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한국통사
원제 : 韓國痛史 (1915년)
박은식 / 범우사 / 1999.7.15
한국통사 (韓國痛史)는 박은식이 저술한 한문으로 된 한국의 민족주의 역사서이다. 1915년 6월에 상하이의 대동편역국에서 태백광노 (太白狂奴)라는 가명으로 발행되었다. ‘통사 (痛史)’라는 제목은 ‘아픈 역사’라는 뜻으로, 1864년 고종 즉위부터 1911년의 105인 사건까지의 47년간 한국이 일본에 주권을 뺏기게 된 경과를 주로 담고 있으며 한반도의 지리나 각 지방의 특산물, 명승·고적지, 고조선 건국부터 고종때까지의 역사도 서술하고 있다. 그 외에도 여러 사진들과 그림들이 포함되어 있어 한국의 근대사 연구에 중요한 사료이다.
이 책은 백암 박은식 선생이 수년의 집필 끝에 1915년 중국 상해의 중국인 출판사에서 순한문으로 편찬한 것으로, 망국으로 이어지는 우리의 아픈 근대사를 서술하고 있다. 대원군이 집정한 1864년부터 국망 직후인 1911년까지의 근대사, 일제침략사, 민족운동사를 총 3편 114장으로 구성했다.
○ 목차
이 책을 읽는 분에게
범례
삽화
한국통사 서(序) / 캉 유웨이(康有爲)
서언(緖言) / 태백광노(太白狂奴)
제1편
제1장 지리의 대강
제2장 역사의 대강
제2편
제1장 대원군의 섭정
제2장 경복궁의 증건
제3장 서원 철폐
제4장 재정의 개혁
제5장 국방을 염려하고 풍속을 교정함
제6장 천주교를 엄금하고 신도를 학살함
제7장 프랑스군을 크게 이김
제8장 미국 선박을 방어함
제9장 일본과의 교섭
제10장 대원군 하야
(중략)
제42장 오도리가 가고 이노우에가 오다
제43장 박영효의 재차 망명
제44장 을미 차관조약
제45장 일본인이 우리 국모를 시해함
제46장 폐후와 복위
제47장 지방 의병
제48장 아관파천
제49장 러시아 세력이 점차 신장되고 열강이 이권을 나눠 가짐
제50장 한국에서의 일ㆍ러 협약과 러시아에서의 협약
제51장 각 철도를 외국인에게 인가함
제3편
제1장 대한 독립과 독립당
제2장 재정고문의 문제
제3장 일본과 러시아의 3차 협약
제4장 일본이 광산을 빼앗음
제5장 일본인이 어업권과 포경권을 점거함
제6장 일본인이 우리 송도 인삼을 도둑질함
제7장 울릉도, 장고도 사건
제8장 제일은행권의 강제 발행
제9장 영ㆍ일 동맹과 러ㆍ프협약
제10장 한만 문제에 관한 러ㆍ일의 교섭
(중략)
제52장 한국인의 교육이 말살됨
제53장 한국인의 산업이 전무하게 됨
제54장 장인환, 전명운이 미국인 스티븐스를 사살함
제55장 이토가 육군, 사법 양부를 폐지함
제56장 안중근이 이토를 사살함
제57장 이재명이 이완용을 찌름
제58장 한ㆍ일 합병
제59장 한국인의 불복과 의심스런 투옥사건
제60장 우리나라의 종교와 일본의 속박
제61장 120인의 대규모 투옥 사건
결론
한국통사 후서(後序)
한국통사 발(跋)
부록 / 한국근대사 연표
○ 구성
전 3편으로 구성된 본서는 제1편은 우리나라의 지리적 환경과 역사의 대개, 제2편은 대원군의 개혁정치에서부터 아관파천 이후 친일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제3편은 대한제국의 성립과 그 후의 일제의 침략과정을 취급하였다. 본서를 서술한 방법은 그가 범례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근세신사(新史)의 체제를 따라 역사적 사실을 중심으로 장(章)을 이루고, 이 사실을 기술함에 있어서는 그 내용을 서술하기도 하고, 이에 대한 견해, 즉 비평이나 논평을 가하기도 하였으며, 또 이 사실이 유래하게 된 선행사건을 거론하기도 하고, 그 결과로서 일어나게 되는 사실을 부론(附論)하기도 하였다.
