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 1, 2
MEMOIRES D’HADRIEN (1971)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 민음사 / 2008.12.26
–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최초 여성 회원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의 대표작
.페미나 바카레스코 상,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상 수상작
.고대 로마 제국의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죽음을 앞두고 전하는 불멸의 잠언들
“사실 (史實)과 부합하는 진짜 회상록”이라 평가받는 역사소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은 로마 제국의 14대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병상에서 죽음을 예감하고 지난날을 고백하는 일종의 회고록으로, 그의 입을 통해 잠언과도 같은 삶의 비밀을 전하고 있다.
삶과 죽음과 사랑에 대한 단상에서부터 자신이 생각하는 인간사의 본질과 이상향, 황제가 지켜야 할 덕목, 권력과 제국의 흥망성쇠에 대한 비밀, 그리고 자신이 사랑한 소년들에 대한 내밀한 고백에 이르기까지. 하드리아누스는 때로는 한 인간으로서 아름답고 비밀스러운 고백을 전하는 동시에, 때로는 한 제국의 황제로서 파우스트적인 통찰력을 보이며 예언자와 같은 모습까지 보인다.
삶의 진실에 대한 그의 웅숭깊은 성찰은 아름답고 단단한 문장 속에서 빛을 발한다.
또한 치밀한 고증을 통해 2세기 로마의 모습이 완벽하게 재현되어 있으며, 역사 속 황제는 완전한 한 인간의 목소리로 소설 속에 살아 있다.
○ 목차
[1권]
방황하는 어여쁜 영혼
다양, 다종, 다형
확고해진 대지
[2권]
황금시대
지엄한 군율
인내
창작 노트
자료 개괄
작품 해설 곽광수
작가 연보
○ 저자소개 :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Marguerite Yourcenar)
1903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프랑스인 아버지와 벨기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열흘 만에 어머니를 잃었고, 정규 교육 대신 개인 교습을 받았다. 라틴어와 그리스어는 아버지가 직접 가르쳤으며 아버지와 함께 고전 작가들과 19세기 유럽 문학을 읽고 여행을 다녔다. 영국에서 영어를 배우고 독학으로 독일어를 공부했다. 열여섯 살에 그리스 신화의 이카로스에 대한 장시를 썼으며, 아버지가 이를 자비로 출간해 주었다. 이때부터 본명 ‘크레얭쿠르 (Crayencour)’의 철자를 뒤바꾸어 만든 ‘유르스나르’를 필명으로 사용했다.
1929년 『알렉시, 또는 부질없는 투쟁에 대하여』를 잡지에 게재한 후 소설을 쓰며 유럽 여러 곳을 여행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마운트데저트 섬에 정착했다. 1951년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을 출간하여 페미나 바카레스코 상과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상을 받았으며 이때부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에세이집 『확인 조건부』(1962)로 콩바 상과, 『암흑 작업』(1968)으로 페미나 상을 받았고, 그 후에도 모나코 문학상, 프랑스 국가 문화 대상, 아카데미 프랑세즈 대상을 받았다. 번역에도 관심이 많아 헨리 제임스와 버지니아 울프, 그리스 시인 콘스탄틴 카바피의 작품들을 프랑스어로 번역 출간했다.
하버드 대학교를 비롯한 미국의 네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와,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며, 외국인 자격으로 벨기에 왕립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된 데 이어, 마침내 1981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최초의 여성 회원이 되었다. 1987년 마운트데저트 섬에서 일기를 마쳤다.
– 역자 : 곽광수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프로방스 대학교 문과대학 불어불문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불어교육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저서 『가스통 바슐라르』, 『가난과 사랑의 상실을 찾아서』 등과 역서 『공간의 시학』, 『예지』, 『새벽의 삼종에서 저녁의 삼종까지』, 『구조 시학』 등이 있다.
○ 출판사 서평
– 1951년 출간한 이후 페미나 바레스코 상과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상을 받았고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 준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5, 196)으로 출간되었다.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가 근 30년간의 치밀한 고증과 치열한 집필 정신으로 남긴 역작이다. 40명으로 회원 수가 제한되어 있으며 340여 년간 단 한 명의 여성 회원도 받아들이지 않았던 아카데미 프랑세즈는 그 업적을 인정해, 1981년 그녀를 최초의 여성 회원으로 선출했다. “사실 (史實)과 부합하는 진짜 회상록”이라 평가받는 역사소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은 로마 제국의 14대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병상에서 죽음을 예감하고 지난날을 고백하는 일종의 회고록으로, 그의 입을 통해 잠언과도 같은 삶의 비밀을 전하고 있다. 전 (前) 서울대 교수 곽광수는 10여 년에 걸친 작업 끝에 원문의 단어 하나 놓치지 않는 충실한 번역을 완성하였으며, 400개가 넘는 각주를 통해 2세기 로마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했다.
