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한스 큉, 과학을 말하다 : 만물의 시초를 둘러싼 갈등과 소통의 드라마
한스 큉 / 분도출판사 / 2011.7.12
‘한스 큉, 과학을 말하다’의 원제는 ‘만물의 시초’ (Die Anfang aller Dinge)다. 현대 가톨릭 신학계의 거물 한스 큉이 과학과 종교 간의 해묵은 갈등의 역사를 깊고 오래 들여다보고, 나름의 해법을 제시했다. 질문은 당연히, 모든 것의 태초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성경이 무슨 말을 하는지, 물리학과 생물학은 또 어떻게 말하는지, 아는 사람은 다 안다. 문제는, 과학과 종교가 각기 다른 언어로 말한다는 것이다.
지난 2천 년 동안 이 둘은 평행성을 그리며 달리다가 때로는 만나고 때로는 부딪쳐 깨지곤 했다. 골이 깊어 보였다. 그러나, 우리가 골이라 여기는 이것이 진짜 골일까? 그렇다면 이 골을 메울 수 있을까? 어떻게 메울 수 있을까? 이 책은 이를 둘러싼 각종 질문에 대한 신학자 한스 큉의 대답이다.

○ 목차
프롤로그 빛이 생겨라!
제1부 모든 것을 통합하는 하나의 이론?
1. 실재의 수수께끼
2. ‘시초’의 물리학
3. 무엇이 세계를 가장 깊은 곳에서 결속하는가?
4. 수학의 근거에 관한 논쟁
5. 실증주의만으로는 부족하다
6. 실재의 불확실성
7. 자연과학과 신학: 상이한 관점
제2부 시초로서의 신?
1. 시초 중의 시초를 묻는다
2. 자연과학은 종교 비판으로 차단되었는가?
3. 자연상수는 어디서 왔는가?
4. 우주의 정밀 조정에 대한 반응
5. 왜 무無는 존재하지 않는가?
제3부 창조냐 진화냐?
1. 생성의 시초
2. 신학의 저항
3. 신 없이? 신과 함께?
4. 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5. 성경과 창조
6. 궁극적 기원에 대한 신앙적 증거
제4부 생명의 기원
1. 생명은 언제부터 존재했는가?
2. 생명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3. 우연인가 필연인가?
4. 생명친화적 우주는 왜 하나뿐인가?
5. 기적
6. 신의 활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제5부 인류의 기원
1. 인간 신체의 발달
2. 인간 정신의 발달
3. 뇌와 정신
4. 뇌 연구의 한계
5. 인간 윤리의 기원
에필로그 만물의 종말
1. 종말에 대한 물리학적 가설
2. 종말에 대한 묵시록적 환시
3. 성서적 환시의 의미
4. 빛으로의 죽음

○ 저자소개 : 한스 큉 (Hans Kung)
현존하는 종교계의 최고 지성이라 불리는 한스 큉은 1928년 스위스에서 태어났다. 로마 교황청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뒤 1954년 가톨릭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파리의 소르본 대학교와 가톨릭 대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여 1957년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1959년까지 스위스 루체른에서 사목 활동을 하다가 1960년 독일 튀빙겐 대학교의 가톨릭 신학 교수가 되었다.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학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1979년 가톨릭교회의 전통 교리에 대한 비판이 파문을 일으켜 바티칸으로부터 신학 교수직을 박탈당했으며 이 일은 국제적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후 튀빙겐 대학교는 그를 신학 교수직이 아닌 개인적인 교회일치 신학 교수직에 임명하였다. 세계종교인평화회의 의장을 역임하였으며, 1996년 대학에서 퇴임한 후 세계윤리재단 회장으로 선출되어 여전히 충실한 가톨릭 신부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그의 저술과 강연은 가톨릭 신학의 영역을 뛰어넘어 세계 신학계 전반에 큰 도전이었다.
우리말로 번역된 그의 저서로는 『그리스도교』, 『왜 그리스도인인가』, 『교회란 무엇인가』, 『신은 존재하는가』, 『문학과 종교』, 『중국 종교와 그리스도교』, 『세속 안에서의 자유』, 『세계 윤리 구상』, 『믿나이다』, 『한스 큉, 과학을 말하다』, 『그리스도교 여성사』등이 있다.
– 역자 : 서명옥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교에서 기초신학 전공으로 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예수의 특이성: 정당한 혼합주의는 존재하는가?」 「예수 그리스도: 역사 안에서의 절대자? 한 역사적 실재의 보편적 의미에 대한 물음」 등의 논문을 썼고, 『성서에서 만난 변화의 표징들』 『올해 만날 50천사』 『50가지 성탄 축제 이야기』등을 분도출판사에서 옮겨 펴냈다.
○ 책 속으로
우주와 인간의 진화에 관한 온갖 다양한 관점에도 불구하고, 자연과학과 종교 간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을 하나의 새로운 공통점으로 극복하는 것은 정녕 근대에서 근대 이후로 이행할 즈음 꾸었던 백일몽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 p.15
1613년 베네딕도회 수도승 카스텔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갈릴레이는 성경과 자연과학적 지식의 관계에 대해 언급한다: 자연과학적 지식이 확고부동하고 성경 말씀에 모순된다면 성경을 새롭게 해석해야 옳지 않겠는가! — p.23
세계의 시초와 관련하여, 빅뱅과 세계 모형과 우주론에 대해 (자연과학적으로) 탐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유대인·그리스도인·무슬림과 기타 수많은 사람이 구약성경에 따라 거듭 고백하는 우주의 창조자 하느님에 대해 (신학적으로) 공공연히 논의하는 것이 오늘날 어떤 의미가 있을까? — p.174

○ 출판사 서평
왜 천지간에 존재자는 있고 무는 없는가? 만물의 시초에 대관절 무슨 일이 있었는가?
– 만물의 시초를 둘러싼 갈등과 소통의 드라마
한스 큉이 마침내 물질과 생명과 인류와 인간 정신의 기원에 대해 입을 열었다. 그는 이 시대 가장 도발적 신학자다. 우주 만물의 근원과 정면대결하면서, 그는 신학과 종교의 견고한 담벼락을 과감히 부수고 나와 물리학·수학·생물학·뇌 과학·고고학·인류학의 아성을 유유자적하게 넘나든다. 그러면서도 자기 정체성의 뿌리는 철학과 신학의 심연에서 중심을 잃지 않고, 과학과 종교의 올바른 관계 정립과 소통을 늘 새롭게 시도한다. 놀라운 것은 그가 빨아들인 정보의 방대함이 아니라, 그것을 토대로 쌓아 올린 비판적·통합적 사유 체계의 고유함이다.
신이 가설이 아니라 실재라는 사실은 과학적 증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이성적 신뢰 속에서만 긍정될 수 있다고 한스 큉은 주장한다.
그는 우주론의 근본 문제에 성경이 답을 내린다고 진심으로 믿지 않으며, 인간의 모습을 한 신이, 그것도 세상을 ‘엿새 만에’ 창조했다는 성경의 믿음을 고수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성경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과학자들에게는, 계몽된 이성이 우리를 오도한 적은 없었는지, 이성이 복된 진보와 동시에 살인 기계도 만들어 내지 않았는지, 삶의 자연적 기반을 파괴하지 않았는지 따져 물으며, 사물을 대함에 있어 자연과학적 시각과는 다른 또 하나의 시각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한스 큉, 과학을 말하다』는 종교적 신심도, 우주적 신심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과학자들은 종교를 통해 도전과 자극을 받고, 신학자와 믿는 이들은 물리학과 생물학의 찬연한 성과들이 세계와 생명과 인간의 기원에 새로운 빛을 던져 주었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또한 그 빛이 시대에 걸맞게 이해된 성경의 증언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비추고, 석연히 해명된 철학과 신학을 겸손한 자의식으로 현대인에게 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정확하고 사실적인 지식은 사물을 이해하는 전제 조건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큰 맥락을 파악하고, 전문 분야의 식견을 견지하면서도 전체를 놓치지 않으려면, 철학적·신학적 기초 지식이 필요하다. 이 책이 시류를 타는 과학적 주제들에 새로운 지식을 덧대기보다는, 차라리 과학의 근본 문제에 일관성 있고 신뢰할 만한 해답을 주었으면 하는 것이 한스 큉의 소망이다.