.범례: 참고한 서적을 약 10여 종이며 대부분 한글 및 일문판이라고 밝히고 있다
.삽화: 백두산 천지와 옛 유적지, 대한제국의 궁궐과 인물, 그리고 한일 교섭중인 인물들의 사진을 실었다. 마지막으로 ‘나라를 위하여 돌아가신 어른’으로 민영익과 안중근의 초상을 실었다.
.서: 캉유웨이가 중국사람들을 독자로 쓴 글로 폴란드, 이스라엘, 인도, 미얀마, 베트남, 자바, 말레이시아의 선상에서 한국의 망국사를 소개하고 있다.
.서언: 박은식은 서언에서 나라를 잃은 서러움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이역땅에서 오랫동안 숨어 있다보니 사람 대하기가 더욱 부끄러워진다. 거리의 아이나 시장 잡배들도 나를 나라 잃은 노예라고 꾸짖는 듯하다. 천지가 비록 크기는 하나 이러한 빚을 지고 어찌 편안히 돌아갈 곳이 있겠는가!” — 한국통사 39쪽, 범우사, 박은식
.제1편: 한국의 지리와 지방을 1장에서 간략하게 서술하였고, 2장에서는 단군이후의 역사를 간략하게 소개하였다.
.제2편1863년 철종의 승하와 고종의 즉위에서부터 대한제국의 성립까지의 사건들을 기록하였다.
.제3편1897년 대한제국의 성립에서부터 1910년 한일합방과 이듬해 신간회사건까지 사건들을 기록하였다.
.결론: 발해의 망국과 그 기록의 없음에 대한제국의 망국과 그의 책을 빗대어 설명하였다.
.후서-발: 후서와 발은 출판의 일을 맡은 한진(韓震)이 박은식 선생의 뜻을 헤아려 책을 펴는 뜻에 대하여 썼다.
○ 책 속으로 : 한국 통사의 결론 부분 [전문]
옛날에 대씨가 지배했던 발해는 그 영토가 5천리나 되고 약 300년간의 영화를 누렸다. 그들은 무공이 뛰어났던 데다 문물이 번창하였기에 세상에서는 그들을 해동성국이라고 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멸망한 다음에는 발해의 역사라는 것이 명확히 후세에 전해지지 않고 있으니 그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일찍이 용천이라는 곳에 와서 그들의 고적들을 답사하며 보았더니 잡초만이 우거져 있어 씁쓸하기 짝이 없으니 힘차게 흘러가는 강물소리처럼 무예가 드높고 문장이 세상천지에 알려졌던 그 찬란한 위업들이 이제는 모두가 바람에 날려 버린 듯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발해가 문장으로써 세상에 널리 알려졌을 때는 발해의 문인학사들이 당나라에 가서 과거에 급제한 자들이 많은데 어찌 문헌상에 간략하게나마 남아있지 않으며, 또한 그들의 왕자와 왕족 그리고 그들 유민들이 요나라의 노예가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무기를 들고 고려로 들어온 자들이 만여 명이나 됐는데도 그들의 기록을 가져오지 않았는가? 그것은 그들 민족이 마한 동족이고 그들의 영토가 고구려의 옛 영토이기 때문에 고려인이 볼 때는 한 집안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방문하여 이를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옛사람들이 발해사를 편수하지 않았던 것은 이를 고려로 알고 정리하지 않았던 것이니 이를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무릇 인류가 이 지구의 땅 위에 집을 짓고 살면서 야만스럽고 무지함을 벗어나기 위해 국가제도를 정하고 도덕윤리와 정치, 교육, 법제 등을 갖추게 되었는데 이 모든 것이 역사인 것이다. 역사가 있다는 것은 국혼이 존재하는 것과 같다. 아시아 최대의 또는 가장 오래된 나라들을 예로 하여 이를 말하자면, 중국의 혼은 문학에 있고, 돌궐의 혼은 종교에 근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이 시대에 따라 흉노, 강족, 금원, 몽고족 등에 의해 침략을 받아 지배당하기도 하였으나 5천년에 이르는 문학의 연원이 단절되지 않았던 까닭은 타민족에 동화되지 않았던 것이고, 오히려 타민족이 중국에 동화되게 되었고, 돌궐은 국세가 미약하여 강토도 점점 축소되어 감으로써 오래도록 열강들의 제재를 받아야 했지만 1억이나 되는 교도들의 세력이 언제나 강성했기 때문에 그들은 곧 국권을 회복하고 했으니 이는 바로 국혼이 강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선비, 거란, 몽고는 모름지기 한때는 극성하여 많은 지역을 정복함으로서 천하에 그들의 무공을 빛내기도 했으나 일순간에 그들의 국명이 다하고 말았으니 이들 나라는 백이 강한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국교, 국학, 국어, 국문, 국사는 혼에 속하고, 전곡, 졸승, 성지, 함선, 기계는 백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혼이 있는 자는 백에 따라서 죽고 살지 않으므로 나라에서 국사를 가르체게 되면 그 나라는 망하지 않게 된다. 오호라 지금의 한국은 이미 백은 죽었다고 할 수 있으나 소위 혼이라는 것이 남아 있는가, 아니면 이미 없어져 버렸는가?
