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한스 큉의 이슬람 : 역사 현재 미래
한스 큉 / 시와진실 / 2012.9.11
이 책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영향력 있는 세계 종교 가운데 하나인 이슬람을 제대로 이해하자는 취지를 담고 있다. 대중 매체가 유포하는 이슬람 이미지는 다른 어떤 종교의 이미지보다도 공포와 거부감과 부정적인 선입견에 물들어 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근본주의적이고 폭력적인 일부 이슬람 집단의 악행에 시선이 묶인 나머지, 평화롭게 살면서 이슬람을 실천하려는 대다수 무슬림을 보지 못하고 이슬람의 풍요로운 영적ㆍ윤리적 전통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이슬람이 지난 수백 년 동안 어떤 정신적인 발전을 경험했는지, 이슬람의 역사 속에서 어떤 ‘패러다임’이 형성됐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또한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에게,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과 적극적으로 대화하라고 용기를 북돋는 책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도 많은 개신교ㆍ가톨릭 그리스도인, 신학자들이 종교 간 이해와 협력을 위해 헌신하고, 그것을 통해 사회 전체를 이롭게 하는 일을 하고 있다. 대화의 준비가 되어 있는 종교인들이 더욱 강고하게 연대하여 평화를 촉진하는 세력의 목소리가 더욱 커질 수 있기를 바라는 저자의 바람이 담겨있다.

○ 목차
한국어판 서문
이 책은 무엇을 원하는가?
제I부 근원
1장.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종교
- 이슬람에 대한 적대자 이미지
- 이슬람에 대한 이상적 이미지
- 이슬람에 대한 실제적 이미지
2장. 시작의 문제
- 근동 고등 종교의 역사 5000년
- 아라비아의 유대인, 그리스도인, 유대-그리스도인
- 아브라함 – ‘책의 사람들’의 선조
제II부 핵심
1장. 하느님의 말씀이 책이 되었다
- 꾸란 – 이슬람의 독특성
- 꾸란 – 하늘에서 떨어진 책?
2장. 핵심 메시지
- 하느님 외에는 하느님이 없다
- 무함마드는 그분의 예언자다
- 예언자 – 지도자
3장. 핵심 구성 요소
- 의무 기도
- 사회적 기부, 단식, 순례
제III부 역사
1장. 초기 이슬람 공동체 패러다임
- 신앙의 영속적인 실체 – 변화하는 패러다임
- 종교적 비전의 실현
- 종교적 · 사회적 변혁
- 예언자에서 예언자의 대리인으로
- 초기 이슬람 공동체의 팽창
- 이슬람의 신학과 무슬림 법의 시초
- 초기 이슬람 공동체의 위기: 당파의 분열
2장. 아랍 제국 패러다임
- 메디나에서 다마스쿠스로 – 권력의 새로운 중심지
- 반대당(야당) 시아파
- 이슬람을 부각시킨 제국의 종교 정책
- 이슬람 법의 탄생
-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하나의 새로운 공동체
- 세계 제국의 탄생
- 신학 논쟁과 그 논쟁의 정치적 파급력
- 제국의 위기
3장. 고전적 이슬람 세계 종교 패러다임
- 새로운 시대의 개막
- 고전적 이슬람: 세계 문화
- ‘예언자의 전통’, 순나의 형성
- 네 개의 중요한 법률 학파
- 두 번째 신학 논쟁: 계시와 이성
- 국가와 신학
- 제국의 해체
4장. 울라마와 수피의 패러다임
- 제국의 몰락 이후 수많은 국가의 탄생
- 울라마: 법률 학파에서 대중 운동으로
- 수피즘: 신비주의자의 형제단
- 대중 운동 차원으로 확대된 수피즘
- 규범적 신학
- 신학 대전
- 아랍 철학의 발전과 쇠망
- 중세 이슬람의 위기
5장. 이슬람 근대화 패러다임
- 유럽 근대화와의 대결
- 세 이슬람 제국: 무굴, 사파비, 오스만
- 이슬람 세계에 대한 유럽의 도전
- 개혁과 반동 사이에서
제IV부 현재의 도전
1장. 여러 가지 패러다임의 경쟁
- 세속화의 길
- 이슬람주의의 길
- 사회주의의 길
2장. 무슬림들은 어떤 이슬람을 원하는가?
- 경쟁하는 패러다임들의 동시성
- 끊임없이 변화하는 이슬람
3장. 근동 분쟁과 새로운 패러다임
- 분쟁의 원인
- 끝없는 비극?
4장. 새로운 신학적 대화 모델
- 과거의 방법
- 예수에 대한 대화
5장. 사변적인 물음
- 유일신 신앙과 삼위일체
- 성서에 대한 재고
6장. 성서 비평에서 꾸란 비평으로?
- 문자 그대로의 계시인가?
- 비평적 주석
- 시대를 의식하는 꾸란 이해
제V부 미래의 가능성
1장. 이슬람의 갱신
- 기본 정책
- 실현을 위한 모델
2장. 이슬람 법질서의 미래
- 전통적인 법체계에 대한 도전
- 근대적 법률 체계의 도전
- 종교와 여성, 그 긴장 관계
- 결코 피해갈 수 없는 개혁
3장. 이슬람 국가 질서와 정치의 미래
- 국가와 종교 – 하나인가 따로인가?
- 세속주의가 아닌 세속성
- 종교, 폭력, ‘거룩한 전쟁’
- 전쟁이냐 평화냐?
4장. 이슬람 경제 질서의 미래
- 이슬람이 해결책인가?
- 이슬람 전통의 재발견
- 경제와 윤리
5장. 이슬람 생활 질서의 미래
- 옷이 사람을 만든다?
- 이슬람주의와 세속주의 사이의 외줄타기
- ‘충돌’ 대신 대화
- 모스크를 둘러싼 논쟁
에필로그: 희망의 이미지, 이슬람
- 적대자 이미지에서 희망의 이미지로
- 계몽된 종교성
- 문명 간의 대화를 위한 이슬람의 공헌

○ 저자소개 : 한스 큉 (Hans Kung)
현존하는 종교계의 최고 지성이라 불리는 한스 큉은 1928년 스위스에서 태어났다. 로마 교황청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뒤 1954년 가톨릭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파리의 소르본 대학교와 가톨릭 대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여 1957년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1959년까지 스위스 루체른에서 사목 활동을 하다가 1960년 독일 튀빙겐 대학교의 가톨릭 신학 교수가 되었다.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학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1979년 가톨릭교회의 전통 교리에 대한 비판이 파문을 일으켜 바티칸으로부터 신학 교수직을 박탈당했으며 이 일은 국제적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후 튀빙겐 대학교는 그를 신학 교수직이 아닌 개인적인 교회일치 신학 교수직에 임명하였다. 세계종교인평화회의 의장을 역임하였으며, 1996년 대학에서 퇴임한 후 세계윤리재단 회장으로 선출되어 여전히 충실한 가톨릭 신부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그의 저술과 강연은 가톨릭 신학의 영역을 뛰어넘어 세계 신학계 전반에 큰 도전이었다.
우리말로 번역된 그의 저서로는 『그리스도교』 『왜 그리스도인인가』 『교회란 무엇인가』 『신은 존재하는가』 『문학과 종교』 『중국 종교와 그리스도교』 『세속 안에서의 자유』 『세계 윤리 구상』 『믿나이다』 『한스 큉, 과학을 말하다』 『그리스도교 여성사』 등이 있다.
– 역자 : 손성현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 감리교신학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튀빙겐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옮긴 책으로는 게르트 타이쎈의『역사적 예수』, 『성서 –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프란츠 알트의 『생태주의자 예수』, 게르하르트 르틴의 『몸으로 읽는 성서 – 비블리오드라마』, 볼프강 ㆍ 에케하르트 슈테게만의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회사』, 리처드 홀슬리의 『크리스마스의 해방』등이 있다.

○ 출판사 서평
– 한스 큉의 획기적인 저작 ‘유대교’, ‘그리스도교’에 이어 ‘이슬람’이 출간됨으로써 아브라함의 세 종교를 다룬 삼부작 완성
“나는 이 책에서 엄청나게 극적이고 변화무쌍한 역사, 하나의 위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한다. 그러나 나의 주된 관심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다. 어떻게 이슬람은 현재의 이슬람이 되었는가? 그리고 이것은 미래를 염두에 둔 물음이기도 하다. 장차 이슬람은 어떻게 될 것인가?”
세계 종교는 지난 이십여 년 동안 한스 큉의 주된 관심사였다. 한스 큉이 쓴 책들은 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문명 간의 대화를 위한 선구자적 역할을 감당해왔다. 독자들에게 새롭게 선보이는 이 방대한 저술은 이슬람에 대한 총체적이고도 심오한 연구서다. 그는 이슬람 1,400년 역사의 흐름을 따라 패러다임의 전환을 묘사하고 다양한 흐름을 서술하면서, 지금 이 시대에 절실하게 제기되는 문제에 대해 이슬람 세계가 취하고 있는 여러 가지 입장을 소개해준다. 수적인 면에서 볼 때 그리스도교 다음으로 큰 종교인 이슬람을 대상으로 이렇게 포괄적인 정치적 ㆍ 문화적 ㆍ 종교적 분석을 제시하는 것, 이것은 우리 시대의 신학자들 가운데서 오직 한스 큉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말한다. 이슬람과의 대화 없이는 세계 평화가 지속될 수 없으며, 세계 도처에 살고 있는 무슬림과 평화롭게 공존하는 일도 불가능하다. 현대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슬람을 이해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근거가 탄탄한 책, 신학적으로 폭발력이 강한 책, 정치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책이 지금 여러분 앞에 있다.
– 이슬람과 관련하여 함께 던져야 할 물음
이슬람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이런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도대체 왜 12억이 넘는 사람들이 이 종교를 믿는가? 왜 아프리카의 애틀랜타 연안에서 인도네시아 섬들까지, 또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에서 모잠비크까지 이 지구의 중간 영역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종교를 믿고 있는가? 왜 이슬람교는 그리스도교 이후 최대의 세계 종교가 되었는가? 언젠가는 그리스도교를 능가할 것이라는 희망이 산발적으로나마 표출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왜 무슬림들은 이슬람이 가장 새롭고 가장 훌륭한 종교일 뿐 아니라 가장 오래되고 가장 우주적인 종교라고 믿는가? 유목민인 베르베르족, 근동의 아랍인, 서아프리카인, 동아프리카인, 터키인, 보스니아인, 알바니아인, 페르시아인, 파키스탄인, 인도인, 중국인, 말레이시아인, 그리고 최근에는 거의 모든 나라 사람들이 그 모든 문화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거대한 종교 가족으로 묶이고 있다. 이슬람이 이런 일을 다른 어떤 종교보다 잘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정말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도대체 이슬람의 힘은 어디에 있는가? 이슬람이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슬람의 근원은 무엇인가? 이슬람의 가치관, 상징은? 이슬람의 메시지, 본질, 구성 요소는? 이슬람 세계의 일상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이슬람의 정치, 문화, 예술은? 나중에는 이런 질문도 던진다. 이슬람의 약점, 이슬람이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무슬림도 스스로 비판적인 물음을 던져야 할 만한 것은 무엇인가?
저자는 ‘악의 축’으로 마녀사냥을 당하고 있는 이슬람에 대한 편견을 걷어내는 데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그 근본 이유는 서로에 대한 무지 때문이며, 그 무지를 걷어내려는 용기 있는 대화의 결여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저자는 다음과 같은 기본 원칙을 천명한다.
– 문화의 충돌에 반대하며
“종교 평화 없이는 세계 평화도 없다!” 이것은 저자가 1982년 튀빙겐 대학교에서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에 대한 강의를 할 때 이미 도출해낸 결론이다. 앞서 출간한 『그리스도교』(1991)와 『유대교』(1994)처럼, 이슬람을 다룬 이번 책도 다음의 기본 원칙에 입각하여 집필됐다. 이 원칙은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의식의 전환, 전 지구적인 의식의 전환을 염두에 둔 것이다.
종교 간의 평화 없이는 국가 간의 평화도 없다.
종교 간의 대화 없이는 종교 간의 평화도 없다.
종교에 대한 기초 연구 없이는 종교 간의 대화도 없다.