○ 언론소개
한스 큉, 과학을 말하다
한스 큉은 앞으로 과학과 신학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이에 대한 단서가 아래와 같이 나온다.
자신의 연구가 성경의 세계상을 위협한다는 사실을 갈릴레이 스스로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는 수학적 언어로 쓰인 자연의 책 뿐 아니라 ‘성경의 책’도 진지하게 받아드리고 싶었다. 1613년 베네딕도회 수도승 카스텔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갈릴레이는 성경과 자연과학적 지식의 관계에 대해 언급한다: 자연과학적 지식이 확고부동하고 성경 말씀에 모순된다면 성경을 새롭게 해석해야 옳지 않겠는가! – 23쪽.
한스 큉은 이언 바버를 참조하여 (Religion and Science) 뉴턴으로부터 촉발된 고전물리학은 소박한 실재론을 가정하고 있고,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은 소박한 실재론을 부정하고 비판적 실재론과 부합되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다른 철학자들이나 과학사가들도 이와 같이 설명하는지는 불분명하다. 게다가 물리학은 고전물리학을 폐기하지 않았다. 고전물리학은 여전히 실재 세계를 잘 설명하고 있으며 우리의 인지, 인식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물리학에서조차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의 극한을 고전물리학으로 설명한다. 각 물리 이론들의 연결 고리가 이렇다면 소박한 실재론과 비판적 실재론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연결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비판적 실재론의 층위 개념은 소박한 실재론을 포용할 수 있는 것인가?
물리학은 결코 뉴턴이 전제하는 것처럼 관찰자의 관점과 무관하게 세계 자체를 기술하지 않는 것이 명백해졌다. 물리학의 이론과 모형은 실재를 원자 차원에서 곧이곧대로 기술(소박한 실재론)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 가능한 구체적 현상들을 구성하는 세계의 구조를 상징적이고 선택적으로 묘사하려는 시도다. 이것이 물리적 실재를 단순한 관찰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험과 해석의 창조적 결합을 통해서 인식하려는 비판적 실재론이다. – 27쪽
과학철학에서는 토마스 쿤을 기점으로 실재론이 변화했다고 기술하지만, 사실 토마스 쿤 조차 물리학 박사 학위까지 가진 물리학자였다. 당시의 물리학으로부터 충분히 영감을 받았을 법하다. 그가 과학사 탐구로부터 패러다임 이론을 발전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양자역학과 일반상대론으로부터 영감을 받았을 확률이 더 크다. 어쨌든, 한스 큉은 다음과 같이 정확히 지적한다.
20세기 초에 이르러 상대성이론과 양자론은 뉴턴적 세계상의 즉물적 실재론과 결정론과 환원주의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물리학은 결코 뉴턴이 전제하는 것처럼 관찰자의 관점과 무관하게 세계 자체를 기술하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물리학의 이론과 모형은 실재를 원자 차원에서 곧이곧대로 기술(소박한 실재로)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 가능한 구체적 현상들을 구성하는 세계의 구조를 상징적이고 선택적으로 묘사하려는 시도다. 이것이 물리적 실재를 단순한 관찰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험과 해석의 창조적 결합을 통해서 인식하려는 비판적 실재론이다. -28쪽
한스 큉은 빅뱅이론을 꽤 증명된 사실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이를 또한 우주에 시작점이 있다는 증거 중 하나로 생각한다.
대통일이론을 수립하고자 하는 과학자들의 진짜 동기는 무엇일까? 한스 큉은 신이 설 자리를 없애려고 하는 것이며, 이것이 역시 유물론 패러담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글레이서는 ‘최종 이론은 없다’에서 모든 것을 하나로 설명하고자 하는 열망이 오히려 기독교에서 온 것으로 설명한다. 둘 다 대통일이론에 불만을 가진 듯하나 설명하는 방식이 다른다. 오히려 글레이서의 의견이 더 정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역사적으로 자연과학은 꾸준히 신뢰받고, 종교에 대해서도 승리를 거듭하는 듯 했지만, 실증주의적 세계관은 괴델에 의해 난관에 봉착했다. 저자는 호킹의 괴델에 대한 언급에서 논증을 시작한다. 그리고 결국은 보편수학과 대통일이론의 꿈 – 온 세상을 수학 혹은 물리로 설명하려고 했던 모든 시도들은 실패한 것으로 판단한다. 이것은 오히려 철학, 신학, 인류학 등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2004년 케임브리지 강의에서 호킹이 대통일이론의 추구를 원칙적으로 영구히 포기했다고 선언한 것이다. … 여기서 호킹은 놀랍게도, 오스트리아의 수학자이며 20세기 최고의 논리학자인 쿠르트 괴델의 제1 불완전성정리를 증거로 내세웠다. – 40쪽
논리수학적, 언어학(의미론, 통사론)적 이율배반을 무수히 극복해 나가는 동안 수학의 근거에 대한 심각한 위기가 닥쳤다. 수학사에서는 수학 이론의 무모순성 문제가 대두되었고, 이를 다양한 방법과 사고방식으로 해결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결국 자기 안에서는 논리적이지만 서로에게는 모순적인 세 가지 표준 해석과, 이에 따른 세 학파가 형성되었다: 논리주의(프레게, 러셀, 화이트헤드), 직관주의 (브라우버르), 형식주의(힐베르트)가 그것이다. 수학을 논리학으로 환원하는 논리주의도, 논리학을 모종의 수학의 근본 통찰에서 구성하려는 직관주의(구성주의)도 보편적 인정을 얻어 내지 못했다. 논리학과 수학을 (의미는 모두 무시하고) 공리적 연산으로 획득한 규칙 체계로 보는 형식주의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괴델의 유명한 제2불완전성정리도 역사적 맥락 속에 있다. 괴델은 이 정리를 통해, 충분히 복잡한 체계의 무모순성은 통상 그 체계에 모순이 없을 경우, 체계 자체 내에서 쓰는 수단을 가지고는 증명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했다. 여기서, 수학의 공리 체계들은 대부분 그 자신의 무모순성을 증명할 형편이 못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유한하고 구성적인 무모순성 증명을 통해 수학적 사고를 보편적으로 통용되도도록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수학자들 사이에 회자되는 경구가 있다: 수학의 무모순성은 신이 존재한다는 징표요, 그 무모순성을 증명할 수 없음은 악마가 존재한다는 징표다(앙드레 베유). – 42-43쪽
오늘날 호킹은 이렇게 본다. “증명할 수 없는 수학적 결과가 있다면, 예측할 수 없는 물리적 문제도 있다. 우리는 우주를 밖에서 바라보는 천사가 아니다. 우리와 우리의 모형들은 우리가 기술하는 우주의 일부다. 물리학 이론도 괴델의 정리처럼 그 자체에 적용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이 모순적이거나 불완전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호킹은 신의 정신을 인식할 통일된 이론을 추구했으나 실패했다. – 44쪽
빈의 ‘사이언티픽 컴퓨팅’ 교수 루돌프 타쉬너에 따르면, 괴델의 제1불완전성정리가 컴퓨터 전문가들에게 주는 의미는 이렇다. “모든 프로그램에 대해 컴퓨터가 (실행을)멈출지 무한 반복을 계속할지 결정할 수 있는 보편적 처리 절차란 없다. 컴퓨터의 전지전능함에 대한 믿음은 거의 종교적이기까지 하지만, 이 믿음에서 구원해 줄 소식이 바로 이것이다. 아무리 정교하게 고안된 컴퓨터라도 처리할 수 없는 문제는 늘 있다. 온갖 기교로 맞서 봐야 실패할 뿐이다.” 타쉬너 이전에 이미 앨런 튜링이 ‘정지 문제’의 해결 불능성을 인지하여 증명해 냈다. – 47쪽
결국 한스 큉은 형이상학을 배제하고자 한 논리실증주의 비판하며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고 칼 포퍼는 이 결론에 힘을 더해 준다.