나는 단군이 개국한지 4100년(1863년) 만에 황해도 해변가에서 태어났으므로 점점 더 국권이 실추되어 가고 있는 지금에 있어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써 국민적 책임을지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늙어 백발이 된 지금 국가가 존망에 처하게 되어 이제는 조상에 제사조차 지낼 수가 없게 되었으니 큰 죄를 지은 내가 어찌 편안히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
하루는 애양이라는 곳에서 우리 동포를 찾아 묵게 되었는데, 다음날 그 집 주인이 나에게 말하기를 꿈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지금 여기에 있는 자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써야할 책임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눈물을 흘리며 우리 선조님들이 묵묵히 소자에게 명을 내리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선이 문치를 시작한 이래 500년 동안 많은 문사들을 배양했고 그로 인해 베풀어진 은덕 또한 깊고 넓기만 하니 글을 아는 문재들도 각 시대마다 그득하다 아니할 수 없다. 나는 그들만큼의 큰 그릇이 아니니 어찌 내가 그런 계통을 이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런 계통을 이을 사람이 나타나기를 오래도록 기다렸으나 이미 수년동안 그러한 글을 썼다는 사람이 있다는 소리를 나는 듣지 못했다. 세월이 이미 이처럼 흘러 나도 나이가 적지 않게 되었고, 나의 맡은 바 직분도 또한 그만두게 되었으니, 4천년 문명부국이 발해국의 흥망사와는 다르므로 비록 천하 사람들이 내가 비록 부족하다고 질책하더라도 나는 이제 쓰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4천년 전체의 역사는 쓰는 일은 보다 유능한 자가 나타나서 해야 할 일이고, 이는 세월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보며 또한 반드시 그런 인물이 나타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이후 목격했던 근대사는 쓸 수가 있을 것 같으므로 갑자는(1864)에서부터 신해년(1911)까지의 역사를 총 3편 100여장으로 나누어 서술하여 이를 통사라고 하였지만 감히 정사라고는 할 수 없다. 이제 이 글을 통해 우리 동포들이 다행히 국혼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바라며, 절대로 이를 저 버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 (결론부 전문 끝)
– 판본
본래 박은식은 순한문체로 한국통사를 썼으나, 1949년 박노경에 의하여 국한문체로 번역되었고 이후 이장희도 1996년에 박영사를 통해 제3판을 발간하였다. 1975년에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에서 간행한 ‘박은식 전서’에 상해간본 영인본이 포함되어 있다. 하와이의 재미한국인들이 1917년 국민보사를 통해 고한글체로 번역을 해 내었다. 김승일은 두 번역본을 근간으로 현대문으로 번역하여 1999년 범우사를 통해 발표하였다. 현재 ‘박은식전서'(3권) 중 상권에 영인된 ‘한국통사’는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에서 소장하고 있다.
– 흥선 대원군에 대한 평가
박은식은 이 책에서, “흥선 대원군이 여러 개혁을 추진한 것은 잘한 일이나 서세동점의 시기에 나라문을 열지 않은 것은 한국이 중흥할 기회를 잃도록 한 것이며 여기에서부터 ‘통사'(痛史)가 시작된다”고 보았다.
○ 내용 및 평가
– 내용
한국통사는 한 나라의 국교(國敎)와 국사(國史)가 없어지지 않으면 나라도 결코 망한 것이 아니라는 신념 아래,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해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서술된 것이다.