1993년 미국의 정치학자인 새뮤얼 헌팅턴은 이런 원칙과는 전혀 반대되는 입장을 내세웠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질문의 형식을 띠더니, 나중에는 아예 외교정책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자리를 잡았는데, 그것이 바로 ‘문명의 충돌’이다. 문명 간의 싸움은 세계사의 불가피한 시나리오인가? 펜타곤의 고문이었던 헌팅턴은 개별 문화의 내적인 역동성과 다양성을 깊이 연구하지 않았고, 여러 문명들의 복잡한 역사적 맥락과 모호한 경계와 상호 번영과 평화로운 공존에 대해서는 무지했던 것이 분명하다. 바로 그 헌팅턴이 ‘서구’와 ‘이슬람’의 충돌이야말로 특히 위험한 것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이로써 그는, 과거 냉전 체제를 유지시켰던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을 냉전 이후 이슬람에 대한 적개심으로 대치시키는 데, 나아가 미국의 엄청난 군사적 무장을 정당화하는 데, 그리고 그가 원했건 그렇지 않건 간에 계속해서 전쟁이 일어나기에 좋은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이념적인 엄호를 한 셈이다.
그러니까 헌팅턴의 글이 발표되기 일 년 전인 1992년(조지 H.-W. 부시 재임 때 일어난 제1차 이라크 전쟁이 불명예스럽게 종결된 해이며, 제2차 이라크 전쟁이 일어나기 꼭 10년 전이다) 미국에서는 소수의 이데올로그와 패권주의 정치가들의 모임인 ‘네오콘’, 즉 ‘신보수주의 집단’이 석유 자원 ㆍ 미국의 헤게모니 ㆍ 이스라엘의 ‘안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예방적 차원의 전쟁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1999년 조지 W. 부시가 미국의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바로 그 전쟁을 위한 준비가 면밀하게 추진됐다. 2001년 9월 11일에 일어난 전대미문의 대형 참사는 일단 아프가니스탄 침공의 구실이 됐고, 이것은 (거기에 참여하지 않은) 이라크에게 큰 위협이 됐다. 유엔 안보리의 동의를 얻는 데 실패한 뒤, 오웰식의 언어 왜곡을 총동원하여 전쟁의 근거와 전쟁의 목표를 꾸며대던 부시 행정부는 영국 총리 토니 블레어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동조에 힘입어 2003년 3월 18일, 모든 국제법과 세계 여론의 반대를 무시하고, 이라크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 미국은 이라크에 엄청난 군사적 폭력을 퍼부었고, 일단 가시적으로는 단시간에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그 전쟁은 테러를 억제하기는커녕, 테러가 아프가니스탄과 근동과 전 세계로 확대되는 계기가 됐다. 곳곳에서 비극적인 테러가 연이어 일어났다. 발리, 카사블랑카, 리아드, 이스탄불 그리고……. 2004년 3월 11일 마침내 유럽의 마드리드에서도 대형 참극이 벌어졌다. 그 여파는 테러 이틀 뒤 실시된 스페인 의회 선거 결과로 나타났다. 이라크 파병을 결정했던 의원들이 선거에서 참패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이라크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다른 유럽 나라들에게도 극도로 불안해진 국제 정세의 신호탄 같은 것이었다. 두 이슬람 국가에 대한 전쟁, 그리고 모든 유엔 결의 사항을 무시한 이스라엘의 반인륜적 점령 정책에 대해 서구 사회가 보여준 ‘이중 잣대’로 인해 온 이슬람 세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노와 쓰라림을 느꼈으며, 그들의 자세는 극도로 냉담해졌다. ‘추락’은 이제 ‘자기실현적 예언’이 되어버렸다.
지금 우리는 새로운 국제 관계 형성을 위해 너무나 중요한 시점에 서 있다. 서구 유럽과 이슬람의 관계, 그리고 세 개의 아브라함 종교, 즉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간 새로운 관계 형성을 위한 기로에 서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양자택일밖에 없다. 종교 간의 경쟁, 곧 문명 간의 충돌, 즉 국가 간의 전쟁을 택하든지 아니면 문명 간의 대화, 종교 간의 평화를 기초로 국가 간의 평화를 택하든지 둘 중 하나다! 인류 전체가 치명적인 위협 앞에 서 있는 지금, 우리는 증오와 복수와 적개심의 댐을 쌓는 대신 편견의 담을 이루는 벽돌을 하나하나 치우고 대화의 다리, 즉 곧장 이슬람으로 통하는 다리를 놓아야 하는 것일까? 한스 큉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저자는 서로의 차이를 대충 얼버무리고 뒤섞어버리는 혼합주의를 원하지 않는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서로에 대한 성실한 접근과 이해이며, 이것은 쌍방의 분명한 자기의식ㆍ객관적이고 공정한 자세ㆍ서로를 잇는 것과 가르는 것에 대한 정확한 지식에 기초한다. 이러한 시도는 정치ㆍ경제ㆍ학문ㆍ언론 분야의 염세주의자와 냉소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상주의적 순진함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저자는 새로운 세계 질서에 대한 희망을 아예 포기하고 사는 게 아니라면, 이러한 시도야 말로 유일하고 실제적인 대안이라고 말한다.
– 사람들이 대화의 능력을 갖추도록 하기 위한 간학문적 기획
한스 큉은 이슬람에 대한 출판물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또 한 권의 방대한 분량의 이슬람 전문 서적이 과연 필요한 것인지 되묻는다. 문화사의 관점에서 이슬람에 대해 쓴 책은 이미 충분하다. 정치사적인 접근은 말할 것도 없고, 종교사적인 접근도 세계 여러 나라의 말로 출간되어 넘쳐 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 책을 문화사ㆍ종교사ㆍ정치사ㆍ법률사의 관점에서 쓰지 않았다. 저자가 이 책을 쓴 것은 문화와 문화, 종교와 종교, 나라와 나라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형성돼야 하는 이 결정적인 변화의 시기를 맞아 많은 사람들이 대화의 능력이 있는 사람, 즉 ‘세계-능력이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어떤 지향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ㅡ 그가 그리스도인이건 무슬림이건, 아무 종교도 믿지 않는 세속주의자이건, 경제인이건 문화인이건, 교사건 목사건 대학생이건 ㅡ 이 세계의 상황을 더 잘 평가하고 거기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황은 세계 종교에 대한 이해 없이는 제대로 파악될 수 없다. 문화사ㆍ종교사ㆍ정치사ㆍ법률사와 관련된 설명은 고도로 복잡한 진술 과정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수십 년 전부터 저자 집중하고 있는 기본 정책도 투명하게 드러나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한스 큉이 신학자ㆍ철학자ㆍ종교 대화자로서 이 책을 통해 기여하려는 바이다.
저자는 이러한 목표에 입각하여 미래를 내다보면서 이슬람의 어제와 오늘을 공정하게 진술한다. 이슬람의 천사백 년 역사를 기술하는 것은 유대교 삼천 년 역사, 그리스도교 이천 년 역사 기술보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앞서 나온 두 책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책은 이슬람의 역사에 대한 종교학적-중립적 서술이 아니다. 이슬람의 가르침에 대한 교리적-신학적 진술에 그치는 것도 아니다. 이 책은 연대기적 서술을 하면서도 핵심적인 내용을 논구하고, 역사적인 차원과 교리적인 차원의 종합을 시도한다. 이 책에서도 한스 큉은 엄청나게 극적이고 변화무쌍한 역사, 하나의 위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지만 이따금씩 이야기를 끊고 비판적인 질문을 던진다. 패러다임의 변화와 함께 이슬람 세계에 나타난 변화의 결과를 묻되, 그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미래를 내다보며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특히 어떤 전통이 유연함을 잃어버리고 거의 소통불능의 지경에 빠졌을 때 떠오르는 ‘다시 묻기’와 ‘토론을 위한 질문’을 던진다. 그러므로 이 책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간학문적인 기획이다. 다시 말해, 따로 떨어져 있던 ‘학과’들이 서로 맞물려 이슬람에 대한 다중적인 관점을 매개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소간 위험스러운 모험, 즉 이슬람에 대한 깊은 이해와 이슬람에 대한 비판 사이의 외줄타기 모험을 감행한다. 저자는 이슬람에 대한 깊은 이해를 추구하되 그것이 지금의 모습을 정당화하는 쪽으로 오용돼서는 안 되며, 이슬람에 대한 공개적 비판이 (서구인의) 자기 정당화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고 경계한다. 왜냐하면 무슬림이 아닌 이가 쓴 이 책은 이슬람의 약화 내지 소멸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이슬람의 내적 갱신에 대한 희망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모든 (그리스도교적 혹은 세속적) 우월의식을 멀리하고 이슬람의 갱신을 위해 함께 노력하고자 한다.

– 이슬람 1,400년 역사의 패러다임에 따른 분석
‘정보의 스모그’ 시대 속에서 이 책은 단순한 사실로 이루어진 지식이 아니라 방향 제시의 지식을 제시한다. 즉 이슬람 전체를 도식화하지 않고 세분화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이 난해한 시도를 감행할 수 있었던 것은, 『신은 존재하는가?』(1978), 『전환기의 신학』(1987), 『세계 윤리 구상』(1990) 등에서 저자가 일찍부터 깊이 성찰하면서 서서히 발전시켜온 패러다임 분석을 통해 하나의 분명한 이론과 그에 동원되는 일군의 개념들이 수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슬람 1,400년의 역사를 서술하되, 모든 시대와 영역과 사조와 인물을 총망라하여 자세하게 재구성하지는 않는다. 필요한 경우에는 대표적인 저작을 소개하며, 심지어 이슬람 전문가조차도 다 소화해낼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해진 자료들 가운데서 일부를 소개하기도 한다. 그러나 패러다임 안에서 사유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것은 역사의 주요 구조 안에서, 그 역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에게 집중하는 가운데 그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다. 패러다임 안에서 사유한다는 것은 이슬람의 역사 속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나타났던 총체적 상황 구조를 분석하되, 그것의 생성과 성숙, 나아가 그것의 쇠퇴와 경직을 분석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패러다임 안에서 사유한다는 것은 전통주의의 형태로 굳어져버린 그 패러다임이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음을 밝히는 것이며, 새로운 패러다임의 출발을 드러내고, 가능하다면 미래를 위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다. 자신의 종교는 항상 같은 모습을 유지해왔다는 견해, 즉 자신의 종교에는 어떤 중대한 변화 없이 점진적인 발전만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유대인이나 그리스도인의 경우보다는 무슬림의 경우에 더 만연해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그야말로 허황된 것이라는 사실이 이 책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물론 저자의 주된 관심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다. 어떻게 이슬람은 현재의 이슬람이 되었는가? 그리고 이것은 미래를 염두에 둔 물음이기도 하다. 장차 이슬람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므로 저자의 역사 서술의 특징은 단순한 연대기 나열이 아니라 시간과 문제의 맞물림이다.
필연적으로 광범위한 영역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은 모든 종류의 물음에 대답을 제시하고, 무슬림과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그리고 유대인에게도) 상호 이해의 촉매제가 될 것이다. 저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흥미로운 요소들, 매혹적인 일화들, 나아가 나름 중요한 어떤 부분들을 생략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자꾸만 변화하는 역사적 관계 속에서 초점이 분산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같은 이유에서 저자는 이슬람의 중심지인 아라비아, 터키, 이란을 주로 다루어야 했다. 인도, 사하라 아래쪽 아프리카, 동남아시아의 이슬람에 대한 내용은 비교적 부수적으로 다뤘다. 또한 저자는 국가적 차원의 이슬람과 정치적 이슬람의 발전에 주목했고, 민속 차원의 이슬람은 하나의 배경 정도로만 언급했다. 세부적인 것의 밀림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각각의 위대한 총체적 상황 구조 혹은 패러다임을 만날 때마다 ㅡ 초기 이슬람 공동체의 패러다임(P I), 아라비아 제국 패러다임(P II), 고전적 이슬람 세계 종교 패러다임(P III), 울라마와 수피의 패러다임(P IV), 이슬람 근대화 패러다임(P V) ㅡ 간략한 역사적 배경과 함께 그 패러다임의 조건ㆍ원인ㆍ영향ㆍ상수ㆍ변수를 톺아내어 현대적 패러다임(P VI)의 기본 특징을 인지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였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시작됐다고 해서 옛 패러다임이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약간의 오버랩은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정확한 이해에 도움이 된다.
