈베르트의 기악적 유산
잘 알려져 있다시피 슈베르트는 위대한 ‘가곡 작곡가’였다. 기숙학교 시절부터 작곡을 시작한 그는 유독 가곡에서만큼은 처음부터 탁월한 성과를 보여주었다. 그 이유를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다른 장르와 달리 슈베르트가 가곡에서 그렇게 일찍부터 성숙한 결과물을 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힘들지만, 무엇보다 그의 월등한 시적 재능에서 출발해야 할 것 같다. 이미 기숙학교 시절의 친구들도 이 재능을 알아보았다. 슈베르트는 시의 형태로 접하게 된 거의 모든 것을 음악으로 창작했다.” 벌써 10대 후반에 작곡한 유명한 괴테 가곡 《실 잣는 그레트헨》과 《마왕》을 통해 감정의 흐름과 격정을 설득력 있게 펼쳐냈던 슈베르트는 10여 년 뒤 발표한 두 연가곡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와 《겨울 나그네》를 통해 “가곡 예술의 정점에 도달”했다.
그렇지만 슈베르트는 가곡 외에도 초창기부터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시도했다. “어린 초보 작곡가는 당연하다는 듯이 처음부터 모든 장르를 적극적으로 다루었다. 도이치 번호 10번여까지의 작품들만 보더라도 피아노곡, 가곡, 4중주 혹은 5중주 편성의 현을 위한 실내악곡, 교향곡, 오케스트라를 위한 서곡, 연극을 위한 서곡, 미완성으로 남은 오페라 《거울의 기사Der Spiegelritter》(D. 11) 등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슈베르트는 집안의 현악 4중주단에서 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했다. 아마도 이런 가정에서의 실내악 활동이 초기 실내악곡이 탄생한 배경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초기 교향곡과 서곡 등은 기숙학교 오케스트라를 비롯한 소규모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를 위해 작곡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가족과 친구들을 위한 작품에서 대중을 겨냥한 대작으로
1824년 봄, 슈베르트는 무척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매독 때문에 오랫동안 빈 종합병원에서 수은 치료를 받느라 몸이 허약해지고 머리까지 빠졌다. 친구들의 모임도 프란츠 폰 쇼버 같은 핵심 멤버가 외국에 나가 있는 통에 와해될지도 모를 지경에 처해 있었다. 더구나 야심 차게 준비하던 오페라 《피에라브라스》의 공연이 무산되면서 빈 오페라계에 진출하려던 꿈도 꺾이고 말았다. 하지만 실망도 잠시, 슈베르트는 다시 한번 용기를 내어 ‘기악’ 작곡으로 눈을 돌렸다. 더 나아가 아예 과거와는 다른 수준에서 작곡에 접근했다. 초기에 “친구와 가족을 위해 작곡했던 실내악곡이라든가 기숙학교 오케스트라나 하트비히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를 위해 작곡했던 관현악 서곡과 초기 교향곡”을 넘어 훨씬 더 광범위한 대중을 겨냥한 작품을 만들기로 결심한 것이다.
전문적인 직업 작곡가로서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한 슈베르트는 현악 4중주 d단조(《죽음과 소녀Der Tod und das M?dchen》, D. 810)를 비롯한 실내악곡을 거쳐 ‘대교향곡’을 향해 나아간다. “이 계획을 슈베르트는 교향곡 C장조 《그레이트》(D. 944)로 실현했다. 〔…〕 나름 성공적이었던 여섯 개의 초기 교향곡 이후 처음으로 (유일하게) 완성된 교향곡이었다.”
가곡뿐만 아니라 기악에서도 불후의 대작을 내놓은 작곡가로서 슈베르트의 가치를 일찍부터 알아본 이들은 학자나 비평가가 아니라 후세대 작곡가들이었다. “1839년에 슈베르트의 형 페르디난트에게서 C장조 교향곡 《그레이트》를 발견한 사람은 로베르트 슈만이었고,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와 프란츠 리스트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슈베르트 음악에 매료되었다. 슈베르트를 평생 동안 깊이 존경했던 요하네스 브람스는 그의 작품을 일찍 접한 덕분에 베토벤의 그늘에서 마침내 벗어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슈베르트의 방식은 현대 작곡가들에게까지 영감을 주고 있다. “최근에는 장 바라케, 루치아노 베리오, 볼프강 림, 디터 슈네벨, 한스 첸더 같은 유럽 작곡가들이 시간을 비선형적으로 구조화하는 슈베르트의 새로운 방식에 깊이 매료되었고, 미국 작곡가 모턴 펠드먼은 자신이 열렬한 슈베르트 신봉자라고 고백했다.”
지난 1994년 국제 프란츠 슈베르트 연구소의 ‘프란츠 슈베르트 대상’을 받았고, 지금은 『슈베르트 전망Schubert: Perspektiven』이라는 저널의 공동 편집인을 맡고 있기도 한 슈베르트 전문가 힌리히센 교수가 집필한 이 평전은 낭만적 이미지로 점철된 채 편파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슈베르트를 재조명했다. 슈베르트의 삶과 작품 세계에 대한 여러 가지 편견과 오해를 걷어내는 한편 지금까지 간과되어왔던 다양한 장르를 깊이 들여다보면서 작곡가 슈베르트의 인생사를 재구성하고 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