체재는 범례 · 목록 · 서 · 서언 · 삽화 · 제1편 2장 · 제2편 51장 · 제3편 61장 · 결론 · 후서 · 발 등으로 되어 있다. 삽화는 모두 12항목으로 되어 있다.
제1항은 광개토왕비문에서 집자한 제사(題辭), 제2항은 백두산 천지, 제3항은 고적으로 신라태종묘비 등 12점, 제4항은 이순신(李舜臣)의 철갑구선(鐵甲龜船), 제5항은 금강산, 제6항은 궁전의 명소, 제7항은 서울의 명소, 제8항은 한국황실, 제9항은 순종, 제10항은 황실의장과 경내명소, 제11항은 을사조약·한일신협약 때의 한국대신 및 일본대표, 제12장은 을사조약 이후 순국한 인물 등의 사진을 수록하였다.
본문은 3편 114장으로 1864년 고종 즉위로부터 1911년 이른바 105인사건 발생까지 47년간의 역사를 시대순으로 서술하고, 중요 부분은 각 장 뒷부분에 저자의 의견을 첨가하였다.
제1편은 서설편으로 지리와 역사의 대강을 적었다. 제1장은 한반도의 위치와 산천, 각 지방의 중요도시와 명승지 및 특산물 등으로 구성되었다. 제2장은 단군신화에서 시작해 고종 즉위 전까지의 역사를 긍정적인 사실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제2편은 모두 51장으로 대원군의 섭정에서 아관파천 이후 대한제국 성립 직전까지의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다루고 있다. 제1∼10장에서는 대원군이 집정해 하야하기까지의 대원군의 개혁정치를 서술하였다.
즉, 대원군이 집정하게 된 경위와 경복궁 중건―서원 철폐―세제 개혁―국방대책과 풍속 교정―천주교 탄압―병인양요―신미양요―일본과의 통상교섭 거부―대원군의 하야 경위 등이 그 내용이다.
저자는 이 부분에서 대원군의 세도정치 척결과 왕권강화를 위한 내정개혁은 높이 평가했지만, 서세동점의 국제정세에 어두워 쇄국정책으로 한국이 중흥할 기회를 잃었다고 하면서 통사(痛史)는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였다.
제11∼13장에서는 민씨정권에 의한 문호개방과 그에 따르는 사실들을 서술하고, 문호개방은 우리나라가 스스로 부강해질 수 있는 실력을 가진 뒤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제14∼17장에서는 임오군란과 그 결과로 일어난 청나라의 군사적 개입 및 일본측과의 제물포조약 체결, 청일 양국의 군대주둔 문제에 관해, 제18장에서는 구미열강과의 통상조약 체결에 관해 서술하였다.
제19∼25장에서는 갑신정변에서부터 동학혁명이 일어난 때까지의 중요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갑신정변에서 일본이 소극적이었던 것은, 개화당이 성공해 계속 집권하면 한국이 지나치게 발전하지 않을까 우려해서였다고 하였다.
제26∼44장은 동학혁명에서부터 청일전쟁·갑오개혁을 거쳐 명성황후시해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사실을 서술하였다. 저자는 동학혁명의 책임은 정부에 있고, 갑오개혁은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다. 제45∼47장은 명성황후시해사건과 의병운동을, 제48∼51장은 아관파천과 그 뒤에 일어난 열강의 이권쟁탈에 관한 내용이다.
제3편은 모두 61장으로 1898년 대한제국이 성립한 때부터 1911년 105인사건까지의 사실을 서술하고 있다. 제1장은 대한제국 성립 때의 국내사정과 독립협회 활동상을, 제2∼13장은 열강의 이권쟁탈, 특히 일본의 경제적 침략과 1904년 러일전쟁의 발발을 서술하였다.
제14∼32장에서는 일제의 통신기관 강점, 일본선박의 내해항해의 자유권, 황무지개간 요구와 이의 반대운동, 압록강변의 삼림채벌권, 각 지방 광산채굴권 등의 장악 및 정치적으로 경찰권을 빼앗고 고문정치를 실시하는 과정과 러일전쟁과 강화조약 내용 등을 서술하였다.
제33∼44장은 일제의 침략 앞에 매국과 애국에 관계된 인물들을 서술하였으며, 을사조약 강제체결의 경위와 일본의 이권침탈 및 문화재 약탈상 등을 중점적으로 논하고 있다.