– 길고 긴 사유의 길
이슬람에 대한 현재 한스 큉의 견해는 수많은 연구와 경험의 산물이다. 그것은 1955년 저자가 젊은 박사 과정 학생이었을 때 북아프리카에 있는 어느 이슬람 국가를 여행하면서 시작됐다. 그 시기는 로마 가톨릭의 개혁과 관계된 핵심 논점을 마음에 품고 처음으로 의미 있는 에큐메니칼 대화를 추구했던 때요, 칼 바르트의 칭의 이론에 대한 박사논문(1957)을 쓰던 때였다. 그는 이 시기의 연구를 통해 훗날 종교 간의 대화를 위해 방법론적으로 필요한 것을 많이 배우게 됐다. 이슬람에 대한 저자의 학문적 연구의 초석을 닦아준 중요한 사건은 튀빙겐 대학의 일반 교양 강좌에서 이슬람 전문가인 요제프 반 에스 교수와 함께 진행한 대화식 강의였다(〈그리스도교와 세계종교Christentum und Weltreligionen〉, 1984). 저자는 그때 획득한 통찰을 수많은 연구와 여행과 토론을 통해서 심화 ㆍ 확대할 수 있었다. 특히 1990년대에는 독일의 SWR과 스위스의 DRS가 함께 제작한 7부작 TV 다큐멘터리 〈흔적 찾기: 세계 종교를 찾아서Spurensuche. Die Weltreligionen auf dem Weg〉를 위해 촬영 여행을 떠났는데, 그 가운데 제7부가 바로 이슬람의 다양한 패러다임을 다루고 있다. 7부작 다큐멘터리는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비디오, CD-ROM, DVD로 볼 수 있으며(한국어: 〈세계의 종교〉, 베네딕도미디어 2004), 설명이 덧붙여진 책으로도 출간됐다.
삼부작의 마지막인 이 책은, 근동에서 발흥한 세 종교, 즉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장기 프로젝트 ‘우리 시대의 종교적 상황Zur religi?sen Situation der Zeit’이 마무리다. 이 프로젝트는 1989년부터 1997년까지 보쉬기념재단과 다이믈러벤츠재단이 지원하는 프로젝트 “종교 평화 없이는 세계 평화 없다!”의 일환으로 계획된 것이었다. 수천 년을 이어져 내려온 세 종교의 역사 속에서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끼치고 있는 정신적인 힘에 대한 분석, 즉 역사적 ㆍ 조직적 진단이 일차적인 목표였다. 그 다음은, 거기서 미래에 대한 전망을 이끌어내어 실천적 에큐메니칼 해결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특히 교리적인 부분을 다룰 때에는 삼자 간 방법론을 사용하여, 이슬람에 대한 서술과 비판을 그리스도교에 대한 (그리고 유대교에 대한) 자기비판과 결부시킨다.
○ 추천사
“종교 간 평화 없이 세계 평화 있을 수 없다.” 현재 종교 간의 이해와 평화를 위해 가장 크게 힘쓰는 이 책의 저자 한스 큉의 말이다. 사실 세계 주요 종교 중 우리가 가장 잘 모르고, 심지어 가장 크게 오해하고 있는 종교가 바로 이슬람이라 할 수 있다. 세계 여러 종교의 ‘심층’을 꿰뚫어보는 혜안의 소유자 한스 큉이 이 책에서 밝혀주는 이슬람의 ‘심층’에 접하므로 이슬람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더욱 깊어지고, 나아가 한국에 종교 간의 평화가 증진되는 계기가 마련되기 빈다. – 오강남 교수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명예교수/종교학)
한스 큉 박사의 방대한 저작 《이슬람》. 세계 최고의 신학자가 쓴 최고의 저작이 최고의 번역자를 만나 우리 글로 출판된 것을 진실로 축하하며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한스 큉은 가톨릭 신학자로서 종교학 연구와 종교 대화에서도 이미 세계적 명성을 얻은 학자다. 이슬람에 대한 연구와 이해가 아직 일천한 한국에서 한스 큉의 『이슬람』은 한국 교회와 종교계에 신선한 도전이 될 것이다. – 채수일 목사 (한신대학교 총장/선교 신학)
한스 큉의 『이슬람』은 그리스도교 신학자가 쓴 책이지만 그의 명성에 걸맞은 해박한 지식과 무려 25년간 쏟은 이슬람에 대한 그의 연구 성과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놀라운 역작이다. 이슬람의 웅숭깊은 과거와 현재를 심도 있게 개관하고, 지금보다 평화로운 미래를 견인하는 데 필요한 지혜와 통찰을 담고 있다. 이슬람에 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되어 있는 지금, 이 책은 우리에게 이슬람이 그리스도교 유대교와 더불어 아브라함 신앙을 잇는 같은 뿌리의 일신교이고, 한편 우리 사회에 쌓인 이슬람에 대한 무의식적인 악감이나 편견의 벽을 넘어 세계적 종교 이슬람의 실상을 바르게 볼 수 있는 새로운 시각과 인식을 제공한다. 종교 간 대화와 평화를 생각하는 우리 사회 지성인들에게 매우 유익한 필독서다. – 손주영 교수 (한국외국어대학교 아랍어과 명예교수/이슬람 역사)

○ 독자의 평 1
이 책은 무엇을 원하는가?
9 앞서 나온 《그리스도교》 (1991)와 《유대교》 (1994)처럼, 이슬람을 다룬 이번 책도 다음의 기본 원칙에 입각하여 집필됐다. 이 원칙은 인류가 살아 남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의식의 전환, 전 지구적인 의식의 전환을 염두에 둔 것이다.
종교 간의 평화 없이는 국가 간의 평화도 없다.
종교 간의 대화 없이는 종교 간의 평화도 없다.
종교에 대한 기초 연구 없이는 종교 간의 대화도 없다.
14 내가 이 책을 쓴 것은 문화와 문화, 종교와 종교, 나라와 나라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형성돼야 하는 이 결정적인 변화의 시기를 맞아 많은 사람들이 대화의 능력이 있는 사람, 즉 ‘세계-능력이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어떤 지향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 그가 그리스도인이건 무슬림이건, 아무 종교도 믿지 않는 세속주의자이건, 경제인이건 문화인이건, 교사건 목사건 대학생이건━ 이 세계의 상황을 더 잘 평가하고 거기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황은 세계 종교에 대한 이해 없이는 제대로 파악될 수 없다.
제I부 근원
1장.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종교
68 그리스도교의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이슬람의 이미지도 보통 이중의 변증법에 의해 규정된다. 하나는 본질 Wesen과 형태 Gestalt의 변증법이요, 다른 하나는 본질 Wesen과 해악 Unwesen의 변증법이다.
69 그래서 나는 모든 경직된 본질주의에 반대하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싶다. 이 지속적인 본질은 오직 변화하는 것 속에서 나타난다. 이것은 그리스도교나 이슬람이나 마찬가지인데, 어떤 정체성은 오로지 가변성 속에 있다. 연속성은 오로지 사건 속에 있다. 지속성은 변화하는 현상 속에 있다. 요컨대 이슬람의 본질은 형이상학적 불변성이나 탁월성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끊임없이 가변적인 역사적 현상의 형식 혹은 형태 Gestalt 속에서 나타난다. 바로 이런 근원적이고 지속적인 ‘본질’, 즉 이슬람의 본질과 대면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역사적 현상의 형식, 즉 이슬람의 ‘형태’에 유의해야 한다.
71 종교에 대해 우호적인 사람들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종교라는 인간적인 현상이 상당히 양면적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모든 종교에는 본질과 형체, 지속적인 것과 변화하는 것만 있는 게 아니다. 거기에는 선한 것과 악한 것, 구원을 가져오는 것과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것, 본질 Wesen과 해악 Un-Wesen이 뒤엉켜 있다. 스스로도 너무나 양면적인 인간이 그 둘을 명확하게 분리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심지어 가장 본질적인 것을 가지고도, 성경이나 꾸란을 가지고도 해악을 자행 할 수 있다.
2장. 시작의 문제
94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은 결코 아랍세계의 소수 계층에만 제한되지 않았다. 이슬람의 발흥 이전에 육백 년 동안 아랍의 그리스도교가 존재했다. 크래그의 말을 빌리자면, “널리 퍼져나간 그리스도교, 모든 어려움을 뚫고 자기를 관철시킨 그리스도교는 실제로 아라비아 섬의 일부였다.” 또한 “아라비아적인 것과 그리스도교적인 것의 결합, 아라비아 사람과 그리스도교 신앙 사이에 성공적인 관계가 존재했다.”
97 이슬람 이전의 아랍인들에게 유일신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예언자와 거룩한 경전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헬레니즘적인 그리스도론이었다. 예수를 사실상 메시아/그리스도로 신격화하고, 예수를 하느님과 동일시하고, 예수를 화육한 ‘하느님’, 심지어 십자가 처형을 당한 ‘하느님’이라고 선포하는 그리스도론은 그들에게 전혀 수용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120 후기의 메디나 장에는 여태껏 아브라함과의 자세한 관련성없이 언급됐던 이스마엘이 등장한다. 아랍인은 바로 이 이스마엘에게서 유래하며, 유대인은 이사악과 그의 아들 야곱에게서 나온다. 이스마엘은 아버지 아브라함을 도와 메카에 카바를 짓고, 카바가 순수한 유일신 숭배를 위한 자리가되고 순례의 중심지가 되도록 하는 일을 돕는다.
123 꾸란에 따르면, 무슬림이야말로 아브라함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유일한 후계자는 아니지만 유일하게 위조되지 않은 신앙인들이다. 무슬림은 아브라함에게서 많은 것을 물려받았다. 무슬림이라는 ‘이름’, 그들의 믿음, 메카 제의, 신 중심주의, 보편주의, 이 모든 것이 아브라함의 덕이다.
123 아브라함의 경우만 하더라도 이것이 극도로 난해한 문제라는 사실, 세 종교 간의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며 정치적으로도 극히 민감한 문제라는 사실, 나아가 이 세 종교의 근원적 정체성이 걸려 있는 심각한 문제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129 그리스도교 밖에도 구원이 있는지에 대한 물음은 오늘날 가장 급박한 물음인데도 세계교회협의회는 <다양한 종교와 사상을 가진 사람들과의 대화를 위한 지침> (1979)에서도, 또 수많은 총회에서도 이 물음에 답을 하지 않았다. 소속 교회의 입장들이 너무나 상반된다. 동방 정교회는 이 문제를 철저히 거부하고 있고, 몇몇 근본주의적인 개신교 교회들은 더욱 강력한 거부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한 번 이 문제를 철저하게 물어보자.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개종하지 않는다면 모조리 지옥으로 떨어질 그 사람들과 무슨 ‘대화’를 한단 말인가?
130어쨌든 전통적인 가톨릭 교회의 견해는 오늘날 더 이상 공식적인 가톨릭 교회의 입장이 아니다. 그것은 결정적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1964)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한 견해를 밝혔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교회를 모르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양심의 명령을 통하여 알게 된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영향 아래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이 문장에서 명시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사람들은 유일한 하느님을 믿음으로써, 또한 그분의 뜻을 행함으로써 그 기원에서부터 이미 유대인이나 그리스도인과 가장 공통점을 많이 가진 사람들, 즉 무슬림이다.
제II부 핵심
1장. 하느님의 말씀이 책이 되었다
142 꾸란은 무슬림에게 단순히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꾸란은 아랍어로 기록 된 살아있는 책, 거룩한 책이다.
142 하느님이 직접 계시하신 모든 것이 여기에 있다. 바로 이것을 통해서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개정 할 것은 전혀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무슬림은 어린 학생 때부터 여기 있는 모든 것을 최대한 기억에 새겨야 한다.
147 꾸란은 하느님의 최종적 계시의 증명서로서 이슬람의 모든 영역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유대인에게 토라가 중요한 만큼,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가 중요한 만큼, 꾸란은 무슬림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실제로 꾸란은 무슬림에게 ‘길과 진리와 생명’이다.
164 오늘 우리의 신학적 문제 의식에서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무함마드가 어떻게 그 계시를 받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과연 무함마드가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는지 그렇지 않은지의 여부다.