논리실증주의는 ‘감각 소여’, 즉 감각적 경험에 ‘주어진 것’을 논증의 최종 근거로 삼는다. 프랑스 철학자 오귀스트 콩트의 해묵은 경험적 실증주의처럼 감각적 경험을 유일한 출발점으로 보지는 않지만 그래도 감각적 경험은 모든 주장의 정당성에 대한 ‘컨트롤 타워’ 구실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 연유로 논리실증주의를 신실증주의 혹은 경험주의라고도 부른다. – 49쪽.
나는 이 모든 것에 반대한다. 현대의 논리학과 과학철학은 절대로 반형이상학적이고 반신학적이어서는 안 된다. – 52쪽
1935년 포퍼는 <탐구의 논리>에서 과학적 가설과 이론의 획득에 관한 규칙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경험과학에서 귀납법의 한계를 제시했다. 그는 묻는다: 어떻게 연구자는 개별적 경험 명제로부터 하나의 이론 체계에 이를 수 있는가? 어떻게 새로운 과학적 인식에 이를 수 있는가? 포퍼의 대답은 놀랍다: 그것은 (참임을 증명하는) 검증을 통해서가 아니라, (거짓임을 증명하는) 반증을 통해서다.
논리실증주의의 핵심은 검증 원칙이다. 모든 진술이 경험을 통해 검증될 수 있어야 한다는 극단적 요구는 초경험적 진술에만 적용되지는 않는다. 경험적 가설, 나아가 과학적 지식 전부가 동시에 사라질 것이다. “실증주의적 극단주의는 형이상할뿐 아니라 자연과학까지 절멸시킨다!” 왜? 대부분의 자연과학적 명제는 경험적으로 검증될 수 없고 사이비 명제로 내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법칙들도 논리적으로는 기본 경험 명제로 환원될 수 없다.’ …
미래에 대한 예측을 결정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자연법칙들은 결코 검증될 수 없고, 다만 시도와 오류를 통해 반증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 포퍼의 반론이다. … “절대적으로 확실하고 증명 가능한 지식이라는 옛 과학의 이상은 일종의 우상으로 드러났다.” 긍정적으로 말하면, 모든 과학적 명제는 “가설이다. 사실로 증명될 수도 있겠지만, 모든 증명은 상대적이다”.
지식의 처음에는 언제나 ‘추측’, 추정, 모형, 가설들만이 시험을 기다리고 있다. 포퍼가 보기에, 더는 비판할 수 없는 최종 증명이 과학적 명제에 존재한다는 믿음은, 그저 주장만 하는 독단론이거나 늘 새로운 논증만 일삼는 무한소급이거나, 아니면 개별적 체험을 일반화하는 심리주의라는 가망 없는 트릴레마로 귀결될 뿐인데, 이 중 쓸만한 건 아무것도 없다.
… 형이상학적 문제의 합리적 분석은 근본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포퍼의 결론이다. 여기에는 특히 “모든 지성인의 관심을 끄는 우주론의 문제”, 또한 “우리 자신과, 우리가 속한 이 세계와, 그리고 세계의 일부인 우리의 지식을 이해하는 문제”가 포함된다.
포퍼에 따르면, “순수하게 형이상학적인 (그래서 철학적인) 사유가 우주론의 발전사에 엄청나게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결코 부인할 수 없다. “탈레스부터 아인슈타인에 이르기까지, 그리스의 원자론자들부터 데카르트의 물질에 대한 고찰에 이르기까지, 윌리엄 길버트, 뉴턴, 라이프니츠 그리고 보슈코비치의 에너지에 관한 성찰로부터 마이클 패러데이와 아인슈타인의 에너지 장에 관한 추론에 이르기까지, 이정표가 되어 준 것은 바로 형이상학적 사유였다.” – 52-54쪽
이제 저자는 실재 자체에 관해 씨름하기 시작한다. 논리실증주의는 그리고 수학과 과학은 한계에 부딪혔고 실재를 논하기에는 매우 부족하다. 실재는 일차원적이지 않다. 실재는 투명하고 분명한 것이 아니다. 실재는 불분명한 것이고, 의문투성이이며 다면적이다. 실재에 대한 다차원성, 다층성에 대해 논하기 위해 하이젠베르크를 인용한다.
‘실재 자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실재의 다양한 관점, 차원, 층이 존재할 뿐이다. 위대한 물리학자 가운데는 1942년 하이젠베르크가 “실재의 ‘층에 관한 이론’”에서 실재의 최하위층과 최상위층에 관해 말한 바 있다. 실재의 최하위층에서는 시간과 공간 내 현상과 과정의 인과관계가 객체화될 수 있다. 실재의 최상위층에서는 “비유를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는 세계의 부분, 즉 ‘실재의 최종 근거’에 대해 시야가 열린다”. – 59쪽
실재는 다차원적이면서도 그 안에 통일성을 내재하고 있다.
그 때문에 일찍부터 주체와 객체, 사고와 존재, 정신과 물질, 영혼과 육체, 인간과 동물을 가르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성과 신앙, 철학과 신학의 이원론에 관해서도 실재의 통일성과 진리는 늘 새롭게 논구되어야 한다. 존재의 통일성과 진리에 대한 그리스 철학의 문제와 우주의 구원과 그 의미에 대한 고대 히브리인들의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것들은 서로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숙고할 일이다. – 60쪽.

저자의 신학 분파들의 자연과학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평가를 아래에서 엿볼 수 있다.
독일 신학이야말로 자연과학과의 관계를 현저히 회복할 필요가 있다. 카를 바르트 학파는 자연과학과 대화하기 어려웠다. ‘자연신학’에 대한 역사적 반감 때문이었다. 루돌프 불트만 학파는 우주론을 경시하고 인간 존재 규명에 집중했다. 가톨릭 신학자들은 무엇보다 유해한 로마 교의 문서들을 철저히 검토하고 갈릴레이와 테야르 드 샤르댕을 복권시키는 문제에 몰두했다.
영미권의 사정은 달랐다. 여기서는 신학자들만 물리학에 광녀한 것이 아니라 물리학자들도 신학에 깊이 개입함으로써, 뜻 깊은 조정 작업이 수행되었다. 수십 년 전부터 저작들이 다량 출간되었다: 물리학자이다 신학자인 이안 바버, 신학자이자 생화학자인 아서 피코크, 수리물리학 교수이자 신학자인 존 폴킹혼 등이 모범적인 사례다. – 65쪽
다음의 한스 큉의 판단은 자연과학이 어떻게 철학과 대화할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자연과학은 철학을 비판할 수도 있고, 세계관을 정립할 수는 없으나 도움을 줄 수는 있다.
물론 현대 물리학은 두 가지 점에서 칸트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첫째, 시간 공간 인과성 같은 자연의 기본 범주는 객관적 소여성이 아니라, 우리의 선험적 인식 조건일 뿐이라는 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경험계는 순수 주관성에 온전히 근거하고 있지 않다.