이기(李沂) · 나인영(羅寅永) · 오기호(吳基鎬) · 김인식(金寅植) 등의 일본천황에게 보낸 항의문, 『황성신문』의 폐간과 장지연(張志淵)의 언론활동, 이상설(李相卨) · 이유승(李裕承) · 안병찬(安秉瓚) · 조병세(趙秉世) · 민영환(閔泳煥) 등의 을사조약 반대운동과 민영환 · 조병세 · 홍만식(洪萬植) · 송병선(宋秉璿) · 이상철(李相哲) · 김봉학(金奉學) 등의 순국, 최익현(崔益鉉)의 격문 등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또, 일본이 한국을 병탄할 목적으로 이용한 한국인은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 영선군(永宣君) 이준용(李埈鎔) 등 황족, 박영효(朴泳孝) 등 당시의 국사범, 송병준(宋秉濬) · 이용구(李容九) 등 일진회(一進會) 간부들이라는 사실을 서술하였다.
제45∼61장에서는 1905년 을사조약 이후 1910년 국권상실, 1911년 105인사건까지의 내용을, 제45장에서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해 한국의 농토를 약탈한 사실을, 제46장에서는 헤이그밀사파견 사실을, 제47장은 고종의 퇴위사실을, 제48장에서는 정미7조약의 진상을, 제49장에서는 군대해산과 박승환(朴勝煥)의 순국 사실, 제50장에서는 군대해산 후 각 지방에서 일어난 의병운동을, 제51∼58장에서는 일제의 한국인에 대한 탄압상, 장인환(張仁煥) · 전명운(田明雲)의 의거, 이재명(李在明)의 의거, 안중근(安重根)의 의거 등을, 제59∼61장에서는 국권상실 이후의 사실을 서술하고 있다.
제45∼61장에서는 1905년 을사조약 이후 1910년 국권상실, 1911년 105인사건까지의 내용을, 제45장에서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해 한국의 농토를 약탈한 사실을, 제46장에서는 헤이그밀사파견 사실을, 제47장은 고종의 퇴위사실을, 제48장에서는 정미7조약의 진상을, 제49장에서는 군대해산과 박승환(朴勝煥)의 순국 사실, 제50장에서는 군대해산 후 각 지방에서 일어난 의병운동을, 제51∼58장에서는 일제의 한국인에 대한 탄압상, 장인환(張仁煥) · 전명운(田明雲)의 의거, 이재명(李在明)의 의거, 안중근(安重根)의 의거 등을, 제59∼61장에서는 국권상실 이후의 사실을 서술하고 있다.
– 평가
한국통사는 국권상실의 과정을 직접 목격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한 필자가 투철한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해 통사로서의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서술한 점, 우리나라 근대사를 가장 먼저 종합적으로 서술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 저자소개 : 박은식 (朴殷植, 1859년 9월 30일 ~ 1925년 11월 1일)
박은식 (朴殷植, 1859년 9월 30일 ~ 1925년 11월 1일)은 일제 강점기의 학자, 언론인, 독립운동가, 교육자, 애국계몽운동가, 정치가이다. 자(字)는 성칠(聖七)이고 호는 겸곡(謙谷), 백암(白岩·白巖·白菴), 태백광노(太白狂奴), 무치생(無恥生)이며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존창공파 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2대 대통령을 지냈다.
– 생애 초기
.출생과 가계
박은식은 1859년 9월 30일 황해도 황주군 남면에서 아버지 박용호와 어머니 노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오랫동안 몰락했던 그의 가문은 할아버지인 박종록(朴宗錄)의 대에 농업으로 재산을 모으고 가세를 일으켰고, 아버지 박용호는 서당의 훈장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는 17살 때까지 서당에서 공부를 한 뒤 1875년 황해도에서 널리 이름나 있던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과 서로 사귀면서 여러 의견들을 자주 나누는 등의 교류를 하였다. 이 두 사람은 신동이라 불릴 정도로 대단히 자질이 뛰어났다.
.소년기
1877년 부친 상을 당하여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왔고, 1879년 연안 이씨(延安李氏)와 혼인, 분가하여 평안남도 삼등현으로 거처를 옮겼다. 1880년 경기도 광주로 가서 남인계 정약용 학파의 계승자였던 신기영(申耆永)과 정관섭(丁觀燮)에게 학문을 수학하였다. 1885년 관서(關西)의 대학자였던 화서학파 운암 박문일(朴文一)(1822~1894)과 성암 박문오(朴文吾) 형제에게서 정주학(程朱學)을 수학하였다. 그는 향시에 참가해서 특선으로 합격하였다. 이후 6년 동안 박은식은 줄곧 숭인전 능참봉이란 벼슬을 맡아 생활하였다.