– “마지막 자유로운 인간들의 세기”의 황제 하드리아누스 : 파우스트적인 통찰력으로 삶의 비밀을 전하는 현인의 목소리
“키케로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이르는 시기는, 이교의 신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그리스도는 아직 나타나지 않아, 인간 홀로 존재했던 유일한 시대였다.” 유르스나르는 플로베르의 이 문장에 영감을 받아 “마지막 자유로운 인간들의 세기”를 살았던 황제 하드리아누스의 이야기를 구상한다. 하드리아누스는 말한다. “나는 단순히, 인간이었기에 신이었다.” 소설 속에서 드러나는 하드리아누스의 모습은 황제이자 탁월한 군사 전력가이고, 학자이자 시인이며, 쾌락과 정열의 인간이기도 하다. 전인적인 모습을 보이는 동시에 “현자에 가까운 인간”의 모습을 보인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은 로마 제국의 14대 황제이자 오현제 (五賢帝) 중 세 번째로 기록되는 하드리아누스가 불치병에 걸린 후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예감하고 지난날을 회상하며 자신이 후계자의 후계자로 지목한 마르쿠스에게 그동안 느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전하는 회고록이다. 삶과 죽음과 사랑에 대한 단상에서부터 자신이 생각하는 인간사의 본질과 이상향, 황제가 지켜야 할 덕목, 권력과 제국의 흥망성쇠에 대한 비밀, 그리고 자신이 사랑한 소년들에 대한 내밀한 고백에 이르기까지. 하드리아누스는 때로는 한 인간으로서 아름답고 비밀스러운 고백을 전하는 동시에, 때로는 한 제국의 황제로서 파우스트적인 통찰력을 보이며 예언자와 같은 모습까지 보인다. 삶의 진실에 대한 그의 웅숭깊은 성찰은 아름답고 단단한 문장 속에서 빛을 발한다.
우리들의 모든 유희 가운데 그것은 (사랑은) 영혼을 전복해 버릴 위험이 있는 유일한 것이며, 또한 그 유희를 하는 사람이 필연적으로 육체의 광기에 자신을 방기하게 되는 유일한 것이다. (중략) 인간이 이보다 더 단순하고 더 불가피한 이유들로 결정을 내리고, 선택된 대상이 이보다 더 정확히 그것이 가지는 가감 없는 환락의 무게로써 계량되며, 진실을 사랑하는 사람이 벌거벗은 인간을 판단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이보다 더 많이 가지는 그런 선택을 나는 알지 못한다. 거부와 책임과 기여로 이루어지는 복합체, 가련한 고백, 취약한 거짓말, 나의 쾌락과 타자의 쾌락 간의 열정적인 타협, 끊어 버리기는 불가능하면서도 너무나 빨리 풀어지는 그토록 많은 관계의 끈들, 이런 것들이, 죽음의 경우에 필적하는 헐벗은 상태에서, 패배와 기도의 경우를 능가하는 겸허에서 출발하여, 매번 다시 이루어지는 것을 보며 나는 경탄한다. 육체의 사랑에서 인격체의 사랑으로 건너가는 그 신비로운 작용은 나에게 무척 아름답게 보였으므로, 나는 거기에 나의 삶의 일부분을 바쳤던 것이다. (1권, 26~27쪽)
세계의 장래는 더 이상 나를 불안하게 하지 않는다. (중략) 모든 것을 신들에게 맡긴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인간들의 정의가 아닌 신들의 정의에 신뢰를 더 많이 가지게 되었다거나, 혹은 인간의 지혜로움에 더 많은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그 반대이다. 삶이란 잔혹한 것이다. (중략) 재난과 파멸은 계속 찾아올 것이며, 무질서가 승리하겠지만, 때때로 질서가 승리하기도 할 것이다. 두 전쟁 시기 사이에 평화가 다시 자리 잡기도 할 것이고, 자유, 인간성, 정의 등의 말들이 여기저기에서, 우리들이 그 말들에 부여하려고 했던 의미를 되찾게도 될 것이다. (중략) 이와 같은 단속적인 불멸성에 나는 감히 기대를 거는 것이다. (2권, 232~233쪽)
유르스나르는 “옳고 그르든 간에, 그 당대의 사람들은 죽음을 가까이 둔 황제가 초인적인 덕을 갖추고 있다고 믿었”다며 하드리아누스 니제에게 현인의 통찰력을 부여한 이유를 밝힌다. “자신이 이 세계의 아름다움에 책임을 지고 있는 듯이 느꼈다.”라고 말하는 황제는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도 현자의 모습을 잃지 않으며 “두 눈을 뜬 채 죽음 속으로 들어가려 노력”한다. 실제 하드리아누스 자신의 시로 마지막 회고를 마치며, 그는 위대한 황제의 모습 그대로 죽음을 맞이한다. “조그만 나의 영혼, 방황하는 어여쁜 영혼이여, 육체를 맞아들인 주인이며 반려인 그대여, 그대 이제 그곳으로 떠나는구나, 창백하고 거칠고 황폐한 그곳으로, 늘 하던 농담, 장난은 이젠 못하리니.”
