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해석에 반대한다
수전 손택 / 이후 / 2002.9.9
미국을 대표하는 예술 평론가 중의 한 사람인 수잔 손택의 비평집. ‘해석에 반대한다’ 등 대표적인 논문을 비롯하여 문학, 영화, 연극, 인물, 문화일반 등 여러 현상에 대해 날카로운 분석을 보여준다. 손택의 대표적인 비평집이라 볼 수 있으며 미학이나 문학비평 영역에 시사하는 바가 많은 글들이다.
○ 목차
감사의 글
Ⅰ.해석에 반대한다
스타일에 대해
Ⅱ.수난자의 본보기로서의 예술가
시몬느 베이유
카뮈의 <작가수첩>
미셸 레리스의 <성년>
영웅으로서의 인류학자
게오르그 루카치의 문학 비평
사르트르의 <성 주네>
나탈리 사로트와 소설
Ⅲ.이오네스코
<대리인>에 대해
비극의 죽음
연극 구경
마라, 사드, 아르토
Ⅳ.로베르 브레송 영화의 영적 스타일
고다르의 <그녀의 생을 살다>
재앙의 상상력
잭 스미스의 <불타는 족속들>
레네의 <뮤리엘>
소설과 영화에 관해 한마디
Ⅴ.내용 없는 신앙심
정신분석학과 노먼 브라운의 <죽음에 맞선 삶>
해프닝, 급진적인 병치의 예술
‘캠프’에 관한 단상
하나의 문화와 새로운 감수성
본문에 실린 글들의 출전
인명 찾아보기
작품 찾아보기
○ 저자소개 : 수전 손택 (Susan Sontag)
미국 최고의 에세이스트이자 평론가, 소설가로 1933년 1월 뉴욕에서 태어났다. 첫 소설 ‘은인’ (The Benefactor, 1963)과 에세이 ‘캠프’에 대한 단상’ (Notes on ‘Camp’, 1964)을 발표하면서 문단과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66년 평론집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서구 미학의 전통을 이루던 내용과 형식의 구별,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구별에 반기를 들며 화려한 명성을 얻었다. 그 뒤 극작가, 영화감독, 연극연출가, 문화비평가, 사회운동가 등 끊임없이 변신을 거듭한 손택은 ‘새로운 감수성의 사제’이자 ‘뉴욕 지성계의 여왕’, 그리고 ‘대중문화의 퍼스트레이디’로 미국 문화의 중심에 우뚝 섰다.
미국 펜클럽 회장을 역임하는 동안(1987 ~ 1989)에는 한국을 방문해 구속 문인의 석방을 촉구했고, 1993년에는 사라예보 내전 현장에 가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상연하는 등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도 아낌없이 보여 줬다. 2003년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서 ‘독일출판협회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한 ‘사진에 관하여’ (1977)와 ‘전미도서상’ 소설 부분 수상작인 ‘인 아메리카'(1999)를 비롯해 네 권의 평론집과 여섯 권의 소설, 네 권의 에세이, 네 편의 영화 시나리오와 두 편의 희곡이 있으며 현재 32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히고 있다.
2004년 12월, 골수성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유해는 파리의 몽파르나스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 역자 : 이민아
이화여화대학교에서 중문학을 공부했고, 영문 책과 중문 책을 번역한다. 옮긴 책으로 올리버 색스의 『온 더 무브』, 『깨어남』, 『색맹의 섬』, 빌 헤이스의 『인섬니악 시티』, 에릭 호퍼의『맹신자들』, 이언 매큐언의 『토요일』, 헬렌 한프의 『채링크로스 84번지』, 수전 손택의 『해석에 반대한다』, 피터 브룩의 『빈 공간』등 다수가 있다.
