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프랑스 혁명과 마리 앙투아네트
피에르 시프이로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95.4.1
– 프랑스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권력의 희생양으로 사라 진 마리 앙투아네트. 부귀영화를 누리다 짧은 생애를 마감한 마지막 왕비의 최후 60일 이야기
역사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화려했던 베르사유 궁전의 생활 등으로 우리가 흔히 악녀로 알고 있는 인물 중 하나 일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공주였던 그녀는 왜 프랑스의 왕비가 되어야 했을까? 무엇이 그녀를 끝없는 사치와 향락으로 내몰았나?
마리 앙투아네트는 1755년 11월 2일 오스트리아 빈이 고향이다. 그녀는 오스트리아의 여 황제 합스부르크가문의 마리아 테레지아와 로트링겐 가 출신 프란츠 슈테판사이에서 태어나는데,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의 가문인 합스부르크가문은 18세기 유럽왕실에서 프랑스의 부르봉가문과 더불어 양대 축을 이룰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이 있는 가문이었다.
13세기 독일 지역에서 힘이 약한 가문들 중 하나 였던 합스부르크가가 유럽왕실의 큰 축을 차지하기 까지는 이유가 있었다. 이무렵 신성로마제국의 제위는 이전 제후들이 황제를 선출하는 식으로 되어 있었는데 힘이 강한 제후들이 권력다툼을 하는 사이 합스부르크가의 루돌프1세에게 황제 자리가 돌아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예상치 못하게 야심이 큰 인물이었다. 그는 정략결혼을 통해 가문의 영토를 지속적으로 꾸준히 넓혀 나갔다. 그 결과 15세기에 이르러서는 서부유럽과 동부유럽을 걸친 광대한 영토를 지닌 가문으로 부상했고, 16세기 카를5세와 에스파냐황실의 혼례로 최전성기를 맞게 된다. 이무렵 유럽대륙의 전체가 이가문의 소유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소유영토가 많아진다.
그 이후 오스트리아계와 에스파냐계가 분리되기는 하지만 18세기에도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가문으로 자리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러한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가의 유일한 상속녀 였다.
원래 그녀에겐 오빠가 있었는데, 요절하여 아버지 카를 6세의 유일한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여자는 로마제국의 왕이 될수 없었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 중 일부는 아들만이 왕위를 상속 받을 수 있다고 규정해 놓았었기 때문에 카를 6세의 차기 제위의 후계자에 대한 관심으로 유럽왕실은 달아올랐다.
○ 저자소개 : 피에르 시프이로
최근작으로 ‘프랑스 혁명과 마리 앙투아네트’ 등이 있다.
– 역자 : 용경식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86년 『동서문학』 제정 제1회 번역문학상을 수상했다. 옮긴 책으로 소설 『야간비행』 『자기 앞의 생』 『투쟁 영역의 확장』 『고문하는 요리사』 『어제』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전기 『조지 오웰, 시대의 작가로 산다는 것』 등 다수가 있다.
○ 책 속으로
배심원들이 검사가 적용한 법에 따른 구형이 옮다는 데에 만장일치로 동의함에 따라서, 본 법정은 마리 앙투아네트, 다시 말해 오스트리아의 로렌, 카페 과부에게 사형을 선고합니다.
작년 3월 10일의 법에 따라서 프랑스 영토 내에 있는 재산은 공화국을 위해서 압수 수용됨을 선언합니다.
검사의 청구에 의해서 본 판결을 혁명 광장에서 집행할 것과, 프랑스 전역에 활자화하여 방을 붙일 것을 명합니다. — p.261
○ 프랑스 혁명과 마리 앙투아네트
- 프랑스 혁명
1789년 5월 5일 프랑스 왕정은 재정 파탄을 해결하고자 삼부회의를 베르사유 궁정에서 개최한다. 3%의 귀족과 성직자, 그리고 97%의 시민이 참여하는 회의였다. 구성은 양측 대표단 300 대 300으로 600명으로 구성되었다.
회의는 양측의 첨예한 대립으로 끝났다. 그해 6월 20일 시민 대표들은 테니스코트에 모여 새로운 국민의회를 만듦으로써 혁명의 서곡을 울린다. 절대왕정에 반기를 든 최초의 사건이다.
그 이후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여 시민들이 무장하게 되고, 1789년 8월 26일 근대 민주주의 발전의 토대가 된 인권선언을 가결한다. 인간의 자유, 평등, 국민주권, 법 앞의 평등과 사상의 자유, 과세의 평등 등 봉건 영주와 귀족의 특권 폐지를 내세웠다.
1789년 10월 혁명의 불을 댕긴 주요 사건 중 하나가 베르사유 궁전에 머물던 국왕을 파리로 귀환시킨 사건이다. 그리고 이 시위대에는 파리 하층 시민 부녀자들 특히, 시장에서 생선을 팔던 여인들이 선봉에 섰다.