– 치밀한 고증 속에서 “공감적 마술”로 이루어 낸, 황제의 초상 : 고대 로마 제국 황제 하드리아누스의 존재하지 않는 ‘진짜 회고록’
유르스나르는 스무 살에 하드리아누스에 대한 소설을 처음 구상한다. 하지만 소설을 완성한 것은 마흔여덟 살의 일이었다. 「창작 노트」에 기록되어 있는 그녀의 작업 원칙 중 하나는 다음과 같았다. “관계되는 일체의 것을 연구하고 읽고 조사할 것.” 유르스나르는 근 30년간 수많은 역사박물관과 도서관을 돌아다니며 1~3세기 로마에 대한 온갖 문헌을 독파하고 비문과 비명의 기록을 모으고, 기념 건축물과 주화에 새겨진 그림과 초상을 연구하는 등 그 당시 사학계의 중요한 연구 성과를 모두 참조했다. 소설과 함께 남긴 「창작 노트」와 「자료 개괄」을 보면 그녀가 얼마나 광범위하고도 치밀하게 자료 조사를 하고 얼마나 치열한 고민 속에서 작품을 완성했는지 알 수 있다. 「자료 개괄」을 통해서 작품 구상의 근거도 정확히 밝히고 있다.
유르스나르에게 역사소설이란 “되찾은 시간 속으로 깊이 들어가 하나의 내적 세계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2세기 로마의 시간을 복원하기 위해 그녀가 확인할 수 있는 모든 사실 (史實)을 검증하는 작업을 거쳤다. 황제의 가치관 같은 내면의 문제에서조차 객관적인 근거가 필요했던 그녀는 여러 기록을 통해 황제의 서재를 재구성하여 그의 생각을 추적하기까지 했다. 유르스나르는 19세기 고고학자처럼 작업했다. 하지만 또한 그들이 외적인 사실에 주목하는 것으로 그칠 때 그녀는 내적인 역사, 즉 황제의 내면까지 재현해야 했다. 이를 위해 그녀는 “상상 속에서 자신을 어떤 다른 사람의 내부에 옮겨 놓는 방법”이라고 스스로 정의한 “공감적 마술”을 방법론으로 삼았다. 그녀는 그렇게 탄생한 황제의 목소리가 역사 이상의 진실함 속에서 스스로의 초상을 그리게 했다. 그리고 어떤 중개도 없이 생생하게 황제의 목소리를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일인칭 서술 방식을 택했다.
유르스나르는 “한 발은 고증적인 자료 조사에, 다른 발은 공감적 마술”에 담근 채 치열한 집필을 계속했고 몇 번의 좌절 속에서도 끝내 20세기의 역작을 완성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에는 2세기 로마의 모습이 완벽하게 재현되어 있으며, 역사 속 황제는 완전한 한 인간의 목소리로 소설 속에 살아 있다.
– 10여 년의 확고한 번역 의지 속에서 탄생한 작품
가스통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 베를렌의 『예지』, 프란시스 잠의 『새벽의 삼종에서 저녁의 삼종까지』를 번역한 바 있는, 전(前) 서울대 교수 곽광수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을 우리말로 옮기는 데 10여 년의 시간을 바쳤다. 문체에 관한 자신의 지론을 고수하여 우리말에서 다소 어색하더라도 원문의 단어 하나 버리지 않는 충실한 축어역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완벽에 완벽을 기하는 그의 고집이 10년의 세월을 흐르게 했다. 지병이 악화되는 고통도 있었지만, 만족할 때까지 작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또한 2세기 로마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배경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 『로베르 고유명사 소사전』, 『라루스 대백과사전』, 피에르 그리말의 『신화사전』 등을 참고로 하여 400개가 넘는 각주도 달았다. 고대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어휘 선택도 고심하여 결정했다. 10여 년의 세월, 역자 곽광수의 이러한 치밀한 작업 덕분에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은 보다 원전에 충실하고 온전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선보이게 되었다.
로마제국 제14대 황제 하드리아누스 (Publius Aelius Trajanus Hadrianus, 76 ~ 138) 개관
하드리아누스 (Publius Aelius Trajanus Hadrianus, 76년 1월 24일 ~ 138년 7월 10일)는 로마 제국의 제14대 황제이다. 네르바 – 안토니누스 조 (朝)의 제3대 황제이다. 제국령을 두루 시찰하여 제국 각지의 실정을 파악하는 데 주력한 한편 트라야누스 황제의 팽창주의 노선을 폐기하고 현실적인 판단을 토대로 변경 안정화로 전환하였다.