165 만일 우리가 무함마드를 그리스도 이후의 예언자로 인정한다면, 우리는 무슬림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실, 즉 무함마드는 자신의 메시지를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는 사실, 그의 메시지는 단순히 무함마드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 계시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느님의 계시란 정말로 하느님이 직접 영감을 불어넣어 주셨을 뿐 아니라 하나 하나 그대로 받아 적도록 불러주신 것이란 뜻인가? 물론 무슬림들은 그렇게 믿는다. 하지만 일부 그리스도인들도 성경을 그런 하느님의 말씀, 그런 하느님의 계시로 믿는다. 이 문제는 최근 들어 새롭게 쟁점이 되고 있는 주제다.
2장. 핵심 메시지
166 유대인의 신앙 고백도, 그리스도교의 신앙 고백도 이슬람의 신앙 고백처럼 핵심을 찌르면서 동시에 배타적이고, 동시에 보편적인 고백으로 관철되지는 못했다. 비록 꾸란에는 이런 두 단락 문장은 나오지 않지만, 그 신앙 고백은 다음과 같다. “하느님 외에는 하느님이 없고, 무함마드는 그분의 예언자다.” 이것을 고백하는 사람은 무슬림이요 이것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은 무슬림이 아니다.
179 꾸란에서 하느님의 전능에 대한 진술과 인간의 책임에 대한 진술은 성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상호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결코 서로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두 개의 상보적 진리라는 표현을 쓴다. 이 둘은 모두 진지하게 간주돼야 한다. 합리적으로는 도무지 양립 할 수 없는 이 두 가지 진리는 후대의 그리스도교 신학, 그리고 후대의 무슬림 신학이 끈질기게 붙잡고 씨름해야 할 주제며, 하느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기 결정의 문제에 대한 다양한 모색의 단초가 된다.
180 유대교의 묵시문학이나 신약성서의 묵시문학과 비슷하게 꾸란도 전 우주를 심판하시며 완성하시는 하느님 앞에 모든 인간이 모이는 장면을 장 엄한 심판의 그림으로 서술하고 있다.
181 그리스도교의 경우, 낙원에서 맛보게 될 영원한 행복을 묘사함에 있어 후대로 가면서 너무나 영적이고 초감각적인 경향을 띠는데 반해, 꾸란의 묘사는 극도로 감각적이다. 지극한 행복 속에서 하느님을 관조함·용서·평화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나 희미하고 지엽적이다.
188 신앙이란 단순히 주관적인 심정의 움직임이 아니다. 그것은 신앙의 내용(belief)이 없는 신앙행위(faith)가 아니다. 신앙은 단순한 느낌이 아니다. 신앙이 느낌이라면 무엇을 믿느냐보다는 믿는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게 된다. 그것은 신앙에 대한 감정적 오해일 것이다. 아니다! 유대인과 그리스도인과 무슬림에게 신앙이란 하나의 전체로서의 인간이 자신의 정신과 심정의 모든 힘을 다하여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을 지금 여기에서 무조건 신뢰하며 받아들이고 의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212 무함마드가 유일하신 한 분 하느님께 복종 할 것을 요구 한 것은 카바를 중심으로 한 모든 제의와 상업 행위에 위협이 되었다. 무함마드의 메시지는 다른 남신들과 여신들을 섬겼던 그곳의 종교적 풍습만이 아니라 순례 사업과 시장을 위협했고, 그로 인해 메카의 재정 체계와 경제 체계, 메카의 대외 정치와 무역 정책, 기존의 모든 종교·사회·정치기구를 위협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부족의 성스러운 전통과 내적인 일치와 외적인 명성을 통째로 위협했다.
215 622년 9월 24일 그들은 메디나 오아시스의 남쪽에 있는 꾸바에 도착했다. 이것을 예언자의 히즈라(이 말은 망명, 혹은 이주라는 뜻이다. ‘도주’가 아니다)라고 부른다. 이것은 그저 가볍게 장소만 바꾼 사건이 아니라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그렇다! 이것은 어떤 다른 세계로 넘어 감, 극적인 전이였다. 부족 구성원끼리만 긴밀하게 연대하는 세계가 아니라 신앙 공동체의 세계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다신주의가 아닌 이슬람의 세계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히즈라가 예언자 개인에게만이 아니라 이슬람 전체에게 결정적인 전환의 순간이었기 때문에, 무슬림 전통은 622년 (7월 16일)을 새롭게 열린 이슬람력의 원년으로 삼았다.
226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은 메카를 향한 무슬림들의 순례가 시작되는 지점에 있는 인물이며, 모든 순례 체계의 영적인 지도자다. 물론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메카와 카바의 근원을 아브라함과 연결 짓는 모든 진술은 역사적 검증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다른 한편 이것은 역사적인 논란의 대상이기도 하다.
242 무함마드의 삶을 추동하는 것은 종교적 메시지의 선포였으며, 자신이 하느님께 사로 잡혀 그분의 보내심을 받았다는 경험이었다.
242 그는 종교적인 동기에 기초하여 개인의 삶과 공동체의 삶을 새롭게 구성하고자 했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당시로서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폭력적인 방식을 활용했다.
242 무함마드는 극도로 현실적인 정치가였으며,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 및 자기가 속한 지역의 현실에 알맞은 정책을 구현하려고 했다.
252 만일 그렇다면 그 교회는, 또한 모든 그리스도교 교회는, 모든 무슬림을 한 분 하느님을 향한 신앙으로 인도한 유일한 사람도 “존경심을 가지고 바라봐야”한다. 당혹스럽게도 그의 이름이 위의 선언문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슬림으로 하여금 한 분이신 하느님을 경배하도록 만든 사람은 오직 그 한사람이며, 하느님은 오직 그를 통해서만 “인간에게 말씀”하셨다. 그는 바로 예언자 무함마드다.
253 유대교인 중에서 무함마드가 예언자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아예 처음부터 부정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히브리 성서에도 아주 다양한 예언자들이 있으며, 그들 모두가 인간적인 면에서 모범적인 사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고민해봐야 한다.
253 그리스도인 중에서 그리스도 이후에 또 다른 예언자가 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아예 처음부터 부정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신약성서도 그리스도 이후에 활동했던 진정한 예언자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생각해봐야 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메시지를 증거하고 해석하며, 새로운 시대와 상황에 맞게 전달하는 사람들이었다.
253 무함마드가 자기 자신을 예수 이후의 참된 예언자로 이해하고 또한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자신의 메시지가 예수의 메시지와 일치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처음부터 교리적으로 반대해야 할 필요는 없다. 물론 그리스도 예수와 예언자 무함마드의 관계에 대해서는 세부적으로 아직 해명해야 할 내용이 있다. 그러나 무함마드에게 예언자의 호칭을 인정해주는 것은 그리스도인과 무슬림 사이의 상호 이해를 위해서, 특히 꾸란에 기록된 바 그가 선포한 메시지를 위해서는 상당히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3장. 핵심 구성 요소
255 무슬림이 된다는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먼저 하느님과 그 분의 사자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다는 것이며 그 다음으로는 네 개의 주요 의무를 이행한다는 것이다. 그 네 개란 의무기도, 사회적 기부, 단식, 위대한 순례다. 이것은 이슬람 신앙의 다른 네 개의 기둥이며, 이슬람이라는 집은 바로 이 다섯 개의 기둥 위에 서있다.
258 세례도 필요 없고 고해성사도 필요 없다. 무슬림은 어떤 명시적인 죄의 고백을 통해서 자신의 죄를 극화하지 않고 그저 씻는 행위를 통해서 하느님 앞에 나아가기도 할 수 있다.
258 이슬람에는 사제 계급과 사제 서품이 없고 제단도 없다. 앞에서 기도를 선창하는 사람, 혹은 존경받는 평신도 이맘이 있을 뿐이다.
272 무슬림의 단식은 식사 시간에 한정된 절제가 아니라, 해가 떠오를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하루 종일 절제를 실천하는 것이다. 물로 입을 헹구거나 담배를 피우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이 단식은 특정한 날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한 달 내내, 즉 라마단 달 내내(30-28 일) 실천하는 것이다. 라마단 달은 이슬람 음력의 아홉 번째 달로서 모든 계절에 올 수 있다는 사실이 단식을 어렵게 만든다.
제III부 역사
1장. 초기 이슬람 공동체 패러다임
292 무함마드는 고대 아라비아의 가족, 씨족, 부족 체제를 새로운 공동체의 토대로 활용했다. 그러나 이 혈연 관계는 상대화됐다. 더 정확히 말하면, 새로운 종류의 친족 관계를 통해 확대되고 변화된 것이다. 부족 연합으로부터의 이탈(히즈라)은 새로운 시대의 막을 열었고, 이 새로운 친족 관계가 결국 과거의 혈연관계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단번에 확실히 보여주었다.이 새로운 친족관계란 바로 신앙의 친족관계다.
292 그 당시만 해도 아랍은 고도로 문명화된 세계의 주변에 살면서 문화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그다지 조직화돼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비잔틴 제국이나 사산 페르시아 제국과 연결된 지역을 제외하면 아랍권은 하나의 종교나 하나의 제국에 의해 통일된 적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슬람 이전의 아랍 세계는 정치적·사회적 응집력이 매우 약했다.
310 로마 가톨릭 모델은 아우구스티누스와 여러 교황의 영향을 받아 교회(하느님의 나라)와 국가(세상 나라) 사이의 확실한 대립을 가정하기에 이르렀다(P III). 그런데 이슬람 공동체의 경우는 처음부터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이슬람 P I). 이슬람 신앙 공동체가 하나의 핵심이며, 이슬람 국가는 그 핵심을 중심으로 세워진 나라다. 이슬람에서 종교 기관과 국가 기관은 원칙적으로 동일하다. 종교 공동체와 정치 공동체는 하나의 ‘하느님 나라’다 그러므로 국가와 종교의 분리는 없다. 그 둘은 따로 분리 될 수 없는 통일체로 융합되어 있다. 이 이슬람 국가는 철저한 신정정치, 즉 하느님의 통치를 따르는 국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역사 속에서도 정치 조직과 종교 공동체의 통합을 추구하던 모델(교회국가 바티칸, 뮌스터의 세례자 제국, 칼뱅 시대의 제네바 등)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311 근본적으로 무슬림은 전쟁을 정치의 수단으로서 긍정했을뿐 아니라, 필요한 경우에는 주저하지 않고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이슬람은 처음부터 전투적인 성격, 하느님의 투사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슬람은 초기 그리스도교보다는 초기 유대교에 가까우며, 그시기 유대교의 ‘야훼 전사들’과 닮았다.
313 처이슬람의 첫 번째 패러다임은 한편으로 꾸란의 급진적인 종교적 자극과 가치관과 요청의 결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 그런 새로운 상황에 의해 감싸이고 겹쳐져 버린 과거의 아랍·베두인 부족 문화가 처한 상황의 결과이기도 하다.
318 칼리파 제도를 도입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서 그것을 선포하고 이행했던 예언자가 직접 지도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이제 예언자의 대리인(칼리파)이 지도하는 시대가 되었다. 하느님의 새로운 계시를 통해서 합법성을 부여받는 일은 이제 더 이상 없다. 이제는 예언자가 아닌 지도자에게 인간적인 권위, 파생된 권위가 부여됐을 뿐이다. 그는 하느님의 ‘대변자’가 아니라, 기껏해야 하느님의 ‘대화 파트너’ 정도일 것이다.
325 무슬림들이 대제국의 문화 지역과 접촉하고 또한 대결하는 빈도가 잦아지면서, 이슬람 초기 공동체의 지도력도 이제는 새롭게 정복된 지역, 즉 시리아·이라크·이집트에 관심을 집중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듯 외적인 팽창이 점진적으로 초기 이슬람 세력의 발전에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336 비무슬림은 이슬람으로 개종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정복자들에게 세금(지즈야)을 내야 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이슬람을 일단 아랍의 종교, 아랍인들을 위한 종교로 이해했다. 그리고 그런 입장에는 한 동안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경제적인 이익을 챙기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점에 있어서 무슬림들은 거의 주저함없이, 현명하게 행동했다. 적절한 순간에는 협상을 해야 한다는 사실은 예언자가 무슬림들에게 가르쳐준 바였다.
336 무슬림 지도층은 피정복민의 지리적 여건과 상황에 따라 각각 다른 계약을 채결했고 항복한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상당히 괜찮은 계약 조건을 제시했으며, 과거의 비잔틴 지배층을 (또한 사산 왕조의 지배층을) 새로운 체제 속으로 흡수했다.