둘째, 자연과학은 순수 주관성의 절대 우위를 지양했을 뿐 아니라, 인식을 ‘촉발하는’ ‘물자체’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인식을) 구성하는 의식이 초시간적 기관이 아니듯, 객관화될 수 있는 (인식)내용도 현상 ‘배후의’세계가 아니다. 물리학의 차원은, 주관이든 물자체의 세계든 어느 한쪽에만 근거하지 않고 자기만의 고유한 세계를 형성하는 일종의 과정이다. 발터 슐츠는 이를 “물리학의 세계’라 불렀다.
결론인즉, 실재 그대로의 존재자, ‘;존재 자체’를 개념적으로 분명히 기술할 수 있다는 자연과하의 고전적 자기이해는 오늘날 더 이상 지지될 수 없다. – 67쪽
큉은 무신론 과학자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 신유물론에 대해 키스 워드를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무시한다.
프랜시스 크릭, 칼 세이건, 스티븐 호킹, 리처드 도킨스, 자크 모노 그리고 피터 앳킨스 같은 탁월한 학자들이 종교적 믿음을 공개적으로 조롱하는 책들을 출간하여 자신들의 비판에 과학적 권위를 내세웠다. 그들의 주장은 대단히 부적절하다. 그들 본연의 과학적 작업은 종교적 주아들의 진리나 오류와 별 관련이 없다. 그들이 어쩌다 철학의 영역으로 길을 잘못 든 거라면, 그들은 철학적 관점의 역사도 다양성도 무시해 버린 셈이다. 그들은 유물론적 견해가 보편적 지지를 얻고 있는 양 둘러대지만, 유물론을 지지하는 철학자들은 사실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신봉하는 유물론은 특히, 의식 문제와 진리와 도덕 과념의 중요성을 전혀 고려할 능력이 없다는 점에서, 매우 신랄하고 비판적인 반론에 부딪쳤다. – 80쪽
한편, 포이어바흐, 마르크스, 프로이트의 종교 비판에 대해서는 그 정당함과 부당함을 함께 인정한다.
포이어바흐의 투사 이론, 마르크스의 아편 이론, 프로이트의 망상 이론은 신이 단지 인간적 투사나, 개인의 이해의 제약을 받는 위안이나, 유아적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단지 ~’ 혹은 ‘~에 지나지 않는다’가 포함된 문장들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81쪽
우주의 정밀 조정에 대한 대응으로 두 가지를 들고 있다. 하나는 우주론적 사변으로서의 다중우주이고, 다른 하나는 티플러의 우주론적 논증이다. 우주론적 사변은 ‘사변’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간단하게 무시할 수 있는 것으로 치부한다. 정밀 조정에 관한 많은 물리학자들의 반응이 다중우주라는 가설을 끌어들여 설명하는 것인데 이것이 결국 사변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다중우주 개념에 대해 각각의 대표 물리학자들을 구분한 것은 꽤 중요하다. 안드레이 린데, 알렉산더 빌렌킨은 빅뱅으로부터 많은 우주가 생겨나고 그후 확대 되었다는 것은 주장한다. 앨런 구스, 에드워드 해리슨, 리 스몰린은 블랙홀로부터 새로운 우주고 생겨난다고 주장한다. 리사 랜들과 라만 선드럼은 외부 공간의 차원에 우주가 존재하고 중력에 의해 서로 영향을 줄 수도 있고 없기도 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구분은 저자의 과학에 대한 이해 깊은 것을 알 수 있다.
티플러의 우주론적 논증에 대한 내용은 이 책에서 충분하지 않다. 다만 다음을 인용하고 있다.
“우주는 유한한 시간부터 존재하며, 물리학적 우주와 그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들은 이들 법칙에 지배되지 않으면서 시간과 공간 밖에 있는 조화를 통해 생겨난다. 요약하면, 우리는 신이 계획하고 창조한 우주 안에 살고 있다!” – 105쪽
한스 큉은 무한한 실재를 가정한 물리학에 관한 사변에 대해서도 반대하지만, ‘본능적 반대’에 의한, 즉 무신론적 신앙을 출발점으로 삼는 것 역시 반대한다.
정상우주론, 끈이론, 초끈이론, M이론 등 많은 이론 가운데, 창세기의 도전을 피하고 신의 문제를 도외시하기 위해 무엇보다 우주의 특이점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목표 하에 발전해 온 이론이 무엇인지 나는 판단할 수 없다. – 107쪽
그러나 무엇이 문제인가? 신을 가설로 둔다 한들, 무신론적 신앙이 배경이 된다 한들 과학은 내적 합리성 혹은 자신의 규칙에 따라 발전할 것이다. 실제로도 과학사륻 들여다보면 과학은 그렇게 발전해 왔다. 오히려 과학 이전의 무언가를 가정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 아닌가?
에밀 뒤 부아레몽이 언급한 7가지 근본 수수께끼를 한스 큉은 ‘세계 수수께끼’로 말한다. 세계 수수께끼는 다음과 같다. 물질과 에너지의 본성, 단순한 감각지각, 운동의 근원, 생명의 기원, 자연의 합목적성, 이성적 사고와 언어의 기원, 자유의지의 실재에 대한 궁극적 설명들이다. 현대의 과학과 철학 혹은 신학이 겹치는 부분들이다. 어쩌면 가장 풀 수 없고, 어쩌면 영원히 알 수 없으면, 어쩌면 무한한 개수의 이론이 존재할 수 있는 부분이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대한 단순하고 명쾌한 설명을 얻을 수 있을까? 설령 과학과 철학, 신학이 모두 힘을 합한다고 해도 힘들지 않을까. 한스 큉은 지식과 무지를 구분하는 것에서 ‘세계 수수께끼’를 푸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설명한다.
물리적 실재는 대체로 불가해하다. 황홀한 물리적 대우주뿐 아니라 아원자 입자들의 황홀한 소우주도 우리의 개념으로는 정확하게 묘사되지 않는다. 대우주든 소우주든 결국 상징 암호 비유 모형 수학 공식으로만 표현될 수 있을 뿐이다. – 112쪽
사실 어떤 개념, 어떤 실재를 정의내리고 다루는 것에서 과학만큼 단순하고 명료하고 경계가 분명한 것은 없다. 그 중에서도 물리와 수학이 더욱 그렇다. 그것이 결국 저자의 말처럼 암호, 비유, 모형, 수학 공식으로만 표현될 수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인간의 이해 방식이고 한계이니 말이다. 이러한 표현들이 실재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한다면,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르게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이해 가능한 것은 무엇인가? 상징 암호 비유 모형 수학 공식은 이해될 수 있는 것인가? 그것들은 어떤 방식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인가? 결국 익숙해진 표상들이 아닌가? 어쩌면 과학은 그 자체로 표상이 될 수 있다. 물론 익숙해질 수는 없겠으나 전문가들의 권위에 기대는 것이든 자아 외부에 있는 세상, 자연의 내적 합리성이든 과학은 익숙해질 수는 없어도 다른 어떤 것들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주는 표상이 될 수 있다. 그 일례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뉴턴의 만유인력, 라이프니츠의 에너지 보존 등은 수없이 문학과 철학 안에서 비유로 쓰인다. 이런 것들이 과연 이해되는 것이기 때문일까? 결국 모든 것은 불가해하고, 익숙함에 의해서든, 어떤 권위에 의해서든 매개되는 것일 뿐이다.