– 하드리아누스 (Publius Aelius Trajanus Hadrianus)
.황제명: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Publius Aelius Trajanus Hadrianus)
.재위: 117년 8월 10일 ~ 138년 7월 10일
.전임: 트라야누스 / 후임: 안토니누스 피우스
.출생: 76년 1월 24일, 히스파니아 바이티카
.사망: 138년 7월 10일, 이탈리아 바이아이 (별장)
.묘지: 이탈리아 로마 성천사성
.가문: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부친: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아페르
트라야누스(계부)
.모친: 도미티아 파울리나
.배우자: 비비아 사비나
.자녀: 루키우스 아일리우스(입양아), 안토니누스 피우스(입양아)
.건축물: 비너스와 로마 신전
로마 제국 최전성기로 알려진 로마의 평화와 제국의 영원 (Pax romana et Aeternitas imperii)시대 중 세 번째 황제이자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세 번째 황제이다. 본명은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즉위 후 제호로 취한 정식 명칭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Imperator Caesar Traianus Hadrianus Augustus).
당대 로마인들과 후대 로마제국 사람들에게는 전쟁보다는 교양과 예술에 뛰어난 황제로 인식됐다. 하지만 오늘날 금석문, 기록 등을 통해 가능한 전쟁을 피하고 제국의 내정 개선에 힘을 기울인 실용적인 명군으로 평가되며, 트라야누스가 최대로 확장한 로마 제국을 안정적으로 관리하여 반석 위에 올려놓은 황제이다.
그는 그리스 문화에 심취해 있었고, 양성애자였으며, 까탈스럽고 뛰어난 미적 감각으로도 유명했다. 사생활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트라야누스에 비해 하드리아누스는 한 인간으로서도 흥미로운 면모들을 많이 갖고 있었고, 이 때문에 그는 늘 후세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 생애 및 활동
– 즉위 이전
본명은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76년 1월 24일생으로 로마 관보에 따르면 로마 태생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친척 트라야누스처럼 속주 히스파니아(지금의 스페인)의 도시 이탈리카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도 있다. 전임 황제이자 양부 트라야누스와 동향이고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의 아버지가 외사촌관계였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촌수 기준으로 따지면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의 촌수는 5촌이며, 6촌 관계까지를 같은 가문 사람으로 본 로마 기준으로도 같은 집안 친척이었다.
출신 가문을 살펴보면 3세기 이전 히스파니아의 로마인 식민도시 이탈리카에 정착한 본국 이탈리아계인데다, 오랜 세월 동안[4] 히스파니아에 정착한 집안이었다. 또 아버지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아페르는 로마의 원로원 의원이자 법무관이었고, 플라비우스 왕조 아래에서 귀족 신분을 얻게 된 트라야누스와 외사촌 형제였다. 그래서 본가가 속주에 더 영향력이 있다고 해도 상당한 부와 권력을 쥐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배경 때문에 하드리아누스는 또래의 부유한 귀족 자제들처럼 유년 시절 훌륭한 교육을 받았는데, 86년 불과 10살의 나이에 아버지 하드리아누스 아페르가 사망했다. 이때 하드리아누스의 아버지가 어린 아들의 후견인으로 대대장이었던 사촌 트라야누스와 로마 기사계급에 속한 아킬리우스 아티아누스를 지명했는데, 트라야누스와 아킬리우스 아티아누스는 그 부탁을 받아들였다. 하드리아누스는 10살때부터 트라야누스의 보호를 받게 됐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와 아티아누스의 보호를 받고 있음에도 부잣집 도련님답게 오락이나 사냥같은 취미생활을 더 좋아했고 그리스 문화를 사랑했다고 한다.
당숙뻘인 트라야누스는 하드리아누스가 15살이 되었을 때 군에 복무시키려고 했는데, 이런 시도는 하드리아누스의 사냥 취미 탓에 무산됐다. 따라서 하드리아누스의 매부가 될 예정이었던 세르비아누스가 참다못해 하드리아누스의 무절제한 생활을 보호자 트라야누스에게 알렸다고 한다. 이때 트라야누스는 화가 크게 난 나머지 이탈리카에서 사냥에 열중하던 하드리아누스를 로마로 불러들여 엄중하게 감시했고 그가 로마시 상속 법정 중 한곳의 판사가 되는데 힘을 썼다. 트라야누스는 하드리아누스를 이탈리카에서 로마로 불러들였고, 하드리아누스는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때문에 트라야누스 시대와 하드리아누스 시대동안 이탈리카 출신들이 제국 요직을 차지하는 것과 같은 현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로마로 돌아온 하드리아누스는 새로운 일에 열중하면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트라야누스는 오히려 그에게 정신을 차리라는 의미에서 곧바로 군복무를 시켰다.