357 칼리파에 대한, 이슬람 공동체의 지배 모델에 대한 세 가지 다른 이론 때문에 움마의 통일성이 깨졌다. 세 개의 당파(피라끄)가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357 오늘날 무슬림의 대다수(거의 90 퍼센트)는 순니파다. 순니파는 ‘순나’, 즉 전통과 관습을 지키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들은 이슬람 공동체의 투표, 혹은 능력있는 대표자들의 투표를 통해서 예언자의 후계자를 뽑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357 시아파는 소수다(오늘날 무슬림의 약 10퍼센트. 이란, 이라크, 레바논에 많다). 그들은 예언자 무함마드가 직접 보여준 신적인 소명, 그리고 그 소명의 선포가 예언자의 후계자를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오직 알리만이 예언자의 후계자라고 말한다.
2장. 아랍 제국 패러다임
363 4세기부터 다마스쿠스는 비잔틴 제국의 속주 시리아의 수도였으며, 제국의 동쪽을 수호하는 사령부도 다마스쿠스에 있었고, 주교가 자리하는 교구의 수도이기도 했다. 그랬던 다마스쿠스가 634년부터는 아랍인의 것이 되었고 무슬림 총독이 다스리는 시리아 지역의 수도가 됐다. 그런데 이제 이 다마스쿠스가 새로운 아랍왕조의 중심지가 되었다. 새 왕조는 정확하게 89년 동안(661~750) 거대한 아랍 제국을 통치하고 열 네 명의 칼리파를 배출하게 된다.
364 우마이야 가문 칼리파들의 주요 관심은 이슬람이라는 종교와 신학이 아니라 새로운 제국을 정치적으로 지도하는 것, 그리고 행정 체계를 조직화하는 것이었다.
364 사막의 도시인 메디나 대신 시리아의 문화 도시 다마스쿠스가 이슬람·아랍 제국의 정치적 중심지가 됐으며, 동시에 이슬람 세계의 수도가 되었다. 바야흐로 도시 국가가 베두인 족을 누르고 승리를 차지한 셈이었다.
377 알리의 투쟁으로 인해 발생한 분열, 즉 이슬람 공동체의 분열이 이로써 더욱 악화됐다. 파띠마의 아들, 영원한 순교자로 추앙받는 후사인의 처절한 죽음으로 인해 이 분열은 거의 영속적인 것이 된다.
377 이제 시아파는 이슬람 내부의 독자적인 교파로서 독자적인 신앙고백과 예배 의식을 확고히 했다. 알리는 시아파의 참된 칼리파요 이맘이며, 후사인은 이 모든 것의 영원한 증인으로 추앙된다.
377 그러므로 시아파를 아랍 제국 패러다임(P II) 내부의 반대파 운동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380 원래 마흐디라는 호칭에는 종말론적인 의미가 없었고, 다만 합법적인 칼리파 혹은 이맘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나 무함마드 이븐 알 하나피 야가 죽은 뒤 쿠파의 시아파 사람들 가운데는 무크타르가 선포한 마흐디는 죽지 않았으며 다만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세상 어느 곳엔가 있을 뿐이라는 말을 확고히 믿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380 참된 이맘의 ‘사라짐, 부재, 재림’에 대한 사상이 8 세기 이후 시아파에서 발전됐지만, 순니파 안에서도 처음부터 그런 사상이 존재했다. 이제 이것은 확실히 메시아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옛 시대의 정의를 다시 수립할 세상적인 지배자의 도래에 대한 신앙이 된 것이다. 그래서 많은 무슬림이 오늘날까지도 마흐디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
388 행정 개혁의 목표도 아랍화·이슬람화였다. 행정적인 영역에서 그리스어와 페르시아어 대신 아랍어를 공용어로 채택한 것은 아랍어를 천박하고 난삽하고 발음하기 까다로운 베두인의 언어쯤으로 여겨 경멸하던 비무슬림들에게 아주 상징적인 변화였다. 이제는 관청에서 일하는 사람들, 즉 그리스어나 페르시아를 썼던 교양인들도 오로지 아랍어로만 의사 소통해야 하는 것이다.
389 그리스어와 페르시아어의 영향으로 인해 아랍어 자체도 변화 됐으니 아랍어의 어휘, 몇몇 문법 규칙, 구문론과 문체까지도 – 꾸란은 제외! – 그 영향을 받았다. 압드 알 말리크의 아들이자 계승자인 왈리드조차도 꾸란의 정통 아랍어를 구사할 수 없었으니 이것이 그 아버지에게 커다란 슬픔이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여기서 오늘날까지도 이슬람의 큰 문제 가운데 하나가 불거져 나온다. 정통 아랍어는 큰 행사 때만 사용하고 그 밖에는 문학 작품에서나 등장한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꾸란이 계시의 문서로 선포되는 것은 사실이나, 대중은 꾸란의 고색창연한 언어 때문에 그 뜻을 어렴풋하게만 이해할 수 있다.
403 한 마디로 말하자면, 과거 가부장제적인 통치(P I)가 제국의 정부(P II)로 변모한 것이다. “과거의 칼리파 직은 개인적 차원의 지배체제로서 칼리파 개인의 종교적 혹은 가부장적 특성에 크게 의존돼 있었다면, 새로운 칼리파 직은 개인적인 면모와 무관한 제도였다. 우마이야 왕조는 칼리파 직을 하나의 국가정권으로 변모시켰다. 동시에 그것을 생명력 있게 보존했으며, 제국이라는 상징과 이슬람의 유산을 하나로 체현해냈다.”
446 이슬람과 유럽 근대성의 대결이 첨예해지고 그와 더불어 19세기 이슬람 정체성의 위기가 정점에 달했을 때 다마스쿠스, 베이루트, 카이로의 무슬림들은 다시금 아랍적인 것에 마음을 모았다. 갱신의 운동은 일단 초창기의 아랍어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고 중세의 고전 표준 아랍어를 연구하고 현대화하려는 노력이 활발해졌다. 이슬람 갱신 운동은 그런 노력을 통해 아랍적인 문화 국가를 세우고자 했던 것이다.
446 그런데 20세기 초반이되면서 문화적 아랍주의와 나란히 정치적인 아랍주의가 형성됐다. 아랍어를 사용하는 모든 사람은 공통의 위대한 역사에 입각하여 정치적으로도 하나의 유일한 아랍 국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럽의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또한 범오스만주의와 범투르크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범아랍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아랍 문화, 아랍 언어, 아랍 종교를 육성하고 그것을 토대로 모든 아랍 국가의 대대적 인 통일을 이루고자 하는이 운동은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우마이야 제국의 이미지를 품고 있었다.
3장. 고전적 이슬람 세계 종교 패러다임
452 바그다드는 아랍인의 도시가 아니라 – 호라산과 이란이 패권을 쥐게 된 상황에 걸맞게 – 페르시아 스타일의 도시였다. 바그다드는 동부이란의 모범을 따라 원형으로 설계 됐고 정밀한 기하학 원리를 따라 지름 23 킬로미터로 기초가 놓였으며, 그 중앙에는 화려한 모스크와 칼리파 궁정이 자리했다. 그 중심부에서 네 방향으로 네 개의 길이 뻗어나가 네 개의 성문에 닿았다. 이로써 도시는 정확하게 4 등분됐는데 이것은 우주적 지배권을 상징적으로 명시하려는 것이었다.
453 바그다드는 그 당시 세계에서 (중국을 제외하고는) 가장 크고 빛나는 도시였다. 세로 7킬로미터, 가로 6킬로미터가 넘는 면적에 30~50만 명의 주민이 사는 도시였다. 10세기에는 그 인구가 150만에 달했을 것이다. 바그다드는 수백 년 동안 무슬림 세계의 문화적 중심지였는데, 이미 9세기 초반에 그런 대도시로 성장해 있었다.
454 제국의 개혁은 의도적으로 아랍적 토대가 아닌 이슬람적 토대 위에서 진행됐다. 압바스 왕조의 칼리파들은 종교인으로서의 자의식을 바탕으로 모든 무슬림을 포괄하는 움마의 지도자, 모든 민족을 포괄하고 통일하는 보편적 종교 이슬람의 투사가 되려고 했다.
456 아랍 문화는 보편적 유산이 됐다. 아랍 ‘나라’가 무너졌다고 해서 아랍 문화도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랍 문화는 모든 무슬림이 공유하는 국제 문화가 됐다. 아랍어는 사라지지 않고 꾸란의 언어, 곧 이슬람의 언어로 자리를 잡았다. 점점 더 많은 비아랍인들이 아랍어를 ‘링구아 프랑카’, 즉 상호 의사 전달을 위한 ‘타협 언어’로 사용했다. 이란 사람들조차도 아랍어 문자를 받아들였고 지식인들의 대화에는 아랍어가 쓰였다. 시문학만큼은 페르시아어를 사용했다.
457 이슬람의 종교는 세계 종교가 됐다. 아랍 나라의 해체로 이슬람이 손해를 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이슬람은 더욱 강화됐다. 이슬람은 아랍 문화의 토대일 뿐 아니라, 평등한 권리에 기초하여 인종적 족쇄를 끊어 버린 종교가 됐다. 이제 이슬람은 이집트인과 베르베르인,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 중앙 아시아인과 투르크인 모두의 종교였다.
481 칼리파는 학문의 전문가들과의 협력에 의존했다. 이제 그 신성한 법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일은 얼마 전부터 막강한 세력으로 성장한 두 종류의 독립적 조합에게 귀속된 일이었다. 하나는 종교학자들(울라마)의 조합이었다.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학문으로서의 법과 그 원리였다. 다른 하나는 법률학자들(푸까하)의 조합이었다. 그들은 개별적인 법률 규정과 그것의 해결법을 주로 연구했다. 그들의 법률 토론 과정을 통해 압바스 왕조 치하에서 그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법(주로 제의 관련 법, 사법, 형법)이 형성됐으며. 전통 지향적인 사고를 하는 무슬림들에게는 오늘날까지도 이 법의 효력에 변함이 없다. 이 거룩한 법이 바로 샤리아, 즉 꾸란에 의거한 법률 규정의 총체다.
536 신도들의 스승을 자처한 칼리파 마문은 바그다드에(그 옛날 비잔틴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그리스도교의 중심 로마에서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본격적으로 국가 종교 재판을 도입했다. 그것은 이슬람 사상 처음있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바그다드의 경찰서장의 지휘 하에 벌어지는 이 대대적인 사업을’미흐나'(신앙 조사)라고 불렀다.
544 꾸란 이해와 관련하여 이 새로운 종합은 꾸란의 영원성에 대한 신앙이 꾸란의 역사성에 대한 신앙을 누르고 승리한 것을 의미한다. 무타질라파는 꾸란이 창조된 실재, 즉 하느님이 창조하신 말씀에 불과하다고 믿었다. 꾸란은 (그 스타일 때문이 아니라 그 내용 때문에) 독창적인 기적이요, 예언자가 하느님의 사명을 받은 분이라는 사실을 증언한다.
546 전통적인 것과 합리적인 것 사이의 위대한 싸움에서 아샤리의 학파, 즉 아샤리파가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써 순니파 신학의 합리적·전통 적 형태가 실현됐다. 1세기 전에 이슬람 법의 영역에서 알샤피이가 이룩한 성과를 이제 신학의 영역에서 아샤리가 이룩해냈다. 그것은 신학을 전통주의의 원칙 위에 세우는 것이었다. 훗날 알 가잘리는 이 신학을 발전시켜 순니파 이슬람의 대표적인 교리 체계를 완성한다. 그리고 이 교리는 오늘날까지도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553 압바스 가문의 혁명으로 시작된 세계 종교 패러다임(P III)은 칼리파의 위기, 군대와 관료정치의 위기, 경제의 위기로 인해 정치적 종말을 맞았다. 바그다드는 계속해서 칼리파의 거처로 남았지만, 제국의 주인은 더 이상 칼리파가 아니었다. 중앙으로 집중됐던 힘이 지방으로 흩어지는 경향이 점점 강해졌고 결국은 여기 저기에 제후국이 생겨났다.
