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하룻밤에 읽는 징비록
서애 류성룡 / 아인북스 / 2015.4.10
징비록(懲毖錄)은 조선 선조 때 류성룡이 쓴 임진왜란에 대한 1592년(선조 25)에서 1598년(선조 31)까지 7년 동안의 일을 수기(手記)한 책으로, 저자가 벼슬에서 물러나 한거(閑居)할 때 저술하였고 1604년(선조 37년) 저술을 마쳤다.
– 목차
징비록은 / 8
지은이 서문 / 10
징비록1
- 일본국사 귤강광이 다녀감 / 13
- 일본국사 의지 등이 옴 / 17
- 통신사 황윤길 등이 일본에 다녀옴 / 21
- 명을 치겠다는 일본국서가 말썽 / 26
- 다급한 전쟁준비 / 28
- 이순신의 발탁 / 30
- 신립장군의 됨됨이 / 35
- 임진왜란 발발 / 38
- 영남 여러 성의 함락 / 41
- 급보가 연잇고, 신립 등이 달려감 / 45
- 김성일의 논죄 / 50
- 김늑의 민심수습 / 53
- 상주 싸움에서 이일이 패주함 / 54
- 서울의 수비와 임금의 피란 / 58
- 신립이 충주에서 대패함 / 63
- 임금이 피란길에 오름 / 67
- 왜적이 서울에 들어옴 / 74
– 저자소개 : 류성룡조선 시대의 문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군사 업무를 관장하는 전시 재상이었다.
임진왜란이 이후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나 전쟁을 회고하며 반성하는 의미로 『징비록』을 저술하였다.
유성룡은 1542년 10월 1일 경상도 의성현 사촌리에서 황해도 관찰사 유중영과 어머니 안동 김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호는 서애(西厓),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4세부터 글을 읽고 14세에는 향시에 합격하는 등 명석한 두뇌를 지녔던 그는 일찍이 많은 시험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을 지냈다.
21세에 퇴계 이황에게 가르침을 받고 23세에 생원 회시 1등, 진사시 3등으로 급제하여 이듬해에 성균관에 입학했다.
25세에는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면서 병조좌랑, 이조좌랑, 홍문관 부제학, 대사헌,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의 관직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직후에는 영의정에 임명되었다가 파직되지만 다시 도체찰사의 자리에 올라 조선의 내정과 군사 상황을 총괄하였다.
이순신 장군과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온 유성룡은 왜란에 대비하여 이순신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등용하여 왜란으로 인한 국가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자 힘썼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끝난 1598년, 북인의 탄핵으로 영의정에서 파직당하고 이듬해에 고향인 하회마을로 낙향하였다.
이후 조정에서 다시 벼슬을 내렸으나 저술에만 힘썼으며, 이후 병산서원에 위패가 모셔졌다.
그가 저술한 임진왜란 회고록인 『징비록』은 당시의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실제적인 묘사와 기록이 담겨있다. 더불어 지난 실책을 반성하고 후일을 대비하는 내용까지 담고 있어 가치가 높은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 징비록 저술의 동기
‘징비’란 시경(詩經)의 소비편(小毖篇)의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豫其懲而毖後患)”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징비록은 임진왜란 전란사로서,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7년에 걸친 전란의 원인, 전황 등을 기록한 책이다.
‘징비록’의 첫 장에서 류성룡은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고 비옥한 강토를 피폐하게 만든 참혹했던 전화를 회고하면서, 다시는 같은 전란을 겪지 않도록 지난날 있었던 조정의 여러 실책들을 반성, 앞날을 대비하며 왜란을 겪은 후 후세에 길이 남길 쓰라린 반성의 기록으로 『징비록』을 저술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처럼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저술되었다는 점에서, 『징비록』은 우리나라에서 씌어진 여러 기록문학 중에서도 특히 두드러진다고 하겠다
이 책의 내용에는 임진왜란의 원인과 경과 그리고 자신의 잘못과 조정의 실책,백성들의 조정에 대한 비판 등을 담고 있다.
‘징비록’은 이후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의 공과를 평가하는데 사용되었다.
특히 류성룡은 스승인 퇴계 이황의 학설에 따라 이기론(理氣論)을 펼치고 양명학을 비판했으며 이황의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을 좇아 기(氣)는 이(理)가 아니면 생(生)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여 기보다 앞서 있는 실체로서의 이를 규정했다.
류성룡은 양명학의 핵심적 이론인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과 치양지설(致良知說)이 ‘굽은 것을 바로 잡으려다 지나치게 곧아진(矯枉而過直)’ 폐단에 빠진 것으로 불교의 학설과 다름없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하나에 치중됨이 없이 병진해야 한다는 지행병진설(知行竝進說)을 주장했다.
그가 남긴 저작 중 ‘징비록'(懲毖錄)은 이러한 ‘알면 행하여야 한다’는 지행병진설이 잘 반영된 책으로 알려 있다. 참혹한 국난의 하나였던 임진왜란에서의 아픈 경험을 거울삼아 다시 그러한 수난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후세를 경계하기 위하여 남긴 저술이다. 임진왜란의 전모를 정확하고 생생하게 비춰주고 있어 임진왜란에 관한 많은 기록 가운데서도 귀중한 사료(史料)로 평가되고 있다.
– 징비록 일화
‘징비록’에는 임진왜란 직전, 그리고 발발 및 전개 과정에서 있었던 일화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1586년, 쓰시마 도주(島主) 귤강광(橘康廣, 유즈야 야스히로柚谷康広)이 히데요시의 서신을 갖고 조선을 방문했을 때, 그의 행렬 좌우에 늘어선 조선군 병사들이 들고 선 창을 보고 「당신네들의 창은 참 짧군요 그래」하고 비웃었다.
1591년에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通信使)의 정사(正使) 황윤길(黄允吉)과 부사(副使) 김성일(金誠一)은 일본을 시찰하고 나서 선조에게 일본의 사정을 보고했는데, 황윤길이 「반드시 병란의 화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한 것과 달리 김성일은 「신은 왜국에서 그런 징후는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1592년 4월 15일, 조선을 침공한 왜군이 동래(東莱)로 쳐들어갔을 때, 부사 송상현(宋象賢)이 분전하다 죽었다. 송상현은 왜병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도 마다한 채 죽는 것을 택했고, 왜인들은 그러한 송상현의 절의에 감탄하며 그의 시신을 관에 넣어 정중히 매장하고 그의 무덤에 묘표까지 세워 주었다고 한다.
명의 심유경(沈惟敬)과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서로 친한 사이로, 사사건건 서로 감싸주었고, 임시변통의 조치로 전쟁을 멈추려 했다.
1598년 10월, 노량 앞바다에서 퇴각하는 왜군을 추격해 벌어진 해전에서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이 날아오는 탄환에 맞고 숨을 거두었다. 그는 죽기 직전, 「싸움이 아직 다급한 판인데 내가 죽었다고 알리지 마라」는 말을 남겼다.
왜군은 조선에서 수많은 살략을 자행하였고, 이는 《징비록》 속에 고스란히 묘사되었다. 1597년에 벌어진 정유재란(게이초의 역)에서 전공을 증명하기 위해 잡은 포로나 시신의 목에서 코를 베어내는 장면도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징비록의 주제가 왜군의 실태보다도 조선군의 허약하기 짝이 없는 국방의식에 대한 비판에 무게가 실려있는 만큼, 주된 내용은 왜군에 대응하는 조선측의 허술함 또한 비판하고 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