하드리아누스가 배속된 군단은 제2군단 아디우트릭스였고 그의 직위는 군단장이었다. 그런데 하드리아누스는 군복무를 하면서 상당히 잘했다고 한다. 따라서 제2군단장을 한 이후, 도나우 강에 주둔 중인 제5군단 마케도니카 군단장을 역임했는데 도미티아누스가 죽고 네르바가 제위에 올랐다. 그런데 얼마 안 가 네르바는 트라야누스를 양아들로 삼아 후계자로 지명한 후 병사했다. 그리고 97년 당숙 트라야누스가 네르바 황제의 양자가 되었던 해에는 라인 일대 사령관 트라야누스가 새로운 제위 계승자가 된 의미에서 군대 축하 메시지 전달 사절에 뽑히는 영예까지 얻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네르바가 죽고 트라야누스가 제위에 올랐는데, 이때 로마 고대 기록들에 따르면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에게 네르바 사망 소식을 전달하는 첫 주자가 되겠다는 열망으로 자신을 질투하면서 방해한 다른 사절들을 제끼고 그들이 놓은 여러 장애물들을 다 헤친 뒤 걸어간 노력 끝에 트라야누스에게 제위 등극 소식을 가장 먼저 전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는 친밀한 사이 이상이 됐고 최측근 중 한 명이 되게 되는데,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 재위 기간동안 친족이 몇 없는 황제 밑에서 승승장구 했다.
하드리아누스는 2차 다키아 전쟁가 벌어진 105년에서 10년 기간동안 제1군단 미네르비아 군단장으로 있으면서 다키아 전쟁을 지휘했고, 전후 이때의 공로를 인정받아 106년도 법무관이 됐다. 그리고 107년에는 전직 법무관 자격으로 하 판노니아 총독을 지냈고 이듬해 집정관까지 지냈다. 이후 그는 114년 트라야누스가 파르티아와 전쟁을 위해 동진할 당시, 황제가 출정한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야 될 시리아 속주 총독에 임명됐다.
– 황제 즉위에서 로마 귀환까지
76년 로마에서 태어났다고 하나, 원적 (原籍)은 로마 제국의 식민지인 히스파니아 (현재의 에스파냐) 파에튀리카의 이탈리카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고도 한다. 아버지는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어머니는 도미티아 파울리나로서, 트라야누스 황제의 사촌 형제의 아들에 해당한다.
85년 먼 친척인 트라야누스 황제가 후견인이 됨으로써 로마로 거주지를 옮긴다. 93년 (또는 94년), 18살의 나이로 20인 위원 (委員)직을 맡아 민생 관련 업무를 수행하였고, 로마 제국 제2군단의 부관에 임명되면서 지휘관의 발판을 놓게 되었다. 나아가 96년에 제5마케도니아 군단의 지휘관, 97년 제12프리미게니아 군단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판노니아, 하부 모이시아 및 상부 게르마니아 각 속주에서 고급 장교의 임무를 수행해 공적을 세운다. 101년에 원수재무관 (元首財務官)에 취임하여 트라야누스 황제의 비서로서 활약, 황제의 연설을 원로원 (元老院)에서 대변하는 역할을 맡은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105년 호민관 (護民官)에 취임하였고, 나아가 법무관으로 선출됨과 동시에 제1미네르바 군단의 사절, 군사령관으로서 제2차 다키아 전쟁에 참전하여 공적을 세웠고, 107년부터는 속주의 장관으로서 하부 판노니아를 다스렸다. 이때 쌓은 공적으로 이듬해 108년명목상 황제 다음 가는 로마 제국의 관직인 보좌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114년부터 시작된 파르티아 전쟁에서도 군단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황제 트라야누스의 보좌역을 맡아 두터운 수완을 발휘한다. 117년 트라야누스는 하드리아누스를 속주 시리아의 총독 (코메스)로 임명하였다. 병을 얻은 트라야누스는 하드리아누스를 대신 파르티아 원정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로마로 돌아가지만, 도중에 킬리키아 지방의 세리누스에서 사망하고 만다. 죽기 전 트라야누스는 하드리아누스를 자신의 양자로 지명했는데, 이것은 황후 프로티나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8월 9일에 안티오키아에 머무르고 있던 하드리아누스에게 트라야누스의 양자가 되었음을 알리는 편지가 도착하고 이틀 뒤 트라야누스가 서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때 하드리아누스는 휘하 군대로부터 「임페라토르 (황제)」라 불렸고, 이 날이 하드리아누스의 공식적인 「즉위날」이 되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세리누스로 가서 조문을 표한 뒤, 다시 시리아로 돌아갔다. 그 뒤 동부 변경의 안정을 위해 속주 메소포타미아와 아르메니아를 포기한다는 처리와 함께, 야만족의 침입으로 불온한 정세에 놓인 도나우 강 유역에서 물러나 속주 다키아와 모이시아를 재편성하고 이듬해 7월에야 로마로 돌아왔다.
하드리아누스의 제위 계승에 대해 일부 원로원 의원들은 이견을 드러냈는데, 이때 하드리아누스의 후견인이던 심복 근위장관 아티아누스가 예방적 차원의 처치로서 「원로원의 명령에 따라」, 집정관을 맡았던 유력한 원로원 의원 4명을 살해했다 (하드리아누스의 명령이었다고 보는 연구자도 있다).