과학과 종교 혹은 철학 사이에 절대 겹치지 않는 영역이 한스 큉에게는 존재한다. 자연 과학이 경험적 방법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채택하는 한 결코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시간이 시작 (창조) 되는 순간에 한없이 가까이 갈 수는 있어도 정확히 시공간이 생겨나는 순간의 사건을 알 수는 없다. 자연과학을 이루고 있는 기본적인 상수들의 근원 역시 알 수 없다. 존재하는 것은 탐구할 수 있으나 없는 것은 탐구할 수 없으며, 왜 없는지에 대한 질문 역시 던질 수 없다. 이것은 근원적 질문이며 근원적 신비이기 때문에 과학의 방법론으로는 절대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다. 따라서 간극을 메우는 방법으로 아무리 간극의 신의 자리가 좁혀진다고 해도 이 영역은 남아 있다. 결국 한스 큉은 신 가설이 필요없다고 하는 라플라스에 반대하여 신 가설을 남겨두자고 제안한다.
태초부터 주어진 우주의 자연상수들은 어디서 왔는가? 혹은 (힘의 통일이 이루어졌다면) 하나의 자연상수는 어디서 왔는가? 빅뱅으로 시작한 우주는 도대체 어디서 왔는가? 이것은 비단 태초의 사건에 대한 물음만이 아니라 실재 전반에 대한 물음이다: 대관절 왜 무언가 존재하며 무는 존재하지 않는가? 위대한 수학자이며 철학자인 라이프니츠에게 이것은 철학의 근본 문제이며 마르틴 하이데거에게는 “기적 중의 기적”이다. “왜 존재자는 있는데 무는 없는가?” 그렇다 이것은 자연과학자가 답할 수 없는 인간의 근원적 질문이다. 경험계의 피안에 관한 한, 자연과학자에게는 결정권이 없다. ‘공백을 때우는 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공백’이 아니라 절대 시초다. 여기서 인간은 실재의 근원적 신비에 봉착한다. 이것은 세계가 실재의 가능한 근원과 근거와 근본 목표에 대해서 맺는 기본적 관계에 관한 물음이다. 이 실재는 과학자뿐 아니라 보통 사라들을 위해서도 존재한다.
…자연과학자는 자연과학자로서 실재의 ‘문법적’구조를 탐구하지만, 동시에 실재의 ‘의미 구조’, 의미와 해석에 대한 인간의 본질적 문제도 제기한다. 이런 문제에 직면하여 항복하거나, 원인의 문제를 포기하거나, 아니면 신의 문제를 떠안고 가거나, 자연과학자는 어차피 선택의 기로에 선다. 나는 신을 가설로라도 염두에 두기를 자연과학자들에게 권하는 바이다. – 117-118쪽
나는 어떻게 근원적 신비에 접근할 것인가? ‘신’이 하나의 가설이나 ‘관념’이 아니라 ‘실재’라는 것을 나는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실재의 근본 문제에 대한 답은 순수 이론의 토대 위에서가 아니라, 체험적 반성적 실천의 길을 통해 찾아야 한다는 것은 이미 분명해졌다. 그러니까 순수 이성의 이론적 조작을 통해서가 아니요, 비이성적 감정이나 단순한 정서만을 통해서는 더더욱 아니다. 미덥고 합리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근본 결단과 근본 자세에 근거해야 한다.
…온갖 의심이 일어도 그런 신뢰의 자세만 갖춘다면 나는, 실재가 진짜로 있음을 총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고, 존재자의 근본 정체성과 가치와 의미를 긍정할 수 있다. 나는 합리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포괄적 신뢰의 자세로 신의 실존, 모든 존재자의 근원 또한 받아들일 수 있다. 그것은 나의 총체적 체험, 태도, 행위에 영향을 미친다.
…신의 실재를 논리적 추론으로 증명하려는 이론 이성을 통해서는 신을 귀납적으로 증명할 수도 없고 세계와 인간의 경험된 실재로부터 연역적으로 추론할 수도 없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토록 불확실한 실재를 모든 이가 체험할 수 있도록 불 밝히는 안내자 역할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사고하고 행동하는 인간이, (‘실천 이성’의 노선을 따라, 혹은 ‘전인’적으로) 자유롭되 합리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인간의 가장 깊은 믿음 소망 사랑이 그렇듯이, 이 또한 순수 이성을 초월하는 전인적 개방을 요구한다.
…신에 대한 진술들은 삶의 경험적 지평에서 실존적 문제들을 통해 입증되고 검증되어야 한다. 이른바 인간의 결단이 필요 없을 만큼 명징한 경험에서 이론의 여지 없이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로운 결단이 요구될 만큼 늘 의심스러운 경험을 명쾌히 밝혀 줌으로써 입증되어야 하는 것이다. 신에 관한 담론은 인간과 세계의 실재에 대한 구체적 경험으로 뒷받침되고 그 경험과 관계 맺고 소통할 때만 신빙성을 지닌다. – 121쪽
신에 대한 긍정이야말로 실재에 대한 근본 신뢰의 확고부동한 근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 121쪽

위와 같은 한스 큉의 실재론은 어떤 철학 (철학자)에 기반하고 있는 것인가?
한스 큉은 창조와 진화의 싸움에서 성공회와 가톨릭,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근본주의적 태도를 거부한다. 종교계의 이러한 태도들에 대해 진정한 믿음이 아니라고 언급한다. 그러면서 과학철학사에서 나타난 신 개념을 오귀스트 콩트, 테야르 드 샤르댕, 화이트헤드를 통해 살펴본다. 오귀스트 콩트는 종교계와 정반대의 길을 걸었고, 그의 실증주의는 결국 과학만능주의에 빠졌다. 테야르 드 샤르댕은 자연과학자와 신학자를 최초로 화해시킨 인물로 평하고 있으며, 화이트헤드는 철학과 신학에 동시에 영향을 주었으며, 자신 역시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 역시 수정이 불가피하다.
테야르에게 자연이란, 수십억년 동안 한 발씩 전진하면서 점증하는 물질의 복잡성과 내면화를 통해 자기완성에 이르는 거대한 발전 과정이었다. 그에게 신은 창조의 근원이자 목표만이 아니었다. 신은 스스로 진화 속에 있으면서, 소립자와 광활한 우주 공간에서부터 식물계와 동물계의 ‘싱명권역’을 넘어 인간의 ‘정신권역’에 이르는 진화에 동참한다.
그 (테야르 드 샤르댕)는 자연과학적 인식을 신학적 사유와 조화시키는 일을 자기 필생의 과업으로 여겼고, 앙리 베르그송의 영성적 생철학, 특히 ‘창조적 진화’ 혹은 ‘생의 약진’에 관한 사상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테야르에게 자연이란, 수시억년 동안 한 발씩 전짖ㄴ하면서 점증하는 물질의 복잡성과 내면화를 통해 자기완성에 이르는 거대한 발전 과정이었다. 그에게 신은 창조의 근원이자 목표만이 아니었다. 신은 스스로 진화 속에 있으면서, 소립자와 광활한 우주 공간에서부터 식물계와 동물계의 ‘생명권역’을 넘어 인간의 ‘정신권역’에 이르는 진화에 동참한다.
테야르의 세계관에서는 인간도 아직 완전하지 않다. 인간은 생성되어 가는 존재다. 인간화, ‘인간 발생’은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 ‘인간 발생’은 ‘그리스도 발생’을 향해 나아가며 ‘그리스도 발생’은 그 미래적 충만, ‘오메가 포인트’에서의 ‘플레로마’(충만)을 향해 나아간다. 인간의 개인적 집단적 모험은 여기서 끝나고 세계의 완성과 신의 완성이 이곳에서 수렴한다.