1892년 민병석(閔丙奭)의 천거로 동명왕릉참봉(東明王陵參奉)으로 전직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발생하자 동비(東匪)들의 반란으로 규정하였다. 그해 갑오개혁이 단행되자 그는 갑오개혁은 사설(邪說)이라며 조정의 정책에 비판을 가하였다.
– 대한제국 멸망 이전
.독립협회 활동
박은식은 40세가 가까워오던 무렵부터 여태까지 공부했던 주자학과 위정척사사상의 본질에 의심을 품고 신학문·신지식을 알아야겠다는 필요성에 절감하여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황성신문
1898년경 9월 민족지사 장지연·남궁억·나수연·유근(柳瑾) 등과 함께 ‘대한황성신문’을 인수하여 새로이 ‘황성신문’으로 제목을 바꾸고 창간 보급하였으며, 박은식은 장지연과 같이 공동주필에 취임하였다.
.대한매일신보
1904년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되자 그는 대한매일신보에도 주필이 되어 사설을 썼다. ‘대한매일신보’는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한국명 배설)이 편집인이자 발행인인 한·영 종합일간지였으며, 고종 황제와 민족주의 지식인들의 지원을 받았다. 의병투쟁을 사실 그대로 보도한 정론으로 일제로부터 탄압을 받았으며, 1905년부터 1907년까지 양기탁의 주선으로 박은식이 주필로 활동하였다. 당시 다른 언론들은 일제의 사전검열을 받았지만, ‘대한매일신보’ 만은 발행인인 배설의 국적이 영일동맹으로 일본과 친교하던 영국이어서 언론의 자유를 다른 신문들보다는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은 오래 가지 못하였다. 일제가 신문법을 고쳐 대한제국에서 외국인이 발행하는 신문이던, 외국에서 조선인이 발행하는 신문이던 모두 압수와 판매 금지가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일제는 배설과 양기탁을 구속하였고, 특히 양기탁은 국채보상운동을 위한 의연금을 횡령, 사취하였다는 죄명을 씌워서 탄압하였다. 결국 1910년 항일언론인인 배설이 물러나고, 영국인 비서였던 앨프리드 W. 마넘(萬咸(만함), Alfred W. Marnham)이 통감부에 신문을 팔아 넘기고 말았다.
.서우학회
박은식은 1906년 신석하, 김달하, 김병도등과 함께 서우학회를 결성하여 기관지 ‘서우’의 주필로 취임하였다. 서우는 1906년 12월에 창간호를 냈으며, 1908년 1월까지 모두 4책을 발행하였는데 박은식은 집필, 편집, 지도를 모두 맡았다. 1908년에는 서우학회를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와 통합하여 서북학회를 창설하고 기관지인 서북학회월보를 창간하였다.
.황성신문 주필
1905년에는 황성신문이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으로 일제의 탄압을 받게 되었으며, 1906년 2월 황성신문이 복간되었으나 장지연이 사장으로 복직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에 1910년 8월 폐간될 때까지 황성신문에서 주필로 있었다. 당시 박은식은 일제의 검열을 피해서 ‘연무제진'(聯武濟進,무장운동과 연관하여 나란히 전진하다.)이라는 말을 썼는데, 이는 애국계몽활동이 의병의 무장항쟁과 연계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언론인 박은식은 옳지 못한 것을 매섭게 꾸짖고,사리를 정확하게 구분하는 글을 써서, 청나라의 언론인이자 사상가인 캉유웨이가 “법필(法筆)이 사공(사마천)의 정수를 득(得)하였다.”라고 칭찬할 정도였다. 하지만 일제의 비위를 거슬려서 일본 헌병대에 구금되었다가 풀려나는 탄압을 받기도 하였다.