○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업적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치세에 이루어진 특기할 만한 사실들은
.속주 메소포타니아와 아르메니아의 포기와 동부 변경 안정화, 방벽(防壁) 건조 등을 통한 제국 주변 지역 방어책의 정비
.로마 제국 전체의 통합과 평준화
.두 차례에 걸치는 장기간의 순찰 여행
.관료 제도의 확립과 행정제도의 정비
.법 제도 개혁이 있다.
그가 황제로 취임할 때, 선제 트라야누스의 적극적인 정책에 의해 제국의 판도는 최대에 이르렀었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일찍이 다키아를 속주로 삼았고, 파르티아 전쟁에서 메소포타미아, 아시리아, 아르메니아를 속주로 삼았으며, 치세 말기에는 로마 제국 역사상 가장 넓은 판도를 실현시켰다. 그러나 동방에 인접해 있던 파르티아와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 비추어 하드리아누스는 외교 기조를 공세에서 수세로 전환하고, 유프라테스 강 동쪽의 메소포타미아와 아시리아, 아르메니아 속주를 포기하는 대신 동방의 변경을 안정시키는데 힘썼다.
하드리아누스는 제국의 통일을 위해서는 평화가 필수불가결한 것임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고, 제국의 동부 이외에도 제국의 방어력을 정비하는데 힘썼다. 군사적인 요충지에는 방벽(리메스) 구축으로 천연의 요새를 지어 제국을 방비했다. 그 중에서도 칼레도니아인과의 분쟁이 있었던 브리타니아 북부에도 방벽을 구축하였다. 보통 「하드리아누스 방벽(하드리아누스의 벽)」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게르만인과의 경계였던 라인 강이나 도나우 강 지역, 북아프리카에도 방벽이 지어졌다. 그리고 황제 스스로가 순찰 여행 도중에도 현장에서 병사 훈련을 사찰했고, 직접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또한 군단에 현지 병사를 채용함으로써 군단의 규모를 안정시키고 군비를 절약하였다.
파르티아 문제를 수습한 뒤, 하드리아누스는 제국 내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데 주력하였다. 우선 속주를 대하는 자세를 바꾸어 속주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이탈리아와의 일체화에 노력을 기울여, 하드리아누스 자신도 두 차례에 걸친 장기간의 순찰 여행에 나섰다. 여행 목적은 제국 방비의 재정비와 제국 행정의 조사, 통합의 상징으로서 황제 자신을 주지시키며 제국 각지(특히 길리시아화된 지역)의 순찰에 있었으며, 건설 관계자를 동반하는 등 공공 부분의 공사도 함께 행해졌다. 20년간 3차례에 걸친 제국 전역을 시찰하여 제국 영토의 방위나 각지에서 일어나는 반란에 대한 대처, 통치 기구 정비 등 제국 내부를 튼실하게 만드는 데 충실하게 노력하여 제국을 재구축한 황제로 불린다. 특히 통치 기구 정비가 매우 철저하여 그가 구축한 관료 기구는 제국의 기초를 마련하고 후세의 모범이 되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정치적으로도 뛰어난 업적을 이룩했지만, 군사면에서도 우수하였다. 군대의 규율 개정에 의한 군 내부를 개혁시켰으며, 용병술에 뛰어난 하드리아누스 덕분에 로마군은 연전 연승이었다. 또 전투 상황일 때는 앞장서서 지휘를 하였기 때문에, 군대의 사기를 크게 높였다.
하드리아누스는 법 제도의 정비를 추진하여 사르비우스 율리아누스에게 명하여 『영구고시록(永久告示錄)』이라 불리는 법전을 편찬하게 한다(완성은131년경으로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인 6세기까지 사용되었다). 이것은 법무관이 내리던 기존의 고시(속주 총독이나 심판인의 법의 근원)들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훗날 동로마 제국 유스티니아누스의 시대에 이들을 토대로 『유스티니아누스 법전』(『로마법 대전』)이 편찬되었다.
130년에는 제1차 유대-로마 전쟁 때에 파괴되어 방치되어 있던 예루살렘을 로마풍의 도시로 건설하여, 자신의 씨족명 「아일리아」를 붙인 식민도시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라 명명하였고, 132년에는 유대인들의 할례를 금지했다. 이에 유대인들은 조직적인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다(바르 코크바의 반란). 하드리아누스는 다른 속주로부터 군단을 동원하여 3년 만인 135년에 반란을 진압하였다. 이러한 반란의 결과로 유대 지방은 「속주 시리아 ・ 팔레스티나」라 명칭이 바뀌었고 유대라는 이름은 사라졌으며, 유대인들은 제국 각지로 대규모 이산되고(디아스포라) 이후 예루살렘 시내에 거주하는 것이 제한되었다 (예루살렘에서의 야훼 숭배도 금지되었다).