80년 전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해 내고 화형 당해 죽은 ‘잔 다르크’도 19세의 여성이었다. 1791년 국왕의 파리 탈출 시도와 바렌에서의 체포로 파리로 송환되는 사건, 1793년 단두대에서 국왕의 처형과 이후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 1794년 공포정치의 상징인 로베스피에르의 처형과 1799년 군사적 독재를 수립한 나폴레옹의 “혁명은 끝났다”는 말과 함께 프랑스 대혁명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프랑스 대혁명에 얽힌 이야기
.무능하고 소심한 루이 16세의 현실 인식
굶주림에 지친 시민들이 혁명의 깃발을 들고 일어선 당시 루이 16세는 사냥에서 돌아와 일기에 ‘오늘은 아무것도 못 잡았다’고 썼다고 한다. 그리고 하인에게 ‘폭동’이냐고 물어 하인은 ‘혁명’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아무런 준비 없이 루이 15세가 전투에서 패하고 천연두로 사망하여 루이 16세는 왕이 되었다. 위기에 놓인 왕국을 다스리기에는 한없이 부족한 왕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
마리 앙투아네트는 1755년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 프란츠 1세와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국의 안전을 위해 프랑스와 동맹관계를 수립하고자 마리 앙투아네트는 루이 16세와 정략결혼을 함으로써 비극이 시작된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관련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오르내린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죽음 아니면 빵을 달라”는 시민들에게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주라”는 말이다. 이 말은 실제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마리 앙투아네트는 소작인의 밭을 마차를 몰아 망치는 일이 당시 프랑스 왕실의 전통이었으나 이를 거부한 유일한 왕비였다고 한다. 아마 당시 프랑스 왕실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낳은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는 단두대에 오르기 전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을 데리러 올 마차가 왕실마차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온 것은 지붕도 없는 사형수 호송 마차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파리 시내를 거쳐 단두대로 향했다고 한다.
세 번째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머리 스타일이다. 당시 이국에서 온 왕비의 패션은 귀족사회에서는 늘 관심의 대상이었다. 특히 마리 앙투아네트는 머리 스타일에 집착하여 1m가 넘는 올림머리를 하였고, 이를 치장하기 위해 몇 시간이 소비되었다고 한다.
실제 프랑스 왕실의 재정 파탄은 선대의 향락과 미국독립전쟁 지원이 가장 결정적 원인이었다. 물론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치와 낭비가 왕실재정을 더 어렵게 한 것은 사실이다. ‘적자부인’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아마 파티를 좋아하고 독특한 패션으로 치장하기를 좋아한 탓일 것이다.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
마리 앙투아네트를 가장 잘 표현한 일화는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일 것이다.
출세욕에 눈이 멀었던 귀족 갑부 로앙 추기경은 당시 왕실의 여자 절반과 잠자리를 했을 만큼 호감형 제비였다. 이에 우쭐한 그는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비방 팜플릿을 만들어 배포하기도 했는데 이를 마리 앙투아네트가 알게 되어 후에 로앙이 관직에 오르는 것을 저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몰락한 귀족 타모르 백작 부인은 이를 알고 로앙 추기경에 접근하여 자신이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 친하다고 하며 중간 다리 역할을 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던 중 한 보석상이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가져와 허영심을 부추겼으나, 이미 바닥난 왕실재정을 알고 있는 마리 앙투아네트는 루이 16세가 사 주겠다는 것도 거부하였다. 그런데 타모르 백작부인이 로앙에게 접근하여 왕비가 다이아몬드를 갖고 싶어 하니 이를 구매하여 선물한다면 화해할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그래서 다이아몬드 구매비를 받아내었고, 다이아몬드 상인에는 왕비가 마음을 바꿨다며 돈은 나중에 주기로 하고 다이아몬드를 받은 후 잠적한다.
후에 모든 것이 밝혀지기는 했지만, 모든 누명을 마리 앙투아네트는 뒤집어쓴다. 문제는 시민들에게 이러한 사기극이 먹혀들 만큼 왕비의 신뢰가 땅에 떨어져 있었다는 사실과 사건을 통해 알게 된 관직 매매의 폐습, 왕실의 사치, 귀족들의 부도덕한 행위였다. 특히 왕과 함께 파리 탈출을 시도한 왕비의 행위는 시민들의 신뢰를 떨어뜨리게 한 결정적인 배신행위였다. 하나의 진실은 왜곡되었지만, 그 동안 아홉 개의 불신과 거짓을 행했다면 시민들은 그 한 가지의 진실에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오늘날 자유, 평등, 박애를 가져온 프랑스 대혁명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권위를 믿지 말고 스스로 생각해보고 시험해보라”는 계몽사상으로 깨우친 시민 정신의 승리다. 그 승리의 길에 일부 소수의 귀족과 성직자들이 단두대에 피를 뿌렸지만, 그 몇 배의 시민들은 이름도 없이 죽어갔다. 그렇게 성장한 것이 오늘날의 프랑스 민주주의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