○ 추천평
손택은 작가와 사상가가 어떻게 상징적인 존재가 될 수 있는지 여러 방식으로 보여준다. 그녀는 이리저리 눈을 굴리고 다니는 분석가이자 음유시인이며, 대중적인 잔소리꾼이자 움직이는 양심이다. — 타 임
1961년부터 1965년 사이에 발표한 26편의 에세이를 시기별로 실어놓은 이 책은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생생한 역사이다. 이 책은 그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문화적 기록이 될 것이 분명하다. — 뉴욕타임스
이 책에 실린 에세이들은 눈이 부실 정도의 지적 퍼포먼스이며, 1960년대 아방가르드 미학의 가장 강력하고 계몽적인 진술이다. — 보 그
손택의 에세이는 오늘날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분석해주고 예견해준 위대한 작품이다. — 카를로스 푸엔테스, 멕시코 소설가(노벨 문학상 후보자)
○ 독자의 평
플라톤이 예술을 현실의 모방으로 정의한 이래 예술은 끊임없이 자기의 존재 의의를 증명해야만 하는 비참한 쳇바퀴를 굴려왔다. 스승의 말이라면 사사건건 토를 달았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역사상 최초로 예술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고 아주 체계적인 글까지 남겼지만 사실 그건 플라톤에 대한 반박이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이 모방이라는 플라톤의 견해에 동의했다. 단지 그것이 유용하다고 말했을 뿐이다.
예술이 객관적 미의 구현이 아니라 예술가 자신의 주관적 표현이라는 관점을 널리 받아들인 오늘날에도 그 정당성에 대한 물음은 끈질기게 살아 남았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한 것이냐?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우리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느냐? 오래된 편견 안에서 사람들은 예술이 다른 무언가를 가리킨다고 믿는다. 예술은 무언가의 상징이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예술은 그저 통로에 지나지 않는다. 진리와 본질은 예술 작품이 가리키는 어떤 곳 즉 예술 작품의 너머에 존재한다.
만약에 내가 망치를 가리키며 이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사람들은 망치라고 말할 것이다. 거기엔 일말의 주저도 의심도 없다. 그런데 내가 앤디 워홀의 브릴로 박스를 가리키면?
현대인들은 비평을 통해 예술을 받아들인다. 비평은 예술을 해석해 그것이 왜 예술인지를 밝혀낸다. 여기서 그들이 집중하는 건 내용이다. 그래서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독재자 프랑코와 나치의 잔혹성을 폭로하는 정치적 메시지가 된다. 하지만 이게 과연 유일한 길일까? 우리는 <게르니카>를 그저 고통, 비애, 슬픔, 좌절 같은 감정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걸까?
예술은 감각의 총체다.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것을 감각하지 않고 이해하려 드는가? 예술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태도엔 확실히 문제가 있다. 수잔 손탁이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주장하는 요지도 바로 이거다. 예술을 다른 무엇이 아닌 그 자체로 받아들이라는 것.
지금 중요한 것은 감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잘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임무는 예술작품에서 내용을 최대한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작품 속에 있는 것 이상의 내용을 더 이상 짜내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임무는 내용을 쳐내서 조금이라도 실체를 보는 것이다. 오늘날, 예술에 대해 뭔가를 말하려 한다면 우리는 예술작품이 우리에게 훨씬 더 실감나도록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비평의 기능은 예술작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예술작품이 어떻게 예술작품이 됐는지, 더 나아가서는 예술작품은 예술작품일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p34~35)
현대 예술이 그토록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해석으로부터 탈주하고픈 욕망이었을 것이다. 더 이상의 해석은 거부한다. 그리하여 예술은 침묵을 하나의 주요한 양식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맙소사, 현대 예술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해석을 쏟아내지 않는가! 뿐만아니라 현대 예술은 비평과 모종의 뒷거래를 벌이기도 한다. 까놓고 말해 캔버스 전체를 어지럽게 채운 페인트가 비평없이 예술이 될 수 있었겠는가?
우리의 문화는 무절제와 과잉 생산에 기초한 문화다. 그 결과, 우리는 감각적 경험의 예리함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p.34).
1933년애 태어난 손탁의 시대에도 이미 감수성의 종말이 문제시 되고 있었다. 이후로 우리가 그것을 회복할 시간을 가진 적 있을까? 우리는 21세기에 산다. 감성은 이미 멸종했을 것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