○ 황제와 원로원의 관계
치세 동안 하드리아누스는 국내, 외적으로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지만, 로마 원로원에는 하드리아누스의 정책을 좋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존재했다.
일단 하드리아누스 치세 초기에 집정관 경력이 있었던 원로원 의원 네 명이 살해된 것이 이를 보여준다 하드리아누스는 방위에 필요한 병력과 유지비 등의 부담이 늘어나 결국 제국이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고, 그러한 판단 아래 메소포타미아와 아시리아, 아르메니아에서 철수한다는 현실 노선으로 전환했다. 그러나 당시 원로원에는 실제로 전장을 누비며 영토 확장에 공헌한 자들도 있어, 하드리아누스의 온건한 대외 정책을 비판했던 것이다. 원로원 일부의 거센 반발에 하드리아누스의 지지자들은 반대파 거물 네 명을 숙청하는 강경책으로 대처했다.
치세 말기 후계자를 선출할 때에도 의견이 맞지 않아, 황제의 의형제 율리우스 우르수스 세르비아누스와 그 손자 페다니우스 푸스쿠스를 자살로 몰아갔다. 황제의 치세 말기 하드리아누스와 원로원의 관계는 긴장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몇몇 그룹과의 관계가 긴장 상태였을 뿐이라고 보기도 한다).
말년에 그는 병상에 누워서 안토니누스를 양아들로 삼아 자신의 후계자로 결정했다. 황제가 서거한 뒤에는 하드리아누스를 신격화하여 국가신(國家神)의 반열에 올리는 것조차 반대하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이 경우 신격화되지 못한 채 도미티아누스처럼 「기록 말살형」에 처해져 하드리아누스의 통치에 관련된 모든 기록이 말소될 수 있었다. 황제의 후계자가 된 안토니누스는 눈물을 흘려가며 필사적으로 원로원 설득에 힘썼고,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신격화에 대한 원로원의 동의를 얻어냈다. 이후 안토니누스는 「경건한 안토니누스(안토니누스 피우스)」라 불리게 되었다.
로마 황제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이 많이 세워졌던 로마에서 5현제의 한 사람으로 알려진 하드리아누스의 순행을 기리는 비석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 말년
문화적으로는 118년, 로마 근교의 티볼리에 대규모의 별장 빌라 하드리아누스의 건설을 시작하였고 동시에 후세의 신고전주의 (新古典主義) 건축에 큰 영향을 준, 로마에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판테온 신전의 재건에 착수했다. 그 외에도 로마의 베누스와 로마 신전 등 각지에 많은 건축 사업을 벌였다.
사생활의 면에서 비티니아의 미청년 애인 안티누스를 총애하여 속주 아이깁투스 (이집트) 시찰 중에 그 미청년이 나일 강에서 사고사한 뒤에는 그를 신격화하여 신전을 세우고 도시 안티누폴리스를 지었으며, 제국 내에 안티누스의 상을 세우고 천공에 안티누스가 거할 자리를 짓게 했다고도 전한다.
몸이 튼튼했지만 만년에는 컨디션 불량에 시달렸고,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성공 직전에 늘 노예에게 들켜 제지되곤 했다). 또한 자신의 후계자로 처음 지정했던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 (Lucius Aelius)가 138년 1월에 사망하기도 했는데, 다음 달에 다시 안티누스 (Antinous 또는 antinoös)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다. 그리고 138년 7월에 바이아이 (Baiae)의 별장에서 62세로 서거하였다.
○ 기타
– 유대인 문제
하드리아누스는 즉위 직후 전임자인 트라야누스 시절 일어난 유대인 반란을 해결해야 했다. 하필이면 트라야누스가 파르티아에 원정을 나가있을 때 뒷통수를 친 것인지라 제국의 입장에서는 유대인의 반란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으며, 무척 강경하게 반란을 진압했다.
예루살렘 지역의 유대인들은 132년 또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하드리아누스는 134년 이를 진압한 이후 이런 일이 발생할 가능성을 차단할 겸 예루살렘 지역의 유대인들을 모조리 강제이주시켰다. 그렇다고 유대 전체에서 유대인을 몰아낸 것은 아니고 예루살렘에서 추방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유대인에 적대적인 분위기가 되어가면서 많은 유대인이 외지로 이주한 것은 사실이다.