554 바그다드는 그 당시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세계의 정신적 중심이었다. 그 시대를 감성적으로 미화하는 경향은 어디서나 접할 수 있으나, 그래도 세 가지 요인 만큼은 지속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다. 첫째는 그 시대가 발전시킨 이슬람의 신학이요, 둘째는 그 시대가 풍요롭게 구축해 놓은 이슬람의 법이요, 마지막은 그 시대가 기초를 놓은 국제 도시 수준의 이슬람의 문화다. 그리고 이 패러다임이야 말로 – 여러가지 부정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 탁월한 다문화 사회를 구성했는데, 신앙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같은 시기의 로마 그리스도교나 비잔틴 그리스도교에 비해 여러 가지 면에서 관용적 인 사회였다.
4장. 울라마와 수피의 패러다임
562 동쪽을 향한 – 비잔틴 교회를 복종시키고 예루살렘을 정복하기 위한 – 대규모 전쟁을 가장 먼저 적극적으로 계획한 사람은 절대주의적 교황권의 선구자인 그레고리우스 7세(힐데브란트 1073-1085 년 재위)였다. 그가 이런 계획을 시작하고 20년 후 실제로 제1차 십자군 원정이 일어났다.
563 그레고리우스 7세가 죽고나서 십 년도 되지 않아 제1차 십자군 전쟁(1096~1099)이 일어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571 투르크인의 헤게모니는 압바스 왕조가 몰락하던 시기에 이미 발아하기 시작했다. 중앙아시아의 스텝 지역 민족인 투르크인은 페르시아에서 하나피파 성향의 순니파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압바스 왕조가 모집한 최초의 용병이 바로 투르크인이었으며, 거대한 동쪽 제국의 지배자였던 가즈나 왕조도 투르크인이었다. 11세기 전반부에 페르시아 전체를 장악한 셀주크 왕조도 투르크계 유목민이었다. 셀주크 왕조는 1055년에 바그다드까지 정복하여, 부이 왕조의 꼭두각시 칼리파를 셀주크의 꼭두각시로 만들었다,
576 이미 945년에 정치적으로 종말을 맞은 압바스 왕조 칼리파의 패러다임은 중앙아시아 몽골 부족의 침입으로 1258년 확실하게 끝장났다.
576 지금까지 대부분의 이슬람 통치자들은 자신의 출신을 예언자 무함마드와 연결시키려고 애썼는데, 이것은 계보를 소중히 여기는 전통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계보의 중요성이 사라져 버렸다. 새로운 술탄들은 대개 아랍인이 아니었고, 이슬람 전통에 기대어 자신의 정권을 합법화하려는 생각도 없었다.
576 이슬람 사회와 종교는 처음에는 아랍인, 그 다음에는 페르시아인이 주도했으나 이제는 여러 인종 집단 중에서도 특히 투르크인들이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됐다.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는 폐허가 된 이라크에서 서쪽으로 바그다드에서 다마스쿠스와 카이로로, 그 후에는 이스탄불로 옮겨졌다. 하나의 이슬람 제국이라는 정치 기관은 사라지고 ‘이슬람 문화권'(‘이슬람 세계’)만이 남았다.
580 이 건물은 바로 마드라사(학교)다. 메드레세, 메데르사라고도 불린다. 이 건물은 이슬람의 고등교육기관으로서 지금부터 이슬람의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나 나중에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정체된 모습을 노출하면서 그 명성과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고 16세기 이후로는 쇠락의 길을 걷는다. 어쨌든 마드라사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상징이었다.
600 이슬람 신비주의자는 이러한 무조건적 신뢰, 혹은 신뢰를 통해 하느님께 헌신하는 것이 하느님의 유일성(타우히드)을 인정하는 데서 나온다고 봤다는 사실이다. 어떤 피조물을 하느님 곁에 둔다든지, 남몰래 다신주의를 신봉한다든지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 분 하느님의 지혜와 권능과 자비는 모든 것을 포괄하며 모든 것을 움직인다.
609 10~14세기, 고전적 이슬람 이후 칼리파 부재의 패러다임(P IV)에서 수피 운동은 법률 학파의 발전과 나란히 문화를 규정하는 중요한 세력으로 성장해서 패러다임의 한 구성 요소가 될 만큼의 무게를 지니게 됐다.
658 알 가잘리가 꾸란의 매개자, 즉 무함마드를 빛과 같은 존재, 그 누구와도 동일시 될 수 없는 존재로 묘사하고, 무수한 말과 행동에 나타난 예언 자의 모든 미덕을 칭송한 것은 사실이다. 그로써 그 예언자가 하느님께 이르는 ‘길’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잘리는 그 예언자도 단지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예수가 인간으로서 하느님께 이르는 길이 되신 것에 비중을 두고 후대의 어떤 교의학자보다도 예수의 가르침과 삶, 고난을 많이 다루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이 그리스도가 단지 인간이 아니라 (존재론적 의미에서) 하느님의 아들이며, 그러므로 신인이라는 사실을 맨 처음부터 증명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659 가잘리는 두 본성을 지닌 신적인 인간을 도저히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정리의 입장에서 볼 때(하느님의 하나의 본성에 대한 스물 일곱 개의 질문에 이어) 하나의 신적인 본성 안에서 세 개의 위격을 나누는 것에 대한 열여섯 개의 정교한 질문은 불필요한 것일뿐 아니라 하느님의 유일하심에 대한 신성모독일 것이다.
660 새로운 시대의 종교학자, 신학자, 법학자라고해서 그 문장에 침윤한 유산을 새롭게 바꿀 수는 없었다. 다만 새로운 상황에 맞게 그 유산을 새롭게 해석하거나 증가시킬 수는 있었다. 이렇게 해서 예언자 언행 (하디스)을 기록한 여러 가지 전승이 생겨났는데 거기에는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말씀이 있는가 하면 또 새롭게 나타난 말씀도 있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바로 공식적인 하디스학이었다. 이 학문은 ‘건강하지 않은’ 전통과 ‘건강한’ 전통을 구분하는 것을 자기 과제로 삼았는데, 건강한 전통은 결국 후대를 위하여 여섯 개의 위대한 경전 모음집으로 보존됐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9세기 중반부터는 이 건강한 전통의 몸체가 본질상으로는 불변의 형태로 고정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하나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시작되어 (P IV) 예언자의 언행과 관련해 더 이상이 새로운 전통은 허용되지 않고 ‘자율적인 적법 결단의 문’도 거의 닫혀버린 것 같았을 때, 신학이건 법학이건 그 종교가 경직화되는 위기가 찾아왔다.
665 이슬람 철학의 실질적 기원은 그리스 철학자들의 작품번역이다.
665 바그다드의 도서관은 플라톤의 저작 번역서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저 번역서를 확보하고 있었는데 (물론 라틴어 번역이 아니라 아랍어 번역) 문헌학적으로 상당히 정밀한 번역이었다. 무슬림 독자를 위해 그런 모범적인 번역 작업을 한 사람들, 즉 그리스어와 시리아어로 기록된 텍스트를 아랍어로 번역한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주로 시리아의 그리스도인 학자들이었다.
683 코르도바의 경우가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은 – 나중에 그리스도인이 재정복한 톨레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지만 – 세 개의 아브라함 종교의 신앙인들이 각각의 신학적 핵심 내용에서는 차이가 확연했음에도 큰 문제없이 공존할 수 있었으며, 각각의 종교가 규정하고 있는 삶의 형식을 고수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683 스페인 역사학자 미켈 데 에팔자는 8세기 초부터 16세기 초, 그러니까 무슬림과 유대인에게 강제 개종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 세 종교의 공존을 한 마디로 이렇게 요약했다. “하나의 지배적인 종교와 두 개의 인정받는 소수 집단.” 여기서 우선 지배적인 종교란 이슬람을 말한다.
688 아랍·이슬람 철학은 샤리아 이슬람과 수피 이슬람과 맞설만한 힘이 없었다. 철학은 공식적 인정을 받는 규범 지위를 얻지 못했고, 지속적인 구조나 기관, 예컨대 대학 내의 한 분과로 발전하지도 못했다.
688 단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미 12세기에 아랍·이슬람 철학에게 작별의 시간이 찾아왔다.
688 바야흐로 13세기는 그리스도교 스콜라 철학의 시대가 됐다! 아베로에스의 철학은 이슬람에서도 역사를 만들지 못했는데, 오히려 그리스도교에서는 큰 역사를 만들게 됐다. 그의 저작이 특히 라틴어로 (그리고 히브리어로) 번역되어 전해졌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의 철학이 아랍·이슬람 철학에서는 마지막 장을 의미한다면, 중세 그리스도교 철학에서는 하나의 시작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702 중세 초기의 이슬람에 스며있던 엄청난 정신적 생명력은 중세의 전성기에는 파리, 프랑스, 이탈리아 등 그리스도교 유럽의 여러 도시들로 옮겨 간 것 같다. 바그다드와 압바스 제국의 문화 유적과 문화재는 몽골 군대에 의해 파괴 됐지만, 유럽에서는 철학과 신학과 학문과 예술이 교회 및 국가 기관과의 마찰에도 불구하고 창조적인 방식으로 전개 될 수 있었다.
5장. 이슬람 근대화 패러다임
705 1960 년 이후로 아랍 세계는 사하라 아프리카를 제외한 모든 개발 도상국에게 추월당한 신세가 됐다. 21세기 초에는 아랍 세계가 국제적 경쟁에서 낙후된 상태라는 사실을 아랍인들 스스로가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아랍의 저명한 학자, 정치가들이 작성한 2002년 유엔 <아랍 인간 개발 보고서>에 의하면 아랍의 22개국은 (교육 및 보건 분야에서 엄청난 발전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통계 대상 나라들 중에서 최하위를 기록했다.
708 이슬람의 뒤처짐은 유럽의 근세 때 시작된 것이 아니라 12세기에 이미 시작됐다. 그 당시의 이슬람이 철학을 내팽개치고 그와 더불어 세속적 학문의 자율성을 포기한데서 이미 시작된 것이다. 반면 서구 그리스도교에서는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 학문적 자율성의 자기 주장이 내내 가능했다. 이미 그 당시부터 이슬람 내부에서는 사유와 행위의 새로운 자유가 불가능해졌으며, 삶과 예술의 창조성이 불가능해졌다.
708 후기 중세에 이슬람이 몰락하게 된 까닭은 – 오랫동안 무슬림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 십자군 전쟁, 몽골의 침입, 식민주의와 같은 외적인 요인들 때문만이 아니다. 유럽 르네상스의 전야에 이슬람의 영역에서는 근대 학문의 발전이 근본적으로 차단된 것은 무엇보다도 내부의 메마름 탓이었으며, 이성과 자유에 적대적인 정통 교리가 철학과 신학을 눌러 이긴 까닭이었다.
711 어떤 특정한 패러다임 탓도 아니다. 각각의 패러다임은 어떤 특정한 시대에 알맞은 것이다. 다만 하나의 패러다임이 자기에게 알맞은 시대를 넘어서서 영속화한 탓이다.
711 종교가 철저하게 제도화 되면 종교적 패러다임은 높은 지구력과 생존력을 지니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이슬람에게나 그리스도교에게나 정신적 비생산성의 원인이 될 수 있다.
726 사파비조는 새로운 왕조로 성장하여 이란을 다시 통일하고, 1501년부터 1722년까지 이란을 다스렸다. 이스마일 1세는 1501년 타브리즈에서 스스로를 페르시아의 ‘샤’로 선포하고, 투르크만 군대의 도움을 받아 이란 전체를 정복했으며, 내적으로 지리멸렬한 나라를 통합하고 강력한 중앙권력하에 단일 민족 국가를 결성했다.
753 오스만제국의 개혁은 철저하게 위로부터의 개혁, 즉 통치자인 술탄에게서 시작된 개혁이었으며, 처음에는 오직 지도층에게만 해당된 개혁이었다.
753 이슬람 국가 오스만 제국은 차례 차례 근대화됐다. 이것은 중앙집권화와 합리화 그리고 사실상 세속화를 의미했다. 물론 술탄이 이런 개혁을 추진한 것은 이슬람을 거스르려는 게 아니라 이슬람을 위함이었다. 그 당시 오스만 제국은 서양의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거센 물결에 맞서는 이슬람 최후의 보루였으며, 그 보루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꼭 지켜내야 하는 것이었다.
769 투르크인들은 패전국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말은 차르 제국, 독일 황제 제국, 합스부르크 제국의 종말이었을뿐 아니라 오스만 제국의 종말이기도 했다.