이러한 ‘충만화’, 우주와 인간의 발전은 보편적 우주 그리스도 안에서 전진하고 상승하며 정점에 이른다. 테야르에게 신의 실재와 세계의 실재는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통합된다. 이 모든 것이 그에게는 당연히 순수 이성의 비전이 아니라 인식하는 신앙의 비전이었다. ‘나는 어떻게 믿는가’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우주가 하나의 진화라는 것을 믿으며, 이 진화가 영을 목표로 노력한다는 것을 믿으며, 이 영이 인격 안에서 완성된다는 것을 믿으며, 최고의 인격은 보편적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습니다.”- 141-142쪽
테야르가 자연의 역동성을 다양한 일련의 발전 단계로, 선형으로 ‘상승하는’ 점증적 진화로 파악했다면, 화이트헤드는 모든 가능한 형태 안에서 약동하는 생명으로 이해했다. 그것은 목표 없는 과정, 창조적 전진, 정점 없는 무한 시간이다. -145쪽
화이트헤드는 무엇보다 ‘형이상학적 합리화’를 통해 현대적 신 개념을 이해시키고 싶었다. 비인격적 질서(절대적 내재성 (라는 동양적 개념도, 인격적 존재라는 셈 족의 신 개념 (절대적 초월성)도, 세계를 신의 한 존재 단계로 이해하는 범신론적 개념 (극단적 일원론)도 당연히 그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리스도교도 이 세 가지 표상을 모두 거부한다.
화이트헤드는 신을 철두철미 ‘과정 중의 신’으로 이해하고, 신의 생성을 단순히 주장만 한 것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정당화하려고 했다. 그 때문에 신의 본성을 개념적 관념적 ‘근원 본성’과 물리적 실재적 ‘후속 본성’의 ‘쌍극’으로 보았다. “결국” 신은 “그 본성의 합일을 통한 실제 세계의 실현이다 …”. – 146-7쪽
콩트의 실증주의는 과학만능주의 가깝고 종교 없는 과학과 신 없는 진보는 사회의 여러 측면에서 부작용을 나았다. 샤르댕의 과학과 신학을 화해시키고자 한 노력들은 의미는 있었으나 발전하지 못했다. 화이트헤드에서 비롯된 과정철학과 과정신학은 다시 신을 언급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으나 그 신 개념 역시 만족할 만하지 않다.
과학 시대에 우리는 신을 어떻게 얘기할 수 있을까? 예전처럼 성경의 권위에 기대어 신을 주장할 수 있을까? 아니다. 성경의 특별한 권위를 내세우는 것은 저 폭력적인 근본주의자들과 다르지 않다. 신에 관한 한 아예 입을 다물어야 하는가? 한스 큉 뿐 아니라 많은 과학자들조차도 신을 (서로 다른 개념이지만) 말한다. 그렇다면 이제 신에 대한 얘기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
부버의 결론은 이렇다.
“이 말을 금기시하는 사람들을 존중해야 한다. 그들은 ‘신’을 끌어들여 권력을 누리려는 불의와 비리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을 포기하면 안 된다. 이 말을 오용에서 구하기 위해 ‘궁극의 대상’에 대해서는 당분간 침묵하자는 제의는 얼마나 설득력 있는가!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 우리는 ‘신’이라는 말을 깨끗이 씻을 수도 없고 완전하게 할 수도 없다. 하지만 더럽혀지고 찢긴 그대로, 그 말을 땅에서 들어 올려 깊은 근심의 시간 너머 일으켜 세울 수는 있다.” – 150쪽
한스 큉은 자신이 생각하는 신 개념을 다음과 같이 발전시킨다.
‘신’을 세계에 대한 은유로 사용하는 물리학자들이 있다. … 그러나 신은 우주와 동일하지 않다고 주장해야 한다! … 그렇다면 싱는 초지상적 존재인가? 아니다. … 그렇다면 신은 외계 존재인가? 그것도 아니다. … 근본은 바로, 신이 우주 안에 있고 우주가 신 안에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신은 세계보다 더 크다. … 신은 삼라만상 안에 고립되어 있지 않다. 그분의 무한성은 공간을 포함하며 한 장소에 국한되지 않는다. 신은 아니계신 곳이 없다. … 신은 세계에 내재한다. … 신은 세계를 초월한다. … 신의 영원성은 시간을 포함한다. 이 영원성은 시간을 초월한 것이 아니라, 시간의 모든 부분에 존재한다. 신은 인간과 세계의 역사와 무관한 불변적 선의 이데아 (플라톤)도 아니요, ‘부동의 원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아니며, 생명 없는 일자 (플로티노스)도 아니다. … 신은 역동성 자체이며, 세계를 자신 안에서 창조하고 내면에서 보이지 않게 지탱하고 움직인다.
이렇게 신은 근대의 통일적, 역동적 실재 이해의 맥락에서 사유될 수 있다. 신은 실재의 일부로 유한자와 병존하는 (최고) 유한자가 아니다. 신은 만물에 내재하며 파악할 수 없는 ‘무한 차원’이다. 보이지 않는 수하의 차원이 아니라 무한 실재의 차원이다.
… 신과 세계, 신과 인간의 관계는 변증법적으로만 표현될 뿐이다. 신은 초월적이지만 내재한다. 영원하지만 시간 안에 있고, 무한하지만 공간 안에 있다. -151-154쪽
신이 인격인가, 아닌가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더욱 복잡하다. 신에 대한 정의와 묘사는 결국 비유와 상징일 수밖에 없다. 성경에도 많은 의인적 개념과 상징이 등장한다.
첫째, 신은 인격 이상이다. … 신이 인간과 같은 인격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모든 것을 포함하고 모든 것을 관통하는 신은 인간이 거리를 두고 표현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이것이 진실이다. 신은 모든 실재의 근원과 근간이요 믿는 이들의 개별적 실존을 결정하는 근본 목표다.
둘째, 신은 인격이 아닌 것도 아니다. … 지고의 이데아 (플라톤)나 자기 관계적 사유 (아리스토텔레스) 이상이다. 우주의 순수한 아름다움 이상이며 역사의 맹목적 정의 이상이다. 이 궁극의 실재는 우리에게 무관심하거나 우리를 무관심하도록 방치하는 존재가 아니라, 해방하고 요구하는 우리의 ‘궁극적 관심’ (폴 틸리히)이다. 말하자면 우리에게 편재해 있으면서 동시에 우리를 벗어나는 존재다. 구약성경의 신은 숨어 있지만, 백성 가까이에서 그들과 계약을 맺고 각 개인과 관계 맺는 분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인격적인 것과 비인격적인 것이 어떻게 서로 긴밀하게 결합될 수 있을까? 두 개념을 초월함으로써 가능하다. … 분명 신학자는 인격적, 비인격적 개념을 초월하는 한 단어를 찾아 ‘초인격적인 것’을 말하게 될 거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공식으로 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이련 개념으로 신을 파악하고 정의할 수 있을까? 아니다. 신학자가 신을 파악하고 정의한다 해도, 그것은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은 보이지도 않고, 파악할 수도 정의할 수도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를 르네상스 사상가 니콜라우스 쿠자누스는 ‘대립자들의 합일’이라고 표현했다. 최대이자 동시에 최소이므로 최소와 최대를 초월한다는 것이다. 신은 ‘전혀 다른 존재’이지만, ‘내게는 나의가장 깊은 내면보다 더 내면적이다’ (아우구스티누스). – 155-157쪽.
다시 바이츠제커다. 본회퍼에 의해 자주 인용된 이 사람을 한스 큉 역시 인용한다.
… 단언하건대 자연과학자들은 … 자기 고유의 전통 (주로 유대교나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충분히 안다고 생각하지만, 이와 관련된 결정들도 때로는 ‘저급한 정보 합리성’에 근거해 있다.