하드리아누스는 예루살렘의 이름도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라고 바꿔버렸는데 아일리우스는 하드리아누스의 성이고 카피톨리누스 언덕은 유피테르를 기리는 신전이 있는 로마의 언덕이었다. 이는 로마 입장에서 유대인에 대한 인내심이 끝났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유대인들 특유의 디아스포라 성향은 그 전에도 강했으며, 생각과는 달리 대단히 많은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해서 로마인으로 동화된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진 한편, 역으로 유대교로 개종해서 유대인 집단에 합류하는 기존 로마인들도 많았다. 하드리아누스의 조치를 이후 로마 제국이 계속 엄수하진 않았고, 이후에도 예루살렘엔 세월이 지나면서 다시 유대인들이 어느 정도 모여들긴 한다. 그러므로 현대의 유대 문제를 하드리아누스에게 묻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 성격 및 기행
그의 언행을 기록한 황제 실록에 따르면 ‘성격은 복잡하고 변덕스럽다’했다고 한다. 사실 젊었을 때 트라야누스의 측근들과 대립했던 것도 그의 까칠한 성격이 한 원인이었다. 이런 성격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엄청난 실력이 기반이 되어있었다. 문학, 수학, 기하학, 회화, 악기 등에서 초일류였고 무예에 굉장히 능했다. 로마 황제들 중에서 종합적으로 봤을 때 이 정도로 다재다능한 인물은 매우 드물다.
건축가로도 뛰어났다. 지금까지도 로마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남은 판테온은 그가 착안해 설계한 것이며 티볼리에 지은 광대한 별장에도 그의 취미나 미적 감각이 곳곳에 남아 있다. 하드리아누스는 엄청난 그리스광이었는데, 황제 권력을 이용해서 아테네에 도시 하나를 지어서 바쳐버렸다. 이후 자기가 지은 신도시와 원래 도시를 구별하는 지점에 여기까지는 테세우스의 도시, 여기서부터는 자기의 도시라는 개선문을 만들었다. 이 신도시 지역은 오늘날에도 아테네의 대표적인 부촌으로 꼽히는 플라카 지역으로, 이곳에 그가 만든 개선문과 아고라의 유적이 남아있다. ‘아드리아노플’로도 불리는 ‘하드리아노폴리스’ (에디르네)도 그가 지어 그의 이름을 딴 도시이다.
로마 엘리트 중에서 가장 그리스 문화에 심취 했었으며, 덕분에 그리스 철학에도 꽤 뛰어난 학문적 식견이 있었다. 그리스 문화의 상징인 수염을 기른 최초의 황제이기도 하다. 네로처럼 예술가적 기질이 다분한 황제였지만, 네로는 취미에 매몰되어 국정을 소홀히 한 반면 하드리아누스는 그렇지 않았다. 굳이 흠을 잡자면 티볼리에 엄청난 돈을 들여 별장을 지은 정도다. 이후 로마 황제들은 수염을 기르는 황제들이 많아지게 된다.
그리스 문화를 좋아했고 양성애자였다고 한다. 그는 123년 클라우디오폴리스 (현 터키의 볼루)를 여행하던 중 안티노우스 (안티누스)라는 청년과 만난 후 연인 관계가 된다. 제국은 순회할 때에도 안티노우스를 늘 동행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다 130년 이집트에서 그가 죽었을 때 이집트에 안토니오폴리스라는 도시를 세워줬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안티노우스는 나일강에 빠져 악어에 물려 죽었는데, 마침 이집트에선 악어에 물려 죽은 사람은 신이 된다라는 믿음이 있는 걸 안 하드리아누스는 즉시 안티노우스를 신으로 삼아 신전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 후 안티노우스 신앙은 그리스 문화권에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거기에 더해 안티노우스를 조각한 석상은 제국 전역에 세웠다. 정확히 말해 황제가 명령했을 수도 있지만 안티노우스 신앙에 빠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조각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지금도 세계의 고전 석상 박물관에 가보면 하드리아누스 석상과 안티노우스 석상은 늘 함께 둔다.
– 하드리아누스 방벽
이름 그대로 하드리아누스 통치 시절 (117~138)인 122년부터 건설하기 시작해서 6년 즈음 지나서 완성했다고 한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대략적인 경계에 존재하고 있으며 길이는 약 117km이다.
흔히 이 방벽이 현재까지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경계라고 오해받기도 하지만 현 경계를 기준으로 방벽은 전 구간 잉글랜드에 속해있다. 그나마 서쪽 경계는 방벽과 비교적 가까운 편이다. 동쪽 경계는 뉴캐슬 인근으로, 로마 시대부터 성채 도시로 기능했고 이후에 성을 더 지어서 ‘뉴캐슬’ (Newcastle)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다만 원래 브리튼인의 땅이던 그레이트브리튼섬의 문화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로 두 동강 난 건 로마 속주 브리타니아가 하드리아누스 방벽 이남에만 설치된 것이 가장 주요한 이유다.
원래는 5~6m였다고 하지만 주민들이 집을 짓는 등 여러 용도로 돌을 가져간 결과 현재에는 1~2m정도만이 남았다고 한다.
라틴어로는 ‘하드리아누스 방벽’을 뜻하는 Vallum Hadriani 말고 Vallum Aelium이라는 단어도 쓰는데, 이는 하드리아누스의 이름 (Publius Aelius Hadrianus Augustus)의 일부인 ‘아일리우스’를 딴 것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