769 오로지 아라비아 반도에 있는 사우드 왕조만이 엄격한 이슬람 와합주의 이념의 토대 위에서 1932년 독립 국가를 세울 수 있었는데, 그 나라의 이름이 사우디 아라비아다. 이제 아라비아가 다시금 세계사의 무대 위에 등장한 것이다.
771 이제는 투르크족이 아랍인을 다스리는 권리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아랍 지성인이 점점 늘어났다. 특히 비이슬람 공동체가 오스만 제국 내에서 동등한 법적 권리를 갖게 된 다음부터는 그런 현상이 더욱 두드러졌다. 그들은 새로운 시대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해법이 새로운 이데올로기, 즉 아랍주의라고 생각했다.
771 19세기에 이미, 무슬립 아랍인들을 대단히 혐오하는 그리스도교 아랍인들이 생겨나서 사실상 세속적인 아랍주의를 선전했다. 일단 레바논의 유럽식 근대화는 새로운 형태의 세속적인 아랍 의식을 양산했다.
제IV부 현재의 도전
1장. 여러 가지 패러다임의 경쟁
785 과격한 패러다임 전환, 즉 근대로의 변화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사례는 아마도 아랍 문자를 라틴 문자로 대치시킨 법령(1928)이었을 것이다. 아타튀르크는 이렇게 해명했다. 터키인의 80퍼센트가 문맹인데 그 까닭은 아랍 글자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모든 터키인은 단순한 라틴어 알파벳을 배워야 한다.
785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는 학교의 교과목에서 삭제됐다. 법령이 공포되고 몇 주 되지 않아서 모든 공무원은 문자시험을 봤고, 한 달 뒤에는 모든 신문과 책이 라틴 문자로 인쇄되어 나왔다. 그야말로 유례없는 문화적 변혁이었다. 이제는 일부 전문가들만이 1929년 이전에 나온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아랍어로 기록된 꾸란은? 무슬림의 거룩한 경전 꾸란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실용주의자요 무신론자인 아타튀르크는 거기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불신자와 싸울 때만 일단 전략적인 이유에서 종교를 도구화했을 뿐, 원칙적으로는 종교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786 이슬람은 아랍인에게 적합한 종교지 터키인을 위한 종교는 아니었다. 이슬람을 국가 종교로 규정하던 구절은 1928년 헌법에서 삭제됐다. 종교는 개인의 문제였고 무슬림이라는 사실도 터키인이라는 사실을 구별해주는 특징으로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새로운 터키 공화국에서 비무슬림 단체는 상당 기간 주변적 존재로서 명맥을 유지해 나갔다.
788 알 와합의 주장에 의하면, 수피즘은 정화의 대상이 아니라 억압의 대상이다. 그렇다! 심지어는 무함마드의 묘비와 초기 동지들의 묘비조차 파괴됐고, 시아파의 가장 중요한 순례지로서 오늘날의 이라크 카르 발라에 있는 후사인의 무덤조차 파괴됐다. 시아파 사람들은 오늘날까지도 이것을 용서하지 못한다. 이븐 압드 알 와합의 사상은 현대에 대한 모든 순응을 거부하는 엄격한 도덕주의로 이어졌다.
792 이란의 이슬람은 아라비아의 이슬람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 케말 아타튀르크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장군 레자 칸 팔라비는 1921년에 이미 카자크 여단장의 자리에 올라 테헤란의 실권을 잡았다. 1925년 그는 샤로 선출되어 즉위했다.
801 시리아에서는 이미 오스만 제국 시절부터 아주 매력적인 사상, 즉 모든 아랍나라를 하나의 나라로 묶는 ‘범아랍주의’ 사상이 발전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과 프랑스가 아랍세계를 정치적으로 분열시켜 놓은 상황에서,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하는 위대한 아랍 제국, 즉 우마이야 왕조의 제국은 특별히 시리아에게는 그야말로 눈부시게 아름다운 기억이었다.
805 이라크는 오늘날 인구 2,300만의 (인구의 97퍼센트는 무슬림이고 그 가운데 대다수는 시아파다) 비교적 젊은 국가이지만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고급 문명의 터전 위에 서 있는 나라다. 그 문명이란 인류에게 문자, 바퀴, 주간의 구분, 태양력, 최초의 계산 체계, 최초의 법을 선사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다. 이라크는 엄청난 역사를 지닌 ‘두 강 사이의 땅’에 위치해 있다. 고대에는 수메르인의 신전이 있는 거룩한 장소였고, 바빌론과 앗시리아와 칼데아 제국이 있었으며, 중세에는 사산 왕조와 우마이야 왕조와 압바스 왕조가 차지했던 땅인 셈이다.
810 사담 후세인은 이 전쟁 때부터 이슬람을 대대적으로 이념적 무기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물론 아랍 국가에서 독재자가 자기의 권력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종교를 남용하는 일은 자주 있었던 일이다. 그러나 호메이니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세속 정권들은 이슬람을 정치적으로 무가치한 것. 민속음악 같은 것으로 치부했다. 사담 후세인도 호메이니에 맞서서 자신을 무슬림으로 내세울 수 있었으나 그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하지만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 앞에서는 너무나도 쉽게 거룩한 도시(메카, 메디나, 예루살렘)의 수호자처럼 행세했으며, 이슬람을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이용했다.
2장. 무슬림들은 어떤 이슬람을 원하는가?
827 사우디아라비아의 봉건적 이슬람주의가 외부 세계에는 그리 강렬한 인상을 주지 못한 데 반해, 이란 호메이니 정부의 급진적인 이슬람주의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여주었다. 호메이니 정권은 처음에는 이슬람 세계에 희망을 일깨웠으며 열광적인 지지를 이끌어냈다.
3장. 근동 분쟁과 새로운 패러다임
841 무슬림과 유대인의 반목은 종교사의 숙명이 아니다. 무슬림과 유대인의 사이는 여러 가지 면에서 그 둘과 그리스도인의 사이보다는 가깝다. 그 둘은 수백 년 동안 함께 잘 지내곤 했다. 스페인이나 이스탄불이나 발칸 반도가 대표적인 예다. 무슬림과 유대인의 깊은 적대감은 20세기 이후에야 시작됐으며, 일차적으로는 종교적 문제가 아니라 근동의 분쟁, 즉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이스라엘 사람들과 무슬림들 사이의 정치적 분쟁과 관계된 것이다. 그 분쟁의 평화로운 해결 없이는 유대인과 무슬림의 관계도 본질적으로 개선되지 못할 것이다.
842 20세기에 이르러 유대교 국가주의 운동은 사방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먼 옛날 이스라엘 민족의 땅, 그러나 7/8세기부터는 특히 아랍인의 고향이었던 그 땅에 ‘유대인의 고향'(1917년 밸푸어 선언)을 세우고, 나아가 독자적인 유대인 국가를 건립하는 데 성공했다. 하나의 땅을 놓고 두 민족이 다투게 되고, 그로 인해 두 개의 국가주의가 대립하게 되면서 팔레스타인 분쟁이 시작됐다.
848 사실 시온주의자들 대다수는 세속주의적 성향을 띤 사람들이었으나 그 땅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하여, 그리고 다양한 국가·언어·문화·다양한 경제적 ·사회적 계층에 속해 있던 사람들을 그 땅에 이주시키기 위하여 종교와 성서를 다시 집어 들었다. 그것은 모든 유대인을 하나로 묶는 종교 전통, 2천 년도 훨씬 전에 상실된 국가적 통치권에 대한 기억, 다윗·솔로몬 대제국 때의 경계선을 의미했다. 고대 이스라엘이 불과 몇 십 년 동안만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그 통치권을 지금 다시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4장. 새로운 신학적 대화 모델
865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삼위일체론과 성육신론이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도 여러 가지 면에서 비판과 오해와 거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그 교리가 너무나 쉽사리 조야한 삼신론에 빠져버리기 때문이다.
865 그들이 보기에 그리스도교의 교리는 지나치게 복잡하면서도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 이슬람의 신학과 프로파간다는 꾸란이 인간의 이성과 합치되며, 심지어 최신 학문과도 완전히 맞아 떨어진다는 사실을 칭송하고 있다.
873 비록 꾸란이 성서의 고귀한 호칭을 사용하고는 있지만 꾸란의 그리스도론은, 정교회의 조직신학자인 다마스쿠스의 요한 이래로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이 이슬람에 맞서서 내세웠던 고전적 그리스도론, 즉 선재론·성육신론·양성론의 의미에서 발전된 그리스도론과는 완전히 다르다. 정작 그리스도교 교리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가 있는 호칭, 즉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꾸란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충분히 이해할만한 것이다. 다신주의에 젖어있던 고대 아랍부족들은 ‘하느님의 딸’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예언자 무함마드는 ‘하느님의 딸’이라는 호칭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도 부정적으로 보았다. 그런 호칭은 수많은 그리스·로마·게르만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처럼. 마치 신이 육체적 관계를 통해 혈통을 이어가는 것처럼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무슬림들은 이것을 하느님의 초월성에 대한 거부, 아니 그것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884 유스티누스의 기록에 의하면,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메시아/그리스도로 인정하긴 했지만. 예수가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가 메시아/그리스도로 선택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원칙적으로 율법과 할례를 지켰으며, 유대교적 성격이 강한 그리스도론을 대변했다.
884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예수 자신은 물론 예수의 처음 제자들,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대부분, 또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 선교사들도 모두가 유대인 정확히 말해 ‘유대 그리스도인’이었다는 사실이다(무슨 다른 가능성이 있는가?).
892 무슬림과 그리스도교인 사이의 대화를 위해서는 초기 그리스도교와 초기 이슬람의 친척 관계에 대한 깨달음에서 나온 여러가지 내용들을 활용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그리스도교는 꾸란의 예수 이해를 더 이상 무슬림 이단사상으로 간주할 것이 아니라, 아라비아의 토양 위에서 초기 그리스도교의 특성을 받아 들인 그리스도론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5장. 사변적인 물음
898 7세기 이슬람은 삼위일체 교리를 향해 비판의 화살을 집중시켰다. 꾸란은 그 교리를 격렬한 언어로 비판했다. “경전의 백성들아! 너희 종교의 한계를 넘지 말며, 하느님에 대해서는 진실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말라. 마리아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는 오로지 하느님의 사자이며, 하느님께서 마리아에게 전해주신 그분의 말씀이며, 그분의 영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예언자를 믿되, (하느님에 대하여, 그분이 하나 안에) 셋은 (셋이라고는) 말하지 말라! (그런 말을 하는 것을) 그만둬라! 그것이 너희에게 낫다. 하느님은 오로지 유일하신 하느님이다.
906 그리스도인이 무슬림을 제대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먼저 자기 자신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성서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렇게 성서에서 새롭게 출발하게 되면 그 즉시 알게 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유대 그리스도교 안에서, 나아가 신약성서 전체에서 아버지 하느님·아들 예수·하느님의 거룩한 영에 대한 신앙은 있지만 셋이면서 하나인 하느님, 즉 삼위일체에 대한 가르침은 없다는 사실이다. 사도신경도 삼위일체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하 지 않는다. 그렇다면 신약성서에서 본 아버지, 아들, 영의 관계를 무슬림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916 그리스도인은 거꾸로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봐야 할 것이다. 예컨대 나 자신은 한 분 하느님, 아브라함의 하느님 신앙을 위해서 히브리 성서 말고도 탈무드, 할라카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꾸란도 증언하는 하느님에 대한 공동의 신앙을 위해서 이슬람의 샤리아까지도 중요한 것으로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리스도인 스스로도 전통의 팽창, 때로는 괴상한 돌출 형태들은 너무 지나친 것이라고 간주하는 데,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제V부 미래의 가능성
1장. 이슬람의 갱신
953 그리스도교 달력으로는 21세기, 이슬람력으로는 15세기 초반에 ‘갱신'(타즈디드)이라는 말은 이슬람의 구호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아프리카로부터 근동과 중동을 거쳐 파키스탄,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까지 이슬람 전역에서 울려 퍼지는 단어가 되었다.
953 이제야 그들은 분명히 알게 됐다. 식민주의·유럽 중심주의의 근대 패러다임(P V)이 정치적으로 무너지고 탈식민주의·다중심주의의 근대 후기 패러다임 (P VI)이 시작되는 동안 이슬람의 부흥도 함께 일어나고 있었다.