이 점에서 탁월한 예외는 물리학자이자 철학자인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다. … 기초과학으로서의 물리학은 실재의 통일적 이해 범위 안에 있어야 한다. 그는 자연과 인간, 물리학적 자연과학적 영역과 형이상학적 종교적 영역을 결합시키려 했다. 그는 이렇게 붇는다.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이 좁은 세계의 구조에 맞추어서만 상상한다면, 원자와 은하의 세계를 제대로 사고할 수 있을까?” 대답은 이렇다. “우리가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것을 기술할 때 활용되는 구조들은 더 심오한 실재의 표피에 불과하다. 실제적 감각계는 수학적 구조와는 또 다른 속성들을 내포한다. 그것들은 아마 일부 다른 형태들도 숨기거나 폭로할 것이다. 차안과 피안의 경계는 다시 허물어진다.” – 161-162쪽
한스 큉은 과학의 시대에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다. 과학 언어가 아닌 신앙의 언어로 신앙을 진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창조 신앙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성경의 창조 이야기는, (현대인에게도 해당되지만) 과학적 방법과 언어로는 답할 수 없는 단순한 질문에 그 시대의 상징과 비유로써 답한다. 그것은 순수이론적 질문이 아니라 근본적이 실존적인 질문이다.
한처음에 무엇이 있었나? 만유의 근원이신 선한 하느님이 계셨다.
하느님 외에 다른 신이 존재하는가? 아니다, 하느님 외에 다른 신은 없다.
그러나 세계사 안에는 분명 선과 악이 투쟁하지 않는가? 아니다. 선한 하느님은 악이나 악마적 적대 세력과 경쟁하지 않으신다.
실재의 일부는 열등한 속성을 가지지 않는가: 정신에 비하여 물질이, 영성에 비하여 성이? 아니다, 선한 창조주 하느님의 세계는, 물질과 육신과 성까지 포함하여, 모두 근본적으로 좋은 것이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 (창 1:31).
창조 과정의 목표는 무엇인가? 창조 과정의 위대한 목표는 (고립되지 않고 우주 한복판에 있는) 인간이다. 성경은 구원이 아니라 창조가 이미 세계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하신 사랑이라고 가르친다. 지속적 창조와 진화가 세계를 유지한다고 이해하면 된다. – 173쪽.
위에서 볼 수 있듯이 한스 큉이 진술한 신앙 언어는 마지막에 과학 언어와 겹치는 부분이 있다. 한스 큉은 신앙과 과학의 구분을 강조하는 듯 보이나, 결국 교집합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신앙이 과학 언어를 사용할 때는 분명 매우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과학 언어에게 그 언어의 자리를 내주는 것이 더 좋은 방편이라 생각된다.
창조신앙은 자연과학을 무한히 살찌운 도구적 지식에 아무것도 보태지 않으며 어떤 자연과학적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나 (급격한 학문적,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혁명의 시대에, 그리하여 근원 상실과 방향 상실의 시대에)( 창조 신앙은 인간에게 방향 설정의 지식을 제공한다. 인간에게 삶과 진화 과정의 의미를 발견하게 하고, 행위의 척도를 제공하며 광대무변한 우주에서의 궁극적 안전을 담보한다. – 174쪽.
그러나 한스 큉의 이러한 신앙과 과학의 구분은 조금 순진하다. 과학은 이미 그 의미를 찾기 시작했다. 진화를 완전한 우연의 과정으로만 보지 않는다. 우연처럼 보이는 사건들이 모였을 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탐구하기 시작했고, 창발이 어떤 목적을 낳을 수 있는지 탐구하기 시작했다. 무목적의 우연이란 과학적으로 무엇인지도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의미를 찾기 위해 과학적 연구 결과들을 수집하고 비교하며 통일성있는 설명을 찾고 싶어한다. 신앙이 의미를 제공하고 과학 언어와 구분될 수 있다는 생각은 이제 안이하다. 과학은 의미의 영역에도 도전하고 있다.
아래에서 한스 큉은 질서있는 수학으로 묘사되는 세계가 신의 존재를 통해 잘 설명될 수 있고, 신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한스 라이헨바흐를 비롯한 경험주의의 자식들은 이러한 생각에 전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증명할 수 없어도, 내가 이것을 긍정할 수 있는 정당한 이유가 있다. 확연한 신뢰 속에서 나는 이미 하느님의 존재를 확인했다. 이것이야말로 내게 참으로 이성적이고 검증된 것이다. 존재하는 하느님이 참 하느님이라면, 그분은 지금 여기 나만의 하느님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태초에도 이미 모든 영원성의 하느님으로 존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우주는 하느님의 존재를 통해서만 질서 (Kosmos)로 명쾌히 납득될 수 있다. 그 질서는 본성상 수학적으로 정돈되어 있고 매우 복잡하며 역동적이다. 우리 우주의 광대함과 자연과학의 복잡성에 직면하여 다수의 자연과학자가 경탄과 경외, 기쁨과 두려움의 감정을 펴출했고, 더불어 이 우주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는 건 아닌지 물었다. 아마 이런 질문에는 자연과학이 아니라, 우리가 신앙이라 부르는이성적 신뢰가 나름의 근거를 지니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 175쪽.
생명의 발생과 진화의 과정을 추적하면 자연스럽게 우연과 필연 사이의 대립과 마주하게 된다. 자크 모노는 저서 ‘우연과 필연’에서 우연성의 결정적 우위를 인정했다. 그러나 만프레트 아이겐은 저서’게임’에서 모노에 반대한다. 우연이되 거기에도 규칙이 있다는 것이다. 큉은 물리학의 카오스에서도 그 의미를 찾는다.
카오스조차 인과율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 인과적 부분 체계망은 산출되는 운동 패턴이 ‘우연’이랄 수밖에 없을 만큼 복잡하다. 그럼에도 카오스 이론은 컴퓨터의 도움으로 역동적 체계의 수학적, 물리학적 기술을 시도한다. 이런 역동적 체계는 결정된 우연의 행태와 카오스적 구조의 형성으로 특징지어진다.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는 결국, ‘카오스’속에서도 인과관계는 존속하며, 무질서 속에서도 질서가 발견된다는 것이다. – 199쪽.
우연을 긍정한다 해도 신을 부정할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과정의 완전한 우연을 주장하는 진화론자라 할지라도 실존적 질문 앞에서는 난처해질 수밖에 없다.
… 생물학자뿐 아니라 누구라도, 실존적 선택에 직면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진화의 과정은 무의미하고 인간은 궁극적으로 고독할 수밖에 없는가? 구체적 삶의 무한한 개별적 다양성에서 무엇이 확연히 느껴지는가?
진화의 근원, 근간, 근본 목표를 부정하는 사람은 과정 전반의 무의미성과 인간의 총체적 고독을 감수해야 한다. …
진화의 근원, 근간, 근본 목표를 긍정하는 사람은 전체 과정과 자기 존재가 지니는 근본적 유의미성의 근거를 과정 자체에서 찾으려 하지는 말 것이나, 적어도 그것을 신뢰하며 전제할 수는 있겠다. 그렇다면 아이겐의 의문이 풀릴지도 모르겠다. “관련성들을 인지한다 해도, ‘왜 무언가 존재하고 무는 존재하지 않는가?’라는 라이프니츠의 질문에는 여전히 답이 없다.” – 202쪽.
한스 큉은 약한 인류 원리를 지지하는 듯하다.