.언론의 영향력
그가 이처럼 열정적으로 언론 활동을 한 것은 ‘독립신문’의 영향이었다. 독립협회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은 국민을 관리와 군주보다 우위에 둚으로써 민주주의를 전파하였다. 이를 본 박은식은 언론이 계몽활동에 매우 쓸모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죽을 때까지 언론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1907년 비밀결사회인 신민회가 결성되자 그는 그 곳에 가입하여 교육·출판 부문에서 민족계몽운동에 힘썼다.
– 독립 운동
.중국 망명과 독립운동
박은식은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그 이듬해인 1911년4월 중국으로 망명하여 만주 환인현 흥도천에 “윤세복”이 설립한 동창학교에서 1년간 머무르면서 ‘대동고대사론’ ‘동명성왕실기’ ‘명림답부전’ ‘천개소문전’ ‘발해태조건국지’ ‘몽배금태조’를 집필하였다. 이후 그는 중국 각지의 이름난 사람들과 교류를 하다 상해로 와서 1914년 망명 이후 줄곧 써오던 ‘한국통사’의 집필을 완성하고 이듬해인 1915년에 간행하여 일본인들을 놀라게 하였다. 박은식은 ‘한국통사’에서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과정에 초점을 맞췄는데, 그러면서도 일제에 대한 독립 운동도 중시하여 의병 활동은 정신 역사적으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높이 평가하였다. 박은식이 쓴 ‘한국통사’는 중국과 러시아 지역의 교포 사이들에서 널리 읽혀졌고, 1917년 미국 하와이에서도 출판되어 우리 교포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1919년 박은식은 3·1운동을 경험하고선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집필하여 책으로 냈다. 그는 이 책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을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우리 민족의 이러한 노력은 광복이 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 확신하였다. 1919년 10월 15일 그는 국민교육의 연구장려 및 유학생파견, 지도 등의 목적으로 하는 대한교육회(大韓敎育會)를 상해에서 조직하였으며, 회장 겸 편집부원으로 활약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취임과 죽음
1925년 3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계자들은 파벌 싸움으로 인해 대통령으로서 마땅한 사람이 없자, 대통령 서리 겸 국무총리를 맡고 있던 박은식을 2대 대통령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박은식은 7월 오히려 임시정부의 정치 체제를 대통령 중심제에서 국무위원제로 바꾼 뒤, 9월 국무위원제의 최고 대표자격인 국무령에 이상룡을 추천하여 당선시켰다. 또한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관련이 없는 이승만 중심의 구미위원회를 폐지했으며, 헌법을 개정하여 임정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일치시키고자 하였다.
– 최후
그는 한가지 꿈이 있었다. 바로 조선의 독립을 보고 광복사를 쓰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건강이 악화되었고, 결국 지병을 이유로 사임하였고, 박은식은 1925년 11월 1일 인후염으로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만약 그가 20년만 더 버텼더라면 광복사를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죽음을 앞둔 그는 “첫째 독립을 하려면 전족(全族)적으로 통일이 되어야 하며, 둘째 독립운동을 위하여는 모든 수단방략이라도 쓰고, 셋째 동지간의 애증친소(愛憎親疎)의 구별이 없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 사후
1925년 11월 4일 그의 국가, 민족에 끼친 공훈을 추도하여 임시정부 최초로 국장을 거행하여, 유해는 상하이 정안사로(靜安寺路) 공동묘지 600번지에 안장되었다.
중국 ‘중화보’, ‘상해화보’ 등의 언론사들도 박은식의 삶과 업적을 기념하는 특집기사를 작성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그의 유해는 1993년초 김영삼 정부의 임정 요인 유해 봉환사업에 따라 사후 68년 만인 1993년 8월 5일 서울로 운구, 봉환되어 서울 동작구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 저서
.박은식은 1911년 만주에서 1년간 6권의 책을 저술하였고, 대종교 신자가 되었다.
《대동고대사론》(大東古代史論)
《동명성왕실기》(東明聖王實記)
《명림답부전》(明臨答夫傳)
《천개소문전》(泉蓋蘇文傳)
《발해태조건국지》(渤海太祖建國誌)
《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
.1912년에도 상하이에서 여러 책을 저술하였다.
《안중근》, 1914년
《각국근사》(各國近史), 1915년
《한국통사》, 1915년 – 일제가 조선사 편수회를 설치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준전》
《한국독립운동지혈사》, 1920년
《이순신전》, 1923년
《한말비록》(韓末秘錄)
《대동민족사》
《단조》
《안의사중근전》
– 번역서
《발해사》
《금사》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