2장. 이슬람 법질서의 미래
974 예언자적 종교 셋은 모두 정신적·종교적 갱신 운동으로 시작됐으나 그 것이 법과 제도로 구현되는 과정에서 경직된다. 오늘날이 세 종교의 미래는 중세 이후 지속되고 있는 이 경직성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990 꾸란 가운데는, 특히 메카시대의 꾸란에는 모든 인간의 신앙의 자유, 신 앞에서의 동등한 존엄성을 강조하는 본문들이 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본문, 무엇보다 종교의 자유와 관련하여 무슬림들이 항상 인용하는 본문은 꾸란 2장 256절이다. “종교에는 강요가 없다.” 근본적으로 종교의 다원성이 인정되고 있으므로 관용의 기초가 이미 마련됐다고 말할 수있 을 것이다. “주님의 뜻이 있었다면 지상에 있는 그들 모두가 믿음을 가졌을 수도 있었으리라. 그대는 강요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믿게 하려 하느뇨?”
995 꾸란의 천지 창조 이야기에서는 여성이 남자를 유혹하는 존재로 묘사되지 않는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도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이다. 인류 최초의 커플이 저지른 원초적인 죄 때문에 그들이 낙원에서 쫓겨나는 이야기는 꾸란에도 있다. 그러나 그 죄는 성행위를 통해서 태어난 모든 생명이 고스란히 넘겨받는 이른바 상속죄, 곧 원죄가 아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이 원죄설 때문에 생명이 태어나면 가능한 한 빨리 세례를 베풀었던 것이다. 사실 이런 식의 이론은 성서와는 전혀 무관하다. 창세기에도 신약성서(로마서)에도 그런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젊은 시절 마니교에 몸 담았던 위대한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의 창작물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995 그런데 성서적으로 아무런 근거가 없는 이 원죄 이론, 그 죄에 대한 – 역시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유래한 – 극단적인 공포, 그에 상응하는 구원 갈망이야말로 라틴 교회의 그 어떤 교리보다도 강력하게 성을 악마화하고 여성을 비하하는데 기여했다. 그런데 이런 식의 사유는 이슬람에게는 (그리고 유대교에게는) 너무나 낯선 것이었다.
1016 인권은 개인의 권리지 개인주의의 권리가 아니다. 인권은 어디서라도 사회적 차원을 전제하고 있다. 인권은 언제라도 인간 공동체의 맥락에서 파악돼야 한다. 그러므로 인권 선언은 개인의 사상·양심·종교의 자유만이 아니라, 종교 공동체와 공적 종교 활동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정은 “사회의 자연적이고 기초적인 단위이며, 사회와 국가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시민권과 정치적 인권과 나란히 사회적·경제적·문화적 권리도 그만큼 소중하다.
3장. 이슬람 국가 질서와 정치의 미래
1031 로마 가톨릭 패러다임은 16세기 종교개혁에 의해 비로소 그 기초가 흔들리게 됐으며 대대적인 패러다임의 전환과 그리스도교의 분열을 경험하게 된 반면, 압바스 가문의 칼리파 패러다임은 10세기에 이미 정치적 종말을 맞았고 13세기 몽골의 침입으로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뒤이어 급격한 지방화가 진행됐고 그 결과 이슬람 세계에는 더 이상 보편적 권위를 보장하는 신자들의 지휘관이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종교의 영역과 정치의 영역을 아우르는 ‘하느님의 대리자’ 시대는 지나가고 이제 처음으로 국가와 종교 엘리트, 혹은 종교 기관과의 분리가 이루어졌다. 라틴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식의 분리는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존재했으며, 종교 개혁은 이런 분리를 심화했을 뿐이다. 이제 신실한 무슬림은 자신의 삶속에서 일어나는 종교적 윤리적, 법적 문제와 관련하여 더 이상 칼리파나 술탄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울라마와 수피(P IV)를 찾았다. 이제 칼리파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이슬람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울라마와 수피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제2성전이 무너지고 그와 함께 제사장들도 사라져 버린 유대교가 오직 랍비의 존재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1036 유엔 인권헌장에 따르면 종교의 자유는 인권의 일부로서 신앙과 양심의 자유, 종교적 고백의 자유, 아무런 종교에 속하지 않을 자유, 사적으로 혹은 공적으로 예배 행위를 할 수 있는 자유를 포함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본질적으로 –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되물음이 필요한 중요한 지점인데 – 개종의 자유까지 포함된다.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종교 또는 자신이 직접 선택한 종교를 다시금 포기할 수 있는 권리 말이다. 해당 집단 내에서는 그것을 배교 혹은 배신이라고 부르곤 한다. 이것은 기성종교뿐만 아니라 사이비 종교 집단, 유사 종교집단, 비종교적인 세계관 지향적 집단에서도 매우 민감한 문제로 간주되며, 대개는 엄격한 처벌의 대상이다. 그리스도교도 이슬람도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전혀 관용을 보이지 않았다.
1042 구약학자들 대부분이 동의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에서는 왕조시대(P II)까지만해도 다신론이 만연해 있었으며, 하느님에 대한 신앙도 일단은 일신숭배 의 형태였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은 여러 신들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야훼를 한 분 하느님으로 경배했다. 다른 민족이 믿는 다른 신들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다른 신들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는 엄격한 유일신 숭배 사상은 바빌론 포로기 이후부터나 존재했다.
1052 현대의 무슬림 연구가들은 예언자의 전기를 근거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메카시대의 꾸란에서 지하드는 ‘전쟁’이라는 의미보다는, 논쟁을 할 때 요구되는 ‘노력’이라는 의미에서 많이 쓰이고 있으며, 무장 전투는 어차피 가망이 없는터라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메디나 시대의 꾸란에 기록된 최초의 계시에는 우상을 숭배하는 메카 사람들에 대한 무장 전투를 허용하는 대목이 있고, 이로써 자기 방어를 위한 ‘지하드’는 의무가 되었다. 이후의 계시에서는 ‘불신자들에 대항하는 신앙의 무력 전투’라는 의미로 ‘지하드’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음이 점점 분명하게 드러난다.
1058 자기 전통에 등장하는 호전적인 언어와 사건은 역사적으로, 즉 그 당시의 상황에 근거하여 해석돼야 한다. 그렇다고 그런 언어와 사건을 무작정 미화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세 종교 모두에게 해당한다.
1058 히브리 성서에 나오는 잔인한 전쟁, 곧 야훼의 전쟁과 무자비한 복수의 시편은 가나안 정복의 상황에 비추어서, 그리고 너무나 강력한 외세 앞에서 자신을 방어해야 했던 후대의 상황에 비추어서 이해돼야 한다.
1058 그리스도교의 선교전쟁과 십자군전쟁은 중세 초기와 중세 전성기의 교회이념에 근거한 것이다.
1059 전쟁을 독려하는 꾸란 구절은 메디나 시절 예언자가 처해있던 구체적인 상황과 메디나 꾸란의 특수한 성격을 반영하고 있다. 다신주의에 젖어있는 메카 사람들에게 맞서 싸울 것을 요구하는 구절이 오늘 이 시대에 폭력 사용을 정당화하는 구절로 오해돼서는 안된다.
4장. 이슬람 경제 질서의 미래
1067 9세기의 이슬람 사회는 무타질라파의 신학, 즉 학문과 자유의지를 강조하고 꾸란을 역사적 맥락 안에서 읽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그 신학을 정죄했고, 11세기에는 자율적인 철학 및 세속적인 발명 정신과 결별했는데 (이탈리아 르네상스에서는 바로 그 발명 정신 덕분에 새로운 도구들이 탄생했다), 이제 그런 선택으로 인한 부정적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1067 유럽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은 세속 직업을 소명이나 예배(하느님을 섬기는 것)로 여기고(마르틴 루터) 경제적 성공을 하느님의 은총의 징표로 여기면서 비교적 높게 평가했는데, 이슬람 세계에서는 그런 종교개혁이 일어나지 않았고, 이제 그것으로 인한 부정적 결과가 가시화된 것이다.
1067 이슬람의 경제는 유럽 경제시스템의 대등한 파트너가 될 수 없었다. 20세기가 시작되고 한참이 지날 때까지도 거의 모든 이슬람 국가들이 경제적으로 유럽 식민주의 열강에 종족돼 있었다는 사실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석유자원의 발견이 일부 아랍 국가에게 특별한 경제적 권력을 부가해주었지만, 그들은 그 힘을 자기 나라의 내적인 발전을 위해 충분히 사용하지 못했다.
5장. 이슬람 생활 질서의 미래
1091 꾸란은 여성의 옷과 관련하여 보편적인 종교적 의무 조항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예의 차원의 가이드 라인 정도만을 제공하고 있으니, 여기서는 베두인족 여성이나 노예 여성과는 구별되는 도시적 의복의 이상이 가장 예의바른 것으로 추천되고 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꾸란 구절이 후대에 오면서 점점 더 제한적이고 더 엄격한 방향으로 해석됐는데, 이는 일부 하디스 구절에 근거한 해석이었다.
1092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이슬람 의복, 특별히 여성의 의복은 그저 단순한 옷 이상의 무엇, 종교적 의미가 배제된 세속적 유행의 액세서리 이상의 무엇이다. 이 옷은 종교적·정치적 신념의 상징으로서 이슬람을 위한 의식적인 결단, 세속 국가에 대한 의식적인 저항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1096 머리와 목을 가리는 두건은 1979년 아야톨라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 이후에 비로소 이란의 모든 여성에게 부과된 종교적 의무 규정이 되었고 그와 더불어 여성의 종속적 역할도 어느 정도 확정지어졌다. 이로써 두건은 정치적 함의가 있는 상징의 지위를 갖게 됐다. 그것은 꾸란에 근거한 것으로서 ‘하느님 없는 군대’를 이기고 다시금 승리하는 이슬람의 상징이 됐다.
1122 다양한 종교의 신앙인들, 특히 아브라함을 선조로 둔 세 종교의 신 인들은 좀 더 자주 만나 함께 기도할 수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 물론 그들이 하느님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사실 그런 차이는 그리스도교 내부에도 존재한다. 하지만 하느님의 실재는 인간의 생각과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므로 다양한 하느님 이해 때문에 한 분 하느님에 대한 공동의 기도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 독자의 평 2
우리에게 이슬람…이라는 세글자는 매우 낯설다.
낯설다 못해 두렵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911테러, 오사마 빈라덴, 하얀터번 긴 수염, 히잡 너머에서 껌벅거리는 큰 눈… AK소총과 석유 그리고 OPEC…
이 책을 읽은 후, 이슬람이라는 세글자에 갇혀 있는 나의 고정관념이 얼마나 편협한 선입견이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나와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그들에게 진심으로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이슬람이라는 세글자가 인류 역사 1/3 이상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진데, 산업사회 이후로 급부상한 유럽과 미국 중심의 역사 교육으로 인해 나머지 절반을 외면했던 것이다.
저자는 이슬람의 형성과 발전과정, 이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방식이 역사적 흐름에 따라 어떤 변화를 겪게 되는지, 단순한 ‘이슬람’만으로써의 역사가 아닌 고대 근동 종교들의 패러다임 변천사를 병렬적 관계에 진열하여 조목조목 읇는다.
현재를 있게한 역사, 그로부터 펼쳐질 미래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천 페이지가 넘는 양의 서술은
저자의 역사적·문화적·종교적 지식이 얼마나 해박하고 방대한지 실감할 수 있게 한다.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는 근동 지방의 내전과, 전쟁에 대한 비판서는 독자들에게 충분히 도전이 될 만한 메세지를 가지고 지금도 서점가에 활발히 유통되고 있지만, 대부분 피상적인 이야기와 얕은 배경 지식만을 가지고 감정적인 호소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서적이 독자에게 제한된 지식을 제공하고, 왜곡된 선입견을 강화시키는 역효과를 유발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이슬람에 대한 교과서라 할 수 있다.
부디 이 책을 통해 이슬람에 대한 선입견을 벗어버리고,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있던 찬란하고 아름다운 역사의 일부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것을 위해 이 책은 충분한 양의 정보와 신뢰할 만한 전문적 지식을 제공하고 있다.
끝으로, 번역서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매끄러운 번역으로 긴 긴 책을 무리 없이 읽을 수 있게 해준 역자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며…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