이 문제는 1970년대부터 영미권에서 구체적으로 논의되었다. 적지않은 우주론자, 물리학자, 생물학자가 이른바 ‘인본 원리’를 ‘초자연법칙’으로 받아들인다. 이 원리는 우리 우주의 초기 조건과 자연상수들이 생명과 지능이라는 ‘관찰자’가 ‘생성될 수 있도록’ 주어져 있었음을 보증한다. 이런 견해는 1961년 미국의 저명 물리학자 로버트 디키가 ‘부드럽게’ 표현한 바 있다. 말하자면, 1973년 영국의 물리학자 브랜던 카터처럼, ‘생성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이 주장에 따르면, 우주는 언젠가 필연적으로 생명과 지능을 생성할 수밖에 없는 기본상수와 기본 법칙들을 처음부터 지니고 그런 방향으로 결정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호주의 물리학자 폴 데이비스는 진화에서 ‘신의 계획’까지도 간파하려 했지만, 판단은 물론 ‘개인의 취향’에 맡겼다.
나는 강력한 인본 원리가 창조자와 그 피조물의 관계를 지나치게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중심적으로 그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주에서 어떻게 실제 지금 모습대로 생명과 정신의 출현이 가능했는지 과거를 돌아봄으로써 알 수 있다는, 다소’ 부드러운’의미로 이 원리를 이해하면 충분하지 않은가? – 206쪽.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이상학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온전히 종교라고 주장한다. 과학 내부에서는 결코 결론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결론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은 종교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현대의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무신론자들을 포함하여 종교들 사이에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인가? 각 종교 내부에서도 결론 내릴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과학과 종교 사이의 종교가 어떤 연관성을 주장한다 한들 과학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그 주장은 어떤 결론일 수는 없는 임시적 설명 정도밖에 될 수 없다. 더욱 한스 큉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은, 과학은 그 내부에서 이미 형이상학적 의미에 대한 단서들을 꾸준히 내놓고 있다는 점이다. 큉이 “자연과학은 진화에서 이 의미를 읽어 내지 못하며 기껏 추측할 따름이다” 라고 디키를 인용하여 말하는 부분은 이제는 많은 과학자들이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신에 대한 이성적 신뢰 속에서야말로 과학적 인식과 종교적 신앙고백을 뒤썪지 말 일이다. (아무리 칭찬할 만해도) 윤리적, 종교적 충동 때문에 궁극의 상태인 ‘오메가’로 향하는 것을 인본 원리의 도움으로 진화 과정에 귀속시키고 거기에 의미를ㄹ 부여해서는 안 된다. 그 의미는 과학이 아니라 종교적 믿음만 부여할 수 있다. 나는 만물의 ‘근원’인 ‘알파’를 긍정했다. ‘목표’인 ‘오메가’도 지지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과학의 피안’에 있는 이성적 신뢰의 긍정이 중요하다는 것만은 분명히 해 두어야겠다. – 214쪽.
큉은 굉장히 중립적인 위치에 서 있는 것 같으나 저 입장에서 과학과 신앙의 대화는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한스 큉은 심신일원론은 완전히 배제한다. 그렇다고 스피노자의 범신론적 일원론을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심신일원론의 발전을 얘기하며 판넨베르크를 언급한다.
일찍이 개신교 신학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는 행동과학의 통찰들을 차용하여,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영혼의 특별한 내면세계의 독특한 체험을 이렇게 설명했다.
인류학적 행동과학은 이체험을 우리 육체적 행위의 독특성으로 설명한다. 말하는 능력이 있는 인간으 외부 세계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은 고요한 사유와 상상ㅇ의 내면세계다. … 언어는 특별한 정신적 내면세계의 생성 조건인바, 그것조차 인간과 주변 세계의 육체적 관계 속에서 생겨난다. 따라서 내면세계와 외부 세계의 차이는 근원적 사실이 아니라, 인간의 육체적 행동에서 생겨난 파생적 사실이다. 인간에게는, 육체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영혼’이 실재하지 않으며, 단순히 기계적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는 육체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거기서 도출된다. 둘 다 추상이다. 세상을 상대로 움직이고 행동하는 통일적 생명체, 오직 인간만 실재할 뿐이다. – 235-236쪽.
그러나 정신과 자아에 관해 환원주의적 태도를 취하는 것 역시 옳지 못하다.
이런 의미에서 정신은 결코 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전 인격을 통해 “구현된다”. 자아는 사회적 구성물이지만, 환상은 아니다. – 256쪽.
이후 한스 큉은 뇌와 정신, 영혼에 관해 여러 의견을 개진하며, 종말과 죽음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그 가운데에서도 그의 입장은 과학이 하는 일과 종교 혹은 철학이 하는 일은 구분되어 있다. 언뜻 종교와 과학 사이에 많은 대화가 있어야 하고 서로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면서도 서로 같은 도구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저자의 입장을 고수하기보다 종교와 과학이 서로를 어떻게 이용 (활용)하여 자신들의 연구를 더욱 풍부하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종교는 과학의 결과 뿐 아니라 과학적 연구 방법, 과학 철학, 분석 철학 등을 도입할 수 있고, 과학은 솔직하게 종교와 철학이 과학 연구의 근본 가정에 함의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다면 더 깊이있는 연구가 이뤄질 수 있지 않을까? 한스 큉이 알 수 없다는 중간 영역에 대한 탐구, 층위와 층위 사이를 잇는 연구는 이런 방법들이 도입되어야 하지 않을까?

○ 독자의 평
빛이 생겨라!
한스 큉이 마침내 물질과 생명과 인류와 인간 정신의 기원에 대해 입을 열었다.
그는 이 시대 가장 도발적 신학자다. 우주 만물의 근원과 정면대결하면서 그는 신학과 종교의 견고한 담벼락을 과감히 부수고 나와 물리학, 수학, 생물학, 뇌 과학, 고고학, 인류학의 아성을 유유자걱하게 넘나든다. 그러면서도 자기 정체성의 뿌리는 철학과 신학의 심연에서 중심을 잃지 앓고 과학과 종교의 올바른 관계 정립과 소통을 늘 새롭게 시도한다.
신은 가설이 아니라 실재하는 사실은 과학적 증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이성적 신뢰 속에서만 긍정할 수 있다고 한스 큉은 주장한다.
그는 우주론의 근본 문제에 성경이 답을 내린다고 진심으로 믿지 않으며 인간의 모습을 한 신이 그것도 세상을 엿새 만에 창조했다는 성경의 믿음을 고수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성경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과학자들에게는 계몽된 이성이 우리를 오도한 적은 없었는가? 이성은 복된 진보를 이룩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살인적 전쟁 기계도 만들어 내재 않았는가? 삶의 자연적 기반을 파괴하여 오늘날 많은 이가 지구의 미래를 걱정하도록 만들지 않았는가? 따져 물으며 사물을 대함에 있어 자연과학적 시각과는 다른 또 하나의 시각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하고 지적한다.
이 책은 종교적 신심도 우주적 신심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과학자들은 종교를 통해 도전과 자극을 받고 믿은 이들은 물리학과 생물학의 찬연한 성과들이 세계와 생명과 인간의 기원에 새로운 빛을 던져 주었음을 기억하기를 바란다.
종교의 소멸은 모험을 찾는 인간의 드높은 소망이 억압될 때 나타난다 – 화이트 헤드
오직 한 사람의 기독교인이 있었고 그는 십자가에서 죽었다. 신은 죽었다 – 니체
내게 신이라는 단어는 인간의 약점을 드러내는 표현 또는 산물에 불과하다. 성경은 명예롭지만 상당히 유치하고 원시적인 전설들의 집대성이며 아무리 치밀한 해석을 붙이더라도 이 점은 변하지 않는다 – 아인슈타인
이를 이해하려면 철학적, 신학적 기초 지식이 필요하다. 이 책에서 왜 천지간에 존재자는 있고 무는 없는가? 만물의 시초에 대관절 무슨 일이 있었는가? 이 책이 시류를 타는 주제들에 새로운 지식을 덧대기보다는 차라리 과학의 근본 문제에 일관성 있고 신뢰할 만한 해답을 주었으면 하는 것이 한스 큉의 소망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